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우

 

'''이관우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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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삼성 블루윙즈 역대 주장'''
김남일
(2006)

<color=#373a3c> '''이관우'''
'''(2007)'''

송종국
(2008)

'''이관우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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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K리그 베스트 일레븐 '''
FW
김도훈
FW
마그노
MF
신태용
MF
이성남
MF
'''이관우'''
MF
김남일
DF
최진철
DF
김태영
DF
김현수
DF
산토스
GK
서동명
'''2006 K리그 베스트 일레븐 '''
FW
우성용
FW
김은중
MF
김두현
MF
백지훈
MF
'''이관우'''
MF
뽀뽀
DF

DF
마토
DF
최진철
DF
김영철
GK
박호진
'''2007 K리그 베스트 일레븐 '''
FW
이근호
FW
까보레
MF
따바레즈
MF
'''이관우'''
MF
김기동
MF
김두현
DF
아디
DF
마토
DF
황재원
DF

GK
김병지



''' 대한민국의 축구감독 '''
''' 이름 '''
'''이관우'''
'''李官雨 | Lee Kwan-Woo'''

''' 출생 '''
1978년 2월 25일 (46세)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국적 '''
대한민국
''' 신체 '''
175cm
''' 가족 '''
2남 중 둘째
''' 직업 '''
축구선수(윙어 - 미드필더 / 은퇴)
축구감독
''' 소속 '''
''' 선수 '''
'''대전 시티즌 (2000~2006)'''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06~2010)
홈 유나이티드 (2013~2014)
''' 감독 '''
수원 삼성 (2015 / U-12 코치)
수원 삼성 (2016~2017 / U-12 감독)
수원 FC (2018~2019 / 수석 코치)
수원 FC (2019 / 감독 대행)
대한민국 U-19 (2019~2020 / 코치)
청주대학교(2020~)
''' 국가대표 '''
13경기 1골(대한민국 / 2000~2008)
''' 등번호 '''
대전시티즌 - 34번, 8번
수원삼성블루윙즈 - 13번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22번[1], 10번[2], 8번[3], 9번[4]
''' 종교 '''
불교
1. 개요
2. 클럽
2.1. 프로 데뷔 이전
2.2. 대전 시티즌
2.3. 수원 삼성
2.4. 홈 유나이티드
3. 지도자 생활
3.1. 수원 삼성 유소년 지도자
3.2. 수원 FC 수석 코치, 감독 대행
3.3. 대한축구협회 전임 지도자
3.4. 청주대학교
4. 해설위원
5. 플레이스타일
6. 여담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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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축구선수이자 지도자이다.

2. 클럽



2.1. 프로 데뷔 이전


한양공고에 다녔을 때 청소년 국가대표팀 시절부터 패스가 좋은 선수로 유명해서 1996년 AFC U-19 축구 선수권 대회(대한민국에서 열린 대회로 우승), 1997년 FIFA U-20 월드컵 대회에도 참가했다. 다만, 이 대회에서 브라질에게 3-10[5] 프랑스에게 2-4로 참패하며 1무 2패[6]로 탈락,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서 일반 축구팬들에게는 특별히 좋은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다.[7] 뭐 당시 청소년 대표팀으로 뛰던 연령대 선수들이 훗날 월드 슈퍼 스타의 반열에 오르는 티에리 앙리, 다비드 트레제게, 미카엘 실베스트르 등이 있었기에 그렇다 쳐도, 브라질에게는 너무 참패했고, 가장 만만한 남아공전 무승부가 두고두고 아쉬웠다. 남아공이라도 이겼더라면 16강을 노릴 법했기에... 이때, 브라질은 한국 말고도 프랑스를 3-0, 남아공을 2-0으로 이기면서 조예선 3전 전승, 15득점 3실점을 기록했는데, 그나마 한국은 3골이라도 넣었다. 이 대회에서 브라질을 상대로 3골을 넣은 팀은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그러나 실점을 더 크게 내주고 졌기 때문에 놀림감이 되는가 했지만, 16강전에서 브라질벨기에를 10-0으로 이기면서 한국보다 더한 참패를 당했다. 이 15골은 현재까지도 피파 주최 대회 사상 조예선 최다 골 기록이다.[8] 그러나 브라질은 8강에서 현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 감독인 리오넬 스칼로니를 비롯해 후안 로만 리켈메, 파블로 아이마르, 에스테반 캄비아소 등이 버티고 있던 아르헨티나에게 0-2로 패하며 탈락했고, 대회 우승은 여기서 브라질을 꺾은 아르헨티나에게 돌아갔다.

