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수/선수 경력
1. 영광의 선수 시절
프로야구 개막전 MBC 청룡과의 경기에서 한국프로야구 1호 홈런을 때려내는 이만수.
'''한국프로야구 1호 안타, 1호 타점, 1호 홈런'''의 주인공이다. MBC청룡과의 개막전에서 팀의 4번 타자 겸 주전 포수로 출전하여 1회에 2루타를 치며 타점[1] 을 기록했으며, 5회 초 두 번째 타석에서 홈런을 쳤다. 참고로 이만수는 이날 프로 출범 1호 타점과 1호 홈런을 기록한 이만수는 등나무 가구 세트를 받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1982년 삼성에 입단했다. 한국프로야구 원년 멤버 중 한 명으로, 삼성 라이온즈에서 프로 선수로 16시즌 동안 활동했다. '''프로 원년 멤버들 중에서 가장 오래 뛰었던 선수이다.''' 별명은 헐크. 등번호는 22번으로, 현재 삼성 라이온즈의 영구결번이다. 현재 삼성의 영구 결번인 양준혁의 10번도 다른 선수들이 단 적이 있었고[2] 삼성의 또 다른 영구 결번 번호인 이승엽의 36번도 그 이전의 선수들이 단 적은 있지만 이만수의 22번 만큼은 은퇴한 후에도 아무도 단 사람이 없어서 삼성 라이온즈 역사에서 유일하게 22번을 단 선수로 남게 되었다.
삼성의 초대 프랜차이즈 스타. 장효조&이만수-양준혁-이승엽으로 시작된 프랜차이즈 스타 계보 중 한 축이었으며. 삼성의 역사는 이만수로 시작된다고 과언이 아니다. 삼성 본좌 라인 중 유일한 우타자이지만 삼성에서의 우승 경험은 전후기 통합 우승을 이룬 1985년 뿐, 한국시리즈 우승 경험은 없었다.
국가대표 선수 출신으로 포지션은 포수. 한국프로야구 1호 안타, 1호 타점, 1호 홈런, 100호 홈런, 200호 홈런, 최초의 트리플 크라운을 기록, 다양한 타이틀 및 통산 기록으로 대한민국 야구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성실성과 노력으로 대표되는 선수로 1985년 삼성이 플로리다로 훈련을 갔을 때, 정규 훈련+야간 개인 연습+새벽 개인 연습을 하는 모습을 보고, 한 현지인은 머리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냐는 말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위대한 타자 중 하나이지만, 1984년의 트리플 크라운 달성 과정은 두고두고 비판을 받는다. 당시 김영덕 감독이 이만수의 타율 1위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홍문종을 '''9연타석 고의사구'''로 내보내는 노골적인 타이틀 만들어주기를 강행하여 트리플 크라운의 가치가 빛을 잃었고, 그 대가로 시즌 MVP도 그 해 한국시리즈에서 나홀로 4승으로 맹활약한 롯데 최동원에게 내어주는 흑역사가 있었다. 뭐, 이만수는 이미 1년 전인 1983년 시즌에 MVP를 수상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이만수는 당시 인터뷰에서 83년도는 본인이 받지 말아야 할것을 받아 의아했고, 84년은 당당히 받아야 할 것을 못 받아 불만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선수 시절 말년 삼성의 은퇴 제의를 계속 거절하자 은퇴식도 치루지 못한 채 1997 시즌 후 방출 당해 결국 은퇴했고, 자비를 들여 미국으로 코치 연수를 가게 되었다. 또한 과거 선수 시절에 팬들에게 캔 투척을 했다는[3] 웃지 못할 흑역사가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삼성의 슈퍼 인기 스타. 기량이 떨어진 1990년대에는 거의 나오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삼성 팬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으며 경기가 끝나가면 팬들은 이기건 지건 대타 이만수를 외쳤고 이만수가 나오면 병살을 치든 삼진을 당하든 홈런을 치든 팬들에게 환호성을 받았다.
그 옛날 에스에스패션(현 삼성물산 패션부문) 위크엔드[4] 광고에도 출연한 적이 있다. 바로 아래 동영상을 참고하자.
이 때만 해도 이만수는 어린이들에게 그야말로 우상이었다. 당시 야구 선수가 이런 광고에 나올 정도라면 어느 정도로 인지도가 높았는지 알 수 있지 않은가?
