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연(1970)

 

[image]
[image]
1987년 리즈 시절.
2006년 미국에서 잠시 귀국했을 때.
1. 기본 정보
2. 소개
3. 활동 내역
3.1. 1집 (1988년)
3.2. 2집 (1989년)
3.3. 3집 (1990년)
3.4. 작사가, 가창력
3.5. 루머로 인한 마음고생, 미국행
3.6. 그 이후
4. 이상은 폭행(?) 루머
5. '' 겹받침 오자 사건


1. 기본 정보


이름
이지연(李智姸)
본명
이진영
출생
1970년 10월 31일[1] (53세)
경상북도 대구시 남구(현 대구광역시 남구)
학력
대구봉덕초등학교
서문여자중학교
경복여자상업고등학교
서울예술전문대학 (중퇴)
가족
1남 3녀 중 셋째[2]
직업
가수, 작사가, 요리사
데뷔
1987년 1집 '그때는 어렸나봐요'

2. 소개


대한민국의 가수.
고등학교에서 보컬그룹 '재뉴어리'의 싱어를 하다가 가수로 나서게 되었다. 데뷔 당시 맑고 깨끗한 얼굴에 특별히 기교를 부리지 않고 나오는 그대로의 목소리로 노래해 신선한 느낌을 준다는 평을 받았다.#
당시 짧은 기간 활동하던 동명이인의 남자 고교생 가수가 있었기 때문에 이지연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했다. 1987년 말에 1집 '그때는 어렸나봐요'로 앨범이 나오며 데뷔했지만 실제 활동은 1988년 초부터다. 가수 데뷔 전에 “이진영”이라는 이름으로 잠시 잡지 모델로 등장하기도 했다.
데뷔하자마자 김완선과 잠깐이지만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며 함께 '여고생 가수'로 인기몰이를 했다. 10대 미모의 여가수라는 이유만으로 라이벌화 시켰지만, 이때의 이지연은 김완선을 능가하는 슈퍼 루키로 바로 자리매김을 했다.[3]
이후의 강수지[4], 하수빈 등 1990년대 등장한 청순 스타일의 여성 솔로가수의 기획에도 큰 영향을 준 가수.
'''사실상 대한민국 여자 아이돌 솔로 가수의 시조격인 인물이다.'''

3. 활동 내역



3.1. 1집 (1988년)


'''<그 이유가 내겐 아픔이었네>'''가 큰 히트를 기록하며 다운타운 차트에선 1위를 기록하고 가요톱10에서도 정상권에 오래 머물며 음악적으로도 빅히트했지만 무엇보다도 청순가련한 외모의 10대 여가수의 등장은 센세이션했고, 당시 유행히던 책받침 해외 3대장(소피마르소, 브룩쉴즈, 피비케이츠)에 맞서던 국내 스타의 선두주자였다. 이미연, 최수지, 이상아, 김혜수 등이 국내 책받침 스타로 유명했으나 가수로는 이지연이 거의 유일했다.
<그 이유가 내겐 아픔이었네>에 이어 후속곡 '''<난 사랑을 아직 몰라>'''에서는 10대 소녀의 발랄한 댄스를 선보였고 TOP 5위권의 성적을 올리며 연말 KBS 가요대상에서 남녀 통합으로 한 명에게만 주어지는 “신인가수상”을 수상했다. 훗날 <난 사랑을 아직 몰라>는 영화 “어린신부” 주제가로 주인공 문근영이 리메이크하여 재조명된 적이 있다.
위의 두 곡 외에도 1번 트랙 '''<그때는 어렸나봐요>'''와 인순이의 곡을 리메이크한 '''<눈물의 편지>''', '''<남겨진 슬픔,사랑>'''등이 인기를 모았다
미국의 세계적 팝스타 티파니가 내한했을 때 합동 공연을 선보였다.

