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노동조합총연맹
1. 개요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노동조합 연맹이다. 흔히 줄여서 '''한국노총'''이라고 부르며, 전국 16개 지역본부와 53개 지역지부를 두고 있다.
우리나라의 웬만한 대기업 노조 상당수는 여기에 소속되어 있으며, 산하 언론으로 노동과희망이 있다.
이 연맹의 본부격인 노총회관은 1948년 대한노총 시절부터 서울 소공동에 있었으나 1974년에 잠시 사직동 체신노조회관을 잠시 쓰다가 1976년, 여의도에 새 회관 건물이 세워지자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2002년에 새 노총회관 건설로 인해 마포로 옮겼다가 2005년 완공 이후 여의도로 복귀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한국노총 가맹노조 명칭은 대체로 '@@(업종별)노동조합연맹 ##(기업명)노동조합'으로 칭한다.
2. 역사
한국노총의 역사는 아래와 같이 참으로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 상대적으로 강경한 스탠스를 띠며 정부[2] 와 관계가 상당히 험악한 민주노총과 달리 한국노총은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하는 등 정부에 다소 협조적이며, 규모에 비해 정치적 투쟁력은 적다. 이러한 온건한 노선은 현실주의 노선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어용노조라는 비판을 듣기도 한다.
한국노총이 온건한 정치 노선을 띠게 된 것에는 탄생 배경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해방 직후 좌익 계열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노동 운동을 주도했고, 이에 위기를 느낀 우익 계열 인사들이 대한독립촉성협의회의 산하 단체로 대한독립촉성전국노동총동맹을 조직하게 된다. 이때 깊이 관여한 인물들이 바로 초대 사회부 장관이었던 전진한이다. 대한독촉노동총연맹은 1948년 8월 임시대의원의회 때부터 대한노동총연맹(이하 대한노총)으로 바꾸었으며 초대 위원장이 전진한이었다. 대한노총은 초기에는 한독당계, 이승만계, 한민당계 등이 공존했지만, 얼마 안 가 이승만의 노선을 벗어나지 않는 관변 단체가 되었다. 대한노총 간부로 그 유명한 김두한이 있었으니 말 다했다.
1953년에는 노동조합법 시행으로 여러 노동조합이 결성/해체되자 대한노총에도 재편성의 필요성이 시급해졌다. 이로써 1954년 경전노조 위원장인 정대천과 철도노조 위원장 김주홍을 중심으로 '대한노동조합연합회'를 만들려다 대한노총 최고위원 이진수와 갈등이 벌어지는 등 파벌 싸움이 일어나 1959년에는 김말룡 등 김기옥 위원장 반대파가 분할되어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이하 전국노련)'이 만들어졌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인한 민주화 바람과 더불어 5월 9일에는 어용파 간부들이 총사퇴하였고, 11월 25일부터 대한노총과 전국노협이 통합해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이하 한국노련)으로 새로 출범하였으나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강제 해체된 뒤 박정희 군정의 산별노조 정책[3] 에 따라 현재의 명칭으로 결성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민주화되기 전까지 한국노총은 어용노조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1997년까지 노동조합법상 복수노조 설립 금지에 관한 조항이 있어서, 복수 노조는 물론 복수 전국단위 노동조합 연맹도 허용되지 않았다. 이는 국가적 효율을 위해 노동조합을 통합해서 하나의 기구만을 두도록 한다는 취지 때문이었다.[4] 정부 통제하에서 노동 운동을 하다 보니, 노조 내부의 민주화 요구에도 별다른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노동운동 자체에도 비전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5] 그래서 일부 노동운동가들은 어떻게든 중앙위원에 들어가서 노조를 바꿔보려는 전술을 쓰기도 했고, 아예 대기업 노조 하나가 통째로 탈퇴하는 일도 있었으며 동일방직 노조처럼 결성 과정에서 도시산업선교회가 지원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건들로 생겨난게 민주노조 건설운동이다. 1970~80년대에는 각 사업장별 민주노조 건설운동이 일어났고, 80년대에는 기업별 노조운동이 일어났다.
1979년 10.26 사태 이후 1980년 사북사태 등으로 노동운동은 다시 활발해졌으나, 5.18 민주화운동을 총칼로 짓밟은 전두환 정권은 '노동계 정화조치'를 통하여 민주노조 인사들을 대거 숙청하였고, 청계피복, 원풍모방, 콘트롤데이타, 남화전자, 서통 등의 민주노조들을 강제 해산시켰다. 1980년 12월 31일부터는 노동조합법과 노동쟁의조정법이 개정되어 산별노조가 기업별 노조로 바뀌고 노동쟁의 제3자 개입 금지 규정이 신설되었다.
