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생육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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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을 위해 늦게 결혼하고 계획생육을 합시다!" 1970년대 후반 계획생육정책 초기의 포스터로, 문화대혁명 직후이기 때문에 문혁스타일이 포스터에 짙게 배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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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계획생육정책을 안정시켜 조화롭고 아름다운 가정을 함께 만듭시다." 2000년대 계획생육 포스터다.
计划生育政策
1978년부터 시행된 중국의 국가규모 산아제한책. '한자녀 정책'이라고 하기도 하며 사상 최대 규모의 인구조절정책. 한국에서 1970년대부터 펼친 "가족계획정책"의 대륙판인데, 대륙의 스케일과 중국 공산당의 강제력이 겹쳐서 한국의 비슷한 정책에 비해 국내외적으로 훨씬 거대한 영향을 끼쳤다.
원래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이 인구라는 것은 고전경제학의 기본이다. 그렇기 때문에 19세기 각국은 인구증가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특히 독일은 적극적으로 이를 장려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근친상간에 의한 출산'''도 예전에는 교회법 때문에 호적에서 자녀로 인정이 안되었으나, 독일은 최초로 이를 인정했을 정도. 일본도 이를 '''본받아''' 메이지 시대에 다산정책을 장려했다.
이는 독일보다 늦게 산업화를 시작한 스탈린 시기의 소련에서도 그러했다. 더구나 스탈린 시절 말기에는 독소전쟁 때문에 소련 인구는 거의 3천만이 사망했고, 노동력이 부족하여, 수백만 추축국 포로를 10여년간 억류하면서 전후 복구사업에 투입했을 지경이었다. 그러니 소련에서는 다산정책이 국가적인 정책이 되었다. 그런데 중공정권은 수립 직후부터 사회주의 선배국이었던 소련을 모방했는데, 당시 노동력이 부족했던 소련에서 벌어지던 여러 다산정책도 똑같이 시행하였다. 대표적으로 소련에서 다산을 한 산모에게 수여하던 모성영웅훈장을 중국에서도 수여하기 시작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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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적 인구. 기원전부터 꾸준히 증가하다 전한, 후한 시기에 6,000만명 선을 유지하다 삼국, 남북국 시대에는 5천만정도로 감소한다.
이후 당나라 중후반까지 8,000만명까지 증가하다 오대십국시기까지 다시 5,000만 정도로 감소한다. 이후 송나라~명나라 시절까지 1억~ 1억 5,000만명 근처에서 머무르다가 청나라 시절 평화가 계속되고 농업생산력이 증가하자[1]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이미 청나라 말기에는 '''4억명'''에 이르렀다.
바로 위에 서술했듯이 중국에서는 평화가 정착되고 농업기술이 발달한 명나라, 청나라 시절 인구가 폭증했다. 20세기 전반에 중국의 혼란 때문에 인구증가 속도는 어느정도 둔화되었어도 꾸준히 늘어나고 있었다. 1949년 마오쩌둥이 천안문 망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포할 때 중국의 인구는 5억 4,000만을 기록했다. 계속해서 늘어나는 인구 때문에 북양정부 말기부터 중국 지식인 사회는 마거릿 생어의 영향을 받아 산아제한을 논하기 시작했으며 국민정부의 시대에 들어서는, 여성의 의무는 가정에서 건강한 아이를 길러내는 데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국가가 과학적으로 우량아의 출산과 양육을 도와야한다는 이유로 피임, 낙태, 인공유산 등을 정당한 권리로 인정하고 무통분만을 비롯한 선진적인 산부인과 기술들을 적극 도입해오고 있었다. 남녀가 동등한 사회적 의무를 지니고 있다는 공산주의적 양성평등론에 비하면 유교보수적인 국민당의 태도에서 기인한 것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태도가 낙태권에 있어선 좀 더 진보적인 태도를 취하게 만든 것. 또한, 테크노크라트와 유학파의 발언권이 높았으며 이들이 정책 결정과정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국민당 치하에서는 국가의 경제구조가 감당할 수 없는 과중한 인구는 오히려 경제적 부담이 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으며 실제로 과잉인구로 인한 기아, 폭동 등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인구수를 적정선에서 유지하면서 과학기술을 통한 생산력 증진을 꾀하였다.
하지만 1949년 국민당을 뒤엎고 집권한 마오쩌둥은 이러한 경향에 대해서 정면으로 제동을 걸었다. 마오쩌둥은 중일전쟁과 국공내전기때 인력이 갈려나간 경험을 했던 사람이었던 것도 있었기에 '人多力量大' 즉 사람이 많으면 국력도 크다고 말하며 다산을 장려하였다. 마오쩌둥은 "소련이나 미국이 핵공격을 해서 6억명 중 3억명이 날아가도 나머지 3억명이 더 많이 낳으면 강해질 것이다"란 발언을 한 다산론자였다. 당연히 생어의 산아제한론은 물론이고 멘델의 유전의 법칙을 비롯해서 계획생육에 관련된 모든 학문은 제국주의 학문으로 규정되어 금지되었고 낙태, 인공유산, 피임은 모조리 금지되었다. 흔히들 국공내전 이후 사회가 안정되어 먹고 살기 좋아져 인구가 늘어났다고 미화했지만, 사실은 국가에서 낳아야 할 애 숫자만 안 정해주는 수준이지, 사실상 차우셰스쿠의 인구 정책마냥 출산 강요를 하던 상황이었고 더욱이 기계적인 공산주의 양성평등의 원칙에 따라서 여성들이 가사노동과 사회노동을 이중으로 부담해야 하는 중국의 상황상 여성의 부담은 더욱 가중되었다. 임신 8개월, 9개월의 만삭이라 하더라도 출산휴가는 언감생심이고 오히려 일 못한다고 두들겨맞는 상황이니 불법 낙태가 판을 쳤고, 임신부들이 중노동을 자처하여 노동으로 낙태하려는 목불인견의 상황이 이어졌다.
결국 공산당원들조차도 여성들을 중심으로 더는 견디지 못하겠다고 아우성을 치기 시작하니 저우언라이의 아내 덩잉차오 등을 필두로 여성 정치인들이 이를 시정해줄 것을 중앙정부에 요청하였다. 여기에 마인추를 비롯한 학자들도 멜서스를 비판하는 선에서 조심스럽게 산아제한의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50년대 중반에 들어서 중국 역사상 최초의 산아제한 정책이 실시되었으나, 불과 몇년 후 마오쩌둥이 반우파 투쟁을 전개하면서 산아제한 정책은 폐기되었고 산아제한을 주장했던 학자들은 "제국주의의 사주를 받아 사회주의 분열책동을 벌인 간첩"으로 몰려 숙청당해서 줄줄이 하방당했다. 마인추도 베이징대학 총장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그 뒤의 대약진 운동에서 마오쩌둥의 개삽질로 상상을 초월하는 아사자가 발생하자 마오쩌둥도 산아제한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 피임 금지를 철회하여 중국의 출산율은 그 뒤로 감소세에 접어들었지만, 그럼에도 1970년대 초반까지 5명대 이상을 꾸준히 유지했기 때문에 중국의 인구는 1960년대와 70년대에는 약 '''10년마다 2억명씩''' 불어나 1970년대 말에는 10억명에 이르렀다. 대약진운동 직후에 보상성 출산으로 1963년 출산율이 7.5명까지 올라간 적도 있었고, 이러한 베이비붐은 197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다. 이 당시에는 대약진 운동으로 인구가 감소하였기에 당국에서 산아제한을 시행하려 들지는 않았다. 1960년대 중반에 산아제한에 대한 논의가 나오기 시작했지만 문화대혁명으로 다시금 논의는 물밑으로 가라 앉았고, 1970년대 초반까지 베이비붐이 이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1982년에 인구조사를 할 땐 10억명을 돌파하게 된다. 즉, 30여년만에 인구를 2배 폭증시킨것이다.
헌데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1950년대에 출생한 1차 베이비붐 세대들이 사회로 진출하여 노동인구가 급속히 증가하기 시작하였고 국가에서 늘어나는 노동인구에 맞추어서 막대한 양의 일자리를 만들고 인프라를 건설해야되었기에 이 점에 있어서 과부하가 걸렸고. 식량 생산 또한 한계에 다다르는 등[2] 부작용이 생기기 시작했다. 1950년대 말 대규모 기근으로 약 3,000만명이 아사한 이후 대규모 아사사태는 없었지만, 그래도 중국의 식량사정은 빠듯했다. 경제가 마비된 문화대혁명 시기에도 식량 증산을 위해서 대규모 개척 사업이나 간척 사업이 끊임없이 진행되었다. 이 때문에 윈난성 여러 밀림이나 내몽골의 여러 초원들도 농경지로 개척되었다. 이런 개척의 후유증으로 그곳이 아예 사막으로 변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둥팅호나 쿤밍의 톈츠처럼 호수를 낀 여러 명승지가 간척사업때문에 상당히 파괴되었을 정도. 그러나 인구는 1970년대 초반까지 급속하게 증가하였고 그로인해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하지 못해 식량배급이 1970년대 말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니까 매 가구에 지급되는 양표(粮票)라는 식량쿠폰이 없으면 돈을 아무리 줘도 배급소에서 식량을 살 수 없었다.[3] 또한 중국같은 큰 나라는 식량이 안보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식량자급은 꼭 필요하다.