이지연 - 그 이유가 내겐 아픔이었네 (1988)

3.2. 2집 (1989년)


큰 인기를 모은 데뷔 앨범에 이어 1989년 2월 발표된 2집 娟(연, 1989년)에서는 그 유명한 ''''바람아 멈추어다오''''가 있다. 이 곡은 당시 젊은층을 겨낭한 곡들이 1위까지 쉽지 않던 가요톱10에서 5주 연속 1위를 기록하며 골든컵을 수상했다. 당시 투표인단으로 순위가 결정되는 가요톱10에선 중장년층 투표인단이 꽤 비중을 차지해서 하이틴을 겨낭했던 당대 가장 인기 많았던 남성그룹 소방차는 1위 기록이 전무했고[5], 김완선의 곡들도 인지도는 높았지만 1위를 그렇게 많이는 하지 못했고 트로트나 조용필, 전영록, 정수라, 이선희 같이 전 세대 두루 인기있는 가수들의 곡들이 1위를 독차지했다는 걸 감안하면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 해에 박남정이 <널그리며>와 <사랑의 불시착>과 같이 골든컵을 받으면서 비로소 젊은 층의 발랄한 곡들이 정상에 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곧 박남정과 이지연이 젊은 층 뿐만 아니라 전 세대의 인기를 골고루 얻었다는 증거라고도 볼 수 있다.
1989년 상반기를 강타했던, <바람아 멈추어다오> 에 이어서 슬픈 마이너 발라드곡 '''<슬픈안녕>''' (My Love로 시작하는 가사때문에 제목을 “My Love”로 기억하는 사람도 있고, 우스개소리로 “라일락”으로 기억한다는 라디오 사연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이 TOP 5위권의 히트를 기록하며 전혀 상반된 분위기의 노래들로 보다 음악적으로 성숙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외에도 <바람아 멈추어다오>와 같이 전영록이 작곡한 어쿠스틱 발라드 '''<그후론>'''과 고3 시절 담임 선생, 친구들과 녹음하여 화제가 된 '''<졸업>'''이 히트되었고 특히 <졸업>은 매 졸업시즌 리퀘스트 송으로 30년이 가까이 지난 지금도 자주 들을 수 있다.
1989년 가을, ABU 국제 가요제에 한국 대표로 출전하여 3위에 입상하기도 했다. '''<사랑을 위한 밤>''' (Love For Night) 이 곡은 이 후 1990년 여름에 발매된 앨범에 뒤 늦게 새롭게 편곡되어 수록되나, 이미 1989년 말에 앨범이 없는 곡임에도 MBC 가요순위 프로그램 “쇼 네트워크” TOP 10안에 들기도 하며(당시 가요순위는 앨범판매량 점수가 컸는데 앨범이 없음에도 상위권에 올랐다는 건 큰 인기를 끌었다고 볼 수 있다) 현재에까지도 회식장소 노래방 애창곡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렇게 1989년을 자신의 해로 만들은 이지연은 MBC와 KBS 에서 10대가수상과 올해의 가수상을 수상했다.

대표곡인 '바람아 멈추어다오'.

3.3. 3집 (1990년)


최고의 두 해를 보낸 뒤, 1990년을 맞이한 이지연에게 다소 이상한 기류가 감지되었다. 봄에 녹음하여 여름에 발매된 3집 앨범의 타이틀 곡 '''<늦지 않았어요>'''라는 다소 성인풍의 발라드곡에 트레이드마크였던 긴 생머리를 쇼커트한 뒤 컴백하여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당시 음악잡지 포토뮤직에 미술공부를 하러 유학을 가려고 한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이후 팬들의 껌테러에 긴 머리를 자를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 “언니~ 사랑해요!”라고 하며 머리에 붙이고 갔다고... 이처럼 그녀는 여학생들의 이유없는 안티에 시달린 원조다.
아니나 다를까 타이틀곡 <늦지 않았어요>가 가요톱10 TOP 5까지 오르며 상승곡선을 타던 1990년 8월 즈음, 스포츠신문들은 이지연의 잠적, 증발 등을 대서특필하며 쇼킹한 소식을 알렸다.
3집에는 위에 언급한 대로 '''<사랑을 위한 밤>'''(Love For Night)이 재편곡되어 수록되어있다.