1983년 12월 유화조치 이후 1984년을 기점으로 대우어패럴, 효성물산, 가리봉전자, 로옴코리아 등지에서 민주노조가 다시 생겨나기 시작했고, 1985년 4월에는 대우자동차 파업이, 6월에는 구로동맹파업이라는 전대미문의 연대파업이 일어났다. 물론, 이는 한국노총과는 무관하게 개별 작업장에서 조직된 노조들에 의해 일어난 일이다. 이로 인해 서울노동운동연합(약칭 서노련)과 인천지역노동자연맹(인노련)이 생겨났으며, 19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민주노조 설립이 급격히 늘어나 1987~1988년 마창노련과 서노협 등 각 지역노조 협의회와 업종별 노조연합들, 1990년 전노협 및 업종회의, 대기업 노조연합, 1995년 민주노총까지 이어진다.[6] 하지만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총 내부에서 개혁 요구가 높아지면서, 어용 노조 성향은 많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타협주의와 협동주의적 성격이 만연해 있다.
민주노총이 주로 진보정당과 연대한다면, 한국노총은 양대 정당과 연대하였다. 김대중의 새천년민주당과 연합하여 비례대표 후보를 내고 당선자를 얻었다.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과 대립, 2002년 지방선거에서 한국사회민주당을 만들었으나 망했고 2004년 총선 당시에는 녹색사민당으로 고쳐 독자적인 정치 세력화를 시도했으나 소수점대 득표율로 참담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2007년 대통령 선거 당시에는 이명박 후보를 지지했다. 근데 이명박 정부에서 내세웠던 경제 기조가 신자유주의였고 거기에 비정규직 고용기간연장(실패로 돌아갔지만)을 추진했었기 때문에 진보 세력으로부터는 어용노조라는 온갖 비난을 받았다. 뭐, 나중에 와서 이 문제 때문에 관계가 끊어지긴 했지만. 하지만 한국노총은 이명박 정부 초창기부터 노동과 복지 정책에 대한 견해 차이로 정부와 마찰을 빚어왔으며, 결국 지지를 철회하고 민주통합당과 협력관계를 구축했다.
2012년 대통령 선거 당시에는 지역 본부별로 지지한 후보가 달랐다.
2013년 12월 23일 경찰의 민주노총 본부 압수수색에 항의하는 뜻에서 정부의 사죄가 있을 때까지 노사정 위원회에 출석하지 않기로 결의한 것을 시작으로, 기사
2014년 12월 3일, 국내 제3노총인 국민노총[7] 과 조직 통합을 선언했으며, 민주노총과 규모 격차가 더 커졌다. 기사
2015년 9월 노동개혁과 관련된 내용으로 노사정위원회가 파행을 겪었다. 이를 잘 수습하여 통과 되는 듯하였으나 한국노총 중집위에서는 분신을 시도하는 등 파행이 있었다. 한국노총 전체로 볼 때, 의견이 통합되지 않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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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노사정 대타위 파탄을 선언, 박근혜정부의 노동개혁은 노동자들을 죽이는 짓이라면서 올해 총선 새누리당 낙선운동을 하겠다고 한다. # 이에 극우단체에서는 한국노총도 민주노총 2중대란 반응을 보였다. 사실 제20대 총선에서 말과는 다르게 새누리당에 비례대표로 한국노총 인사들이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에서 전태일의 여동생 더불어민주당 전순옥 비례대표 의원은 한국노총의 1960~70년대 흑역사와 관련된 이야기도 꺼냈다.''' 과거 한국노총이 중앙정보부의 통제하에 있었던 이야기, 한국노총이 정부의 어용 노동단체이자 노동자들의 저항을 분쇄하는 관리 단체, 지도부의 부패에 대한 관용, 그리고 그러한 것을 통제하던 중앙정보부의 행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당시 한국노총은 올라오는 이야기는 막고, 위에서 내려오는 정부 정책을 지부 노조들에게 전달하는 역할만 했다고 깠다. 또한, 박정희 정권 시절 노동조합 대표의 선택권도 제한되었고, 그렇게 뽑힌 노동조합 대표는 안기부에 가서 사상교육을 받은 후 보상을 받았음도 밝히고 있다.
