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역사
1. 개요
아르헨티나의 역사를 다루는 항목.
2. 독립 이전의 역사
BC 1만년 경에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아르헨티나 일대에서 부족별로 나뉘어 살았다. 아르헨티나 동북부 지역은 투피-과라니 어를 쓰는 부족들이 살았고, 파타고니아라고 볼리는 중부와 남부 지역은 마푸체족과 테우엘체족 등이 살았으며. 서북부 지역은 15세기에 잉카 제국에 복속되었으며 이로 인해서 현재의 아르헨티나 국기에 잉티가 그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16세기 중엽에 파타고니아 일대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었다. 파타고니아와 티에라델푸에고 지역은 마푸체, 테우엘체, 야마나, 셀크남 족 등 원주민들이 반독립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18세기 중엽인 1776년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이 설치되었다.
3. 독립과 통일
19세기 초 영국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침공을 시민들의 힘으로 물리친 사건을 계기로 독립의지가 촉발되었고 이후 호세 데 산 마르틴의 5월 혁명이 일어나면서 1810년 5월 독립을 선포하고 임시정부를 수립, 1816년 7월 9일에 투쿠만 회의에서 중앙 집권적 공화국으로 성립되었음을 선언했다. 처음에는 라플라타 부왕령 자체가 그대로 라플라타 합주국으로 독립을 선언하였으나, 합주국의 내부 다툼이 격해져 상이한 문화를 가지고 있던 볼리비아, 우루과이 그리고 파라과이가 이탈하게 된다. 이후 하나의 강력한 중앙정부를 원하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중앙집권주의자들과 자치권을 지키려는 지역들의 연방주의자들 사이에 마찰이 심해 독립 직후부터 투닥투닥거리게 된다.
베르나르디노 리바다비아가 중앙집권주의자로서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와 동시에 최초의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라플라타 강 하구에 위치해 아르헨티나의 무역을 독점하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국유화하고 그 수입을 통합된 국가 전체를 위해 사용하고자 하였으나, 지방의 연방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위협하는 중앙정부가 나타나는 것을 반대했고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지주들 역시 자신들이 독점한 무역 특권을 내놓을 생각이 없었다. 결국 1827년 리바다비아는 대통령에서 쫒겨나게 된다. 이후 아르헨티나는 제대로 된 지도자 없이 산발적 내전에 휩싸이게 되며, 각 주의 주지사들이 권력을 나누어 가졌다. 아르헨티나 연합국이라는 큰 틀의 국가는 존재하였으나 사실상 유명무실하였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가 상당히 큰 권력을 행사하는 매우 느슨한 연방체제가 성립되었다.[1]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가 쿠데타와 반목으로 마구 교체되는 사이, 1829년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가 기존 중앙집권주의자 주지사를 제거하고 연방주의자의 리더로서 주지사에 오른다. 이후 그는 강력한 독재정책과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함으로서,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아르헨티나 연합국에 그나마 안정을 가져오게 된다. [2] 이후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중앙집권주의자들 에 대한 철저한 숙청이 이루어져 이들은 전부 지방으로 도망가고, 힘을 모아 로사스에게 대항하기도 했지만 철저하게 박살나버렸다. 이렇게 로사스는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안정적 독재체제를 구축하게 되며, 자신의 가문이 아예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를 독점하게 하려 했다.[3] 물론 그의 잔혹한 통치와 권력 독점 야욕은 그의 인기를 계속 떨어뜨려 말년에 그는 암살의 위험을 고려해 자신의 집무실과 관저에서 나가지 않았다.
로사스가 장기집권하는 도중 우루과이에서 내전이 일어나자, 이에 개입하는 과정에서 페드루 2세의 브라질 제국과 충돌이 일어나게 된다. 결국 브라질과 전쟁을 하게 되고, 이에 남아있던 중앙집권주의자 잔당들이 합세하여 대 로사스 연합을 형성하게 된다. 로사스는 여기에서 대패하여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로부터 쫓겨나고, 영국으로 망명하게 된다.[4]
이에 1853년 아르헨티나의 각 주지사들이 모여 새로운 헌법 제정에 찬성[5] 하고 아르헨티나를 연방국가로 만드는 데 동의하게 되어 엔트레리오스 주의 호세 우르키사가 새로운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신헌법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 세관의 수입을 모든 주가 공유하도록 된 것에 반대한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이를 거부하고 혼자 아르헨티나 연합국을 탈퇴하게 된다. 그로부터 무려 10년 간 아웅다웅 계속해서 다투다가, 결국 여러 분쟁을 거쳐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바르톨로메 미트레가 최종적으로 내륙의 아르헨티나 연합국을 제압하게 된다. 이후 모든 주가 참가한 의회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 세관을 국유화하되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의 수입을 보장하는 방법으로 합의가 이루어졌고, 1862년 미트레가 통합된 아르헨티나의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4. 전성기(~1929년)
아르헨티나는 넓은 토지와 초원이 있었으나 농사를 짓기에는 강수량이 모자라 많은 생산량을 보장하지 못했고, 때문에 목축업이 가장 크게 발달한 국가였다. 그러나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던 것이 당시에는 냉동기술이 없어 소와 양을 수출하려면 살아 있는 채로 실어야 했기에 비용이 크게 증가했고 이는 유럽 시장에서 경쟁력이 떨어졌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냉장 기술이 개발되어 소고기 등을 도축해도 적도를 통과할 수 있게 되자, 아르헨티나 경제는 크게 부흥하게 되었다.
