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수/선수 경력
1. 클럽 경력
1.1. 프로 데뷔 이전
그런데 현재와 같은 유명세와는 달리, 아마추어 시절에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으며, 연세대 90학번으로 3학년 시절에 겨우 주전을 따낼 정도였다. 동래고등학교[1] - 연세대학교 출신이다. 참고로 3학년때 같이 투톱을 이룬 선배가 89학번 김도훈이다.
1.2. LG 치타스 / 안양 LG 치타스
1.2.1. 1994 시즌
1994년 LG 치타스 (현 FC 서울) 입단 후 신인상을 거머쥐었다.
1.2.1.1. 상주 상무(군 복무)
1997년 상무에 입단, 1999년에 다시 안양 LG 치타스로 복귀하였다.
1.2.2. 1999 시즌
1999년에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 입단 테스트 제의를 받고 김도근과 같이 런던행 비행기에 탑승했으나 낚시였다(...). 분명히 입단 테스트랑 메디컬 테스트까지는 받았는데 왠지 모르게 컴백. 본인도 왜 그때 입단을 못한 건지 영문을 모르고 있다(...).[2][3]
1.2.3. 2000 시즌
99년 중반에 군복무를 끝내고 안양 LG로 돌아와 2000년 K리그에서 우승을 이끌었다.
우승과 더불어 2000년 K리그에서 득점 2위 어시 1위를 하며 만장일치로 리그 MVP를 따낸다. 이때 당시 팀원이었던 이영표의 증언에 의하면 '무조건 용수한테 공을 보내!'가 전략이었다 한다.
1.3. 제프 유나이티드
[image]
1.3.1. 2001 시즌
2001년 당시 한국 선수 최고 금액인 이적료 3억 엔에 제프 유나이티드로 옮겨 이적 첫 해에 득점 2위를 기록하였고, 올스타 선정. 이때 당시 본인의 인터뷰 등을 보면 초반에 전혀 패스가 안 오는 등 심리적으로 팀원들이 많이 서먹했던 듯했으나 비 오는 날 첫 골을 넣은 뒤 그런 거 없어졌다고 했다. 영상을 보나 실적으로 보나 최용수 중심으로 모든 공격을 펼쳤다. 간략하게 그 시절 영상
1.3.2. 2002 시즌
2002년에는 J리그 8천번째 골을 넣는 등 활약을 펼쳤다. 이때 월드컵이 끝나고 경기에서 6골을 넣는 등 득점력이 발군에 가까웠으나 문제는 이미 그리도 그리던 한일 월드컵은 끝났다.
1.3.3. 2003 시즌
2003년에서도 팀내 6-7할에 가까운 골을 넣으며 제프 이치하라의 3년간 에이스로 군림했다. 이때 개막전에 골을 넣고 다음 시합과 그 다음 시합에 해트트릭을 기록해 이 달의 아시아 선수에도 뽑혔다. 니코니코동화에서도 제프의 시합 등에서 오래 전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최용수보다 존재감 넘치는 공격수는 거의 없다.", "한국은 최용수 이후로 이렇다 할 공격수가 없지."라는 평가가 따라다닌다. 지금도 최용수는 제프 유나이티드에서 팀의 레전드로 인정을 받는다.
1.4. 교토 상가 FC
1.4.1. 2004 시즌
2003년 말 교토에서 거액에[4] 교토 상가에 1년간 임대되었다. 등번호는 21번이며, 시즌 도중에 부상이 있기는 했으나 주장도 겸임할 만큼 많은 신뢰를 받고 많은 골을 넣었으나 팀이 6위로 승격하지 못해 아쉬운 한 해였다.
1.5. 주빌로 이와타
1.5.1. 2005 시즌
2005년 주빌로 이와타로 이적했으나 부상과 부진으로 15경기 1골이라는 실망스런 성적을 남겼다.
1.6. FC 서울
1.6.1. 2006 시즌
2006년 FC 서울의 플레잉 코치로 입단하여 정규리그 2경기에 출전하였고 같은 해 8월 5일 FC 도쿄와의 친선 경기에서 은퇴하였다.
2. 국가대표 경력
2.1.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2.1.1.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대표팀에는 연세대 4학년 때 입성. 1995년 좋은 피지컬을 가진 선수를 좋아하는 아나톨리 비쇼베츠 감독의 특성으로 올림픽 대표팀의 주전 공격수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그 해 1월 31일 1995 칼스버그컵 콜롬비아전에서 A매치에 데뷔하여 선제 결승골을 기록하였고, 2월 다이너스티컵에도 출전하였다.[5] 득점은 홍콩전 정도 뿐이었지만 많은 공격에서 유기적인 움직임으로 상대를 괴롭혔다.
