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톨리 비쇼베츠

 

''' 아나톨리 비쇼베츠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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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의 축구감독 '''
''' 이름 '''
'''아나톨리 비쇼베츠'''
'''Anatoliy Byshovets'''
''' 본명 '''
아나톨리 표도로비치 비쇼베츠
Анатолий Фёдорович Бышовец[1]
''' 출생 '''
1946년 4월 23일 (78세) /
소련 우크라이나SSR 키예프시
''' 국적 '''
러시아
''' 신체 '''
176cm
''' 직업 '''
축구선수(공격수 / 은퇴)
축구감독
''' 소속 '''
''' 선수 '''
디나모 키예프(1963~1973)
''' 감독 '''
소련 대표팀 유스(1982~1985)
소련 U-23 팀(1986~1988)
디나모 모스크바(1988~1990)
소련 / CIS 대표팀(1990~1992)
AEL 리마솔(1992~1993)
대한민국 대표팀(1994~1995)
대한민국 U-23 팀(1995~1996)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1997~1998)
러시아 대표팀(1998)
샤흐타르 도네츠크(1998~1999)
CS 마리티무(2003)
톰 톰스크(2005)
로코모티프 모스크바(2006~2007)
''' 기타 '''
대한민국 대표팀(1994 / 기술고문)
FC 크라스노다르(2009 / 자문위원)
FC 우파(2011 / 기술고문)
''' 국가대표 '''
39경기 15골(소련 / 1966~1972)
''' 하계 올림픽 남자 축구 우승 감독 '''
미셸(1984)(1988)미에라(1992)
1. 개요
2. 선수 시절
3. 지도자
3.1. 소련 시절
3.2. 한국 시절
3.3. 다시 러시아로


1. 개요


러시아, 우크라이나(소련)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2006년부터 2007년까지 FC 로코모티프 모스크바 감독을 맡았다.
태어난 곳은 우크라이나지만, 국적은 러시아다. 소련 축구 전성기의 상징적인 인물로서 FC 디나모 키예프에서 선수 생활 전부를 보냈다. 1988 서울 올림픽에서 소련 U-23 대표팀을 이끌고 금메달을 따냈다. 이때 비쇼베츠의 활약이 인상적이었던지 이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기술고문을 거쳐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대한민국 U-23 대표팀 감독을 연달아 역임했다.
1996 애틀란타 올림픽 때는 대한민국 U-23 대표팀을 이끌고 2차전까지 1승 1무로 선전했으나, 마지막 경기였던 이탈리아 U-23 대표팀에게 뼈아픈 1-2 패를 당하며 토너먼트 진출이 좌절되었다. 이후 유럽으로 돌아가서 클럽과 러시아 대표팀 등을 맡았지만 크게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나마 성과라고 한다면 FC 로코모티프 모스크바에서의 러시아 컵 우승 정도다. 로코모티프를 떠난 뒤로는 팀을 맡지 않다가 기술고문과 자문위원 등의 역할 정도를 맡았으나, 2011년 이후로는 그마저도 하지 않고 눈에 띄는 활동도 없다.

2. 선수 시절


FC 디나모 키에프의 유소년팀을 거쳐 성인팀에서 뛰었다. 이 때 그는 팀의 핵심 공격수로 소련 챔피언쉽 4회 우승 (1966, 1967, 1968 3연패, 1971)과 소련컵 2회 우승(1964, 1966)을 차지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소련 대표팀의 주전 공격수로 나서 4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3. 지도자



3.1. 소련 시절


1973년 은퇴 후, 디나모 키에프의 축구학교에서 지도자 생활을 이어갔다. 1988 서울 올림픽에서는 소련 대표팀을 지도하여, 호마리우가 이끈 브라질을 결승에서 대파하고 금메달을 땄다.

