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유나이티드 FC/~2011년

 



'''인천 유나이티드 시즌'''
'''창단'''

'''~2011년 시즌'''

2012년 시즌
1. 창단, 2004 시즌
2. 역사에 남을 최고의 시기, 2005 시즌
3. 다소 아쉬웠던 2006 시즌
4. 닥공의 정점, 2007 시즌
5. 장외룡의 아쉬운 복귀, 2008 시즌
6. 일리야 페트코비치의 등장, 2009 시즌
7. 유병수 그 자체, 2010 시즌
8. 명불허전 허정 '', 2011 시즌


1. 창단, 2004 시즌


초대 감독으로 독일 1860 뮌헨 전 감독 베르너 로란트를 영입했고, 지역 출신 스타인 최태욱을 영입하는 등 스쿼드도 곧잘 갖추어 나갔다. 초대 주장은 김현수. 이 시기 합류한 선수 중에는 후일 인천의 초대 레전드의 반열에 오르는 '''임중용, 전재호, 김이섭, 노종건'''도 있었다. 2004년 3월 1일에 벌어진 창단 기념 경기에서 미오드라그 안젤코비치의 득점을 앞세워서 J리그감바 오사카를 4-0으로 대파하며 큰 기대를 받았지만, 시즌 중에는 그리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하면서 K리그 2004 시즌 전기 리그에서 꼴찌인 13위를 기록하면서 팀의 분위기가 상당히 침체된다. 심지어 0:5로 관광당한 적도 있었다. 다름아닌 대구 FC와의 원정 경기. 그 이후로 박이천 감독이 지휘봉을 잡을 때까지 대구 FC에게 만날 때마다 패배했다.
2004년에 영입한 외국인 선수 중 제일 기대를 받은 선수는 2002년 월드컵에서 터키의 최종 3위 기록에 큰 공헌을 한 아스톤 빌라 출신의 '''알파이 외잘란'''이었다. 그러나 까고 보니 알파이는 희대의 망나니였다. 다만 최종적으로는 '''이득'''을 보기는 했다. 외잘란은 2002 월드컵 터키 대표팀 출신이라 많은 기대를 모았지만, 정작 제대로 하는 건 없었고 전북의 에드밀손의 발목을 아작내는 등 경고와 퇴장으로 얼룩진 경기를 펼쳐 6개월 동안 고작 8경기에만 출전했다. 그후 'K리그는 관중수가 적다'고 까다가 그가 원하던 관중이 많은 구단인 우라와 레즈로 120만 달러의 이적료로 이적했다. 공짜로 영입한 선수에게 50만 달러만 주고 우라와로부터 120만 달러의 이적료를 받았으니 인천에게는 70만 달러나 득이었다.[1] 다른 외국인 선수 중에는 일본 국가대표 출신의 마에조노 마사키요, 스페인 라리가에서 뛴 적이 있는 조르제 토미치, 유망주 제난 라돈치치도 있었으나 라돈치치는 첫 해 말 그대로 잉여에 가까웠고 마에조노는 부상이 겹쳐 기회를 많이 못 받았으며, 토미치는 시즌 내내 활약이라고 할 것이 없었다. 그나마 제 값을 한 선수는 창단 첫 골의 주인공 미오드라그 안젤코비치이지만 안젤코비치도 여름에 J리그로 떠났다. 그러자 알파이, 안젤코비치가 나가서 생긴 자리에 인천은 드라간 스토이사블례비치라디보예 마니치를 영입했다. 이 중 드라간은 실패로 끝났지만 마니치는 리그컵에서 대활약을 펼치며 성공한 선수로 꼽혔다. 그 후 베르너 로란트 감독이 사임하고 장외룡 감독대행 체제로 나가기 시작하면서 팀이 살아나기 시작해서 마무리는 나름 희망적인 첫 시즌을 끝냈다.

