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메다 아야카

 


'''NMB48 팀 M 역대 부캡틴'''
초대 부캡틴

'''우메다 아야카
(2014.02~2016.03)'''

이지리 안나

'''우메다 아야카'''
'''梅田 彩佳 | Umeda Ayaka'''
'''본명'''
'''(梅田 彩佳(うめだあやか (우메다 아야카, Umeda Ayaka)'''
'''출생'''
1989년 1월 4일 (35세)[1]
후쿠오카 현 [image] 키타큐슈 시[image]
'''국적'''
[image] 일본
'''신체'''
151.5cm | B78cm | W59cm | H82cm A형 | 왼손잡이
'''직업'''
배우, 교사, 라디오
'''경력'''
'''AKB48 2기생'''
AKB48 팀 K (2006~2012)
AKB48 팀 B (2012~2014)
NMB48팀 BⅡ (2014~2016)
DiVA (2010~2014)
'''애칭'''
'''우메짱''', 매실[2]
'''소속사'''
TRUSTAR
'''링크'''
공식블로그 Dance Studio UMEDA
공식팬클럽
'''SNS'''
인스타그램 트위터 755
1. 개요
2. 캐치프레이즈
3. 캐릭터 및 성격
3.1. 이상한 사람(?)
4. 대인관계
5. 활동
5.1. 데뷔 전
5.1.1. 시련의 매실
5.2. AKB48 활동
5.2.1. 이적!?
5.3. NMB48 활동
5.4. 졸업 이후
6. 참여곡
6.1. 선발 참여곡

[clearfix]

1. 개요


[image]
일본의 걸그룹 NMB48AKB48의 전 멤버.
'''원조 무푸쉬의 아이콘'''이며, 그런 참담한 현실을 뚫고 기적같이 선발까지 뚫어버린 역전 드라마의 주인공.
도쿄돔 콘서트'에서 '''신내각이 발표되어, 팀 B의 캡틴을 맡기도 했으며 후에 '''AKB48그룹 대조각축제에서 캡틴직은 쿠라모치 아스카에게 넘겨주고 NMB48로 완전이적하게 되어 NMB48 팀 BⅡ 부캡틴'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팀 B2의 캡틴인 카미에다 에미카가 학업을 이유로 활동을 일시적으로 중단했던 시절에는 카미에다 에미카를 대신하여 캡틴 대행을 맡기도 했다.
2018년에 북해도 예술고등학교 요코하마 위성 캠퍼스에서 댄스 & 보컬 코스 교사로 취임했다.

2. 캐치프레이즈


'''후쿠오카 출신, 우~메!! 우메짱인 우메다 아야카 입니다!!'''

'''福岡県出身、う〜めっ!梅ちゃんこと梅田彩佳です!!'''

2015년 캐치프레이즈를 바꾸었다.

'''후쿠오카 현 출신 1989년 1월 3일 26세, 염소자리의 A형! 하나~둘~ '(그렇게 안보여~) 우메다 아야카입니다!!'''

'''福岡県出身、1989年1月3日26歳, 山羊座のA型! せえの~(見えない~)梅田彩佳です!!'''



3. 캐릭터 및 성격



3.1. 이상한 사람(?)


어떤 일을 하면 상당히 승부욕이 강해지고 몰두하는 타입. 하지만 평소에는 천연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들어보면 어딘가 이상한(...) 사람인 듯 하다.''' 지하철을 기다리면서 진지하게 춤연습을 해서 옆에 있던 동료를 식겁하게 만들거나 도시락을 먹다가 반찬을 집어들고 대화를 시도하거나[3] 악수회에 온 한국여성팬에게 생글생글 웃으며 한국어로 '''"뽀뽀 해주세요"''' 드립을 쳐서 당황시키거나 한다고. 게다가 자타공인 지독한 시스콤이다. 고향에 있는 17살 여동생을 무척 아껴서 비슷한 또래의 팀K 후지에 레이나를 보며 여동생에 대한 그리움을 달랜다는데... 실제로 AKB48이 출연한 케이블 TV의 콩트 프로그램인 미묘, 뭘 그렇게 까지.......에서는 사이비 강사나 사이비 미용사, 수상한 가게 종업원, 바람잡이 역을 종종 맡았는데 이게 참 기막히게 잘 어울린다(...). 직접 몸으로 웃기는 데 능하고 연기력이 좋은 듯.
본인이 한국에서 먹힐 거라고 굳게 믿고 있다. 길가다가 종종 한국인으로 오해당하는 일이 있는 모양. 이런 이유에서인지 한국에 가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는데 2012년 1월 24일 촬영차 DiVA 멤버들과 함께 한국에 첫방문을 했다.[4][5]
우메다는 모 이벤트 당시 한국의 언론매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꺅 소리를 지르며 한국이 좋다는 말을 술술 늘어놓고 나중에는 ''''한국인이 되고싶다''''라고까지 말을 한 적이 있다.
어른스러운 얼굴과 다르게 몸매가 상당히 빈약한데 컴플렉스가 작은 가슴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 하지만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는 듯...개그로 승화시킨다.
[image]
팬들이 이런 짤방을 보여주자
[image]
'''실사로 찍어서 인증해주었다.'''
남바 이적 이후에는, 볼륨감 있는 몸매로 유명한 남바 멤버들 사이에서 학살(...)을 당하는게 아니냐는 농담이 돌았는데, 본인이 구플에서 그걸 '''네타로 써먹기 시작했다.'''
이적 후 첫 싱글인 '이비자 걸' PV가 공개된 직후에는

