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역사
1. 조선 전기
경복궁 입지 결정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야사'''가 전해진다. 무학대사가 한양에서 궁궐의 터를 잡을 때, 처음에는 청계천과 중랑천이 합류하는 지점(현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 부지.)에 터를 잡으려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 지나가던 노인이 소를 이용해 밭을갈며 소가 일을 못한다는 불평으로 "이러, 이 '''무학 같은 소야.'''"라고 하는 바람에 놀란 무학이 좋은 터를 묻자 여기서 십 리#s-3를 더 가라고 조언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처음 터가 왕십리[1] 가 되었고, 노인이 말한 곳이 현재 경복궁 터였다고 한다.[2]
경복궁은 풍수를 고려해서 지어졌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무학대사와 정도전 모두 수도로 한양을 지목했지만 무학 대사는 동향을, 정도전은 남향을 주장했는데, 결국 정도전의 뜻대로 이루어졌다. 그러자 무학 대사가 2가지 예언을 했는데, 첫 번째 예언과 두 번째 예언은...[3] 당연히 위의 두 이야기는 야사일 뿐이며 첫 번째 야사는 사실 무학대사가 한양을 지을 때나 경복궁을 지을 때 거의 아무 역할도 하지 않았다. 했다고 해봤자 한양에 대하여 태조가 묻자 ‘좋은 곳이긴 한데 대신들과 백성의 의견을 들어 결정하라’고 한 게 전부이다. 또한 정도전은 풍수지리를 괴력난신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두 번째 이야기 역시 야사일 뿐이다.
경복궁은 조선이 건국된 지 3년여가 지난 1394년 12월에 착공되어 1395년 9월 말에 1차 완공되었다. 흔히 비교되는 명나라의 자금성보다 먼저 지어진 궁전이다. 자금성은 1406년에 착공되어 1420년에 완공되었다. 즉, 경복궁이 자금성을 본따 지었다는 등의 설명은 틀린 설명이다. 완공 후 정도전이 궁궐의 주요 전각인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사정전, 근정전, 근정문 등의 이름을 정했다.[4] 처음 완공 당시 경복궁의 규모는 390여 칸이었는데, 흥선 대원군 중건 당시 규모가 7225칸이었다는 점을 보면 상당히 작고 조촐한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완공 당시 궁궐 중심부의 핵심 시절 위주로 건설되었으며, 궁궐 주위를 구분하는 담장도 없었다.[5] 이후 지속적으로 증설 공사가 이어졌는데, 특히 세종대에 대대적인 확장 공사가 이루어져서 제대로 궁궐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경복궁과 광화문의 축을 북한산과 관악산을 연결하는 축선과 일치하도록 서쪽으로 틀어지게 지었는데, 무학대사가 ‘관악산은 불[火]의 산이기 때문에 관악산과 북한산을 축으로 하면 도시가 화를 당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 광화문 앞길 130m 구간만 경복궁과 같은 축선으로 배치하고, 그 다음부터 종로 입구까지는 도로의 중심이 동쪽으로 최대 39m 가량 틀어진 구조로 조성하였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후, 1399년 정종이 개경으로 천도하면서 4년 만에 경복궁은 빈 궁전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후 1405년 태종이 한양 재천도를 단행했는데, 태종은 경복궁으로 돌아오지 않고 창덕궁을 새로 건설하여 이곳으로 들어왔다. 태종은 경복궁을 매우 꺼려 주로 창덕궁에서 거처했다. 태종이 1405년 한양으로 재천도를 명하고 개성을 떠나 한양에 도착했을 때 아직 창덕궁이 완공되지 않아 입궐이 불가능한 상태였는데, 이때 태종은 경복궁에 들어가지 않고 민가에서 일주일 정도 숙박한 후에 창덕궁에 입궐했다. 태종이 경복궁을 얼마나 꺼렸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다.[6]
태종은 경복궁을 기피하고 창덕궁에서 주로 거처했지만 경복궁을 방치하지는 않았는데, 큰 의례나 행사가 있을 때 거의 경복궁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태종 당시 처음 만들어진 창덕궁은 의례를 위한 외조는 매우 조촐하게 건축되었는데, 정전(正殿)인 인정전은 3칸 규모에 불과했을 정도였다. 때문에 처음에 창덕궁을 건립할 때, 주요 행사는 경복궁에서 치르고 창덕궁은 거의 주거 용도로 이용할 목적이었던 것 같다.
