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진

 

[image]
'''조재진
(曺宰溱 / Cho Jae-Jin)'''

<colbgcolor=#423f3f> '''생년월일'''
1981년 7월 9일 (43세)
'''국적'''
[image] 대한민국
'''출신지'''
경기도 파주시
'''신체조건'''
186cm / 78kg
'''포지션'''
스트라이커
'''등번호'''
8번, 9번[1], 18번, 19번[2]
'''학력'''
대신고등학교 (1997~1999)
'''소속팀'''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00~2004)
광주 상무 (2002~2003)
'''시미즈 S펄스 (2004~2007)'''
'''전북 현대 모터스 (2008)'''
감바 오사카 (2009~2010)
'''국가대표
(2003~2008)
'''
40경기 / 10골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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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대한민국의 前 축구 선수.
한국 축구 최고 수준의 타겟형 공격수였다. 전성기 시절에는 공중볼 경합 능력과 강력한 몸싸움, 왕성한 활동량과 의외로 빠른 발을 바탕으로 준수한 연계와 측면 피딩 능력을 갖춘 전형적인 타겟맨으로 국가대표 주전 원톱 자리를 꿰찼다. 그러나 이런 다양한 장점들이 있음에도 선수 생활 내내 그를 따라다녔던 고관절 이형성증 부상과 상대적으로 모자란 골 결정력에 발목을 잡혔다.

2. 클럽 경력



2.1. 수원 삼성 블루윙즈


대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00년 수원 삼성 블루윙즈에 입단하며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수원의 김호 감독이 팀의 10년 대계를 바라보고 육성한 어린 선수들인 이른바 '''김호의 아이들''' 중 한 명이었으며 김두현과 함께 김호의 아이들 가운데 가장 성공한 케이스다. 하지만 쟁쟁한 선수들에 가려 주전 경쟁에서 밀려났던 조재진은 만년 후보로 지내던 중 일찌감치 병역을 해결하고자 2002년 상무에 입대했고, 꾸준한 경기 출전으로 실력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조재진의 수원 시절 성적은 축구팬들에게 두고두고 웃음거리 회자되며 안티들에게 까였는데 기록은 다음과 같다.
2000년 수원 5경기 출장 득점 없음
2001년 수원 3경기 출장 득점 없음
2003년 상무 31경기 출장 3골 3도움 슈팅당 득점률 0.052
2004년 수원 8경기 출장 1골
총 4시즌(수원 3시즌, 상무 1시즌) 47경기 4골(1PK) 3도움 슈팅당 득점률 0.05
물론 수원 시절엔 후보였기에 출장 횟수가 너무 적어 제대로 된 표본이라 하긴 힘들다. 하지만 광주 상무 시절 기록만 봐도 골을 잘 넣는 선수가 아니라는 건 대번에 알 수 있다.[3] 이런 처참한 득점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상무에서 중용된 것은 다른 공격수가 갖지 못한 그만의 장점 때문이었다.
수원, 그리고 상무 시절 조재진은 그야말로 헤딩과 '''포스트 플레이에 특화'''한 선수였다. 강인한 피지컬을 바탕으로 지치지 않는 스태미너와 몸싸움, 공간침투로 수비진을 교란시키고 장신을 활용한 공중볼 장악과 위협적인 헤딩슛 으로 2선 미드필더진에게 많은 기회를 제공했다. 국내 최고 수준의 선수들이 모여있던 수원에선 다소 빛이 바랬지만, 경기를 그려나갈 키 플레이어가 없었던 상무에서 이런 조재진은 독보적인 존재였다.

2.2. 시미즈 S펄스


상무 제대 후 수원으로 복귀했지만, 2004년 J리그 시미즈 S펄스로 이적했다.
K리그보다 수비의 압박이 덜하고 미드필더에서 패스로 풀어가는 J리그에선 꽤 먹어주는 실력으로 펄펄 날아다니며 시미즈 시절 통산 101경기 45골을 기록했다.