초창기 크보의 최고의 인기스타였다. 말년에 대타로 2루타라도 때려내면 원정팀에서도 기립박수를 쳐주기도. 삼진을 당하면 다들 만수바보~ 만수바보하고 관중들이 놀렸는데 그게 비웃는게 아니고 정말 동네 친한 바보형(..)을 놀리듯이 한것으로 인기가 정말 대단했다.
장종훈과 마찬가지로 한국시리즈에서의 불운의 선수이기도 하다. 그나마 1번의 우승이라도 있으니(이만수는 1985년 통합우승, 장종훈은 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 그걸로 위안을 삼자. 하지만 삼성은 1985년 통합우승의 경우 공식적인 우승이지만 한국시리즈가 열리지 못했고 이만수를 보유한 삼성은 한국시리즈에서 '''0회 우승, 6회 준우승'''이라는 대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선수 시절에 이루지 못했던 우승은 마침내 2005년에 월드시리즈에서 코치로 재직중이던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우승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다만 이만수가 뛰던 당시 삼성이 새가슴 팀이었다고 이만수 또한 새가슴으로 몰아가면 곤란한 것이, 이만수의 포스트시즌 성적을 보면 그는 절대 새가슴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통산 포스트시즌 타격 WAR은 스탯티즈 기준 1.88인데 이는 역대 포스트시즌 엔트리에 든 삼성 야수 중 1위에 해당한다. 참고로 바로 뒤가 1.85의 이승엽이다. 타율 .257은 포스트시즌이면 괜찮은 타율이고, 53안타는 팀내 역대 7위, 홈런은 7개로 2위, 33타점은 4위에 해당하며 그의 앞에는 이승엽, 박한이, 양준혁 등 왕조 시기의 후배들뿐이다. 즉 80년대 포스트시즌에 참가했던 삼성 선수들 중 가장 좋은 포스트시즌 성적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은퇴하는 1997년까지 이만수는 포스트시즌 안타, 홈런, 타점, 득점 등 주요 지표에서 1위를 마크했으며, 이만수에 이은 팀내 PS 타격 WAR 2위는 장효조였는데 1.22로 엄청난 차이가 난다. 다만 병살도 7개로 1위였고[5] , OPS 같은 지표가 좀 떨어졌다는 건 특기할 점이다.
이만수의 포지션이 포수인 걸 생각하면 수비까지 합산 시의 총합 포스트시즌 WAR 또한 팀내 TOP 안에 들지 않을까 생각된다. 다만 투수들까지 합산한다면 투수들에게 밀린다.[6]
16시즌 동안 1449게임에 출장, 5034타석에서 타율 .296, 타점 861, 홈런 252, OPS .907을 기록했다. 16시즌동안 3할 타율을 6번, OPS 9할 이상을 9번이나 달성한 레전드 중 레전드이다. 조정 OPS는 '''무려 155. 장효조급의 어느 타격의 신과 사자왕을 제외하면 가장 높은 수치다.특히 타격이 약한 포수로서 이 정도의 타격을 기록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 '''역대 홈런왕 3번[7] , 타격왕 1번, 포수 골든글러브 5번을 수상한 레전드이다.'''
KBO 역대 최고의 포수를 넘어 역대 최고의 우타자로 부를 만한 선수이다. 특히 주목할 사실은 그의 볼넷:삼진 비율. 커리어 통산 4310타수 672볼넷 490삼진으로 10타수당 삼진 1개에 지나지 않을 만큼 정교한 타격과 파워를 겸비한 타자였다. 여기에 82~90년, 즉 이만수의 전성기로 한정지어 계산하면 그 위엄이 더더욱 빛난다. '''9년 평균 타 출 장이 .310 .399 .554에 OPS가 .953으로 동기간에 OPS가 9할을 넘는 선수는 오직 이만수 뿐이며, wRC+는 무려 173.2에 9년 합계 sWAR은 49.77승이나 된다!'''[8] 누적홈런은 183개로 당연히 1위, 그러면서도 BB/K가 1.19나[9] 되는, 그야말로 타격의 신이라 불릴 수준이었다. 당시 리그에서 푸홀스나 미기, 트라웃이나 다름없는 엄청난 타자였음이 명백하다.[10][11]
게다가 이만수가 전성기이던 시절은 꾸준히 투고타저였다. 장명부나 선동열, 최동원 같은 굇수가 팀에 하나 있으면 그팀의 전력이 중하위권에서 우승을 바라볼 정도로 상승했고 경기 수도 지금보다 훨씬 적었다. 경기 수, 년도별 득점 상황에 맞게 조정한 스탯으로 이만수의 기록을 뜯어보면 이만수는 훨씬 더 위대한 타자임을 알 수 있다. '''통산 wRC+[12] 가 159.0으로 외야수와 지명타자로 뛴 양준혁에 이어 역대 2위.''' [13] 포지션을 감안하면 더더욱 뛰어난 수치이다[14][15]
