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럴드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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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rald Vincent Bull
제럴드 빈센트 불(Gerald Vincent Bull) 박사는 1928년 3월 9일에 태어나 1990년 3월 20일에 모사드에 의해 암살당한 캐나다인으로, 특기 분야는 대포다. 빅 바빌론 프로젝트로 유명하다.
1928년 3월 9일에 캐나다의 온타리오에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모두 잃어서 삼촌 집에 얹혀살게 되고, 그 삼촌마저 유명을 달리하여 숙모의 밑에서 불우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비상한 천재였던 그는 '''24살에 박사'''가 되어 당시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하여 영국의 과학기술들이 피난차 이전되었던 캐나다 무기 연구 및 발전 시설(Canadian Armament Research and Development Establishment)에 들어가 연구를 하게 되었다.
제랄드가 맡은 일은 모형과 풍동실험을 통하여 초음속이 비행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서였다. 기존 방식은 기체 주변의 공기를 이동시켜 환경을 만들어 주는 방법이었는데, 초음속 레벨에 달하자 그만한 기류를 만들어주는 데에 큰 어려움이 있었다. 이 때 제럴드는 발상을 전환하여 관찰모형을 송탄통(sabot)에 집어넣고 대포를 이용하여 발사하는 방식으로 모형을 초음속 상태로 만들어 문제를 해결하였다.
캐나다 정부의 군사기술에 대한 미온적인 태도(투자 문제)와 고루한 관료주의와 더불어 소득에 대한 불만 때문에 박사는 기존 직장을 버리고 몬트리올 맥길 대학교의 교수로 옮겼다. 덕분에 CARDE에서 공기동역학 학자로서 1959년, 1만 7천 달러를 받은데 반해, 1961년, 미국 국방성과의 노즈콘(탄두 뚜껑) 관련한 상담만으로 10만 달러가 넘는 소득을 벌어들였다. 또한 미군 탄도연구실(US Army's Ballistic Research Lab)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일생에 걸친 제럴드의 꿈이라면 대포로 발사한 투사체가 바로 지구 중력권을 빠져나가 외부 궤도에 올라앉게 하는 것이었다. 1961년 제랄드는 HARP(High Altitude Research Project) 계획을 시작하게 된다. HARP 계획은 맥길 대학 지원으로 이루어지는 비군사적인 학문적 계획이었다. 제럴드는 기계공학부분의 교수로 참가했다. 그러나 계획의 특성 상 미군 탄도연구실도 이 계획의 강력한 후원자가 되었고, 당연하게도 미군은 실험을 위해 퇴역한 전함의 함포와 레이더를 비롯한 군사장비를 제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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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인치 HARP 대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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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인치 HARP 대포의 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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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 중단후 현지에 버려진 16인치 HARP 대포.
계획의 자세한 내용은 HARP 프로젝트 항목 참조.
실제로 HARP 계획은 고도 180km까지 발사체를 날려 보내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의 전비로 인해 미국의 투자가 중단되어 취소되었다. 음모론이지만 저렴한 위성발사 방법이 개발되면 결국 핵무기처럼 퍼져나가 세계적인 우주경쟁시대가 열릴 것을 우려했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보통의 과학자라면 여기서 꿈을 접겠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제럴드는 계획의 경력자들을 재조직하여 상업적 기업인 우주연구회사(Space Research Corporation)를 세웠다. 박사는 그의 슈퍼 건에 관한 비전의 실현을 도와줄 후원자를 찾기 위하여 NATO, 미국, 캐나다, 중국, 이스라엘, 핀란드 그리고 이라크 등의 다양한 세력들과 접촉했다.
당시는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었고, 제럴드의 항공역학 투사체 연구 덕에 그는 회사를 군사병기회사로 바꿀 수 있었다. 투사체를 고고도까지 날도록 한 그 동안의 연구는 또한 기존의 포탄에 비해 더 먼 거리를 날아가 목표를 더 정확하게 맞출 수 있는 신형 포탄을 만들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제럴드의 회사에서 만들어진 포탄은 당장 미해군에 채택되어, 미군의 구축함들이 베트남 해안에서 소련이 지어 준 베트남의 신형 해안요새를 요새포 사거리 밖에서 피해 없이 침묵시킬 수 있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제럴드의 회사가 생산하는 포탄은 그의 국적이 있는 캐나다의 공장에서 생산되었는데, 제럴드가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그의 생산품을 많이 사용하는 미 국방부의 무기 거래에 걸리적거렸다. 그러나 제럴드의 전략적 중요함을 알게 된 이상 그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면 저런 문제는 사소한 걸림돌이 될 뿐이었고, 그리하여 상원의원 배리 골드워터(Barry Goldwater)의 후원으로 제럴드는 국회의 동의를 얻어 미국 국적을 얻을 수 있었다. 1964년도 미 대선에서 데이지 걸로 린든 B. 존슨에게 떡실신 당한 그 사람이 맞다. 이런 경우는 이전에 단지 윈스턴 처칠과 라파예트 후작만이 누릴 수 있었던 아주 드문 영예였다.