다만 태종은 세종에게 선위하면서 아들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해 창덕궁의 외조를 대대적으로 크게 고쳐짓는 공사를 명했다. 한편 재위 기간 동안 태종은 경복궁에서 큰 행사를 치르기 위해 박자청을 시켜 경복궁의 추가적인 중수 공사를 계속 진행했다. 1412년에는 연못에다가 어찌 건물을 올릴 수 있느냐는 신하들의 우려도 불구하고 경회루 건설을 지시했고, 박자청은 이를 실현시켰다. 왕세자 양녕대군이 친필로 직접 경회루의 현판을 써서 태종을 기쁘게 한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다만 태종대에 건설된 누각은 흥선대원군이 중건한 현재의 것보다는 작은 규모였던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경회루 하단의 석조 기둥들은 태종대에 만들어진 것이 임진왜란 때 불타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 경복궁 터를 묘사한 그림을 보면 황폐한 가운데 경회루의 석조 기둥들은 남아있는 것이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후 세종대를 거치면서 경복궁은 더욱 대대적인 확충 공사가 이루어졌다. 태종과 달리 세종은 협소한 창덕궁보다 넓은 경복궁을 선호했다. 상왕 태종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주로 창덕궁에 거처했지만, 태종이 승하한 후 세종은 경복궁 공사를 명하였고, 집권 중기 이후부터는 거의 경복궁에 머물면서 정사를 돌봤다. 특히 비만 및 눈병으로 고생하던 후기에는 거의 경복궁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경복궁에서 세종의 왕도정치의 흔적이 녹아 있는 상징적인 건물 중 하나가 집현전 전각인데, 왕이나 왕족이 사용하지 않는 궐내각사에 불과한 건물임에도 불과하고 집현전은 경복궁에서도 근정전과 경회루 다음 가는 규모의 크고 아름다운 건물로 건설되었다. 세종대에 여러 전각이 새로 지어졌을 뿐만 아니라, 초기에 다소 작게 건설된 사정전 등의 기존 건물들을 중수하기도 했다. 1431년에는 광화문이 세워졌다.
이처럼 경복궁은 세종대를 거치면서 제대로 궁궐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조선 전기 경복궁의 기본적인 형태는 세종 때 완성되었다. 이후 경복궁은 조선 전기 내내 조선의 정궁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세종대 이후에도 경복궁은 여러 왕을 거치면서 지속적인 증·개축을 거쳤다. 근정전과 광화문에는 청기와가 올라가기도 했다.
이후 중종 때 화재로 동궁전이 불타기도 했으며, 임진왜란 전 경복궁에 일어난 가장 큰 화재는 명종 때 발생했다. 1553년(명종 8년) 대화재가 발생해 근정전을 제외한 편전 및 침전 구역 건물들이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이때 조선 왕조에서 대대로 내려오던 귀중한 보물과 유산들도 화재로 함께 소실되었다고 한다. 윤원형 등의 지지하에 명종이 독촉한 결과 대규모 인력이 동원되어 이듬해에 매우 신속하게 중건이 완료되었다.