아울러 중국은 한국 못지 않게 인구 분포가 불균형하고 서부 지역이나 내몽골 같은 데는 사람이 살기가 어려운 환경이므로 평야나 해안 지역에 인구가 주로 몰리는 문제가 있다. 또한 개발도상국에 지나치게 높은 인구증가는 경제 발전에 좋지 않다고 여겨진다. 자녀 양육비용이 늘어나고, 그로 인해 가계당 잉여자금이 줄어들어 저축이 늘어나지 않는다. 개발도상국에서 국내 투자자금을 조성하는 데 필수적인 저축이 정체 상태라는 것은 치명적인 문제다. 게다가 그 자녀 양육비용이 효율적으로 쓰이는 것도 아니다. 자녀 둘이면 둘 모두 대학 보낼 수 있는 것이, 자녀 다섯이면 하나 대학 보내기도 벅차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대혁명의 여파가 어느정도 잠잠해지자 1970년대 초반부터 저우언라이의 주도로 농어촌지역까지 포함한 광범위한 산아제한 운동을 펴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 출산율은 빠르게 떨어지기 시작하여 1970년 5.65명이던 출산율이 1972년을 기점으로 5명대 아래로 떨어진것을 시작으로 1973년에는 4.57명 1974년 4.18명 1975년 3.81명 1976년 3.47명 1977년 3.18명, 1978년에는 2.94명 1979년에 2.75명순으로 큰 폭으로 떨어졌고 출생아수도 1970년대 초반에는 3,000만명에 육박하던 수준에서 2,000만명 아래로 떨어지며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는 했다.[4] 하지만 이러한 출산율 감소에도 1963년~1971년도에 출생한 2차 베이비붐 세대들이 막 아기를 낳으려는 시기가 다가왔고, 출생아 수의 감소가 어려워질 것을 염려한 집권한 새 지도부는 경제적 문제뿐만 아니라 안보적 문제도 고려하여 1980년부터 아예 한족들에게 1자녀만 낳을 것을 강제하며 강압적으로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산아제한 정책 시행에 대해서 이미 출산율이 충분히 감소되었는데 뭘 더하라는 얘기가 농어촌 지역을 중심으로 나오고[5] 서방국가로부터도 인권침해라는 문제제기도 있었지만 덩샤오핑은 이러한 논의에 대해서 식량문제와 난민발생발언등으로 묻어버렸다.
영미권에서는 one-child policy라고 번역하므로 일반적으로 반드시 아이를 하나만 낳아야 한다고 생각하곤 하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출산율이 1.0보다 높을 수가 있을까? 하지만 중국의 출산율은 1.0 이하로 추락한 적이 출산율을 통계로 집계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없으며, 현재까지도 여성 1명 당 출산율 1.6~1.7명을 유지하고 있다. 사실 1자녀라 해도 반드시 1명만 낳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즉, 예외사항이 있었는데 우선 도시에 사는 부부 양쪽이 외동이면 아이를 2명 가질 수 있다. 또한 농촌에서는, 일손이 부족하고 또 아무래도 남아선호사상이 높아서 첫째가 여아였을 경우 불법을 감수하며 둘째까지 낳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소수민족에 대한 일종의 보호책으로 보통 2자녀 이상을 가질 수 있다. 중국 정부 공인 55개 소수민족 중에는 인구수가 수천 명에 불과한 민족도 여럿 있기 때문에, 이들에게 1자녀만을 갖게 한다는 것은 사실상의 절멸책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소수민족 보호를 위해 도시에 살고 있을 경우는 2명, 농촌지역은 4명까지도 허용되었다. 이렇기 때문에 위구르족은 이슬람교 특유의 다산선호와 겹쳐 인구수가 엄청나게 불어났다.[6] 반면 만주족의 경우 청나라 때 한족들을 변발령, 문자의 옥 등으로 탄압했고 그 보복으로 태평천국 운동 및 신해혁명으로 자신들이 한족들에게 대거 학살당했던 것 때문에 대부분 자신들이 만주족이라는 사실을 대놓고 드러내지 않으면서 한족인 척 연기하며 살았으므로, 자신들이 자녀를 2명까지 가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족으로 위장하기 쉽게 일부러 1자녀만 가진 경우가 많았다.
벌금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한 사람도 까짓거 못 낳을건 없다.[7] 유명한 중국 영화감독인 장예모는 2013년 아이를 몰래 7명을 낳은 게 밝혀져서 748만 위안(약 12억원)에 가까운 벌금을 냈다. 더군다나 한자녀 정책이 전국적으로 동일적용되는것이 아니고 지역별로 몇명까지 낳을 수 있을지 정책이 다르기 때문에 1자녀 정책을 적용받는 가구의 수는 총가구의 40%에 못미친다. 게다가 쌍둥이의 경우는 의도적으로 둘째나 그 이상을 만든 게 아니므로 불이익 대상에서 제외된다. 그래서 중국 여성들이 부작용을 감수하고 '쌍둥이 낳는 약'을 구해서 먹는 사례도 있었다.
또한, 요즘에는 둘째 만든다고 해서 낙태시키거나 감옥에 넣는 것도 아니고 벌금을 내거나 이런저런 불이익이 주어지는데, 문제는 서민층에는 이러한 불이익이 치명적이지만 상류층은 그깟 벌금 내고말지 뭐 하고 둘째를 낳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무원, 교원들은 둘째를 낳으면 벌금은 물론이고 직장을 잃을 각오도 해야 하기에 위장이혼을 하는 경우도 많다고.
정부 몰래 낳으면 되지 않느냐는 이야기가 있는데, 중국의 사회통제 정책은 그렇게 허술하지 않다. 이렇게 호적에 올리지 않고 몰래 임신하여 아이를 낳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 일단 1자녀를 가진 여성은 무조건 정기적으로 보건소에 출두하여 신체검사를 받아야 한다. 운 좋게 신체검사를 통과하여 아이를 낳았다고 한들, 호적에 올리지 않은 아이는 절대로 학교에 입학할 수 없기 때문에 제대로 성장하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1자녀정책을 위반하고 출생하여 호적에 오르지 못한 인구는 문명화가 거의 안 된 농촌에서나 존재한다. 하지만 이렇게 호적에 오르지 않은 아이의 수는 1,300만 명(추정치) 정도에 불과(?)하다. 중앙에서 책상머리로 입안된 대약진운동이 겨우 1년만에 중국 전역에서 철저히 실시되었다가 커다란 문제를 야기할 정도로 중국의 사회통제는 강력하다.
중국 입양법(中华人民共和国收养法)은 양자도 1명만 들일 수 있도록 하고 있는데,[8] 이 또한 이 정책의 일환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친자를 양자로 위장해서 우회출산하려는 꼼수를 방지하기 위한 것.
하지만 전통적으로 다산을 선호한 농업국가였던 중국에서 전통을 갑자기 180도 바꾸는데는 어려움도 많았다. 1990년대의 중국신문을 보면 이 계획생육정책이 실시된지 10년이 넘었지만, 농촌 지역에서 이에 대한 반발이 극심했고, 1자녀도 잘 지켜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당시 나온 인민일보나 중국청년보의 기사를 보면 초생촌(超生村), 즉 계획생육정책이 잘 지켜지지 않는 마을이 어떻게 가난하게 허덕이고 있는지, 다산 가구들이 어떻게 비참하게 사는지에 대한 르포기사가 자주 실렸다. 이는 계도성 보도로, 사람들에게 다산의 폐해를 인식시키기 위한 것. 중국 정부가 1970년대 말부터 이런 강제정책을 밀어붙였지만, 농촌 지역에서는 자주 무시되었으며, 마을 사정에 따라서는 잘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시에서는 비교적 잘 지켜진 반면 농촌에서는 자녀가 노동력이자 노후보장이라는 2가지 이익이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중앙에서 명령을 해도 4~5명 낳는 일이 드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정책에 반발해서 폭동을 일으켜 병원을 점거한 뒤에 칭제한 사태도 있었다고...
하지만 90년대 중반에도 농촌지역에서는 계획생육정책이 잘 지켜지지 않았던 걸로 보인다. 예를 들어, 아이돌 가수인 화전소녀의 푸징(1995년생)이 4남매중 둘째, 중국 여자 배구 국가대표팀의 에이스 주팅(1994년생)이 6남매중 맏이였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인권 침해 소지도 다분한데, 대부분의 나라의 산아제한 정책은 아이를 덜 낳도록 유도[9] 하는 것이지만, 중국의 계획생육정책은 '강제'였다. 처벌은 더욱 강경해서, 일반적으로는 벌금을 내야 하지만 정책 시행 초기에는 임산부를 가축 축사(!)로 끌고 가서 강제로 낙태시킨 바 있다. 정책 시행 이후에도 사람들이 정책을 따라주지 않아서 공포정책의 일환으로 시행되었던 것이다. 현재 강제 낙태는 표면적으로는 시행되지 않고 있다.[10]
아울러 벌금낼 형편이 안되는 하류층에선 자식을 더 가지기 위해서 신고 안하고 몰래 임신했다가 산이나 숲에서 출산해버리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이 경우 자식은 당연히 등록이 안 되는 유령인구가 되는데 이들은 인신매매를 비롯한 각종 인권유린 범죄의 표적이 되곤 했다.