상원의 의결에도 불구하고, 해군과의 거래는 결국 여러가지 이유로 무산되었다. 미 해군이 탁월한 성능에도 불구하고 박사의 상품을 경멸하였지만, 다른 이들은 그런 단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박사의 사거리 연장 포탄과 그를 쏘기 위하여 디자인된 살상용으로는 끝내주는 성능의 야포는 이집트, 이스라엘, 네덜란드, 이탈리아, 영국, 캐나다, 베네수엘라, 칠레, 태국, 이란, 남아프리카 공화국, 오스트리아, 그리고 심지어 소말리아 등 많은 나라들이 채택을 했다. 미국과 캐나다 국적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박사의 입장은 두 나라 군수제품의 수출법령의 차이를 이용하여 법망을 피할 수 있는 나라에서 상품을 선적하여 수출하면 된다는 '''꼼수'''를 사용 가능하게 하므로 사업에 이점을 제공하였다. 이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박사는 버몬트 주 북쪽 경계의 고립된 시골에 그 자신의 포격장, 측정탑, 사격제어탑, 레이더 추적실, 작업장 그리고 기계실을 지었다. 이 상태에서 SRC는 300명이 넘는 사람을 고용하고 1500만 달러가 넘는 첨단 장비를 보유하고 있었다.
HARP 사업의 중단은 박사에게 정부 출자 과학 기관을 불신하게 만들었다. 그는 정부의 연구자들을 "광대" 혹은 "잡종과학자"라고 언급하였고, 자신의 미래는 자유로운 사업의 활력있는 세계에 의존할 것을 결심하였다. 일단 자금 문제상 최종 목적인 우주로 나가 고고도를 탐색하는 대신, 박사는 그의 재능을 돈을 벌기 위해서라도 치명적인 군수품의 개량에 바쳤다. 박사는 그가 싫어하였던 소련이나 그 동맹국에 대해서는 자사 제품을 팔지 않았지만, 그 외는 '''누구에게나 팔았다'''. 박사의 대포는 앙골라의 조나스 사빔비의 UNITA 전쟁에서 큰 도움이 되었고, 이란 이라크 전쟁에서도 양 측에 의해 널리 사용되었다.
우주개발자였던 박사는 이제 전문 무기상이 되었다. 박사는 무기상으로는 큰 성공은 거두지 못하였는데 '''상업적인 재능은 없었기 때문이다'''. 많은 엔지니어들처럼 박사도 사업적인 경영에 지배되기보다는 기술적 성취의 결과에 즐거워했다. SRC의 분위기는 박사는 교수, 고용인들은 학생으로 비교가 되는 매우 학구적인 분위기였다. 박사의 고용인들은 그에게 대한 충성도가 매우 높아 거의 숭배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SRC는 박사의 천재적인 기술적 장점에도 불구하고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 박사는 대포 기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것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자신의 개량 대포를 수출한 것이다. 이것이 나중에 G5가 되었는데, 기존의 대포를 능가하는 사거리를 자랑해서 1970년대에 개발된 견인포 중에선 가장 우수한 성능이었다고 한다.
이 탓에 제럴드는 1980년에 큰 시련을 겪는다. '''미국의 카터 행정부가 제럴드의 남아프리카 공화국과의 거래를 비난하며 그를 금수조치 위반과 관세법 위반 혐의로 투옥시켰기 때문이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제럴드는 자신이 위선자이며 편향적이고 배타적인 워싱턴의 관료집단의 정치적 희생양이 됐다고 생각했다. 제럴드는 미국 감옥에서 7개월동안 옥살이를 하였고, 많은 양의 서적을 읽고, 감옥의 난방시설을 성공적으로 재구성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옥에서의 씁쓸한 경험은 그를 냉소적으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박사의 열렬한 고객 중 하나인 중동에서는 옥중의 박사에게 비지니스를 제안했고, 박사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서 출소 후에는 미국과 캐나다에서의 고립을 포기하고 벨기에의 브뤼셀로 이사했다. SRC는 유럽의 최전방 무기고이며, 어떤 전쟁상품도 거래될 수 있는 이 곳에서 큰 환영을 받았다.
1987년 11월, 제럴드 불은 브뤼셀 주재 이라크 대사관의 정중한 접촉을 받고 이라크 측의 모든 경비 제공 하에 바그다드로 가게 되었다. 지난 이란과의 소모적이고 승패가 불분명한 전쟁에서 사담 후세인 정권은 800억 달러의 병기와 병장비를 소비하였다. 사담은 특별히 소련이 지원한 스커드 미사일을 좋아하였는데, 이것은 "도시간의 전쟁"으로 불리어진 기간 동안 도시 한가운데에 발사되어 시민들을 살상함으로서 이란인들의 전쟁 사기를 가혹하게 흔들었다. 사담의 심중에서 스커드 미사일의 가장 큰 문제는 제한된 사거리와 낮은 명중율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라크 로켓 기술의 발전에 많은 장비와 인력을 투자하고 있었다. 이라크는 이미 제럴드의 155mm 야포를 남아프리카와 오스트리아로부터 많은 양을 사들였었고, 그 위력에 감탄하고 있었다. 이라크는 미군이 운용했던 야포 이상으로 더 좋고, 더 멀리 나가며, 더 정확한 제럴드의 야포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제럴드는 다시 감옥에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이라크에 대한 무기 금수 조치를 깨는 일에 대해 마지못해 동의하였다. 일단 상황이 다급했으므로 이라크는 그의 비위를 잘 맞추었다. 또한 그들은 제럴드의 평화적인 우주대포계획에 대해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여 그를 기쁘게 하였다. 결국 "주도권을 생각하십시오" 라면서 제럴드는 이라크 산업부에 자신의 생각을 제의하였고 이라크 정부의 흥미를 끌었다.