2. 역사에 남을 최고의 시기, 2005 시즌


장외룡 감독이 대행 딱지를 벗어던지고 정식 감독으로 나선 시즌이며, 임중용이 주장이 된 첫 시즌이고, '''역대급 기적'''으로도 언급된다. 시즌 시작 전 신인으로는 최효진이 들어왔고, 트레이드를 통해서 미드필더 서동원이 들어왔다. 이 시즌에 영입된 선수 중에는 도 있었는데, 이 선수들은 인천에 오랫동안 머물며 팬들의 응원을 받았으나 결국 최후에는 승부조작으로 커리어를 마감했다. 외국인 선수로는 셀미르야스민 아기치가 기존 라돈치치와 마니치와 함께 뛰었고, 당시 아기치, 라돈치치, 마니치는 '''삼치'''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마니치가 여름에 나간 직후 슬로베니아 출신의 세바스티안 시미로티치가 왔었으나 제대로 적응에는 실패했다.
그렇게 시작한 2005 시즌에 인천은 결국 '''K리그 준우승'''[2]을 달성한다. 이 과정은 인유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비상>에 잘 나와있다.[3] 2005 시즌 준우승으로 장외룡 감독에겐 외룡사마란 별명이 생겼다. 이는 K리그 시민구단 중 역대 최고 성적이다.
인천은 처음으로 K리그 시즌 베스트 11을 수상한 선수를 배출('''임중용''')했고, 방승환이나 , 최효진 등 젊은 선수들이 팀에 자리를 잡으며 미래를 기대할 만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3. 다소 아쉬웠던 2006 시즌


영광의 준우승을 이룬 이후, 주전 미드필더 서동원은 결국 한 시즌만에 성남 일화 천마로 이적하게 되었다. 셀미르는 당초 떠날 줄 알았지만, 결국 시즌 시작 직전에 완전영입을 하여 다시 인천으로 돌아왔다. 아기치와 셀미르, 방승환, 라돈치치, 최효진, 김치우, 임중용, 전재호, 김학철, 김이섭 등 주전급 플레이어들을 대부분 지켰기에 전력 면에서는 전 시즌과 비슷해 보였지만, 여름 이적시장에서 셀미르와 아기치는 결국 이적했고 라돈치치는 2005년의 폼을 회복하지 못하면서 팀 전체가 다소 기대에 못 미쳤다. 셀미르와 아기치의 빈 자리에 새로 들어온 선수들은 드라간 믈라데노비치블라제 일리요스키였는데, 후자는 결국 적응에 실패했지만 드라간은 이후 몇 년간 인천 중원을 책임지는 선수가 되었기에 이 시즌에도 긍정적인 부분은 분명 있었다.

4. 닥공의 정점, 2007 시즌


장와룡 감독이 2006 시즌 종료 후 유학을 떠나면서, 2007년은 박이천 감독대행이 한 해를 맡아 이끌게 되었다. '''그리고 박이천은 그만의 색깔이 드러나는 인천을 만들었다.'''
시즌 시작 전 유망주에 그쳤던 이근호윤주일과 트레이드했고 당시에는 인천이 이득이라는 소리가 있었지만... 이근호는 이후 포텐이 폭발하여 국가대표가 되었고, 윤주일은 6개월만에 인천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김상록, 데얀 다미아노비치'''의 영입은 이 시즌 인천을 먹여살린 최고의 영입이 되기도 해서 인천의 이적시장은 나름 준수했다고 볼 수 있다. 김상록 - 데얀 - 방승환의 공격 라인과 이를 받쳐주는 박재현, 드라간 등의 활약이 눈부셨고, 인천은 많은 실점을 냈지만 또 엄청난 득점도 기록했다. 김상록은 이 시즌 리그와 리그컵을 합쳐서 10골을 기록하였고, 데얀은 리그 14골, 리그컵 5골, FA컵 1골 등 첫 해에 20득점을 혼자 책임지는 위엄을 보여줬다. 다만 방승환은 시즌 막판 퇴장 당시 사건을 일으키는 바람에 '''무기한 출전 정지'''를 먹어 아쉽게 시즌을 마무리했다.
비록 6위 안에 들지는 못했지만, 박이천 대행은 2018년까지의 모든 감독 중 '''가장 승률이 높은 감독'''으로 남아있다.[4]
그리고 6위 안에 들지 못해 플레이오프 진출을 하지 못한 데에도 한 사건의 영향이 꽤나 컸다. 바로 '''임중용에두가 충돌했던 사건.''' 시즌 후반기에 인천은 우승에 도전하던 수원 삼성 블루윙즈를 만나게 됐는데, 이 경기에서 선제 실점을 허용하기는 했으나 10경기 무패 행진을 기록하던 인천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던 중, 에두가 임중용에게 파울을 범하고, 임중용이 에두를 밀치고, 다시 에두와 충돌하는 상황이 일어났는데, 갑작스럽게 임중용이 퇴장당하고 에두는 경고를 받았다.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한 관중들 입장에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판정에 불만을 품은 인천은 거칠어졌고, 결국 전재호이관우에게 거친 반칙을 범하고 퇴장당한다.[5] 팀의 두 정신적 지주를 한 번에 잃은 인천은 무너지기 시작했고, 스코어도 3 : 0으로 벌어졌다. 그런데 그 순간, '''인천은 에두가 임중용에게 침을 뱉는 영상을 입수하여 전광판에 계속 틀어놓았다.''' 그와 함께 관중들은 분노했고, 심판은 이에 압박감을 느끼며 괴상한 판정을 반복하였다. 동시에 수원 선수들이 흔들리고 인천 선수들은 다시 경기에 집중하게 됐다. 이어서 수원도 오심에 휘둘리게 되면서 스코어는 순식간에 3 : 2까지 왔고, 수원은 야유를 받으며 공을 돌려 시간을 보내 간신히 버텼다. 경기 종료 후 팬들은 심판에게 거세게 항의하고 퇴근길을 막았으며, 데얀 다미아노비치가 인터뷰에서 거센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다. 인천, 에두, 전재호는 사후징계를 받았으나, 정작 심판은 아무 징계가 없었다. 에두를 잃은 수원도 결국 우승에 실패했고, 인천은 심판 판정에 굉장히 예민한 모습을 보이다가 결국 앞서 언급한 방승환의 심판 판정에 대한 항의에 이은 퇴장 사건까지 벌어지며 무너졌다. 전재호의 선례로 인해 방승환은 결국 '''1년 출전 정지'''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6]