거기다가 오랜 내전이 끝나게 되면서, 그동안 미루어 두어 통제하지 못하고 있던 원주민 영토를 향한 정복 및 식민에 착수한다. 1800년대 후반에 이루어진 대규모 정복사업은 아르헨티나의 영토를 2배 이상 뻥튀기 해놓았으며, 남부 파타고니아 지방을 제외하고는 전부 농업과 목축업에 쓸만한 땅들이었기에 아르헨티나의 1차산업은 크게 부흥하였다.[6] 이에 지주들의 자본 축적이 이루어져 1880년 이후부터는 초기적인 산업화가 시작되었고, 해외 자본, 특히나 영국과 프랑스의 자본이 유입되어 최초로 근대적 공장이 세워지는 등 아르헨티나는 빠른 경제성장을 이룩하게 되었다.
1900년 이후부터는 그렇게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문화와 사회가 크게 발전하여, 본격적으로 '남미의 프랑스'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은의 여왕', '남미의 파리' 등 화려한 명칭을 갖게 되었다. 철도와 기간사업이 건설되었고 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지하철[7] 을 건설하였다. 급진주의당이 정권을 잡고 운영한 10여 년 동안은 사회정치적 문제에도 크게 관심이 대두되어 모든 사람들에게 투표권을 보장하였고[8] 사회안전망에 대한 기초적 작업이 이루어졌다. 목축업과 농업은 물론 타 산업도 발달하기 시작해 1910년 무렵부터 1970년대까지는 세계 15대 경제 대국으로 늘 빠지지 않았고, 1910년대 아르헨티나의 1인당 GDP는 프랑스, 이탈리아보다 높은 세계 8위권으로 벨기에와 비슷했다. 이때의 아르헨티나는 명실상부한 선진국이었으며, 드레드노트급 전함을 구입하고 독립 초기 주변국인 브라질과 파라과이와의 전쟁에서 승전할 정도로 중남미에서는 강대국[9] 이기도 했던 나라였다. '아르헨티나인처럼 부자이다.'라는 관용구가 프랑스에 생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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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독립 100주년 기념행사. 1916년의 아르헨티나의 화려한 모습을 보여준다.
익히 알려진 동화 '엄마찾아 삼만리'에서 이탈리아인 주인공 소년이 엄마 찾아 가던 곳이 바로 아르헨티나였다. 즉 유럽에서 아르헨티나 드림을 찾아 이민을 왔다.[10]
5. 대공황: 아르헨티나 몰락의 시작
그러나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을 시작으로 세계 경제가 큰 타격을 받으면서 목축업과 농업에 쇠고기, 곡물 수출에만 의존[11] 하며 부를 쌓던 아르헨티나는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었고 이때 국내 위기의 혼란을 틈타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치에 개입하게 되면서 아르헨티나는 여타 중남미 국가들처럼 잦은 군부 쿠데타와 군부 독재 등 군부의 정치 개입이 반복되는 등 경제적, 정치적으로 끝 없는 혼란에 빠져들게 되었다.
6. 2차 세계대전 시기
아르헨티나에는 나치 독일의 전횡을 피해 도망친 유럽 이주민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일례로 볼펜을 발명한 신문기자 비로 라슬로(Bíró László) 역시 원래는 헝가리 사람이었으나 나치를 피해 아르헨티나로 도망쳤다.