한편, 1996년 6월 23일 대구에서 열린 삼성-쌍방울 경기에서 박진석과 빈볼시비로 추격전까지 벌였는데,[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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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험악해야 정상인 상황인데 어째서인지 둘의 표정이 훈훈하다. 그래서 관중들은 오히려 재미있어했다고 한다. 이 때 박진석의 발이 너무 빨라서 쫓아가던 이만수가 제풀에 지쳤다고... 그런데 더 웃긴건 이만수가 추격을 하면서 삼성 후배선수들한테 "저거 잡는 사람 내가 빵사준다"라고 했다는 카더라도 있다. 박진석과 이만수의 술회
참고로 이만수를 말리러 뛰어가는 이광길 코치는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이만수 수석코치와 SK에서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
그의 마지막 현역 선수시절
2. 수비 능력에 관한 논란
다만 수비 능력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김영덕, 김응룡, 심지어는 백인천 등의 감독들은 팀의 공격력을 믿고 이만수가 1이닝이라도 더 수비를 하게 하려고 투수에게 배팅볼을 지시했다는 얘기가 있다. 또한 김성근 역시 이만수를 보고 "이만수의 경우에는 단순하고 착한 친구다."라고 평했다. 단순해서 상대팀 감독으로서 상대하기 편했다고.
김성근 강연에 보면, 늘 나오는 이야기중에 하나가, OB 코치 시절, 이만수 팔뚝에 힘줄 바뀌는 것만 보고도, 구질을 다 알아내서 써먹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도 상식선에서만 봐도 이만수 깎아내리기의 일환.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는데도 뒤를 보면서 이만수 팔뚝을 보고 사인은 읽었다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 포수 이만수의 가치를 폄하하려는 발언이라는 평가가 있다.[18]
그리고 김성근의 OB감독 시절, 즉 84~88 5시즌 동안 OB는 한번도 삼성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한 적이 없으며, 상대전적도 56승1무39패로 삼성의 압도적인 우위였다. 게대가 86년도에는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게 패했다. 김성근이 삼성 외 다른팀의 감독을 맡은 시절과 이만수가 현역이었던 시절, 김성근의 팀이 삼성보다 윗자리에 있었던 경우는 3번인데 89년 태평양과 96,97의 쌍방울이었다. 96,97년도에는 이만수가 은퇴를 앞둔 시기에다 포수로서의 능력은 완전히 상실한 대타 상태였다. 그렇다면 김성근의 팀이 포수 이만수가 이끄는 삼성을 제대로 누른건 89년 태평양 감독 시절 준플레이오프가 유일하다. 그걸 두고두고 사골처럼 우려먹는다고 보면 될 듯.
이만수의 수비 능력을 까는 대표적인 일화가 있는데 바로 1990년 한국시리즈 3차전 당시에 백인천 감독이 일부러 홈런을 맞았다고 하는 이야기다. 당시 LG가 3-0으로 앞선 9회말 상황에서 백인천 LG감독이 자기팀 배터리에게 직구 승부를 지시하였고 이만수는 3-2 추격 홈런을 때렸었다. 후일 이 사건에 대해서 백인천 감독은 이만수를 다음 경기의 선발 포수로 출전 시키기 위한 볼배합이였다고 주장하였으며, 이만수가 그만큼 만만했다고 이야기했다. 따지면 한국 시리즈에서 1점차 추격 홈런을 일부러 맞아 줬다는 말이니. 사실이라면 대단한 배짱이 아닐수 없다. 다만 삼성팬들 사이에서는 당시 홈런을 때렸든 말든 압도적인 공격력을 보이며 백업과 넘사벽의 차이를 보이던 포수를 영향력이 큰지도 의문인 포수 리드 하나 대문에 상식적으로 다음 경기에 뺄리 없다는 점. 홈런 더비에서도 몇개 못치는 홈런을 무슨 수로 의도 했냐며 예지안이라도 있었냐는 점. 한국시리즈에서 일부러 1점차 추격을 당하는 감독이 실존 한다면, 그거야말로 정상이 아닐거라는 점을 들어 그냥 백인천 감독의 자기 변명성 및 승자의 여유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당시 백인천 감독 말에 따르면 홈런을 주려고 한 건 아니었고 그냥 안타 한 방 맞아주려는 의미였는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으며 다른 포수인 박정환의 경기 운영에 LG 타자들이 어려워해서 이만수를 계속 내도록 정삼흠에게 높은 직구를 던지도록 한게 여러 책 및 인터뷰에서 나온다.
