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징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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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무관이자 이징옥의 난의 주도자. 본관은 양산(梁山). 시호는 충강(忠剛)이다. 중추원지사 이전생(李全生)의 아들. 양산 이씨는 인천 이씨에서 분적된 이씨로 후에 이징옥의 후손들은 인천 이씨로 환원하였고 현재는 인천 이씨 충강공파로 불리운다, 양산 이씨는 이징옥의 형인 이징석으로 이어졌다.
2. 상세
무력만으로 놓고 전조인 고려의 척준경과 함께 한국 역사상 최강으로 불려지는 인물로[1] 입소문으로 전해지는 야사에 그 초인적인 용력이 잘 나타나 있다. 그 형 이징석과 동생 이징규[2] 도 당대에 무인으로서 3형제가 모두 용명을 떨쳤다. 병든 어머니가 이징석과 이징옥을 불러 "내가 '''살아있는''' 멧돼지가 보고 싶다."고 말하자 이징석은 멧돼지를 쏴서 생포한 뒤 갖다드렸는데, 이징옥은 '''더 큰 멧돼지를 몇날 며칠을 쫓아다니며 집 앞마당까지 몰아와서 기진맥진해 뻗어있는 걸 어머니께 보여드렸다.''' 이것도 모자라서 호랑이를 10대 시절에 맨손으로 잡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물론 야사니 너무 신뢰하지는 말자. 다만 사냥감을 탈진할 때까지 추적하는 지구력 사냥법은 실제로 있는 사냥법 중 하나다. 자세한 것은 사냥 항목 참조.
세종 시대부터 북방에서 근무하여 여진족을 상대로 용맹을 떨쳐 여진족들의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김종서의 눈에 띄어 북방 정벌을 하는데 도움을 줬는데, 이 때 김종서는 총사령관 역할을 수행했고 직접 전장에 나가 여진을 몰아내는 데에는 이징옥의 노련한 무력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사실 김종서가 처음 북방에 부임했을 때 둘의 대(對) 여진관은 달랐다. 김종서는 문신답게 다소 온건책을 주장했고, 이징옥은 강경토벌을 주장했다. 이징옥은 군사적으로 강하게 제압하지 않으면 결코 여진의 저항을 물리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3] 그러나 김종서도 몇 년 후에는 이징옥의 의견을 수용하여 강경토벌론으로 돌아서게 된다.[4] 그래서 1440년 이후로는 적절한 군사 시위와 적지에 침투하는 작전까지도 구사한 끝에 함경도의 6진이 완성되어 두만강 이남은 완전히 조선의 영역으로 자리잡게 되었다.[5][6]
이렇듯 무예로써도 전설급이었지만 단순한 거친 무장이 아니라 '''개념인'''이었다. 세종 시대에는 명나라 사신[7] 들의 횡포와 수탈이 심했는데, 특히 명나라 사신이 오면 조선의 매인 '해동청'을 잡으려고 안달이었다. 사신으로 온 윤봉[8] 이라는 자가 해동청을 제멋대로 잡고 남의 집 사냥개를 빼앗자 이징옥은 몰래 개를 주인에게 돌려주고, 잡은 해동청을 풀어줘 버렸다. 윤봉이 이를 가지고 게거품 물고 발악하자 '''"저거 그냥 잡종이에요"'''라고 둘러댔다고. 어쨌든 이 일로 유배를 가기도 했다.[9] 사실 이게 의기있는 행동인건 맞지만[10] 자칫하다간 외교 문제로 비화될 수 있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 때문에 조정에서는 말 그대로 골머리를 앓았다. 세종도 '''매랑 개 한 마리 때문에 이게 뭔 꼴이냐'''라고 이징옥을 깠고, 맹사성이나 허조는 이 일로 '''이 사실이 명나라에 알려지면 뒷감당을 못한다'''고 처벌을 반대할 정도의 사건이었다. 의기있는 사람이었던 건 사실이지만 대국적으로 처신하는 안목은 부족했던 모양. 어쨌든 이 일로 10년 넘게 지키던 경흥을 떠나 2년동안 썩었다.