2.3. 전북 현대 모터스


'''단 1년 뿐이었지만 전북현대의 왕조 밑거름이 되게 한선수'''
2008년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뉴캐슬[4], 에레디비시의 위트레흐트[5] 등 몇몇 유럽 구단의 주목을 받았으나 계약 단계까지 이르지는 못했고, 시미즈와의 계약이 종료되자 전북에 입단한다.
전북 시절의 조재진은 신인 때와는 스타일이 달랐다. 헤딩 등 슈팅은 수원, 상무 시절보다 정교해졌지만, 그걸 제외한 다른 부분에선 오히려 예전보다 퇴보해서 왕성한 활동력은 많이 줄어 있었다. 압박과 몸싸움이 상대적으로 약한 J리그에 진출한 부작용으로 조재진만의 특화된 장점이 사라져 국대에서의 존재 의의는 점점 희미해졌다.
그러나 전북의 최강희 감독은 조재진에게 활동량과 활동폭 대신에 문전 앞에서의 골사냥만을 요구하며 팀의 공격 전술을 조재진에게 맞추었다. 정규리그 24경기 8골의 성적은 언뜻 보기에는 주전 스트라이커로서는 저조한 성적이지만 전북의 득점은 2008년 24경기에서 총 39득점으로 전체 득점 4위라는 우수한 기록이었으며 조재진은 그 39골을 넣은 전북의 선수 중 가장 많은 골을 넣은 선수였다. 게다가 전북은 이 해에 2000년 이후 팀 사상 두번째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전북이 2008 시즌을 준비하면서 조재진, 강민수 등 좋은 선수를 영입했으면서도 시즌 초반 최악의 부진을 겪다가 정규리그 6위에 그친 것은 조재진을 비롯한 공격진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전반기 내내 호흡이 맞지 않았던 수비라인의 탓이 크다.
즉, 아주 못한 것은 아닌데 2008년 10월 25일 인천 유나이티드전에서 최태욱이 주워먹으라고 골대 1M 앞으로 찔러준 패스를 홈런으로 연결시키는 희대의 개발슛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저평가 받는 경향도 있다. 주요 감상 포인트는 들어간 줄 알고 골을 연호했다가 머쓱해하는 중계진과 패스를 찔러준 팀 동료 최태욱이 머리를 감싸쥐고 아쉬워 하는 장면. 넷상의 축구팬들은 이 슛을 리바이스 대반품 슛이라고 칭했다.

2.4. 감바 오사카


'''현역 마지막 소속팀'''
2008년 K리그 복귀를 나름대로 성공적으로 마쳤으나 다음해 전북에 15억원이라는 거금의 이적료를 안겨주며 일본 J리그 감바 오사카로 이적했다.
2009~2010 일본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6] 국내 복귀를 시도 중인데 에이전트에서 오퍼금액으로 최소 10억 이상이 돼야한다고 떠벌려서 구단과 축구팬을 어이상실하게 만들었다. 사실상 국내 최고 대우를 해달라는 뜻인데... 무슨 이동국처럼 한 시즌 20골을 넣어줄 골잡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몰리나처럼 경기 흐름을 뒤엎어버리는 능력을 보여주지 않는 이상 그런 거액을 선뜻 내줄 팀은 없었다. 정 안되면 미국이나 다른 곳도 알아본다고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K리그J리그의 수준 차이도 있고 전북 현대 모터스에서도 큰 임팩트를 주지 못했다.
결국 K리그보다 수비가 널널한 일본에서 말아먹었으면 국내에서도 통할 리 만무하고 K리그에서 연봉 10억원급을 내 줄만한 구단인 FC 서울, 수원 삼성 블루윙즈같은 구단은 조재진을 필요로 할 분위기도 아니기에 쉽게 K리그 팀에 안착하기 힘들다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2.5. 현역 은퇴


그렇게 에이전트의 언플 때문에 여론이 점점 안좋아지던 중인 2011년 3월 18일, 갑작스럽게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그동안 밝히지 않았지만 20살 때부터 선천성 고관절 이형성 문제로 뼛조각이 돌아다니면서 고통을 주는 상태였고, 선수 생활 내내 병행한 약물 치료도 한계에 부딪혀 병원에서도 더는 뛸 수 없다고 진단했다고. 은퇴 기사
앞서 뉴캐슬 유나이티드 FC와 계약이 불발로 끝난 이유도 사실은 고관절 문제 때문에 메디컬 테스트에서 떨어져서였다. 당시 이적 보도를 냈던 최원창 기자[7]는 거짓보도를 냈다거나 쓸데없이 설레발로 기사를 내서 이적이 취소되었다는 이유로 네티즌들에게 엄청 까였었는데, 조재진이 은퇴를 하며 뉴캐슬 이적이 불발된 진짜 이유를 밝히고 또 고관절 부상 사실도 덮어주었는데, 그동안 뭣도 모르고 까서 미안하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또한 지속적인 하지정맥류 또한 이른 은퇴를 결심하게 된 계기 중 하나로 작용했다. 이런 부상들 때문에 점프 한 번만 해도 착지하고 나서 엄청난 통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2011년 4월 16일, K리그 6라운드 전북 vs 광주의 경기에서 전북 현대 모터스 구단은 한 시즌밖에 안뛴 조재진의 은퇴식을 치뤄주며 훈훈함을 남겼다. [8]
2014년 2월 농구 선수 현주엽과 함께 배임 혐의로 피소되었으나 9월 무혐의 및 각하처분 되었다.

