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시프 스탈린/평가
1. 개요
이오시프 스탈린의 평가에 대해 서술한 문서.
보통 악명 높은 독재자들은 후세의 평가가 부정적인 평 일색인 경우가 많지만, 스탈린은 그 악명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병존하는 매우 특이한 사례이다. 이는 그가 아직까지도 인류 역사상 가장 무시무시한 독재자 중 한 명으로 악명이 자자하며 무수한 악행을 저지른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소련이라는 국가의 최고 지도자로서 큰 업적을 여러 가지 남긴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기에 발생하는 일이다.
일단 스탈린의 업적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소련의 전쟁 지도자로서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추축국을 패퇴시키고 소련과 연합국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것과, 집권기에 소련을 기존의 2류 강대국이 아닌 명실공히 미국과 세계를 양분하는 초강대국으로 올라서게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유사 이래 최강의 라이벌 관계로 손꼽히는 아돌프 히틀러, 공산 독재자로 자주 비교되는 마오쩌둥과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총통은 독일을 패망으로 몰아넣음으로써 완전히 말아먹었고, 주석은 엄청난 인명을 희생시키고도 자국의 공업화에 실패하고 국가를 퇴보시켰다. 반면, 스탈린은 피바람을 일으키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 대가로 소련을 초강대국의 지위에 올려놓았다.
스탈린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조차 스탈린이 소련이라는 나라를 크게 발전시켰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부정적인 평가 일색인 히틀러, 긍정적인 평이 없진 않으나 자국을 제외하면 부정적인 평이 더 많은 마오쩌둥과 달리 스탈린은 아직까지도 평가가 정리되지 않고 긍정적인 평과 부정적인 평이 혼재하는 것이다.
공산주의 국가들 특유의 서류 통계상으로만 나타나는 발전, 왜곡 및 사실 은폐 등의 문제 등을 생각하여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서도 비슷한 성과조작이 벌어진게 아닐까 하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당시 소련의 발전은 엄연히 실제 벌어진 일'''이었다. 소련쪽 통계에서도 이런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소련에서는 주로 주민들의 대우나 식량 쪽에서 이런 문제가 발생하였지 마오쩌둥의 중국처럼 성과를 부풀려 나타내지는 않았다. 만약 소련의 발전이 서류상에서나 벌어진 일이었다면 미국이 바보도 아니고 당시 소련을 초강대국 취급하고 여러 면에서 눈치를 보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업적을 가릴 정도의 악행 또한 상당하다. 익히 알려진 대숙청과 굴라크, 카틴 학살, 우크라이나 대기근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직접적인 학살 말고도 인민들을 감시하고 억압하는 각종 제도화된 수단을 보편화했다. 스탈린이 그것들을 시작했다고는 할 수 없는 이유는, 레닌이나 트로츠키 등 전임 지도자들이 그런 수단들을 먼저 개발하고 사용한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KGB, 국가감찰기구, 수용소 등을 확실하게 제도화시키고 심지어 전세계의 공산주의 정권에 퍼트리기까지 한 것은 스탈린의 책임이 맞다.
참고로 트로츠키주의 계열에서도 그런 수단들이 필요했다고 주장했지만, 스탈린은 그것을 정도 이상으로 엄청나게 오남용했기 때문에 비판을 받는다. 딱히 트로츠키주의자는 아닌 좌파 지식인 슬라보예 지젝은 제도적인 감시, 억압, 탄압, 정치적 테러리즘은 레닌과 트로츠키의 시대부터 있어왔지만, 그러한 폭력이 공공연하면서도 공식적으로는 은밀하게 자행된 것은 스탈린 시대에 정점을 찍었다고 주장했다. 즉, 레닌 시대에는 이러한 탄압이 공개적으로 이뤄지고 따라서 이에 대한 논의 역시 공개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스탈린 시대에는 '밤 사이에 누군가 사라지면, 다음날부터 마치 그런 사람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양 행동하는' 상황이 도래했다는 것이다. 결국, 이런 극도로 잔인한 감시 체제를 이용해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는 일인독재정으로 공산주의 특유의 인민독재를 변질시킨 것이 그의 가시적인 악행 이상으로 가장 큰 과오이기도 하다.
단순히 공과가 병존하는 독재자 자체는 인류 역사에서 숱하게 볼 수 있지만, 스탈린처럼 공과 과가 모두 극단적으로 큰 경우는 정말 드물다. 그렇기 때문에 스탈린에 대한 평가는 그가 사망한 이후 수십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의견이 매우 심하게 갈리고 있으며, 딱히 이렇다 할 총평이 정립되지도 않고 있다.
2. 경제 성장
2.1. 공업화의 신화적 성공
"속도를 늦추면 뒤떨어집니다. 그리고 뒤떨어지면 패합니다. 우리는 패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패배는 우리가 바라는 게 아닙니다. 옛 러시아의 역사는 무엇보다도 뒤떨어진 탓에 끊임없이 패배한 역사였습니다. 러시아는 몽골의 칸에게 패하고, 터키의 지방총독에게 패하고, 스웨덴의 봉건영주에게 패했습니다. 러시아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영주들에게 패하고, 영국과 프랑스의 자본가에게 패하고, 일본 남작에게 패했습니다. 러시아가 뒤떨어진 탓에 모든 사람에게 패했습니다. 군사적으로 뒤떨어져서, 문화적으로 뒤떨어져서, 농업이 뒤떨어져서 패했습니다. 그들이 러시아를 친 것은 그게 이익이 되고 그러고도 무사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혁명 전의 시인이 한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너는 비참하다, 너는 풍요롭다, 너는 강력하다, 너는 무력하다, 나의 조국 러시아여.' (...) 우리는 선진국보다 50년에서 100년이 뒤떨어졌습니다. 10년 안에 그 격차를 없애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짓밟히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소련의 노동자와 농민에게 그렇게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러시아인이 전차와 비행기, 함대로 무장하면 절대 정복할 수 없을 겁니다. 절대로. 그러나 기술이 없어 제대로 무장하지 않으면 전진할 수 없습니다. 옛 러시아의 역사는 이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여간 결과만 보면 낙후한 봉건사회를 완전히 탈피하지 못했던 소련을 초강대국으로 만든 인물이다. 원래부터 마르크스주의는 과학을 표방했으며, 역사 발전의 원동력으로 생산력을 들었다. 스탈린은 생산력을 늘리는 게 공산주의로 가는 길이라 생각했고, 그랬기에 이런 생산력 증가에 모든 것을 걸었다. 특히 철강과 전기 생산이 중점적으로 강조되었다. 그 결과 유럽의 후진국이었던 소련은 대공황 시기를 지나자 서구 열강에 필적하는 공업국으로 성장했다.[2]히틀러:"만약 누군가 나한테 소련이 3만 5천대의 탱크로 무장할 수 있다고 말해줬더라면 그 사람보고 미쳤다고 했을 거요."
(...)
만네르하임:"우리는 소련을 20년, 아니 25년간이나 마음대로 무장할 수 있게 내버려두었습니다."
-아돌프 히틀러와 카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하임의 비밀대화 중.
스탈린은 1928년부터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정부의 모든 행정력을 동원하여 산업화[3] 를 무지막지하게 밀어붙였다. 이렇게 정부가 직접 나서서 산업을 육성하는 것은 독일과 일본에서도 벌어진 일이었지만, 소련은 스케일이나 범위, 강도에서 독일과 일본을 훨씬 능가했다. 대부분의 개발독재자들처럼 스탈린도 기술력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었고, 개인적으로도 경제개발에 큰 열의를 보였다.
과학자들도 대접을 받았다. 대우가 훨씬 좋아졌을 뿐만 아니라 푸짐한 연구비를 타내 여러 최신 연구를 마음껏 할 수 있었다. 로켓 연구가 대표적인데, 현대 로켓의 아버지였던 콘스탄틴 치올콥스키 같은 경우 러시아 제국 때는 지나치게 공상적인 연구때문에 학계에서 푸대접을 받았지만, 소련 성립 이후에는 연구의 중요성을 알아본 소련 정부의 적극지원을 받게 되어, 소련 공군사관학교가 생겼을 때 창립 교수가 되었고 장례식도 국장으로 치뤄졌다. 비록 과학계에도 대숙청의 칼날이 덮치긴 했으나, 심지어 체포당일 처형되던 많은 다른 분야의 인재들과 달리 숙청대상이 된 많은 과학자들이 사형을 면할 수 있었고, 훨씬 편한 전용 감방에서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세르게이 블라디미로비치 일류신이나 우주개발의 책임자가 된 세르게이 코롤료프가 바로 이 케이스. 물리학 전공자라면 누구나 들어봤을 이름인 레프 란다우(1962년 노벨물리학상 수상)는 서슬퍼렇던 대숙청기간에 "스탈린 독재는 히틀러와 다름 없다"고 말했다가 NKVD에 체포되어 반동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그 재능을 아낀 대물리학자였던 표트르 카피차(1978년 노벨물리학상 수상)가 스탈린에게 "쟤 죽으면 나도 그만두겠음"이라고 직접 위협 편지를 썼고, 스탈린이 베리야에게 명령해 감방에 갇혔던 그를 석방하였다. 소련은 하마터면 천재 물리학자를 잃을 뻔했으나, 스탈린의 과학자 사랑으로 란다우는 목숨을 건진 것이다.
그리하여 1930년대 소련은 매년 10%가 넘는 경이적인 경제성장률을 기록한다. 당시 대공황으로 전 세계의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의 10%가 넘는 경제성장률은 더욱 경이적이었다. 그 결과 프랑스, 영국, 독일을 추월하고 1938년에는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된다. 혁명과 내전으로 잿더미가 된 당시 영국 식민지 인도제국 수준의 경제력을 가졌던 농업국가가 15년 만에 발전된 미국까지 넘보는 공업국가가 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기 때문에 소련은 전쟁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다.
