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성씨)

 


1. 개요
2. 실존 인물
2.1. 태씨를 예명으로 쓰는 인물
3. 가상 인물
4. 여담


1. 개요


太 / Tae
대한민국의 성씨. 본관으로는 협계, 영순, 남원, 밀양, 통천이 있다.
협계(浹溪) - 황해도 신계군 일원.[1] 발해의 예부경으로 고려에 망명했던 예부경 대화균의 후손인 대집성을 중시조로 하고 있다고 한다.[2]
영순(永順) - 경상북도 문경. 걸걸중상의 18대 손이라는 대금취라는 인물이 고종 40년(1253년)과 46년(1259년) 지금의 황해도 금천군인 금교(金郊)와 흥의(興義), 송도(개경)에서 몽골군을 격퇴하는 공을 세워 지금의 경상북도 문경군 영순면에[3] 영순군으로 봉해진 데서 영순 태씨가 유래했다. 여담으로 유득공발해고를 저술할 때 인용한 자료 가운데 <영순태씨족보>도 있었는데, 현존하는 영순태씨족보가 류득공이 인용할 당시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지는 불명. 문경뿐 아니라 경상북도 경산 남천면 송백리에 집성촌이 있다. 집성촌은 발해마을이라고 부르며, 집성촌 태씨 남성 142명의 얼굴을 분석하고 공통점들을 모아서 대조영의 표준영정을 새로 만들기도 했다. 일반적인 한국 남성들보다 머리의 앞과 뒤가 더 큰 특징이 있다.[4] 기사 지금도 대조영에 대한 왕조식 제사를 복원해 지내고 있으며, 2007년 KBS에서 사극 <대조영> 방영 당시 마을 주민 전원이 본방사수를 했다고 한다.
남원(南原) - 태집성의 9세손이라는 진사 태명례를 시조로 하는 집안으로, 조선 단종 2년(1454년) 재직 중에 화를 당해서 함길도 길주로 유배되었다고 한다.
주변에서 쉽게 찾아보기 힘든 상당히 희귀한 성씨다. 고려 중기까지는 그래도 중급 귀족 정도의 지위를 누렸던 대씨가 몰락한 것은 최씨 무신정권과도 연관이 있다. 무신집권자 최우는 대집성의 딸이었던 과부 대씨를 자신의 계실로 삼았는데, 그녀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오승적(吳承績)이라는 아들을 두고 있었고, 계모 대씨는 최항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죽은 김미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이에 앙심을 품은 최항은 집권한 뒤 계모 대씨의 택주 작위와 재산을 모두 빼앗은 다음 야별초 황보창준(皇甫昌俊)을 시켜서 이부형제인 오승적을 바다에 던지게 했다. 마침 오승적이 바다에 던져진 것은 밤이었던데다 썰물 때라서 오승적은 죽음을 면했는데, 머리 깎고 개골산에 숨어서 어머니에게 자신이 살아있다고 편지를 보냈다가 그만 그 집 노비에 의해 밀고당하는 바람에 다시 잡혀서 강에 던져졌고, 임무에 실패한 황보창준 역시 처형당했으며, 대씨는 70여 인의 일가 인사뿐만 아니라 집안 노비들까지 죽거나 유배당하는 화를 입었다. 아울러 바닷섬으로 귀양 보냈던 사람들까지 죽이라는 명이 내려졌는데, 오승적의 인친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한 사람 가운데는 전임 추밀원부사로써 귀주성에서 몽골군을 막고 나주에서 일어난 이연년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던 명장 김경손도 있었다.
발해 유민의 후예로, 발해 고왕 대조영의 후손들이다. 태씨 족보에서는 시조를 대중상으로 명기하고 있다. 실제로 대조영 직계는 왕통에서 끊겼으며, 대조영의 형제인 대야발의 후손인 방계 계통이 후대에 들어 왕위를 계승했다. 자세한 것은 발해/왕사 문서 참조.
발해 멸망 전후로, 태자 대광현을 비롯한 다수의 발해인들이 고려로 망명해 왔으며, 고려에 들어온 뒤 본래 대씨였던 것을 뜻이 같은 태씨로 바꿨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전부터 대씨와 태씨를 혼용한 흔적이 보인다. 중국의 역사 기록서인 『동사통감』에도 대조영을 '태조영'이라고 쓴 기록이 있고 고려시대 역사서 『고려사』도 고려 후기의 무신 대집성(大集成)을 태집성(太集成)과 혼용했다.#기사링크 물론 전부 바꾼 건 아니며, 대씨를 그냥 유지한 밀양 대씨[5]도 있다. 이 집안은 발해 마지막 왕 대인선의 아들 대탁(大鐸)을 집안의 시조로 삼는다.
