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언(삼국지)
劉焉
(? ~ 194년)
1. 개요
후한 말 익주에 자리잡은 군벌로 삼국지의 인물이다. 자는 군랑(君郞)이다. 형주 강하군 경릉현 사람으로 그의 조상들은 한장제 원화(84~87년)연간에 이곳으로 이주하였다.
유표와 더불어 한경제 사남 노공왕(魯恭王) 유여(劉餘)의 후손이다.
유언이 세운 익주 세력이 아들 유장을 거쳐 고스란히 유비에게 넘어갔고 거기에 기반해 촉한이 나온 만큼, 훗날 촉한의 선구자와 같은 인물이라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2. 생애
동한 말 군웅할거 시대 당시 군웅할거를 개막한 동탁, 원소, 원술, 공손찬, 여포, 손견, 마등, 조조, 유비와 같은 1세대 군벌에 속한다.
본래 익주에 오기 전에는 구경 대신 중 하나인 태상(太常)의 관직을 역임한 고관이었다. 그러나 유언은 중앙 정계가 혼란하자 이에 염증을 느끼고 익주자사로의 부임을 요청하여 그곳을 평정, 자신의 왕국으로 쌓아올렸다.
원래는 벽지인 교주를 맡으려 했는데, 이유인 즉슨 조정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그만큼 힘을 키우기 쉬울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동부(董扶)라는 사람에게 전해 들은 "낙양은 어지러워 질 것이고 익주 지역에 천자의 기운이 있다."는 도참설을 믿고 익주로 갔다고 한다.
하지만 도참설을 안 믿어도 익주로 가는 게 본인에게 더 이득이긴 했다. 교주의 경우 완전 변방이기 때문에 사섭의 예와 같이 중앙의 간섭을 배제하고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기는 쉽지만 그만큼 중앙의 정세에 관여할 수 있는 여지도 적었다. 하지만 익주 같은 경우 분지이기에 방어에 유리할 뿐만 아니라 주변의 영향력도 배제할 수 있으며, 동시에 진-서한으로 이어지는 중원의 중심지 중 하나인 장안(관중)-낙양(중원)과도 멀지 않기에 유사시 중앙에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유언은 한경제의 후손이니 잘만 하면 난세를 틈타 황제의 자리도 넘볼 수 있는 익주가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결국 훗날 황제가 정말로 나오기는 나왔는데... 이게 유언은 아니었다.
익주 지역의 황제를 칭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유비였지만, 유언의 행보 덕분에 유비가 익주를 차지한 뒤 득을 본 것은 사실이니 어떻게 보면 촉한의 시조 혹은 프로토타입이라고 볼 여지가 있다.
이때 익주는 전임 자사 극검#s-2의 실정으로 마상, 조지 등이 스스로 황건적이라 칭하며 광한군 면죽현을 중심으로 들고 일어나 광한군, 촉군, 건위군, 파군을 휩쓸던 것을 익주종사 가룡이 막 평정한 터였다. 유언은 가룡을 교위(校尉)로 삼고 주도는 면죽으로 정해 관대하게 위무에 힘쓰며 민심을 모아 슬슬 독자 세력을 꾀하였다. 한편 유력 호족인 파군태수 왕함#s-2, 임공현장 이권 등 십여 명을 숙청해 익주에서의 입지를 공고히 하였다. 191년엔 이에 반발해 무기를 든 가룡과 건위태수 임기도 진압하고 죽였다.
동한 말 각종 반란과 부패, 혼란으로 엉망이 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군 태수들을 감찰하는 역할에 머물렀던 '주자사'를, 실권을 가진 '주목'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한에서 이 주장이 받아들여지긴 했는데, 목과 자사는 완전히 대체된 것이 아니라 혼용된 것으로 보인다. 예: 기주'''목''' 원소(하북 최강 리즈 시절), 예주'''자사''' 유비(조조에게 망명해 있던 시절). 여담으로 촉한의 경우에는 둘의 구별을 확실히 해서, 자사보다 목을 더 높게 취급했다.
한나라의 자사와 태수는 상하관계가 명확치 않았다. 그 때문에 지방에서 대규모 반란이 발생해서 지방군만으로도 통제가 불가능할 때, 딴 마음을 품은 유언이 정식으로 이와 관련된 상소를 올려 익주목 감군사자(益州牧 監軍使者)라는 파격적인 관직에 오르게 된다.
유언이 감군사자가 되어 익주목을 겸하고 한 일은 먼저 익주자사 극검의 죄를 묻는 것이었고 이후 익주 내부의 치안을 다스리는 것(이라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익주 장악)이다. 내부의 치안을 다스리는 행위는 익주목의 직무 영역이므로 능히 이해되는데, 극검의 죄를 묻는 직무는 익주목의 영역이라기보다는 감군사자의 직무라 보인다. 즉 〈유언전〉에서 보인 '극검을 잡아들여 죄를 다스려 벌을 주는 것을 맡게(當收儉治罪)'하기 위해 감군사자로 임명한 것이다.[1] 그러나 후한 말기의 주목에게 주어진 주의 행정과 군정에 대한 권한을 살펴볼 때 이후 익주 내의 여러 사건들에 대해 벌이는 유언의 활동들에서 감군사자와 주목의 역할을 분리해 이해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이는 감군사자 영익주목을 계승한 유장(劉璋)에 대해서도 같다.