스탈린 주도의 경제개발은 단순한 총생산 증가에 그친 것이 아니라 소련 경제의 체질이 질적으로 달라졌다는 것에 그 중요성에 있다. 더 나아가 스탈린식의 경제개발은 소련의 상하부 구조를 완전히 탈바꿈시켰다. 사실 러시아는 덩치가 크기 때문에 18세기 이래 못해도 5강(20세기 초반까진 영국+프랑스+독일+미국과 함께)에는 꼭 드는 나라였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주산업은 농업이었으며, 공업의 비중은 매우 낮았고, 사회는 봉건제의 잔재가 강하게 남아 있는 후진 농업사회였다. 그리하여 러시아제국은 20세기 들어와서도 그 덩치와 국력에도 불구하고 초강대국으로 보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명분하에 러시아의 모든 부분에서 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예를 들어 제정시절에는 의무교육도 없었고, 문맹률은 90%에 육박했으며 20세기 들어서도 문맹률이 크게 줄지 않아 러시아 혁명 직전에는 문맹률이 75%에 달했다. 허나 스탈린 집권기간동안 교육기관의 확충으로 문맹율은 1% 미만으로 떨어지게 되었고, 광범위한 지식층이 생겨났다. 또한 제정시설 러시아의 과학기술은 유럽본토에 비해서는 2류로 간주되었고, 연구기관이나 교육기관 모두 형편 없었으나, 스탈린 시절 소련의 과학기술은 뿌리를 내리고 일취월장하여 20세기 중반에 가면 미국과 맞먹을 정도로 발달하게 된다. 스탈린 덕으로 소련이 20세기 후반에 미국과 맞장뜰 수 있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5] 소련이 독소전쟁의 상흔이 가시기도 전인 1950년대 스푸트니크와 보스토크로 우주시대를 열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스탈린 시절에 키워놓은 중공업과 과학기술 때문이었다. 어쨌든 이오시프 스탈린이 전개한 공업화 덕분에 1950년대 소련은 무상교육 무상의료를 인민들에게 제공할 수 있었고, 사회의 많은 부분에서 복지정책이 실행되었다. 특히나 실업률이 많이 낮아져 고용률 면에서 확실한 성과를 거두었다.
히틀러의 침략으로 일어난 독소전쟁으로 소련은 또다시 잿더미가 되었으나 종전 3년 만에 경제를 전쟁 전 수준으로 회복시킨다. 그가 죽은 50년대에도 소련의 GNP 경제성장률은 평균 8%,[6] 소련의 국민소득 대비 투자율은 28%로 아주 높은 수준이었다. 아시아의 네 마리 용도 나중에 국가 주도로 경제를 발전시키는데, 소련과 아시아국들의 성장에는 비슷한 면이 많지만, 아시아국들은 미국이라는 거대시장을 잘 이용한 반면, 소련의 경우에는 거의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낸 것'''이기에 이 시기의 소련의 경제성장은 더더욱 경이적인 것이다.[7] 이후 신생 국가들의 산업화 모델이 되었다.[8][9]
1930년대 이오시프 스탈린의 진행한 소련의 공업화 정책은 또 다른 점에서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1941년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했을 당시 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소와 같이 우랄산맥 인근에 있는 공장들을 가동하여 독일군의 침략을 막아내는 데에 필요한 탱크나 비행기 등을 대량 생산할 수 있었다. 독소전쟁 시기 소련은 놀라운 성과를 달생했다. 무론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랜드리스라 하여 미국이 소련에게 상당한 물자를 제공한 것도 영향이 있었지만, 소련 경제는 1942년 후반 여섯 달 동안 독일이 그해를 통틀어 얻을 수 있었던 생산 수준에 도달했을 정도로 전쟁 수행에 성공적으로 헌신했고, 그 수치는 주목할만 했는데, 그 반년 동안 소련은 15,000대의 항공기와 13,000대의 탱크를 생산해냈다. 즉 탱크와 항공기 생산에서 엄청난 성과를 올려 독일군의 침략을 상대했던 것이다.[10] 독소전쟁 당시 소련의 대량 군수물자 생산은 1930년대 공업화가 기반이 되었기에 가능했다.
2.2. 그러나 인민을 갈아넣어 만든 공업화
그러나 저런 초고속 성장을 밀어붙이기 위한 인민들의 희생은 너무나 어마어마했고, 인민들의 희생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특히 농업 정책에서는 저 닥치고 밀어붙이기가 잘 통하지 않았고, 집단화의 부작용 때문에 결국 소련은 망할 때까지 만성적인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 뭐, 그래도 국가가 안정된 다음에는 식량을 수입해서라도 국민들이 식량부족에 시달리지 않게 하기는 했다.
집단화 직전의 소련의 농업상황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이는 블라디미르 레닌과 니콜라이 부하린이 강력히 추진한 신경제정책(NEP)에 의해 농업부분에서 자본주의적 요소가 상당히 도입되었기 때문이었다. 부하린은 실제로 농민들에게 '''"농민 여러분, 부자 되시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스탈린도 처음엔 부하린의 정책에 반대하지 않았다.[11] 농민들은 고무되어 부자가 되기 위해 열심히 일을 했고, 그래서 농업생산량도 증대하고 부농(네프만(NEPman)/쿨라크)[12] 도 생겨났으나, 문제는 다른 부문에 비해 그 속도가 더딜 뿐만 아니라 그 부산물로 생긴 부농들은 정권의 위험요소였다. 사회주의 이론상 부농들을 그냥 놔두는 건 모순되었고[13] 자연스럽게 추진하면 50년이 될지 100년이 될지 모르는 공업화 추진을 위해선 "내가 아니면 안된다." 생각한 스탈린은 1929년 계급의 적 쿨라크 박멸을 선언한다.[14] 농촌에서 만들어지는 잉여를 모조리 공업생산에 투입할 목적으로[15] 전국의 모든 농토를 소프호스와 콜호스라는 집단농장으로 재편하는 강제적인 농업집단화가 행해진다. 해당 지역마다 농민집단의 상위 4~5%의 쿨라크를 때려잡으라고 할당량(?)까지 내려온다. 실제론 상위 15%~20%에 해당하는 필요 이상의 중농까지 때려잡았다.
어쨌든 자기 땅을 잃는데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16] 초기에는 자기 땅을 잃은 농민들이 항의를 하였고, 그게 통하지 않자 아예 종자를 태우거나 혹은 세마리 이상 가축을 가지면 어차피 쿨라크로 몰리거나 몰수되니 가축을 굶겨 죽이거나 도축해서 숨기는 등의 태업을 하였다. 그 결과로 농기계 역할을 하는 가축과 퇴비의 부족으로 다음해 흉년크리로 이어졌고 심지어는 이판사판이라 생각한 대규모의 농민 반란이 일어나서 군대가 출동하여 잔인하게 진압하기도 했다. 그 결과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일어났고, 1932년~33년 기근은 절정에 달해 결과적으로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소비에트 연방에서 500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러한 인구학적 타격은 2차대전 전에도 통계치에 수정을 가할 정도였다. 1937년 소련의 공식 인구 집계는 1억 5600만이었는데 경악한 담당자 쿠르만은 사망자, 군인, 탈소련자들의 통계를 갖다붙혀 1억 6830만으로 허위보고했다. 그리고 그 조작된 자료를 보고 대기근의 여파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당시 서방에서 1930년대 후반 소련의 기존 인구 증가 속도론 1억8천800만이 넘어야 되는데 2천만 명 정도가 모자르자 '''희한하네~'''라고 생각할 정도였다.[17] 기존의 이에 대해 정권을 잡았던 스탈린의 책임이 있는 것에 대해서는 이론이 없으나 그것이 농민반항을 억압하기 위한 의도적인 것이었는지 혹은 그저 자연재해와 행정적 문제로 인한 불가피한 것이었는지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대체로 서방측 학자들은 전자라고 주장하지만, 러시아인들은 대체로 후자를 주장한다. 스탈린과 소련 체제에 매우 비판적이었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도 우크라이나 대기근은 스탈린이 아니라 자연재해가 원인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우크라이나 대기근 이전 1921년 적백내전 직후 기근에 이은 발진티푸스로 500만명 이상 죽은 참사가 근거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도시에서 굶어죽었고 우크라이나 기근은 농촌에서 굶어죽었다. 강제 공출로 도시는 상대적으로 멀쩡하고…[18] 1932년 곡물 생산은 1930년보다 20%가 감소한걸로 추정하고 가축수는 1929년 기준으로 1935년엔 절반에 불과 했다고 한다. 명백한 인재다. 이러한 삽질은 이념상 이유로만 단순히 농업집단화를 추진한게 아니라 공업화 추진으로 기계류 등을 수입하는데 모자라는 외화를 식량 수출로 땡기기 위해서 농촌에 공출량을 늘리는데 개인적으로 갈취하기보다는 집단농장에서 공제하기 편한 사정도 있었다.