2017년 5월 조기대선에서 지지후보를 결정하는 선거를 통해 46%의 득표율을 얻은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는데, 정작 20대 총선에서는 지도부 출신 인물들이 새누리당에 비례대표 신청을 하여 앞 순번을 배정받아 무난히 당선되고 현재까지도 자유한국당 국회의원으로 있는 모습을 보면 상당히 괴리감이 크다. 이는 조합원들의 투표를 통해 결정한 결과라서 그런 것인데, 민주노총이 산하 기관들과 조합원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지도부가 일방적으로 정의당 심상정 후보와 민중연합당 김선동 후보에 대한 공동 지지 의사를 밝힌 것과 대비된다. 민주노총 중집, 심상정 김선동 지지후보로 결정 고 볼 수도 있으나, 상대적으로 민주노총은 앞서 서술했다시피, 기득권으로부터 기울어진 처지이고, 촛불혁명 의 주체를 자처했기 때문에, 민주노총의 명확한 후보 지지는 (애초에 두 명을 선택한 것도 그닥 선명하다고 보기보다는, 피해야 할 대상을 집었다고 봐야겠지만) 특수한 상황 속에서 대표적인 집단의 목소리를 선명하게 천명하기 위한 선택이었을 뿐이고, 따라서 이를 비민주적 절차라고 판단하기에는 성급하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과거 한국사회민주당을 창당하여 독자노선을 택했을 때에도, 민주노동당을 시작으로 통합진보당을 거쳐 진보정당을 지지하며 사회주의•민주사회주의•공산주의•생디칼리즘 등 온갖 다양한 노선을 택하는 경향을 보여주는 민주노총과는 달리 형식적으로라도 꾸준히 사회민주주의, 제3의 길을 주요 지향점으로 삼았다는 점이 특이하다.
2020년 3월 10일 21대 총선에서 민주당을 지지하기로 결정하였다.
3. 사건사고/논란
3.1. 2015~2016년의 반정부 투쟁
당초 정부에 협조적이었던 한국노총의 성향은 박근혜정부 출범 이후 서서히 바뀌기 시작하더니, 2015~2016년에 이르러서는 '''새누리당 심판''', '''노동개악 반대''' 등의 구호를 내세우며 정부의 노동개혁 정책에 극렬히 반발하고 민주노총과 공동대응하는 등 투쟁적 성격을 보였다. 특히 2015년에 한국노총이 총파업을 결의한 것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에 처음 있던 일이다.
하지만 2016년 20대 총선을 앞두고 전·현직 간부 7명이 무더기로 정부 여당인 새누리당에 '''비례대표 공천''' 신청#을 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3.2. 포항MBC의 노동 관련 프로 취재 방해
2020년 12월 10일 포항제철소에서 하청업체 직원이 사망한 것#에 대한 노동부가 포항 MBC 취재진[8] 과 유가족과 국회의원 노웅래가 함께 조사를 하려고 왔는데, 이 단체 금속노련 산하 '''포스코노동조합 회원 10명이(!)'''이 취재진의 동행 취재를 막아서 문제가 되었다.#[9] 보통 산재 관련 취재는 노조측이 아니라 사용자측(여기선 포스코측)에서 막는다는 걸 고려하면 무척 이례적인 상황.
참고로 여기에 한국노총 포스코노조연합이 성명문을 냈다.
이후 12월 16일, 포항 MBC는 포스코노조에 대한 성명문을 발표하였다.
정의당 소속 전 경북도당 위원장 박창호가 해당 노동조합의 성명서를 비판하였다. #
정의당의 김종철 대표도 포스코에 방문하였고 이번에는 포스코의 경영진들이 포항 MBC의 취재를 막았다고 한다.
함깨 취재에 동참했던 노웅래 더불어민주당 소속 국회의원도 노조원을 비판하며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이래서 제정해야 한다는 말을 하였다. 더불어민주당 포항 남,울릉 지역위원회도 포스코 노동조합의 성명서를 비판하였다. #
4. 역대 위원장
4.1. 통합 전
4.1.1. 대한노총
1952 ~ 1958년 10월 이전까지는 집단지도체제였다.
- 홍윤옥 (1946. 3 ~ 5/9 ~ 10)
- 조시원 (1946. 5 ~ 9)
- 전진한(조선방직대책위원회파(이갑성계)) (1946.10 ~ 1952.11)
- 이진수(정화위원회파) (1952.5 ~ 1954)
- 조광섭, 주종필, 조용기, 박중정(정화위원회파) (1952.5 ~ 11)
- 송원도, 조경규 (1952.11 ~ 1954)
- 정대천 (1954~1957)
- 김주홍 (1954~1958)
- 김두한[10] (1954~1955)
- 이준수 (1955~1957.10)
- 하광춘 (1957.10 ~ 1958)
- 성주갑 (1957.10 ~ 12/1960.5 ~ 11)
- 김기옥 (1957.12 ~ 1960.5)
- 이주기, 김용학 (1957.12 ~ 1958)
4.1.2. 전국노협
- 김말룡 (1959~1960.11)
4.2. 통합 뒤
4.2.1. 한국노련
- 김말룡 (1960.11 ~ 1961.5)
4.2.2. 한국노총
- 이규철 (1961~1964)
- 김광수 (1964~1965)
- 이춘희 (1965~1967)
- 이찬혁 (1967~1970)
- 최용수 (1970~1971[11] )
- 배상호 (1971~1976)
- 정동호 (1976~1979)
- 김영태 (1979~1980[12] )
- 정한주 (1980~1982[13] )
- 김규벽 (1982~1984)
- 김동인 (1984~1988[14] )
- 이시우 위원장대행 (1988)
- 박종근 (1988~1995)
- 송수일 (1995~1996)
- 박인상 (1996~2000)
- 이남순 (2000~2004)
- 이용득 (2004~2008/2011~2012)
- 장석춘 (2008~2011)
- 문진국 (2012~2014)
- 김동만 (2014~2017)
- 김주영 (2017~2020)
- 김동명 (2020~)
5. 한국노총가
5.1. 구 버전
작사는 김광섭, 작곡은 이흥렬이 맡았다.