2. 임진왜란과 조선 후기
명종 때 중건된 지 38년 만인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선조가 파천을 떠나자 도성이 아노미가 되면서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들은 일본군이 입성하기도 전에 백성들의 손에 이미 모조리 불에 타 소실되고 말았다.선조실록에서는 선조수정실록처럼 왜 궁궐에서 불이 났는지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 같지는 않다.# #
왜란기의 경복궁은 선조수정실록의 기록대로 선조가 파천하자마자 성난 군중들이 궁성과 형조, 장례원을 약탈하고 불을 질렀다는 것이 정설이나, 방화 주체가 조선 백성들이 아닌 일본군이라는 설도 제기되긴 한다. 일단 인조대에 쓰인 선조수정실록은 《징비록》의 기록을 그대로 옮겨 적었는데, 당시 파천에 함께했던 류성룡도 직접 보고 쓴 기록이 아니라는 한계를 가지는 것은 사실이다. 무엇보다 파천 당일 폭우가 내렸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궁궐에 화재가 날 수 없다는 점을 내세운다.거가가 떠나려 할 즈음 도성 안의 간악한 백성이 먼저 내탕고(內帑庫)에 들어가 보물(寶物)을 다투어 가졌는데, 이윽고 거가가 떠나자 난민(亂民)이 크게 일어나 먼저 장례원(掌隷院)과 형조(刑曹)를 불태웠으니 이는 두 곳의 관서에 공·사노비의 문적(文籍)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궁성의 창고를 크게 노략하고 인하여 불을 질러 흔적을 없앴다. 경복궁(景福宮)·창덕궁(昌德宮)·창경궁(昌慶宮)의 세 궁궐이 일시에 모두 타버렸는데, 창경궁은 바로 순회세자빈(順懷世子嬪)의 찬궁(欑宮)이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파천 출발 당일은 아니더라도 일본군 입성 전인 음력 5월 초 어느 시점에 이미 경복궁이 불탄 것은 확실해 보인다. 한성 함락 당시 경복궁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일본 측의 기록이 나오면서 일본군이 방화한 것이 아니냐는 반론도 있지만, 해당 기록의 출처인 《조선정벌기》는 정작 임진왜란 때 참전도 하지 않은 저자 오제키가 후대에 상상력을 가미해 쓴 군담소설에 가깝기 때문에 경복궁을 보았다는 진술은 신뢰하기 어렵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일본군이 본 것은 4대문과 종묘 정도였다.
하지만 문화재청에서 간행한 《경복궁 변천사》라는 책에서는 일본군이 불태웠다는 주장을 내세우고 있으며, 그 근거로 당시 일본군에 종군한 승려인 제다쿠가 쓴 《조선일기》라는 책에 한성에 입성하고 경복궁을 직접 답사한 내용이 적혀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7][8]
이후 한양으로 환도한 선조는 정릉동[9] 에 있던 월산대군의 사저(私邸)를 개수하여 임시 궁궐로 사용했고 그곳을 정릉동 행궁이라 불렀다.[10] 선조는 경복궁 대신 창덕궁부터 우선 중건하도록 결정하여 1605년부터 창덕궁 중건 공사가 시작되었다. 사실 선조는 경복궁 먼저 중건할 계획을 세웠고 실제로 착공에 들어갔지만, 경복궁 터가 너무나 황폐화되어 복구하는 데 엄청난 물자와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예측되자 결국 경복궁 중건을 포기하고 창덕궁을 먼저 중건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게 되었다.
광해군은 즉위 후 중건된 창덕궁에 거주하면서 창경궁을 재건하였고, 새로 경희궁[11] 과 인경궁을 짓는 등 궁궐병이라 불릴 정도로 여러 궁궐을 동시 다발적으로 지었지만, 경복궁은 끝내 중건하지 않았다. 풍수지리적인 이유로 경복궁 중건을 일부러 피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경복궁은 조선 후기 내내 중건되지 못했고 궁궐 터는 일반인 출입금지 지역으로 묶인 채 270여 년간 벌판으로 방치되고 있었다고 알려져 왔다. 하지만 의령남씨가전화첩의 영묘조구궐진작도(英廟朝舊闕進爵圖)를 보면 영조가 근정전이 불타고 남은 축대 위에서 신하들에게 하례를 받는 모습이 있어, 그냥 아무 관리 없이 방치된 것은 아니고 나라에서 관리는 지속해온 것으로 보인다.
1864년 고종의 섭정 자격으로 정권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집권 이듬해인 1865년,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경복궁 중건에 착수했다. 2년 후인 1867년에 마침내 경복궁이 중건이 완료되었다. 흥선대원군이 중건한 경복궁은 7225칸 규모였다.[12] 경복궁 중건에 소요되는 재원은 당시 조선 1년 예산의 10배 가량 되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이를 조달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은 원납전을 걷고 당백전까지 발행하는 등 무리한 정책을 펼쳤는데, 당백전은 초인플레이션을 일으켜 조선 경제를 엉망으로 만들었고[13] 이는 결국 그의 실각 원인이 되었다.