자주 그러했듯이, 다가오는 재앙의 최초 신호는 소련 경제에서 가장 불우한 부문인 농업으로부터 왔다. 소련 농촌은 불균형한 경제 정책과 늘어나는 정부 지출을 지탱하기 위해 새로운 세금 부담의 타격을 고스란히 받았다. 비효율적인 집단농장 체제 하에서 농업은 침체되었고 나라를 먹여 살릴 능력이 없었다.축산업의 상황은 특히 나빴다. 심지어 소련 공식 통계로 보아도 1953년 초 전국의 가축 두수는 1939년보다 늘어나지 않았고,이는 1928년보다 3분의 1이 더 적은 수였다. 1953년의 돼지 수는 1928년과 동일했다 전국의 농촌에서 모스크바로 쏟아져 들어온 수많은 민원에는 절망적인 상황이 묘사되어있다. 이런 외침 중의 일부는 스탈린의 귀에까지 닿았다. 1952년 10월과 11월에 접수되어 스탈린에게 전달된 편지 중에는 소련의 다양한 지역에서 집단 농장의 고초를 토로한 불만들이 담겨 있다. 수의사인 홀로도프는 사실상 무보수 강제 노동을 하고 있는 집단농장 노동자들에게 일할 의욕을 복돋을 동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렇게 썻다.우리 언론에 따르면, 우리는 농업에서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실제로 현실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겠습니다. 호밀 수확량이 보잘 것 없습니다. 추수 과정에서 막대한 낭비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감자는 어느 정도 수확되었지만,과연 감자 수확이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공장에서 동원된 노동자들이 감자를 캡니다 이 기간에 그들은 평소 임금의 50퍼센트밖에 받지 못합니다. 이 일에서 얻는 이득이 없기 때문에 감자를 빠짐없이 캐내려고 노력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최대한 빨리 일을 끝내려고 맨 위에 있는 것들만 대충 걷어낼 뿐입니다. 이제 축산업을 보겠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말하는 것조차 창피스럽습니다 연간 우유 생산량은 사료를 먹인 젖소 한 마리당 1,200~1,400리터를 넘기지 못합니다. 한 마디로 우스울 뿐입니다. 이는 보통 염소 한 마리에서 나오는 양입니다
- 올레그 흘레브뉴크의 「스탈린」(삼인출판사-유나영 분 옮김) 503p~504p
불만이 만연한 근본 원인은 소련의 낮은 생활수준이었다. 집단화로 생산성이 심하게 저하된 농업은 위기와 침체 사이에서 휘청거렸다.스탈린 정부는 1931년~1933년과 1946년~1947년처럼 국토의 상당 부분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부 특정 지역이 기근이나 식량 곤란을 겪고 있음을 매년 인정해야 했다 심지어 가장 호시절에도 평균 식사량이 빈약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로 빵과 감자에 의존해 살았다.스탈린 사망 직전에 소련 시민은 주로 밀가루 음식(주로 빵)약 500그램 소량의 곡물 감자 약 400~600그램 우유나 유제품 약 200~400그램을 소비했다 이 식품들이 전형적인 식단의 대부분을 이루었다. 그 이외의 식품, 특히 고기는 특별한 때에만 먹을 수 있었다. 일인당 육류 및 육가공품 소비량은 하루 평균 40~70그램, 지방(동물성,식물성 기름,마가린,돼지비계) 소비량은 15~20그램이었고 여기에 설탕 몇 티스푼과 약간의 생선을 더하면 끝이었다 평균적인 시민은 달걀을 6일마다 1개꼴로 먹을 수 있었다.'''이런 식단은 수용소 수감자의 표준 식단과 거의 동일했다''' '''이는 중앙통계국에서 산출한 기관인데 이 기관은 항상 정치적 압력을 받고 있었으므로 현실을 장밋빛으로 착색했을 가능성이 높다'''[19]
- 올레그 흘레브뉴크의「스탈린」(삼인출판사-유나영 분 옮김) 544p
공산품의 공급 사정 역시 마찬가지로 나빴다. 공장에서 제조한 물건의 가격은 전통적으로 특별히 높게 매겨졌다. 사람들은 단순하고 상대적으로 값싼 물건을 택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런 물건을 살 형편이 되는 사람도 드물었다. 예를 들어 1952년에 가죽 신발을 구입할 수 있는 농민은 4명 중 1명꼴이었다. 가장 간단한 신발과 옷조차 갖추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 올레그 흘레브뉴크의「스탈린」(삼인출판사-유나영 분 옮김) 545p
소련 인민의 고난을 초래한 또 다른 요인은 공업과 농업 부문의 지극히 열악한 노동 조건이었다. 물질적 보상 체계가 제대로 수립되지 않아 작업장에는 폭압이 만연했다. 노예 노동은 물론 굴라크 내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행해졌지만, 자유롭다고 하는 산업 및 농업 노동자들도 흔히 강압적인 환경에서 중노동을 했다. 일부 산업의 작업장, 특히 가장 임금이 낮고 위험한 곳에서는 청년들을 강제 동원하여 작업이 수행되었다 동원을 회피할 경우에는 노동 수용소의 징역형이 기다리고 있었다. 1940년부터 1952년까지 약 1700만 명이 지각, 근무지 근무이탈, 동원 회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여기에 작업장 규율 위반 건수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 엄청난 숫자는 소련 노동자들의 이타적 열정을 과시하는 의기양양한 선전이 거짓이었음을 폭로한다
올레그 흘레브뉴크의「스탈린」(삼인출판사-유나영 분 옮김) 546p
1930년대처럼 스탈린은 재난이 발생하고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빵 부족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된 '파괴자들'과 '투기꾼들'을 비난하는 쪽을 택했다. 크렘린 지도자에게는 전시에 쓰기 위해 인정사정없이 비축했던 엄청난 '전략적' 곡물이 있었다. 이제 그는 이 곡물을 소비용으로 방출하기를 거부했다. 스탈린은 또 외국에서 식량을 구매할 수 있는 금 1500톤도 국고로 갖고 있었다. 몰로토프와 미코얀은 나중에 스탈린이 금의 매각을 금지했다고 회고했다. 심지어 스탈린은 국제연합의 국제부흥국이 러시아에 보내려 한 식량 지원도 마다했다.(우크라이나와 백러시아에 대한 일부 지원은 허용했지만), 그와 동시에 스탈린은 소련 식량을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공산주의자들뿐만 아니라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에게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스탈린은 산업 재건과 재무장에 돈을 쓰기 위해 소련 인민들, 특히 농민과 노동자들을 피폐화하는 전전의 정책으로 돌아갔다. 1946년과 1948년 사이에 농민들에게 물린 세금은 30% 증가했고, 1950년까지 150% 급증했다. 국가는 또 소련 인민들로부터 '빌렸다'고 하지만 사실은 몰수한 수십억 루블에 이른 전쟁 공채를 상환하는 것도 거부했다. 대신 새로운 재건 공채가 생존을 우해 발버둥치는 시민들에게 강요되었다.
블라디슬라프 M.주보크의 「실패한 제국」(아카넷-김남섭 분 옮김) 163p~164p
이렇듯 집단농장에 종속된 농민들에게 지불되는 극도로 낮은 수매가로는 국가에 생산물이 모조리 몰수되었다는 뜻이다. 농촌을 착취함으로써 중공업과 무기 분야에만 집중 투자하고 공업부문 또한 무보수 강제노동이 만연하여 스탈린식 산업화는 국민에게 고통을 주었다. 소련 지도자들은 스탈린이 죽은 즉시 오랫동안 과제로 남아있던 경제 개혁에 착수하였다. 농축산물에 대한 수매가를 인상하고 농민에 대한 세금을 인하하여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농민들의 숨이 트였고 농업생산성이 개선되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삽질로 인해 반세기 뒤인 80년대 소련 농업인구는 전체의 20~22%, 미국 농업인구는 전체의 4~5%인데도 미국은 수출 잘하는데 소련은 자기 수요도 안되었다라는 참혹한 이야기도 있다. 물론 기후 탓도 있다. 러시아의 최남단이 미국의 북쪽 지역이다(...). 그러나 러시아도 추운 나라라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남쪽 지대에 농사가 매우 잘 되는 비옥한 땅이 있고[20] 소련은 유럽에서도 가장 풍요로운 곡창지대라는 남캅카스 지역과[21] 나름대로 농사 잘 되고 자원도 풍부한 흑토지대인 우크라이나도 가지고 있었던 점을 보면 결국 당시 소련 정부가 농업 계획을 잘못 수립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못한다.[22][23]베리야가 체포된 후 흐루쇼프는 재빨리 지휘자의 자리로 진입했다. 하지만 말렌코프가 눈에 잘 띄는 직책인 각료회의 의장 자리를 여전히 차지하고 있었다. 나라의 많은 사람들은 그를 스탈린의 후계자로 계속 여겼다. 1953년 8월 8일 최고 소비에트에서 연설하면서 말렌코프는 '향후 2-3년' 내에 소련 인민들의 생활 수준을 급진적으로 개선시킬 깜짝 놀랄 만한 몇가지 정책을 발표했다. 1928년 이래 처음으로 국가는 군산복합체와 기계제작 부문을 희생하고 농업 및 소비재 관련 경제에 대한 투자를 증가시키기로 약속했다. 말렌코프는 또 농가와 개인 부속지의 크기를 늘릴 뿐만 아니라 질식할 것 같은 농업 세도 반으로 줄이겠다고 선언했다. 이 조치들은 1년 내에 농민들의 가처분 소득을 거의 배가시켰다. 심각한 식량 문제가 계속 소련을 괴롭혔으나, 적어도 농민들은 터무니없는 재산세를 모면하기 위해 과수원을 줄이고 소를 도살하는 짓을 그만두었다. 대신 그들은 고기와 우유를 시장에 다시 팔기 시작했다. 말렌코프는 러시아 전역의 무지크(러시아어로 농부, 촌놈을 뜻하는 단어)들이 농촌의 밀주로 가득 채워진 술잔을 그의 건강을 위해 건배하는 등, 레닌 이래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지도자가 되었다.
블라디슬라프 M.주보크의 「실패한 제국」(아카넷-김남섭 분 옮김) 241p
어쨌든, '''스탈린 시대 소련 인민들의 엄청난 희생은 헛되지 않아서''' 1960년대부터는 소련도 그럭저럭 살기 괜찮은 나라가 된다. 냉전 이후 미국에 비해 딸리는 경제력으로 미국과의 군비경쟁을 하면서 국가 재정의 태반을 군사부분에 밀어 넣기는 했어도 국가가 퇴보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24]
1960~1980년대의 소련 노동자들의 삶을 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제도적으로 보장받았다. 무상의료, 무상교육, 1년에 3주간의 유급휴가, 그리고 차례를 꽤 오래 기다려야 하지만[25] 월봉급 10%가 넘지 않는 임대료를 받는 국영 임대 주택. 그리고 소련 전체에서 최저/최고 봉급차는 6배에 불과했다. 참고로 현재 미국의 경우는 수천배가 넘는다. 당시 소련은 보건의료도 무상이었고 약도 국가보조금이 나와서 매우 저렴했다.[26] 또한 소련은 1930년대 후반부터 노동자 연금제도가 자리잡아, 일반적인 인민대중에게도 안정적인 연금을 제공할 수 있었다. 따라서 괜히 냉전시대 서구 좌파들이 스탈린을 찬양했던 건 아니라는 얘기.