2.2. 대전 시티즌


[image]
1999년J리그 아비스파 후쿠오카 이적을 추진했지만 당시 K리그에 남아 있던 드래프트 문제로 진출하지 않았고, 한양대학교졸업한 후 2000년에야 일본에서 제시한 금액보다 한참 낮은 금액에 대전 시티즌의 지명을 받아 프로로 데뷔했다.
당시 대전 시티즌에는 1997년에 창단 멤버로 입단하여 팀의 외로운 에이스 역할을 소화하던 '샤프' 김은중이 있었는데 그 전까지 미드필더진의 도움을 많이 받지 못하면서 혼자 골문 앞에서 악전고투하던 김은중에게 꿀같은 패스를 쏙쏙 잘 넣어주던 이관우는 최고의 조력자였다. 이 둘의 활약으로 대전 시티즌은 2001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FA컵 우승을 하기도 하는 등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9]
게다가 이 당시 남자다운 외모의 김은중, 여성들의 마음을 흔드는 동안미남 이관우의 외모 조합도 팬들의 마음을 매우 흔들었고, 두 사람의 이름을 한자씩 따와 '''은우'''라고 불렸다. 2001년의 FA컵 우승, 2002년 월드컵 이후로 대전 축구팬들이 늘어났을 때 이관우를 쫓아다니는 여성팬들도 상당히 많았다.
[image]
그러나 대전 시티즌의 재정 문제는 갈수록 심각해져갔고, 결국 대전은 팀 운영비 충당을 위해서 이관우와 김은중을 팔 수밖에 없었다. 결국 2004년에 김은중이 먼저 FC 서울로 떠났고, 김은중이 떠난 후 이관우는 2년간 대전을 홀로 지키다가 2006년 여름수원 삼성 블루윙즈로 이적하게 된다. 원래 이관우는 2007년에 FA가 될 예정이었기에 이 때까지 대전에 남은 후 J리그 진출을 고려하고 있었으나, 이적료 수입이 급했던 대전 시티즌이 선수에게 동의를 구하기에 앞서 먼저 수원과 협상해 버려서 잠시 대전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2.3. 수원 삼성


수원으로 이적한 후에도 팬들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적응기도 없었으며, K리그에서 가장 뛰어난 플레이메이커였고, 팀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선수였기에 라이벌 팀인 대전 출신이라는 것은 팬들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으며, 팬들과 팀 동료들에게 좋은 모습으로 비췄다. 수원에서는 2006년, 2007년 연속으로 좋은 활약을 보여서 K리그 올스타에 선정되었고(2007 시즌에는 주장을 역임했다.), 팀이 우승한 2008년에도 22경기 출장 2골 3도움으로 좋은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대전 시절부터 잔부상이 잦은 유리몸으로 악명을 떨쳐서, 매 시즌마다 풀 시즌을 소화하지 못하고 몇몇 경기를 부상으로 쉬는 경우가 잦았다. 수원 이적 후에는 큰 부상 없이 잘 뛰나 싶었지만 2009시즌 왼쪽 무릎 연골 부상으로 3경기 출장에 그치며 한 시즌을 통째로 날려먹게 되고, 2010년에 또 다시 무릎 연골을 다치면서 기나긴 재활을 하게 된다. 시즌 후반기에 간신히 복귀하긴 했지만 이미 수원의 중원에는 김두현이상호 같은 쟁쟁한 선수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2년간 쉬면서 폼이 뚝 떨어진데다가 나이가 30대 중반을 향해가다 보니 주전 경쟁에서 완전히 탈락하고 재계약도 불발되었다.
2010 시즌 후 자유계약인 상태에서 수원은 재계약을 포기하였고, 한때 친정 팀 대전 시티즌이 재영입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돌았으나 이관우 측은 돈 문제보다 '자기 폼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대전에 입단하여 민폐를 끼치기 싫다'라는 이유로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수원 시절 워낙 고액 연봉자였던 터라 연봉을 맞춰주기 어려운 반면 폼을 되찾을 확률이 높지 않다는 문제로 타 K리그 팀들도 영입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10]