애틀랜타 올림픽 대표팀은 당시 역대 어느 때보다도 메달권 진입에 대한 기대를 높였고, 윤정환과 함께 올대의 중심 선수로 활약했다.[6] 1차 지역 예선에서 홍콩과 인도네시아를 가볍게 쌈 싸먹고, 최종예선 조별리그의 사우디, 중국 전에서 어시스트 한 개로 그쳤으나 준결승 이라크 전에서 혼자 두 골을 뽑아내고 결승전에서 페널티킥까지 성공시켰다. 그러나 본선 와일드 카드로 나온 황선홍에 밀렸는지 1차전 가나 전에는 결장했다. 멕시코, 이탈리아 전에서 출장했으나 공격 포인트를 올리지는 못하고 한국도 8강 진출에 실패했다. 여담으로 1996 애틀랜타 올림픽 때 훗날 아챔에서 광저우 에버그란데의 감독으로 만날 파비오 칸나바로와 이때 선수로 만났다.
2.2.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2.2.1. 1998년 FIFA 프랑스 월드컵
차범근호 출범 이후, 피지컬이 좋은 선수를 선호하는 차 감독의 특성으로 최용수를 코리아컵에 시험삼아 기용하게 된다. 이 시도는 성공적이었고, 결국 최용수는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아시아 예선에서 주전 원톱으로 낙점되게 된다.[7]
월드컵 지역 예선 홍콩전 해트트릭을해당영상 시작으로, 최종예선 카자흐스탄전 4골[8] , 우즈베키스탄전 3골[9] , 일본전 2어시스트로 7골 2어시스트를 몰아치며 바야흐로 최용수 시대를 여는가 했다. '''1997년은 최용수 축구 인생의 리즈시절로 기억된다.''' 그때 당시 활약상, 97-98년 영상
그러나 체코와의 평가전 이후(체코와의 평가전 하이라이트) 투톱 파트너로 복귀한 황선홍이 하필이면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부상을 입었고, 최용수 본인도 본선 첫 경기인 멕시코 전에서 결장했다. 당시 왜 최용수를 기용하지 않았는가에 대해 차범근 감독과의 불화설까지 있을 정도였다. 차범근 감독이 해명하기를 '황선홍 부상 이후 투톱이 아닌 원톱으로 가야 했는데 원톱으로 최용수를 세우는 것보다 김도훈이 낫다고 판단했다'고 했다.# 이후 네덜란드 전과 벨기에 전에서 출전했지만 좋은 활약을 보이지는 못한다.[10]
최용수는 프랑스 월드컵 네덜란드와의 경기 전 인터뷰에서 자신의 골 결정력이 네덜란드의 베르캄프에게 뒤지지 않고 네덜란드를 상대로 1승을 얻겠다고 호언장담했다.마르세유 1승 기적은 있다 뭐, 이 정도야 언론을 상대로 호기롭게 말하는 발언이긴 했지만 결과적으론...
2.2.2. 1998년 방콕 아시안 게임 ~ 2000년 AFC 아시안컵
프랑스 월드컵 이후 허정무가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1998년 12월 방콕 아시안 게임에 출전해 조별 예선부터 16강 쿠웨이트 전까지 팀 내 최다 골인 7골을 넣으며 공격진을 책임졌으나 8강에서 2명이나 퇴장당한 태국에게 2-1로 덜미를 잡혀 탈락했다. 이후 허정무 감독은 아시안 게임 이후 최용수를 더는 대표팀에 선발하지 않았다. 2000년 최용수는 K리그 커리어 하이를 기록하여 그 해 K리그 우승과 MVP를 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평가전에만 불렀고, 2000 AFC 아시안컵 레바논 최종 명단에는 제외했다. 심지어 중동에도 강하고 아시아 킬러인 그의 활약을 생각하면 참 미묘한 결과.