박노자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소련의 붕괴에는 미국 부자들처럼 엄청난 부를 손에 쥐고 살고 싶어했던 소련 "높으신 분들"의 욕심도 작용했다고한다.
문제는 이런 좋은 복지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생산성의 혁신이 제자리 걸음을 걸었다는 점이다. 근본적으로 사기업을 비롯한 민간 주체에게 혁신을 고무할 인센티브 체계가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스탈린 시대의 소련은 국가권력이 사회의 각종 자원을 동원해서 더 효율적인 생산단위에 때려박으면 성장하는 요소투입형 경제였다. 하지만 스탈린이 죽고 나서 전후복구까지 끝나자 소련은 이미 고도화된 도시경제였고, 혁신과 창조적 파괴, 생산성 향상이 아니면 성장을 유지할 수가 없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충실한 인센티브 체계로서 효과적 제도를 갖추지 못한 소련은 비효율만 양산했지만 인민들에게 정치권력과 거래로 준 것이나 다름 없던 복지제도는 점점 더 과중한 압박으로 소련 체제를 내리눌렀다. 이를 극복하고자 1960년대부터 성과급 제도를 강화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이었다. 어차피 위에서 시키는 일만 하는데, 대충 대충한다 해도 대놓고 봉급이 크게 떨어진다거나 하지는 않았으니까. 때문에 소련의 눈부신 경제성장은 1960년대 들어서면서 차차 둔화되었다. 문제가 계속 쌓여만 가자 브레즈네프 집권 말기~안드로포프 집권기에 들어서서는 성과급 제도를 강화했지만 그 효과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계획경제 시스템으로 막대한 이익을 누리고 있는 각급 당관료들이 그들의 권한을 절대 놓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
고르바초프는 이런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급진적인 시장경제를 도입했으나, 치밀한 계획없는 시장경제 도입은 유통-배급 시스템을 붕괴시켜버렸고, 인민의 삶은 수렁으로 굴러떨어졌다. 사회주의가 아니라 막장자본주의 국가가 되어버린것. 여기에 보수파들이 고르바초프를 끌어내리려던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망하는 바람에 소련은 허망하게 무너졌다. 보수파들이야 막나가는 나라를 걱정했겠지만, 사회주의적인 부작용을 치유하지 않고서는 아무리 소련체제를 유지하려고 해도 얼마간 연장할 따름이었음은 명약관화. 그러나 옐친 대에는 애써 모은 예금이 휴지조각이 되어버렸고, 임금수준이나 사회보장제도가 소련 시대에 비해 형편없이 뒤떨어지면서 많은 러시아인들은 저임금 빈곤층으로 굴러떨어져나갔고, 많은 러시아인들은 적어도 '''삶의 질의 면에서는''' 소련 시절이 현재보다 나았다고 이야기한다.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 노선과 그 저항으로써 보수파의 쿠데타에도 여러 관점이 있는데, 이중에는 아예 당시 소련은 '능력에 따라 생산하고 기여한 만큼 소비하는' 사회주의 체제에서 '능력에 따라 생산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하는' 공산주의적 이상이 완성되는 사회로의 과도기에 있었는데, 그 과도기적 문제를 지나치게 심각하게 받아들인 고르비가 설레발을 쳐서 다 말아먹었다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있다. 한국에서도 대학 교수 중에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얼핏 보면 막장 종북주의자들이 할 주장같지만 걔들은 북한밖에 몰라서 소련은 관심도 없으며, 애시당초 북한은 출발만 공산체제지 실제로는 전제왕정이었으니 해당사항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주로 소련 말기의 개방기에 유학갔던 사람들 중에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좀 있는데, 한국에서 대학 다니려면 부모 등골을 빼먹어야 하는데 소련에서는 학비가 공짜일 뿐더러 대학생은 공부하는 게 일이라고 월급까지 주는 체제에 매료돼서 눈에 뭐가 좀 씌인 것이라고 보는 경우가 많은 듯. 어쨌거나, 위 단락의 내용처럼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인들의 삶의 질은 소련 시절보다 훨씬 열악하고, 그나마 좀 나아진 것도 블라디미르 푸틴이 집권한 뒤의 일이다.
이 단락에서 약간의 오류를 지적하자면 먼저 소련은 인센티브제에 기반하여 경제성장을 했으며, 소련은 계획경제였다는 점이다. 사기업이 없었지만 그래도 소련에는 '''인센티브제'''가 정착되었고, 소련의 경제성장에 큰 기여를 했다. 먼저 소련의 경제성장과정을 보면 채찍과 당근이라는 방식을 도입했는데, 특히 스탈린의 경우 목표량을 초과생산한 동무에는 막대한 포상과 훈장 그리고 혜택을 부여했고, 그러지 않은 동무에게는 징계처벌을 하였다. 생산량이나 근태, 업무실적이 급격히 낮은 경우에는 심한경우 '''숙청당했다.''' 그래서 위에 대충대충 일한다고 해도 봉급이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는 표현은 사실과 다르다. 소련에서 살아본 사람들의 말이나 러시아와 구공산권 국가에서 살면서 경험한 것에 의하면 소련권 사람들이 일은 열심히 한다. 다만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 잘한다는게 문제이다. 이런 직업관을 표현하는 단적인 일화가 있는데, 한 남자가 소련 말에 놀러갔는데 한 사람은 땅을 파고 한 사람은 그 판 땅을 메꾸는 일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자기들의 일이 나무를 심는 것인데 오늘 나무를 심는 사람이 병으로 안나와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련인들의 근로의욕은 상당히 높은 편이었는데, 매번 목표치 이상을 달성해서 상당한 인센티브를 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는 '''목표치'''다.
소련은 계획경제국가이다. '''모든 목표치는 당관료의 손끝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들이 필요한 물자의 '''양'''을 책상에서 결재하면 이 문서가 하달되어 공장에서 해당물자를 생산한다. 자유경제시장처럼 사기업이 마음대로 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 목표치를 달성하면 해당 공장과 사기업은 충분한 혜택을 받았다. 그러니 공장도 딱 그 목표치만 생산하게 된다. 문제는 사람이 수요량을 예측하는 것이 겁나게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물자가 부족해지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그리고 이러한 목표치에 따른 인센티브제도는 인센티브는 늘어나는데 막상 생산력이 떨어지는 막장현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고르바쵸프가 도입한 것이 '''중앙당의 생산량 통제'''를 폐기한 것이었다.[27] 생산량 통제의 폐지는 당연히 인센티브제도의 폐지로 들어섰다. 중앙당은 각자 공장이 알아서 생산해서 벌어드린 수익으로 인센티브를 받으라고 했다. 당연히 근로의욕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목표치가 없으니 인센티브를 받을 수 없고, 직접 수익을 내라는데 어떻게 수익을 내야하는지도 모르니 말이다. 문제는 생산량에 있었다. 수십년 간 중앙당이 정해준 목표치만 달성한 기업과 공장에서 알아서 생산하라고 한다면 그들이 어떻게 생산하겠는가? 수요를 알지도 모르고, 돈을 번다는 개념도 없다보니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 그래서 이들이 선택한 것은 과거의 생산량을 목표치로 생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센티브도 없으니 의욕은 떨어지고 목표치만 생산하다보니 결국 생산력증대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물자는 적고, 거기에다가 국영상점에다가 헐값에 납품하는것보다 시장에 파는것이 몇배 이상의 이득을 챙길수있는 상황속에서 눈치가 재빠르게 돌아가던 기업들이나 업자들은 물자들을 시장에 팔며 이득을 얻는쪽을 택했다. 그야말로 이것의 악순환이 빅뱅을 일으켜 소련 말 물가폭등을 유발시킨 것이다.