거기에 남아선호사상 문제로 여아낙태와 영아살해 또한 심각한 문제로 남아있다. '무작정 1명만'이었을 때는 특히 영아살해가 심각했다. 1980년대 이후 출생자의 경우 성비가 최대 121:100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2010년대 들어서 서서히 완화되어가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보면 성비 불균형 문제가 심각하다. 그러다보니 신부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결혼을 못 하는 남자가 대거 생겨났으며 특히 농어촌 지역에서 노총각 문제가 심각하다. 그리고 결혼을 하지 못한 노총각들이 외국 여성이나 소수민족이나 탈북자 여성을 납치 또는 인신매매하여 강제로 아내로 삼거나 동남아시아 여성들과 매매혼이나 다름없는 국제결혼을 하여 새로운 사회문제가 탄생하고 있다.
또한 1자녀 정책은 인구 1,000만 이상인 민족에만 적용되는데 조건을 충족시키는게 한족과 좡족, 만주족, 후이족, 위구르족[11] 등등 몇 없다. 그래서 출산이 제약되는 한족들이 정부에 대한 불만을 나타내거나 소수민족에 대한 혐오로 이어지기도 한다. 특히 위구르족이 중국 내지에서 분쟁의 불씨가 되어 있다는 점이 체험담으로 자주 거론되기 때문에, 한족 인구가 이런식으로 계속 줄어들고 반대로 소수민족 인구가 계속 증가하면 한족이 "주류 민족"의 지위를 빼앗기고, 소수민족의 밥이 될 것이라는 불안감까지 가지고 있다. 굳이 이런 피해망상적인 생각이 아니더라도, 민족 불평등으로 생각하고 "왜 주류 민족인 한족이 오히려 차별받냐" 반발하는 여론이 만만치 않다. 그러나 인구가 지나치게 비대해진 문제는 소수민족 책임이 아니므로, 억지라고 여겨질 수도 있겠다.
물론 의도는 좋았으나 너무 강압적인 정책이었고 현재 와서는 경제적으로도 고령층이 비대해지고 노동인구가 감소하면서 아직 한창 개발도상국인 중국을 급격한 고령화사회로 인도하게 되었다는 시각이 있다. 그러나 중국은 아직 도시화율(2019년 현재 약 60%)이 그다지 높지 않기 때문에 중국 내부에서는 아직 규제를 완전히 풀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 측에서는 그랬다가는 농촌에서 폭발적으로 인구증가가 벌어질 수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농촌지역의 출산율이 높다고 해봐야 2명대 수준이고, 그간 진행된 이촌향도 현상으로 젊은층들이 도시로 빠져나와 고령화가 더 빨리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라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중국내에서도 큰 사회적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한국이나 일본에 비하면 정도가 덜할뿐, 비슷한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당장은 농촌빈곤 퇴치가 큰 과제이지만 산아제한을 완전히 풀어도 큰 문제가 닥쳐올 것은 기정 사실이라는 것이다.
소황제 (小皇帝 샤오황디)는 중국 정부가 1979년 채택한 `한가정 한자녀 정책'에 따라 각 가정에서 부모의 과보호 속에 자라난 독자(獨子)들을 지칭한다. 부모 세대와는 달리 개혁.개방으로 비교적 풍요롭게 자란 세대이다. 이러한 지나친 과보호는 자녀들의 심각한 인성문제를 야기 시켰다. 중국 지하철 발길질 사건
만약에 계획생육을 실시하지 않았다면 중국의 인구는 2010년 이전 15억을 넘었을 것이라는데 인구학자들의 의견은 일치한다. 인구가 저렇게 많으면 상술했듯 경제발전에 도리어 짐이 될 수도 있고 재화의 분배를 둘러싸고 정부에 부담을 줄 수 있기 때문에 긍정적인 부분이 있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다. 무리는 따랐지만 어쨌든 중국 인구증가에 제동을 거는데는 성공했기 때문. 이렇게 인구증가 압력이 덜해지자 중국의 가계 저축율은 끊임없이 늘어나 세계 최고수준이며, 이런 저축률을 바탕으로 한 자본형성은 중국이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루는데 도움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1970년대말 가까스로 식량자급(100%)을 달성한 이후 현재도 110%의 식량자급률을 유지하고 있는데[12] , 계획생육이 아니었다면 이를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인도의 경우와 비교해봐도 중국의 성과는 눈에 띄는데, 1960-70년대 인도 국민회의 집권 시절 인도도 빈민층의 강제 불임화 등을 통해 산아제한 정책을 실시했지만 실패했고,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반발때문에 국민회의는 정권을 잃었고 그 다음부터는 이런 정책을 꺼내는 것은 인도에서는 정치적 자살행위로 간주되었다. 현재도 부분적으로 산아제한 정책과 피임 정책을 시행했지만 출산율 하락 속도는 더뎌서 중국의 출산율이 이미 70년대 말에 2명대로 진입했고 93년에 1명대로 떨어진데 반해, 인도의 출산율은 2000년대가 들어서야 2명대로 떨어졌다.[13] 인도는 인구도 가파르게 증가하여 2020년대에 인구로는 중국을 넘어설 것이라고 예상되고 있다.
그러나 산아제한 정책을 조기에 폐기하지 않아 중국은 심각한 저출산으로 인구 위기를 맞았다. 산아제한정책 성공이 결국은 중국의 국력 강화를 실패하게 한 것이다. 중국은 2015년 한 자녀 정책을 폐지했지만 출산율은 2016년에만 소폭 반등했고 2017년부터 출산율이 폭락해 심각한 저출산 위기 상황이 되었는데도 산아제한 정책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출산율을 반등시키지 못한다면 중국의 성장률은 폭락할 것이고 미국과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으며 국가적 위기를 피할 수 없다.
2010년대부터 국책연구기관에서도 1자녀 정책을 폐지하고 2자녀 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2015년부터 중국의 생산가능 인구(만 15~64세)가 급속히 줄기 때문에 오래 지나지 않아 폐지될 거란 전망이 우세했다. 그러다가 시진핑 정부 들어 2013년 11월, 한 자녀 정책을 다시 완화해 앞으로 부부 중 1명이 독자이면 두 자녀까지 허용하는 쪽으로 바꾸기로 했다. 중국 정부는 이 제도를 실시한 뒤 수년 뒤 '두 자녀 정책'을 도입할 것으로 전망되어 사실상 계획생육정책은 폐지 수순을 밟았으며 2015년 10월 29일에 시진핑이 1자녀 정책의 완전폐지를 시사했고 결국 2016년 한 자녀 정책이 완전 사라지고 두 자녀 정책으로 선회하게 되었다. 기사 참조. 일단 2자녀까지는 누구든지 허용되는 셈.
이미 2010년대 들어 당원이나 공무원같은 경우를 제외한 일반인의 경우에 이 제도 거의 유명무실해지고 있으며, 인권유린 시비를 불렀던 강제낙태제도는 완전히 없어졌고, 벌금으로 대체되고는 있지만, 일부 성에서는 그 벌금도 안내고 버팅겨도 되는 수준까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2자녀 정책을 시행하면서 한자녀 정책 모범지역으로 선정된 지역에서 공무원들에게 자녀 2명을 낳을 것을 강요하는 경우도 빈번해졌다고 한다.
또한 산아제한 완화 이전에 둘째 자녀를 낳아 처벌을 받은 부부들이 지방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거는 일도 늘었다.
2016년 들어서 헤이룽장 성에서는 부분적 3자녀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헤이룽장 성 일대의 고령화가 한국 수준으로 심각해서 나온 궁여지책으로 보인다. 중국 헤이룽장성서 부분적 '3자녀 정책 시행'…국경지역 주민·소수민족 대상
다만 두 자녀 정책이라는 이름에서 보듯 계획 생육 정책을 완전히 없앤 것은 또 아니다보니 여전히 자녀를 3명 이상 낳은 경우 그 아이의 호적등록이 거부되는 등의 모습들은 남아있다. 또 일반인들은 덜해도 당원이나 공무원의 경우엔 여전히 셋째를 가질 경우 출당되거나 불이익을 당할 각오 정도는 해야 한다. 그리고 호적에 없는 아이들은 독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혜택을 못 받는 건 또 당연하고.
청년들이 과도한 집값[14] 과 교육비용 등[15] 의 이유 때문에 출산율 기피하는 현상은 중국도 예외가 아니라서 2자녀 정책을 펴는것만으로도 한참 모자라다는 전문가들의 진단이 이어지고 있으며, 3자녀 정책시행이나 산아제한 완전 폐지 및 출산장려 정책 얘기도 나오고 있다. 중국 정부도 2017년도 출생아수 감소를 나름대로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모양인지, 2018년 3월에 국가위생 계획생육위원회를 폐지하고 국가위생건강위원회로 간판을 바꿔달았으며, 중국인구협회 홈페이지도 폐쇄되었다. 이후로 2020년이 되면 산아제한이 완전히 폐지될 것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관측이며 고령화로 인해서 출산장려부서를 신설하는 등의 대책마련에 나서고 있다. 그 외에도 남초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에 딸이 둘인 가정에도 보조금을 지급한다.
