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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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지도자로서 현역 시절 포지션은 수비수.
별명은 캐넌 슈터.
현역 시절에는 공격형 풀백의 이미지가 강했고, 매우 강한 킥력을 바탕으로 한 중거리 슈팅이 인상적이었던 선수였다.
2016시즌 후반부터 감독대행으로서 인천 유나이티드를 이끌며 인천을 강등위기에서 구해냈다. 이때 '''이기는 형'''이라는 별명까지 붙으며 정식 감독으로 승격됐지만, 성공의 이면에는 부족한 자질 논란이 감춰져 있었고 모 대표이사 부임 이후로는 '''최악의 선수단 운영'''과 '''온갖 논란거리를 만들어내는 행동들'''로 인해 팀을 강등위기로 몰아넣어 결국 모든 팬들이 등을 돌리는 현상을 자초했다.[1]
2020시즌 말, 소속팀 부산 아이파크가 자동 강등되는 12위까지 떨어지자 조덕제 감독이 사퇴하면서 남은 시즌 동안 감독대행으로서 팀을 이끌었다.
2. 선수 경력
2.1. 유년 시절
전라남도 화순군 출생으로, 3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시골 동네에서 논이든 밭이든 넓은 터만 있으면 공을 차고 놀았다. 형들과 어울릴 때도 어느 정도 상대가 될 정도로 운동능력이 좋은 꼬마였다.
그러나 축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안타까운 가족사 때문이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부모님이 병으로 돌아가셨고, 친척에게 의탁하기 위해 8살이 되던 해 6남매가 서울로 상경하였다. 그리고 서울 상경 후 그의 인생에 전환점이 찾아오게 되는데 은로초등학교 4학년 우연히 체육대회에 출전하여 달리기 우승을 차지했고, 이를 지켜본 축구부 코치가 축구선수가 되라고 제안한 것이다. 서울로 올라와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을까 걱정하던 큰형도 이기형의 결정에 찬성하였고, 본인도 큰 고민은 하지 않았다거 한다. 이를 계기로 이기형은 축구선수 생활을 시작하였다.[2]
뛰어난 축구실력을 바탕으로 중,고교 모두 체육특기생으로 진학하였고, 정명고 2학년 시절 청소년 대표에 뽑힌 이후로 태극마크는 늘 그의 가슴에 붙어있었다. 이러한 실력을 바탕으로 이기형은 1992년 축구명문 고려대학교에 진학하였고, 1995년에 열린 애틀랜타 올림픽 축구 아시아 예선전에서 발군의 기량을 보여주었다. 이에 이기형을 눈여겨보던 신생팀 수원 삼성 블루윙즈는 그에게 계약금 1억 5천만원이라는 당시로써는 거액을 안겨줬고 이기형은 수원 삼성 블루윙즈에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2.2. 수원 삼성 블루윙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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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삼성의 창단 멤버가 된 이기형은 입단 첫 해에는 올림픽 대표팀 동기인 박충균과 경쟁이 예고되기도 하였으나, 저돌적이고 활발한 플레이로 단숨에 김호 감독이 아끼는 자원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활약은 계속 이어져 1998년과 1999년 수원의 K리그 2연속 우승의 핵심 멤버로 활약하게 되었고, 2000년 잠시 부상으로 주춤하기도 하였으나, 금세 컨디션을 회복하고 2002년까지 수원 오른쪽 수비를 담당하였다.
2.3. 성남 일화 천마
수원에서 7년째 뛰던 2002년 말, 수원과의 계약이 만료됐다. 양측은 연봉 문제로 조금씩 갈등을 겪던 중이었다. 이기형은 당시 연봉 제시액이 본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기대에 못 미쳤다고 밝혔다. 당시엔 자유 계약 대상자라도 K리그 규정에 따른 이적료가 있었다. 그런 가운데 성남이 그를 영입한다.[3]"수원과 성남에서 정말 강한 팀을 많이 경험했죠. 그중에서도 가장 강했던 팀을 하나 고른다면 성남에서의 첫해, 그러니까 2003년이에요. 그때 선수와 전술 등 모든 게 가장 강했어요. 지금 저와 함께 생활하시는 김도훈 감독님부터 정환이 형, 신태용 감독님, 데니스, 김대의 같은 선수가 다 한 팀에 있었죠. 경기에 나가면 거의 이기는 식이었어요. 지금 전북이 비슷한 수준으로 가고 있지 않나 싶어요."