2.4. 홈 유나이티드


본인도 현실을 직시하고 제2의 인생을 준비하는지 2011년 경기도 화성시 동탄신도시 쪽에 음식점을 개업해 사장님이 되었지만 공식적으로 선수 은퇴를 선언하지는 않았다.
이 음식점이 낙지집이라 수원의 용병인 게인리히와 비슷한 별명인 '''낙지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11] 뒷날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새벽에 일어나서 장보기와 재료 손질은 물론 요리까지 본인이 손수 했다고 한다. 원래 요리 좀 했던 터라 낙지집이 장사가 꽤 잘 돼서 오산시에 분점도 냈었다.
그렇게 낙지를 굽고 볶으며 해물과 함께하는 제2의 인생을 사는가 했는데 2013년, 싱가포르의 S리그에 속해 있는 홈 유나이티드 FC[12]선수로 복귀했다. 전성기에 비해 몸은 좀 불어났지만 아직 죽지 않은 발재간을 선보이며 두자리수 득점을 기록, 팀의 공격을 이끌고 있다. 낙지집은 그대로 영업 중인데, 아마도 다른 사람이 대신 맡아서 운영하고 있는 모양. 홈 유나이티드 FC싱가포르 컵 우승 경기에도 출장해서 경기 MVP로 선정되어 상금 1,000싱가포르 달러를 받았다. 이임생 전 감독의 말에 의하면 싱가포르 리그에서 정상급 선수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낙지집은 축구계로 돌아오면서 완전히 접었다고 한다.

3. 지도자 생활



3.1. 수원 삼성 유소년 지도자


2014년을 마지막으로 진짜로 완전히 은퇴를 선언하고 2015년부터 수원 삼성 블루윙즈 U-12 유스 팀의 코치직을 맡으며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으며, 2016년에는 코치에서 감독으로 승진했다. 2017년 금석배 전국초등학생축구대회 우승으로 대회 최우수 지도자상을 수상했다.

3.2. 수원 FC 수석 코치, 감독 대행


[image]
2018년 김대의 감독의 부름을 받고 수원 FC 수석코치로 부임하였다.
그러던 2019년 10월 29일 김대의 감독이 성적부진으로 사임하면서 잔여 리그 2경기를 감독 대행으로 지휘하게 되었다.
감독 대행 부임 이후 김성근 코치가 팀의 전체적인 수비를 잡아주는 역할을 맡은 반면 이관우는 전체적인 틀을 잡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
11월 3일 안산 그리너스전을 통해 감독 대행 데뷔전을 치렀고, 후반 추가시간에만 3골이 터지는 혈투 속에 2:1 승리를 거두면서 수원 FC는 7경기만에 승리의 기쁨을 맛봤다.
부천 FC와의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2:1로 패배하면서 2019시즌을 마무리하였다.

3.3. 대한축구협회 전임 지도자


이후 2020년 대한축구협회 전임 지도자로 부임하였다.# 김정수(1975) 감독이 이끄는 U-19 청소년 대표팀의 최철우 코치가 전남 드래곤즈 수석코치로 자리를 옮기면서 그 빈자리를 채우게 됐다.# 김정수 감독과는 2000 시즌부터 2003 시즌까지 대전에서 함께 뛴 이후 17년만에 다시 호흡을 맞춘다.

3.4. 청주대학교


2020년 10월 조민국이 떠난 청주대학교 축구부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4. 해설위원


MBC에서 유로 2016 해설로 참여했는데, 해설위원으로는 첫 데뷔인 만큼 부정확한 발음, 피상적인 표현 및 부족한 어휘력으로 시청자들로부터 질타를 받았다. 그러나 조별리그를 통해 어느정도 방송에 적응한 후, 토너먼트에 접어들면서 발음이나 말을 버벅대는 부분은 꽤 개선된 모습을 보였다.