2.3. 중공업 우선주의에 대한 후세의 평가
급진적 공업화를 위한 농업 희생이 불가피했다는 견해도 있다.[28] 이게 꼭 소련의 경우에 한정된 것도 아니고 국가 주도의 고속 공업화를 추진한 나라에서는 대부분 농촌과 농업이 희생당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중공업화를 위해서는 국가의 자원을 공업 분야에 우선적으로 투자할 수 밖에 없고, 공업 노동력을 확충하기 위해서는 농촌 젊은이들을 도시로 끌어들일 수 밖에 없으며, 또 그렇게 도시에 밀집한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서는 농촌에서 생산한 식량을 싼 값에 도시에 공급해야 하니까... 스탈린 정권 당시의 소련이 사회주의 이념에 따라 토지를 국유화해서 이런 문제점이 크게 두드러진 부분은 있지만, 다른 나라도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29] http://ko.wikipedia.org/wiki/영국의_농업_혁명을 보면 알듯이 영국의 산업 혁명은 원래 농업 혁명부터 시작된 것이며 한국의 저곡가 정책 역시 흔히 왜곡되는 것과는 달리 농업 보조금이다. 일본의 경우에도 자유롭지는 않아서 일본의 전체주의가 크게 발흥했던 일제강점기 시절의 무자비한 식량 수탈은 다 이런 맥락에서 온 것이다. 산미증식계획으로 일본은 공업화에 박차를 가했지만, 일본 농민들은 심대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자본주의 국가의 경제발전에서 나타나는 이촌향도 현상은 원래 농촌에 있던 실업자들이 새로 일자리가 생긴 도시로 떠나는 현상이며 농촌이 가난해지거나 착취당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30]
이렇게 중공업 우선주의는 인민 생활의 저하 등의 많은 문제[31] 를 야기했으나, 당시 소련은 '''안보적으로 이에 우선순위를 둘 수 밖에 없었다.'''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 지도자들은 자본주의 세력이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전복하기 위해 쳐들어 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고, '''실제로 적백내전 당시 외국군들이 러시아 땅에 들어와서 혁명을 방해했기 때문에''' 이런 강박관념은 결코 망상이 아니었다.[32] 1920년대 초엔 폴란드에 쳐발리면서 붉은 군대의 현대화에 목말라 있기도 했다.[33] 하여튼 중공업 투자가 제2차 세계대전 때 소련의 승리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소련군은 독일군 못지 않게 기계화가 되어 있어서 초반의 대패에도 불구하고 후에 승리할 수 있었다.[34] 실제로 1920년대에 투하쳅스키가 붉은군대의 현대전 작전 수행을 위해 필요한 전술에 필요하다 주장한 수만대의 전차, 장갑화 차량과 항공기의 요구는 당시 소련의 공업력 수준으로 불가능했고 스탈린의 공업화가 아니었다면 전시에 소련의 생산능력은 달성하기 어려웠다. 게오르기 주코프도 이 때 이루어진 공업화가 아니었다면 전쟁에서 패했을 것이라며 이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농업을 초토화시키는 동시에 중공업과 군수산업에 올인한 투자가 과연 최선이었는가 하는 시각들도 존재한다. 페레스로이카 이후 재발견된 부하린을 지지하는 시각에선 스탈린이 필요 이상으로 중농을 때려잡는 바람에 급격한 식량 문제가 발생하였고 오히려 이 같은 식량문제가 중화학공업을 추진했던 당시 걸림돌이 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부하린은 급격한 중화학공업화는 황금알을 낳는 닭을 죽이는 꼴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급격한 중화학공업추진은 결국 식량문제를 안게 만들었고 실질적으로 부하린식으로 추진했더라도 스탈린이 원하던 시기에 원하던 수준의 중화학공업에 이르는 것은 별반 차이가 없었다고 본다. 부하린도 중화학 공업으로 전환 필요성은 분명히 인식하기도 했고, 중화학공업으로 전환은 하되 급격하게는 하지 말자는 입장이었다. 오히려, 급격한 공업화로 인하여 가축생산의 공급은 50%가 감소하였으며 곡물생산은 기대보다도 적었다. 부양인구가 줄었으므로 공업자본을 형성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으나 농촌으로부터 도시로의 인구유입은 산업자본 성장을 저해하였다 실제로 농촌에서 도시로 흘러들어간 인민이 필요보다 약 1900만명 이상 이주해버렸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 주장에 기초하여 1920년대 말에 소련경제의 잠재적 성장 가능성을 남용했다는 것이고, 만일 대안의 정책들이 채택 되었더라면 좀더 큰 산출이 있을 수 있었고 좀 더 많은 자본이 더 적절한 비율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출처]
이런 식으로 닥치고 일단 밀어붙이는 스탈린식 국가주도형 경제정책, 민주집중제의 '집중'을 강화하는 관료제의 강화는 후세의 좌파들에게도 엄청난 논쟁거리가 되었다. 스탈린 체제 하에서의 소련의 국가성격을 무엇으로 보는지에 따라 현재의 좌파들의 정파가 갈리기도 한다. 이는 현재 존재하는 북한, 쿠바, 베트남 등의 소위 '사회주의' 국가들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관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레닌은 네프에 대해 국가를 다시 자립하게 만들기 위해 시장에 임시로 양보하는 것 이상으로 생각했다. 1927년 농가의 절반이 농업 협동조합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은 네프의 성공을 보여주는 지표였다. 그 결과로 생산성이 꾸준히 상승했다.1926년에 이르러 1913년 수준의 농업 생산량이 회복됐고 1920년대 중반의 수확량은 러시아 농업의 황금기였던 1900년대 당시보다 17퍼센트나 높았다. 레닌이 기획했던 것처럼 네프가 지속됐더라면 그것은 제3세계에서 사회주의 발전의 본보기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소련 경제는 농업부문의 활황에 힘입어 1921년과 1928년 사이에 급속히 성장했다. 하지만 네프는 농업 집단화를 통해 중단됐다. 농업 집단화는 소련을 영구적인 불구로 만들었고 수백만 명의 농민들의 삶을 파괴했다.
-올랜도 파이지스(조준래 분 옮김)의「혁명의 러시아1891~1991」(어크로스, 2017, pp.205~210)
이는 한국에서는 크게 세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 데, 먼저 국가자본주의로 보는 관점이다. 한국의 급진좌파 중 하나인 노동자연대등이 주장하는 이 관점은 소련 관료제는 하나의 자본으로서 노동자에게 작용했고, 국제 자본주의 경제에 있어 소련은 엄연히 그 일부였기에 세계공황에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소련의 붕괴는 자본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일 뿐 사회주의의 실패라 보기 힘들다는 것이 그 입장이다. 한편 자율주의나 평의회 공산주의 등의 일부 분파는 스탈린 이전 레닌 집권기부터 소련의 붕괴까지를 국가자본주의 사회라 보기도 한다.
그 다음 주장으로는 스탈린의 정책들을 레닌의 정책을 계승한 것이라 보는 것이다. 이는 한국의 스탈린주의자(PD)들 대다수가 가진 입장이기도 하다. 레닌 집권 이후부터 소련의 붕괴까지의 역사는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들이었다는 입장이고, 소련 붕괴 이후도 소련의 체제는 사회주의가 아닐지 몰라도 사회주의에 근접한 복지국가라는 인식을 가진다.
비주류적인 주장으로는 정통 트로츠키주의 단체들의 '변질된 노동자국가론'이 있다. 노동자국가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혁명 이후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의 과도기 국가를 말한다. 즉 한 사회의 권력이 자본과 지배계급에 존재하는지, 혹은 노동계급에 존재하는지에 따라 노동자국가 여부가 갈린다. 스탈린 이후의 소련은 이러한 노동자국가의 틀은 가졌지만 스탈린에 의한 중앙에의 집권, 사업장과 공동체의 민주주의를 관료제로 대체해 버린 것은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노동자국가'는 분명히 아니라는 입장이 '변질된 노동자국가론'이다.
결론적으로 적어도 수성 및 발전의 측면에서 따져본다면[35] 스탈린이 트로츠키보다 더 나은 지도자였다고 보는 의견이 주류이다. 트로츠키가 노농적군을 건설해 1919년에 소비에트 러시아를 구해냈듯이 스탈린은 군대를 뒷받침할 산업을 재편해서 1941년에 소련을 구해내었다. 그의 급진적인 공업화 정책이 아니었다면 소련은 전지구의 상당부분을 공산화시키지도 못하고 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에게 승리하지 못하고 붕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36] 트로츠키주의 측에서는 트로츠키와 스탈린과의 차이점만을 부각해 설명하지만, 냉정하게 본다면 반대파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 농민을 갈아넣는 중공업화, 군사력의 확대 및 확충 모두 트로츠키의 정책이었다. 많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트로츠키의 축출 이후 스탈린에게 적대하다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실시되자 도리어 스탈린에게 충성을 맹세했고[37] 이는 그것이 트로츠키의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멀리 갈 것 없이, 농민을 갈아넣어 만든 자본과 전국적 징집으로 만든 군대로 승리한 전쟁의 실질적 최고사령관이 바로 누구였는지 생각해보자. 트로츠키는 허망하게 축출된 토론가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레닌 생전에 소련의 실질적 2인자였다. 그런 트로츠키는 포용력이 없는 정치적 리더십으로 실각했지만, 스탈린은 아무리 잔인하고 혹독할지언정 정치적으로 승리한 다음 계획에만 그친 트로츠키의 중공업화를 실제로 이룩해내어 소련이 맞이한 가장 위협적인 적을 격퇴해내었고 이는 트로츠키의 군사적 성공에 결코 꿇리지 않는다.
중공업화를 반대한 부하린과 중공업화를 점진적으로 효율적으로 진행하자고 한 트로츠키 모두 1920년대 당시에는 상당히 합리적인 주장을 하는 것처럼 보였고 스탈린은 세 명중 가장 강경한 공업화를 추진하였다. 스탈린은 몰로토프의 증언에 따르면 1943년 정도까지 유럽에서 전면전, 총력전을 벌일 수 있을 계획으로 산업화를 추진했고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까지 이 구상에서 시작한 것이라 본다면 이는 15년짜리 계획이 된다. 그것도 트로츠키파를 제거한 1927~1929년에 시작한 계획으로. 그렇다는 것은 스탈린의 개인적 권력욕과 별개로 그가 어떠한 이유에서건 정말로 소련의 공업국가화를 1920년대부터 마음 속에 품고 있었고 실행에 옮겼다는 결론이 된다. 스탈린의 경쟁자들은 무능하지 않았고 각자의 비전과 선견지명이 있었지만, 1928년을 기준으로 잡았을때 농업국가인 소련을 15년만에 수천대의 전차와 항공기를 보유한 국가로 만들 '''추진력'''을 가진 게 스탈린이었다. 당대의 평가가 어땠는지, 그리고 다른 지도자들이 소련을 이끌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의 논의에 대해선 차치하고서라도 '''일단 결과만 본다면''' 스탈린은 소련의 구원자이다.