흥선대원군이 국력을 크게 소모해 가면서까지 중건한 경복궁이지만, 정작 실거주자인 고종은 신축된 경복궁을 좋아하지 않았다. 경복궁에 입주한 지 5년만인 1873년에 고종은 아버지 흥선대원군 몰래 경복궁 북쪽 구석에 민가 형태의 건청궁을 지은 후 아관파천 때까지 거의 줄곧 그곳에 거처했다. 을미사변이 벌어진 장소도 건청궁 안 곤녕합이다. 개항 후에는 전등을 설치하고, 러시아인 건축가인 사바틴을 초빙해 건청궁 내에 있던 관문각을 2층 크기의 양관으로 바꾸는 등의 현대화 작업도 진행되기도 했다.[14]
결국 을미사변 후 고종은 경복궁을 버리고 러시아 대사관으로 피신을 단행했다. 아관파천 후 1897년 고종은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으로 환궁했고, 그해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환궁 당시 경운궁은 민가를 개조한 전각 두 채만 달랑 남아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고종은 1896년부터 1902년에 걸쳐 6년간 대대적으로 경운궁을 궁궐화하는 공사를 벌였다. 확장 공사라기보다도 그냥 궁궐을 새로 짓는 수준이었다. 공사 당시 '''경복궁의 전각들을 헐어다가 경운궁 전각을 세웠다.'''
경복궁과 다르게 창덕궁 전각은 전혀 헐리지 않았다. 1904년 경운궁 대화재로 경운궁 전체가 홀라당 타버렸을 때 고종과 조정은 창덕궁으로 이어할지, 경운궁을 재건할지 두 가지를 놓고 고민했지만, 경복궁을 사용하는 방법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이쯤 되면 경복궁에 대한 고종의 태도는 거의 혐오에 가까운 수준이라고 보인다.
경술국치 직후 일장기가 근정전에 걸린 것으로 알려진 바도 있지만, 엄밀히 말해서 이는 사실이 아니다. 자세한 것은 경술국치 문서 참조.
3. 일제강점기 시절
한일 강제 병합 후에는 식민지의 사기를 꺾고 실용성도 따질 겸 일본 총독부의 만행으로 인해 가장 훼손된 정도가 큰 궁궐 가운데 하나[15] 이기도 하다.[16] 일제는 우선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하며, 동쪽 담장을 안으로 밀어넣으면서[17] 약 4,000여 동의 건물을 없애 버렸고, 이후 경복궁 내부 중앙 축선에 근정전과 광화문을 가로막는 형태로 조선총독부 청사 건물을 지은 뒤[18] 광화문을 다른 자리로 옮겨버리기까지 했다. 이 외에도 여러 전각들을 훼손하거나 통째로 일본으로 밀반출하는 등 일제강점기 내내 온갖 수난을 겪었다. 그리고 일제가 훼손한 공간들은 상술한 조선물산공진회나 다른 박람회들을 여럿을 개최하는 등, 일종의 컨벤션센터 개념에 가깝게 활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일제강점기 때는 흥례문 터에 지어진 조선총독부 청사 및 집옥재 일대에 총독 관저의 경비를 맡은 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집옥재 일대의 경우 8.15 광복 이후에도 이 잔재가 남아서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30경비단 병력[19] 이 경복궁 내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는 1996년 30경비단이 33경비단과 통폐합해 제1경비단을 창설하고 부대를 이전하면서 해결하였다.
4. 광복 이후
일제강점기 일제의 수탈로 수난을 당했던 경복궁이였으나 광복 이후에도 격동하는 대한민국의 모습을 두 눈으로 지켜보며 경복궁은 수 차례 수난을 당해왔다. 경복궁에 남았던 대표적인 수난의 흔적인 조선총독부 청사는 해방 이후에도 미 군정청사, 한국전쟁 당시에는 북한군의 참모본부, 휴전 이후부터는 정부중앙청사로 쓰이게 되었다. 대한제국 황실이 몰락하고 조선총독부가 물러난 이후에도 경복궁은 대한민국 역사의 중심에 다시 서게 된 셈이다.
5.16 군사정변 당시에는 정변에 참여한 군인들이 경복궁 내의 정부중앙청사를 무력으로 점령하는 일도 있었다. 중앙청을 장악해 진압군을 무력화시키고 대통령과 미군의 승인을 얻어내기 위함이였다. 무력으로 경복궁을 장악한 박정희 정부는 광화문을 복원하겠다고 나섰으나 본래의 모습이 아닌 콘크리트 구조로 된 석조건물로 만들어버리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우리의 기술로 문화재를 복원할 수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함이였다.[20]
12.12 사태 당시에는 경복궁에 주둔하고 있던 장세동 대령 휘하의 30경비단이 수도경비사령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쿠데타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경복궁은 일본이 물러난지 35년만에 다시 한번 쿠데타 세력의 주둔지가 되었다.[21] 당시 쿠데타군의 핵심이던 전두환 소장, 노태우 소장, 장세동 대령 등은 이곳에 모여 정승화 총장 체포, 수경사령부 및 특전사령부 무력화 등의 계획을 세웠다.