이스라엘은 1988년 9월에 그들의 샤비트(Shavit) 로켓을 궤도상에 올려놓는 데 성공하였다. 이 사건은 아랍 연맹에게는 매우 큰 충격과 실망을 안겨주었다. 제럴드는 이라크는 수십 혹은 수백의 아랍 인공위성을 궤도상에 올려놓을 수 있을 것을 약속하였다. 물론 작고 무인이라는 단서가 붙기는 하지만 숫자로 압도할 수 있었다. 또 그 발사체들은 한 개에 단지 5천 달러 정도의 비용만이 들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것이 달성된다면 이라크는 초강대국에 비하면 작지만 유일하게 아랍에서 우주로 진출한 기록을 세울 수 있었다. 게다가 작은 위성일지라도 일단 작아서 자연스럽게 위장효과가 생기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감시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게다가 스파이 위성의 유용성은 이미 초강대국에 의해 증명되었으며, 이라크 측은 제럴드와의 협력을 통하여 매우 넓은 범위에 적용할 수 있는 유용한 과학적 지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지식은 평화적이건 군사적이건 다양한 용도로 쓰일 수 있었다.
어쨌거나 제럴드는 그의 인생에서 최초로 다양한 지원을 할 수 있는 관대한 후견인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를 할 수 있었다. 1989년 이라크는 제럴드와 그 회사에 기존에 보유한 이라크군의 야포를 개량하는 대가로 1년에 500만 달러를 지불하고, 이라크 소유의 스페이스 건을 만들기 위한 계획의 절정인 '바빌론 계획'에 착수하였다. 제럴드는 북부 이라크에 사드 16 미사일 테스트 복합단지와 같은 전용 무기 벙커를, 서방 기술자의 관리와 그레이 마켓에서 구한 서방의 첨단장비들을 가지고 제작에 들어갔다. 바빌론 프로젝트는 지금까지 꿈꾸어 온 제럴드의 대망이었고, 이제 모든 것이 그의 손 안에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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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중인 베이비 바빌론(Baby Babylon).
1989년 8월, 350mm의 구경을 가진 베이비 바빌론(Baby Babylon)이라고 명명된 원형의 축소판이 중앙 이라크의 자발 함라인(Jabal Hamrayn)[1] 이라는 비밀장소에서 건조되었다. 베이비 바빌론은 탄두를 우주궤도에 올릴 수는 없었지만, 탄도탄으로 간주될 수 있는 사거리(750km)를 가질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라크는 1,000mm 구경과 2,100톤의 무게를 가진 원형인 빅 바빌론을 비롯한 다른 스페이스 건도 제작을 시도하였으나 부품 밀수에 어려움이 있었다. 워낙 구경이 커서 고압수도파이프로 위장할 수 있었지만, 무기 상인으로서의 제럴드의 재능이 별 볼 일 없다는 것은 그가 이미 감옥을 다녀 온 것으로부터 증명이 된 바다. 제럴드 자신부터가 자신의 위업을 선전하기 좋아했다. 제럴드의 역할이 상당하였던 "지적 공동체"의 내부에서 말들이 새기 시작했고, 몇 가지는 이라크와 미사일과 관련이 있는 내용이었다.
웃기게도 이라크의 스페이스 건은 '''통상적인 군사무기로서의 효용성이 거의 없었다'''. 일단 너무 커서 은폐를 할 수 없고 이동은 커녕 방향 전환마저도 할 수 없었다. 이는 애초에 거대한 크기로 인해 포신을 고정 가능한 방법이 없어서 산의 경사면에 포신을 기대서 건설했을 때부터 생긴 원초적인 문제였다. 또한 발사 시에는 150m 크기의 화염을 내뿜는데 이는 일반적인 스파이 위성이 간단히 잡아낼 수 있었으며 그 파괴를 위해서는 이스라엘의 F-15 전폭기의 단 한 번의 공격이면 충분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포를 만들어서 적국을 타격하느니 차라리 '''항공기를 이용한 폭격'''이 모든 방면에서 효율적임이 이미 2차 대전에서 증명되었다. 그 결과 군사적 위치로는 스페이스 건과 거의 비슷한 열차포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게다가 스페이스 건이 단 한방의 발사체로로도 적국을 끝낼 충분한 가능성인 화생방 병기를 적의 수도 한 가운데에 떨구는 방법을 사용할 수 있지만 그것 역시 이미 베트남 전쟁에서 고엽제 등을 항공기로 미친듯이 뿌린 역사가 있고. NBC 병기는 그렇게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사용 시 엄청난 국제적 비난에 직면하고, 상대도 똑같이 NBC 병기를 마구 양산해(핵은 그렇다 쳐도 생화학 무기라는 게 만들기 어려워 보이지만 국가적 역량을 동원한다면 양산이 엄청 쉬운 물건 중 하나다.) 공격해 올것이 자명하고 상대가 NBC 병기를 쓸 것이 알려지면 그에 대한 대비를 하게 되어 제대로 된 타격을 못 주고 오히려 전투 수행에 지장만 주기 때문에 함부로 사용할 수 있는 무기가 아니다.