3.2. 한국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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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U-23 대표팀 감독'''

'''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 김삼락호 '''

''' 비쇼베츠호 '''

''' 허정무호(U-23) '''
한국 A대표팀은 1993년에 열린 1994 FIFA 월드컵 미국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숙적 일본에게 0-1로 패배한 후, 도하의 기적으로 간신히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한다. 당시 완전히 한 수 아래라고 생각했던 일본이 네덜란드 출신의 오프트 감독을 영입해 한국을 이기고 월드컵 본선 진출에 거의 성공할 '''뻔'''한 것에 자극을 받아, 축구 선진국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공감대가 다시 한 번 국내에 형성된다. 당시 구소련 공산권이 붕괴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동유럽권 축구 지도자 영입이 가능했던 점도 작용했다. 지금까지도 축구팬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발레리 니폼니시 감독이 유공 코끼리에 부임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니포 감독도 역시 러시아 출신이다.
그런 배경속에, 1988 서울 올림픽 축구 종목에서 소련이 우승할 당시 감독으로서 한국과도 이미 인연이 있었던 아나톨리 비쇼베츠가, 1994년 2월에 일단은 한국 월드컵 축구 대표팀 기술고문으로 선임되어서 한국 땅을 밟게 된다. 이후 6월달에 1994 미국 월드컵이 종료된 후 김호 감독이 사임하고, 7월부터 올림픽 팀 및 A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한국 A대표팀 감독 데뷔 무대는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이었다. 당시에는 연령 제한이 없어서, A대표팀 최정예 멤버가 출전했는데 8강전에서 홈팀이자 숙적인 일본을 3:2로 격파하고 4강에 진출하는 데까진 성공했지만 4강전에서 우즈베키스탄에 0:1로 덜미를 잡히면서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경기 내용은 일방적인 한국의 우세였는데, 아쉽게도 골키퍼 차상광이 볼을 어이없이 놓치는 바람에 지고 말았다. 뒤이은 동메달 결정전에서도 쿠웨이트에 패해 동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그리고 그는 23세 이하 올림픽 대표팀을 맡는다. 2년 뒤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는 첫 경기에서 윤정환의 페널티킥 결승골로 1-0으로 가나를 잡고 48년만에 올림픽 축구에서 승리하였다, 2차전에서 멕시코와 0-0 무재배를 한 데 이어 최종전에서 이탈리아에 1:2로 패하면서 사상 첫 8강 진출에는 실패했다. 당시 이탈리아는 2패로 탈락 확정이었고, 한국은 비기기만 하면 토너먼트에 올라갈 수 있었으나, 종료 직전 한골을 먹는 바람[2]에 8강 진출이 실패했다.
올림픽에서 탈락한 후 한국으로 오지 않고, 미국 현지에서 러시아로 돌아갔다. 그래도 계약 기간은 다 채웠기에 코엘류본프레레, 베어벡, 슈틸리케처럼 계약 기간 중도에 잘린 감독은 아니다.
겨우 2년간 한국 대표팀을 맡았지만, 축구팬들 사이에서 평은 대체로 긍정적이다.
폐쇄적이던 한국 축구 지도자들은 첫 외국인 대표팀 감독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는데, 대표적으로 박종환은 비쇼베츠를 두고 "동유럽은 축구 선진국이 아니다"라면서 대놓고 디스했다. 1991년에 독일 출신의 명장 데트마어 크라머가 23세이하 대표팀 기술고문을 맡아서 사상 첫 올림픽 본선 진출의 쾌거를 올렸지만, 국내 지도자들의 냉대 속에 정작 본선은 지휘하지 못하고 1년만에 짤린 적이 있었다. 시간이 흘러서 2001년 거스 히딩크 감독이 부임했을 때도 국내 지도자들은 히딩크를 퇴물 사기꾼 취급하면서 하루빨리 짤라야 한다고 주장했던 흑역사가 있다.[3] 이때도 박종환, 차경복, 허정무 등등 차범근을 제외하면 국내지도자들 대다수가 저랬다.