아시안컵 이후 허정무 감독이 사퇴하면서 2000년 12월 20일 거스 히딩크 감독이 월드컵 대표팀 감독으로 내정된 직후 열린 일본과의 원정 친선 경기에서 최용수는 대표팀에 복귀했다.[11]
2.2.3. 2002년 FIFA 한일 월드컵
2001년 히딩크호 초기 시절부터 불리우면서 많은 시합을 치렀다. 컨페더레이션스 컵에도 출전했으나 호주전만 출장. 첫골은 9월 나이지리아와의 평가전에서 1골 1어시를 기록하고, 11월 크로아티아와의 평가전에서 선제골을 기록했다. 히딩크의 자서전에서도 멋진 골이라고 평가 받는 골이었다. 그뒤 2002년 골드컵에서도 미국 전, 멕시코 전 등에 출장했으나 대회 도중 엔트리에서 사라졌다.[12] 3월 유럽 평가전 핀란드전에서 황선홍의 2번째골을 어시스트했다. 터키전에서도 선발 출장했으나 0-0으로 끝났다. 중국전도 선발 출장했으나 0-0 그리고 마지막 평가전인 프랑스전에서 후반 교체 출장해서 옆구리 부상을 입었다.
그리고 본선인 2002년 월드컵에서도 뛰었으나, 주전 경쟁에서 밀리며 이렇다 할 활약은 보이지 못했다. 조별리그 2차전 미국전에서 '''노마크 1m 거리에서 골대 위로 독수리 슛'''을 날리는 바람에 폭풍 같이 까였다. 절묘한 패스를 넣어줬던 이을용이 슛이 빗나가는 순간 '''뒷목을 부여잡고 쓰러지는''' 장면이 백미. 해당 장면.
2002년 월드컵에서는 황선홍이 선발 원톱으로 낙점된 상황에서 안정환과 교체 멤버로 경쟁하던 상황이라 출전 기회도 별로 없었는데 저런 실수까지 저질러서 그 이후로 경기에서 볼 수 없었다.[13] 미국전 이후 히딩크 감독이 선수단 전원 휴식을 취하게 해도 혼자서 연습했다지만 거의 출전하지 못했다. 16강 이탈리아전에는 후반 역전을 노리고 공격수만 5명을 세웠는데 이미 황선홍과 안정환이 모두 투입된 상태라 중앙 공격수인 최용수는 윙 포워드인 이천수, 차두리에게 밀려서 나오지 못했다.'''"야이! 이걸 못넣네요!"'''
- 신문선 해설위원, 최용수가 미국전에서 찬스를 놓치자
월드컵 이후에도, 국대 경기에 간혹 주전으로 나왔었는데, 코엘류 시절 콜롬비아전, 일본전, 우루과이전 전부 선발로 나왔으나 당시 지나치게 비대해져 많은 문제를 일으키던 중이었던 붉은 악마 중 일부는 국내에서의 A매치 시에 저 월드컵 때의 일을 빌미로 최용수가 공만 잡으면 야유를 보내는 행동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던 도중 2003년 1회 동아시아컵 때 엔트리에 뽑혔으나 중국전을 마지막으로 대표팀에서 보는 날은 없게 되었다. 동아시아컵을 마지막으로 최용수는 국가대표팀에서 은퇴를 선언했다.
2.3. 총평
1998 월드컵 예선에서 황선홍이 부상 중으로 없던 대표팀을 훌륭히 본선으로 이끌었던 공로에도 불구하고 2002 월드컵의 영광의 그림자였다는 점에서 안타까운 선수이다. 하지만 선수 시절 상대를 죽일 듯한 포스와 높은 제공권으로 기억되는 팬도 많다. 실제로 감독 시절 황선홍과 자주 부각되며 국대에서의 활약 또한 모두가 잊었다고 하기엔 기억하는 사람 또한 많다.
현역 때는 일본에서 가장 부러워하고[14] 무서워했던 공격수로 통했다. J리그에서의 활약이 워낙 좋았고[15] 95 다이너스티컵에서 홍콩전 외에는 최용수는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지 못했음에도 직접 대결 시 공격진에 제일 경계해야 할 선수라 하면서 패스만 보내면 일본 측 중계석에서 최용수만 부르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웃기다. 그러나 이건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일본의 컴플렉스 덩어리 같은 선수인지라[16][17] 일본이 부러워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2000년 겨울 친선전에서도 "드디어 그 최용수가 돌아왔습니다!"라고 할 정도였다. 선호하는 배번은 10번으로 소속팀에서나 국대에서나 별 일 없으면 항상 10번을 달고 뛰었다. 다만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는 11번을 달았다.[18] 이후로도 2003년 콜롬비아 전을 제외하고 잠시 10번을 달았으나 은퇴할 때까지 11번으로 고정되었다. 교토 시절 21번, 이와타 시절 16번, FC서울에서 은퇴할 때는 11번을 달았다.