이렇듯 해방 이후에도 오랫동안 수난을 당하던 경복궁은 1995년 문민정부가 시행한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일환으로 비로소 재조명받게 된다. 문민정부는 과거사 잔재 청산을 내세우며 구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였고 12.12사태의 주역이던 30경비단을 통폐합하여 이전하여 과거 일본 제국주의와 군사독재정권의 잔재를 지워내었고 이후 정부와 서울시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과거의 모습을 되찾게 된다.
5. 복원
광복 이후 경복궁을 다시 복원하려는 노력이 여러 차례 있었으나, 무산되거나 체계적이지 않게 복원되었다. 1955년부터 구황실재산사무총국이 경복궁사무소를 설치해 관리하기 시작했다.
엄연히 따진다면 지금의 청와대 자리 또한 경복궁의 뒤뜰에 해당되기 때문에[22] 완전 복원을 위해서는 청와대를 없애야 한다. 참여정부 때 청와대를 당시 '행정 수도'로 불린 세종시로 옮기기로 계획했으나, 대한민국의 수도가 서울이라는것은 관습헌법에 해당되는것이기에 헌법개정절차와 같은 국민 투표를 거쳐야하며, 그렇지 않은 신행정수도의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 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좌절되었다. 만약에 이때 대통령 관저를 세종시로 이전했다면 청와대 건물을 함께 옮겼거나 다른 장소에 청와대를 옮겨서 현대사를 기릴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박정희 정권 시절 경복궁을 복원하려고 하였으나 예산 부족으로 실제로 복원된 것은 광화문을 제 위치로 돌려놓은 것뿐이었다. 그나마도 예산 부족과 정확한 고증과 철저한 준비 없이 의욕만 앞서서 시도하여 광화문을 콘크리트 구조물로 복원하여 정확한 복원이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현판도 박정희 대통령이 쓴 한글 현판이었다. 웃지못할 일화로는 서예 대가이자 국회의원이었던 윤제술이 콘크리트 광화문에 걸린 현판을 보고 화가 나서 "아니, 어느 놈이 저걸 글씨라고 썼냐!"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그 때 옆에 있던 동료 정치인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대통령을 가리키자 식겁하여 얼른 큰 소리로 "아, 그래도 뼈대 하나는 살아 있는 글이구먼!"이라고 했다고.. 윤제술이 지적했듯이 박정희의 글씨가 문화재에 걸 만한 명필은 아니었다. 게다가 고증대로면 한자로 적어야 할 현판을 한글로 적었으니 거기서부터 문제점이 있었던 것. 광화문이 후에 다시 제대로 복원될 때 그 현판의 보존 여부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으나, 결국 고증을 지켜서 박정희 현판은 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되었다. 현판은 당대 것을 복원하기로 하고 복원은 광화문 유리원판 사진을 바탕으로 고종 당시 영건도감 제조로 광화문 현판 서사관이 된 임태영이 쓴 현판을 디지털 복원하기로 하였다. 일제가 시멘트를 바르면서 습기가 차 제습기를 돌리면서 그 진동으로 현재 균열이 진행 중인 석굴암을 그대로 보수하고 방치했듯이 전반적인 문화적 교양 없이 탁상행정으로 결정해 버린 폐해가 드러난 예라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나마 광화문이 겉모습이라도 멀쩡하게 복원되고 담장도 궁궐 양식을 복원되면서 최소한 이곳이 경복궁 부지임을 일반인들도 인식할 수 있게 되었고, 일제의 잔재였던 조선총독부 청사도 가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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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경복궁 복원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 데에는 비용 문제도 있었거니와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기 때문이었기도 했는데, 경회루 앞에 골프장을 만들겠다고 하거나(1963년), 박물관을 짓겠다면서 기존에 남아 있던 경안당, 대향당, 정훈당(동당) 등 9동 106칸의 전각을 철거(1966년)하는 등 그나마 남아있던 경복궁을 훼손하기도 했다. 철거한 경안당의 부재 일부는 1978년에 향원정 앞 향원교를 보수하며 사용한 기록이 있다. 1972년에는 앞서 서술한 고종 때 건축된 선원전 자리에 땅을 파고 불교 양식을 듬뿍 바른 국립중앙박물관 신청사 같은 건물을 지어올리는 몰상식한 정책을 반복했다.[23] 이렇게 정부와 공무원들의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현저하게 낮았기에[24] , 경복궁 외에도 전국적으로 문화재에 대한 보존이 사실상 없다시피 했다. 때문에 광복 이후에도 존속한 유적이 파괴되거나 유물이 분실되는 경우 등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또 1979년에는 마방 터에 후생관을 지었는데, 이 건물은 현재의 국립고궁박물관이다.
