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한일본인
在韓日本人
1. 소개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일본인.[1] 일본 기준으로는 '''자이칸(在韓)'''이라 불린다.
2011년 10월 기준으로 유학, 사업, 결혼 등의 체류자나 영주권[2] 자와 일본계 한국인을 합쳐 30,382명 수준이다.[3]
2013년 8월 31일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 이민정보과 월보에 따르면 일본인 유학생은 2,781명(유학 1,714명/한국어 연수 1,067명)이며 한국인의 배우자(결혼이민자)[4] 는 12,104명(남성 1,174명/여성 10,930명)이며 취업자격 체류자 1,782명(불법체류자 2명 포함)이며 단기체류자 23,462명[5] (불법체류자 499명 포함)이며 등록외국인[6] 23,194명(불법체류자 363명)이다. 체류 일본인의 숫자는 47,443명(불법체류자 875명)이다.
2013년 8월 대한민국을 찾은 일본인은 269,086명으로 중국인에 이은 2위이다. 2012년 일본인 입국자는 3,497,525명으로 그 해 외국인 입국자 10,121,950명 중 가장 많았다.
2018년 기준 재한 일본인의 수는 남성 19,325명, 여성 41,553명으로 '''도합 60,878명'''으로 집계되었으며, 위에서 볼수 있듯이 7년전인 2011년에 비해 2배 가까이 증가하였다.#
2. 개요
일제강점기 시대 한반도에 건너온 재한일본인은 일본 현지에서 가난하고 생계에 곤란을 겪던 사람들이 식민지에서 한 탕 해먹으려고 건너온 경우가 많았다.# 기본적으로 이들은 일본 현지에서도 하층민이었기 때문에 그 반대급부로 한국인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성향이 강했으며, 조선총독부의 권력을 등 뒤에 업고 많은 부를 쌓았다. (물론 이런 이권이 있는 파이는 수요는 많은데 공급이 적어서 적었다)
과거 재한일본인의 숫자는 19세기 말에 수백명 수준이었으나 점점 늘어나 광복 직전엔 60만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제법 불어났다. 그러나 그 당시의 재한일본인의 절대 다수는 일제 패망과 동시에 일본으로 귀국하였다. 이들을 히키아게샤라고 한다. 남은 재한일본인은 광복 이후 한국에 남겨진 한국인들의 일본인 부인(모임도 있다)이 많았다.
35년이란 세월이 지나면서 일본 본토가 더 낯선 재한일본인도 많았기에, 떠나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이 있기도 했다. 일부는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식으로 이름을 바꾸는 역창씨개명을 하면서까지 한국 땅에서 모은 재산을 지키려고 발버둥쳤다. 하지만 광복 이후의 혼란기에는 한국인들의 반일감정이 거셌고, 무엇보다 미군정과 소련군정이 이를 용납치 않아서 이들 대부분은 재산을 모두 몰수당한 채 강제 송환되었다.
그래서 재일교포와는 달리 현재 대부분의 재한일본인은 그 기원이 일제강점기에 있지 않다. 한국인과 결혼한 극소수의 일본인 처나 실수로 가족과 함께 가지 못하고 한국에 남게 되어버린 사람이나 한반도에서 계속 살기 위해 한민족으로 위장한 이들 정도만이 남게 되었다. 그런 사람들도 6.25 전쟁에 휘말려서 학살당하거나 한민족에 동화되거나 일본으로 돌아가는 식으로 거의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한국인 남편들이 일본인 아내를 데리고 있는 게 부담스러워 도망가거나 쫓아낸 경우도 있었다. 경주 나자레원이란 곳이 이렇게 남은 일본인 여성들을 위한 요양원으로 1972년에 세웠다. 현재는 잔류한 일본인이 대부분 고령자[7] 라 세상을 떠난 탓에 몇 명 안 남았다. 설립자는 김용성(1918-2003)인데 아버지가 일본인한테 살해당했다고 한다. 그렇게 한일 간에 갈등과 차별 심하고 어려운 시절에 한국인과 결혼한 사람들을 위해 세웠다고. 250여명이 이 시설에 와서 일본의 단체 등의 도움으로 147명은 일본으로 돌아갔고 100여명은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2020년 8월에 5명의 일본인 할머니들이 남아 있다고 한다. 남아 있는 사람들의 평균 연령은 96세다. 동아일보의 관련 기사
서울 용산구 이촌1동(동부이촌동)의 일본인 마을은 1000명 넘는 일본인이 거주해 ‘리틀 도쿄’로 불리지만 일본의 거리 모습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한국에 중장기적으로 머무는 일본인들은 한강변에 위치해 환경이 쾌적하고 교통이 편리한 이곳에 모여 들어 지금까지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다. 걸어서 골목길을 다녀 보면 ‘일본어 상담 가능’ 등의 문구를 적어 놓은 일본인 대상 부동산 중개업소, 일본어를 병기한 안내표지판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으며, 일본인이 운영하는 자그마한 선술집(아지겐)이나 우동집(미타니야)도 있다. 일본인 어린이만 다니는 유치원이 있고 부동산과 약국, 동네 병원, 은행 등에서도 일본어가 통한다. 또란 이 동네를 경유하는 시내버스의 경우 일본어 안내방송이 나온다. 예를 들어 6211번 버스라든지.