3. 제2차 세계 대전과 외교 분야
3.1. 외교적 승리와 초강대국이 된 소련
또한 스탈린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로는 '''얄타 회담에서의 외교적 승리'''가 있다. 얄타 회담을 통해 스탈린은 루즈벨트의 불안함을 이용하여 대일전 참전을 약속하는 대가로 '''동아시아에서의 세력확장을 보장'''받았으며, 결과적으로 만주 작전을 통해 70만의 관동군을 2만의 사상자만으로 제압하는 위업을 달성하여 한반도의 북쪽의 38선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미국과의 합의가 없었다면 아마 한반도 전체는 소련군이 점령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동유럽 각국에 공산정권을 세워서 소련과 서방의 완충지대를 마련했다. 2차대전에서 폴란드 침공의 결과 독일과 국경을 맞대었다가 독소전쟁 초반에 거의 나라가 망할 지경이었음을 상기하면 스탈린은 엄청난 희생에도 불구하고 결국 희생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3.2.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승리
독일과의 전쟁 초반 몇달만에 수백만의 군대와 모스크바 서쪽의 광대한 영토를 잃게 되는데 그 원인 중에는 스탈린이 일부 원인을 제공했다. 1930년대 말에 군대 내에서의 대숙청으로 쓸만한 지휘관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는 것과, 수많은 사전정보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침공을 끝까지 믿지 않으면서 대비를 충분히 하지 않은 것, 무리한 사수명령으로 많은 병력을 포위섬멸작전의 희생양으로 만들었다는 것 등이다.[38]
하지만, 국가총력전의 형태로 흐른 당시의 전쟁에서 미하일 투하쳅스키 계열의 게오르기 주코프와 세묜 티모셴코 등을 등용했다는 점과 미국의 렌드리스(Lend-Lease,무기대여법)를 받아 투하쳅스키의 종심전투이론을 실행해냈다는 점은 특기할만하다.
이전 문단에서도 나오다시피 스탈린은 초반의 충격을 털어낸 채 전쟁을 수행하면서 행정을 챙겼는데, 군사적 능력이 전무한 것은 아니었지만 애초에 정치장교로 시작했던 스탈린은 대규모 전쟁을 수행하기에는 주코프와 같은 고위 군장교들 보다는 실전에는 무리가 있었고, 작전의 대부분을 주코프에게 맡기고 본인은 행정을 맡아 전시의 행정을 처리해나갔는데, 이는 히틀러와 대비되는 점이었다. 즉흥적으로 작전을 입안하고 이에 관여한 히틀러와는 달리 스탈린은 철저한 분석과 현실적인 안목을 통해 주코프와 일선 야전사령관들의 업무에는 그다지 개입하진 않았다. 단, 불필요한 간섭을 줄인 것이지, 여러 장치를 통해 장교단을 철저히 휘어잡고 있었다.
공업화정책을 통해 중공업에 대한 투자를 늘렸고 전쟁지휘능력과 대숙청, 정치장교제도를 빼고본다면 스탈린이 관료로서의 능력이 제법 괜찮았음을 알 수 있는데, 혁명기부터 행정분야를 도맡아 처리한 점과 권력을 잡고 난 뒤에는 의욕적으로 중공업에 대한 투자를 한 점이 독소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일조했다고 보는것이 옳을 것이다.
포병덕후로도 유명하다. 그냥 좋아하는게 아니라 현대전에 대한 통찰이 탄탄한 근거가 되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하고 뭘 더 제공해야 하는지 파악하는 눈은 있었던 듯하다.현대전에서 총포탄을 아껴서는 안됩니다. 탄약을 아끼는 것은 범죄요. (중략) 만약 더 많은 포탄을 사용했다면 올해 2월에는 승리했을 것이오. 전쟁을 한달만 더 일찍 끝냈다면 비용을 얼마나 아낄 수 있었겠소? 10억 루블은 절약됐겠지. 그리고 더 많은 인명을 구할 수 있었을 거요. 포탄이 별거요? 만약 당신이 현대전에 대해 생각한다면 이런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포병이 모든 것을 결정하기 때문이오.
- 1940년 4월 회의 중 스탈린의 발언 #
이외에도 다포탑 전차를 철저히 배격하고 경전차와 기병전차, 나중에는 T-34를 비롯한 중형전차를 대거 생산하여 붉은 군대는 1940년대 일찍이부터 수천대의 전차를 갖추게 되었고, 보병용 자동화기의 채용을 밀어붙여서 그리고리 쿨리크가 중단해버린 PPD 기관단총의 생산을 재개하고 SVT-40 200만 정 생산계획을 수립하고 보병의 1/3을 SVT-40으로 무장시키거나, 실패했긴 하지만 탄띠로 급탄하는 DS-39 공랭식 경기관총을 개발해 채용하기도 했다. 기계화 이론가인 투하쳅스키, 야키르, 예고로프와 우보레비치등을 숙청하기는 했지만 붉은 군대의 기계화에도 신경을 써서 소련의 기술 때문에 성공하진 못했지만 GAZ-60 하프트랙 장갑차를 일찍이 채용하기도 했다. 항공기술에서야 I-180 전투기가 외면당하고 VI-100(후일 Pe-2가 되는) 중전투기가 급강하폭격기가 되는 등의 일이 있긴 했지만, 다른 많은 나라도 항공기술에서는 삽질을 많이 했으므로 스탈린만의 문제라 볼 순 없다.
4. 종교정책
- 이 챕터의 내용은 고려대 노어노문과 석영중 교수의 <러시아정교 -역사 신학 문학>을 참조함.
무시무시하게도 정교회 성인들이나 그리는 이콘에 나오기도 했다. 이 그림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모스크바에 거주하던 성녀 마트로나(Матрона)와 비밀리에 만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스탈린부터 정교회 신학교 출신이긴 하나,유럽에서 가난한집 수재들은 신학교가 학비가 면제되기에 진학하는일은 흔했다. 스탈린은 신학교 시절 일치감치 공산주의자로서 훗날 공산주의 이론서적도 여러권 펴낸다.
앞서 레닌시절 러시아 정교회는 박멸수준으로 탄압을 받았는데 우선 러시아 제국의 국교였던 정교회의 지위가 법적으로 박탈되며 교회의 재산도 몰수되었다. 총대주교 제도를 용인해주긴 했지만 신학교는 폐쇄되어야 했고, 적백내전당시 초법적으로 교회에 대한 약탈과 사제 살해등이 이어졌다. 특히나 1918년 키에프 수좌 대주교를 비롯하여 주교 교구사제 부제 수도자 평신도등 1만 2천명이 집단 살해되고 교회와 수도원은 약탈당했다. 내전이 끝난후 볼셰비키 지도부는 마르크스의 가르침에 충실하였는데, 레닌은 직접적인 교회에 폭력을 선호했고 트로츠키는 교회 내부를 분열시킨다음 장악하는 방법을 썼다. 1922년 신경제정책 이후에 교회에 침투한 볼셰비키 추종자들이 '''교회의 반혁명적 행태'''를 항의하며 소련정부 체제를 찬양하고, 교회를 장악하려 했는데 이를 반대한 총대주교는 체포 구금 당했다가 영국의 개입으로 석방되나 1925년에 사망했고 17년간 총대주교좌는 공석이었다. 물론 교회에 침투한 '진보'들이 교회 탄압과 성직자 처형과 추방을 긍정한것은 아니나 무신론을 표방한 공산주의에서 자유 평등 정의를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교회에서도 이런 가치를 추구하면 공산당에서도 교회를 용인할것이라는 순진한 발상이었다.
스탈린 시기인 1929년부터 1930년말까지는 이미 교회는 소비에트 연방 내에서 200여개내지 300여개를 제외한 모든곳이 폐쇄 당했고 4만명의사제와, 비슷한수의 수도자와 수녀, 수백만의 신도들이 추방내지 유배, 처형당했다. 어용화된 기존 교회를 대체하여 상당수의 신자들은 지하교회로 숨어들었다. 무엇보다 '''스탈린은 신학교 출신이라서 정교회의 본질과 러시아 민중의 전통적 신앙심을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런만큼 그의 교회 탄압은 전례없이 잔인하고 가혹했다.''' 기존의 공산당 종교 정책에서 정치 깡패 노릇을 했던 무신론자 연맹을 1929년 전투적 무신론자 연맹으로 개창하여 인민을 위해 봉사한다는 명목으로 교회를 부수고 이콘을 불태우며 교인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앞에 있는 스탈린 이콘은 러시아 정교회에서 생존을 위해 굴욕적으로 제작한것으로 진지하게 스탈린을 성인으로 추존한 건 아니다.. 공산당에선 실제로 정교회에서 거의 유일한 자체수입인 양초 판매 수익을 끊기 위해 초 불매 운동을 벌이고, 이콘과 성물 십자가 때려부수기를 멈추지 않았으며 종종 교회에 방화를 저질렀다.
국가적 차원의 지원을 받은 전투적 무신론자 협회 운동은 '''"무신론을 통해서 공산주의로, 종교와의 전쟁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 같은 호전적인 구호로 미화 되었다. 공산당 중앙위원회 산하의 무신론자 동맹은 러시아를 무종교 국가에서 반종교 국가로 만들라는 지령을 받아 모스크바를 무신론의 수도로 만들자는 계획까지 세웠다.
한때 러시아 정교회에서 러시아 제국의 국가적 성원을 받아 만드려는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은 스탈린의 계획에 따라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했고 부지는 '소비에트 인민대궁전'으로 마개조할 예정이었으나 2차대전 때 모스크바 방어를 위해 철골을 뜯어가자 미완성 상태로 방치된다.