@AyakaUmeda: 誰や、イビサガールのMVみて、梅ちゃんのおぱいどこいってるひと。ほんとにないんだ。っていってるひと。
누구야, 이비자걸 MV보고, 우메쨩 슴가 어디있냐고 하는 사람. 정말 없구만.하는 사람.

이런 메시지를 쓰더니, 6월 20일 엠스테 첫방 직후에는

@AyakaUmeda: 誰や 公開処刑いうたの。笑(*_*)
누구야 공개처형이라고 하는 사람. ㅋㅋ(*_*)

이라며 몸소 자학드립을 날려주셨다...
참고로 극장 공연에서도
[image]
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곤 한다.
게닌3에서도 자신의 가슴을 네타로 써먹었다. 방송에서 할 말이 없을 때 가슴이 작다는 얘기를 하면 주위에서 좋아한다고. 그런데 미루키가 가슴을 네타로 써먹는 게 부럽다고 하자 잠깐 표정이 안 좋아졌다.
2016년 본인 생탄제에서의 코멘트를 들어봐도, NMB로 이적한게 경력에 나쁘지 않게 작용한 것 같다.

4. 대인관계


AKB 초창기에는 최대의 라이벌은 오오시마 유코. 서로 댄스에 대한 경쟁심이 넘쳐서 항상 댄스레슨에서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친한 멤버는 출신지가 같은 팀K의 노나카 미사토. 거의 매일 통화를 하는 사이로 틈만 나면 쇼핑을 하러 가거나 도쿄타워에 야경을 보러가거나 수족관에 가거나 바다에 가거나...여튼 웬만한 커플들의 데이트 코스는 다 돌고다닌다. 팀B의 사토 아미나와도 사적으로 친한 모양. 팀K의 아키모토 사야카, 오오시마 유코와 잠시 동거한 적도 있다.
NMB48 팀 N의 코타니 리호를 닮았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서로 '자매 같다'라고까지 말했으며 리포포는 '언니'라고 한다. 자매 그룹과의 이벤트 등에서 만날 때마다 서로 투샷을 촬영하는 사이이다.
같은 팀의 타케우치 미유를 엄청 좋아한다고 한다. 여동생과 같은 나이라서라는 듯. 팀B의 멤버 일부가 질투까지 한다고.
5회 총선거에서 문제가 생겼다. 28위에 올라서 기뻐하는 야마다 나나 뒤에서 거북한 표정을 지으며 '방해되잖아'(邪魔, 쟈마), '시끄러워'(うるさい, 우루사이)라고 대놓고 말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야마다는 우메다에게 '죄송합니다'(ごめんなさい, 고멘나사이)이라고 답하는 모습도 카메라에 잡혔다. 이에 대해 우메다의 팬들은 '邪魔'가 아니라 '감사합니다'(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아리가토우고자이마스)의 뒷부분 '…ざいます'(...자이마스)를 잘못 들은 것이라고 반박했다. 일단 사과의 경우는 정황상 야마다가 길을 막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나온 사과라고 보는 편이 맞다고 보인다.

참고로 이 영상은 마츠무라 카오리가 자신의 구글 플러스에 올리는 '1코메다'의 일부이다.

5. 활동



5.1. 데뷔 전


뱃속에 있을 때 심장이 2번이나 멈췄었다고 한다. 무척이나 어렵게 세상에 태어났다.
주유소를 하는 집의 딸로 중학교 2학년때 DA PUMP의 춤을보고 멋지다고 생각해서 키타큐슈 니시고쿠라에 있는 댄스 스튜디오에 다녔다. 2년 정도 다녔는데 그 뒤로는 독학으로 춤을 공부했다고 한다. 후에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로는 댄스부에 들어가 대회에도 출전했다고 한다.
MAX의 NANA의 라이브를 보고 연예계를 동경하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오디션을 보기 시작했는데 거의 50사 정도 소속사 오디션을 봐서 수없이 떨어졌다. 모닝구 무스메 제7기 오디션에서 2차까지 오른적이 있는데 그 당시의 모습은 숏컷으로 지금의 여성스러운 모습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보이쉬하다.[6]
결국 'AKB48 제2기생 오디션'에 합격해서 AKB48의 멤버가 되었다.
AKB48에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한건 역시 극장이 있다는 점에서 매일 노래하고 춤출 수 있다는 것은 엄청 좋다고 생각해서 응시하게 되었다고 한다.