매우 청렴하고 성실한 인물이었는데, 세종부터 그 뒤인 문종, 단종을 거치며 일생 동안 북방에 수십 년간 근무했는데도 불만 하나 없었으며, 본인은 매우 청렴하여 보다 못한 부하 무관이 "우리 장군님께서는 추운 겨울에도 '''겨울날 입을 옷이 한 벌밖에 없어요'''"라고 문종에게 직소했을 정도. 이에 문종은 좋은 털옷을 이징옥에게 보내주기도 했다. 그리고 부친상을 당했을 때 장지 문제로 형과 충돌하기도 했는데[11] 열받은 형 이징석이 이징옥을 아버지 빈소에서 두들겨 패기도 했는데,[12] 이 북방에서 여진을 떨게 한 용장은 형이 말도 안되는 이유로 폭력을 행사했음에도 불구하고 형에게 폭력을 휘두를 수 없다는 이유로 '''그냥 맞고만 있었다.''' 그리고 며칠 동안 앓아 누웠다가 겨우 일어났다고. 조선 초의 관리들이 여러 문제로 스캔들에 깨끗했던 인물들이 거의 없었던 데 반해 이징옥은 이렇듯 사생활이 매우 깨끗했다.[13]
세종과 문종이 승하하고 단종이 즉위했을 때에도 북방에서 근무했다. 비록 당시 실권자인 김종서의 신임을 얻기는 했지만, 토목의 변과 이만주 때문에 북방이 혼란스러워 계속 북방을 맡긴 것으로 추정된다.
3. 이징옥의 난
단종 1년에 계유정난이 일어나 김종서가 살해되고 수양대군이 안평대군과 이징옥을 엮으면서 그도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과감한 시도를 하는데 계유정난 직후 자신을 대신해서 박호문[14] 이 후임 함경도절제사로 오자 이징옥은 자신을 살해하려는 계획을 파악하고, 박호문을 살해한 다음[15] 자신을 따르는 군대와 북방으로 진출하여 여진족과 연합하여 '''스스로 황제를 칭하며''' 옛 금나라 수도 오국성에다가 대금(大金)을 세우고 반란을 도모하려 한 것 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부하 정종과 이행검의 배신으로 실패하고 만다.
실록에 따르면 반란 이후 항상 무장한 상태로 잠도 안자고 있어서, 부하 '정종'은 날씨가 추우니 부하들이 술을 먹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이징옥도 이를 승낙하고, 정종이 술을 바쳐서 막 마시려는 찰나에 부하들이 화살을 날렸고 화살을 맞고 도망치던 중에 추격자에 의해 암살당했다고, 야사도 비슷하게 전개되어서 수양대군의 밀계를 받은 병사 두 명이 그를 살해하려고 잠입하여 술에 취해 잠든 그의 오른팔을 잘랐다. 이에 이징옥은 오히려 칼을 빼앗아 역으로 그들을 죽이고 밖으로 나왔는데 회령부사 정종과 호군 이행검이 잠입시킨 군사들이 이징옥을 살해하기 위해 포진해 있었다. 이징옥은 오른팔이 잘린 상태에서 '''칼 한자루 뿐인 맨몸으로 수백명이나 쓰러뜨리면서 사투를 벌이다가 다음 날아온 화살들에 전신을 맞으면서 처참하게 최후를 맞는다.'''[16] 사후 시신은 거열로 찢겨졌으며 목은 베여져 3일간 효수되다가 한양으로 보내져 조정에 바쳐진다.
반란이라곤 해도 이징옥의 난이라 불린 이 사건은 사실 궁지에 몰린 이징옥의 '''최후의 발악'''적 성격이 강하다. 다만 아무리 궁지에 물렸다지만 출신도 경상도 출신이라 지연도 없고 여진족들에게는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라 인맥도 전혀 없고 사이도 안 좋은 인간이 갑자기 대금 황제를 자칭한 일이나, 이징옥의 첩 혹은 그냥 친한 기생을 이징옥의 아들이 황후라 말하는 점, 이징옥이 살해된 직후 조선 상황을 알기 힘들었을[17] 야인들이 수양대군[18] 을 칭송했다는 기록 등 현실적으로 너무 어처구니 없는 단종실록의 기록 때문에 이징옥의 난을 세조의 조작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애초에 이징옥이 '''무력으로 세조를 몰아내고 단종을 복위시키려 했던 것'''을 왜곡한 엉터리라는 주장도 있을 정도. 채제공은 자신의 문집 번암집에서 '''이징옥의 난은 단종 복위 운동으로 이징옥이 칭제건원한 적은 없다'''고 주장한다.