성남에서 보낸 2년은 순탄한 편이었다. 주전급으로 뛰며 무난하게 K리그 우승과 K리그 리그컵 우승을 한 번씩 달성했다. 하지만 김학범 코치가 감독으로 올라가던 해, 성적 부진으로 인해 선수단에 찬바람이 불었다. 마침 FC 서울에서 영입 제안이 왔다. 김학범 감독도 수락했고 성남을 떠나 서울로 이적한다.
2.4. FC 서울
이후 시즌 종료와 함께 어린 선수들의 중심을 잡아 줄 베테랑 수급이 시급하다고 여긴 FC 서울이 이기형을 영입했다. 하지만 이장수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후 전술적 견해 차이로 갈등을 빚었고 본인의 기량도 줄어들어 출장 기회가 줄어들었다. 2005년에 16경기 밖에 출전을 못하였고 이것은 2006년에도 이어져 2005년과 비슷한 경기 수를 출전하였고 K리그 리그컵[4] 우승에 기여했으나, 세간의 평가는 지난 시즌과 비슷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장수 감독의 계획에도 이미 제외된 상태였다. 결국, 시즌 종료와 함께 팀을 나갔고, 그것이 K리그에서 보낸 마지막 시즌이었다.
2.5.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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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과 2년 계약을 마친 후 K리그 중하위권 구단으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았다. 그러나 연봉을 깎아가며 국내에 남기보다는 외국의 축구를 경험하고 싶었다. 원래 A리그의 웰링턴 피닉스 입단을 추진하였으나, 협상 단계에서 좌절되고 말면서 뉴질랜드의 오클랜드 시티로 전격 이적하였다. 오클랜드 시티에 입단한 이후로 세미 프로였던 뉴질랜드에서 월등한 기량을 자랑하며 적지 않은 나이에도 노익장을 과시하는 활약으로 정규 주전으로 출전하였으며, 리그 우승에 이바지하고 FIFA 클럽 월드컵에도 출전하여 도움을 기록하는 등의 활약을 보인 뒤 2010년을 끝으로 현역에서 최종 은퇴하게 되었다.
3. 국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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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데뷔하여[5] 축협은 올림픽 대표팀을 타국 A대표팀과 맞붙는 대회에 참가시켜 실전 경험을 쌓게 했다. 이기형은 21세의 나이에 칼스버그컵과 다이너스티컵을 소화하며 대표 선수로 첫발을 뗐다. 그중 다이너스티컵에서 일본을 상대한 결승전은 화제를 모았다. 전반 26분 이우영이 코너킥을 땅볼 패스로 내줬고, 후방에서 달려들던 이기형이 골대와 약 30m 떨어진 곳에서 쭉 뻗는 슛을 날려 골망을 찢을 듯 흔들었다. 4번째 A매치에서 터진 데뷔골로 이기형의 오른발은 뭇 사람에게 알려졌다. 이기형은 이날 한 골을 더 넣어 2-2 동점을 만들었으나 한국은 승부차기 끝에 우승을 놓쳤다. 1997년 9월 28일 도쿄국립경기장에서 열린 일본과의 최종예선 3차전에서 멋진 크로스로 서정원의 동점골을 간접적으로 도왔다. 47경기 6골로 꽤 많은 출장 기록을 갖고 있지만 정작 A대표로서 남긴 족적은 다이너스티컵 이후 희미하다. 대회 본선마다 불참했기 때문이다. 1998 프랑스 월드컵 예선 때 붙박이 라이트백으로 뛰며 강한 인상을 남겼지만 정작 본선 명단엔 들지 못했다. 차범근 감독이 자신을 외면한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다고 한다.[6]
2002 한일 월드컵 역시 정상 컨디션이었다면 참가할 수 있었지만 거스 히딩크 감독 초창기에는 십자인대 부상에서 제대로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십자인대 부상은 원래 6개월 만에 나을 수 있었지만 지나치게 의욕적으로 재활 훈련을 하다 무리하는 바람에 수술에 들어갔고, 그렇게 6개월씩 두 번 회복기간이 연장돼 결국 일년 반 동안 그라운드를 떠나 있었다.