3. 국가대표 경력



3.1.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3.1.1. 2004 아테네 올림픽


아테네 올림픽 조별리그 3차전 말리전에서 헤딩슛으로 2골 기록해 3:3 무승부[9]대한민국의 8강 진출을 견인하며 국대 간판 스트라이커였던 이동국의 백업 요원으로 떠올랐다.[10]

3.2.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3.2.1. 코엘류호


상무 및 올림픽 대표팀에서의 모습을 바탕으로 2003년 코엘류 감독 시절 국가대표팀에 첫 발탁되어 A매치에 데뷔했다.

3.2.1.1. 본프레레호/2004년

2004년 12월 한국이 독일을 3:1로 이긴 레전드급 경기에서 3번째 골을 넣었다. 참고로 차두리가 어시스트한 골로 원래 오른발로 차려고 했는데 빗맞아서 디딤발인 왼발을 맞고 들어갔다(...) 일명 디딤발 슛... 그리고 경기 후 인터뷰로 '자신이 올리버 칸을 상대로 골을 넣을 수 있는 선수라는 것을 증명해서 기쁘다'고 해서 살짝 비웃음을 당했다(...)

3.2.2. 아드보카트호



3.2.2.1. 아드보카트호/2006년


3.2.2.1.1. 2006년 FIFA 독일 월드컵

그리고 2006 FIFA 월드컵 독일을 앞두고 4-3-3 시스템에서 원톱을 맡던 이동국이 갑작스런 십자인대 부상으로 하차하면서 조재진의 축구 인생은 엄청난 변화를 맞는다. 이때까지 최전방에 장신의 타겟 스트라이커를 두는데 익숙해져 있던 대한민국안정환이 그 역할을 완전히 대신하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 하에 조재진을 주전 스트라이커로 발탁했다.[11]
한국은 독일 월드컵에서 준수한 성적을 내고도 조별 예선에서 탈락했지만, 조재진은 3경기 모두 선발로 나서 유럽, 아프리카의 장신 수비수들과의 치열한 경합을 벌이며 많은 공중볼을 따내 외신들의 호평을 받았다.[12] 그러나, 국내 팬들에겐 골을 못 넣는다고 욕을 먹었지만(최전방 공격수인데 유효슈팅 0개...) 그나마 프랑스전에서 분데스리가 최고의 라이트백 윌리 사뇰,프랑스 국대 레전드 수비수 릴리앙 튀랑과의 공중볼 경합에서 이기며 박지성의 동점 골[13][14]을 어시스트해서 체면치레는 하였다.
이때 저위의 리듬타기나 골을 못 넣는 공격수로 까이긴 했지만 프랑스, 스위스의 국대 수비수들을 상대로도 적어도 조재진이 헤딩은 따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면서 외신들에게는 좋은 평가를 받았고 이 평가가 월드컵 이후 해외팀들의 관심으로 이어졌다. (사실 프랑스전에서는 최전방에서 고립된 상태였다. 미드필더 싸움에서 일방적으로 대한민국이 밀리는 바람에...그래도 조재진은 미드필더 라인까지 내려와서 수비가담도 했고..)
그리고 스위스전 패배이후 눈물이 그렁그렁하며 울음을 삼키는 모습이 화제가 되어 CF를 찍기도 했다.

3.2.3. 베어백호



3.2.3.1. 2007년 AFC 아시안컵

독일 월드컵 전후로 대표팀 주전으로 자리매김했지만, 꼬리표처럼 따라다닌 골 결정력 부재는 여전히 나아지지 않았다. 2007년 아시안컵에도 주전 공격수로 나왔으나 역대급 빈공에 시달리던 당시 대표팀의 모습에 따라가먼서 대회 무득점으로 마감했다. 정작 흔들라는 골네트는 승부차기에서 힘차게 흔들었지만...