이지연 - 늦지 않았어요 (1990)

3.4. 작사가, 가창력


  • 1집 그때는 어렸나봐요 / 남겨진 슬픔, 사랑
  • 2집 슬픈안녕 / 서툰이별 / 사랑은 / 차가운 미소만이 / 그대
  • 3집 하지만 / 세상은 하나, 당신도 하나 / 내마음 나도 몰라 / 그대는 변덕쟁이
위 곡들은 이지연 본인이 직접 작사한 곡이라고 한다. 보수적이었던 당시에 어린 여고생이 이런 사랑 노래 가사를 쓰는걸 염려한 기획사에서 작사가로 이름을 못 올리게 했다는 이야기를 팬카페에 밝힌바 있다. 3집 곡들은 본명인 이진영 작사로 올려져있다.
20년이 훌쩍 넘은 지금 보자면 보이시한 음색과 자연스럽게 올라가는 고음 등 가창력도 매우 뛰어난 수준이지만 활동하던 당시에는 외모만 앞세웠다는 평가를 받았다. 사실, 이지연의 후덜덜한 외모와 그 때 당시 활동했던 가수들의 후덜덜한 명단을 보면 이해는 간다. 특히 디바 타입 여자가수는 이 시기가 전성기였다. 당대 라인업을 보면 이선희를 시작으로 민해경, 양수경, 나미, 조갑경 등이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신효범이 갓 데뷔했던 시절이다. 성인가요계에도 김연자, 김지애, 현숙, 김수희, 문희옥 등과 이미자 같은 대형스타들도 현역이었다. 사실 그녀는 가창력 면에서만큼은 어떻게 보면 시대를 정말 잘못 타고난 비운의 가수다.

3.5. 루머로 인한 마음고생, 미국행


활동 시절, 당대의 라이벌이었던 이상은의 뺨을 때렸다는 루머, '' 겹받침 오자 사건, 매니저였던 유현상과 부적절한 관계였다는 루머, 11살 연상의 무명의 기타리스트와의 불륜 루머(그 기타리스트는 이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이지연이 미국으로 잠적하자 이혼남의 아내가 남편이 이지연 때문에 이혼했다면서 '내 남편 내놔'라는 식의 인터뷰를 여성잡지와 해서 이지연이 유부남과 불륜을 저질렀다고 소문이 났다.) 등 각종 루머들과 빽빽한 스케줄로 힘들어하던 이지연은 1990년 3집 활동 중에 11살 연상인 언더그라운드 가수인 정국진[6]과 사귀였지만 가족들의 반대가 심해지자 둘이 미국으로 잠적해 버렸다.