이렇게 아르헨티나는 나치를 피해 도망친 사람들이 몰린 나라인 데다가 세계적인 농업국인 덕에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아르헨티나'라는 나라 자체가 연합국의 군량고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나치의 주동자들도 종전 직전 아르헨티나로 도망쳐오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아돌프 아이히만. 이 때문에 히틀러가 사실 도망가서 아르헨티나의 시골 구석에서 잘먹고 잘살고 있다는 음모론의 주역이 되기도 했다.[12]
7. 페론 집권기: 본격적인 아르헨티나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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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페론
그러던 중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6년 육군 대령출신 노동부 장관 후안 페론이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되면서 정세는 어느 정도 안정화되기 시작했고 대통령이 된 페론은 노동자와 빈민층을 위한 사회 복지 정책을 펼쳤다. 흔히 말하는 포퓰리즘의 대명사인 '페론주의'는 이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에비타'로 잘 알려진 영부인 에바 페론은 빈민의 어머니로 추앙받으며 어찌 보면 페론보다 국민들의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00년대 초반의 아르헨티나는 분명히 잘 사는 부국이었으나 사회문제는 심각했다. 산업화는 부분적으로 이루어져 제대로 된 중산층이 형성되지 못했고, 극단적으로 부자여서 해외 진출을 통해 돈을 쓸어모으는 지주층과, 그 밑에 소속된 노동자들로 사회가 극단적으로 이원화 된 것이다. 중산층이라고 해 봐야 공무원, 사무직 정도였으나 농업 위주 아르헨티나 경제 및 사회상에서 주류가 되지 못했다. 결국 수많은 빈민들이 거리를 맴돌며 일자리와 월급을 요구하였고, 이는 단순노무직에 사람들이 집중되어 비참한 삶의 질을 낳게 되었다. 후안 페론의 정책들은 이런 빈민들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고, 빈민가 출신인 에바 페론의 사회 활동까지 합쳐저 엄청난 인기로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페론이 펼친 정책은 상당히 문제가 있었다. 지속가능한 정책도 아니었을 뿐더러 거기다 만만한 부자들과 중산층들의 돈을 뜯어 회생 가능성이 없는 노동자나 빈민층들을 일방적으로 지원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서민을 위하는 지도자랍시고 포퓰리즘 정치와 선동으로 자국민들을 철저하게 우민화하여 아내였던 에바 페론과 함께 대통령궁에서 호화 생활을 누렸고 권력 요직에 자신의 추종자들만을 무조건적으로 기용하였다. 그리고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페론은 자신의 정책에 반기를 드는 정치가들은 가차 없이 억압하고 탄압하는 권위주의적 독재자로 변하기 시작했다.
물론 후안 페론이 빈민율을 줄이려고만 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인데 빈민 구제는 경제 개발과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고 후안 페론은 빈민 구제 먼저 하고 경제 개발을 하겠다고 했다. 결국 무분별한 임금인상으로 서민들은 매우 기뻐했으나 경제는 큰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페론의 능력과는 별개로 2010년대 후반에 이른 현재도 아르헨티나에서는 후안 페론 그 자체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그러던 1952년 영부인이었던 에바 페론이 암으로 죽으면서 페론 행정부가 추진하던 정책들 상당수가 한계를 드러났다. 페론 정부가 이혼과 매춘을 합법화하며[13]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의 지지를 완전히 잃자, 페론 정부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면서 페론의 입지는 약화되기 시작하더니 결국 페론은 1955년 9월 군부내 페론 반대파들이 일으킨 쿠데타로 실각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후 지속되는 군부 쿠데타와 정치 갈등으로 아르헨티나는 끝 없는 혼란에 빠져들었고 결국 석유파동으로 아르헨티나가 위기에 처하자 아르헨티나 정부에서 후안 페론의 귀국을 허용해주었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후안 페론은 대통령에 재당선되었다. 후안 페론이 재집권하면서 일시적으로나마 경제가 나아지는 듯했지만[14] 고령이었던 페론은 얼마가지 않아 사망했고 이어서 대통령이 된 후안 페론의 후처 이사벨 페론은 수완 부족과 좌파에 대한 탄압, 보수적인 재정 정책, 급속히 올라가는 물가 등으로 인기를 잃었다.
결국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를 중심으로 한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아르헨티나 군부가 다시 집권하게 되었다.
8. 군사독재: 아르헨티나의 암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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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1976년은 아르헨티나 역사상 최악의 해이다. 이사벨 데 페론은 1976년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를 합참의장격인 전군총사령관에 임명했는데 군대를 완전히 손아귀에 넣은 비델라는 쿠데타를 통해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이 되었다. 군부는 좌파와 페론주의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벌이며(일명 "더러운 전쟁") 국민들의 대대적인 반감을 사게되었다. 이 당시 탄압의 강도는 단순한 독재 정도가 아니라 수천명의 반정부 인사들과 시위 참여자들을 쥐도새도 모르게 잡아들인 후 재판 없이 고문 사형하였다. 뿐만아니라 수만 명의 시민이 실종되거나 국가보안군에 의해 살해, 대서양에 수장 되었다.