5.1.1. 시련의 매실


AKB48 가입당시 우메다는 후쿠오카의 댄스스쿨에서 센터를 맡고있어 상당히 촉망받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후쿠오카에서 상경 해 온 우메다에게 기다리고 것은 '''위에는 위가있다'''라는 현실이었다고 한다. 아무리 열심히 춤을 춰도, 따라갈 수 없는 아이가 있었다. 또한 메이크업과 헤어스타일을 아무리 연구해도 자신보다 귀여운 아이, 예쁜 아이가 눈앞에 있었다.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누군가보다 '못하다'는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한다. '왜 내가 뒷줄이지? 왜 어른들은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거지?'라며 자신을 직시하지 않고 주위만 탓하고 있었다고. 그리고 멤버들에도 마음을 닫았다고 한다. '같은 팀이지만 라이벌과는 사이좋게 될 수 없어!'라면서. 원래 아티스트 지향이었던 우메다는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갖는 신비적인 면을 동경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팬이 되어준 사람들 에게도 '저를 응원해주세요'라고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되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단지 매일 오로지 체력이 붙어 있는 한 춤추고 있었다. 몸이 비명을 질러도 상관없이, '좀 더 춤추면 더 위에 갈 수 있을거야'. '인정 받을 수 있을거야'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루라도 쉬면 현재 위치가 떨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발에 통증을 느낄 때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로는 '꿈을 쫓는 여자의 고집'이었다고 한다.
당연히 다리는 엄청난 혹사를 견뎌내지 못해서 말썽을 일으켰고 블로그에 다리를 다쳤다고 공표하고 결국 공연을 쉬게 되었다. 뒤에 알려진 사실은 단순히 다친수준이 아니라 왼발 정강이뼈에 피로골절이 일어났었다고 한다. 즉, 혹사로 뼈가 부러졌었던 것. 우메다는 다리가 낫지도 않았는데 공연 출연을 강력히 희망했다.
당시 토가사키 토모노부 지배인이 간곡히 공연을 당분간 쉬고 치료에 전념할 것을 설득했으나 우메다는 휴식 한달도 안되어서 공연 출연을 강행했다. 당연히 다리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고, 결국 부상이 심각해져서 치료때문에 AKB48의 활동까지 그만둬야 했다.
그 다음은 친정 후쿠오카 현에 돌아와 고등학교에 복학했고 재활을 하면서 현지 TV프로그램 리포터 등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다른 멤버들과의 차이가 벌어져 가.....'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그 일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어째서 내가 이 꼴이지!' 마침 AKB도 서서히 TV에 나오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방에서 다친 왼발을 문지르고 있는데 TV를 켜면 AKB48이 우메다가 모르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때의 절망감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위에는 위가 있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인정 받지 못한 자신. 독선으로 자멸해 버린 몸도, 마음도 약한 자신. 나는 정말 나 자신이 싫어.'라고 생각했었고 완전히 실의의 구렁텅이에 빠졌었다.
거기에서 구해 준 것은 후쿠오카의 가족이었다고 한다. 매일 우메다의 푸념을 우메다의 어머니는 가만히 들어주셨고, '살아 있는 한 어떻게든 될꺼야'라고 우메다의 아버지는 격려해주 었다. 그런 가족과 지내면서 우메다는 자기 약점을 되돌아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처음 맛 본 쓴 것이었지만, 시간을 들여 되돌아 보면서 부드러운 단맛이 되었다고 한다. '약한 것도 좋을지 몰라....' 그런 자신을 좋아하게 된다면, 이번에야 말로 바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어느덧 우메다는 발 부상을 고치는 것 뿐만 아니라 약한 자신을 좋아하게 된다는 것을 재활의 목표로 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현지 프로그램 리포터를 하게되면서 만나게된 사람이 아리요시 히로이키. 당시 우메다 아야카가 현지 리포터를 할 시기는 아리요시도 사루간세키 이후 인기가 급하게 식어 이일 저일 가리지 않고 하던 시기. 이 때 만나서 서로 힘든것을 많이 털어놓고 얘기하면서 친해졌다. 아리요시도 AKB공화국을 진행하면서 모든 멤버들한텐 독설을 뿜어내는데, 우메다한테 만큼은 절대 안그렇다. 보통 멤버들이 말을 더듬으면 못한다고 엄청 디스하는데 오히려 잘한다 잘한다 하고 우쭈쭈해준다. 이게 서로 힘들때 후쿠오카방송에서 만났던 인연 덕분.
후에 재활을 끝나고 AKB48에 성공적으로 복귀 준비를 하게 되었는데 복귀에 대한 압박감으로 K4를 연습하던 당시 무척 예민하고 날카로운 상태가 지속되었는데 이런 우메다의 차가운 태도에도 참을성 있게 말을 걸어준 사람이 바로 당시 같은 팀K였던 카사이 토모미였고 그래서 우메다는 카사이를 상당히 좋아한다. 후에 K5의 카사이 생탄제에 일 때문에 참석하지 못한 우메다 아야카가 음성으로 당시의 일에 대해 고마웠다는 말을 전했다.