주목은 전한 성제 때의 관질 2000석 관직으로 설치되었다가 폐쇄된 관직이었다. 한 주의 군령/군사법권/군정/민정을 통괄하는 관직인 주목의 설치에 대한 요구는 황건적의 난이 발생하기 이전부터 조정에서 논의가 되었다는 설이 존재한다. 그 만큼 한나라가 차츰 혼란으로 치닫고 있었다는 얘기다. 이미 한나라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견제와 균형의 원리 측면에서 애매모호한 관계가 성립하게 된 주자사와 태수는 혼란한 상황 속에서는 지방행정을 마비시키기도 했다.
그러므로 유언의 상소문에서 보이는 '자사의 위엄이 가벼워 사방에서 발생하는 병란과 도적을 막지 못한다고 하는(四方兵寇, 焉以為刺史威輕, 既不能禁)' 부분의 보완은 주목을 임명할 때 그 관질을 '본래의 관질로 직을 맡은(皆以本秩居職)' 것으로 보완되며, 주목이 가지는 행정권은 과거 목과 백이 그러했던 것처럼, 또 전한 말기 때 주목이 설치된 배경처럼 주 단위의 행정관으로 임명함으로써 확보된다. 유언의 주목 설치에 대한 건의는 이후 삼국시대가 진행되면서 지방관에 장군, 도독 등 여러 권한을 덧붙여 행정권과 군령, 군정권을 쥐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유언이 188년 주목 설치를 건의한 이래, 십상시의 난으로부터 시작된 멸망으로의 행진곡을 연주하고 있던 한나라 중앙정부는 이를 데 없이 강력한 권한을 가진 익주목 유언과 형주목 유표 등의 주목 설치로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동탁과 이각/곽사 정권 때문에 그 권위에 치명상을 입은 한나라 정부가 주도적으로 뭘 할 수는 없었으니까. 유언은 이 상황을 이용해 익주를 장악해 적극적으로 할거에 나선 것이다.
미녀 노씨가 유언의 집에 자주 드나들자, 유언은 노씨의 아들 장로를 발탁해 독의사마(督義司馬)로 독의사마로 삼아 장수와 함께 한중에 파견해 한중태수 소고를 공격해 차지하고 포야곡도를 봉쇄하여 조정과의 연락을 차단하기도 했고,[2] 황제의 의복, 깃발 등을 대량으로 만들어서 황제 흉내를 내려고 했지만, 형주를 맡고 있던 유표가 이를 조정에 고자질했다. 그런데 정작 유표 본인이 더했다.
이런 탓에 정사에서 유언은 유표, 원술, 원소, 동탁과 똑같은 한적(漢敵)으로 취급받는다. 원소는 다른 의미로 분류해야 하는 게 더 맞지만.
이각과 곽사를 몰아내기 위해 마등과 한수가 난을 일으켜 장안으로 향하자, 유언은 교위 손조에게 촉병 5000명을 주어 이를 뒤에서 몰래 후원하기도 했다. 결국 이들의 난이 어이없게 실패하고 패배하자 중앙에서 관직을 지내던 유언의 장남 유범((劉範)이 살해되고 황도에 있던 차남 유탄(劉誕)이 사형되고 셋째 유모는 정신병을 앓다가 죽었다. 여기에 면죽에 화재까지 덮쳐 온통 불바다가 되어버렸다.
유언은 도참설에 심취해 있었고, 오의의 여동생이 귀인이 될 상이라는 관상이 나오자 그녀를 아들 유모와 결혼시켰다. 그런데 유모는 얼마 안 가 죽었고 과부가 된 오의의 여동생은 유비에게 재가해서 목황후가 되었다. 유언이 바라는 대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다만 이러한 예언들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곤란하고 진실성에는 의심 할 필요가 있는데, 이를 기록한 진수 자신이 익주에서 성장했고, 그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초주 역시 도참설의 신봉자였기 때문이다.
이에 주의 치소를 광한 낙현에서 촉군 성도현으로 옮겼으며 심신이 쇠약해져 4남 유장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고 은퇴하여 시름시름하다 사망했다. 유언이 사망하자 측근들은 유장으로 유언을 승계하려고 했지만, 유언의 부하 중 감녕만 유일하게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에게 승계시키려고 했다.
그래서 싸움이 붙었는데 감녕이 패했다. 감녕 개인의 싸움 실력은 엄청났지만 제 아무리 감녕이라 해도 혼자서는 중과부적이었다. 할 수 없이 감녕은 형주로 도망쳤고 유장이 유언을 승계했다.