5. 플레이스타일


대표적인 별명은 '시리우스'로, 그라운드에서 눈부신 플레이를 펼친다는 것과 이관우의 수려한 외모가 잘 어울려서 언론과 팬들이 다같이 불러준 별명이다.
뛰어난 개인기와 번뜩이는 패스, 정확도 높은 크로스와 준수한 프리킥까지 공격형 미드필더에게 요구되는 기술적인 면을 대부분 가지고 있다는 점이 강점이었으나 '유리몸', '저질체력'으로 대변되는 떨어지는 피지컬이 단점. 대전 시절부터 '활동량이 적다', '압박에 약하고 90분 풀타임을 뛸 체력이 없는 선수'라는 지적을 받곤했다. 체력 문제는 본인이 노력을 하고 요령을 깨우치면서 90분 정도는 문제없이 소화할 수 있게 되었고 수원 삼성으로 이적한 후에는 활동량도 점차 늘리기 시작했으나, 조원희김남일 등에 비해서 활동량이 적은 편인 것은 사실이었고 원래 많이 뛰는 타입도 아니었다. 주 포지션은 공격형 미드필더였고, 수원에서는 3톱의 측면 공격수나 중앙 미드필더로 뛰기도 했다.
전성기 때에는 대한민국리켈메라고 불리며 최문식과 윤정환의 뒤를 이을 K리그 대표 플레이메이커로 주목받기도 했다.[13]
그리고 정말 흔치않은 '''선천적''' 양발잡이다. 흔히 최근 양발잡이라고 칭하는 손흥민, 기성용 등의 대부분의 양발잡이들은 타고나기는 오른발잡이임에도 후천적으로 노력을 통해 양발잡이가 된 '''후천적'''인 양발잡이지만 이런 일반적인 경우와는 다르게 이관우는 특별한 훈련이 없이도 이미 선천적으로 타고나기를 완벽한 양발잡이였다. 때문에 손흥민과 기성용처럼 후천적인 양발잡이들은 아무리 양발잡이라고 해도 정작 세트피스를 처리할 때만큼은 절대 왼발을 쓰지 않고 주발인 오른발로 처리하는 반면 이관우는 프리킥을 찰때에도 오른발과 왼발을 번갈아 사용하고 코너킥도 왼쪽 코너킥은 오른발로, 오른쪽 코너킥은 왼발로 처리하며 현역 시절 그야말로 완벽한 양발잡이의 모습을 보여줬다. 후천적인 양발잡이 축구선수야 최근 들어 많이 늘어나고 있지만 이관우처럼 선천적인 양발잡이에 심지어 세트피스에서 왼발과 오른발을 둘 다 사용하는 선수는 전 세계적으로도 몹시 드물다.

6. 여담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이후에 국가대표 소집 문제로 논란이 벌어질 때 'K리그 선수에 비해 해외 리그 선수가 국가대표팀 선발에 유리하다'는 떡밥이 나돈 적이 있었다. 이때 그 피해 사례(?)로 자주 거론되었던 인물이 이관우. K리그에서 공격형 미드필더 및 측면 공격 자원으로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대표팀에선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테크닉 위주의 전략을 중시하던 코엘류호에선 플레이메이킹 능력을 높이 사며 그런대로 중용을 받곤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게는 낯설었던 전략이었던지라 재미를 보지는 못하고 오만 쇼크, 몰디브 쇼크 등 부진의 정점을 찍어야만 했고, 하필 두 경기 모두 이관우가 출전한지라 국내 축구팬들에게마저도 좋은 인상을 보여주진 못했다. 이후로는 사실상 국대와는 인연이 점점 멀어져갔던 셈. 2004 AFC 아시안컵 중국 예선 당시이던 2003년, 네팔과의 경기에서 나온 왼발 중거리슛 골 정도가 국대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겠다.
본프레레호 ~ 베어벡호 더치 커넥션 감독 시절엔 피지컬과 체력을 중시하는 전략 속에서 이관우의 이용 가치는 떨어지기만 했고, 어렵게 중용받은 경기에서도 좋은 인상도 보여주진 못했다. 2005년 여름에는 동아시안컵에도 출전했는데[14], 그때 본프레레호 체재의 한국은 '''무승 최하위'''라는 참담한 성적을 거뒀다. 것도 국내에서 열린 대회에서 말이다. 물론 그 성적이 전부 이관우 탓은 아니지만, 이관우도 출전한 경기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진 못했다.
다만, 실제로 이건 차별 때문이 아니라 대표팀에 뽑힐 법한 즈음에 부상 때문에 몸이 정상이 아닌 경우가 잦았고, 대전 시티즌 때처럼 자신이 공격의 중심이 되는 스타일이 아닐 때에는 인상적인 경기력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체력이 약하고 압박에 취약하다는 비판이 없는 말도 아니었다. 2006 FIFA 월드컵 독일을 앞두고 잠시 대표팀에 몸담으며 팬들의 기대를 모았으나, 가나와 평가전에서 마이클 에시엔에게 글자 그대로 박살이 나면서 지네딘 지단 급의 피지컬 괴물이 아닌 이상 플레이 메이커 전술은 무리임을 증명했다. 결국 2008년 이후론 국가대표로 뽑히지 않았다.
최문식에서 시작되어 윤정환을 거친 한국 테크니션 계보의 잔혹사를 상징하는 대목으로, 한국 축구팬들은 2019년 이강인이 등장할 때까지 현대 축구의 압박을 견뎌낼 수 있는 테크니션을 애타게 기다려야 했다.
수원 삼성에서 퇴출된 뒤 싱가포르에 진출하기 전까지는 낙지집을 운영했다. 본인 기준에는 상당한 맛집이었다고 한다. 이관우 인터뷰.