산아제한 정책을 조기에 폐기하지 않아 중국은 심각한 저출산으로 인구 위기를 맞았다. 산아제한정책 성공이 결국은 중국의 국력 강화를 실패하게 한 것이다. 중국은 2015년 한 자녀 정책을 폐지했지만 출산율은 2016년에만 소폭 반등했고 2017년부터 출산율이 폭락해 심각한 저출산 위기 상황이 되었는데도 산아제한 정책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출산율을 반등시키지 못한다면 중국의 성장률은 폭락할 것이고 미국과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으며 국가적 위기를 피할 수 없다.
2자녀 정책 전면 시행 초기인 2016년 출생아수는 1,786만명대를 기록하면서 1999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고, 출산율도 한국의 90년대 초중반 수준(합계 출산율 1.7명)으로 올라갔다. 저출산은 도시화율과 직접적인 역상관관계가 있는데, 중국은 90%에 육박하는 한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도시화율이 58%에 불과하기 때문에 저출산을 벗어날 여지가 더 높다는 예상이 있었다.
일단 2017년에는 신생아 수가 2016년보다 줄었지만 여전히 2015년보다는 많기 때문에 저출산 경향을 멈출 수 있을지 아니면 일시적인 붐에 불과할지는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차이나포커스 봉황망코리아, 봉황망 기사와는 다른 시각 이에 대한 해석은 분분한데, 중국에서는 출산아 수는 줄었지만, 출산아의 상당수가 둘째라는 점에서 성과가 있었다는 입장이고, 서방에서는 출산아 감소를 들어 "효과가 없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결국 두 자녀 정책은 출산율 반등에 실패했다. 중국 정부는 두자녀 정책으로 선회한 후 2017년부터 연간 출생아수가 다시 2천만을 넘어서기 시작할 것으로 전망했으나 출산율은 2016년에만 소폭 반등했고 2017년에는 오히려 출생아수가 2016년보다 63만명이 줄고, 2018년 출산율은 더 크게 하락해, 2017년 대비 '''무려 200만 명이나 감소한''' 1,523만 명을 기록하며 효과가 전혀 없다는걸 보여주고 말았다.결국 한 자녀 정책 폐지만으로 저출산 경향을 멈추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서방의 예상이 맞았던 것이다. 2019년 출산율은 역대 최저인 1,465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또한 2019년에도 감소세가 멈추지 않아 2019년에는 1,465만 명으로 58만 명이 또 감소했고, 2020년에는 호적 등록까지 마친 신생아 기준으로 2019년보다 176만 명이나 감소한 1,003만 명을 기록했다. 이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최저치이다. 이미 인구감소가 시작될 것으로 예측되는 시기도 2028년에서 2023년으로 앞당겨진 상태이며, 게다가 절망적이게도 이미 생산가능 인구와 가임여성의 수가 지속적으로 줄고 있어[16] 중국 정부의 노력에도 저출산 문제가 나아지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현재 출산율이 국가 위기 상황인데도 중국 중앙정부는 산아제한 정책 완전 폐지에 지나치게 조심스러워 하고 있다.[17] 결국 중앙정부의 공식 발표가 없었는데도 인구 감소와 고령화가 심각한 중국 농촌에서는 노골적으로 다산 장려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과거 산아정책시기의 한 자녀 정책을 강요하던 태도가 180도 선회한 것이다. 최근에는 오히려 두 자녀 출산을 하면 상을 주고, 한 자녀를 출산하면 벌금을 부과하며 자녀를 출산하지 않는 딩크족은 처벌하겠다고 협박하는 표어가 쓰여진 벽보를 중국 농촌에서는 볼 수 있다. 과거에는 출산을 멈추지 않으면 전 주민을 불임수술하겠다고 협박하는 벽보를 볼 수 있었지만 최근에는 정반대로 출산을 하지 않으면 전 주민을 강제 임신시키겠다고 협박하는 표어를 공개해 비판과 반발이 있었다. 오히려 농촌의 강압적 출산 강요로 분노한 여성들이 농촌을 탈출해 역효과만 냈다.
그러나 중국 중앙정부가 산아제한정책을 전면 폐기하고 정책을 180도 선회해 국가적인 출산장려정책을 시행한다고 해도 성공 확률은 낮다는 예상이 강하다. 중국 정부보다도 억압적이고 전체주의적이었던 나치 독일과 스탈린 시대의 소련도 출산장려정책을 시행했으나 한계가 있었고, 루마니아는 출산장려가 아닌 출산'''강요'''정책을 시행했는데도 출산율 증가에 한계가 있었다.
https://www.scmp.com/comment/opinion/article/3047798/how-chinese-officials-inflated-nations-birth-rate-and-population 심지어 공식 발표된 출산율도 조작되었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한국의 경우 중국과는 달리 어마어마한 벌금을 물거나 강제낙태까지 시행하지는 않았다. 한국도 중국과 비슷한 시기에 1950년대 중반-60년대 초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들이 아기를 낳을 시점이 되고, 인구 4,000만이 넘는다는 얘기가 나오고 결국 인구가 4,000만명을 넘어서자 빨리 출산율을 줄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에 '''"덮어놓고 낳다보면 거지꼴을 못면한다"''',"'''둘도 많다'''",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 "'''셋부터는 부끄럽습니다'''" 식의 자극적인 캠페인 표어를 쏟아냈다. 여하튼 그렇게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1986년에 출산율을 1.5명대까지 떨어뜨리는 데에는 성공하기는 했다.
당시 한국에선 아파트 분양자들 대상으로 불임수술을 하면 분양권을 우선으로 주기도 했다.[18] 여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산아제한 정책을 너무 오래 끌었다는 것. 만약 출산율이 인구대체 수준 밑으로 내려간 80년대에 풀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무려 1996년까지 유지되고 폐지되었다. 덕분에 한국은 이제 도리어 폭발적인 고령화와 노동인구 격감 등을 걱정해야 되는 저출산 국가가 되었다. 당시의 인구증가 문제가 그만큼 심각한 과제였다는 반증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이로 인해 새로운 과제가 생길 것이라는 데까지는 예상이 못 미쳤다.
정책 시작 당시 아직 중국은 산업화가 덜 되어 농촌인구가 절대다수였기에 한자녀 정책을 적용받는 가정의 수가 생각보다 적고, 편법을 쓰거나 벌금을 물어서라도 아들을 낳으려고 하는 경우가 워낙에 많았기 때문에 출산율 저하속도는 한국보다 느려서 90년대 들어서야 출산율이 2명 아래로 떨어졌다. 그래서 80년대 중후반생들의 인구 비중이 의외로 높아서 1970년대 후반생들보다도 수가 많다. 하지만 중국 역시 한국처럼 산아제한 정책을 너무 오래 끌었고, 그 결과로 생산인구의 감소가 '''한국보다 빠른''' 2013년부터 시작되었으며(한국은 2017년부터 시작) 1인당 GDP는 2019년에 들어서야 1만 달러를 겨우 넘었는데, 이미 65세 이상 인구의 비중은 2019년 기준 12.6%에 달해서 2021년 고령사회, 2031년 초고령사회 진입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혁명을 위해 늦게 결혼하고 계획생육을 합시다!" 1970년대 후반 계획생육정책 초기의 포스터로, 문화대혁명 직후이기 때문에 문혁스타일이 포스터에 짙게 배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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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계획생육정책을 안정시켜 조화롭고 아름다운 가정을 함께 만듭시다." 2000년대 계획생육 포스터다.
计划生育政策
1. 개요
1978년부터 시행된 중국의 국가규모 산아제한책. '한자녀 정책'이라고 하기도 하며 사상 최대 규모의 인구조절정책. 한국에서 1970년대부터 펼친 "가족계획정책"의 대륙판인데, 대륙의 스케일과 중국 공산당의 강제력이 겹쳐서 한국의 비슷한 정책에 비해 국내외적으로 훨씬 거대한 영향을 끼쳤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두 부부가 모두 외동이면 둘을 낳을 수 있도록 허용했고, 2013년부터는 두 부부중에 한 명이라도 외동이면 둘을 낳을 수 있게 허용하면서 한자녀정책은 사실상 폐지된다. 그리고 3년 뒤인 2016년에는 누구라도 2자녀까지 허용하게 된다.国家提倡一对夫妻生育两个子女。
(국가는 한 쌍의 부부가 두 자녀를 출산할 것을 제창한다.)
인구 및 계획생육법(中华人民共和国人口与计划生育法) 제18조 제1문.
2. 역사
원래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이 인구라는 것은 고전경제학의 기본이다. 그렇기 때문에 19세기 각국은 인구증가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특히 독일은 적극적으로 이를 장려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근친상간에 의한 출산'''도 예전에는 교회법 때문에 호적에서 자녀로 인정이 안되었으나, 독일은 최초로 이를 인정했을 정도. 일본도 이를 '''본받아''' 메이지 시대에 다산정책을 장려했다.