하지만 이만수의 수비 능력이 뛰어 났다는 주장과 기록도 많고, 같이 뛰었던 김시진 前 롯데 자이언츠감독에게 그의 수비 실력에 대해 묻자, 김시진과 배터리를 이뤘을 때 가끔 포수와의 사인 없이 던지는 노 사인 변화구들을 모두 다 받아낼 정도로 좋은 수비실력을 지녔었다고 하였다. 실제 이만수의 현역 시절 수비스탯을 비교해 보았을 때[19] 1990년대 이후 최정상급 포수로 인정받는 박경완과도 큰 차이가 없고 도리어 수비적인 측면에서도 당시 1류에 위치해 있었다. 바보 만수로 대표되는 희화화 이미지+4번타자 포수+당시 일선 지도자들의 짠 평가가 이미지를 왜곡시킨 것에 가깝다. 당시 리그 수준을 감안하더라도 현역 시절의 포수 이만수는 공격, 수비 모두 흠잡을 곳 없는 완성형 포수에 가까웠다. 한국에서 중요하게 평가하는 투수 리드(게임콜링)에 대해서는 특출난 장점이 없었다고 하지만 일단 이선희, 김일융, 김시진 등 80년대 삼성의 투수들은 당시 리그 초일류 투수들이었기 때문에 이만수가 투수 리드를 잘한다고 티가 나지도 않는다.
위에서 말했듯이, 이만수의 수비력은 과도하게 까이는 경향이 다소 있다. 이만수의 현역 시절 공격력이 거의 푸홀스급이다 보니 수비력에서 다소 저평가 당하는 편이다. 이러한 수비 문제는 박경완과의 비교 시 많이 언급되는 편이다.
지금도 이만수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타격은 역대급, 수비는 테러급'일 정도이니.. "이만수의 어깨가 약하다 ,물어깨다." 라는 말이 지금까지도 야구팬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퍼져 있지만 사실 이만수의 통산 도루저지율은 0.377이다. 물어깨라고 욕먹기에는 억울한 성적이다. 당시 선수들의 도루성공률이 형편 없었다는 반론도 있지만, 저정도 도루저지율이면 준수하다는 소리를 들었지, 물어깨라고 욕먹을 정도까지는 아니다.
그리고 이만수의 게임당 에러율(포수 포지션)은 0.047로 박경완의 0.057, 진갑용의 0.069보다도 낮다고 하나 여기에는 헛점이 있는데 박경완, 진갑용하고 이만수하고 경기수 차이가 2배 이상난다. 경기 수 차이가 크지만, 수비가 좋은 선수들의 게임당 에러율이 전성기 시절 이만수 선수의 게임당 에러율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1세기에 들어와서 이만수 vs 박경완 논쟁이 개싸움으로 변질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SK 와이번스 팬덤'''과 '''삼성 라이온즈 팬덤''' 의 충돌과 관련이 깊다. SK 감독으로서 논란을 야기해왔던 이만수와 SK의 레전드로 여겨지는 박경완의 비교이기 때문에 이만수의 평판이 바닥까지 추락하기 좋은 비교 환경이 되어버리게 된 것도 원인이다. 사실 선수 시절에도 과도한 리액션 등등으로 야구계에서 적을 많이 두고 있었기 때문에 과도하게 폄하당하는 측면도 있다. 이런 상황에 삼성의 레전드인 이만수 선수를 비호하는 삼성라이온즈 팬덤 또한 수가 많고, 이러한 문제로 삼성팬덤과 sk팬덤 간에 충돌이 종종 일어나곤 한다.