이후 연좌제로 그의 장남 자원(滋源)과 차남 윤원(潤源)은 처형 또는 이징옥과 함께 살해되었고, 딸은 노비로 분배되었다. 당시 8세였던 셋째 아들 연원(淵源)은 유모가 구출하여 은신, 경상북도 경주 토함산 서편 아래 상신곡에 숨어들어, 은거하여 본관을 초계라 칭하고 세계를 이어갔다가(경주시 외동읍 신계리), 그의 후손들은 순조(純祖) 때 다시 세상에 나왔다. 이징옥의 형 이징석과 동생 이징규는 이징옥과 달리 계유정난에 가담했기에 공신에 책봉되었는데 이 사건으로 체포되었으나 전부터 이징옥과 사이가 안좋았고 적극적으로 난을 토벌하기도 하여서 세조가 그들을 연좌하지 않았기에 석방되어 무탈하게 지내게 된다.李節度澄玉者。梁山人。自少武勇絶人。兄澄石亦以力爲州里所伏。其母欲見生野豕。澄石卽日射一豕而歸。澄玉出門二日。始徒手還。母訝之。澄玉與其母出外庭。一大豕臥於場。脅息瞪目。其狀甚獰。蓋澄玉必欲令母目見生豕。跡而逐之。超山越壑。竆日夜蹴迫。必使疲頓氣盡而至於是也。每射虎。張目叱之。虎便闔眼。低首而走。金宗瑞以江界府使。知澄玉忠且勇。擧以自代。時年二十二。未幾陞拜北方節度使。璽書諭曰。卿之威武大振。雖古人無以過之。虜皆讋服。予甚嘉之。須體寡人之至意。永作北鄙之良將。以副予心。旣莅營。選六鎭藩胡驍敢善騎射者三千。皆隷牙下分爲隊。每廵列邑也。使之各出境迎送焉。光廟受禪。密遣朴好問代之。澄玉疑之曰。曾有密敎。非國有大事不召我。今佗將之匿聲來代。何也。於是捽下新節度問之。好問不敢諱。遂殺之。謀擧兵直指京師。約其麾下曰。吾渡江請命于天朝。復上王事蔑不濟矣。決以明日行。鍾城府使鄭種知其謀。是夜使人伏於板上。乘其熟睡斫右臂。澄玉驚起奪其劒。赤身飛出。左手擊殺百餘人。身亦被亂箭死之。年二十四。忠臣義士聞之。莫不暗暗流涕。光廟三年。爲冤死人招魂。設供於東鶴寺。特書李澄玉於錦城大君及六臣列。嗚呼。聖人之不以嫌害義。以勸千古爲人臣者盡心所事之忠。其意不亦宏達乎哉。
이 절도(李節度) 징옥(澄玉)이라는 자는 양산(梁山)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무용(武勇)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 형인 징석(澄石) 또한 힘으로 주리(州里)에서 탄복하였다. 그 어머니가 산 멧돼지를 보고 싶어 하였는데 징석이 그 날로 활로 멧돼지 한 마리를 쏘아 돌아왔다. 징옥은 문을 나선지 이틀 뒤에야 비로소 맨손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묻자 징옥은 그 어머니와 함께 뒤뜰로 나왔다. 한 마리의 큰 멧돼지가 마당에 드러누워 있는데, 씨근거리며 눈을 부릅뜨고 있어 그 생김새가 매우 기괴하였다. 대개 징옥이 꼭 어머니로 하여금 산 멧돼지를 눈으로 보게 하기 위하여 뒤 밟아 쫒아, 어떤 때는 몰고 어떤 때는 역습을 당하면서, 산을 넘고 들을 건너면서 밤낮으로 발로 차고 협박하여 굴복시키고, 반드시 기진맥진하게 만든 다음에 발로 차서 몰고 온 것이었다. 호랑이를 쏠 때마다 눈을 부릅뜨고 호통을 치면 호랑이가 눈을 감고 머리를 떨구고 달아났다.
김종서(金宗瑞)가 강계부사(江界府使)가 되어 징옥이 충성스럽고 또한 용맹함을 알고 자신을 대신하도록 천거하였다. 이때 나이 스물둘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위가 올라서 북방절도사(北方節度使)가 되었다. 새서(璽書)로 그를 효유하였다.
"경의 위엄과 무예가 크게 떨쳤으니 옛 사람이라 하여도 그보다 더하지는 못할 것이다. 오랑캐들이 모두 와서 복속하였으니 내 매우 가상히 여긴다. 모름지기 과인의 지극한 뜻을 이루었다. 길이 북도(北鄙)의 양장(良將)으로 내 마음에 부합하라."
드디어 군영에 이르러 육진(六鎭)의 번호(藩胡)들로 날래고 용감하며 기사(騎射)를 잘하는 자 3천 명을 뽑아 모두 아장 아래에 나누어 예속시키고 부대로 삼았다. 열읍을 순시할 때마다 그들을 시켜서 각기 국경을 나가서 맞이하고 보내고 하였다.