자국 기업들을 헐값에 매각해 얻은 비자금을 이용해 FIFA로부터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의 개최권을 사실상 돈주고 사왔다. 그렇게 1978년 6월에 월드컵을 개최했는데 이건 완전히 '''제2의 베니토 무솔리니'''라 불릴만했다. 말 그대로 무솔리니가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에서 했던 짓을 그대로 따라했고 결국 아르헨티나를 억지로 우승시켰다. 이로인해 프로파간다에 성공한 비델라는 5년동안 집권했으나 월드컵의 열기가 식자 국민들의 불만을 견디다 못해 1981년 퇴임하고 같은 군장성 출신인 로베르토 에두아르도 비올라로 돌려막기를 했다. 로베르토 에두아르도 비올라 역시 몇 개월 못하고 결국 레오폴도 갈티에리로 돌려막기를 시전하고 퇴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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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폴도 갈티에리
그리고 레오폴도 갈티에리도 호르헤 비델라처럼 프로파간다를 위해 뭔가 일을 만들고자 했다. 영국과의 영토분쟁 지역인 포클랜드 제도를 무력 '수복'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결국 포클랜드 전쟁에서 영국에게 참패를 당했다.
1970년대 후반에 들어와있던 외국자본도 포클랜드 전쟁 직후에 대거 빠져나갔으며, 이자율 상승까지 겹쳐서 외채를 도저히 갚지 못하게 되어 경제가 파탄위기에 직면하자 명분을 잃은 군부는 민주 정부에 정권을 이양했다.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킨 레오폴도 갈티에리가 대통령직에서 사퇴하고 아르헨티나 군사정부는 1년 정도 레이날도 비뇨네가 이어 받았다가 결국 이듬해인 1983년에 군사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을 불러 일으켜 직선제 선거를 실시하여 급진시민연합소속의 라울 알폰신에게 정권을 넘겨주었다.
9. 민주화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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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울 알폰신
라울 알폰신은 민주화를 위해 정치개혁을 단행하였고 아우스트랄 프로젝트를 해서 화폐부터 개혁하고 여러가지 경제정책을 내세워서 집권 초기에 어느정도 성과가 나오는가 싶었다. 그러나 임기 말년에 초 인플레이션 현상을 막지 못한 채 임기를 6개월 남겨놓고 결국 사퇴하고 말았다. 이어서 선거를 통해 페론주의 정당인 정의당이 집권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카를로스 메넴은 기존의 페론주의와는 반대되는, 이전 군부정권이 했던 신자유주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초기엔 이러한 약빨이 먹어서 물가가 안정화 되었다. 외자유치에 적극적이었다. 또한 민영화를 해서 돈이 되는 기업들이 대거 민영화되었다. 당장은 돈이 들어왔다. 빈부격차는 커졌지만 저환율 정책으로 초인플레이션이 진정되었기 때문에 일단 경제적으로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덕분에 1995년 대선에서도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2기 집권시에 1기 집권시 정책의 부작용으로 빈부격차가 급속히 확대되었다. 저환율로 수출경쟁력이 떨어져 무역적자가 급속히 커지는 등의 부작용을 겪었다. 1997년 IMF 외환위기로 쐐기타를 맞고 부정부패마저 횡행하면서 3선까지 노렸던 카를로스 메넴은 지지율 추락으로 3선을 포기하고, 1999년에 임기를 마치고 퇴진하였다. 그 이후 선거를 통해 정권이 교체되었다.
그러나 정권교체로 집권한 급진시민연합 정부도 영 신통치는 않아서 별수없이 기존정책을 계속 유지하다가 결국 2001년 지속되는 경제난[15] 분노한 시민들의 시위로 퇴진을 하게 된다. 이후로는 다시 정의당이 집권하게 되나 대통령이 일주일만에 4명씩이나 바뀌는 등 급속한 정치적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 아르헨티나 상황은 빈곤율 54%에 실업률 20.8%를 기록할 정도로 최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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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스토르 카를로스 키르치네르(Néstor Carlos Kirchner Ostoić, 1950년 2월 25일 ~ 2010년 10월 27일)
그러다가 2003년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정치적 안정을 회복했고 경제도 IMF 외환위기의 후유증을 벗어나 연간 8.9%대의 급속한 성장을 거두게 되었다. 네스토르 키르츠네르가 집권한 이 시기의 경제성장은 아르헨티나 역사상 가장 빠른 경제성장이었다. 그의 재선은 상당히 유력하였으나 그는 건강상의 이유로 자신의 아내인 페르난데스 키르츠네르에게 차기 후보를 맞겼고, 이후 아내의 후견인으로서 상왕정치를 하였다.
