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레지엔 주
독일어: Provinz Schlesien
영어: Province of Silesia
1. 개요
프로이센 왕국 산하의 행정구역 중 하나로 독일 제국 시기까지 존재했으나, 1차대전 패배 이후 상부 슐레지엔 주와 하부 슐레지엔 주가 분리되었고, 상대적으로 폴란드인들이 다수 거주했던 상부 슐레지엔 지역의 동부(이 지역은 핵심 산업지대이기도 했다)는 주민투표를 거쳐 신생 폴란드에게 할양됐으며, 이러한 조치는 독일 내부의 강력한 반발을 산다. 이후 폴란드 침공을 거쳐 1939년부터 1944년까지 일시적으로 다시 슐레지엔이 하나로 통합되기도 했으나 2차대전은 나치 독일의 패배로 끝났고 이후 스탈린은 아예 슐레지엔 거의 대부분을 폴란드에 넘겨준다. '''아주 쬐끔은 작센의 일부로 남아있는데, 정말 쬐끔이라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 [4] 이에 대해서 독일 내에서 항의의 목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1990년 통일 과정에서 독일이 구 영토를 영구적으로 포기할 것을 명시했기 때문에 슐레지엔 지역이 독일로 다시 반환될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2. 역사
2.1. 근대 이전
약 기원전 1세기 무렵에 이미 고대 게르만족이 이 곳에 거주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었으며 중세 이후로는 슬라브족들이 이곳에 거주한다. 9세기 이후로는 폴란드 왕국의 영토이다가 13세기 무렵부터 소위 동방식민운동의 물결을 타고 독일인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서서히 게르만화가 이루어진다. 상대적으로 독일과 가까웠던 탓에 슐레지엔은 빠르게 게르만화가 이루어져서 이미 13세기 후반에 이르면 독일인들이 수적으로 우위를 점하게 된다.[5]
동방식민운동 이후로는 보헤미아 왕국의 영토였다가 1526년 러요시 2세가 후사없이 죽은 후 합스부르크 가문의 페르디난트 1세가 보헤미아 왕국의 왕으로 선출되면서 보헤미아의 일부였던 슐레지엔 역시 합스부르크 제국에 포함되게 된다. 하지만 1740년 마리아 테레지아가 왕위에 오르자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 당시 프로이센의 왕이었던 프리드리히 대왕은 국사조칙을 파기. 200년 전 체결된 브리그 조약을 근거[6][7] 로 마리아 테레지아의 왕위 승계를 인정하는 조건으로 슐레지엔을 요구하나 오스트리아가 퇴짜를 놓자 곧바로 침공해 슐레지엔 일대는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
테레지아의 대관식 직후 기습적인 침공을 감행했던 프리드리히 대왕은 성공적으로 슐레지엔 전역을 차지하는데 성공했고, 1742년 무렵이 되면 슐레지엔의 대부분이 사실상 프로이센 왕국의 영토로 들어오게 된다. 대찬 여장부였던 테레지아가 그리 쉽게 슐레지엔을 포기할 리가 없었고, 곧바로 반격을 감행하지만 끝끝내 슐레지엔을 수복하는 것에는 실패하고, 1745년 이 일대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해야만 했다.여담이지만 프로테스탄트가 다수였던 하부 슐레지엔 주민들은 내심 가톨릭을 신봉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치에서 벗어나 프로이센 왕국의 호엔촐레른 가문의 통치를 받게 된 것을 기뻐했다고 카더라....
이처럼 슐레지엔을 두고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수 차례 전쟁을 일으킬 정도로 충돌한 것은 이 곳이 그만큼 알짜배기였기 때문이다. 슐레지엔은 철과 석탄이 풍부한 지역으로 이를 바탕으로 한 상공업이 크게 발달해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직전에는 오스트리아 세금 수입의 22%를 책임지는 요충지였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모두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던 곳이 슐레지엔이었다.[8]
2.2. 프로이센과 독일 제국
이후 7년 전쟁을 거치면서 슐레지엔은 확고부동한 프로이센의 영토로 승인을 받았으며 나폴레옹 전쟁과 빈 회의를 거치면서 작센 왕국에게서 일부 지역을 떼어받아 그 규모가 더욱 커지게 된다. 라이프치히 전투 이후로 누가봐도 전세가 기울었음에도 작센 왕국은 눈치 없이 나폴레옹을 편들었고, 그로 인해 강대국들에게 찍혀서 꽤 많은 영토를 뜯기고 만다. 이후로도 슐레지엔은 프로이센의 일부로 독일 연방과 독일 제국에 참여했으며 특히나 각종 철과 석탄이 풍부했던 지역의 장점을 십분 활용해 산업 혁명 시기에는 성공적으로 산업화를 이끌어낸다. 그덕에 인근의 폴란드와 포젠, 포메른, 동프로이센 지역에서 일자리를 찾아 많은 사람들이 슐레지엔(특히 산업이 발달한 상부 슐레지엔)으로 이주했고 20세기 초반 무렵에는 루르 공업 지대 다음가는 독일 내 경제권으로 성장하기에 이른다.