3. 기록
3.1. FC 서울
- K리그 우승 1회 : 2000
- 리그컵 우승 1회 : 2006
- 리그컵 준우승 2회 : 1994, 1999
- 슈퍼컵 준우승 1회 : 1999
3.2.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FIFA 월드컵 4위 : 2002
3.3. 주요 개인 수상
- K리그 신인선수상 수상 : 1994
- K리그 인기상 수상 : 1995
- FA컵 득점상 수상 : 1999
- 올해의 키카골 특별상 수상 : 1999
- K리그 베스트 11 선정 : 2000
- K리그 최우수선수상 (MVP) 수상 : 2000
- 체육인의 날 최우수선수상 수상 : 2001
- 체육훈장 맹호장 : 2002
- 자황컵 체육대상 남자 최우수상 수상 : 2002
4. 플레이 스타일
스페셜1 스페셜2
최용수의 이전부터는 물론 현재까지도 국내 공격수(스트라이커 포지션) 중 최용수보다 성공한 선수는 몇 안 되지만, 그럼에도 최용수는 너무 일찍 나타난 영웅이었다. 준수한 결정력과 능숙한 포스트 플레이, 뛰어난 제공권 등 현대 축구에서 요구하는 덕목을 거의 갖췄다. 현 시대의 호베르투 피르미누(리버풀), 카림 벤제마(레알 마드리드)처럼 전형적인 최전방 공격수지만 조금 수비적으로 내려와 2선과 연계해주는 플레이만 결합된다면 현대 축구에서 가장 교과서적인 선수가 되었을 것이다.
먼저 184cm라는 신장을 가졌다. 타겟형 스트라이커 치고 그리 장신은 아니지만 당시 한국 축구에서는 꽤 큰 편이었다. 그런데 볼의 낙하 지점, 헤더 타이밍과 더불어 점프가 높아서 제공권은 국내 톱 클래스였다. 특유의 내리찍는 헤더는 지금도 구사해 내는 선수가 전무하다. [19] 타겟형 치고 준수한 주력과 포스트 플레이에 최적화된 몸싸움으로 전방에서 꿋꿋이 버텨주는 선수. 박스 바깥에서의 움직임이 날카롭다거나 예리한 플레이를 보여주지는 않지만 박스 내에서의 폼은 가히 최고였다.
플레이 스타일은 과감한 몸싸움과 포스트 플레이를 펼치는 전형적인 파워형 스트라이커로,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는 최다 득점을 기록하였다. 당시 세계 골게터 9위에 오를 정도로 월드컵 예선을 보던 이들은 하나같이 최용수를 칭찬했고 인기는 하늘을 찔렀으며 그에 대한 기대도 남달랐다. 다만 같은 시기 대표팀의 주전 스트라이커 경쟁자였던 황선홍이나 김도훈에 비해서 에이리어 밖에서 움직임이 단조롭다는 단점이 있었다. 또한 플레이 기복이 심한 편이라, 잘 되는 날에는 언터처블이었지만 안 되는 날엔 완전히 버로우를 하는 문제도 있었다.[20] 황선홍은 센스가 뛰어나며 윙 포워드 및 섀도우 스트라이커 쪽도 할 수 있는 포워드, 김도훈은 감각이 뛰어나며 결정력을 가진 포워드라면 최용수는 발군의 파괴력을 가지며 가장 좋은 제공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톱 외의 포지션은 무리에 센스도 떨어지며 감각, 결정력 또한 위 둘에 비해 뛰어나다고 하기 힘들다. 그나마 말년에서는 약간 처진 스트라이커도 가능하게는 되었으나 그러면 최용수의 장점이 많이 사라지는 격인지라 자주 중용되는 포지션은 아니었다.
결국 미드필더들이 양질의 패스[21] 를 넣어줘야 비로서 최용수의 득점력이 산다는 제약과 더불어, 세계적 강호를 상대로는 공격수를 한 명을 내려 허리를 두텁게 세우는 수밖에 없다는 전술적 한계까지 겹쳐 최전방에서 혼자 무기력하게 겉도는 경우가 잦았다.[22] 자연스럽게 팬들에겐 국내용이란 그릇된 인식을 심어주게 되었다.[23] 결국 커리어의 정점에서 출전한 1998 월드컵 본선에서 이렇다 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첫 경기인 멕시코 전 때 김도훈이 쥐가 나서 다리에 침 치료를 받아가며 풀타임을 뛰는데도 이미 에이스 취급을 받던 최용수를 아예 투입하지 않아 차범근 감독이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었고, 두번째 경기인 네덜란드 전은 출전하긴 했지만 누구 하나 못했다고 할 수 없을 수준으로 0:5로 탈탈 털린 경기(...). 그리고 대망의 예선 마지막 경기였던 벨기에 전에서는 결정적인 찬스 2번(노마크 헤딩 찬스와 각이 제법 열린 1:1찬스)를 날려먹으며 지탄을 받았다. 당시 벨기에 전 끝나고 인터뷰도 거부하고 혼자 숙소에서 씩씩대고 있으니까 당시 끗발이 있던 신문선이 숙소 문 앞에서 '최용수'라고 나지막히 부르니 문을 열어주던 모습이 생방송을 타기도 했다.