3.6. 그 이후


1992년에 다시 한국으로 귀국한 그녀는 기자회견을 통해 방송 활동을 재개한 다음 마치 자신의 이야기인듯 한 4집 <삶은 한번뿐인걸요>를 발표했지만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여자 아이돌 팬덤의 형태를 형성하고 있던 이지연의 남자팬들은 남자와 야반도주해서 미국에서 결혼하고 돌아온 그녀를 용납하지 못했고,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가요계가 완전히 재편성 되어 방송사 등에서도 이전의 스타로 대우하지 않았다. 실제 어느 기자는 이 전 미국 잠적 때 허위 기사로 따지자(한참 미국행 후, 행복하게 잘 있다는 사진과 편지를 보냈는데 마트에서 어렵게 알바를 한다 등으로 기사를 내보냈다고... 이를 따지자 “옛날의 이지연인 줄 아느냐, 매장시킬 수도 있다”고 협박도 했다고...
결국 4집은 가요계의 블루칩들(작사가 박주연 작곡가 박강영 등)과 함께 상당한 완성도가 있음에도 완전히 실패했고, 그 뒤 그녀는 대중의 싸늘한 반응 등에 염증을 내면서 그대로 연예계를 은퇴했다.
이후 2006년에 일시 한국으로 귀국해서 콘서트 7080 등 방송에 잠시 출연하였고, 귀국의 가장 큰 이유였던 '추억의 동창회: 프렌즈 80' 콘서트 공연을 했다. 이 공연은 2006년 12월 6일 2회에 걸쳐 서울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다섯 손가락, 조덕배, 원준희, 김성호, 박성신, 김혜림, 들국화최성원 등이 출연하였고 이지연의 출연소식이 가장 큰 뉴스거리가 되었다.
연예계 은퇴 후, 이지연은 주로 미국에서 거주했으며[7] 요리에 매진하여 프랑스 유학까지 다녀왔다고 한다. 현재는 요리연구가로 활동하는 중이며 미국에서 레스토랑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2008년에 성격 차이 등 여러 갈등으로 인해 18년 만에 남편과 이혼했으나, 친구처럼 지내고 있다고 한다.# 해당기사 이후 9살 연하의 미국인 셰프와 약혼을 했다고 한다#
2018년 1월 14일에 슈가맨 2 첫방송에서 희열팀 첫 슈가맨으로 출연했다. 슈가송은 바람아 멈추어다오. '''첫 회에 첫 슈가맨'''으로 초청해 주셨으니 참가했지, 다른 경우면 안 왔을 거라면서 출연을 했는데, 객석 인터뷰에서 자신과 동년배인 40대가 '''이'''지연의 노래 아는거 불러달라 했을때, '''김'''지연의 노래 <찬 바람이 불면>이라는 노래를 불러서, 를 입고, "괜찮아요, 40대때는 다 그래요."라고 살짝 디스하고, 20대 방청객이 예전에 비해서 ''좀 세월이...''라는 얘기를 듣고, "세월 금방 가요!!"라면서 욱하는 아주머니의 모습을 보이는 등의 웃음 포인트를 드러냈다.

[슈가송] 남심 스틸러♥ 이지연 '바람아 멈추어다오'
그리고 1992년 이후 25년만에 장덕의 오마쥬 프로젝트로 그녀의 작사 작곡인 <연민>을 발표하였으나, 이는 가수로의 복귀가 아닌 활동 당시 많이 따랐던 가수 장덕을 기리며, 앨범 제작사인 ㈜아트인터내셔널 김철한 대표의 간암 말기 투병 중 응원하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2018년 4월 27일 2018 남북정상회담이 진행되었을 때 CNN에 출연했으며, 직접 평양냉면을 조리하면서 소소하게 화제가 되었다. #영상(SBS 비디오머그) 한국 방송으로 치면 슈가맨 출연 이후 3개월만에 출연이다. 그리고 여기서도 그녀는 얼굴이 거의 그대로다.
2017년 애틀란타 조지아주 브룩헤이븐시 블랙번 공원의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과 2018년 1주년 기념식에서 김광석바람이 불어오는 곳를 부르는 등 의미있고 의식있는 활동을 하며 소소하게나마 근황이 기사로 전해지고 있다.