5. 장외룡의 아쉬운 복귀, 2008 시즌


유학을 다녀온 장외룡 감독이 복귀했으나, 전 해의 화끈한 공격 축구와는 너무 대비되는 수비축구로 전술이 전환되면서 경기력도, 관중도 줄었고 그렇다고 성적도 그다지 인상깊지는 않았다. 전 해의 영웅 데얀은 결국 현금 + 이정열, 김태진으로 FC 서울로 떠났는데, 이렇게 받아 온 선수들이 완전히 망하면서 인천에게는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거기에 김상록은 장외룡 전술에 부합하지 못하면서 폼이 완전히 무너졌다. 그래도 라돈치치가 부활하였고, 수비축구에 맞는 김영빈 등의 선수들이 기회를 얻기도 하는 등 나름의 성과는 있었다. 이 시즌에 '인천의 아들' 안재준이 입단했다. 한편, 임중용이 노종건에게 시즌 중반에 주장 완장을 넘겨주면서 오랜 주장 생활을 마감했다.

6. 일리야 페트코비치의 등장, 2009 시즌


장외룡 감독은 2008 시즌 종료 후 J리그로 진출했고, 이에 따라 인천은 새 감독을 물색했다. 그리고 그렇게 영입한 사람이 로란트에 이어서 오란만에 온 외국인
감독인 일리야 페트코비치. 이전까지는 팬들에게 수원 2중대라 불릴 정도로 수원에 약한 모습을 보였으나, 2009년에 수원의 몰락과 함께 그 징크스를 깼다. 5위로 6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나, 4위 성남과 6강 플레이오프 전에서 성남 일화의 선수가 2명씩이나 퇴장당한 상태에서도 최악의 골 결정력을 보이며 1:1로 비긴 후 승부차기에서 3:2로 패배했다.
2009년에는 '''유병수'''가 신인으로 영입됐고, 손대호우성용 등 국대 출신 선수나 정혁, 장원석 등 유병수만큼은 아니어도 준수한 신인들도 영입되면서 팀의 개편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페트코비치는 본인의 정보력을 살려서 좋은 경력의 외국인 선수 오그넨 코로만을 영입하기도 했는데, 코로만은 첫 시즌에는 나름 기대를 충족시켰지만 점차 아쉬운 모습을 보였다.