그러나, 아니 어쩌면 그렇기에 제럴드는 어처구니없게도 바빌론 계획이 100% 평화롭게 쓰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성적으로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럴드는 해당 계획이 군사적 용도로 쓰일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했다. 제럴드가 그의 바빌론 계획에서 원한 것은 명성이었다. 제럴드는 전 세계가 "제리 불(Jerry Bull)" 자신을 우주개발계획을 홀로 이루어 낸 사람으로서 기억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는 스푸트니크가 처음 발사되었을 때 들렸던 세계의 반응을 잊을 수 없었다. 이에 대해 박사의 아들은 "아버지는 그 능력에 비해서 정치적 감각이 떨어졌습니다."라며 씁쓸해했다.
다만 정치적으로는 나름 쓸만한 무기라고 할 수 있는데, 사담 후세인에게 있어서 바빌론 프로젝트는 군사적 무기 이상의 것이었다. 단지 몇 문의 스페이스 건을 장비한 포병 대대로부터 이라크의 명성이라는 성공이 얻어질 수 있다는 환상적인 비약이 이루어졌다. 아랍 세계를 주도권을 쥐는 것은 사담의 야망이었고, 제럴드의 대포는 이라크 주도권의 상징이 될 것이었다. 게다가 호메이니와의 오랜 전쟁은 사담의 위대함을 위한 야망을 없애지 못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1980년 파리 호텔방에서 이라크 핵물리학자 야하 엘 메스하드(Yayha El Meshad)가 모사드에 의하여 살해된 사건과, 1981년의 오시라크 원자로 공습을 통하여, 이런 사담의 야망을 좌절시키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위에 언급된 약점들로 인하여 스페이스 건 자체는 그리 위협적인 무기는 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이스라엘은 일단 제랄드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제럴드는 이라크 측의 요청에 의해 스커드 미사일의 노즈콘 설계에 나서게 되고, 이것이 스페이스 건과는 달리 안보에 큰 위협이 된다고 생각한 이스라엘 측은 지인들을 통해서 박사와의 접촉을 시도했다. 그리고 그 결과 박사는 '''이스라엘의 블랙리스트에 올라갔다'''. 이후로 불 박사는 집에 오면 모든 가구들이 이상하게 배치되어 있다거나, 누군가가 뒤를 밟다가 사라진다거나 하는 수상한 사건에 시달리면서 부쩍 신경질적이 되어 갔다. 그의 최후를 추측하는 사람들 중에는 '나중에 일어난 일과 연결해보면,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이스라엘의 경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러한 사건이 계속 일어나던 중, 결국 1990년 3월 22일, 박사는 브뤼셀의 아파트에서 초대받지 않은 손님과 만나, 무소음 자동권총으로부터 발사된 30구경 총탄 5발을 목과 뒷머리에 맞고 절명하였다. 제럴드를 암살한 자는 끝내 발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여러가지 정황을 보면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바로 모사드이다. 이미 제럴드 불을 추적, 암살을 시도했었고, 무엇보다 불의 시신에서 발견된 총탄은 모사드 요원들이 많이 쓰던 것과 동일했다. 이스라엘 국내는 물론 전 세계 대부분 언론이 이 사건을 모사드의 암살로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모사드는 영화 뮌헨으로 유명해진 검은9월단 보복암살처럼 일단 목표가 정해지면 노골적으로 암살을 시도한다. 설사 실패해서 대외적으로 암살공작이 폭로되어도 멈추지 않는다. 검은9월단 보복작전의 경우도 심지어 엉뚱한 민간인을 사살하는 등 국제적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음에도 몇 년에 걸쳐 계속 수행하는 등 악명이 높았기 때문이다.
Gerald Vincent Bull
1. 개요
제럴드 빈센트 불(Gerald Vincent Bull) 박사는 1928년 3월 9일에 태어나 1990년 3월 20일에 모사드에 의해 암살당한 캐나다인으로, 특기 분야는 대포다. 빅 바빌론 프로젝트로 유명하다.
2. 생애
2.1. 과학자
1928년 3월 9일에 캐나다의 온타리오에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모두 잃어서 삼촌 집에 얹혀살게 되고, 그 삼촌마저 유명을 달리하여 숙모의 밑에서 불우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비상한 천재였던 그는 '''24살에 박사'''가 되어 당시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하여 영국의 과학기술들이 피난차 이전되었던 캐나다 무기 연구 및 발전 시설(Canadian Armament Research and Development Establishment)에 들어가 연구를 하게 되었다.
제랄드가 맡은 일은 모형과 풍동실험을 통하여 초음속이 비행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서였다. 기존 방식은 기체 주변의 공기를 이동시켜 환경을 만들어 주는 방법이었는데, 초음속 레벨에 달하자 그만한 기류를 만들어주는 데에 큰 어려움이 있었다. 이 때 제럴드는 발상을 전환하여 관찰모형을 송탄통(sabot)에 집어넣고 대포를 이용하여 발사하는 방식으로 모형을 초음속 상태로 만들어 문제를 해결하였다.