오늘날 재한일본인들 중에는 한국 주재 기업인들이나 국제 결혼한 사람들이 많다. 또한 동아시아에서 제일 기독교의 비율이 높은 동네인 한국 특성상 기독교인 비율이 높다. 한국에 있는 일본인들은 기독교 선교를 중심으로 뭉쳐 있다. 숙명여대 근처에 통일교 신자인 일본인들이 많다고 한다. 뉴커머들에도 기독교가 많은 걸 보면 1960년대 이후 한국에서 기독교가 많이 퍼지긴 한 모양. 한국 화교들도 기독교 비율이 높은 편이다.
한국에서 살면서 '''한일 외교간의 정치 외교 문제'''가 생기면 가장 많이 고생하는 부류이다. 한국에서는 재일동포에 관심이 많았지, 재한 일본인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그들도 잘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알 수가 없다. 재한 일본인을 다룬 문학은 고려대에서 출간한 '''식민지 조선의 기억'''에 실린 단편에서도 나온다. 여기서 재한 일본인은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결혼 기피대상이었다(물론 소설 내의 설정). 그런데 전후에 히키아게샤가 일본에 돌아가 차별당한 걸 보면 꼭 소설 내의 설정만은 아닐 듯하다.
3. 재북 일본인
재일교포 북송 사업으로 93,340명이 북한으로 갔는데 이중 최소 6,839명이 한반도 계통의 한인과 결혼한 일본인이거나 그들 사이에 태어난 한국계 일본인이었다. 그 외에 북한의 외국인 납치 등으로 일본에 있는 사람들도 있다.
4. 재한 일본 화교·중국계 일본인
일본 내 중국계(대만계 포함) 주민이 다시 한국으로 이주한 케이스인데 특히 일제강점기에 이들이 한국으로 이주해오는 경우가 많았으며, 8.15 광복 후에는 이들의 이주가 없어졌다가 훗날 한일수교로 다시 이들이 한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일반적인 재한화교들과는 다른 정체성을 가졌으며, 야마토 민족 혈통인 재한일본인들과 어울리는 따로국밥에 가깝다.
5. 재한일본인이었던 사람
- 오야부 하루히코 - 소설가. 한때 한국에서 살아서인지 그의 소설에서는 한국인들은 슬플 때 통곡을 하고 막걸리를 저어마신다. 그런데 해방 이후에 가서 그런지 한국에 대한 묘사는 소련군과 힘든 기억이었다.
- 카지야마 토시유키 - 소설가. 그가 평생 다룬 테마는 한국, 이민, 원폭이었다. 그것보다는 이원호류의 기업소설을 많이 썼지만...
- 미즈노 슌페이 - 지한파 교수였으나 항목에 써야 할 정도로 스토리가 복잡해져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나리타 유타카 - 전 덴츠 CEO. 웃긴 건 단순히 한국에서 출생했을 뿐인 일본인인데도 혐한초딩들은 이것만 가지고 친한기업이라고 까댄다(...)
- 도조 유코 - 전범 도조 히데키의 손녀.
- 이토 도요오 - 2013년도 프리츠커상 수상자인 일본의 건축가로, 고향이 서울특별시이다[8] .
6. 재한일본인
- 구로다 가쓰히로 - 일본에서만 알아주는 한국통. 한국에서는 극우니 우익이니 혐한이니 하지만 본인 나름대로 한국에 대해서는 애정이 있다 한다. 부인도 한국인이다(!). 하지만 망언을 일삼기 때문에...
- 나메카와 야스오, 나카모토 유타, 묘이 미나, 미나토자키 사나, 미야와키 사쿠라, 시마다 쇼, 사토 모에카, 미즈구치 유토, 아다치 유토, 야부키 나코, 타카다 켄타, 타카하시 쥬리, 테라다 타쿠야, 테라모토 유키카,[9] 하세가와 요헤이, 혼다 히토미, 후지이 미나, 후지타 사유리, 히라이 모모, 미야우치 하루카, 히로카와 마오 등 한국에서 활동 중인 일본 국적의 연예인.