이는 독일보다 늦게 산업화를 시작한 스탈린 시기의 소련에서도 그러했다. 더구나 스탈린 시절 말기에는 독소전쟁 때문에 소련 인구는 거의 3천만이 사망했고, 노동력이 부족하여, 수백만 추축국 포로를 10여년간 억류하면서 전후 복구사업에 투입했을 지경이었다. 그러니 소련에서는 다산정책이 국가적인 정책이 되었다. 그런데 중공정권은 수립 직후부터 사회주의 선배국이었던 소련을 모방했는데, 당시 노동력이 부족했던 소련에서 벌어지던 여러 다산정책도 똑같이 시행하였다. 대표적으로 소련에서 다산을 한 산모에게 수여하던 모성영웅훈장을 중국에서도 수여하기 시작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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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적 인구. 기원전부터 꾸준히 증가하다 전한, 후한 시기에 6,000만명 선을 유지하다 삼국, 남북국 시대에는 5천만정도로 감소한다.
이후 당나라 중후반까지 8,000만명까지 증가하다 오대십국시기까지 다시 5,000만 정도로 감소한다. 이후 송나라~명나라 시절까지 1억~ 1억 5,000만명 근처에서 머무르다가 청나라 시절 평화가 계속되고 농업생산력이 증가하자[1]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이미 청나라 말기에는 '''4억명'''에 이르렀다.
바로 위에 서술했듯이 중국에서는 평화가 정착되고 농업기술이 발달한 명나라, 청나라 시절 인구가 폭증했다. 20세기 전반에 중국의 혼란 때문에 인구증가 속도는 어느정도 둔화되었어도 꾸준히 늘어나고 있었다. 1949년 마오쩌둥이 천안문 망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포할 때 중국의 인구는 5억 4,000만을 기록했다. 계속해서 늘어나는 인구 때문에 북양정부 말기부터 중국 지식인 사회는 마거릿 생어의 영향을 받아 산아제한을 논하기 시작했으며 국민정부의 시대에 들어서는, 여성의 의무는 가정에서 건강한 아이를 길러내는 데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국가가 과학적으로 우량아의 출산과 양육을 도와야한다는 이유로 피임, 낙태, 인공유산 등을 정당한 권리로 인정하고 무통분만을 비롯한 선진적인 산부인과 기술들을 적극 도입해오고 있었다. 남녀가 동등한 사회적 의무를 지니고 있다는 공산주의적 양성평등론에 비하면 유교보수적인 국민당의 태도에서 기인한 것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태도가 낙태권에 있어선 좀 더 진보적인 태도를 취하게 만든 것. 또한, 테크노크라트와 유학파의 발언권이 높았으며 이들이 정책 결정과정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국민당 치하에서는 국가의 경제구조가 감당할 수 없는 과중한 인구는 오히려 경제적 부담이 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으며 실제로 과잉인구로 인한 기아, 폭동 등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인구수를 적정선에서 유지하면서 과학기술을 통한 생산력 증진을 꾀하였다.
하지만 1949년 국민당을 뒤엎고 집권한 마오쩌둥은 이러한 경향에 대해서 정면으로 제동을 걸었다. 마오쩌둥은 중일전쟁과 국공내전기때 인력이 갈려나간 경험을 했던 사람이었던 것도 있었기에 '人多力量大' 즉 사람이 많으면 국력도 크다고 말하며 다산을 장려하였다. 마오쩌둥은 "소련이나 미국이 핵공격을 해서 6억명 중 3억명이 날아가도 나머지 3억명이 더 많이 낳으면 강해질 것이다"란 발언을 한 다산론자였다. 당연히 생어의 산아제한론은 물론이고 멘델의 유전의 법칙을 비롯해서 계획생육에 관련된 모든 학문은 제국주의 학문으로 규정되어 금지되었고 낙태, 인공유산, 피임은 모조리 금지되었다. 흔히들 국공내전 이후 사회가 안정되어 먹고 살기 좋아져 인구가 늘어났다고 미화했지만, 사실은 국가에서 낳아야 할 애 숫자만 안 정해주는 수준이지, 사실상 차우셰스쿠의 인구 정책마냥 출산 강요를 하던 상황이었고 더욱이 기계적인 공산주의 양성평등의 원칙에 따라서 여성들이 가사노동과 사회노동을 이중으로 부담해야 하는 중국의 상황상 여성의 부담은 더욱 가중되었다. 임신 8개월, 9개월의 만삭이라 하더라도 출산휴가는 언감생심이고 오히려 일 못한다고 두들겨맞는 상황이니 불법 낙태가 판을 쳤고, 임신부들이 중노동을 자처하여 노동으로 낙태하려는 목불인견의 상황이 이어졌다.
결국 공산당원들조차도 여성들을 중심으로 더는 견디지 못하겠다고 아우성을 치기 시작하니 저우언라이의 아내 덩잉차오 등을 필두로 여성 정치인들이 이를 시정해줄 것을 중앙정부에 요청하였다. 여기에 마인추를 비롯한 학자들도 멜서스를 비판하는 선에서 조심스럽게 산아제한의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50년대 중반에 들어서 중국 역사상 최초의 산아제한 정책이 실시되었으나, 불과 몇년 후 마오쩌둥이 반우파 투쟁을 전개하면서 산아제한 정책은 폐기되었고 산아제한을 주장했던 학자들은 "제국주의의 사주를 받아 사회주의 분열책동을 벌인 간첩"으로 몰려 숙청당해서 줄줄이 하방당했다. 마인추도 베이징대학 총장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그 뒤의 대약진 운동에서 마오쩌둥의 개삽질로 상상을 초월하는 아사자가 발생하자 마오쩌둥도 산아제한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 피임 금지를 철회하여 중국의 출산율은 그 뒤로 감소세에 접어들었지만, 그럼에도 1970년대 초반까지 5명대 이상을 꾸준히 유지했기 때문에 중국의 인구는 1960년대와 70년대에는 약 '''10년마다 2억명씩''' 불어나 1970년대 말에는 10억명에 이르렀다. 대약진운동 직후에 보상성 출산으로 1963년 출산율이 7.5명까지 올라간 적도 있었고, 이러한 베이비붐은 197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다. 이 당시에는 대약진 운동으로 인구가 감소하였기에 당국에서 산아제한을 시행하려 들지는 않았다. 1960년대 중반에 산아제한에 대한 논의가 나오기 시작했지만 문화대혁명으로 다시금 논의는 물밑으로 가라 앉았고, 1970년대 초반까지 베이비붐이 이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1982년에 인구조사를 할 땐 10억명을 돌파하게 된다. 즉, 30여년만에 인구를 2배 폭증시킨것이다.
헌데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1950년대에 출생한 1차 베이비붐 세대들이 사회로 진출하여 노동인구가 급속히 증가하기 시작하였고 국가에서 늘어나는 노동인구에 맞추어서 막대한 양의 일자리를 만들고 인프라를 건설해야되었기에 이 점에 있어서 과부하가 걸렸고. 식량 생산 또한 한계에 다다르는 등[2] 부작용이 생기기 시작했다. 1950년대 말 대규모 기근으로 약 3,000만명이 아사한 이후 대규모 아사사태는 없었지만, 그래도 중국의 식량사정은 빠듯했다. 경제가 마비된 문화대혁명 시기에도 식량 증산을 위해서 대규모 개척 사업이나 간척 사업이 끊임없이 진행되었다. 이 때문에 윈난성 여러 밀림이나 내몽골의 여러 초원들도 농경지로 개척되었다. 이런 개척의 후유증으로 그곳이 아예 사막으로 변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둥팅호나 쿤밍의 톈츠처럼 호수를 낀 여러 명승지가 간척사업때문에 상당히 파괴되었을 정도. 그러나 인구는 1970년대 초반까지 급속하게 증가하였고 그로인해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하지 못해 식량배급이 1970년대 말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니까 매 가구에 지급되는 양표(粮票)라는 식량쿠폰이 없으면 돈을 아무리 줘도 배급소에서 식량을 살 수 없었다.[3] 또한 중국같은 큰 나라는 식량이 안보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식량자급은 꼭 필요하다.
아울러 중국은 한국 못지 않게 인구 분포가 불균형하고 서부 지역이나 내몽골 같은 데는 사람이 살기가 어려운 환경이므로 평야나 해안 지역에 인구가 주로 몰리는 문제가 있다. 또한 개발도상국에 지나치게 높은 인구증가는 경제 발전에 좋지 않다고 여겨진다. 자녀 양육비용이 늘어나고, 그로 인해 가계당 잉여자금이 줄어들어 저축이 늘어나지 않는다. 개발도상국에서 국내 투자자금을 조성하는 데 필수적인 저축이 정체 상태라는 것은 치명적인 문제다. 게다가 그 자녀 양육비용이 효율적으로 쓰이는 것도 아니다. 자녀 둘이면 둘 모두 대학 보낼 수 있는 것이, 자녀 다섯이면 하나 대학 보내기도 벅차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대혁명의 여파가 어느정도 잠잠해지자 1970년대 초반부터 저우언라이의 주도로 농어촌지역까지 포함한 광범위한 산아제한 운동을 펴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 출산율은 빠르게 떨어지기 시작하여 1970년 5.65명이던 출산율이 1972년을 기점으로 5명대 아래로 떨어진것을 시작으로 1973년에는 4.57명 1974년 4.18명 1975년 3.81명 1976년 3.47명 1977년 3.18명, 1978년에는 2.94명 1979년에 2.75명순으로 큰 폭으로 떨어졌고 출생아수도 1970년대 초반에는 3,000만명에 육박하던 수준에서 2,000만명 아래로 떨어지며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는 했다.[4] 하지만 이러한 출산율 감소에도 1963년~1971년도에 출생한 2차 베이비붐 세대들이 막 아기를 낳으려는 시기가 다가왔고, 출생아 수의 감소가 어려워질 것을 염려한 집권한 새 지도부는 경제적 문제뿐만 아니라 안보적 문제도 고려하여 1980년부터 아예 한족들에게 1자녀만 낳을 것을 강제하며 강압적으로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산아제한 정책 시행에 대해서 이미 출산율이 충분히 감소되었는데 뭘 더하라는 얘기가 농어촌 지역을 중심으로 나오고[5] 서방국가로부터도 인권침해라는 문제제기도 있었지만 덩샤오핑은 이러한 논의에 대해서 식량문제와 난민발생발언등으로 묻어버렸다.