4. 기타


별명으로는 황새 황선홍의 후계자가 되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작은 황새, 로마자 머리글자로 붙여진 JJJ(쓰리 제이, 트리플 제이)[15], 축구계의 칸트[16], 네덜란드뤼트 판 니스텔로이에서 따온 재지니스텔로이, 네덜란드파트릭 클루이베르트에서 따온 조루이베르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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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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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환을 잇는 간만의 꽃미남 축구스타로 리바이스 광고로 유명하다. 리바이스 이외에도 아디다스 CF를 찍었는데, '나는 공을 차는게 아니야. 90분간 리듬을 타는거지'라는 문구가 화제가 돼서 '''축구할 땐 리듬 좀 그만타고 공을 차라고!'''라는 팬들의 비아냥을 들었다. 덕분에 '리듬조' '공은 안차고 리듬타는 애'등으로 유명해졌다(...) 은퇴 이후 연예계로 진출할 것이냐는 질문도 많이 받았지만 본인은 그럴 생각이 없다고 한다.
CF 때문인지 조재진 관련 짤방이나 영상이 있는데 2004 아테네 올림픽을 앞두고 호주와의 평가전에서 나온 시뮬레이션 액션을 다룰 때 한번 쯤 나올법한 I Believe I can Fly는 꽤 유명한 명작. 그 외에도 2007년 아시안컵 조별예선에서 뜬금없이 하프라인에서 오버헤드킥 슛을 시전(...)한 일명 ‘천수야 역습가자’ 움짤이 유명했었다.
재미없는 축구의 진수를 보여 줬다는 평가를 듣는 2007 AFC 아시안컵을 마지막으로 핌 베어벡 감독이 사퇴하고 후임 허정무 감독이 자신의 팀을 완성해 가면서 대표팀에서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여담으로, 2006년 월드컵을 앞두고 이동국과 조재진 누가 더 타겟에 적합한가 논란이 일었는데, 모 스포츠 잡지에서 특집으로 여러 축구인들에게 앙케트를 돌렸다. 그 가운데 허정무 감독도 있었는데, 답한 사람마다 의견이 갈렸지만 유독 허정무 감독은 비범한 답변을 남겼다. '''둘 다 타겟 감이 아니다.'''
전북으로 이적한 후 2008년 5월 5일 K리그 8라운드 수원 삼성전에서 선제골을 넣은 수원 선수가 전북 서포터즈 앞에서 도발적인 세리머니를 했다는 이유로 동점골을 넣자 수원 서포터즈인 그랑블루에게 주먹감자를 날려서 물의를 빚었다.# 그렇잖아도 수원에서 나가면서 좋지 않게 나가 그랑블루에선 절대로 본명으로 부르지 않고 jjj 같은 별명으로 부를만큼 싫어하는 선수였는데 이 사건으로 영구까임권을 획득. 20라운드에서 다시 맞붙은 수원 홈경기에서 그랑블루가 보복이랍시고 조재진과 스캔들이 있었던 백지영을 거론했다가 엄청난 비판을 받았고 경기에서도 조재진은 1골 1도움을 올리며 5:2 완승을 거두었다.
2009년 감바 오사카로 이적한 후 전북 홈페이지에 직접 그동안 감사했다며 글을 남기는 등 여러모로 전북팬들에게는 좋은 인상으로 남았고 전북 서포터즈 MGB는 조재진의 얼굴이 그려진 응원용 대형 현수막을 감바오사카 서포터즈에게 전달하면서 훈훈하게 마무리 되었다.
전북에서 뛸 때 몇 번 전라북도 내 산골 마을 학교의 아이들을 전액 자비로 초청해서 경기를 관전시켜주었는데 이것은 전북팬들과 구단관계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전까지는 이렇게 팬서비스를 하는 선수가 없었다. 이런 모습을 보며 최강희 감독이나 동료 선수들, 구단 관계자들, 팬들은 '아, 역시 스타 선수는 다르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고.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이후로 전북에서는 어린이날을 비롯해 가끔씩 산골오지의 아이들을 초청하는 선수들이 매년 생겼다. 관련기사
조재진의 은퇴 당시 전북 최강희 감독이 '스타 선수들은 지방 연고 구단에 잘 오려고 하지 않는데 조재진이 전북에 와서 좋은 활약을 보이면서 지방 구단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고 밝혔고, 조재진이 이적하면서 남겨 준 막대한 이적료로 다음 시즌에 알찬 보강으로 창단 이후 첫 우승을 차지하면서 전북 팬들에게는 까임방지권을 얻었다.
이상하게도 은퇴 직후 한동안 다른 나라의 클럽에서 뛴다는 소문도 돌았었다. 대표적으로 인도의 뎀포 SC 라던지, 아이슬란드의 FC Stajarnan(...)[19].라던지. 이스라엘의 하포엘 텔아비브 FC 라던지(...)
2015년에는 골프 사업가로 인생 2막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2018년 이후에는 경기도 김포시에서 축구 교실도 운영하고 있다.
2020년 5월 17일에 방송된 뭉쳐야 찬다 외전 오싹한 과외의 헤딩 코치로 나왔다. 과외 수강생은 허재, 이형택, 김요한, 모태범으로, 주제는 헤딩이다.