결론적으론 이만수의 수비 능력이 과하게 저평가되어왔던 것은 사실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박경완보다 더 뛰어난 수비 능력을 가졌다고 결론짓기엔 무리가 있다고 볼 수 있으며, 그와 반대로 박경완의 수비 능력이 이만수보다 무조건 우위라고 결론짓는것도 성급한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애초에 포수의 수비 능력은 수치로 객관화하기도 어렵기도 하고 그 이상은 팬심의 영역이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3. 은퇴
삼성 라이온즈의 레전드급 포수임에도 불구하고 말년에는 우승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선수의 성적과 결과만 보고 가차없이 결정하던 삼성그룹 특유의 방식때문에 구단과 사이가 틀어지는 바람에 은퇴식도 없이 1997 시즌 후 방출당했고, 그렇게 반 강제적으로 은퇴를 당했다. 당시 삼성 팬들의 어마어마한 반발은 덤.
안 좋게 커리어를 마무리한 레전드의 대표 사례격으로, 제아무리 초특급선수라도 나이먹고 노쇠하면 구단도 처치곤란인데 발이 느린데다가 나이를 먹은 후 포수 수비가 불가능하게 되면 다른 포지션으로 전업하지 않는한 지명타자외에는 자리가 없는데도 이만수는 커리어를 이어가기 위해 포지션 전환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은퇴할 당시 이만수의 나이는 '''만 39세'''였다. 반면 팬들의 지지가 여전히 두터웠고 현역 연장 욕심이 있었던 이만수의 입장과 달리 뛸 수 있는 상황이 한정되었기 때문에 대타 외에는 보직을 제대로 줄 수 없는 감독 입장에서 매우 곤란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 부분이 주장이 좀 틀린것은 이만수가 다른 포지션으로 전업을 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나오는데...93년이후 1루수와 대타로 포지션을 옮겼다. 94년까지는 포수수비를 보았고, 이후 포수로는 불가능이어도 대타로는 여전히 가치가 있었다. 당연히 노장이 자리 차지하면 신인급의 성장에 방해되는건 사실이니 그런 면이라면 몰라도 포지션 전업을 안해서 문제였다는건 억지 주장이다.
다만 기용상황이 한정되었다는 것 자체는 맞는 말. 이만수가 1루수로 전업했을 때 1루수 요원은 이만수 말고도 이승엽과 양준혁이 있었다. 양준혁은 그래도 외야수도 볼 수 있었던 반면 이만수는 외야수를 볼 수조차 없었다. 그리고 이승엽을 외야로 돌리고 이만수를 1루수로 박아봤자 이승엽이 1루수로 뛸 때에 비해 메리트가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즉 위에서 말했던 박정환이 주전으로 도약하지 못한 이유와 똑같다.
위에서 1990년대에 거의 보이지 않았다라 언급했지만, 실제로 주전 포수 자리를 내놓은 건 1993 시즌부터이고 사실상 대타 외에 기용이 어려웠음에도 1993~1996년 4년 동안 대타로 총 777타수를 기록했다. 알려진 것과는 달리 타석에서의 기회는 상당히 많이 받은 셈. 1997년의 경우 무릎 부상 악화로 선수 생활 자체가 어려운 가운데 치른 시즌이라 52타수에 불과. 그리고 삼성은 재계약을 포기한다.
은퇴식을 치른 삼성의 1호 선수는 이만수가 떠나고 2년 후에 은퇴한 유격수 류중일. 은퇴 경기를 치른 삼성의 1호 선수는 양준혁.[20] 이만수의 탈단과정과 이로인한 연고팬들의 반발 & KBO 레전드에 대한 KBO 구단들의 예우에 대한 야구팬들의 반발이 공론화되면서 한때 우승에 눈먼 토사구팽구단 이라는 악명까지 있던 삼성 라이온즈[21] 도 이러한 악습이 많이 시정되었고 2003년에 22번을 이만수의 영구결번으로 지정했지만 삼성 구단의 레전드 죽이기의 안타까운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 덕분에 많은 삼성 팬들은 한 동안 '이만수 감독 복귀' 설을 꾸준히 밀기도 했었다. 그러나 2003년 삼성에서 감독 제의를 했다가 이만수가 대한민국으로 돌아갈 준비까지 다 했던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계약을 파기했던 사건을 생각하면 그냥 그들만의 꿈일 듯.[22] 사실 이 때문에 당시 삼성에서는 김응용 - 선동열 라인이 매우 건재했었다. 2010년 시즌 후 준우승 감독인 선동열을 갑자기 내치긴 했으나 후속 감독은 이만수가 아닌, 삼성의 또 다른 프랜차이즈 스타인 류중일이 맡게 되었고, 4년 연속 우승까지 안겨주게 되어 프런트나 팬들에게도 신임이 두터워져 이래저래 이만수의 삼성 복귀는 힘들 듯 하다. 근데 류중일이 감독에서 짤렸다가 또 다른 프랜차이즈 선수인 김한수가 감독을 맡게 되는데 정작 김한수가 맡은 첫 시즌은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으니
양준혁, 이종범에 이어 무릎팍도사 출연이 확정, 2010년 3월 3, 10일에 2편으로 나뉘어 방영되었다.