4. 이상은 폭행(?) 루머


1987년 말 데뷔해 1988년 한창 인기몰이를 하던 중, 1988년 여름 강변가요제에서 '담다디'로 대상을 차지하면서 혜성처럼 나타난 이상은과 라이벌 구도를 형성한 적이 있었다. 보통 김완선과 라이벌이었다고 얘기하는데, 이쪽은 미모의 하이틴 여가수 노선 얘기고 그나마도 김완선이 1년 반 넘게 먼저 데뷔한 엄연히 선후배 관계였기에 같은 해인 1988년 신인상을 두고 경쟁까지 한 이상은과의 라이벌전에 비하면 비교가 안 된다. 오죽하면 20년이 훌쩍 지난 2012년에도 이런 기사가 나올 정도였으니... 이지연 vs 이상은, 누가 더 멋졌나
이상은이 학년이 빨라서 대학생, 이지연은 고등학생이었지만 두 사람은 1970년생 동갑이었고, 1988년에 이지연은 KBS 신인상, 이상은은 MBC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언론에서도 라이벌 구도로 부추기는 측면도 있었다. 사실 10대 아이돌 팬덤에서 이지연과 이상은은 서로 매력 어필하는 부분이 달랐기때문에 남학생팬이 많았던 이지연, 이상은은 여학생팬이 많기로 유명했을뿐 별다른 충돌은 없었다.
그러다 "이지연이 선배 노릇을 하며 이상은의 뺨을 때렸다"는 루머가 퍼지기 시작했다. 루머의 정확한 근거도 없고 누가 봤다더라만 난무한 가운데, 이 소문은 인터넷도 없던 시절에 일파만파 퍼지며 전국의 이상은 팬들은 물론,[8] 예쁜 외모를 평소에 눈엣가시처럼 못마땅해 하던 여학생들까지 모두 이지연 안티로 변모하는 기현상을 낳았다.
[image]
[image]
  • 당시 이상은의 해명글.
결국,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이상은이 직접 나서서 "그런 일이 없다."라며 적극적으로 해명했고, 방송에서도 잡지에서도 '실제로 우리는 사이좋은 동갑내기 친구'라며 다정한 모습들을 많이 연출했음에도 여파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한 아재의 증언
어찌보면 키도 덩치도 더 큰 이상은이 일방적으로 맞았다는 소문이 먹혀 들어갔다는게 싸움을 비교적 잘 아는 남학생들 사이에서는 이해가 안 가는 상황일 수도 있는데, 당시 여학생들이 본 두 사람의 이미지로는 그게 충분히 가능했다. 이지연은 청순한 외모로 남자들에게 인기 많은 깍쟁이 이미지에 상고 출신이라는 점이 합쳐져서 과거에 좀 놀았던 언니라는 소문이 많았고, 이상은은 서글서글 성격 좋아보이고, 학창 시절에도 약간 어리바리한 모범생 이였다는 이미지가 있었다.
실제로 놀지는 않았더라도 이지연이 한 성격했다는 평가는 사실 일반인들 소문을 떠나 연예계 내에도 있었다. 강수지는 본인 데뷔 방송 당시 이지연이 가수 대기실에서 "아니 쟤는 또 뭐냐"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방송에서 말한 바 있다. 다만 이지연이 출연한 다큐에서 강수지와 동석한 자리에서 이 얘기가 다시 나오는데, 실제 뉘앙스는 이보다 훨씬 부드럽다. 해당 방송분을 보면 자신과는 또 다른 청순가련형 아이돌이 나와서 어휴 저건 또 뭐지 하는 식으로 말했다는 듯. 또한 당시 김희애가 진행하던 라디오 방송에 이지연이 나와 무심결에 욕을 했다는 루머까지 있었는데 이후 김희애와 담당PD가 아니라고 해명을 했다
이 루머로 인해 어마어마한 안티세력으로부터 이지연이 받은 고통은 이루 말로 다 못한다고. 대인기피증에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마음고생 한 것은 이상은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이지연, 이상은 둘 다 연예계에 크게 염증을 느끼면서 한국을 떠났다. 그리고, 이런 막장짓을 저지르는 행동은 아들딸 세대에도 변함없이 빠순이 빠돌이로 진화하게 되면서 더욱 막장으로 변했다.
여담으로 2004년에 이지연이 자신의 팬카페에 이상은에 관해서 쓴 글이 있다. 이 글을 봐도 좋은 친구 사이였음을 알 수 있다.