키르치네르의 아내인 페르난데스가 집권하면서 남편에 비해 부족한 수완과 세계적인 경제위기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경제성장의 호조와 임기 도중에 키르치네르가 사망하면서 과부가 된 페르난데스에 대한 동정으로 2기 집권에 성공했다. 하지만 2기 임기 들어서부터는 급속한 물가상승과 경제성장률 저하, 외화부족[16] 으로 흔들렸다.
그리고 2014년 8월에 또 다시 디폴트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사실 디폴트 선언 자체는 아르헨티나 정부에서 의도한 바가 크다. 미국 헤지펀드들이 채무조정에 합의를 안하고 아르헨티나 정부가 사실상 지급을 포기한 부실채권을 대량으로 사들여서 미국에서 소송을 걸어서 재판까지 갔는데 아르헨티나 정부가 재판에서 그만 '''패소해 버렸다'''. → 결국 미국 헤지펀드에게 돈을 갚는다.→ 근데 헤지펀드에게 돈을 갚게 되면 그 동안 채무조정을 해서 군말없이 지내던 여러 금융기관과 투자자들에게 압력이 들어와 그 동안 채무조정을 통해 탕감받은 몫까지 돈을 갚으라는 요구가 나오게 된다. 아르헨티나는 이미 2000년대 초-2010년대 초반에 여러 차례 채무조정을 거치면서 상당수의 채무를 사실상 탕감받은 상태였다. 그런데 헤지펀드에게 돈을 갚는다면? → 근데 그 이전에 진 빚이 너무 많아서 이걸 다 갚게 되면 아르헨티나 재정이 '''완전히 거덜나게 생긴다''' → 어쩔수 없다 디폴트 하자! 대충 이런식의 과정을 거치게 된 것.[17]
다행히 아르헨티나 입장에선 그 동안 쌓아놓았던 경험도 있고 브라질이나 칠레, 우루과이, 볼리비아 등의 인접 남미 국가와 정치성향이 일치했는데 그 인접국가들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기에[18] 1980년대,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보다는 좀 낫다. 2012년 이후에 경기침체와 상당한 물가상승으로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어 현지에선 그냥 빚갚으라고 하는 여론이 다수. 경기침체가 지속되었던 차라 2013년 총선에서 승리를 위한 전선이 패배한 이후로는 줄곳 레임덕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의외로 2015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정권 재창출이 가능할것이라는 전망이 있었는데, 의외로 지지기반 자체는 꽤 탄탄했던데다가 아무리 아르헨티나 경기가 침체가 장기화되고 있다해도 사실 그 동안 여러차례 찾아왔던 경제난에 비하면 사실 경제난 축에 못들 정도로 양반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1차 투표 1위를 한 여당의 시올리 후보 말고도 3위 후보인 세르히오 마사 역시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아래에서 일한 적이 있었던 페론주의자였기 때문에 잘만 회유하면 정권 재창출이 가능할 것이라는 전망이 있었던 것, 그러나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대통령이 다니엘 시올리(Daniel Scioli)을 적극적으로 밀어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3위 후보인 세르히오 마사(Sergio Massa)와도 이미 관계가 나빠 시올리 후보가 1차 투표에서 37%를 얻는데 그쳤다. 그리고 3위 마사 후보를 지지한 표의 대다수가 마크리 후보로 날아들어오면서 결국 결선투표에서 시올리 후보는 48.6%의 득표율을 얻어 야당 공화제안당 소속이자 최대 야당인 급진시민연합의 지지를 받은 마우리시오 마크리 후보에 패배하면서 허무하게 정권을 내주었다. 그나마 의회 선거에서 승리를 위한 전선이 선전을 거뒀는데 하원에서 의석 상당수를 상실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원내 1당 자리는 유지했고(107석/257석) 상원에서도 과반수 이상의 의석(40/72석)은 여전히 확보했다.