캐나다 정부의 군사기술에 대한 미온적인 태도(투자 문제)와 고루한 관료주의와 더불어 소득에 대한 불만 때문에 박사는 기존 직장을 버리고 몬트리올 맥길 대학교의 교수로 옮겼다. 덕분에 CARDE에서 공기동역학 학자로서 1959년, 1만 7천 달러를 받은데 반해, 1961년, 미국 국방성과의 노즈콘(탄두 뚜껑) 관련한 상담만으로 10만 달러가 넘는 소득을 벌어들였다. 또한 미군 탄도연구실(US Army's Ballistic Research Lab)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일생에 걸친 제럴드의 꿈이라면 대포로 발사한 투사체가 바로 지구 중력권을 빠져나가 외부 궤도에 올라앉게 하는 것이었다. 1961년 제랄드는 HARP(High Altitude Research Project) 계획을 시작하게 된다. HARP 계획은 맥길 대학 지원으로 이루어지는 비군사적인 학문적 계획이었다. 제럴드는 기계공학부분의 교수로 참가했다. 그러나 계획의 특성 상 미군 탄도연구실도 이 계획의 강력한 후원자가 되었고, 당연하게도 미군은 실험을 위해 퇴역한 전함의 함포와 레이더를 비롯한 군사장비를 제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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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인치 HARP 대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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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인치 HARP 대포의 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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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 중단후 현지에 버려진 16인치 HARP 대포.
계획의 자세한 내용은 HARP 프로젝트 항목 참조.
실제로 HARP 계획은 고도 180km까지 발사체를 날려 보내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의 전비로 인해 미국의 투자가 중단되어 취소되었다. 음모론이지만 저렴한 위성발사 방법이 개발되면 결국 핵무기처럼 퍼져나가 세계적인 우주경쟁시대가 열릴 것을 우려했다는 설도 있다.
2.2. 변신
아무튼 보통의 과학자라면 여기서 꿈을 접겠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제럴드는 계획의 경력자들을 재조직하여 상업적 기업인 우주연구회사(Space Research Corporation)를 세웠다. 박사는 그의 슈퍼 건에 관한 비전의 실현을 도와줄 후원자를 찾기 위하여 NATO, 미국, 캐나다, 중국, 이스라엘, 핀란드 그리고 이라크 등의 다양한 세력들과 접촉했다.
당시는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었고, 제럴드의 항공역학 투사체 연구 덕에 그는 회사를 군사병기회사로 바꿀 수 있었다. 투사체를 고고도까지 날도록 한 그 동안의 연구는 또한 기존의 포탄에 비해 더 먼 거리를 날아가 목표를 더 정확하게 맞출 수 있는 신형 포탄을 만들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제럴드의 회사에서 만들어진 포탄은 당장 미해군에 채택되어, 미군의 구축함들이 베트남 해안에서 소련이 지어 준 베트남의 신형 해안요새를 요새포 사거리 밖에서 피해 없이 침묵시킬 수 있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제럴드의 회사가 생산하는 포탄은 그의 국적이 있는 캐나다의 공장에서 생산되었는데, 제럴드가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그의 생산품을 많이 사용하는 미 국방부의 무기 거래에 걸리적거렸다. 그러나 제럴드의 전략적 중요함을 알게 된 이상 그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면 저런 문제는 사소한 걸림돌이 될 뿐이었고, 그리하여 상원의원 배리 골드워터(Barry Goldwater)의 후원으로 제럴드는 국회의 동의를 얻어 미국 국적을 얻을 수 있었다. 1964년도 미 대선에서 데이지 걸로 린든 B. 존슨에게 떡실신 당한 그 사람이 맞다. 이런 경우는 이전에 단지 윈스턴 처칠과 라파예트 후작만이 누릴 수 있었던 아주 드문 영예였다.
상원의 의결에도 불구하고, 해군과의 거래는 결국 여러가지 이유로 무산되었다. 미 해군이 탁월한 성능에도 불구하고 박사의 상품을 경멸하였지만, 다른 이들은 그런 단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박사의 사거리 연장 포탄과 그를 쏘기 위하여 디자인된 살상용으로는 끝내주는 성능의 야포는 이집트, 이스라엘, 네덜란드, 이탈리아, 영국, 캐나다, 베네수엘라, 칠레, 태국, 이란, 남아프리카 공화국, 오스트리아, 그리고 심지어 소말리아 등 많은 나라들이 채택을 했다. 미국과 캐나다 국적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박사의 입장은 두 나라 군수제품의 수출법령의 차이를 이용하여 법망을 피할 수 있는 나라에서 상품을 선적하여 수출하면 된다는 '''꼼수'''를 사용 가능하게 하므로 사업에 이점을 제공하였다. 이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박사는 버몬트 주 북쪽 경계의 고립된 시골에 그 자신의 포격장, 측정탑, 사격제어탑, 레이더 추적실, 작업장 그리고 기계실을 지었다. 이 상태에서 SRC는 300명이 넘는 사람을 고용하고 1500만 달러가 넘는 첨단 장비를 보유하고 있었다.