그리고 이후 시대를 잘못 타고난 비운의 공격수들이라 할 수 있는 최용수, 김도훈의 은퇴 후 한국은 최전방 포지션에 상당한 난항을 겪게 되는데, 안정환이 있으나 본인은 공격형 미드필더 내지 섀도우 스트라이커 룰을 선호했으며, 대신 싸워줄 파이터 타입의 최전방 포지션이 비어서 유상철을 톱으로 올리는 비정상적인 운영까지 해 나가야 했다. 스트라이커 계보를 잇는 후발 주자인 이동국은 이러한 파이터 형이 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흘러야 가능했고[24] 2000년대 초반의 혹사가 커 부침이 많았다. 그리고 이어서 청대부터 탄탄하게 성장한 조재진이 그 재목으로서 기대했으나, 알다시피 조재진은 득점력이 많이 부족해 기대에 걸맞는 선수도 아니었고 결국 잦은 부상으로 낙마하게 된다. 그럼에도 그간 보여준 등지는 스킬[25] 이나 제공권 장악[26] 은 대한민국 축구에 큰 도움이 될 정도였다. 이후 정조국이 청대 및 올림픽에서의 활약에 힘입어 차세대 대표팀 공격수로 각광받았으나 크게 성장하지 못하였고, 이후 나온 박주영은 드디어 한국 정통 공격수의 계보를 잇는 선수가 나왔구나 했지만 완전체가 될 무렵 아스날로 이적해 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현재 거론되는 석현준과 김신욱은 아직 커리어에서 뚜렷하게 보여준 것이 없으며 최용수, 황선홍, 김도훈 급의 재능이 아니다.[27]
애초에 2018년 6월 19일 현재 K리그 득점 순위에 국내 공격수 최다 득점자가 나이 40에 조커로 활약하는 이동국인 것만 봐도 한국의 정통 공격수 계보는 사실상 끊겼다 봐도 무방하며 최용수가 주전으로 뛰기 힘들어하던 그 시절과 비교하면 아주 격세지감이 느껴질 정도이다. 그나마 2018 아시안게임에서 득점왕을 차지하며 우승의 주역 중 한 명이었던 황의조가 후계자로 떠오를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최용수도 우즈베키스탄과의 8강전 해설에서 '''자신보다 더 대단하다.'''라고 인정했으니.[28]
[1] 축구 명가로 유명한 명문고다. 전통적으로 야구보다는 축구 쪽에 투자를 하는 학교. 박정태, 박지철 등을 배출해 낸 동래고등학교 야구부는 IMF를 맞아 해체되었지만 김호, 김호곤, 최용수, 윤성효등을 배출한 축구부는 아직까지 운영되고 있다.[2] 이후 이영표를 PSV에 내보낼 때 안양 LG 관계자의 인터뷰에 의하면 협상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임했다는 발언이 있다. 실제로 협상을 잘 했어도 웨스트햄 입단이 되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적어도 협상 자체는 어느 정도 진행되었다는 이야기. 덧붙여 김도근은 에이전트가 억지로 붙인 덤이었는데 워크퍼밋 발급 조건이 미달돼 갈 수도 없었다.[3] 젊어서는 이게 정말 한스러웠지만 나이들고 나서는 초탈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들이 해외진출하려고 하면 웨스트햄으로 보내겠다고 자학개그를 자주 한다.[4] 당시 40억원 정도에 교토로 이적했다.[5] 국대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올림픽 대표라고 하는게 정상일 정도로 2-3군에 23세 이하였다. 이때 주장 완장도 차기도 했다.[6] 1996년 올림픽 대표는 1995년 초부터 발 빠르게 움직였는데, 지원도 1998년 국대나 2002년 국대에 맞먹을 정도로 남미나 북유럽과도 평가전을 자주 치렀다.[7] 당시 황선홍은 무릎 부상 재활 중으로 예선전에 아예 나서지 못했다가 본선 진출이 확정되고 복귀했다.[8] 홈에서 해트트릭, 원정에서 1골.[9] 홈에서 1골, 원정에서 2골.