2.3. 바이마르 공화국과 나치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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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부 슐레지엔 주의 깃발. 한편 하부 슐레지엔 주는 분리되기 전 상징을 그대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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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부 슐레지엔의 분할. 노란색은 독일, 짙은 청색은 폴란드, 하늘색은 체코슬로바키아.
1919년에 슐레지엔 주 오펠른 관구를 떼어 "상부 슐레지엔"(Provinz Oberschlesien. 주도-오펠른)" 주로 분리시키고, 나머지 지역은 "하부 슐레지엔(Provinz Niederschlesien. 주도-브레슬라우)"이 되어 분리된다. 이 두 주는 1938~1941년 한때 다시 합쳐지기도 한다. 하지만 1차대전이 독일의 패배로 끝나면서 슐레지엔에도 암운이 드리우기 시작한다. 1919년에 훌트신 지역이 체코슬로바키아로 편입되었고, 상부 슐레지엔 전역에서 폴란드 정부의 사주를 받은 폴란드계 주민들이 무장봉기를 일으키고 이에 반대하는 독일의 준군사조직들과 곳곳에서 충돌을 일으키면서 그야말로 개판 오분 전의 상황으로 치닫고 만다. 결국 1921년 주민 투표를 거쳐 상부 슐레지엔이 독일과 신생 폴란드로 분할되었다.(폴란드로 넘어간 땅의 면적은 비록 작지만, 카토비체 같은 알짜 산업지대가 넘어가버렸다) 폴란드로 넘어간 지역은 실롱스크 주가 되었으며, 자치의회를 갖는 등 당시 폴란드 유일의 자치주였다.
1939년 폴란드 침공 직후 히틀러는 다시 상부 슐레지엔을 합병하여 독일령으로 삼는다. 그렇지만 전쟁은 독일의 패배로 끝났고 연합국 사이의 합의에 따라 전후 독일과 폴란드 사이의 국경이 오데르 강과 나이세 강으로 정해짐에 따라 이 국경선 외부에 위치했던 슐레지엔은 고스란히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에게 넘어갔다. 당초 미국과 영국은 오데르-나이세 선이긴 한데 동쪽에 있는 글라처나이세 강(Glatzer Neiße. 폴란드어로는 니사 크워즈카 강(Nysa Kłodzka))을 새 국경으로 만들려고 했다. 이 시나리오에 따르면 주도 브레슬라우를 비롯한 슐레지엔의 절반은 독일이 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소련의 반대로 실패했다.
비록 20세기 초의 전성기 수준까지는 아니었지만 상부 슐레지엔은 2차대전 당시에도 독일의 주요 공업 지역 중 하나였고, 비스와-오데르 대공세 당시 독일군은 미친 듯한 페이스로 밀려오는 소련군을 피해 황급하게 후퇴하느라 슐레지엔의 공업 지대를 손 하나 까닥 못해보고 온전한 상태로 남겨놨고, 6년에 걸친 전쟁으로 인해 국토가 황폐화된 폴란드에게 상부 슐레지엔은 귀중한 선물이 되어줬다. 또한 주데텐란트의 경우에서도 보이듯이 영토만 할양하면 이 일대에 잔존할 독일계 소수민족들이 다시금 분규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슐레지엔에 거주하던 독일인들 역시 대부분 독일 본토로 추방시켜버리고 폴란드인들을 이주시킨다.
2.4.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강제로 이주된 독일인들은 전후 서독 사회에서 '추방민 연합회'라는 정치 단체를 결성, 쪽수를 바탕[9] 으로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콘라트 아데나워를 위시로 한 서독의 초기 정치인들 역시 기민당, 사민당 할 것 없이 오데르-나이세 선의 승인을 거부하면서 국경의 변경을 논의할 여지를 만들어놨었다. 하지만 1969년 취임한 빌리 브란트 총리가 오데르-나이세 선을 실질적으로 승인한데다가 1990년 헬무트 콜 총리가 통일 과정에서 전승국들에게 동프로이센과 슐레지엔을 포함한 구 영토를 포기할 것을 약속하면서 완전히 슐레지엔은 폴란드와 체코의 영토로 확정된다.
가끔 독일인 실향민들이 늘그막에 고향을 찾아서 이 지역으로 이주해가는 경우는 있다고 한다. 독일 정부 역시 그것까지 막지는 않는다고.