HARP 사업의 중단은 박사에게 정부 출자 과학 기관을 불신하게 만들었다. 그는 정부의 연구자들을 "광대" 혹은 "잡종과학자"라고 언급하였고, 자신의 미래는 자유로운 사업의 활력있는 세계에 의존할 것을 결심하였다. 일단 자금 문제상 최종 목적인 우주로 나가 고고도를 탐색하는 대신, 박사는 그의 재능을 돈을 벌기 위해서라도 치명적인 군수품의 개량에 바쳤다. 박사는 그가 싫어하였던 소련이나 그 동맹국에 대해서는 자사 제품을 팔지 않았지만, 그 외는 '''누구에게나 팔았다'''. 박사의 대포는 앙골라의 조나스 사빔비의 UNITA 전쟁에서 큰 도움이 되었고, 이란 이라크 전쟁에서도 양 측에 의해 널리 사용되었다.
우주개발자였던 박사는 이제 전문 무기상이 되었다. 박사는 무기상으로는 큰 성공은 거두지 못하였는데 '''상업적인 재능은 없었기 때문이다'''. 많은 엔지니어들처럼 박사도 사업적인 경영에 지배되기보다는 기술적 성취의 결과에 즐거워했다. SRC의 분위기는 박사는 교수, 고용인들은 학생으로 비교가 되는 매우 학구적인 분위기였다. 박사의 고용인들은 그에게 대한 충성도가 매우 높아 거의 숭배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SRC는 박사의 천재적인 기술적 장점에도 불구하고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 박사는 대포 기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것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자신의 개량 대포를 수출한 것이다. 이것이 나중에 G5가 되었는데, 기존의 대포를 능가하는 사거리를 자랑해서 1970년대에 개발된 견인포 중에선 가장 우수한 성능이었다고 한다.
이 탓에 제럴드는 1980년에 큰 시련을 겪는다. '''미국의 카터 행정부가 제럴드의 남아프리카 공화국과의 거래를 비난하며 그를 금수조치 위반과 관세법 위반 혐의로 투옥시켰기 때문이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제럴드는 자신이 위선자이며 편향적이고 배타적인 워싱턴의 관료집단의 정치적 희생양이 됐다고 생각했다. 제럴드는 미국 감옥에서 7개월동안 옥살이를 하였고, 많은 양의 서적을 읽고, 감옥의 난방시설을 성공적으로 재구성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옥에서의 씁쓸한 경험은 그를 냉소적으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박사의 열렬한 고객 중 하나인 중동에서는 옥중의 박사에게 비지니스를 제안했고, 박사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서 출소 후에는 미국과 캐나다에서의 고립을 포기하고 벨기에의 브뤼셀로 이사했다. SRC는 유럽의 최전방 무기고이며, 어떤 전쟁상품도 거래될 수 있는 이 곳에서 큰 환영을 받았다.
2.3. 몰락
1987년 11월, 제럴드 불은 브뤼셀 주재 이라크 대사관의 정중한 접촉을 받고 이라크 측의 모든 경비 제공 하에 바그다드로 가게 되었다. 지난 이란과의 소모적이고 승패가 불분명한 전쟁에서 사담 후세인 정권은 800억 달러의 병기와 병장비를 소비하였다. 사담은 특별히 소련이 지원한 스커드 미사일을 좋아하였는데, 이것은 "도시간의 전쟁"으로 불리어진 기간 동안 도시 한가운데에 발사되어 시민들을 살상함으로서 이란인들의 전쟁 사기를 가혹하게 흔들었다. 사담의 심중에서 스커드 미사일의 가장 큰 문제는 제한된 사거리와 낮은 명중율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라크 로켓 기술의 발전에 많은 장비와 인력을 투자하고 있었다. 이라크는 이미 제럴드의 155mm 야포를 남아프리카와 오스트리아로부터 많은 양을 사들였었고, 그 위력에 감탄하고 있었다. 이라크는 미군이 운용했던 야포 이상으로 더 좋고, 더 멀리 나가며, 더 정확한 제럴드의 야포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제럴드는 다시 감옥에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이라크에 대한 무기 금수 조치를 깨는 일에 대해 마지못해 동의하였다. 일단 상황이 다급했으므로 이라크는 그의 비위를 잘 맞추었다. 또한 그들은 제럴드의 평화적인 우주대포계획에 대해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여 그를 기쁘게 하였다. 결국 "주도권을 생각하십시오" 라면서 제럴드는 이라크 산업부에 자신의 생각을 제의하였고 이라크 정부의 흥미를 끌었다.