2004 아시안컵도 예선은 주전으로 소화했으나 오만 쇼크로 별다른 족적은 남기지 못했고, 역시 본선행엔 실패했다. 2003년 10월 네팔을 7-0으로 대파할 때 2골을 넣은 것이 이기형의 마지막 A매치였다.
4. 플레이 스타일
공격형 풀백으로 명성이 높았던 선수였다. 수비적으로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강한 힘을 바탕으로 한 중거리 슈팅과 중거리 프리킥에 특출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캐논슈터. 1999년 올스타전에서 123km, 2002년 올스타전에서 138km를 기록하며 최고의 캐논슈터상을 받기도 하였다.
5. 지도자 경력
5.1. 코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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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2010년 뉴질랜드에서 공부를 마치고 2011년부터 FC 서울의 코치로 부임하였으며, 코치직과 2군 코치직을 2014년까지 수행하게 되었다. 이후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으로 부임한 김도훈의 부름을 받아 수석 코치로 임명되었다.
5.2.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 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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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는 형'''
2016년 시즌 중간에 김도훈 감독이 사임하면서 감독 대행으로 임명되었다.'''이기형 감독축하'''[7]
9월 10일 FC 서울과의 경기에서 감독대행 데뷔전을 숭리로 장식하여 탈꼴지에 성공했고 수원 삼성과의 경기에서 극적인 무승부를 거두었다.
감독 대행 자리에 오를때 스플릿 라운드 전까지 3승 2무를 해내겠다고 약속한걸 그대로 지켰다. 그리고 스플릿 라운드에서도 2승 1무를 거둬 대행 부임 이후 5승 3무를 기록, 이름에 빗댄 "이기는 형"이란 별명을 얻었다. 그리고 마지막 라운드 수원 FC를 이겨 '''극적인 K리그 클래식 잔류를 이끌어냈다.'''
감독 대행으로써 팀을 재빨리 수습한 것, 선수단에 목표의식 부여, 기회를 못받던 르엉 쑤언 쯔엉의 기용으로 대표된 폭넓은 선수 기용등 능력을 인정받아 정식 감독으로 부임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29일 정식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5.3.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
5.3.1. 2017년
야심차게 영입한 달리는 그 피지컬로 6개월동안 0골 1어시를 기록하고 앉아있고, 땜빵으로 스트라이커로 기용된 웨슬리는 전문 스트라이커가 아니라 공격이 잘 풀리지 않았으며, 부노자는 자존심이 강해 조직력을 와해시킬 때가 간혹 있어 수비에서 불안한 모습을 지속적으로 노출하게 되었다. 결국 대행 시절과 달리 팀이 삐걱대며 좀처럼 승리를 챙기지 못했다. 중후반기에는 전북한테 3대1로 털리고, 서울한테는 5대1로 영혼까지 털리는 등[8] 굴욕을 맛보기도 했다. 그나마 후반기에 문선민, 김대중, 채프만 등이 각성한 이후로는 승점을 꽤 따내면서 최종순위는 9위를 기록해 어찌어찌 잔류는 성공했다. 선수단 기용 측면에서 문제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케빈, 요니치, 권완규, 박대한, 진성욱 등 지난 시즌의 주축들을 상당수 잃고 맞이한 시즌이기에 참작의 여지는 있다.
5.3.2. 2018년
시즌 시작 전부터 조건부계약설[9] , 대표이사의 월권논란[10] , 코치진과의 불화설, 선수단과의 불화설, 달리의 영입과정에 관한 논란 등등 수많은 논란의 중심에 섰다.