어쨌든 마크리가 집권한 뒤로 외국으로부터 자금이 대거 들어올 것이라는 기대가 컸지만 집권 2년이 지나면서 기대는 사그라들고 있는 중이다.외국으로부터 자금이 들어오고있지만 그 자금들이 아르헨티나 산업부문으로 들어오는것이 아닌 자산시장으로 들어오기 대문에 부동산이나 주식값같은 자산시장이나 호황이지, 막상 실물경제는 침체에 빠져있고, 저환율로 국내산업은 침체에 빠지고있는데다가 공장가동률은 2004년 이래 최악, 실업률도 다시금 10%를 넘어설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는 페론이 펼친 과도한 복지 정책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말아먹은 점도 있지만 이후 대처할 수많은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헛발질만 한 것이 더 크다. 게다가 여러 중남미 국가들처럼 군부 쿠데타와 군부 독재자 등의 군부 독재 등 군부의 정치 권력 개입이 반복되면서 정세적 혼란이 반복되었다.
경제 대국으로 잘 나가던 시절에도 기계 공업이나 제조업과 같은 산업이 많이 부족해 무너지기 좋은 국가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렇다 보니 공업화나 제조업 육성 등 산업화를 추진하여 성장을 기조로 국가 경제를 살렸어야 했고 대공황 와중에 군부 쿠데타로 들어선 군부 정권의 주도로 여러 차례 공업 육성과 같은 산업화 추진과 토지 개혁 등 대대적인 경제 구조 개혁이 시도되었지만 개혁에 대한 기존 기득권층들의 반발로 파행을 거듭하면서 개혁은 실패로 끝났다.[19] 게다가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는 문자 그대로 나라를 외국에 팔아치워 버리면서 아르헨티나를 완전히 파탄내버렸다. 적어도 후안 페론 치세 기간 동안에는 경제가 매우 어려웠으나 회생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존재하는 상태였는데 호르헤 비델라가 나라를 너무 심각하게 파탄을 내었고, 민정 이양 이후에도 라울 알폰신의 초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수습 실패로 아르헨티나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쿠데타 등 군부의 정치 개입 반복과 산업화 실패, 경제 구조 개혁 실패, 포퓰리즘 난립, 정치 혼란으로 인한 성장 동력 상실, 복지 실패에 따른 부채의 증가 등이 복합적으로 얽히고 쌓이면서 아르헨티나는 강대국의 자리에서 밀려나 몰락했고. 현재까지 아르헨티나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10.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슬픈 역사
아르헨티나는 남미 지역 국가들중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의 비율이 낮은데 이는 스페인의 식민지배에서 독립한 이후 백인들이 원주민들을 조직적으로 살해했기 때문이다.[20] 원래 원주민 인구가 다른 남미 국가에 비해 적고[21] 기후도 지리적으로 남극해와 가까워 백인들이 적응 가능할 정도로 온화, 서늘하고 백인들이 힘으로 몰아붙이기 쉬워서였는지는 몰라도, 아르헨티나의 원주민 탄압은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에 비해서도 그 정도가 잔혹하였다.
독립 이후 독재자인 로사스를 비롯한 모든 정파가 참여한 이른바 사막 정복전쟁(Campaña del desierto)으로 자국내의 남미 원주민들을 대거 학살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노예로 팔아넘기며 현재 아르헨티나의 영토와 국경를 획정지었고 여기서 살아남은 원주민들은 북서부 일대나 남부일대로 도피하며 아르헨티나 백인들에게 멸시를 당하며 어려운 삶을 살아야 했다. 동시에 원주민 지도자들은 덜 진화한 생물의 표본으로 산 몸이든 시체로든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박물관에 전시했다. 로사스, 로카 장군, 사르미엔토 등 거의 모든 아르헨티나의 '영웅'들이 이 학살에 관련되어 있다.
국기와 국장에 잉카 제국의 태양신인 인티가 그려져 있을 정도로 잉카 제국의 후예를 자처했지만 실상은 원주민에 대한 대우가 개차반이었고 이렇게 원주민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여기는 정서는 20세기 중반까지도 남아있었다.