선수단 장악 문제로 일부 선수들과 충돌하기도 했으며,한국 축구의 전설 홍명보도 당시 비쇼베츠의 교체 선수 출전을 거부하는 항명을 한 적이 있다. 당시 축구협회 간부로 동행한 조중연이 홍명보를 두고 "선수가 저러면 안된다"는 충고를 공개적으로 했을 정도. 다만, 이와는 별개로 홍명보를 원래 포지션이었던 미드필더로 다시 끌어올려 45분 동안 전술 운용을 하는 실험을 하기도 했으며, 후반전 홍명보의 체력 문제가 대두되었기 때문에, 다시 수비수 위치로 끌어내린 적이 있다. 하지만, '''"(홍명보는) 최고의 플레이메이커다"'''라 찬사를 보냈을만큼 미드필더 홍명보의 모습을 곧잘 염두에 두고 있었던 듯.[4]
그외에도 영어를 못 하는데, 러시아어 통역은 한국말을 잘 몰라 선수 지도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 때문에 축구협회는 지금까지도 외국인 감독 선임에 영어 구사를 중요한 조건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런 저런 문제들 때문에 축협과도 사이가 별로 안 좋아서 한국 생활에 그다지 애착을 보이지 않아 재계약에도 관심이 없었고, 올림픽 결과에 상관없이 임기가 종료되면 떠나겠다고 협회측에 미리 밝혔다.
그러나 선수 개개인에 대한 특징을 잘 파악해서, 공정하게 선수를 선발하는 모습은 상당히 호평을 받았다. 특히 선수들을 지도할 때나 관전하면서 항상 메모하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이렇게 데이터나 기록을 중시하는 모습은 한국의 그 어떤 지도자에게서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전술적 백지 상태였던 한국 축구에 전술을 심으려고 노력했던 면은 꽤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또한 기자들의 적(?)이기도 했다. #
히딩크처럼 피지컬을 중시하긴 했지만, 히딩크와 달리 윤정환을 총애했다. 또한 유상철을 발탁하여 전방위로 사용하여 이후 한국 국가대표팀의 포메이션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윤정환을 중심으로 중앙 미드필더는 윤정환의 보디가드로 피지컬 좋은 선수들로 꾸렸다.[5] 이 전술은 후에 윤정환이 감독이 되었을 때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한국을 떠나면서 한국 축구 발전에 대한 조언을 해 달라는 기자들의 요청에, '''"축협을 해체하면 된다"'''는 정곡을 찌르는 말을 했다.
이후 국대 감독으로 선임된 차범근 감독이 지도법이 비쇼베츠와 유사하다고 해서 배추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3.3. 다시 러시아로


러시아 클럽과 러시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하고, 2006년 FC 로코모티프 모스크바의 감독을 역임하지만 출전을 댓가로 선수에게 뇌물을 요구했다가 발각되어 불명예 퇴진을 당했다. 이후 쿠반 크라스노다르의 기술고문으로 일하기도 했으며 FC 우파의 기술고문으로 일하기도 했다.

[1] 우크라이나어로는 'Анато́лій Фе́дорович Бишове́ць'이다.[2] 상대팀에게 허용한 2골은 모두 베테랑 선수였던 브랑카에게 허용했다. 와일드카드로 선발한 황선홍과 이임생이 모두 부상을 당해 3차전에 결장했고 급히 한국에서 건너온 이경춘은 경기에서 실수를 연발했다.[3] 한국에 오기 전 레알 마드리드에서 1년만에 불명예스럽게 경질당했던 걸 문제삼았다.[4] 2006년 이후, 홍명보의 플레이 스타일을 가지면서 미드필더가 가능한 기성용이 등장했는데 그의 활약을 보면 비쇼베츠는 기성용처럼 홍명보를 써먹으려 했던 듯하다.[5] 그래서 단신 선수들은 외면받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조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