2차 세계대전은 러시아 정교회에 숨돌릴 틈을 주었다. '''다만 스탈린은 종교 뿐만 아니라 러시아 문화 전반에 걸쳐 완화책을 쓴것이지 특별히 종교정책을 유화적으로 한게 아니다.''' 러시아 정교회가 탄압이 완화된건 애국심을 고취시키려면 그동안 러시아 역사와 밀접한 정교회를 끌어들어야 하는 실용적 목적 때문이었다. 1943년 교회의 지지를 공식 요청했는데 이는 유물론자들이 2차대전 승리를 위해 믿음의 힘을 믿을리는 없고 그해 12월 테헤란에서 루즈벨트와 처칠과 만나기로 약정이 되었는데 영국 성공회 주교단이 소련교회를 방문하기로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부랴부랴 스탈린은 러시아 정교회의 숙원이던 17년간 공석이던 총대주교 선출을 승인하고 사제 석방, 교회 신학교 복구도 승인했다. 이과정에서 총대주교는 스탈린에게 감사를 표시했고 정교회는 소련과의 굴욕적인 밀월관계를 시작할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스탈린이 교회 탄압을 그만둔것은 아니었다. 이전의 무신론자 그룹과 유사한 즈나니에(Znanie) 협회를 창설했는데 이번엔 과학자와 교수집단들을 이용하여 종교를 무지몽매로 몰아가는 전략이었다. 러시아 정교회 수뇌부는 전쟁 직후 그리구 전후 잠시 동안은 외국 귀빈이나 단체가 방문시 스탈린 동무와 함께 접대하는 역할을 맡았다. 1957년 모스크바에서 세계 청소년 축제가 개최되었는데 공산당에 포섭된 정교회의 어용 사제 평신도들에게 환대받은 멕시코 기자단들은 "소비에트 정부와 국민들 덕분에 종교는 이 나라에서 존중받고 있다"고 술회 할 정도였다. 마치 1930년대 서구 좌파에서 소련을 지구상 최초의 남녀 평등 실현, 노동자의 천국으로 묘사한 선전에 낚인 것과 같다.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 시절 다시 정교회는 스탈린 격하운동이 일어나면서 다시 탄압당한다. 반정부 성향 사제는 암살되거나 쥐도새도 모르게 체포되어 사라지고, 수도자들은 정신병자로 취급되어 강제수감 되었으며, 정교회 신자 개인은 직장에서 진급과 급여에서 차별대우를 받았다. 이 같은 탄압은 브레즈네프 시절까지 계속되었다. 70년대 중반에 들어서야 소련 공산당은 그동안의 여러 시도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 박멸 정책의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기존의 반 종교 정책을 전환하진 않았으나 소련 내부에서도 러시아 정교회를 이용하여 슬라브 민족주의와 러시아 역사 문화 부흥이라는 목적으로 교회 탄압의 수위를 낮추려는 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는 큰까마귀 모지스에 대한 돼지들의 대접 변화로 패러디되었다.
스탈린과 소련 시대 반(反)종교, 반 기독교 정책에 대해선 다음도 참조 바람.
5. 결론
5.1. 긍정적 입장과 평가
2008년 러시아 국영 TV 채널과 러시아 역사 연구소가 진행한 '위대한 러시아인'을 선발하는 프로젝트에서 스탈린은 조지아인임에도 불구하고 '''3위'''에 올랐으며, 특히 소련의 정치가들 가운데서는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40][41] . 2006년에 진행된 또다른 설문조사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47% 가량이 스탈린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반면 부정적인 답변은 29%에 불과했다.[42] 2007년에 러시아의 10대 청소년 약 1,800명을 대상으로 진행된 다른 투표에서도 절반 이상이 스탈린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며, 46%는 스탈린이 '잔혹한 독재자'라는 견해를 부정했다.[43]'''스탈린의 진정한 핵심적 업적은 나무 쟁기를 가지고 일하던 러시아를 원자로를 완비한 나라로 바꿔놓았다는 것이다.'''
-아이작 도이처[39]
현재 러시아의 지도자인 블라디미르 푸틴의 경우, 소련의 지도자들에 대한 직접적인 평가는 꺼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의 시대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는 견해를 종종 표명하고는 했다. 일례로, 푸틴은 1937년의 대숙청을 '공포의 역사'라고 표현하면서도 "타국이 우리들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견지했으며, 소련과의 단절을 선언한 일부 러시아 정치가들을 비판하고 소련과 러시아의 연속성을 주장했다. 또한, 푸틴 집권기에 개정된 러시아 교과서에는 스탈린의 대숙청이 "급격한 현대화 과정에서 봉착한 난제들을 해결할 능력을 가진 새로운 계층의 부상을 유도했으며, 뛰어난 추진력과 지도부에 충성하는 유능한 인재들을 선발하기 위한 필요악이었다"고 서술하고 있다.[44]
이러한 인식은 주로 소련 붕괴 이후의 사회, 경제적으로 엄청난 혼란이 불어닥쳤고, 러시아인들이 그에 대해 강력한 리더십을 갈망했기 때문이라고 평가된다. 소련 붕괴 이후 자본주의로의 체제 전환이 러시아인들을 부유하게 하기는 커녕 오히려 대다수를 빈곤하게 만들고 양극화를 극심하게 진행시켰으며 러시아의 국력까지 크게 쪼그라 들었기 때문이다. 2000년대 들어와서는 나라가 그나마 정상적인 꼴은 갖추게 되었지만 빈부격차 문제는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으며, 부패한 지배층이 부를 거머쥐고 있고, 민주주의도 형식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들에게 이오시프 스탈린의 이름은 독재와 잔혹함보다는 승리와 영광을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다. 소련 시절을 경험한 노년 및 중장년층은 물론이고 청년들에게까지 스탈린은 대조국전쟁에서 나치 독일을 상대로 승리를 일구어낸 강력한 지도자이자, 미국과 함께 세계를 양분하던 시절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상징하는 존재인 것이다.[45] 전쟁 승리와 경제 발전, 어느 하나만 달성해도 추앙받기 마련인데, 이 둘을 세계 규모로 달성해버렸으니 업적만 놓고 봤을 때는 그야말로 20세기에 가장 성공한 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스탈린은 공산주의를 변질시키거나 수많은 사람을 죽였지만, 그런 실정과 악행을 넘어, 끝내 조국을 초강대국으로 만들고 공산주의를 전세계로 확장했다'''"는 것이 러시아의 주된 평가이다.
5.2. 부정적 입장과 평가
스탈린은 지도와 사업에서의 집단성을 전혀 용납하지 않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변덕과 독단을 기준으로 자기 방침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에 대해 무지막지한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는 설득과 해명, 다른 사람들과의 세심한 작업 등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방침을 강요하고 자신의 견해에 무조건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행동했습니다. 이에 저항하거나 자신의 관점을, 자신이 옳음을 주장하려는 사람은 지도 집단에서 배제되고 도덕적 그리고 육체적 파멸이 뒤따르는 운명에 처해졌습니다.
스탈린은 '인민의 적'이라는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이 말은 논쟁 상대인 개인 또는 사람들의 사상적 잘못을 어떻게든 입증해야 할 필요성에서 단번에 벗어나게 해주었습니다. 이 말은 무언가 스탈린과 견해가 다르거나 단지 적대적 의도를 가졌다고 의심되는 모든 사람을, 그리고 단순히 중상모략을 받은 모든 사람을 혁명적 준법성의 모든 규범을 위반하며서 매우 잔혹하게 탄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했습니다. 사실 이런 '인민의 적' 개념은 현실적으로 중요한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해서 어떤 사상 투쟁을 전개하거나 자기 견해를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이미 빼앗고 없애버렸습니다.
그 결과 혁명적 준법성은 경악스러울 정도로 파괴되었으며, 과거에 당의 노선을 지지했던 그 어떤 잘못도 전혀 저지르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했습니다.
니키타 흐루쇼프의 연설문, <개인숭배와 그 결과들에 대하여>
'''스탈린이 악한이라는 표지는 그가 마음대로 도덕을 전복시켰다는 점에 있다. 선이 악이 되었고, 악이 선으로 둔갑했다. 그는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이 모든 진보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 사람이였다'''.