아울러 백인 총잡이들을 동원하여 아르헨티나 국토의 남쪽 끝인 티에라델푸에고 섬에 사는 원주민 부족들인 오나 족을 대량학살했던 일도 아르헨티나의 어두운 역사다.[22]
그리고 원주민들을 탄압, 학살하고, 오나 족, 테우엘체 족, 마푸체 족등 현지 원주민들이 살던 남부 파타고니아와 안데스 산악, 티에라델푸에고 섬 지역에 백인들을 전부 이주시키고 원주민의 토지를 모두 백인한테 몰수/분배하여 백인과 원주민의 인구 비율까지 바꿔버렸다. 게다가 원주민 탄압 뿐만 아니라 개국 초기 아르헨티나의 이민정책 또한 폐쇄적이었는데 이탈리아, 스페인, 시리아, 독일 같은 유럽, 중동 국가들에서 오는 백인 이민자들만 이민을 받을 정도로 굉장히 악명 높아서, 백인들 이외에도 일본, 중국, 한국 등 동아시아 국가의 황인종도 이민을 받아들였던 다른 남미 국가들인 브라질과 페루,[23] 먼 북미 지역의 미국, 캐나다, 멕시코[24] 등 여타 남/북아메리카 국가들과 다르게 황인 등 비백인계 민족의 이민을 법적으로 불허했었다.[25]
그러다가 후안 페론이 집권한 이후에는 사정이 좀 나아진다. 후안 페론은 아버지가 백인이고 어머니가 원주민-백인 혼혈인 메스티소였는데, 후안 페론은 집권 이후 자국내 남미 원주민들과 혼혈인의 권리향상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렇게 아르헨티나의 원주민 차별 및 탄압은 역사적으로 심각해서 후안 페론이 아니었으면 원주민들이 멸족했을 것이라는 얘기도 나올 정도였다. 오늘날 아르헨티나에서 원주민은 전체 인구 4,500만 명 가운데서 0.5%~2.5%[26] 정도의 소수인데, 백인과 혼혈된 메스티소까지 합해도 여전히 소수인건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원주민 문화에 대한 재조명과 격동의 현대사를 거치며 원주민들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지기는 했지만 대다수의 원주민들은 서북부와 남부 일대에서 극빈층으로 생활하고 있다.[27]
또한 2017년에는 원주민 인권운동가가 실종된 후 익사체로 발견되는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했다. #1 #2
[1] 그러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도 다른 주의 대해서는 주권을 존중해야 했다. 사실상 국가연합과 비슷한 구조.[2] 이렇게 된 이유는 로사스가 신념에 따라 연방주의자에 가입한게 아니라 정치적 상황에 따라서 연방주의자로 가입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원래 중앙집권주의자였으며 여러 번 편을 바꾼 적도 있다.[3] 실제로 로사스는 왕처럼 행동했다. 자신을 3인칭으로 표현한다던지, 세습 독재체제를 마련해 놓는다던지...[4] 로사스는 아르헨티나 역사상 가장 논란이 많은 인물 중 하나로 중앙집권을 통해 미래 아르헨티나의 틀을 다졌다는 의견과 잔혹한 독재자로서 수많은 사람을 처형한 살인광이라는 평가가 엇갈린다. 그러나 그의 공을 기려 아르헨티나의 20페소 지폐에는 그의 얼굴이 인쇄되어 있다.[5] 현행 아르헨티나 헌법의 기초가 된 헌법. 이후 여러 번 개정이 이루어졌으나 틀은 그 때와 똑같다.[6] 물론 이 이면에는 원주민에 대한 잔혹한 절멸 정책이 있었다. 또한 아르헨티나의 경우 미국과 달리 이렇게 정복된 땅들이 소농들이 아니라 대단위로 엘리트층이나 자본가들에게 팔려나가 지주의 소유가 되었고, 결과적으로 이후 아르헨티나로 유입된 이민자들은 거의 대도시 지역에 집중되었다.[7] 미국보다 빠르다. 라인 A로서 리바다비아 대로를 따라 운행하던 엄청난 골동품 지하철이었으나 현재는 안전문제로 운행하지 않는다.[8] 여성 포함. 당시 아르헨티나 사회가 굉장히 선진적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9] 여기서는 '중남미에서는'이라는 단서를 붙여야 한다. 1915년 아르헨티나의 인구는 800만 정도였고, 1924년에 1천만, 1959년에야 2천만에 도달하게 된다. 1910년대 시점 열강이라고 할 만한 국가 가운데 가장 인구가 적었던 프랑스의 본토 인구가 1915년 기준 약 3340만이었고, 벨기에나 네덜란드의 인구가 아르헨티나의 인구와 비슷했음을 감안하면, 1910년대 아르헨티나의 국력은 세계적으로는 벨기에, 네덜란드 정도의 수준이었다. 191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아르헨티나가 중남미에서는 브라질, 멕시코를 넘어서는 경제 대국이었지만, 이때도 전체 GDP로 봤을 때 압도적인 격차가 나지는 않았다.[10] 물론 이 당시 아르헨티나 말고도 칠레나 브라질, 페루, 우루과이 등 다른 남미 국가들로 이민가는 유럽인 이민자들도 있었다.[11] 아르헨티나 수출은 심지어 1960년대까지도 농산품이 90% 이상을 차지했다.