해당 자료
4. 연도별 주요 성적
- 붉은 글씨는 1위 기록. 진한 표시는 리그 5위 내 기록.
[1] 그 전 주자는 상대 수비 실책으로 출루, 안타가 아니다.[2] 허규옥, '''장효조''', 정성룡, 김기태, 김주찬, 김승권 등 무려 7명이나 있다 삼성 선배인 장효조에 대한 일대기를 다룬 다큐에 마지막에서 양준혁은 자신이 10번으로 영구결번하였지만 그 10번은 사실상 장효조의 것이라고 말했다 [3] 1990년 5월 29일 해태와의 3연 전 중 2패를 하고 병살타를 친 뒤에 관중석에 날아온 맥주 캔을 맞았는데, 분에 못 이겨 이것을 다시 던졌던 것. 설상가상으로 당시 이만수가 던진 캔은 한 관중의 안경테를 맞추어 부러뜨렸고, 이로 인해 대구 구장의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졌다. 결국 이만수는 관중들 앞에서 마이크 들고 직접 사죄를 했고, KBO로부터 벌금 및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았다. 그날 알려진 사실은 당시 그의 장남의 담임선생님을 초대한 자리 앞에서 보인 터라 심적으로 힘들었다고 밝혔다.http://sports.media.daum.net/baseball/news/breaking/view.html?cateid=1028&newsid=20110711130650603&p=SpoChosun[4] 후일 라피도, SS311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2007년 판매 부진을 이유로 없어졌다. 이후 후부가 제일모직 스포츠 브랜드 중 유일하게 남아 있었으나 역시 2013년에 판매 부진을 이유로 없어졌다. 현재 삼성물산에는 빈폴이 스포츠는 아니지만 아웃도어 상품을 출시하고 있으며 삼성 라이온즈를 후원하고 있기도 하다.[5] 현재 삼성 포스트시즌 병살 1위는 진갑용과 양준혁이 8개로 공동 1위를 차지하고 있다.[6] 투수 WAR 1위가 김상엽의 3.0이다.[7] 그것도 83~85 3년연속으로 달성했다. 장종훈과 이승엽, 그리고 박병호 이외엔 그 누구도 이루지못한 전인미답의 대기록.[8] 당연히 동 기간 sWAR, wRC+, OPS 모두 1위인데, 이게 KBO 역사에서 얼마나 위대한 성적인지 실감이 안 난다면, 2010년대와 비교해보면 된다. 14시즌 이후 19년도 단 한해를 제외하고 항상 타고투저였던 2010년대 KBO에도 이만수의 .953보다 높은 누적 OPS를 기록한 선수는 박병호, 최형우, 김태균, 그리고 최정 단 4명 뿐... 경기수가 133경기(11, 12), 128경기(13, 14), 144경기(15~)로 확대되었음에도 이만수보다 높은 누적 sWAR을 기록한 선수는 최정과 최형우 단 두명 뿐이다! 2010년대에 3000타석 이상을 들어선 선수들만 놓고 비교한 비율 기록을 살펴본다면, '''이만수보다 높은 누적 wRC+를 기록한 선수는 단 한명도 없고, wOBA를 기준으로 해도 박병호 뿐이다.''' 그나마 1시즌이라도 규정타석을 채운 선수들까지 합쳐서 계산한다면 2시즌여를 뛴 윌린 로사리오와 3시즌을 뛴 에릭 테임즈가 포함될 뿐이다.[9] 삼진을 불명예로 여기던 시절이므로 의외로 순위는 22위지만, 이만수보다 볼삼비가 좋은 선수들 중 김봉연을 제외하면 타석 대비 홈런비율이 3%를 넘는 선수도 한명 없다.[10] 심지어 국민타자 이승엽의 최전성기 95~03 시즌 9년과 비교해봐도 '''이만수가 더 뛰어난 선수다.''' 9년 평균 이승엽의 wRC+는 170.9, 이만수는 173.2. sWAR로 비교하면 이승엽이 5005타석을 들어서고 56.83승을 기록했는데 이만수가 3200여 타석을 들어서고 49.77승을 기록했다. 