5.2. AKB48 활동


2006년 2월 26일 '제2기 AKB48 추가 멤버 오디션'에 합격하지만, 다리부상으로 2006년 12월부터 2008년 5월의 K4 공연까지 공식 활동을 하지 못했다.
복귀 후 2009년부터 2010년까지 약 2년간 도쿄타워 이미지걸로 활동했는데[7] 활동 내내 도쿄타워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나타내며 무척 열심히 활동했다. 이 때 야경 감상사 검정 3급을 취득하기도 했다. 일이 없는 날에도 도쿄타워를 찾아 전망대를 가득 메운 커플들의 모습을 둘러보며 흡족해 했다고(...)
사실 이당시에 지방조기 때문에 형편이 정말 안습했던 모양이다. 아리요시 히로이키가 '아리요시 AKB공화국'에서 밝혔는데, 자신이 우메다가 워낙 불쌍해서(...) 식당에서 카레를 사주었다고 한다. 아리요시는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사주는 성격이 아니다. [8] [9][10] 본인도 '지옥에서 기어올라왔다.'라고 언급 할 정도, 2012년 4회 총선거 16위 선발달성후 '아리요시 AKB공화국'에서 아리요시 앞으로 금의환향하였다.
2010년 이뤄진 팀 셔플에서 변동없이 팀K에 남은 5명의 멤버 중 하나다.[11] 멤버별 캐릭터가 확고히 정해져있던 기존의 팀K에서 오랜 공백을 가졌던 우메짱은 상대적으로 캐릭터가 약할 수 밖에 없었는데 셔플 이후 어수선한 팀에서 후배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본인의 캐릭터를 새롭게 정립한다. 팀에 남은 구팀K의 멤버들 중에서는 팀 셔플의 가장 큰 수혜자.
이에 힘입어, 2009년 1회 총선거에서는 권외였지만 2010년 2회 총선거에서는 32위를 차지하며 언더걸즈에 입성. 2011년 3회 총선거에서는 무려 10계단이 상승한 22위에 랭크되며 '''언더걸즈 센터'''를 차지했다. 후에 이 노래는 우메쨩의 대표곡이 된다. 21위인 타이틀곡 끝자리는 뮤직비디오에서도 몇 초밖에 안 나오고 무대에서도 구석에 위치하는데, 22위인 언더걸즈 센터는 언더걸즈의 곡과 뮤직비디오에서는 중심에 설 수 있다.[12] 당연히 얼굴을 알리기에는 언더걸즈 센터가 훨씬 좋다. 게다가 3회 총선거의 언더걸즈 곡인 '抱きしめちゃいけない'는 RIVER의 언더걸스 곡 '君のことが好きだから' 뺨치는 명곡이다.[13] 그리고 '君のことが好きだから' 센터였던 타카죠 아키는 이노래로 선발멤버로 급성장을 했다. 역시나 우메다 아야카도 언더걸스 센터로 인기가 점점 올라갔다!
같은해 열린 'AKB48 24th Single 선발 가위바위보 대회'에서는 베스트 16위에 오르며 약 3년 반만에 선발에 복귀했다. '''승리의 매실!!!'''
우메다 아야카가 왜 기적의 가까운 성장이냐면, 우메다 야아카는 '''푸쉬멤버가 아니다.''' AKB의 현재 30개가 넘는 싱글까지 나온 상황에서, 선발횟수는 '''단 4번'''. 会いたかった는 맨 초창기 지하돌시절이고, Baby! Baby! Baby!는 CD발매 싱글도 아니다.[14] 上からマリコ는 가위바위보로 뽑는 가위바위보 싱글이고, ギンガムチェック는 총선거 결과로 뽑는 후속싱글. 말그대로 '''푸쉬는 제로'''라고 해도 과연이 아니다. AKB48은 시스템상 푸쉬가 없으면 '''절대 뜨질 못한다'''. 당연히 '''미디어 노출''' 역시 많지 않다. 그리고 우메쨩은 89년생으로 나이도 많은 축에 속한다. 외모는 출중하지만 몸이...
그러나 우메쨩은 이 모든 것을 다 씹어드시고, 뛰어난 '퍼포먼스 실력'과, '좋은 악수회 대응', '독특한 캐릭터'등으로 벌써 데뷔 6년차이지만 뒤늦게 인기가 수직상승하고 있다. 악수회 매진율을 비롯해 많은 부분에서 동기멤버들을 제치며 앞으로 나서고 있다.
결국 '''2012년 제 4회 선발총선거에서는 16위로 선발에 진입하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우메쨩을 옆에서 지켜봐오던 팀 K멤버들은 폭풍눈물을 흘렸다. 사시하라 리노의 4위 랭크와 더불어 철밥통을 깨뜨린 '''용자의 모습'''이라는 평가. 그리고 언더걸스 센터로 인기가 급성장한 선발멤버 타카죠 아키를 다시 언더걸스로 밀어버렸다. 후에 오오시마 유코가 말하기를 우메쨩은 유코 옆자리에 있었는데 언더걸스(17~32위) 발표중에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면서 '''불리고 싶지 않아!! 제발 팀K라고 부르지 말아줘!!'''라고 계속내내 중얼거렸다고 한다.
수상소감 역시 감동의 쓰나미가 밀려왔다.