광묘(세조)께서 선양을 받으시고 은밀히 박호문을 보내어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징옥은 그를 의심하고 말하였다.
"일찍이 밀교(密敎)가 있기를 '국가에 큰 일이 없으면 나를 부르지 않겠다'고 하셨다. 지금 다른 장군이 그 온다는 소리도 숨기고 와서 나와 교대하려 하니 어째서인가?"
호문은 감히 숨기지 않았다. 마침내 그를 죽이고 모의하여 군사를 일으켜 곧장 경사로 나아가고자 하였고, 그 휘하에 약속하였다.
"내가 강을 넘어서 천조에 명을 청하면 상왕(단종)을 복위시키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를 날 밝는 대로 결행할 것이다."
종성부사 정종이 그 모의를 알고 그날 밤에 사람을 시켜서 판상에 숨어서 그가 깊이 잠든 틈에 그의 오른편 어깨를 찍어 끊었다. 징옥이 놀라 일어나서 그 칼을 빼어 맨몸으로 솟구쳐올라 왼손으로 수백 명을 쳐 죽이고, 그 자신도 어지러이 날아드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이때 나이 24세였다. 충신 의사가 이를 듣고 암암리에 눈물 흘리지 않는 자 없었다. 광묘 3년(1457년)에 원통하게 죽은 자를 위해 초혼하고 그 공양을 동학사(東鶴寺)[19]
에서 베풀었을 때, 특별히 이징옥을 금성대군과 여섯 신하의 반열에 썼다. 오호라, 성인이 그 꺼리는 바를 가지고 의를 해치지 않으심으로 하여 천고에 인신된 자에게 그 마음을 다해 힘쓰는 충성을 권하게 하셨으니, 그 뜻이 또한 멀리까지 미치지 않을 것인가.-
번암선생집(樊巖先生集)권55 전(傳) 이절도전(李節度傳)#
계룡산 동학사 숙모전에 배향되었고, 강원도 영월군 장릉의 단종 배식단 사우에 배향되었다. 1698년(숙종 24) 《장릉지(莊陵誌)》에 신원상소(伸寃上疏)가 올려졌으며 여러 차례 논의 끝에 1791년(정조 15년) 관작이 회복되고 충강(忠剛)의 시호가 내려졌다. 이어 장릉배식단(莊陵配食壇)에 배향되었다. 그러나 정조 사후 노론이 집권한 후에 다시 관작이 추탈되었다.
1908년(융희 2년) 4월 30일에야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의 건의로 복권되었다.
4. 매체
고우영과 윤승운의 만화로 알려졌으나, 이 시대를 다룬 사극에서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이라곤 해도 이렇듯 초인적인 용력과 관련된 일화가 많이 남아 극화하기 좋은 요소를 잘 갖췄는데도 어찌 된 일인지 이 시대를 다룬 사극에서는 그저 그런 역사의 단역 정도로 등장한다.
- 사극 사육신에서는 김종서보다 더 키가 작은 인물이 맡았다.
- 한명회에서는 아주 악의적으로 왜곡을 해놔 황제가 되었다고 실실 웃어제끼기나 하는 한심한 모습에 최후 장면도 마치 만취 노숙자처럼 만들어놨다. 이징옥의 기록상 모습과 지나치게 차이가 심할 정도로 사람 하나를 비하해놓았다.
- 용의 눈물 92회에서 아주 잠깐 나왔는데 태종이 문과, 무과의 장원 급제자들에게 직접 어사화를 내리고 축하하는 장면에서 문과 장원 급제자 조말생과 함께 무과 장원 급제자로 등장한다.
- 왕과 비에서도 잠시 등장했는데, 작품 자체가 문종의 승하로 시작하다 보니 청렴한 인품이나 여진족 토벌에서 세운 공적 등은 제대로 묘사되지 못했으며 김종서의 추종자로만 그려졌다. 반란 자체도 황제를 칭하자마자 곧바로 진압되는 식으로 짧게 묘사되었고, 그나마 나레이션에서 김종서와 함께 북방의 영웅이었다는 식으로 띄워주기는 했다. 담당 배우는 다음 작품인 태조 왕건에서 홍유 역을 맡은 송용태.
- 본격적으로 세종 시대를 다룬 대왕 세종에서는 등장하지도 않아서 이징옥의 역할을 김종서가 모조리 가로채는 사태가 발생했다. 하기야 음악 면에서 지대한 공을 세운 박연도 잘려나가는 등 고증 면에서는 영 졸작이라고 해야 할 작품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