[10] 그나마 벨기에 전에서는 후반전 때 얻은 헤딩슛이 정말 아깝게 크로스 바를 넘어갔다.[11] 당시 박항서 국가대표팀 코치가 감독대행을 맡았고, 경기는 안정환의 선제골로 앞서갔으나, 김상식이 퇴장당해 10명으로 싸운 끝에 동점골을 내줘 1-1 무승부로 끝났다.[12] 하지만 이 때 이후 김도훈과 이동국은 최용수에게 밀려 2002 월드컵 최종 명단에서 결국 탈락했다.[13] 안정환은 황선홍의 교체 멤버로 선발된 것이지만 황선홍의 폴란드전 허벅지 부상 이후 포루투갈전부터 스페인전까지는 안정환이 선발로 나왔다.[14] 트루시에 시절 전성기를 달렸던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이 유일하게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부러워하는 점이 최용수를 벤치 워머로 박아둘 정도로 공격수 자원이 넘쳐난다는 것이었다는 말도 있었다.[15] J리그에서의 활약만으로 따지면 득점왕까지 차지했지만 잦은 부상에 시달린 황선홍보다도 더 높은 평가를 받는 선수가 최용수이다.[16] 넘쳐나는 투지에 좋은 피지컬, 그리고 최고의 제공권. 이런 타입의 대형 공격수는 일본에서 예나 지금이나 전혀 없다.[17] 물론 2019년 한국에도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는데, 현재 황의조가 정통 공격수 계보를 잇기는 했지만, 플레이스타일을 보면 최용수와는 달리 테크닉을 좀 더 중시한 플레이를 보인다.[18] 당시 10번은 이영표가 달았다.[19] 훨씬 피지컬이 좋은 김신욱의 헤더를 보면 전형적인 피지컬을 이용해 밀어내는 헤더지 내려 찍어서 성공률을 높이는 헤더가 아니다.[20] 이건 이런 타입의 공격수들이 원래 그렇다. 팀 기복+본인 기복이라.[21] 이 방면에서 천재 미드필더라 불리던 윤정환은 독보적이었다. 날카로운 스루 패스에 최용수의 폭발력은 당시 국대 축구를 보는 즐거움이었다. 특히 절정에 달했던 1996 애틀랜타 올림픽 당시 윤정환-최용수 콤비는 역대 베스트 콤비로 불려도 손색이 없다.[22] 프랑스 월드컵 네덜란드 전 전술은 3-5-2이지만 투톱 파트너 김도훈을 처진 스트라이커처럼 썼기 때문에 3-6-1 형태와 흡사했다. 더구나 허리 싸움에서 완전히 밀리면서 사실상 5-3-2로 흘러갔다...[23] 히딩크 이전 한국 축구계는 피지컬의 중요성을 절감하지 못한 채 막연히 개인기 드립이나 조직력 드립을 쳐대던 시절이었다. 반면 프랑스 월드컵에서 만난 상대는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장신 떡대들이었으니, 심한 말로 계란으로 바위치기랄까.[24] 그리고 이마저도 역대급은 젼혀 아니고 그냥 땜빵 정도 가능한 수준이다. 몸빵형 원톱은 이동국과는 거리가 있다.[25] 당시 이영표는 조재진이 한국에서 등지는 플레이를 제일 잘하며 세계에서도 높은 수준이라고 평가했다.[26]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상당히 빛났다. 프랑스 전 박지성의 골을 어시스트한 헤딩이 조재진의 헤딩이었다. 크로스는 역대 한국에서 런닝 크로스가 제일 정확했던 설기현의 크로스였다.[27] 만일 이들이 위 레전드급 재능이라면 아직도 한국 축구가 박주영을 그리워 할 이유가 없다. 브라질에서도 경기력 다 빠진 박주영을 찾은 이유가 원톱으로 있으면서 2선에 찬스를 제공해주고 때로는 자신이 득점 그러면서도 전방에 자생 능력을 가진 선수라는 의미에서 위의 둘은 상당히 못 미친다. [28] 그러나 이 점은 골 결정력만 놓고 봤을 때 자신보다 대단하다는 거일 가능성이 크다. 황의조의 포스트 플레이 능력과 제공권은 최용수까지 갈 것 없이 박주영에게도 미치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