AKB48 팀K 우메다 아야카입니다. 올해도 이 무대에 서게 해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이 날이 오기까지 무척 두근거리고, 그게 악수회에서 전해졌는지 팬분께서 '우메짱, 팬을 믿으세요'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죄송한 마음과 감사한 마음이 엄청 차올라서, 이 표수만큼, 저를 믿어주고 있는 사람들이 있구나 생각하니 정말로 기쁩니다.

앞으로도 이 연예계에서 열심히 해나가는 동안, 기쁜 일도 괴로운 일도 많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설령 괴로운 일이 100% 중에 99% 있다고 하더라도, 단 1% 기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기쁜 일이 있다면 저는 꼭 앞을 보고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제 발자국을 바라봐주세요. 정말로 감사합니다!

하지만 지독한 비푸쉬 멤버의 한계였던걸까. 당당히 16위 안에 들었음에도 음악방송을 제외한 콘서트 스테이지에서는 본인의 선발곡인 <ギンガムチェック> 무대마저 오르지 못하고 있다. 눈물겨운 노력으로 따낸 선발 자리를 다른 멤버가 채우고 있는 모습을 보는 우메짱의 심정은...
2012년 8월 24일 충공깽도쿄돔 신내각에서 '''팀 B로 이적'''하는 것이 발표. 카시와기 유키를 대신해 '''팀 B의 신캡틴'''으로 임명되었다.
2012년 9월 18일 'AKB48 29th Single 선발 가위바위보 대회'에서 선발진입에 성공했다. 이긴상대는 무려 코지마 하루나. 코지마는 당시 전 싱글 선발 대기록을 세우고 있었으므로 무도관의 관객은 모두 코지마의 이름을 외쳤다. 하지만 결과는 우메쨩의 승리였고 코지하루의 대기록은 깨져버렸다. 하필이면 코지하루를 만나서 불쌍한 우메쨩. 선발에 진입했는데도 마음껏 기뻐하지도 못하고...
도쿄돔 신내각 이후로 각 팀 캡틴들 중 '''극장공연 출석률이 가장 높은 멤버'''다.[15]
2013년 4월 21일 우메짱이 Perfumeねぇ 댄스에 도전한 ひとりパフューム(혼자서 퍼퓸, 1:46부터) 동영상이 유투브에 올라왔는데 3일 만에 재생회수 '''100만회'''를 넘었다.
2013년 6월 8일 AKB48 제5회 총선거에 36,828표로 19위를 차지해서 언더걸스에 진입했다. 정말 아쉬운 순위인데 뒷심이 부족해서 선발의 문턱에서 좌절하고 말았다.

선거 슬로건에서 "99% 선발이 무리라고 해도 1%의 가능성이 있으면 열심히 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아슬아슬한 곳까지 여러분이 해주셔서 여기까지 왔어요.

앞으로도 무리라고 해도 바보취급 받아도 저는 1%의 가능성이 있다면 열심히 할 거예요. 그러니까 앞으로도 이끌어 주세요!! 감사합니다!!