이스라엘은 1988년 9월에 그들의 샤비트(Shavit) 로켓을 궤도상에 올려놓는 데 성공하였다. 이 사건은 아랍 연맹에게는 매우 큰 충격과 실망을 안겨주었다. 제럴드는 이라크는 수십 혹은 수백의 아랍 인공위성을 궤도상에 올려놓을 수 있을 것을 약속하였다. 물론 작고 무인이라는 단서가 붙기는 하지만 숫자로 압도할 수 있었다. 또 그 발사체들은 한 개에 단지 5천 달러 정도의 비용만이 들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것이 달성된다면 이라크는 초강대국에 비하면 작지만 유일하게 아랍에서 우주로 진출한 기록을 세울 수 있었다. 게다가 작은 위성일지라도 일단 작아서 자연스럽게 위장효과가 생기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감시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게다가 스파이 위성의 유용성은 이미 초강대국에 의해 증명되었으며, 이라크 측은 제럴드와의 협력을 통하여 매우 넓은 범위에 적용할 수 있는 유용한 과학적 지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지식은 평화적이건 군사적이건 다양한 용도로 쓰일 수 있었다.
어쨌거나 제럴드는 그의 인생에서 최초로 다양한 지원을 할 수 있는 관대한 후견인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를 할 수 있었다. 1989년 이라크는 제럴드와 그 회사에 기존에 보유한 이라크군의 야포를 개량하는 대가로 1년에 500만 달러를 지불하고, 이라크 소유의 스페이스 건을 만들기 위한 계획의 절정인 '바빌론 계획'에 착수하였다. 제럴드는 북부 이라크에 사드 16 미사일 테스트 복합단지와 같은 전용 무기 벙커를, 서방 기술자의 관리와 그레이 마켓에서 구한 서방의 첨단장비들을 가지고 제작에 들어갔다. 바빌론 프로젝트는 지금까지 꿈꾸어 온 제럴드의 대망이었고, 이제 모든 것이 그의 손 안에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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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중인 베이비 바빌론(Baby Babylon).
1989년 8월, 350mm의 구경을 가진 베이비 바빌론(Baby Babylon)이라고 명명된 원형의 축소판이 중앙 이라크의 자발 함라인(Jabal Hamrayn)[1] 이라는 비밀장소에서 건조되었다. 베이비 바빌론은 탄두를 우주궤도에 올릴 수는 없었지만, 탄도탄으로 간주될 수 있는 사거리(750km)를 가질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라크는 1,000mm 구경과 2,100톤의 무게를 가진 원형인 빅 바빌론을 비롯한 다른 스페이스 건도 제작을 시도하였으나 부품 밀수에 어려움이 있었다. 워낙 구경이 커서 고압수도파이프로 위장할 수 있었지만, 무기 상인으로서의 제럴드의 재능이 별 볼 일 없다는 것은 그가 이미 감옥을 다녀 온 것으로부터 증명이 된 바다. 제럴드 자신부터가 자신의 위업을 선전하기 좋아했다. 제럴드의 역할이 상당하였던 "지적 공동체"의 내부에서 말들이 새기 시작했고, 몇 가지는 이라크와 미사일과 관련이 있는 내용이었다.
웃기게도 이라크의 스페이스 건은 '''통상적인 군사무기로서의 효용성이 거의 없었다'''. 일단 너무 커서 은폐를 할 수 없고 이동은 커녕 방향 전환마저도 할 수 없었다. 이는 애초에 거대한 크기로 인해 포신을 고정 가능한 방법이 없어서 산의 경사면에 포신을 기대서 건설했을 때부터 생긴 원초적인 문제였다. 또한 발사 시에는 150m 크기의 화염을 내뿜는데 이는 일반적인 스파이 위성이 간단히 잡아낼 수 있었으며 그 파괴를 위해서는 이스라엘의 F-15 전폭기의 단 한 번의 공격이면 충분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포를 만들어서 적국을 타격하느니 차라리 '''항공기를 이용한 폭격'''이 모든 방면에서 효율적임이 이미 2차 대전에서 증명되었다. 그 결과 군사적 위치로는 스페이스 건과 거의 비슷한 열차포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게다가 스페이스 건이 단 한방의 발사체로로도 적국을 끝낼 충분한 가능성인 화생방 병기를 적의 수도 한 가운데에 떨구는 방법을 사용할 수 있지만 그것 역시 이미 베트남 전쟁에서 고엽제 등을 항공기로 미친듯이 뿌린 역사가 있고. NBC 병기는 그렇게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사용 시 엄청난 국제적 비난에 직면하고, 상대도 똑같이 NBC 병기를 마구 양산해(핵은 그렇다 쳐도 생화학 무기라는 게 만들기 어려워 보이지만 국가적 역량을 동원한다면 양산이 엄청 쉬운 물건 중 하나다.) 공격해 올것이 자명하고 상대가 NBC 병기를 쓸 것이 알려지면 그에 대한 대비를 하게 되어 제대로 된 타격을 못 주고 오히려 전투 수행에 지장만 주기 때문에 함부로 사용할 수 있는 무기가 아니다.
그러나, 아니 어쩌면 그렇기에 제럴드는 어처구니없게도 바빌론 계획이 100% 평화롭게 쓰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성적으로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럴드는 해당 계획이 군사적 용도로 쓰일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했다. 제럴드가 그의 바빌론 계획에서 원한 것은 명성이었다. 제럴드는 전 세계가 "제리 불(Jerry Bull)" 자신을 우주개발계획을 홀로 이루어 낸 사람으로서 기억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는 스푸트니크가 처음 발사되었을 때 들렸던 세계의 반응을 잊을 수 없었다. 이에 대해 박사의 아들은 "아버지는 그 능력에 비해서 정치적 감각이 떨어졌습니다."라며 씁쓸해했다.