3. 꼭 1자녀여야 하는가?
영미권에서는 one-child policy라고 번역하므로 일반적으로 반드시 아이를 하나만 낳아야 한다고 생각하곤 하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출산율이 1.0보다 높을 수가 있을까? 하지만 중국의 출산율은 1.0 이하로 추락한 적이 출산율을 통계로 집계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없으며, 현재까지도 여성 1명 당 출산율 1.6~1.7명을 유지하고 있다. 사실 1자녀라 해도 반드시 1명만 낳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즉, 예외사항이 있었는데 우선 도시에 사는 부부 양쪽이 외동이면 아이를 2명 가질 수 있다. 또한 농촌에서는, 일손이 부족하고 또 아무래도 남아선호사상이 높아서 첫째가 여아였을 경우 불법을 감수하며 둘째까지 낳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소수민족에 대한 일종의 보호책으로 보통 2자녀 이상을 가질 수 있다. 중국 정부 공인 55개 소수민족 중에는 인구수가 수천 명에 불과한 민족도 여럿 있기 때문에, 이들에게 1자녀만을 갖게 한다는 것은 사실상의 절멸책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소수민족 보호를 위해 도시에 살고 있을 경우는 2명, 농촌지역은 4명까지도 허용되었다. 이렇기 때문에 위구르족은 이슬람교 특유의 다산선호와 겹쳐 인구수가 엄청나게 불어났다.[6] 반면 만주족의 경우 청나라 때 한족들을 변발령, 문자의 옥 등으로 탄압했고 그 보복으로 태평천국 운동 및 신해혁명으로 자신들이 한족들에게 대거 학살당했던 것 때문에 대부분 자신들이 만주족이라는 사실을 대놓고 드러내지 않으면서 한족인 척 연기하며 살았으므로, 자신들이 자녀를 2명까지 가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족으로 위장하기 쉽게 일부러 1자녀만 가진 경우가 많았다.
벌금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한 사람도 까짓거 못 낳을건 없다.[7] 유명한 중국 영화감독인 장예모는 2013년 아이를 몰래 7명을 낳은 게 밝혀져서 748만 위안(약 12억원)에 가까운 벌금을 냈다. 더군다나 한자녀 정책이 전국적으로 동일적용되는것이 아니고 지역별로 몇명까지 낳을 수 있을지 정책이 다르기 때문에 1자녀 정책을 적용받는 가구의 수는 총가구의 40%에 못미친다. 게다가 쌍둥이의 경우는 의도적으로 둘째나 그 이상을 만든 게 아니므로 불이익 대상에서 제외된다. 그래서 중국 여성들이 부작용을 감수하고 '쌍둥이 낳는 약'을 구해서 먹는 사례도 있었다.
또한, 요즘에는 둘째 만든다고 해서 낙태시키거나 감옥에 넣는 것도 아니고 벌금을 내거나 이런저런 불이익이 주어지는데, 문제는 서민층에는 이러한 불이익이 치명적이지만 상류층은 그깟 벌금 내고말지 뭐 하고 둘째를 낳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무원, 교원들은 둘째를 낳으면 벌금은 물론이고 직장을 잃을 각오도 해야 하기에 위장이혼을 하는 경우도 많다고.
정부 몰래 낳으면 되지 않느냐는 이야기가 있는데, 중국의 사회통제 정책은 그렇게 허술하지 않다. 이렇게 호적에 올리지 않고 몰래 임신하여 아이를 낳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 일단 1자녀를 가진 여성은 무조건 정기적으로 보건소에 출두하여 신체검사를 받아야 한다. 운 좋게 신체검사를 통과하여 아이를 낳았다고 한들, 호적에 올리지 않은 아이는 절대로 학교에 입학할 수 없기 때문에 제대로 성장하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1자녀정책을 위반하고 출생하여 호적에 오르지 못한 인구는 문명화가 거의 안 된 농촌에서나 존재한다. 하지만 이렇게 호적에 오르지 않은 아이의 수는 1,300만 명(추정치) 정도에 불과(?)하다. 중앙에서 책상머리로 입안된 대약진운동이 겨우 1년만에 중국 전역에서 철저히 실시되었다가 커다란 문제를 야기할 정도로 중국의 사회통제는 강력하다.
중국 입양법(中华人民共和国收养法)은 양자도 1명만 들일 수 있도록 하고 있는데,[8] 이 또한 이 정책의 일환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친자를 양자로 위장해서 우회출산하려는 꼼수를 방지하기 위한 것.
하지만 전통적으로 다산을 선호한 농업국가였던 중국에서 전통을 갑자기 180도 바꾸는데는 어려움도 많았다. 1990년대의 중국신문을 보면 이 계획생육정책이 실시된지 10년이 넘었지만, 농촌 지역에서 이에 대한 반발이 극심했고, 1자녀도 잘 지켜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당시 나온 인민일보나 중국청년보의 기사를 보면 초생촌(超生村), 즉 계획생육정책이 잘 지켜지지 않는 마을이 어떻게 가난하게 허덕이고 있는지, 다산 가구들이 어떻게 비참하게 사는지에 대한 르포기사가 자주 실렸다. 이는 계도성 보도로, 사람들에게 다산의 폐해를 인식시키기 위한 것. 중국 정부가 1970년대 말부터 이런 강제정책을 밀어붙였지만, 농촌 지역에서는 자주 무시되었으며, 마을 사정에 따라서는 잘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시에서는 비교적 잘 지켜진 반면 농촌에서는 자녀가 노동력이자 노후보장이라는 2가지 이익이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중앙에서 명령을 해도 4~5명 낳는 일이 드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정책에 반발해서 폭동을 일으켜 병원을 점거한 뒤에 칭제한 사태도 있었다고...
하지만 90년대 중반에도 농촌지역에서는 계획생육정책이 잘 지켜지지 않았던 걸로 보인다. 예를 들어, 아이돌 가수인 화전소녀의 푸징(1995년생)이 4남매중 둘째, 중국 여자 배구 국가대표팀의 에이스 주팅(1994년생)이 6남매중 맏이였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4. 논란
인권 침해 소지도 다분한데, 대부분의 나라의 산아제한 정책은 아이를 덜 낳도록 유도[9] 하는 것이지만, 중국의 계획생육정책은 '강제'였다. 처벌은 더욱 강경해서, 일반적으로는 벌금을 내야 하지만 정책 시행 초기에는 임산부를 가축 축사(!)로 끌고 가서 강제로 낙태시킨 바 있다. 정책 시행 이후에도 사람들이 정책을 따라주지 않아서 공포정책의 일환으로 시행되었던 것이다. 현재 강제 낙태는 표면적으로는 시행되지 않고 있다.[10]
아울러 벌금낼 형편이 안되는 하류층에선 자식을 더 가지기 위해서 신고 안하고 몰래 임신했다가 산이나 숲에서 출산해버리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이 경우 자식은 당연히 등록이 안 되는 유령인구가 되는데 이들은 인신매매를 비롯한 각종 인권유린 범죄의 표적이 되곤 했다.
거기에 남아선호사상 문제로 여아낙태와 영아살해 또한 심각한 문제로 남아있다. '무작정 1명만'이었을 때는 특히 영아살해가 심각했다. 1980년대 이후 출생자의 경우 성비가 최대 121:100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2010년대 들어서 서서히 완화되어가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보면 성비 불균형 문제가 심각하다. 그러다보니 신부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결혼을 못 하는 남자가 대거 생겨났으며 특히 농어촌 지역에서 노총각 문제가 심각하다. 그리고 결혼을 하지 못한 노총각들이 외국 여성이나 소수민족이나 탈북자 여성을 납치 또는 인신매매하여 강제로 아내로 삼거나 동남아시아 여성들과 매매혼이나 다름없는 국제결혼을 하여 새로운 사회문제가 탄생하고 있다.
또한 1자녀 정책은 인구 1,000만 이상인 민족에만 적용되는데 조건을 충족시키는게 한족과 좡족, 만주족, 후이족, 위구르족[11] 등등 몇 없다. 그래서 출산이 제약되는 한족들이 정부에 대한 불만을 나타내거나 소수민족에 대한 혐오로 이어지기도 한다. 특히 위구르족이 중국 내지에서 분쟁의 불씨가 되어 있다는 점이 체험담으로 자주 거론되기 때문에, 한족 인구가 이런식으로 계속 줄어들고 반대로 소수민족 인구가 계속 증가하면 한족이 "주류 민족"의 지위를 빼앗기고, 소수민족의 밥이 될 것이라는 불안감까지 가지고 있다. 굳이 이런 피해망상적인 생각이 아니더라도, 민족 불평등으로 생각하고 "왜 주류 민족인 한족이 오히려 차별받냐" 반발하는 여론이 만만치 않다. 그러나 인구가 지나치게 비대해진 문제는 소수민족 책임이 아니므로, 억지라고 여겨질 수도 있겠다.