AKB48에서 선발멤버와 언더걸스는 혜택 차이가 정말 많이 난다. 우메쨩은 '''선발멤버가 되어서 보는 경치부터가 다르다'''라고 방송에서 언급했다. 우메쨩의 입장에서 'AKB48의 선발'이라는 것은 닿을 것 같지만 닿지 않는, 거의 희망고문 수준이기 때문에 팬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안타까울 따름.

5.2.1. 이적!?


그렇게 활동하던 우메다에게 2014년 2월 24일 'AKB48그룹 대조각축제 ~시대는 변한다. 하지만, 우리는 앞밖에 보지않아!~'에서 NMB48 팀 BⅡ로의 이적 및 부캡틴을 맡는 것이 발표되었다. 그런데 이 이동에 대해서는 말이 많다. 그 이유는 48그룹 통틀어 선배가 3명밖에 없는 최고참을 자매그룹으로 겸임도 아니고 완전이적, 그것도 캡틴에서 부캡틴으로 보냈기 때문이다.[16]
그 내용을 살펴보면 오리멘인 1기생 3명을 제외하면 최고참 멤버이자 AKB의 암흑기를 견뎌낸 개국공신급 멤버이자 선발 경력도 있는 멤버인 우메다 아야카를, 아무런 이유 없이 '''NMB48 팀B2 부캡틴으로 좌천시켰다'''.
"우메다 아야카의 '''리더십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최적의 자리에 배치했다.'''", "정말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뭘해도 시원찮은 '''운영진이 발로 짰다.'''", "다른 멤버가 들어가야 하는데 '''잘못 쓴 것이고, 곧 수정본이 나올 것이다.'''", "AKB48에서는 더이상 푸쉬할 방법이 없으니 '''그나마 상황이 좋은 NMB48으로 보냈다'''" 등 여러 커뮤니티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좌천의 입장을 따라가보면 이미 몇몇 팬들은 이 조각은 사실상 강등이라면서, 암흑기를 떠받히고 지탱한 우메다에게 '''졸업을 요구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라고 말하면서 심각한 분노를 나타냈다. 그것도 그럴 것이 팀B2는 모든 멤버가 자기보다 까마득한 후배이며, 심지어 캡틴도 아니고 부캡틴, 즉 자신보다 위에 캡틴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NMB48는 운영진의 주체가 요시모토 흥업, 즉 '''기존 운영진과 다른 개념으로 움직이는 자매그룹이다.''' 그리고 우메는 요시모토도 아니다. 따라서 NMB로 갔다고 해도 푸시를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 못된다.
반대로 최적의 자리라는 입장은 먼저 B2의 전 상황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애초에 B2의 가장 큰 문제는 '''무관심'''이었다. B2의 리더 카미에다 에미카의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그들은 그 무관심을 깨기 위해 그 옛날 팀K가 했었던, 아니 그 옛날 AKB48 멤버들이 했왔었던 전단지 나누어주기, 여러 기획들 시행하기 등 관심을 얻기 위해 '''정말로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노력을 해왔던 팀이다.'''[17] 이번 조각으로 B2의 옛날 멤버들은 상당수 이동했지만[18], 위의 입장에서 그들이 남긴 당면과제인 '''B2를 좋아하는 오타를 만들어 낸다.'''를 실행시킬 최적의 멤버는 역시 이러한 무관심 속에서도 기적의 성장을 보여준 우메다 아야카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만 위와 같이 아무 생각 없이 옮긴 것일 수도 있고 여러 의견들이 산재하고 있으니 조금 더 지켜보아야 할 듯 하다.[19]
NMB48로 완전 이적한 2014년 부터 개인일이 많아지면서 NMB48 활동과 겹치긴했다. 하지만 개인일과 NMB 활동을 잘 양립하면서 AKB선발 출신 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상냥하고 배려심 넘치는 우메짱은 '''"우메다 선배, 우메다상이 아니라 우메짱이라고 불러줘"''' 라면서 팀BⅡ의 후배들에게 먼저 다가가 주었다.
실제로 이러한 노력이 통해서 팀BⅡ 멤버들은 빠르게 우메짱과 친해졌고, MC나 극장공연에서도 우메짱의 역할을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그러다가 2015년 4월 9일 카미에다 에미카가 학업을 이유로 임시휴업하면서 사실상 팀 B2를 캡틴으로서 이끌게 된다. 생탄제를 비롯한 극장공연을 보면 B2 멤버들 사이에서 상당히 신망이 높은편이다.
오랫동안 AKB48 댄스 멤버로써 유명했던지라, 안무에 있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완벽주의자 였기에 이러한 부분도 NMB의 후배들에게 잘 입력해주었다. 그리고 2016년 3월31일 모든 활동을 마치고 NMB48 멤버로써 졸업하게 되었다. 이 날 졸업 공연에서 많은 NMB 멤버들이 그녀를 위해 울어주었다. 비록 짧은 2년이란 시간이었지만 그녀는 NMB48 멤버로써 동료들에게 인정 받은 것이다.
미야자와 사에, 코바야시 카나 와 함께 거짓말 처럼 2기생은 이 날 모두 졸업하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2006년 4월1일, 만우절. 그녀들이 데뷔하기 딱 10년에 하루가 모자란 날이었다.
결과적으로 우메다 아야카의 NMB48 이적은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고 봐야한다. AKB48에 있었으면 차세대의 흐름에 밀려서 선발 탈락햇을 것이지만 NMB48에선 악곡에 계속 나올 수 있었다. 무엇보다 NMB로 이적하면서 보통으로 졸업하면 얻을 수 없는 다양한 경험을 했다. 총선거 순위는 경력 때문이라도 점점 떨어졌지만, AKB에서 가지고 온 노하우를 NMB멤버들에게 흡수시켜주는 등 이 이적은 매우 성공인 이적이었다고 평가 할 수 있다.