김영삼 정부 이후 본격적인 경복궁 복원 공사가 시작되었다.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여러 곳에서 복원 공사 중이다. 때문에 경복궁 권역 어딘가는 항상 공사 중. 하지만 이 공사에도 문제가 있는데, 동궁 근처 자리에 주차장을 짓질 않나, 앞서 국립민속박물관처럼 1979년에는 중앙청 후생관(현 국립고궁박물관)을 궐내에 짓더니 그것도 모자라 경복궁역과 연결 통로까지 짓는 등 어떻게 보면 궁궐 복원과 역행하는 짓을 저질렀다.
'''1990년 당시 경복궁 내의 전각은 36동만 남았다.''' 고종 당시 전각의 7% 수준으로 말 그대로 거의 대부분이 사라진 공터가 되어버렸다. 궁내 잔디 밭은 대부분 건물 터다. (사라진 문화 유산에 대한 관점으로 보자면 잔디밭은 건물들의 무덤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5.1. 1차 복원 사업
1990년부터 2010년까지 21년 동안 이루어진 경복궁 복원 사업이다. 1차 복원 사업에서 총 89동의 전각을 복원하였다. 조선 정궁의 기본 궁제 완비를 목표로 작업하여 복원에는 목재800톤, 석재 5,000톤이 사용되었다고 하며 총 사업비는 1,571억 원이다. 1차 사업 결과, 경복궁 내의 전각은 모두 125동으로 고종 중건 당시 전각 500여 동의 25% 수준이다.
5.2. 2차 복원 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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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명칭은 '''경복궁 2차 복원 정비 사업'''이다. 2011년 10월 3일부터 2020년대 후반까지 경복궁 전각을 76%까지 복원하는 계획이었으나, 2015년 12월 15일 문화재청은 경복궁 2차 복원 사업의 규모를 줄이고 총 기간을 연장하는 방향으로 조정키로 했다. 복원 추진 과정에서 문화재에 대한 방제 여건, 복원 후 활용, 관람객 불편 최소화 등을 이유로 254동을 복원하기로 했던 것을 80동으로 줄이며 공사 기간은 기존의 '''2045년'''으로 15년 연장하였다. 총 투입 예산도 5,400억에서 3,000억으로 감소하였다.
2011년 12월 8일 문화재청은 경복궁의 사정전, 수정전, 향원정을 창덕궁의 금천교, 부용정, 낙선재와 함께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
5.3. 논란
잘못 복원된 경복궁의 전각들#
경복궁은 1995년 구 조선총독부 청사가 해체되면서 본격적으로 복원이 시작됐지만 전각들이 복원될 때마다 항상 논란이 일고 있다. 이유는 당연히 '''그 전각이 어떤 모습인지는 알고 복원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사실 현재는 이러한 복원에 부정적인 학자들도 대단히 많다. 일단 결정적으로 전각을 원래 모습으로 복원하려면 그 전각이 어떻게 생겼는지, 내부는 어떤지 하는 내용을 샅샅이 알 수 있어야 하는데 현재 경복궁은 그런 도안이 없다.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은 《동궐도형》, 《서궐도안》이 남아있어 그 건물이 어떻게 생겼는지 대략적으로나마 알 수 있지만 경복궁은 다르다. 일반인들이 말하는 《북궐도형》이라는 것이 남아있긴 하지만 이는 그림이 아니라 배치도이다. 즉 전각들이 어디에 위치해 있고 몇 칸인지만 보여줄 뿐 내부 모습은 어떤지, 계단은 어떤 모양인지, 공포는 어떻게 생겼는지 같은 것들은 전혀 알 수 없다. 그리고 이 북궐도형도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거라 흥선대원군 당시 모습과 차이가 있다. 가령 강녕전과 부속 건물들이 원래 행랑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건 당시 왕실에서 그린 그림에서는 보이지만 《북궐도형》에서는 보이지가 않는다.[25]
경복궁을 찍은 유리건판 사진을 참고하면 되지 않겠냐는 사람들도 있는데 100%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그전부터 경복궁은 일본의 손에 전각들이 하나하나 해체되던 상태여서 경복궁의 모습을 다 찍지 못하고 겨우 20%만의 사진만 찍어냈다. 경복궁의 주요 건물들 당시 사진은 남아있는데 북궐도형을 기준으로 왼편, 오른편의 전각들의 사진은 선원전, 제수합, 자선당, 그리고 수정궁 빼고는 아무것도 사진으로 남지 못했다. 그나마 유리건판 사진에 있던 전각들의 대부분도 이미 복원되었고, 현재 사진은 남아있지만 복원되지 않은 전각은 선원전, 흥복전, 그리고 만경전밖에 없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건물의 내부나 외부를 추정해서 복원하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항상 논란이 있다.