이 양반이 익주 지역의 민심을 잡고 삼보의 난 등의 전란을 피해 외부민들이 무수히 유입되고 유언 본인도 동주병 등의 외부세력을 적극적으로 끌어 오면서 호족들을 짓밟고 눌러놓은 탓에, 위나 오 지역에 비해 후에 촉한이 될 익주는 호족보다 외부세력이 대부분인 중앙정권의 모습을 보인다. 정사 삼국지에서도 유언, 유장을 촉한 정권의 선구적 통치자로 보아 <촉서>에 배치하였다.
하지만 제대로 다 정리하기 전에 저 세상 가는 바람에 유언 사후 익주는 유언이 끌어들인 동주병[3] 과 토착 호족, 북쪽의 강족과 저족, 남쪽의 만족이 뒤엉켜 어지러웠다. 유언의 뒤를 이은 유장이 이에 대해서 눈치를 많이보기도 했고 말이다. 이후 유비가 익주에 들어오면서 대부분 평정하였으나, 유비가 이릉에서 대패하자 반란이 일어났고 결국 진압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유비와 제갈량의 통치를 통해 익주는 안정을 찾게 된다.
3. 미디어 믹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황건적의 난 시절에 유주자사를 지내면서 유비와 인연을 맺기도 했으나 실제로는 유주자사를 지낸 적은 없다. 유주자사를 지낸 사람은 공손찬에게 죽은 유우다. 연의에서는 유비가 입촉할 때 의용군 시절의 인연을 들며 유장과 관계를 독실하게 하는 요소가 되는 한편 유장을 배신한 유비를 더 배은망덕한 인간으로 만드는 기믹이 되기도 한다.
여러 매체를 통해서 인자한 사람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으나 실제로는 그런 거 없고, 유비 못지않은 야심가였다. 위에 서술된 도참설을 믿고 익주로 이동한 일도 그렇고, 오의의 여동생이 고귀한 신분이 될 것이라는 관상가의 말을 듣고 그녀를 아들 유모의 부인으로 맞이했다. 물론 오의의 여동생을 고귀하게 만든 사람은 다른 사람이었다.
군웅할거 시대 1세대 군벌 중 한 명으로 익주 최초의 군벌로, 촉한의 기반이 자리잡힐 토대를 마련한 인물이지만 군웅할거 세대인 데다 익주에서 따로 노는 기색이 강해서인지 매체에서는 아예 존재가 통생략되고 유장만 나오는 경우가 많다. 아니면 연의를 따라 유주자사로 나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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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삼국지톡에서는 유비군이 황건적에 의해 당할 줄 알고 일찌감치 그들의 사망보고서를 작성 중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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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에서는 유비 삼형제가 의용군으로 오자마자 환대하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병사들을 구타한 전력이 있는 장비의 죄도 너그럽게 용서한다.
삼국전투기에서는 평범하게 모자 쓰고 안경 쓰고 수염 난 노인으로 등장. 연의와는 달리 평범하게 익주자사로 등장한다.
선성 전투 편에서 그의 근황이 묘사된다. 본디 기주자사였으나 중앙정부가 썩어들어가는 꼴을 보고 더는 못 해먹겠다 판단, 지방발령을 자원하여 익주로 간 것으로 묘사된다. 익주로 간 뒤 부패 관리와 도적들을 척살하고 세력이 강했던 지방 호족들을 싸그리 잡아 죽여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한 것으로 나온다. 이후 중앙정부의 개입이 귀찮아서 일부러 장로를 한중으로 보낸 뒤 장로가 길을 끊었다는 핑계로 수도와 연락을 끊고 익주에서 왕처럼 지내게 되는데, 왕처럼 살다 보니 더 욕심이 났는지 급기야 마등이 장안을 칠 때 그들을 지원하여 모반의 뜻을 드러내게 된다. 이후 마등이 패배한 뒤 유언이 마등을 원조한 사실이 발각되어 중앙에서 관리를 지내고 있던 아들들인 유범, 유탄이 둘 다 처형당하게 되고, 이에 상심한 유언은 병들어 세상을 뜨는 것으로 나온다.
여남 전투 편에서 장로를 한중으로 보냈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언급하면서 딱 1컷이긴 해도 오랜만에 재등장했다.
라디오 드라마 와이파이 삼국지에서는 황건적의 난 시기 유관장 삼형제가 의군을 일으켰을 때 잠깐 등장한다. 성우는 이규창. [4] 황건적의 난 이후 등장은 없다.
토탈 워: 삼국 분열된 운명 dlc에서 유니크 장수로 참전이 확정되었다. 190년 군웅할거, 194년 배신당한 천하 캠페인에서 플레이어블 군주로 등장할 것이라고 한다.
3.1. 삼국지 시리즈
유언(삼국지 시리즈)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