- - 원래는 재한일본인이었으나 나중에 귀화를 했기 때문에 재한'일본인'이 아닌, 일본계 한국인이다.
- 부용회 - 일제강점기에 조선인 남편과 결혼한 일본인 아내들 중 해방 직후 귀국하지 못한 사람들의 모임. 한때 이방자 명예회장을 중심으로 전국에 지부를 두었으나 현재는 부산지역 모임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아사히신문(한국어판) 기사, 부산일보 기사
7. 흑역사
- 2004년 1월 29일, 서울 일본인 학교 앞에서 통학버스에서 내린 유치원생 두 명이 근처에 숨어 있던 한국인에게 습격당해 그 중 한 명이 도끼로 머리를 맞았다. 범인은 다른 유아도 찍으려 했으나 교사와 학교 경비원에게 제지당하여 붙잡혔고 그 해 4월 1일에 징역 4년의 판결을 받았다.[10] 도끼로 맞은 유아는 두개골 함몰 골절이라는 중상을 입었으나 다행스럽게 회복되었다. 범인은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고 하나, 제압 당시 술냄새가 심했다는 점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 미즈노 슌페이 사건 - 항목을 보고 판단할 것. 하여튼 이 일로 다른 일본인들도 겉 다르고 속 다르다면서 같이 피해를 입었다(...).
8. 대중문화 속의 재한일본인
거의 다루지 않는다. 이것은 재일한국인 문제와 비슷할 정도로 일본에서는 터부시되는 일이다. 재한 일본인 사회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는다. 브라질의 일본인들이 엄청나게 많이 다뤄지는 것과는 다르다. 다만 90년대 말부터는 부산 같은 곳을 배경으로 재한 일본인이 등장하는 소설이 자주 나오는 편이다. 아예 없는 것처럼 치부하기도 힘든게 이제는 오히려 "어랍쇼? 부산이 배경인데 거기 사는 일본인이 왜 안 나옴?" 같은 말이 나올 정도로 부산에 정착한 일본인이 많다는 걸 일본인들도 안다. 한편 부산에서 일본인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동네를 꼽으라면 단연 동광동이다. 동광동의 부산호텔은 일본인 전용 호텔이라 할 정도로 일본인들이 쉴새없이 드나들고 거기서 부산데파트에 이르는 거리는 일본어 간판을 내건 상점들이 즐비하다.[11][12][13]
9. 같이보기
[1] 한국계 일본인 포함.[2] 한국인과의 결혼으로 인한 경우가 많다.[3] 출처: 일본 외무성(외교부) #[4] 뭐 당연한 얘기지만 결혼 이민자들은 대부분 등록외국인이다. 일본인 결혼 이민자 가운데 600명 정도가 귀화했다. 상당수는 통일교 신도.[5] 90일 미만 체류자.[6] 90일 이상 체류하는 외국인으로 지문 날인을 해야 한다.[7] 1945년에 스무살이라 쳐도 90세 가까이 되었다.[8] 그가 태어났을 때는 일제강점기였으므로 당시에는 경성부였다.[9] 모델로서 일본에서 데뷔했다가 성우 활동도 했었던 여성 연예인. 그러다가 자신이 좋아했던 게임 아이돌마스터를 원안으로 한 한국 드라마에 출연하기 위해 오디션을 보고 합격해서 한국 연예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2019년 현재는 한국어로 된 노래를 발표해서 K-POP 가수로서 활동의 첫 걸음을 떼게 되었다.[10] 서울지방법원은 '저항력이 없는 유치원생의 머리를 가격한 것으로 보아 살의가 없다고 볼 수 없다.'라면서도, 범인의 심신미약 상태였던 점을 감안하여 형량을 고려하였다고 했다.[11] 물론 동광동이 한국에 정착한 일본인들만을 위한 곳이라기 보다는, 일본인 여행자들을 위한 성격이 강하다고 보는 게 적절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로 숙박, 식당, 유흥, 환전 위주의 상점이 간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12] 그나마 최근에는 그런 왜색(?)도 비교적 줄은 추세긴 하다[13] 물론 동광동 일대가 일본인들이 가장 즐겨 찾는 지역 중의 하나이긴 하지만, 해운대쪽에도 집을 사려는 일본인도 제법 있다는 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