7. 관련 문서



[1] 2000년, 2008년[2] 2003-2004년[3] 2008 동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 [4] 2008년[5] 당시 최다 실점 패배 기록을 수립하면서 일부 외신이 우리나라 경기력을 비판하는 기사를 냈는데, 며칠 후 벨기에도 호나우디뉴 등이 이끄는 브라질에 0-10으로 그나마 3골이라도 넣은 우리나라와는 달리 그 쪽은 한 골도 못 넣고 제대로 대패하면서 '''기록을 경신'''하게 된다. 이쯤 되자, 외신도 논점을 바꾸어 브라질전서 골을 기록한 이관우를 '''아시아의 영웅'''이라 추켜세우는 기사를 내보내기도...[6] 남아프리카 공화국과는 비겼다.[7] 그래도 이관우는 브라질을 상대로 멋진 골을 넣어서 어느 정도 인상을 남기긴 했다. 또 당시 대한민국 청대는 공격일변도의 팀이라 수비에서 탈탈 털리긴 했지만 공격적으로는 어느정도 위력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고, 팀의 에이스였던 이관우는 화려한 공격력으로 주목을 끌긴했다. [8] 당시 선수진은 여기에서 확인 가능하다.[9] 2002년에는 대내외적 악재에 시달렸지만 2003년 최윤겸 감독의 지도로 팀을 추슬러 반등에 성공, 팀 연승 기록을 갈아치우며 홈승률 77.3%, 평관 1만 9천, 주중 최다관중 4만 3천 7백명을 기록한다. 이해는 그야말로 대전의 전성기. 구단도 시민들도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그러다가 2004년부터 2008년 사이에 영광의 주역들이 모두 떠나 버리고, 이어 최윤겸 감독도 떠나면서 구단도 차차 기울기 시작한다.[10] 수원에서 나오던 이야기로는 2년간 훈련을 하지 못해서 신인선수보다 못한 경기력을 보였다고 할 정도였다.[11] 이 시기 한 여성팬이 음식점에 찾아왔다 은퇴한 그의 모습을 보고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고 한다.[12] 이임생이 2014년까지 감독으로 이끌었다.[13] 윤정환과 이관우 사이에 고종수를 끼워넣는 사람도 있는데 고종수의 전성기가 워낙 짧아서 그렇지, 이관우와 한 두살 차이다. 그리고 윤정환, 이관우와 고종수는 플레이 스타일이 확연히 달랐다. 고전적인 플레이 메이커라기보단 쉐도우 스트라이커에 가까웠고 몸싸움을 싫어하지도 않았다.[14] 이 대회는 A매치 데이 기간이 아닌 기간 중에 열리는 대회라서 유럽파 선수는 차출할 수 없는 대회로, 대회의 위상이나 바쁜 해외파들의 일정 때문에 국내파/J리거/C리거 선수 점검 성격이 강한 대회로서, 박지성 등 해외파 미드필더진은 참석할 수 없는 시점이었는지라 그나마 중용받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