새로 복원된 전각들도 제대로 복원되지 못한 것들이 꽤 있다. 자선당 계단은 한 개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복원 공사 때 세 계단으로 바꿔버리고 영추문도 제대로 복원이 안 됐고 태원전은 반이 잘린 채 복원되었다.[26]
5.3.1. 시멘트 사용
2018년 10월 8일 KBS의 보도에 따르면 흥복전 복원공사에 시멘트를 20포대정도 사용했으며, 작년인 2018년 4월에 관계자의 양심고백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 이에 재시공에 들어갔으나,# 시멘트가 소량 남아있을 수 있다고 문화재청이 밝혀 논란이 일고 있다. 한편 현재 진행 중인 전국의 여러 문화재 복원 현장에서 시멘트가 무분별하게 사용되고 있다고 제보가 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1] 往十里, 갈 왕(往)를 써서 십 리 더 가라는 뜻.[2] 이 야사는 사극 용의 눈물에서도 작중 에피소드로 다뤄졌다.[3] 한양성을 쌓을 때 어떤 바위를 성 안에 넣느냐 마냐로 정도전과 무학대사가 싸운 적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풍수지리상 그 바위가 성 밖에 나오면 유교가 흥하고 성 안에 들어가면 불교가 흥한다는 것이었는데, 두 사람의 의견이 워낙 강하여 결정을 내리지 못했던 중 눈이 바위를 성곽 바깥으로 두어 둘레를 그리며 쌓였고 무학대사는 '불교가 이번 왕조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이 하늘의 뜻이구나!' 하여 체념하였고 눈 울타리, 즉 설울이 훗날 서울의 어원이 되었다는 이야기기도 있다. 이 바위는 인왕산 선바위라고 알려져있다. 서울의 어원은 정확히 밝혀져 있지는 않으나 신라의 수도였던 서라벌(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이 변한 것이라는 설이 매우 유력하다.[4] 정도전을 증오했던 태종은 왕위에 오른 후 창덕궁을 새로 짓도록 하고 그곳에 주로 머물렀다. 또 완공 직후 정도전이 일괄적으로 이름을 붙인 경복궁과 달리 창덕궁은 각 전각의 이름을 따로 짓지 않았다.[5] 제1차 왕자의 난 때 사병 군대가 쉽게 경복궁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였기도 하다.[6] 그도 그럴 것이, 경복궁이라는 이름부터 시작해서 각종 전각 이름을 지은 당사자가 바로 태종이 죽인 정도전이다. 태종 입장에서, 경복궁에서 산다면 매일 밤 잠 자는 강녕전이나 집무실인 사정전의 현판만 봐도 누가 떠오르겠는가? 실제로 태종 11년에 사간원에서 ‘태조께서 지으신 경복궁을 비워두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요지의 상소를 올려 태종에게 경복궁에 다시 거처하라고 주청한 일이 있다. 그러나 태종은 꽤 솔직하게 ‘내가 무인년에 말하기 부끄러운 일을 했는데 어찌 차마 경복궁에 거처할 수 있겠느냐’며 거부하였다.[7] 임진왜란 때 경복궁은 누가 불태웠을까?[8] 문화재청은 경희궁도 일제가 파괴했다는 왜곡된 서술을 반복하고 있어 무작정 신뢰하긴 어렵다. 경희궁은 흥선대원군 때 경복궁 중건 자재로 사용하기 위해 철거되었다.[9] 현재의 성북구 정릉동이 아니라, 당시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貞陵)이 있던 현재의 중구 정동 지역이다.[10] 이후 광해군대에 경운궁(慶運宮)이라는 이름을 받고 정식 궁궐로 승격된다.[11] 건설 당시에는 경덕궁(慶德宮)이었지만 영조 때 경희궁으로 이름을 바꿨다.[12] 애초에 처음 창건된 경복궁은 390칸 정도의 비교적 아담한 규모였으나 이후 실용적 필요로 확장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임진왜란 직전 경복궁의 규모는 아무리 크게 봐도 5,000칸 정도였다.