5.2. 신 버전
작사/작곡은 김호철이 맡았으며 노래는 노동가요의 대부 박준이 불렀다. 2006년 로고 변경과 동시에 개정.
6. 가맹 노동조합연맹
6.1. 현재 가맹 단체
- 전국섬유·유통노동조합연맹: 구 전국섬유노동조합연맹 #
- 전국고무산업노동조합연맹
- 전국금속노동조합연맹 #
- 전국화학노동조합연맹 #
- 전국IT사무서비스노동조합연맹 #
- 전국공공산업노동조합연맹 #
- 전국광산노동조합연맹
- 전국해상선원노동조합연맹: 구 해상노동연맹-전국해원조합-전국해원노동조합-전국해원노동조합연맹 #
- 전국항운노동조합연맹
-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 구 전국금융노동조합-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연맹 #
- 전국자동차노동조합연맹 #
- 전국택시노동조합연맹 #
- 전국담배인삼노동조합: 구 전국전매청노동조합연합회-전국전매노동조합 #
- 전국관광·서비스노동조합연맹 #
- 전국외국기관노동조합연맹
- 전국우정노동조합: 구 전국체신노동조합 #
- 한국철도·사회산업노동조합 #
- 전국의료산업노동조합연맹 #
- 전국연합노동조합연맹 #
- 전국공공노동조합연맹 #
- 전국식품산업노동조합연맹 #
- 한국공무원노동조합연맹 #
- 전국사립대학교노동조합연맹 #
- 전국건설산업노동조합 #
- 전국출판노동조합연맹
- 전국전력노동조합 #
6.2. 과거 가맹 단체
- 전국철도노동조합: 2002년부터 민주노총으로 상급단체 변경.
- 한국가스공사 노동조합: 이하 동일함.
- 한국교원노동조합: 과거 이용득 집행부 시절 한국노총으로부터 제명됨.
- 전국예능인노동조합연맹: 과거 이용득 집행부 시절 한국노총으로부터 제명됨.
7. 공익재단
- 한국노총장학문화재단
8. 둘러보기
9. 관련 문서
[1] 현재의 로고는 2006년부터 바뀐 것으로, 그 이전에는 톱니바퀴 가운데에 태극무늬가 그려지고 횃불과 화살이 X자로 배치된 로고를 썼다.[2] 보수정권은 말할 필요도 없고, 민주당계 정권과도 관계가 불편한 편이다.[3] 이 산별노조 방식은 미국노동총연맹(AFL)도 채택하고 있다.[4] 이러한 점 때문에 과거 군사정권의 노동조합 정책을 파시즘의 협동주의적 방식이라 해석하기도 한다.[5] 물론 1960년대와 70년대의 임금인상 투쟁에 어느 정도 조직력있는 움직임을 보이긴 했지만, 대부분 한국노총 소속의 개별 사업장 노조의 투쟁에 그칠 뿐이었다. 심지어 당시에는 상급 단체가 없는 노조가 많았고, '''무엇보다 노조 자체를 구경하기 힘든 시대였다.'''[6] 1980년대 민주노조 운동의 중심인물로는 전 경기도지사 김문수와 정의당 대표 심상정, 그리고 훗날 뉴라이트로 전향한 권용목이 있다.[7] 2011년 11월 출범했으며, 통합 전 노동조합원 비율이 전체에서 1%를 간신히 넘을 정도로 규모가 작았다.[8] 다큐멘터리 방영 이후 취재를 위해서이다.[9] 심지어 해당 방송인 그 쇳물 쓰지 마라는 유가족의 동의 하에 취재하였다. 포스코 측의 취재에 응하지 마라는 문자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10]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자 야인시대에 나오는 그 김두한 맞다.[11] 8대 총선 당선으로 퇴임.[12] 당시 섬유노조 위원장 및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도 겸임.[13] 노동부장관 임명으로 퇴임.[14] 13대 총선 당선으로 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