7. 유병수 그 자체, 2010 시즌



2010 시즌은 항상 신나게 해오던 선수팔기를 안한 유일한 해였다. 이적해 나간 선수라고 해야 김상록(부산), 박재현(그리스) 정도로 2년간 확실한 주전은 아닌 선수들이었다. 물론 김상록은 2007년 인천의 핵심이었고, 박재현은 5년간 적절한 스쿼드 플레이어임은 증명했으나 김상록은 폼이 너무 무너졌고 박재현은 연봉 협상에 이견이 있어 보내기는 했지만 보낸다고 아주 아쉬운 레벨은 아니었다. 기존 멤버가 그대로 남아 있고 감독도 적응기가 끝난 2년차가 되었으니 뭔가 다른 분위기를 기대하게 해주었다.
그런 기대에 걸맞게, 인천은 시작과 동시에 연속 홈경기에서 전남 드래곤즈(1:0), 광주 상무(2:0)를 이기며 달라진 듯 했'''지만...''' 바로 이어진 성남 원정에서 6:0, 창단 이후 최다 실점 패배를 찍어주셨다. 후반 17분동안 무려 4실점... 이후 신나는 4연패를 찍으며 승점 자판기 노릇을 하다가 똑같이 막장짓을 하고 있던 포항을 만나 '''유병수'''의 대폭발로 4:0 홈승리를 찍으며 분위기를 반전한다. 유병수는 이날 시즌 첫 득점이자 4골을 모두 집어 넣었고, 이후 '''4경기 9골을 작렬, 득점선두로 올라간다.''' 무난한 팀들(대구, 대전, 강원)과의 대진이 이어지면서 슬금슬금 다시 승점을 쌓고 있는 중. . 경질론이 나돌던 페트코비치 감독도 목을 보전하게 되었고 5월에는 리그 8위에 도달했다. 유병수는 2010 남아공 월드컵 엔트리가 발표되고 나자 K리그에서 미친 듯이 골을 몰아넣고 있다. 안습...
그러나 이러한 호재가 결국 꺾였는데, 시즌 초부터 부인의 건강악화로 팀에 휴가를 얻고 잠시 떠난 일도 있던 페트코비치 감독이 월드컵 휴식기에 구단과 상호계약해지 방식으로 본국으로 떠났다. 전반기 연패와 연승이 감독의 휴가 복귀와 맞물려 있다는 것을 볼 때, 덕장 스타일의 페트코비치 감독이 떠나면서 팀의 후반기 전망에 불안요소가 더해졌다. 그리고 인천은 김봉길 코치를 대행으로 일단 버티려고 했지만... 역시나 월드컵 이후 무한연패로 승점자판기가 되었다. 김봉길 대행은 이 때 연패 행진을 거듭하며 팬들의 기대감을 완전히 날려버리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2012년에 대행으로 돌아온 김봉길은 이 때와는 달랐다고 한다.
일찌감치 FA컵도 탈락하고 2010 시즌은 조기 마무리로 들어가려는 상황에서... 2010년 8월. 월드컵 끝나고 포항으로 갈 줄 알았던 무재배의 달인께서 생뚱맞게 인천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K리그 팬들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명성에 걸맞게 9월 12일 현재 부임 후 '''2연무'''를 기록했다. 9월 19일 경기에서 대구를 상대로 4-1 대승을 거두며 복귀 첫 승을 기록했다. 이후 새로운 라이벌 더비를 만들겠다며 호기롭게 나선 서울과의 경기에서 0-2로 완패했고 다음 라운드에선 약체 대전을 맞아 유병수의 해트트릭으로 3골차로 앞서가다 후반 중반부터 내리 3골을 허용하며 보기드문 3-3 무재배를 연출했다. 전남 원정에서는 서로 무기력한 경기로 0-0 무재배. 경남과의 경기에서도 2:2로 비겼다!

'''3연무'''라는 기록에 팬들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
2010년 11월 7일 정규리그가 종료된 시점에서 허정무 감독의 K리그 시즌 전적은 2승 6무 3패. 참고로 허정무 감독 부임 전의 인천의 성적은 6승 1무 10패 '''무승부 경기가 하나밖에 없었다'''. 라고는 하지만... 사실 이는 짓궂은 축구팬들의 농담에 가까운 것으로, 속사정을 뜯어보면 좀 다르다.
2010년 페트코비치 감독의 기록은 승-승-'''패-패-패-패-패'''-승-무-승-승-승. 그러다 급작스레 사임한 뒤 인천은 팀이 붕괴, 또 다시 '''패-패-패-패-패''' 포풍 5연패를 찍으면서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런 와중에 새로 부임한 허정무 감독이 팀을 추스려 2승 6무 3패를 기록하여 성적을 끌어올렸다. 결코 우습게 볼 일이 아니다. 결국 2010 시즌 최종 순위는 11위. 그래도 창단 이후 첫 득점왕 배출('''유병수''')라는 기록을 내는 데 성공.

