제1차 세계 대전/배경
1. 개요
이 문서는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단이 된 발칸 반도의 19세기사(에 더한 그 이전 역사)와 그에 대한 유럽 열강의 변화를 다룬다.
대전쟁은 19세기 초반부터 전 유럽에 퍼지던 민족주의 의식의 발로로 인한 범슬라브주의(러시아 제국-세르비아 왕국)와 범게르만주의(독일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충돌이 도화선이 되었다. 기존 제국주의 국가(대영제국-프랑스 공화국)와 신흥 제국주의 국가(독일-이탈리아 왕국)간의 갈등은 또한 분쟁을 확대시킨 요소였다. '''여기에 좋은 시비거리가 되어준 게 발칸 반도다.'''"작금의 유럽은 화약고이고, 지도자들은 무기고 위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을 뿐이야. 작은 불씨 하나가 우리 모두를 집어삼킬 전쟁을 일으킬 거야. 언제 그 폭발이 일어날지는 모르겠지만, 어디서 일어날지는 말해줄 수 있지. '''발칸에서 벌어질 저주받을 바보짓'''이 그 폭발을 일으킬 거야." - 오토 폰 비스마르크
19세기 초 발칸 반도의 국가들은 서로 다투듯이 독립을 선포하게 된다. 이 난립한 발칸 반도의 국가들은 민족, 종교가 달랐기에 서로 동질감이 약했고 오스만 제국이라는 과거의 슈퍼파워의 쇠퇴로 인한 힘의 진공상태에 놓여있게 되다 보니 서로 상대방의 영토를 침략해 자국의 세력확장을 꾀하려 하는 그야말로 전국시대급 난세가 펼쳐지게 된다.
이 지역은 오-헝 제국에게도 제국의 "유럽 앞마당"이자, 이미 해외에 뜯어 먹을 곳 없는 나라의 유일한 팽창 가능 지역이었으며,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대처하는 완충지대로 전략적 의미가 매우 큰 곳이었다. 결국 오-헝 제국은 자잘한 신생 독립국들이 서로 지역의 패권을 차지하게 위해 싸우는 모습을 보고 슬그머니 이 지역에 숟가락을 걸치는 시도를 하게 된다. 여러 독립국의 발흥을 부추기면서, 특히 보스니아를 집어삼키고 알바니아 독립을 편들어준 게 좋은 예.
한편 러시아 제국 입장에서도 발칸 반도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제국의 경쟁자인 오-헝 제국의 배후지역이기도 하거니와, 슬라브족도 많이 살아서 만약 이 지역에 러시아 제국에 우호적인 국가가 성립된다면 오-헝 제국은 러시아 제국과 발칸 반도의 친러시아 국가 사이에 껴서 양면전쟁을 수행해야 하니 여러모로 이득이었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발칸 반도 꼬꼬마 국가들의 핵존심을 "슬라브" 드립으로 간질간질 충동질해 자기들끼리 힘을 합쳐 친러 반오스트리아 세력이 형성되기를 시도하게 되며, 여기서 주된 역할을 맡은 국가가 같은 슬라브인 국가이자 팽창주의 전략을 가지고 있던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였다.
2. 역사적 배경
2.1. 오스만 제국의 후퇴와 러•오의 신성동맹
슬라브계 국가인 러시아와 불가리아, 세르비아, 여기에 더해 몬테네그로 공국들의 친분이 시작 된 건 이들에 대항했던 오스만 제국의 약 200년에 걸친 수축(쇠퇴 및 붕괴) 때문이었다.
러시아는 17세기 중반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물리치기 시작한 대륙의 신흥 강자였다. 신흥 강자가 된 러시아는 크림 칸국 등의 방향으로 남하를 시도했고, 이 과정에서 폴란드에게 우세를 거두고 2차 빈 공방전(1683)을 통해 다시 옛날의 세력을 떨치려 하는 오스만과 충돌하게 된다. 200년 이상에 걸친 긴 영토분쟁의 시작이었다. 18세기 내내 오스만과 러시아는 일진일퇴했다.
오스만이 결국 2차 빈 공방전에서 참패한 이후 신성 로마 제국과 오스만 제국은 긴 전쟁에 들어가게 되고, 러시아 역시 1686년의 대 튀르크 전쟁 이래 기독교 신성동맹에 가담해 오스만 제국에 지속적으로 영토를 뜯어내며 엿먹여 왔다.