5. 기록


'''조재진 국가 대표팀 득점기록'''
'''일시'''
'''장소'''
'''상대팀'''
'''경기결과'''
'''대회명'''
2003년 9월 25일
인천
[image] 베트남
5-0
2004 AFC 아시안 컵 예선
2003년 10월 24일
무스카트
[image] 네팔
7-0
2004 AFC 아시안 컵 예선
2004년 12월 19일
부산
[image] 독일
3-1
친선경기
2006년 2월 1일
홍콩
[image] 덴마크
1-3
2006 칼스버그 컵
2006년 5월 26일
서울
[image]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2-0
친선경기
2006년 9월 6일
수원
[image] 대만
8-0
2007 AFC 아시안컵 예선
2006년 10월 11일
서울
[image] 시리아
2-1
2007 AFC 아시안컵 예선
2007년 7월 5일
서울
[image] 우즈베키스탄
2-1
친선경기

6. 관련 문서


[1] 2006 FIFA 월드컵 독일 이후[2] 2006 FIFA 월드컵 독일에서도 이 번호를 달았다.[3] 상무 시절 동료들의 기록을 살펴보면 이동국 27경기 11골(5PK) 6도움 슈팅당 득점률 0.123, 이광재 17경기 5골 1도움 슈팅당 득점률 0.192, 손정탁 34경기 4골 1도움 슈팅당 득점률 0.111.[4] 후술되지만, 메디컬 테스트 과정에서 '선천적 고관절 이형성 문제'가 발생되어 계약이 취소되었다.[5] 위트레흐트같은 경우 감독이 2007년 서울에서 열린 대한민국네덜란드와의 평가전을 직접 관전할 정도로 관심이 있었지만 경기 도중 부상으로 실려나가 제 기량을 보여주지 못했다.[6] 감바 오사카에서 주전경쟁에서 밀려나버렸다. 부상이 점점 악화되어 정상적인 폼 유지가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7] 전 일간스포츠 소속 기자로 박지성의 PSV, 맨유 시절 전담 기자로 오랫동안 취재하였다. 현재는 수원 삼성의 운영팀장으로 근무 중이다.[8] 이럴수 밖에 없는게 지금은 K리그를 넘어서 아시아에서도 내로라하는 전북이지만 조재진이 입단한 2008년에는 06년 아챔 깜짝 우승이 다인 언더독 지방구단 이었다. 모기업의 적극적 투자가 이뤄지기도 전이라 아챔 우승하고도 주전들 내보내야 했던 팀이었다.(대표적으로 염기훈) 여기에 조재진이라는 스타가 온 것은 맨체스터 시티에 호비뉴가 온것과 동일한 수준의 충격이었다. 거기에 한 시즌 뛰고 감바오사카로 가면서 이적료로 15억이나 남겨줬다.(이는 디종으로 이적한 권창훈의 이적료와 맞먹는다.) 또한 가장 잘 나가는 스타임에도 불구하고 봉사활동이나 팬서비스에 솔선수범하여 팀 전체에 귀감이 되었다.[9] 0:3으로 뒤지고 있던걸 조재진의 연속골과 말리 수비수의 자책골로 동점을 만들었다.[10] 사실 국대 입성 초반엔 이동국을 밀어낸 듯한 느낌을 줄 정도로 자주 출전했다. 득점력 때문에 곧바로 이동국에 밀리기는 했지만(...) 즉 처음엔 이동국의 경쟁자였다. 이동국은 이미 주전이고 조재진이 엄청 분발해서 백업자리를 차지한 것은 아니라는 것.[11] 프랑스전에서 월드 클래스 수비수들을 제치고 헤딩은 다 따냈다. [12] 그래서, 조재진은 "동국이 형만 있었어도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라고 아쉬워했었다.[13] 당시 우리 주요 전술은 후방에서 뻥 차주고, 조재진이 떨궈줘서 누군가 주워먹는 공격루트인데, 이 박지성의 주워먹기 골이 유일하게 성공한 사례이다.[14] 근데 박지성의 골은 후방에서 차준게 아니라 설기현의 크로스였다. [15] 그런데 정작 조재진의 정식 영문 이름 표기는 Cho Jae-jin이다.[16] 경기시간만 되면 정확히 90분동안 그라운드를 유유히 산책하며 사색에 잠기기 때문에….[17] 2004년 SBS가 일으킨 자막 방송사고이다.이날 최성용은 173세가 되었다(...)#[18] 바르게 표기하자면 23세 186cm 72kg로 나와야 했다.[19] 이 팀은 네이버에 '웃긴 골세리머니'라고 치면 나오는 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