5.3. NMB48 활동


2014년 6월 7일 AKB48 제6회 총선거에서는 20,658표로 35위를 차지하며 넥스트걸즈로 강등되었다. 저번 총선거에 비해 15,000표 넘게 줄어들며 아쉬움을 남겼다.

2014년 6월 20일 엠스테에서 첫 공개 된 イビサガール 무대에서는 2열 정 가운데, 일명 '''히든 센터'''라 불리는 포지션으로 등장했다.
이비사걸 싱글이 유키링-사야네-미루키-바바 4인 프론트 체제이다 보니, 사야네와 미루키 사이에 있는 우메다가 계속해서 카메라에 잡힌다.[20] '''본점에서는 꿈도 못 꿔 볼 포지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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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안무 구성상 도입부에서는 2열이 맨 앞으로 나와있기 때문에 인트로 안무에서는 '''앞줄센터다!''' 드디어 대우를 받는 거냐며 매실오타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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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는 모두의 우려와는 달리 완벽하게 NMB48에 적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선발멤버로 뽑히는 건 물론이고 키노시타 하루나등 다른 멤버들과 친하게 지내고 극장공연 MC에서도 날아다니는 등 완벽하게 현지화(?)에 성공했다. 게다가 에케비 사단 내에서도 거의 최고참임에도 불구하고 남바에 간 이후로는 오히려 점점 회춘하는 모습을 보여 일각에서는 '''팀B2의 막내 1999년생 아야카쨩'''이라는 드립도 나오는 중
2014년 10월 21일 미야모토 아몬의 제작 뮤지컬 'The Wiz 오즈의 마법사' 에 타노 유카와 더블캐스팅 되었다.
2015년 6월 6일 AKB48 제7회 총선거에서는 17,019표로 56위를 차지하며 퓨처걸즈로 강등되었다. 표수가 떨어질만큼 떨어졌다고 생각되는 작년 총선거 표수보다도 3,600여표 가량 더 떨어져 나갔다.
2016년 1월 7일, 자신의 생탄제에서 "올해가 마지막 생탄제"라고 선언해서 사실상 연내 졸업을 발표했다. 발표 원문은 다음과 같다.

「えーと、今年の生誕祭が私はたぶん最後になると思います。でも卒業しても私はずーっとこれからも頑張り続けます。それを皆さんとこれからもずっと一緒に見ていただければ嬉しいなと思います。最後の曲も最後まで楽しんで、皆さん帰ってください」

2016년 1월 23일, AKB48그룹 리퀘스트 아워에서 51위에 오른 본인의 센터곡 抱きしめちゃいけない를 시작하기 전에 공식적으로 졸업을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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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20일 NMB48 극장에서 졸업 공연을 가졌으며, 2016년 3월 31일 NMB48의 Zepp 투어 마지막 공연을 끝으로 NMB48을 졸업했다. 같은 날 미야자와 사에코바야시 카나도 각각 SKE48, AKB48 극장에서 졸업 공연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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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후에는 '''뮤지컬 배우''', '''멀티 탤런트''', '''배우''' 등에 도전할 예정이다.

5.4. 졸업 이후


2016년 4월 1일, AKB48 2기생 데뷔 10주년 기념 공연에 출연하였다.
2017년 7월 2일, AKB48 팀 서프라이즈 3번째 셋리인 誇りの丘 공연 곡들 중 'ラスベガスで結婚しよう(라스베이거스에서 결혼한다)' 안무를 직접 짰다는게 알려졌다.
2017년 8월 31일에 오리콘 뉴스와 공동으로 유투브 채널을 개설했다.
졸업 후 드라마 촬영, 라디오, 교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 중이다.