스탈린에 부정적인 러시아 사람들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스탈린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는 좋지 않다. 당장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를 거론할 때 히틀러나 마오쩌둥과 더불어 반드시 거론되는 것이 스탈린이다. 여러 창작물이나 매체에서는 악랄한 독재자 이미지의 전형으로 히틀러와 더불어 스탈린이 제시된다. 그 정도로 스탈린의 악명과 그가 역사에 남긴 상흔은 엄청나다. 심지어 스탈린 치하에서 경력을 쌓아 소련 최고지도자가 된 니키타 흐루쇼프나 소련의 마지막 서기장이며 국가 대개혁을 주도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러시아 연방의 초대 대통령 옐친은 스탈린을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아버지는 더이상 없지만, 아버지의 그늘은 아직도 우리 곁에 드리워져 우리에게 자주 명령하며, 우리는 아직도 자주 그의 명령을 따르고 있다.'''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 '''스탈린의 딸.''' (<친구에게 보내는 20통의 편지> 중, 1967년)
러시아의 전임 대통령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는, 2009년 크렘린의 공식 비디오 블로그에서 스탈린을 "재평가"하자는 모든 움직임들을 비판하며, 스탈린의 대숙청은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일침을 가했다.[47] 뿐만 아니라 메드베데프는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에 소련을 "암울했던 시기"로 묘사하며, 강한 국가보다는 경제적 자유와 생활수준의 향상을 강조하기도 했었다.[48]
이외에도 대다수의 러시아 진보정치가들이나 인권운동가들 역시 스탈린에 대해 비판적이다. 대숙청 기간 동안 스탈린이 저지른 엄청난 학살은 당대에도 지속적으로 서구사회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미 흐루쇼프 집권기에 소련 내부로부터도 자성의 목소리가 일어서 한 동안 스탈린이 묻혀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각은 현대의 일부 인권운동가들에게도 이어져서,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 인명경시풍조 및 정치적 부패와 결부되어 '''조지아의 인간 백정'''이라는 멸칭까지 나올 정도로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다. 또한 스탈린의 딸인 스베틀라나는 미국에서 살면서 '친구에게 보내는 스무 통의 편지' 등 회고록을 네 권 썼는데, 스베틀라나는 책에서 "세상에는 자본주의자와 마르크스주의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믿게 됐다"고 썼으며, 스베틀라나는 스탈린을 "매우 단순하고 무례하며 잔인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2009년, 스탈린의 손자 예브게니 주가슈빌리는 대숙청을 두고 스탈린을 "피에 굶주린 학살자"로 묘사한 러시아 언론 노바야 가제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으나[49] , 패소하였다. 노바야 가제타는 스탈린의 손자로부터 피소됐다는 사실을 공표한 뒤 사설을 통해 "진실은 가끔 위험한 것"이라며 "무시한다고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범죄를 숨기는 것은 공범이다. '''스탈린은 2차대전 초기 히틀러가 저지른 범죄의 공범자였다.'''"고 했다. [50]
사실 흐루쇼프 이후의 소련에서 스탈린의 이름은 사실상 말해서는 안 될 자 취급을 받았고, 흐루쇼프가 실각한 이후로도 당차원에서 스탈린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경우는 줄어들었지만 그렇다고 대조국전쟁이나 경제발전에 대한 업적들을 제외하면 결코 긍정적으로 평가되지는 않았다. 흐루쇼프는 물론이요 브레즈네프 시절 수상을 지닌 알렉세이 코시긴 역시 이 시절을 암울한 시기로 묘사했으며 안드로포프 역시 레닌과 스탈린을 비교하면서 스탈린을 비판했다. 이렇듯 '''소련의 국가적인 입장조차도 스탈린을 공산주의를 변질시킨 독재자이자 학살자로 평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의 국가적 쇠퇴와 천민자본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민중을 탄압했던 스탈린이 되려 공산주의의 아이콘이자 조국의 수호자로 찬양받게 되었으니 이 또한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흐루쇼프가 실각한 뒤로 집권한 브레즈네프, 코시긴, 포드고로니, 안드로포프는 겉으로는 전임에 비해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스탈린을 평가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그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지만 '''이제는 두 번 다시 등장해서는 안되는 인물로 평가했다'''. 흐루쇼프가 독선적이고 도전적인 통치를 일삼다가 실각한 것도, 무능하고 우유부단하지만 온화한 성격의 브레즈네프가 차기 지도자로 집권한 것도 스탈린 시대의 피비린내나는 참혹한 정치를 공산당 스스로가 어떻게든 막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수슬로프나 그로미코등을 비롯한 온건파들과 우스티노프, 안드로포프 같은 강경파들의 입장이 좀 다르긴 했지만 공산당 내에서 주도권을 잡은 것은 브레즈네프와 체르넨코 같은 관료계층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전쟁 수행과 공업화에서만큼은 스탈린의 업적을 인정했지만, 결코 그를 이상적인 지도자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5.3. 현대 러시아의 평가
스탈린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입장은 크게 '''유사 이래 최대의 침략을 격퇴해 승리하고 조국을 초강대국으로 만든 위대한 지도자'''와 '''수많은 인민을 숙청한 잔혹한 독재자'''로 나뉜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갑작스런 개방으로 인한 혼란과 정권의 실책이 대두되고 이 탓에 역으로 소련의 향수가 강화되어서 전반적으로 스탈린이 남긴 업적에 초점을 맞춘 긍정적인 평가가 우세하다.[51] 그가 살아돌아와 숙청할 일은 없지만, 그가 이끈 국가적 승리를 곱씹어보는 건 여전히 유쾌한 추억팔이이기 때문이다.[52]
최근 들어 상당히 심해진 경제난으로 인해서 생긴 반푸틴주의와 신 공산주의 활동의 일환으로 이오시프 스탈린의 초상화를 들고 시위를 하는 사람들을 간간히 볼 수 있다.
5.4. 구 소련 가맹국들의 평가
독립국가연합(CIS) 소속의 국가들은 민족 억압책을 편 것은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스탈린이 시행한 소수민족 강제이주 정책으로 인한 민족 구성원의 변동으로 인해서 소련 해체뒤에 많은 문제가 발생했던것도 있기 때문에[53] 이에 대해서도 박하게 생각하지만, 나치 독일에 맞서 소련을 지켜낸 것만큼은 높이 평가한다.[54]
다만, 우크라이나에서는 우크라이나 대기근 때문에 아직까지도 증오하는 사람이 많다. 설문조사에서도 스탈린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 우세하며, 2010년에는 우크라이나 법원이 대기근과 대량 학살의 책임을 물어 스탈린을 기소한 적도 있었다.[55] 뿐만 아니라 2010년 봄에 스탈린 기념 동상이 건립되자, 당해 12월 말에 '''머리가 잘리더니''' 급기야는 '''폭발로 파괴'''되었다고 하니...민족감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셈이다.[56] 우크라이나에서는 스탈린이 히틀러 보다 더 악인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물론 아르메니아도 스탈린에게 심하게 탄압받아서[57] 한 설문조사에서는, 응답자의 38%가 '스탈린과 같은 리더가 필요하다'고 답한 반면, 72% 가량은 '스탈린과 같은 지도자가 이끄는 국가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고 답했다.[58]
스탈린의 고향인 조지아에서는 평가가 갈린다. 조지아의 한 역사 교과서는 스탈린을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즘을 종식시키고 소련을 초강대국으로 만든 인물'로 기술하고 있다.[59] 2008년 남오세티야 전쟁에서도 조지아에 진주한 러시아군은 많은 전리품을 챙겼으나, 스탈린 기념관과 동상은 전혀 손대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포로로 잡힌 조지아군 병사가 자신의 '''스탈린 문신(!)'''을 보여주자 러시아 병사는 그를 바로 석방했을 뿐만 아니라 보드카까지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조지아 입장에서 스탈린은 소련 시절 '''조지아 탄압에 누구보다도 앞장선 인물'''이기에, 일단 조지아 정부는 '''공식적으로''' 스탈린에게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며, 특히 2008년 남오세티아 전쟁 이후 러시아에 대한 반감이 급증하면서, 고리시 시청 앞에 있던 그의 동상을 2010년 철거했다.출처
5.5. 대한민국과 북한에서의 평가
당연히 대한민국에서는 카를 마르크스, 김일성, 마오쩌둥, 블라디미르 레닌 등의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빨갱이들의 두목''', '''소련의 독재자'''라는 평가가 있었으며 특히 1950년 6.25 전쟁 때 소련이 북한에 밀접적으로 군사지원을 하였고 남침을 지지하는 입장을 보이면서 전쟁 이후에는 김일성, 마오쩌둥과 함께 6.25 전쟁의 원흉[60][61] 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한국군의 주적론에 나오는 6.25 전쟁 주역 중에도 당연히 김일성, 마오쩌둥과 함께 포함되었다.
조희연 교수는 박정희의 체제를 개발동원체제라 평했는데, 비스마르크 정권과 스탈린 체제가 박정희 정부와 같은 성격의 체제라고 평가했다.
남한 운동권에서 스탈린에 대한 논의는 이미 한물간 식은 떡밥일 뿐이다. 운동권 자체도 한물간 마당에 스탈린 타령할만큼 한가하지 못하다. 또한 스탈린의 공과를 논할만한 역량을 갖춘 운동권이 소수일 정도로 운동판이 위축되기도 하였고 그런 상황에서 스탈린에 대한 논의를 굳이 하는 운동권은 운동권 내에서도 현실과 괴리된 고담준론을 좋아하는 좌파오타쿠로 취급되는 것이 현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스탈린에 대해서 언급하자면 스탈린에 대한 공과에 대해서 긍정하건 부정하건 간에 대부분의 운동 단위들은 스탈린에 대해서 비판적인 접근을 취하고 있다. 그 이유로는 오늘날 소련이 붕괴해버린 점에서 소련의 주요지도자인 스탈린 역시 비판의 대상에 포함될 수 밖에 없다는 것과 스탈린 시기에 일어난 대규모의 소련 인민의 죽음과 숙청, 경직되어 버린 사회분위기 등의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이것의 불가피성의 여부를 떠나서 스탈린의 책임이 아무리 긍정적으로 평가하더라도 완전히 면책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스탈린시기 소련의 위기의 극복과 소련 생산력의 획기적 전환에 공7과3으로 소련을 반석에 세우는 데 공이 있었다고 평가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과3의 부정적 영향이 소련붕괴의 원흉 중 하나로 지목되는 것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마르크스, 엥겔스까지는 대부분의 운동권 단위들이 공통적으로 따르지만 심지어 레닌을 포함해서 그 후의 공산주의 사상가나 지도자들에 대해서는 각각의 운동단위들이 다른 스텐스를 가지고 있고 이런 스텐스 차이에 스탈린에 대한 평가 역시 포함되어 있다. 즉 단위마다 그평가가 다르다는 것이다.
스탈린주의를 표방하는 단위는 전국노동자정치협회(노정협)와 노동사회과학연구소(노사과연)가 대표적이다. 그렇지 않은 단위들은 아예 관심없거나 레닌에서 딱 끊거나, 아니면 트로츠키를 레닌의 후계자로 간주하고 트로츠키주의 노선을 따른다. 국내에서 나름 규모가 있는 사회주의 단체인 노동자 연대는 이오시프 스탈린을 반혁명의 화신 혹은 제국주의자로 간주한다.
북한에서는 일본제국으로부터 해방을 가져다준 해방자이자 김일성의 남침전쟁을 도와주었던 영웅으로 손꼽혔으며 김일성을 북한 주석자리에 앉히고 지금의 북한을 세우게 하였던 간접적 인물(...)로서 남한과는 달리 호의적이고 영웅적인 평가를 받고있다. 40~50년대의 북한에선 집집마다 스탈린의 사진을 걸어놓는것이 흔했을 정도, 그러나 스탈린 사후에 김일성의 1인 우상화가 진행되면서 스탈린의 사진을 걸어놓거나 스탈린의 저서를 읽는 것은 금지되었다. 근데 또 스탈린 사후~지금까지도 스탈린의 업적(경제 개발, 중공업 육성, 독소전쟁에서의 승리 등)만큼은 아주 높게 평가하고 있다니 이래저래 아이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