8. 명불허전 허정 '', 2011 시즌


2011 시즌 8라운드 현재 2승 3무 3패로 14위. 그나마 잘 캐던 무승부는 죄다 어디로 가고 4월 30일 리그 7라운드에선 전북 현대 모터스에게 2:6으로 '''캐관광'''을 당하지 않나, 리그가 아닌 컵대회이긴 하지만 이후 5월 5일 벌어진 포항 스틸러스와의 경기에선 1:4로 역시 떡실신.
5월 6일에는 주전 골키퍼이던 윤기원선수가 자동차 안에서 자살한 것으로 밝혀져(과연...) 축구계와 인천 유나이티드 팬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이후 대전 원정에서 2:1 역전승, 부산전 0:0 무, 광주 원정에서 1:0 승, 그리고 12라운드 수원전에서 창단 이후 수원전 홈경기 무승 징크스를 깨는 2:1 승으로 5승 4무 3패로 6위를 기록중이다. 승점 상으로는 공동 4위 (제주, 전남, 인천)을 기록중이며 13라운드 경기 결과에 따라 최대 3위까지 올라갈 수 있는 상황이다. 13라운드 상대는 12라운드 현재 5위를 기록중인 전남 드래곤즈와의 홈경기. 13라운드 전남과 1:1 무승부, 14라운드 울산과 1:1 무승부를 기록했다. 15라운드는 경인더비로 뜨고 있는 서울 원정. 여기에서도 1:1 무승부를 기록하며 현재 5위를 기록 중. 16라운드 광주와 2:2 무승부, 17라운드 성남과 2:2 무승부. 리그 9경기 무패지만 '''5연무 달성'''
무승부가 많아 역시 무무열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혼돈의 2011년 리그 속에서 지지않는 축구로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다며 허정무 감독을 찬양하는 사람도 있다. 무서운건 무승부가 많아서 그렇지 중반 이후로는 패배가 없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해외 진출 골키퍼에다 핀란드 언론에서 2010 핀란드 리그 최고의 골기퍼로 보도된 권정혁 선수를 영입하여 영입직후 17라운드 성남전에 선발출장 시켰고. 2실점했지만 나쁘지 않은 활약을 보였다. 하지만 수원전 패배 이후로 또 무를 캐기 시작하더니 지금 리그 성적은 5승 '''10무''' 4패의 성적을 기록하고 있다. 이후로도 연이어 무재배 진수를 보여주며 10경기 연속 무승,8무 2패를 기록하며 5승 12무 5패를 기록했다가, 8월 27일 11경기만인 23라운드 대전 시티즌 안방경기에서 2:0으로 이겼다.
2011 시즌 리그 최종성적은 13위. 결국은 6승 '''14무''' 10패로 최다 무승부, 그리고 허정무와 같이 허정무컵 우승.
한편, 스쿼드 플레이어 중 이세주가 시즌 중 승부조작에 연루되어 제명을 당했다. 다만 이세주는 이후 징계가 경감되어 2년이 지난 후 징계가 끝났고, K3리그 등지에서 잠시 뛰었다. 그 외에 박창헌, 이 인천 시절 조작 사실이 드러나서 영구제명을 받았고[7], 안지호(당시 안현식)도 이 때 적발되었다. 그 외 는 인천 출신이나 타 팀에서의 범죄 사실로 제명을 당했고, 임인성은 조작은 무죄이나 금품수수는 인정되었고, 부산의 이정호, 홍성요, 김응진과는 달리 자진신고를 하지 않아서 징계는 유지되었다.

[1] 참고로 외잘란은 일본에 가서도 7경기에서 6번의 옐로카드와 3번의 레드카드를 받을 정도로 망나니의 진수를 보여주었고 결국 1시즌만에 분데스리가로 갔는데 거기서도 상대선수를 팔꿈치로 치면서 퇴장과 같이 여러 경기 출전 금지를 당했다.[2] 정규리그에서는 무려 '''13승 6무 5패 승점 45점 (득실차 +10)'''의 괴물같은 성적을 달성하며 통합성적 1위를 차지했다. 현재의 룰이라면 당연히 엠블럼 위에 노란 별을 달았을 성적이지만... 이 당시는 플레이오프 제도가 있던 시절(...)이라 챔피언결정전에서 우승한 팀이 우승팀으로 취급받던 때였다. 결국 우승은 챔피언전에서 인천을 탈탈 털었던 정규리그 통합 3위 울산 현대였다.[3] 그 덕에 부산 아이파크울산 현대는 본의 아니게 악당(?)팀이 되어버렸다. 끝판왕이천수. [4] 이기형이 대행 때는 60%의 승률을 기록했으나, 이후 시즌을 합산하면 엄청 아래로 떨어진다.[5] 거기에 카메라에다가 욕설까지 하고 말았다.[6] 결국 중간에 풀리기는 했으나 상당 기간을 그라운드를 떠나있었다.[7] 박창헌도 마찬가지로 징계가 경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