6. 참여곡



6.1. 선발 참여곡


'''NMB48'''
'''NO'''
'''싱글명'''
'''발매일'''
D
イビサガール
2014년 6월 21일
10th
らしくない
2014년 11월 5일
11th
Don't look back!
2015년 3월 31일
12th
ドリアン少年
2015년 7월 15일
13th
Must be now
2015년 10월 7일
'''AKB48'''
'''NO'''
'''싱글명'''
'''발매일'''
1st
会いたかった
2006년 10월 25일
9th
Baby! Baby! Baby!
2008년 6월 13일
24th
上からマリコ
2011년 12월 7일
27th
ギンガムチェック
2012년 8월 29일
29th
永遠プレッシャー
2012년 12월 5일

[1] 일본 기준 빠른 1989년생으로, 학교는 1988년생과 재학하였다. 참고로 쇼와 시대는 1989년 1월 7일로 일주일밖에 안 되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헤이세이 원년생이 아닌 쇼와 64년생이다.[2] 한국 한정. 일본어로 우메(梅)가 매실을 뜻하기 때문.[3] 멤버들의 증언에 의하면 병적으로 혼잣말이 많다고. 요즘은 고쳤다고 한다.[4] 하지만 팬들은 대부분 미야자와 사에에게 달려들었다. 매실짱...[5] 실제로 쉬는 날에 혼자 한국 여행을 다녀오곤 한다.[6] 하로프로에 대한 미련이 남았는지 2010년 가을축제에서는 아는 사람만 아는 하로프로의 유닛 스마이레이지의 곡을 불렀다.[7] 나중에 팀B의 코바야시 카나가 이어받았다.[8] 사실 아리요시의 독설 + 표독스러운 모습은 '캐릭터'라는 설이 일반적이다. 실제로는 굉장히 친절한 사람이라고. 아무래도 본인이 최고의 위치(오와라이콤비 '사루간세키'로서 유라시아 횡단을 했고, 그 여세로 음반을 내서 더블밀리언)에서 바닥까지(소위 말하는 '잇파츠야'로 연예계 생활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캐릭터가 '독설' 캐릭터) 떨어 져 본 경험이 있어서. 실제로 게닌 후배들도 '실제로는 좋은 사람'이라고 한다.[9] 또한, 누구에게나 독설을 날리는 아리요시가 일본 방송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를 아리요시의 독설 방식에서 찾는 평론가도 있다. 적당히 성역없이 까는 듯 보여도, 정말로 상처가 될 부위는 건드리지 않는 독설. 보는 사람에게 카타르시스를 주지만 가장 예민한 부분을 빗겨나가는 독설.[10] 2013년 8월 19일 방영분에서도 우메다가 성격이 좋다고 무진장 편애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과거 어려운 시절 같이 방송했던 인연을 통한 개그요소로 생각하는게 일반적이겠지만 위 '대인관계'란 마지막 부분의 의혹을 잠재우기 위해 일부로 넣은 대목일지도 모른다.[11] 다른 4명은 오오시마 유코, 오노 에레나(졸업), 아키모토 사야카, 미야자와 사에[12] 그리고 PV가 참 특이한데 원신 원컷으로 이루어져있다. 뭔말이냐면 컷이 없고 카메라 한대로 쭉 촬영하는것. 그리고 센터부터 맨뒷줄까지 분량이 똑같다. 제일 불만없는 PV[13] 이 두 곡은 리퀘스트 아워가 개최될 때 타이틀곡보다도 높은 순위를 받는 곡들이다.[14] 당시 레이블사인 소니계열 '데프스타 레코드'와 분쟁이 생겨서 레이블 계약이 해지됐다. AKB48는 Baby! Baby! Baby!후에 킹 레코드로 옮겼는데 엄청난 대박이 터졌다. 나중에 소니레이블사장이 땅을 치고 울었다더라(...)[15] 특히 졸업 전까지의 팀A 캡틴 시노다 마리코는 거의 나오지 못했다. 팬들 사이에서 마리코가 극장 나오는 무대에 당첨되는건 로또맞은거라고. 그만큼 바빠서 그랬지만.[16] 동기인 미야자와 사에는 캡틴으로 이동했다. 자세한 건 항목 참조[17] 사실 이번에 리더가 카미에다로 유지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일 수 있다.[18] 사실 이번 조각에서 가장 수혜를 본 팀이 B2이기도 하다.[19] 2014년 2월 24일 발표 당일날 본인은 아무 코멘트도 하지 않았다.[20] HKT48에서 사시하라 리노가 차지하고 있는 포지션이 이것이다. 비록 2열이지만 사실상 센터나 다름없는 카메라 분량이 확보되는 위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