오스만을 두들겨 패며 팽창한 건 신성 로마 제국과 후신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 튀르크 전쟁으로 합스부르크 왕가는 오스만에 카를로비츠 조약(1699)를 강요하여 헝가리(오늘날의 슬로바키아 포함)[1] , 트란실바니아, 슬라보니아(현재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북동부)를 얻어냈다. [2] 결국 이때 오스만에게서 이긴 것이 오스트리아 제국(나폴레옹 패전 후), 오-헝 이중 제국(헝가리 자치 인정 후) 팽창의 발판이 된 것. 오스만과 오스트리아의 전쟁 역시 펠로폰네소스 전쟁(1714) 등 일일이 나열하기엔 끝이 없다(...)
여하간 이 당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이해는 오스만을 때린다는 이해에 매우 충실했다. 신성 로마 제국과 러시아의 동맹 관계는 7년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에서 보듯 비교적 끈끈한 편이었으며, 신성동맹 역시 여러 차례 조직되었다. 한 예로, 7년 전쟁이 그치자 신성 로마 제국과 러시아 제국, 더해서 프로이센 왕국은 폴란드를 갈라먹는 데 의견이 일치했고 결국 폴란드는 3분 되고 만다.
2.2. 19세기 - 오스만 제국의 붕괴와 발칸 반도의 격동
나폴레옹 전쟁 이후,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수상의 빈 회의에 의해 빈 체제가 성립되었다. 문제는 전쟁의 두 승전국인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구 신성 로마 제국)는 구 체제로의 복귀에는 이해가 일치했지만, 점점 다른 분쟁으로 이해가 갈렸다는 것.
오스트리아는 러시아 차르가 제안한 평화를 위한 신성동맹 체결에는 동의했으나 실제로는 그렇게 내켜하지 않았다.[3] 결국 1815년의 신성동맹은 10년만에 무너졌다. 다만 양국의 관계가 본격적인 적대로 드러난 것은 1848년 혁명의 격동까지 지나간 훗날의 일이었다.
1820년대와 30년대, 그리스는 오스만 제국에 독립을 외쳤고, 영-불의 지원이 이어졌다. 여기에 더해 러시아가 신성동맹을 본격적으로 박차고 그리스를 지지했고, 결국 그리스는 독립되었다.
하지만 한술 더 떠 러시아가 오스만 내 정교회의 보호권을 내세우며 팔레스타인(예루살렘)까지 물고 늘어지기 시작하는 등, 오스만에 대한 팽창 심리를 드러내자 영불은 다시 오스만을 보호하겠다며(...) 크림 전쟁을 터뜨렸다. 러시아는 패전했으나 오스만 제국의 힘은 영•불의 압력에 더욱 약해졌다.
문제는 이때 오스트리아가 종전의 친러정책은 물론, 중립까지 깨고 사실상의 참전을 선언했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는 이로서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루마니아 해안지대)를 잠시 얻게 되었다. 하지만 영불은 이런 영토 확보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의 뒤통수로 이탈리아 통일전쟁으로 베네치아 등의 세력권도 토해내야 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나중에 보불전쟁에서 나폴레옹 3세가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게 발릴 때도 보오전쟁에서 관대한 협상을 얻어낸 오스트리아는 그저 먼산만 보고 있었다. 오스트리아가 독일 제국에 찰싹 결합하게 된 건 이때부터였다.
한편 러시아는 크림 전쟁에서 크게 깨졌지만, 그렇다고 남진 기도를 포기하지 않았다. 특히 1815년 오스만과 싸워서 독립한 '''세르비아'''는 러시아의 팽창의 착실한 지지 세력이었다. 1852년 독립한 몬테네그로 공국 역시 러시아의 지지세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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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가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은 오스만 제국 휘하 보스니아의 독립 움직임을 강력하게 탄압한 오스만을 두고 1877년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가 선빵을 날린 러시아-오스만 전쟁(1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대표적이다. 이 전쟁은 오스만의 패전으로 끝나면서 산 스테파노 조약으로 그 해 불가리아 공국 등이 독립되었다.