그러나 대규모의 추방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상부 슐레지엔 지역에는 독일계들이 꽤 거주하고 있다. 2011년 기준으로 오폴레 주에는 78,595명의 독일계가 거주하며, 주 인구의 7.73%를 차지한다. 이 지역은 독일인이라 할지라도 폴란드와 같은 가톨릭 신자들이 다수였고, 독일인과 폴란드인의 정체성이 모호했기에 독일계가 잔류한 경우가 종종 있으며 남은 독일인들은 정당도 설립해서 폴란드 의회에 의석도 확보하고 있다. 다만 폴란드 전체에서 독일계 인구가 차지하는 비율이 낮기 때문에 1석에서 2석 정도를 얻는게 고작이다.
가톨릭 신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옛 프로이센령답게 공업지대에 일하려고 들어온 개신교 신자들도 있어 루터교회도 생각보다 잘 남아 있는데[10] 체코와 폴란드에 둘 다 걸쳐있다는 특성상 체코 개신교회나 폴란드 루터교회와 다른, 독자적인 교단으로 운영되고 있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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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폴레(Opole) 주 부근의 독일인 분포 (2002년)
2006년부터는 독일계 비중이 20% 이상인 자치체는 폴란드어/독일어 이중언어를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물론 제1언어는 폴란드어이다.
한편 독일에 남은 슐레지엔 흔적으로는 1994년부터 14년간 존재했던 작센 주의 니더슐레지엔 오버라우지츠 군이 있었고, 1909년 창립한 축구클럽 황백(黃白) 괴를리츠가 슐레지엔의 상징을 달고 있다.
"니더슐레지엔의 룰란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표지판[* 룰란트(Ruhland)는 구 슐레지엔 주 가장 서쪽에 있던 도시로, 현재 브란덴부르크 주에 속한다.]
3. 같이보기
- 실레시아
- 2차대전 후 독일과 폴란드의 영토 문제
- 오데르-나이세 선
- 폴란드 회랑
- 슐레지엔 요리
-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 괴를리츠 - 현재 독일의 도시로 구 슐레지엔주에 속했다.
- 미로슬라프 클로제, 루카스 포돌스키 - 독일의 폴란드계 축구선수. 둘 다 출생지가 폴란드 인민 공화국 실롱스크 주였다. 2차 대전 전으로 보면 슐레지엔 주.[12]
[1] 훌트신(Hultschin/체코어 Hlučín) 지방이다. 1차 대전 이후 편입되었으며 체코슬로바키아가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할된 이후에는 체코의 영토로 편입.[2] 오데르-나이세 선 서쪽의 니더슐레지엔 일부가 독일에 잔류하였으나 독자적 행정은 불가능하여 작센으로 편입됨.[3] 현 폴란드의 브로츠와프. 체코어로는 브라티슬라브(Vratislav).[4] 전쟁 전 행정구역으로 따지면 호이에르스베르다 군 전체와 로텐베르크 군 서부, 괴를리츠 군 서부 지역이다[5] 여담이지만 이 때 유일하게 폴란드인들이 수적으로 우위를 점했던 게 바로 개요항목에서 언급한 상부 슐레지엔 일대. 이 일대는 이후로도 거의 700년 가까이 폴란드인들의 수적 우위가 유지된다. 특히나 19세기 중후반부터 독일제국이 노골적으로 폴란드인들을 깔아뭉개고 독일인들을 우대했던 것을 생각하면 흠좀무한 생존력.[6] 브리그 조약은 1537년 슐레지엔 지방의 군소 공국인 브제그 공국과 당시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이던 프로이센이 맺은 조약인데 주된 내용은 공국의 대가 끊길 경우 영지를 브란덴부르크에게 물려준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이던 페르디난트 1세가 조약 승인을 하지 않아 효력이 정지되었다.[7] 문제는 브제그 공국이 보헤미아 왕국의 속국이었고 공국의 종주국 보헤미아의 왕은 1526년 이후로 줄곧 합스부르크 차지였다는 것. 결국 1675년 공국의 대가 끊기자 오스트리아가 합병해 버린다. 브란덴부르크는 조약을 근거로 오스트리아에게 항의했으나 국력 차로 눈물을 삼킬 수 밖에 없었다.[8] 최후까지 오스트리아 영토로 남은 일부 지역은 현재 체코 영토로 남아있다.[9] 동프로이센과 슐레지엔에서 이주된 독일인들을 합치면 1000만이 훌쩍 넘는다. [10] 추방을 면한 극소수의 독일인들과 슬라브인이면서 루터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뒤섞인 것으로 추정된다.[11] 이는 에큐메니컬에 회의적인 등 보수적 성향이 남아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12] 클로제는 오폴레(오펠른) 시, 포돌스키는 글리비체(글라이비츠) 시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