[13] 원래 상평통보 최고액권이 당이전(當二錢)이었는데, 갑자기 그 50배 가치의 주화를 시장에 쏟아내게 되니 당연히 인플레이션이 일어날 수밖에.[14] 현재 관문각이 있던 자리는 빈 터로 남아있는 상태며, 을미사변 당시까지 건재했고 설계자였던 사바틴이 관문각에서 사건의 전말들을 목격했다고 한다.[15] 가장 심하게 훼손된 궁궐은 창경원이라는 이름으로 '''동물원으로 마개조된''' 창경궁이었다.[16] 한국이나 대만 일부에서 주장하는 쇠말뚝 주장처럼 풍수지리적으로 기를 누르려고 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 정도로 일본에 풍수지리가 많이 퍼지지는 않았고, 일본은 조선의 풍수지리를 미신이라며 비웃고 폄하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17] 현재 삼청동길이다.[18] 광복 후에도 대한민국 정부 중앙청으로 오래 쓰였고, 정부서울청사 및 정부과천청사 완공 후 1986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쓰이다가 문민정부 시절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을 펼치며 해체되었다.[19] 12.12 군사반란 당시 반란군에 속한 장세동이 지휘한 그 부대다.[20] 다만 이건 문화재 복원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무지가 더 큰 원인이였다.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복원한다는 개념보다는 더 크고 멋있게 빨리 만들어야한다는 당시의 시대상이 반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박정희 정부는 신라의 옛 도읍인 경주에 보문관광단지를 개발하여 신라시대의 유적을 발굴하였고 이 과정에서 경주 월성, 안압지, 대릉원 등의 신라 유적 및 유물들을 재조명한 업적이 있다.[21] 우연스럽게도 당시 30경비단이 주둔했던 위치 역시 일본군 총독부 청사 방위대의 주둔지와 동일한 위치였다. 경복궁의 옛 전각인 태원전의 터가 바로 이들의 주둔지였다.[22] 지금의 경복궁은 면적의 일부가 잠식당했지만 부지의 상당 부분은 보존된 편이다. 경복궁의 권역에는 지금의 청와대 자리까지 포함되는 정말 크고 아름다운 궁궐이었다. 하지만 그 권역 중에서 3분의 2가 날아간 덕수궁이나 권역이 통째로 사라졌다가 10분의 1 정도만이 복원된 경희궁에 비하면 보존이 잘 된 편이다.[23] 1993년부터 국립민속박물관이 사용중. 이 건물은 법주사 팔상전, 금산사 미륵전, 화엄사 각황전에 불국사 청운교·백운교, 연화교·칠보교의 건축 양식을 혼합한 건물이다. 숭유억불을 지향한 조선왕조의 법궁에다가 불교식 건물을 지어서 역사와는 딴판이 되게 한 데다가 복원에 걸림돌이 되게 만들었으니 학계에서 비판이 쏟아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뒤에도 나와 있듯이 이 건물은 철거 예정이다.[24] 이러한 극치를 보여준 예가 무령왕릉 발굴 때의 박정희의 일화와 1994년부터 있었던 경주 경마장 유치 파동이었다.[25] 1875년 화재 때 강녕전을 비롯한 내전 건물들이 다 타버려 다시 지었을 때 행랑을 연결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26] 다만 태원전 권역은 일제시대에 궁궐담장이 변형되어 재건 당시보다 궁궐이 안쪽으로 밀려 들어간 상태이며 전체 권역을 다 복원하려면 효자로를 거의 절반 가까이 밀어내고 궁궐 담장부터 복원해야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