전쟁의 이름을 생각하면 조금 어이없지만 이 해의 오스만 전쟁에서 러시아는 오-헝의 눈치를 보아 참전하지 않고 중재 명목으로 이득만을 챙겼다. 이는 크림 전쟁으로 러시아가 몸을 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4]
그러나 열강들은 이런 행보에도 다시 러시아를 견제하였으니, 1878년 베를린 회의다. 오스트리아와 영국[5] 은 당연히 러시아 견제 노선이었고, 프랑스는 영국과 동맹을 맺기에는 아직 나폴레옹 전쟁(!)의 앙금이 남아 있었으며, 독일 제국의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동맹국(구 신성동맹국)의 일원들인 양국이 서로 충돌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결국 중재는 독일이 맡게 되었다.(회의장소가 비스마르크의 집무실이었다)
중재의 댓가로 영국에는 키프로스가 할양되었고, 보스니아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관할권에 두기로 결정했다. 또한 불가리아는 친 러시아 공국에서 다시 튀르크의 보호국(즉, 반자치)으로 돌아가며 영토가 거의 1/3로 축소되었다. 한편 마케도니아와 동부 루멜리아(오늘날 불가리아 동남부)가 오스만 제국의 관할로 돌아갔다.
이후 세르비아는 1882년 왕국을 선포하며 완벽하게 독립했고, 1885년 불가리아는 베를린 회의에서 초기 영토에 맞먹는 크기의 동부 루멜리아를 되찾는 등 오스만의 세력이 약해지는 가운데 이후 20년간의 평화가 이어진다.
하지만 20세기 초가 되면서 다시 갈등은 불거지기 시작했다. 애초에 그 20년간의 평화는 사실상 긴장 속의 평화였던 것이다.
3. 삼국 동맹과 삼국 협상
독일의 빌헬름 2세는 러시아와 최대한의 친선을 유지하려 했던 비스마르크를 실각시키고, 러시아와 손을 끊으며 비스마르크 체제를 스스로 무너뜨렸다. 고립된 러시아는 원래 비스마르크가 보불전쟁 이래 고립시켜두려 했던 프랑스와 손을 잡게 된다(1887년 러불동맹). 1904년, 영국과 프랑스의 해묵은 감정을 잊고 영불협상이 맺어졌다. 이어서 러일전쟁과 포츠머스 조약으로 러시아가 몰락하면서, 영국의 관심은 러시아보다 독일 견제에 집중되게 된다. 그래서 뒤늦었지만, 영-러의 영러협상이 1907년 체결되었다.
한편 삼국 동맹의 일원이었던 이탈리아는 전쟁이 터지자 중립을 취하다가 런던 밀약으로 영-불에 이탈하게 된다. 항목 참조.
3.1. 발칸 전쟁
오스트리아는 보스니아를 1908년 러시아 제국의 사전양해를 얻어 완전 합병했다.[8] 그러나 발칸 반도에서 남(유고)슬라브족 통합운동을 주도하던 세르비아 왕국은 이 안건이 확정되자 격렬하게 반발했다. (1908년은 불가리아가 오스만 제국에서 완전히 독립하여 불가리아 왕국으로 승격한 해이기도 하다.) 여기에 더해 알바니아 지역을 노리던 세르비아 왕국을 견제하기 위해 오-헝 제국이 알바니아 왕국의 독립을 지원하자(1911년 이후 - 알바니아 독립전쟁) 세르비아의 슬라브 민족주의자들은 뚜껑이 열려버리고 말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러시아 제국의 지원과 이 두 국가의 주도로 세르비아 왕국, 불가리아 왕국, 그리스 왕국, 몬테네그로 왕국(1852년 독립)으로 구성된 발칸 동맹이 성립했다. 그러나 발칸 동맹 국가들은 러시아 제국의 희망사항과는 달리 오스트리아보다 오스만 제국의 세력을 발칸 반도에서 몰아내는 데 더 몰두하게 된다. 발칸 동맹의 주도국가인 불가리아와 세르비아 모두 팽창정책을 추구했지만, 오-헝 제국으로부터 땅을 뜯어내기에는 아직 오스트리아가 강력했으니 그나마 독립과정에서 싸워본 오스만 제국이 만만하게 보였던 것. 이것이 1차 발칸 전쟁(1912년 가을 ~1913년 봄)이 발생하는 원인이 된다.
일은 여기서 더 커진다. 1차 발칸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을 떡실신시킨 발칸 동맹 국가들이었지만, 이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뜯어낸 영토를 어떻게 나눠 가질지 싸우게 되었다. 1차 발칸 전쟁에서 가장 큰 역할을 했던 불가리아 왕국이 자신의 몫(산 스테파노 조약 당시의 마케도니아)을 과하게 요구하면서 나머지 발칸 동맹 국가들과 갈등을 빚게 된 것이다.