시즌 개막후, 계약만료로 떠난 하창래, '''남은 계약기간을 해지하면서''' 내보낸 채프만, 군에 입대한 김도혁과 이상협 등을 제외하면 주전급 선수의 유출이 거의 없었고, 오히려 무고사, 아길라르, 임은수, 김정호등이 합류하면서 인천 역사에 남을 정도로 수준높은 선수단을 갖추었음에도 선수단 운영에 완전히 실패하여 그 잘하던 최종환, 이윤표, 김용환 등은 수비진 붕괴의 원흉으로 전락해버리고, 한석종이나 고슬기 등도 맞지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시즌 초의 폼을 유지하지 못하고 부진에 빠지는 등 스쿼드 수준이 떨어지게 만들었다. 결정적으로, 팀을 '''어린 선수가 30대에 접어든 부노자를 무시한다, 선수가 지각 등의 잘못을 저질러 팀의 규정을 어겼어도 벌금도 제대로 못걷는다는 등의 소리가 나오는''' 말그대로 개판 오분전의 상황에 빠뜨리고 만다. 팀이 이 모양이니 당연히 성적이 잘 나올 리가 없었다. 2R 전북전에서 승리를 거두었을 뿐 이외의 경기는 부진했다.[11] 결국 12R 제주전이 끝나고 얼마뒤에 결국 사임을 표하며 팀을 떠났다. 코치진과 '''주장'''을 비롯한 선수 두 명이 5월 마지막 두 경기에서 감독에게 기회를 달라고 요청해서 당초 예상보다 늦어졌지만, 결국 최종 사임이 결정된 것. 2018 시즌 중 기록은 12경기 1승 4무 7패이다.
5.4. 부산 아이파크 코치, 감독 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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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시즌을 앞두고 2018년 12월 20일에 조덕제 감독을 따라 노상래와 함께 부산의 코치로 임명되었다. 직전 해까지 프로 구단의 감독이었던 이기형의 코치 복귀에 노상래 역시도 한동안 전남 드래곤즈의 감독이었던 만큼 상당히 화제가 된 코치 부임이었다.
조덕제 감독과는 P급 라이센스를 준비하면서 만났는데 이기형 본인이 먼저 조덕제 감독과 함께 하고 싶다고 먼저 제시했다고 하고, 이후에 연락하니 흔쾌히 코치직을 받아주었다고 한다.
직책은 선수 시절 수비수였던 것을 감안했는지 수비 코치라고 한다.
2020년 9월 29일 팀의 조덕제 감독이 사퇴했고, 이기형 코치는 남은 시즌 동안 감독대행을 맡게 됐다. 순위는 12위 , 11위 인천과 승점이 같고 득실차에서 3골 뒤지는 상황 , 이번에도 강등을 막을 수 있을지 기대되고 있다.
그리고 감독 대행으로써의 첫 경기 FC서울과의 경기에서 2:1로 승리하며 팀은 12위에서 10위로 상승 했고 이 날 승리로 이기형 대행 체제는 많은 부산 팬들의 응원을 받는 듯 했지만, 26라운드 인천 원정에서 이동준의 선제골로 앞서가다가 후반들어 쭉 밀리더니 순식간에 두 골을 먹고 역전을 허용, 결국 1:2로 역전패하며 잔류 기회를 날린데 이어, 성남과의 최종 라운드 단두대 매치에서도 이동준의 환상적인 발리 슛 득점으로 앞서나갔으나 공격진의 두께를 줄이고 수비를 강화함에도 불안불안한 수비를 보여주다가 결국 또 다시 역전을 허용하며 1:2로 패배, 결국 부산은 1년만에 재강등되었다. 역전당한 이후 공격 숫자를 늘려야 하는 상황에서 김현을 투입하면서 이정협을 뺀 교체카드가 의아하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6. 여담
- 2002년 K리그 올스타전에서 기록한 138km 캐논슛 기록은 아직까지 K리그 올스타 역사상 최고속 기록으로 남아있다.
- 1999년 8월 25일 포항 스틸러스와의 홈경기에서 이기형은 천당과 지옥을 동시에 경험해야 했다. 당시 수원은 팀을 이끌던 외국인 선수들이 부상과 경고누적 등으로 모두 결장하는 바람에 국내선수들로만 팀을 꾸려야했고, 전반 박태하와 고정운에게 연속골을 허용한데 이어 전반 29분 이기형이 상대의 승리를 확정지어주는 듯한 골을 자신의 골문에 집어넣어 0-3이 되고 말았다. 패배의 예감이 수원을 감쌀즈음 수원의 저력이 발휘되며 서정원과 이병근의 연속골을 집어넣으면서 극적으로 3-3 동점을 만든 뒤 후반 35분. 이기형이 30m 거리에서 대포알같은 슛을 터트려 4-3 역전극의 대미를 장식했다.