물론 의도는 좋았으나 너무 강압적인 정책이었고 현재 와서는 경제적으로도 고령층이 비대해지고 노동인구가 감소하면서 아직 한창 개발도상국인 중국을 급격한 고령화사회로 인도하게 되었다는 시각이 있다. 그러나 중국은 아직 도시화율(2019년 현재 약 60%)이 그다지 높지 않기 때문에 중국 내부에서는 아직 규제를 완전히 풀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 측에서는 그랬다가는 농촌에서 폭발적으로 인구증가가 벌어질 수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농촌지역의 출산율이 높다고 해봐야 2명대 수준이고, 그간 진행된 이촌향도 현상으로 젊은층들이 도시로 빠져나와 고령화가 더 빨리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라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중국내에서도 큰 사회적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한국이나 일본에 비하면 정도가 덜할뿐, 비슷한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당장은 농촌빈곤 퇴치가 큰 과제이지만 산아제한을 완전히 풀어도 큰 문제가 닥쳐올 것은 기정 사실이라는 것이다.
소황제 (小皇帝 샤오황디)는 중국 정부가 1979년 채택한 `한가정 한자녀 정책'에 따라 각 가정에서 부모의 과보호 속에 자라난 독자(獨子)들을 지칭한다. 부모 세대와는 달리 개혁.개방으로 비교적 풍요롭게 자란 세대이다. 이러한 지나친 과보호는 자녀들의 심각한 인성문제를 야기 시켰다. 중국 지하철 발길질 사건
5. 결과
만약에 계획생육을 실시하지 않았다면 중국의 인구는 2010년 이전 15억을 넘었을 것이라는데 인구학자들의 의견은 일치한다. 인구가 저렇게 많으면 상술했듯 경제발전에 도리어 짐이 될 수도 있고 재화의 분배를 둘러싸고 정부에 부담을 줄 수 있기 때문에 긍정적인 부분이 있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다. 무리는 따랐지만 어쨌든 중국 인구증가에 제동을 거는데는 성공했기 때문. 이렇게 인구증가 압력이 덜해지자 중국의 가계 저축율은 끊임없이 늘어나 세계 최고수준이며, 이런 저축률을 바탕으로 한 자본형성은 중국이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루는데 도움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1970년대말 가까스로 식량자급(100%)을 달성한 이후 현재도 110%의 식량자급률을 유지하고 있는데[12] , 계획생육이 아니었다면 이를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인도의 경우와 비교해봐도 중국의 성과는 눈에 띄는데, 1960-70년대 인도 국민회의 집권 시절 인도도 빈민층의 강제 불임화 등을 통해 산아제한 정책을 실시했지만 실패했고,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반발때문에 국민회의는 정권을 잃었고 그 다음부터는 이런 정책을 꺼내는 것은 인도에서는 정치적 자살행위로 간주되었다. 현재도 부분적으로 산아제한 정책과 피임 정책을 시행했지만 출산율 하락 속도는 더뎌서 중국의 출산율이 이미 70년대 말에 2명대로 진입했고 93년에 1명대로 떨어진데 반해, 인도의 출산율은 2000년대가 들어서야 2명대로 떨어졌다.[13] 인도는 인구도 가파르게 증가하여 2020년대에 인구로는 중국을 넘어설 것이라고 예상되고 있다.
그러나 산아제한 정책을 조기에 폐기하지 않아 중국은 심각한 저출산으로 인구 위기를 맞았다. 산아제한정책 성공이 결국은 중국의 국력 강화를 실패하게 한 것이다. 중국은 2015년 한 자녀 정책을 폐지했지만 출산율은 2016년에만 소폭 반등했고 2017년부터 출산율이 폭락해 심각한 저출산 위기 상황이 되었는데도 산아제한 정책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출산율을 반등시키지 못한다면 중국의 성장률은 폭락할 것이고 미국과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으며 국가적 위기를 피할 수 없다.
5.1. 1자녀 정책 폐지
2010년대부터 국책연구기관에서도 1자녀 정책을 폐지하고 2자녀 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2015년부터 중국의 생산가능 인구(만 15~64세)가 급속히 줄기 때문에 오래 지나지 않아 폐지될 거란 전망이 우세했다. 그러다가 시진핑 정부 들어 2013년 11월, 한 자녀 정책을 다시 완화해 앞으로 부부 중 1명이 독자이면 두 자녀까지 허용하는 쪽으로 바꾸기로 했다. 중국 정부는 이 제도를 실시한 뒤 수년 뒤 '두 자녀 정책'을 도입할 것으로 전망되어 사실상 계획생육정책은 폐지 수순을 밟았으며 2015년 10월 29일에 시진핑이 1자녀 정책의 완전폐지를 시사했고 결국 2016년 한 자녀 정책이 완전 사라지고 두 자녀 정책으로 선회하게 되었다. 기사 참조. 일단 2자녀까지는 누구든지 허용되는 셈.
이미 2010년대 들어 당원이나 공무원같은 경우를 제외한 일반인의 경우에 이 제도 거의 유명무실해지고 있으며, 인권유린 시비를 불렀던 강제낙태제도는 완전히 없어졌고, 벌금으로 대체되고는 있지만, 일부 성에서는 그 벌금도 안내고 버팅겨도 되는 수준까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2자녀 정책을 시행하면서 한자녀 정책 모범지역으로 선정된 지역에서 공무원들에게 자녀 2명을 낳을 것을 강요하는 경우도 빈번해졌다고 한다.
또한 산아제한 완화 이전에 둘째 자녀를 낳아 처벌을 받은 부부들이 지방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거는 일도 늘었다.
2016년 들어서 헤이룽장 성에서는 부분적 3자녀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헤이룽장 성 일대의 고령화가 한국 수준으로 심각해서 나온 궁여지책으로 보인다. 중국 헤이룽장성서 부분적 '3자녀 정책 시행'…국경지역 주민·소수민족 대상
다만 두 자녀 정책이라는 이름에서 보듯 계획 생육 정책을 완전히 없앤 것은 또 아니다보니 여전히 자녀를 3명 이상 낳은 경우 그 아이의 호적등록이 거부되는 등의 모습들은 남아있다. 또 일반인들은 덜해도 당원이나 공무원의 경우엔 여전히 셋째를 가질 경우 출당되거나 불이익을 당할 각오 정도는 해야 한다. 그리고 호적에 없는 아이들은 독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혜택을 못 받는 건 또 당연하고.
청년들이 과도한 집값[14] 과 교육비용 등[15] 의 이유 때문에 출산율 기피하는 현상은 중국도 예외가 아니라서 2자녀 정책을 펴는것만으로도 한참 모자라다는 전문가들의 진단이 이어지고 있으며, 3자녀 정책시행이나 산아제한 완전 폐지 및 출산장려 정책 얘기도 나오고 있다. 중국 정부도 2017년도 출생아수 감소를 나름대로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모양인지, 2018년 3월에 국가위생 계획생육위원회를 폐지하고 국가위생건강위원회로 간판을 바꿔달았으며, 중국인구협회 홈페이지도 폐쇄되었다. 이후로 2020년이 되면 산아제한이 완전히 폐지될 것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관측이며 고령화로 인해서 출산장려부서를 신설하는 등의 대책마련에 나서고 있다. 그 외에도 남초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에 딸이 둘인 가정에도 보조금을 지급한다.
5.1.1. 2자녀 정책 실패와 심각한 저출산 위기
산아제한 정책을 조기에 폐기하지 않아 중국은 심각한 저출산으로 인구 위기를 맞았다. 산아제한정책 성공이 결국은 중국의 국력 강화를 실패하게 한 것이다. 중국은 2015년 한 자녀 정책을 폐지했지만 출산율은 2016년에만 소폭 반등했고 2017년부터 출산율이 폭락해 심각한 저출산 위기 상황이 되었는데도 산아제한 정책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출산율을 반등시키지 못한다면 중국의 성장률은 폭락할 것이고 미국과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으며 국가적 위기를 피할 수 없다.
2자녀 정책 전면 시행 초기인 2016년 출생아수는 1,786만명대를 기록하면서 1999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고, 출산율도 한국의 90년대 초중반 수준(합계 출산율 1.7명)으로 올라갔다. 저출산은 도시화율과 직접적인 역상관관계가 있는데, 중국은 90%에 육박하는 한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도시화율이 58%에 불과하기 때문에 저출산을 벗어날 여지가 더 높다는 예상이 있었다.