[12] 이렇게 이중적 행태를 띈 이유는 아르헨티나 정부인사들인 군부독재자들이 파시즘에 대해서 우호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감히 미국의 불편한 심기를 넘어 전쟁에 적국으로 참여하기는 거부했고, 2차대전 막바지에 연합국으로 참여했다.[13] 가톨릭에서는 이혼을 종교적으로 금지한다.[14] 아르헨티나 상품(주로 농축산품)의 주요 구매처 중 하나인 소련이 석유 파동으로 경제적으로 호황을 맞았던 것도 있기는 하다.[15]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고객들이 은행에 몰려들자 경비원이 고객들에게 총을 쏘기도 할 정도였다.[16] 아르헨티나에서 여러차례 경제위기를 겪은 여파로 아르헨티나에선 달러를 소유하고 있는 가정이 많으나 국가에서 보유하고 있는 외화는 반복된 경제위기의 영향으로 경제 규모에 비해 그리 많지 않고, 거기에다가 페르난데스가 석유산업 국유화정책을 펼치는 과정에서 삐그덕거리는 바람에 안 그래도 경제규모에 비해 적은 외환보유고가 줄어들었다.[17] 그래서 이런 아르헨티나의 디폴트를 기술적 디폴트라고 하기도 한다.[18] 브라질은 룰라 시절을 거치면서 세계 수 위권의 경제강국으로 부상했고 우루과이와 볼리비아도 2000년대 중반 이후에 4-5%대의 꾸준한 경제성장을 기록하고 있으며 칠레도 꾸준한 성장으로 남미에서 가장 높은(1인당으로 따지면) 경제수준을 기록하고 있다.[19] 대공황 직후 같은 시기 아르헨티나와 같이 경제적으로 말아먹었던 브라질은 정부의 주도로 기계 공업 및 제조업 육성 등 산업화에 어느 정도 성공하여 경제적으로 재기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20] 아르헨티나 뿐만 아니라 칠레, 우루과이 등 남미의 백인계 국가들은 대체적으로 아메리카 원주민들에 대한 탄압이 여타 중미, 남미의 국가들보다 심했다. 다만 칠레는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와 다르게 백인과 아메리카 원주민의 혼혈인인 메스티소의 비중도 꽤 높은 편이다.[21] 이는 옆나라인 우루과이와 칠레도 비슷했다. 그나마 칠레와 아르헨티나는 영토 면적이라도 넓어 원주민들이 극소수나마 남아있는 편이지만, 영토면적이 적었던 우루과이는 좁은 영내에서 백인들의 토벌에 원주민들이 버티지 못하고 멸족되어버렸다.[22] 아르헨티나의 오나 족 학살은 굉장히 잔인했지만, 워낙 지구촌 구석에 있다보니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티에라델푸에고 섬의 영국인 목장주들은 섬의 원주민인 오나 족들이 가축떼를 방목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여겨서 일부러 아르헨티나와 칠레에서 백인 총잡이들을 불러들였는데, 오나 족 한 사람의 손이나 귀를 잘라오면 그에 따라 돈을 더 많이 주겠다고 원주민 살육을 대놓고 장려했다. 보너스를 받기 위해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백인 총잡이들은 오나 족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면서 그들의 신체를 잘라 앞다투어 영국인 목장주들한테 가져갔다. 이 잔인무도한 인간 사냥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15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출처: <지도에서 사라진 종교들>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2016년 8월 10일 출간/ 295~299쪽.[23] 페루는 일본계 이민자 출신인 알베르토 후지모리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기까지 했다.[24] 아메리카 원주민과 스페인계 백인의 혼혈인 메스티소가 다수이지만 개국 초기에 이민 정책을 취해 유럽과 중동 국가들에서 오는 백인 이민자들도 수용했다. 일례로 멕시코의 영화배우인 셀마 헤이엑과 안소니 퀸 모두 중동/유럽계 백인 이민자 출신이다.[25] 결국 백인 이민만을 받는 이민정책에 한계가 있었던 나머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냉전 시기에 백인 이민만을 허용하는 이민법을 개정해 페루, 브라질, 캐나다, 미국처럼 일본, 한국, 중국, 대만 등 아시아 국가의 황인 이민자들을 받으려고 했었지만 이 법이 개정되었을 당시 아르헨티나는 이미 국가경제의 전성기가 지나고 쇠퇴하여 망한 뒤였다(...)[26] 혈통뿐만 아니라 정체성 등도 원주민 여부 판단에 고려되기 때문에 이 비율은 유동적이다.[27] 사실 이것은 아메리카 국가들 전반이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