- 2018시즌 팀에서 나가기 전까지 인천이 거둔 1승은 전북인데 이 승리가 전북에겐 5월 10일까지 리그에서의 유일한 패배이다.
- 아들 이호재 역시 축구선수이다. 2019년 대건고를 졸업하고 아빠의 모교인 고려대학교에 진학했다. 인천유나이티드 유소년 팀 출신으로 2018년 K리그 주니어 무대뿐 아니라 프로 2군인 R리그에서도 맹활약해 주목을 받았다. 190cm의 장신 스트라이커인 이호재의 합류는 2018년부터 고려대의 약점으로 지적되어 온 정통 스트라이커 부재에 대한 해답이 될 전망이다.
- 풀백 포변 성애자다. 2016년 인천 유나이티드 수석코치 시절 2군리그인 R리그 감독도 도맡았는데 매 경기 라인업마다 그해 신인 선수들이 풀백 포변 시험대에 오르곤했다. 사실 풀백 말고도 스트라이커가 센터백으로 포변하거나 중앙 미드필더가 스트라이커를 보는 괴상한 라인업도 종종 보였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가 인천 감독이 된 후 경질되기 직전은 2018시즌 초반에 풀백이 진짜 구멍났다. 주전 풀백이던 김용환과 최종환이 제 폼이 아니자, 이기형이 코치시절 시험무대에 올렸었던 박종진이 중용되기 시작했다.
7. 수상
- 2002년 스포츠투데이 - 푸마코리아 선정 7월의 베스트11 (DF 부문)
- 수원 삼성 블루윙즈
- K리그 (우승 2회) (1998년, 1999년)
- K리그 (준우승 1회) (1996년)
- 대한축구협회 FA컵 (우승 1회) (2002년)
- 대한축구협회 FA컵 (준우승 1회) (1996년)
- K리그 리그컵 (우승 4회) (1999년-아디다스컵, 1999년-대한화재컵, 2000년, 2001년)
- 대한민국 슈퍼컵 (우승 2회) (1999년, 2000년)
- 아시아 클럽 챔피언십 (우승 2회) (2001년, 2002년)
- 아시아 슈퍼컵 (우승 2회) (2001년, 2002년)
- 성남 일화 천마
- K리그 (우승 1회) (2003년)
- K리그 리그컵 (우승 1회) (2004년)
- AFC 챔피언스리그 (준우승 1회) (2004년)
- FC 서울
- K리그 리그컵 (우승 1회) (2006년)
- 오클랜드 시티 FC
- 뉴질랜드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 1회) (2008-09 시즌)
8. 같이보기
이기형, 전설의 오른쪽 수비수
[1] 성적이 안 좋았기도 하지만, 이렇게 재임기간동안 많은 논란을 일으킨 건 이기형이 유일무이하다.[2] 출처[3] 마침 애틀랜타 올림픽 트레이너 출신인 김학범 성남 코치와 인연이 있었다. 김학범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 “성남으로 가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김학범은 차경복 감독과 잠시 상의하더니 한 시간 만에 “와라”라는 답신을 보냈다고. [4] 당시는 하우젠컵. [5] 당시 축구협회는 올림픽 대표팀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다.[6] 충격을 받은 이기형은 대회를 시청하지 않았고, 이웃집의 환호성 소리도 듣기 싫어 한동안 산속에 틀어박혔다고 한다. [7] 인천 팬들이 기적적 잔류를 축하하기 위한 걸개이다.[8] 심지어 둘다 홈경기였다[9] 개막후 10경기동안 승리가 없으면 경질된다는 계약을 체결한다는 설이다. [10] 선발라인업에 대표이사가 관여했으며, 이 과정에서 출전기회를 얻은 선수들이 잔류의 주축이었다는 내용의 논란이다.[11] 이 과정에서 구단 역사의 남을 '''5연패'''라는 불명예스런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