일단 2017년에는 신생아 수가 2016년보다 줄었지만 여전히 2015년보다는 많기 때문에 저출산 경향을 멈출 수 있을지 아니면 일시적인 붐에 불과할지는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차이나포커스 봉황망코리아, 봉황망 기사와는 다른 시각 이에 대한 해석은 분분한데, 중국에서는 출산아 수는 줄었지만, 출산아의 상당수가 둘째라는 점에서 성과가 있었다는 입장이고, 서방에서는 출산아 감소를 들어 "효과가 없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결국 두 자녀 정책은 출산율 반등에 실패했다. 중국 정부는 두자녀 정책으로 선회한 후 2017년부터 연간 출생아수가 다시 2천만을 넘어서기 시작할 것으로 전망했으나 출산율은 2016년에만 소폭 반등했고 2017년에는 오히려 출생아수가 2016년보다 63만명이 줄고, 2018년 출산율은 더 크게 하락해, 2017년 대비 '''무려 200만 명이나 감소한''' 1,523만 명을 기록하며 효과가 전혀 없다는걸 보여주고 말았다.결국 한 자녀 정책 폐지만으로 저출산 경향을 멈추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서방의 예상이 맞았던 것이다. 2019년 출산율은 역대 최저인 1,465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또한 2019년에도 감소세가 멈추지 않아 2019년에는 1,465만 명으로 58만 명이 또 감소했고, 2020년에는 호적 등록까지 마친 신생아 기준으로 2019년보다 176만 명이나 감소한 1,003만 명을 기록했다. 이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최저치이다. 이미 인구감소가 시작될 것으로 예측되는 시기도 2028년에서 2023년으로 앞당겨진 상태이며, 게다가 절망적이게도 이미 생산가능 인구와 가임여성의 수가 지속적으로 줄고 있어[16] 중국 정부의 노력에도 저출산 문제가 나아지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현재 출산율이 국가 위기 상황인데도 중국 중앙정부는 산아제한 정책 완전 폐지에 지나치게 조심스러워 하고 있다.[17] 결국 중앙정부의 공식 발표가 없었는데도 인구 감소와 고령화가 심각한 중국 농촌에서는 노골적으로 다산 장려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과거 산아정책시기의 한 자녀 정책을 강요하던 태도가 180도 선회한 것이다. 최근에는 오히려 두 자녀 출산을 하면 상을 주고, 한 자녀를 출산하면 벌금을 부과하며 자녀를 출산하지 않는 딩크족은 처벌하겠다고 협박하는 표어가 쓰여진 벽보를 중국 농촌에서는 볼 수 있다. 과거에는 출산을 멈추지 않으면 전 주민을 불임수술하겠다고 협박하는 벽보를 볼 수 있었지만 최근에는 정반대로 출산을 하지 않으면 전 주민을 강제 임신시키겠다고 협박하는 표어를 공개해 비판과 반발이 있었다. 오히려 농촌의 강압적 출산 강요로 분노한 여성들이 농촌을 탈출해 역효과만 냈다.
그러나 중국 중앙정부가 산아제한정책을 전면 폐기하고 정책을 180도 선회해 국가적인 출산장려정책을 시행한다고 해도 성공 확률은 낮다는 예상이 강하다. 중국 정부보다도 억압적이고 전체주의적이었던 나치 독일과 스탈린 시대의 소련도 출산장려정책을 시행했으나 한계가 있었고, 루마니아는 출산장려가 아닌 출산'''강요'''정책을 시행했는데도 출산율 증가에 한계가 있었다.
https://www.scmp.com/comment/opinion/article/3047798/how-chinese-officials-inflated-nations-birth-rate-and-population 심지어 공식 발표된 출산율도 조작되었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6. 한국과의 비교
한국의 경우 중국과는 달리 어마어마한 벌금을 물거나 강제낙태까지 시행하지는 않았다. 한국도 중국과 비슷한 시기에 1950년대 중반-60년대 초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들이 아기를 낳을 시점이 되고, 인구 4,000만이 넘는다는 얘기가 나오고 결국 인구가 4,000만명을 넘어서자 빨리 출산율을 줄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에 '''"덮어놓고 낳다보면 거지꼴을 못면한다"''',"'''둘도 많다'''",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 "'''셋부터는 부끄럽습니다'''" 식의 자극적인 캠페인 표어를 쏟아냈다. 여하튼 그렇게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1986년에 출산율을 1.5명대까지 떨어뜨리는 데에는 성공하기는 했다.
당시 한국에선 아파트 분양자들 대상으로 불임수술을 하면 분양권을 우선으로 주기도 했다.[18] 여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산아제한 정책을 너무 오래 끌었다는 것. 만약 출산율이 인구대체 수준 밑으로 내려간 80년대에 풀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무려 1996년까지 유지되고 폐지되었다. 덕분에 한국은 이제 도리어 폭발적인 고령화와 노동인구 격감 등을 걱정해야 되는 저출산 국가가 되었다. 당시의 인구증가 문제가 그만큼 심각한 과제였다는 반증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이로 인해 새로운 과제가 생길 것이라는 데까지는 예상이 못 미쳤다.
정책 시작 당시 아직 중국은 산업화가 덜 되어 농촌인구가 절대다수였기에 한자녀 정책을 적용받는 가정의 수가 생각보다 적고, 편법을 쓰거나 벌금을 물어서라도 아들을 낳으려고 하는 경우가 워낙에 많았기 때문에 출산율 저하속도는 한국보다 느려서 90년대 들어서야 출산율이 2명 아래로 떨어졌다. 그래서 80년대 중후반생들의 인구 비중이 의외로 높아서 1970년대 후반생들보다도 수가 많다. 하지만 중국 역시 한국처럼 산아제한 정책을 너무 오래 끌었고, 그 결과로 생산인구의 감소가 '''한국보다 빠른''' 2013년부터 시작되었으며(한국은 2017년부터 시작) 1인당 GDP는 2019년에 들어서야 1만 달러를 겨우 넘었는데, 이미 65세 이상 인구의 비중은 2019년 기준 12.6%에 달해서 2021년 고령사회, 2031년 초고령사회 진입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1] 생산력 뿐만 아니라 아메리카에서 감자, 고구마, 옥수수 등 고산량 농작물 재배도 보급되었다.[2] 다만 이 시기의 식량 문제는 생산성 문제가 컸다. 물론 생산성이 급락한 것이 아니므로 인구증가가 비정상적이였단 게 맞다.[3] 이 양표는 각 성이나 지방마다 모양이 다르기 때문에 현재는 수집가들의 아이템이 되고 있다.[4] 1979년 당시 한국의 출산율은 2.90명으로 오히려 중국보다 높았으며 1980년에도 중국보다 높은 출산율을 기록했다. 하지만 당시 중국에서 농촌 인구가 많아 1자녀 정책을 적용받는 가구수가 생각보다 적은데다가 아들을 무리해서 낳으려는 사람이 많아 출산율 하락폭이 낮아서 이후로 쭈욱 중국이 한국보다 출산율이 높게 된다.[5] 그래서인지 1980년대 당시 중국의 출산율은 강압적인 산아제한에도 몽골과 북한을 제외한 나머지 동아시아 국가들보다 높았다.[6] 다만 신장 위구르 자치구 지역이 워낙 경제가 발전되지 못한 지역이다 보니, 이렇게 인구압력이 팽창하자 그 불만이 이슬람 원리주의나 독립열기로 확산되고 있다.[7] 돈은 있는데 법망을 피해서 낳고 싶은 사람들은 미국이나 홍콩, 마카오로 원정출산 가는 경우가 다반사였다.[8] "收养人只能收养一名子女."(제8조)[9] 한국에서처럼 불임시술자에게 아파트 분양권을 먼저 준다던가 등... 즉, 몇 명을 낳든 자유이지만 적게 낳는 사람한테 혜택을 주는 식이다.[10] 2012년 산둥성에서 강제 낙태를 실시하다가 엄청난 반발을 받았던 바가 있다.[11] 위구르족은 건드리기가 상당히 껄끄러운 관계로 지역에 따라 제대로 지켜지지 않기도 한다. 또한 중국의 위구르족 인구가 1,000만을 돌파한 건 21세기의 일이다.[12] 한국은 25%에 불과하다.[13] 이마저도 인도의 경제 발전 및 서구 문화 유입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에 의한 것이지, 인위적인 인구 조절이 성공한 결과가 아니다.[14] 베이징과 상하이, 선전지역의 집값은 세계적으로도 비싸기로 명성(?)이 높다. 집값높기로 유명한 홍콩이 부럽지 않을 정도. 하지만 평균봉급수준은 한국이나 일본은 물론이고 홍콩이나 대만보다 턱없이 낮은지라 이들 지역에서 사는 젊은층들은 출산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15] 소황제라는 말이 많이 나돌기는 하지만 교육열이 심하다보니 중고등학생이 되면 지옥(?)이 열려서 학교에서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것은 예삿일이고 집안이 부유한 경우에는 각종 사교육으로 아이들을 괴롭히는 경우도 많다.[16] 중국은 한 자녀 정책의 부작용으로 남녀 출생 성비가 심각한 남초라서 인구 유지를 위해 필요한 대체출산율도 2.1명이 아닌 2.2~2.3명대다.[17] 출산율은 90년대 초중반에 1명대로 감소했고 2004년과 2009년에 이미 중국 인구학자들이 한 자녀 정책 폐기를 요구했으나 중국 중앙정부는 시기상조라며 외면하다 2015년에야 한 자녀 정책을 뒤늦게 폐기한 것이다.[18] 채널A의 재연드라마 충격실화극 싸인에서 소재로 다루어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