포수로써 수비기여도가 고평가되었다고 항변한다고 할 지라도 타석수를 1.5배 이상 들어서고 9년 누적하여 7승 더 기록했다면, 80년대 KBO의 경기수가 90년대 이후와 동일했다고 가정할 시 '''이만수의 9년이 누적기록으로도 이승엽의 최전성기 9년을 넘어있다고 말하기에 충분하다.'''[11] 물론 이 문단에서 설명한 모든 기록들은 리그 평균이 동일하다는 가정 아래에 세이버매트릭스로 계산한 것에 불과하므로, 실제 수준차이, 리그 일정차이 등 여러 제반조건을 생각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12] wOBA를 기반으로 한 조정 득점력[13] wRC+가 160.0 wRC+,WAR은 리그 평균 스탯과 개인스탯으로 계산한 수치이고, 이 당시엔 용병도 없고 경기수도 적었으니 어느 정도 감안은 해야한다.[14] 21세기 들어 KBO의 리그 평균 포수 wRC+는 단 한해도 100을 넘긴 적이 없으며, 전 시즌 평균하였을때 약 90정도에 불과하다. 이런 포수 포지션에서, 단 한 해만 wRC+ 159를 기록했다면 MVP 컨텐더로 불릴 만할텐데, 이만수는 통산 기록으로 159를 찍었고 80년대 평균하여 170을 넘겼으며, 커리어하이로는 무려 200을 두번 넘겼다.[15] 베이징 세대 이후로 가장 뛰어난 포수로 극찬 받은 박경완의 wRC+가 이만수의 통산 wRC+보다 높았던 단일 시즌은 단 3회(97, 00, 04)뿐이고, 2010년대 가장 훌륭한 포수로 평가받는 양의지(18, 19)와 강민호(15)는 더 적다. 그야말로 당대 최고의 타자가 포수로 거의 전 경기를 출장해내기까지 한다는, 야구 만화에나 나올법한 선수였던 것. 여기에, 2020시즌에 이만수의 통산 wRC+보다 높은 단일시즌 기록을 낸 타자는 멜 로하스 주니어와 최형우, 단 둘 뿐이다.[16] 이만수가 2회와 4회, 박진석에게 2타석 연속으로 볼넷을 맞았다. 그래서 뛰어간것.뉴스라이브러리[17] 이만수의 왼손에 끼워진 미트를 보면 알겠지만 1루수로 뛰던 시절이다. 후술하겠지만 포수로서의 가치가 떨어졌다고 판단한 삼성 코칭스태프는 1993년 이후부터 이만수를 포수로 기용하지 않았고 1루수나 대타 요원으로 출전시켰다. 이마저도 삼성 1루수 자리에 이동수와 양준혁, 이승엽 등 젊은 선수들이 꿰차면서 그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게 된다.[18] 막상 본인이 언급한 그 경기를 보면 이만수는 긴팔을 입고 있었다.[19] 이만수 선수는 포수로 1216경기를 뛰었으나, 비교하는 선수들은 모두 2000경기 이상 뛰었다. 평균 스탯인 도루저지율로 단순하게 수비능력을 비교하기엔 두개의 사례의 표본수 크기가 다르다. 다만, 수비능력이 뛰어난 선수들의 평균적인 수비능력에 비해 전성기 시절 이만수 선수의 수비능력이 떨어지지 않음을 확인 할 수 있다.[20] 양준혁 이후 은퇴경기를 치른 선수는 다름 아닌 이승엽 선수다. 참고로 이승엽은 2017년 마지막 경기에서 은퇴경기를 치렀다.[21] 물론, 90년대 프로야구판에서 은퇴선수 예우하는 팀은 '''단 한 팀도 없었다.''' 레전드 예우로 나름 좋은 평을 받는 한화 이글스도 안 알려진 8~90년대 레전드의 소리소문없는 은퇴사례가 적지 않고(대표적으로 악바리 이정훈), 우승을 이끈 99년 이후에야 장종훈,송진우등의 선수의 은퇴를 예우하면서 좋아진 케이스. 사실 그마저도 일종의 으리에 가까운 케이스다.[22] 사실 통수 이미지 씌운건 이 사건이 제일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