5. '' 겹받침 오자 사건


1990년, 아나운서 이계진이 진행하는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에 출연할 때 정답인 '닭'을 닥'으로 표기하는 실수를 해서 화제가 된 바 있다. 처음엔 '닥'이라고 쓴 이후, 분위기가 이상하자 '닧'으로 고쳐 써서 심지어 긁어 부스럼까지 만든 셈이 되었다.
그때는 요즘같은 인터넷 국어파괴도 없고 TV에서 신문과 책 신간 광고를 할만큼 사회 분위기적으로 독서율도 무척 높던 시절이었다. 실제로 한국 성인 연간 독서율은 1994년 86.8%로 굉장히 높은 수준이었으나 2018년에는 59.9%까지 낮아졌다. 신문 구독률도 1996년에는 69.3%에 이르렀으나 2017년에는 9.9%까지 추락했다. 따라서 발음이 비슷하거거나 어려운 낱말도 좀처럼 혼동하지 않는 등 전반적으로 시청자들의 국어 수준이 상당히 높았다. 맞춤법에 약하면 엄청난 흠결이 될 수 있던 시대였기에 이 사건으로 잘나가던 아이돌 가수 이미지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이후 소속사에서 제지했는지 오락프로 출연이 좀 뜸해지기도 했다.
이상하게도 이 사건의 주인공을 이지연이 아니라 김완선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많은데, 김완선은 백치미를 흘리긴 했지만 신비주의 컨셉이라 이런 퀴즈 프로그램에는 아예 나오지도 않았고, 김완선 본인이 "내가 닭띠인데 닭의 맞춤법을 틀릴 리도 없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당시 방송을 진행한 이계진도 언론에 증언했다.#
그럼에도 아직도 곳곳에선 닭 맞춤법 사건의 장본인이 이지연이냐 김완선이냐를 두고 장대한 병림픽이 2천년대까지 펼쳐지기도 했다.# 여기에 살이 더 붙어서 '닭'에서 ㄺ 받침의 순서를 반대로 바꾼 'ᄃ\ᅡᇃ'으로 썼다는 주장까지 있다. 여기서 본인이 직접 TV에서 봤다면서 그 때 그 일은 김완선이 한 일이라고 꿋꿋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의 병명은 '거짓기억증후군(False Memory Syndrome)'이라는 것인데, 이런 사람들은 이효리와 비 사이의 소위 '따먹' 루머 건으로도 출몰해 활약을 펼쳤다.
얼마나 유명한 사건이었던지, 나중에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에서 패러디가 된 적이 있었고[9], 김병만달인에서도 패러디가 되었다. 배우 이보희김재박을 김재전으로 읽은 사건과 함께 무식한 이미지 하면 떠오르는 가장 유명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1] 과거에는 1971년 1월 30일생으로 알려져있었는데 최근에 바뀌었다.[2] 가족관계는 부모와, 언니 둘, 남동생이 있는데 이지연은 쌍둥이라고 한다.[3] 데뷔는 김완선이 빨랐지만, 1위는 이지연이 더 빨랐고, 심지어 김완선은 없는 골든컵 이력도 있다.[4] 이지연보다 3살 많다.[5] 'G카페'가 3위까지 든 게 최고 기록이다. 이조차도 흔히 기억하는 전성기인 80년대가 아니라 1995년에 재결합하여 기록한 순위이다.[6] '히파이브'의 리드 싱어로 가수 활동을 했었다.#[7] 이혼 이후 어느 스타다큐 프로그램에서 나오기로는 애틀랜타에 거주하고 있었다. 스트레스를 풀러 간간히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홈경기를 보러 간다는 듯.[8] 알다시피 당시 이상은은 보이시한 매력으로 여학생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던 가수였다.[9] 171화로 개그우먼 이성미가 단역으로 출연한 에피소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