조선시대에는 정유재란 때 의병장으로 남원 전투에서 순절한 태귀생(太貴生), 태천생(太賤生) 형제, 태귀생의 아들로 이괄의 난 때에 순절한 태상문(太尙文), 태팔회(太八回) 형제가 있었다. 이순신의 장검을 만든 두 장인 가운데 한 명은 이무생(李茂生)이고 또 한 명이 태구련(太貴連)으로 태씨다. 태구련은 태구련(太九連)으로도 표기되는데 <난중일기> 을미년 7월 14일자에 이상록, 공태원 등과 함께 등장한다. 이 뒤에 "어머님께서 평안하시다니 기쁘기 그지없다"는 부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순신이 어머니 안부를 물으러 보냈던 인물들인듯 하다. 같은 달 21일자에는 또 "아침에 태구련과 언복이 만든 환도를 충청 수사(선거이)와 두 조방장(신호, 박종남)에게 각각 한 자루씩 나누어 보냈다"는 기록이 있어, 이순신 휘하의 도검 장인이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태구련과 이무생이 이순신에게 만들어 바친 장검은 지금도 아산 현충사에 통제공 유품으로 잘 남아 있기는 한데... 정작 이순신이 실전에 사용했던 쌍룡검은 행방이 현재까지도 묘연하다.
2010년 종친회에서 자체적으로 협계, 영순 두 본관을 통합하기로 결정했고, 본관을 백주(白州)로 바꿨다. 황해도 백주로 현재 지명은 황해남도 배천군이며, 발해에서 무리를 거느리고 내부한 태자 대광현에게 고려 태조 왕건이 내린 식읍이었다. 그런데 정작 그걸 아는 태씨들은 많지 않다(...). 인구는 2015년 기준 9,063명이다.
약 수만 명에 달하는 발해 유민들은 주로 고려의 북부 지역에 뿌리를 내렸다. 기록에 등장하는 태씨 인물들도 주로 평안, 함경 양 지역 출신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김창겸의 논문에 따르면 황해도 평산, 배천, 우봉(금천군) 지역을 본관으로 삼은 태씨들의 경우 태조 왕건이 평양을 서경(西京)으로 삼아 북진정책의 거점으로 정비할 때 패서 지역(관서 지방) 주민들 가운데 부유한 사람들을 뽑아 이주시켰다고 하는데, 이때 발해에서 망명해 온 주민들 또한 주로 북방에 배치시켰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남쪽 지역에 정착시킨 것은 후백제의 공격을 막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6]
단, 대집성과 같이 중앙 정계에서 활동한 인물도 있다. 현재도 이들 태씨는 남한 지역보다 북한 지역에 더 많이 거주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태병렬, 태종수, 태영호 등 북한 유력인사들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이미 1950년대에 봉건제의 잔재라면서 본관을 모두 폐지했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이미 본관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큰 의미가 없다.
태진아는 태씨와 관계 없는 예명으로, 본명은 조방헌이다.
원로 영화 배우 태현실과 정치인 태완선 의원이 그나마 유명하다. 근래엔 배우 태항호가 작품과 예능을 오가며 활약을 하고 있다. 대구시장을 지냈던 태종학(太鍾鶴)도 있다고 한다.#

2. 실존 인물



2.1. 태씨를 예명으로 쓰는 인물


  • 태인호 - 배우[7]
  • 태진아 - 가수[8]

3. 가상 인물



4. 여담


마크 테토가 본인의 한국명을 지을 때 성을 본인의 이름에서 '테'를 따와 태현준으로 지었다.

[1] 충청북도 옥천군의 옛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2] 다만, 대집성 이 사람은 자질이나 인성 면에서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다. 해당 문서 참조.[3] 대동운부군옥에 따르면 영순은 원래 부곡이었는데, 대금취가 몽골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움으로써 현으로 승격되었다고 한다.[4] 뉴스 링크의 주민들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눈썹뼈의 안와상융기가 뚜렷하고 콧대가 곧고 높은 편이며 턱은 강하게 각진 특징들이 보인다.[5] 태씨 중에서도 밀양이 본관인 밀양 태씨가 있다.[6] 출처: 김창겸 <후삼국 통일기 태조 왕건의 패서호족과 발해유민에 대한 정책연구>0[7] 본명은 박상연.[8] 본명은 조방헌. 태진아라는 이름은 태현실의 앞글자와 남진나훈아의 마지막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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