결국 자기들끼리 1913년 여름에 전쟁이 터지는데 이를 2차 발칸 전쟁이라 한다. 이 과정에서 불가리아 왕국은 용감하게 세르비아 왕국에게 선빵을 날렸다. 그러나 발칸 동맹 소속이었던 그리스 왕국과 몬테네그로 왕국이 세르비아 편을 들며 참전했고, 여기에 루마니아 왕국도 러시아 제국의 영향으로 세르비아 왕국을 돕기 위해 전쟁에 참가했으며, 1차 발칸 전쟁에서 불가리아에 털려 열받아 있던 오스만 제국까지 불가리아를 공격하기 위해 전쟁에 개입하게 된다. 이로써 불가리아 왕국은 1:5의 상황에서 패전하게 되고 1차 발칸 전쟁에서 획득한 영토[9] 까지 몽땅 토해내는 안습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물론 동네 깡패(불가리아)는 잡았으나, 발칸 반도의 친 러시아 통합 세력을 탄생 시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배후를 위협하려 했던 러시아 제국의 대 전략은 그야말로 엿 먹은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이것들이 힘 합쳐서 오스트리아 견제하랬더니 자기들끼리 피 터지게 싸운 뒤 서로 원수 지간이 됐으니...
이 분위기 속에서 보스니아의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더욱 세르비아로의 통합을 열망하였고, 이 지역의 안정을 위해 작게는 통합 정책, 크게는 오스트리아 합중국을 그리고 있었던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는 독립을 실패하도록 유화 정책을 내세운 적의 수괴나 다름 없었다. 결국 한 해가 못 되어 보스니아를 시찰하던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암살 당하는 사라예보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물론 사라예보의 암살 자체가 기막힌 우연이었고, 그 이후 전 유럽 적 전면전으로 나아가는 과정 역시 우연이 많이 작용했지만, 결국 "유럽의 화약고" 발칸에서 비롯된 세계 대전은 이미 2년 전부터 예고되어 있던 셈이다.
[1] 합스부르크는 헝가리의 야노시 왕가를 혼인 동맹으로 흡수한 뒤로 헝가리-보헤미아의 왕을 겸하고 있었다. 헝가리의 일부였던 슬로바키아(상헝가리, 상마자르 Upper Hungary) 공국은 일종의 완충지대였는데, 합스부르크 군주국령이었다가 2차 빈 공방전 당시 빼앗긴 상태였다. 이걸 1699년 회복한 것. 이당시 헝가리는 프레스부르크(오늘날의 브라티슬라바)를 수도로 하는 합스부르크 휘하의 헝가리 왕국과 구 수도 부다(오늘날의 부다페스트)를 포함한 오스만 제국령 헝가리, 그리고 왈라키아, 몰다비아, 트란실바니아 공국 등의 오스만 제국의 속국 등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image] 1526년 러요시 2세의 전사로 오스만에게 반독립국으로 망했었던 구 헝가리-보헤미아(오늘날의 체코) 왕국 지역은 이로서 다시 단일 지배자 하에 놓이게 된다.[2] 베네치아 공화국은 크레타를 잃은 대신 달마티아 등을 얻어냈다.[3] 되려 메테르니히의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에게 무너진 베네치아 공화국을 접수했고, 프랑스의 탈레랑을 끌여들여 러시아/프로이센의 팽창에 뒤통수만 때렸다. 빈 회의 항목 참조. 하긴 뭐 러시아도 스위스를 조각내자는 오스트리아의 발상에 반대했다지만.[4] 하지만 어이없게도 이 전쟁은 가장 유명한 "러시아-튀르크 전쟁" 가운데 하나다. 항목 참고.[5] 영국은 크림 전쟁 이래 러시아의 전방향의 남하를 경계하고 있었고, 여러 방면에서 적극적으로 러시아를 견제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는 거문도 사건과 뒤이은 영일동맹이 있다.[6] 출처[7] 초록색이 3국 협상, 연한 갈색이 3국 동맹, 연한 초록색이 러시아의 동맹국[8] 보스니아는 관할권 기간부터 오스트리아 지역의 유일한 "아시아"라며 천대받았다. 일종의 외곽 영토였던 셈.[9] 특히 이스탄불 바로 앞의 동부 트라키아(오늘날의 "유럽 터키"지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