다만 정치적으로는 나름 쓸만한 무기라고 할 수 있는데, 사담 후세인에게 있어서 바빌론 프로젝트는 군사적 무기 이상의 것이었다. 단지 몇 문의 스페이스 건을 장비한 포병 대대로부터 이라크의 명성이라는 성공이 얻어질 수 있다는 환상적인 비약이 이루어졌다. 아랍 세계를 주도권을 쥐는 것은 사담의 야망이었고, 제럴드의 대포는 이라크 주도권의 상징이 될 것이었다. 게다가 호메이니와의 오랜 전쟁은 사담의 위대함을 위한 야망을 없애지 못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1980년 파리 호텔방에서 이라크 핵물리학자 야하 엘 메스하드(Yayha El Meshad)가 모사드에 의하여 살해된 사건과, 1981년의 오시라크 원자로 공습을 통하여, 이런 사담의 야망을 좌절시키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위에 언급된 약점들로 인하여 스페이스 건 자체는 그리 위협적인 무기는 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이스라엘은 일단 제랄드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제럴드는 이라크 측의 요청에 의해 스커드 미사일의 노즈콘 설계에 나서게 되고, 이것이 스페이스 건과는 달리 안보에 큰 위협이 된다고 생각한 이스라엘 측은 지인들을 통해서 박사와의 접촉을 시도했다. 그리고 그 결과 박사는 '''이스라엘의 블랙리스트에 올라갔다'''. 이후로 불 박사는 집에 오면 모든 가구들이 이상하게 배치되어 있다거나, 누군가가 뒤를 밟다가 사라진다거나 하는 수상한 사건에 시달리면서 부쩍 신경질적이 되어 갔다. 그의 최후를 추측하는 사람들 중에는 '나중에 일어난 일과 연결해보면,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이스라엘의 경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러한 사건이 계속 일어나던 중, 결국 1990년 3월 22일, 박사는 브뤼셀의 아파트에서 초대받지 않은 손님과 만나, 무소음 자동권총으로부터 발사된 30구경 총탄 5발을 목과 뒷머리에 맞고 절명하였다. 제럴드를 암살한 자는 끝내 발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여러가지 정황을 보면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바로 모사드이다. 이미 제럴드 불을 추적, 암살을 시도했었고, 무엇보다 불의 시신에서 발견된 총탄은 모사드 요원들이 많이 쓰던 것과 동일했다. 이스라엘 국내는 물론 전 세계 대부분 언론이 이 사건을 모사드의 암살로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모사드는 영화 뮌헨으로 유명해진 검은9월단 보복암살처럼 일단 목표가 정해지면 노골적으로 암살을 시도한다. 설사 실패해서 대외적으로 암살공작이 폭로되어도 멈추지 않는다. 검은9월단 보복작전의 경우도 심지어 엉뚱한 민간인을 사살하는 등 국제적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음에도 몇 년에 걸쳐 계속 수행하는 등 악명이 높았기 때문이다.
3. 그의 유산들
- 로켓 보조 추진탄(RAP; rocket assisted projectile) - 포탄을 더 멀리 날아가게 하기 위한 그의 착상으로, 포탄 뒤에 로켓을 달아서 사거리를 늘렸다. 지금도 최대한의 포탄 사거리를 위해 널리 쓰이는 방법 중 하나.
- 베이스 블리드탄(BB; base bleed) 탄 - 로켓 추진탄은 큰 로켓을 포탄 뒤에 달아야 하지만, 베이스 블리드 탄은 단지 포탄 뒤에 가스를 발생시킨다. 이것은 포탄 후부에 생기는 난기류를 제거함으로서 포탄의 사거리 연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 포탄이 공기를 꿰뚫고 지나가면서 주위의 공기를 밀어내고, 당연히 주변 대기압에 의해 포탄 꽁무니의 공동으로 공기가 메꿔지려 움직이며 음압이 발생되고 난류를 일으킨다. 여기에 약간의 가스를 뿜어내 주는 것으로 음압을 제거해주는 것. 로켓보다 작았기에 그만큼 포탄의 용적을 적게 잡아먹었다. K-9 자주곡사포등이 최대 사거리를 쏘기 위해서 BB탄을 사용한다.
- 베이비 바빌론 - 걸프 전쟁 이후 다국적군에게 발견되어 박살이 났지만, 일부는 영국 박물관으로 갔다.
- HARP 계획에서 만들어진 16인치 포 - 기존 16인치 포의 포신을 2개 붙여서 만든 40m짜리 괴물 대포. 계획이 취소된 후 해체된다.여기서 그 사진을 볼수가 있다.#
- 스페이스 건 - 그가 만약 죽지 않았다면 정말로 출현했을지도 모른다.
[1] '함라인 산'이라는 뜻. '자발'은 지브롤터의 어원에 나오는 그 '자발'과 같다. 국내 문건에는 '자바이 함랸'이라는 이름으로 자주 돌아다니는데, '함랸'은 아랍어에서 보이는 'ayn' 같은 음운 배치가 낯설어 'ryan'으로 잘못 읽은 것으로 보이고, '자바이'는 l을 i로 읽은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