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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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 사회 전반에 대해 서술한 문서.
2. 민족
"'''내가 몸소 다니며 약취(略取)해 온 한인(韓人)과 예인(穢人)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수호·소제하게 하라'''"
『광개토대왕릉비』 비문 중.
주요 민족은 '''부여 계통의 예맥'''이었다. 예는 부여, 맥은 고구려라는 게 일단은 통론. 흥미로운 점은 『광개토대왕릉비』에 예인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아예 같은 부여(예맥) 계통인 예인 또한 한반도 남부의 한(韓)인과 함께 '''이민족'''으로 취급한 듯하다. 더 나아가 충주 고구려비에선 신라를 아예 동이, 즉 '''동쪽 오랑캐라고 명시'''까지 해놨다.[1]"'''동쪽 오랑캐 신라 매금이 늦게 돌아와(東夷寐錦遝還來)'''"
『충주 고구려비』 비문 중.
고구려는 정복한 지역의 지역민들이나 이민족을 집단예민(集團隷民)이라고 불렀고, 이들의 위치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평민과 천민의 사이에 끼어있거나 천민인 입장인 경우가 많았다. 만주원류고에서도 고구려에 대해서 조사하니 마음에 들지 않은 것들이 많았는지 만주족은 전과는 다르게 고조선과 고구려를 자신들의 조상 후보에서 제외해버렸다.[2]
동시에 고구려는 이민족을 복속할 때의 말갈, 거란 등에 대한 고구려의 복속지배 형태가 사료로 남아있다. 이러한 지배형태는 피정복지의 반발을 줄이고, 복속지로부터 고구려에게 필요한 것은 취하되 복속지에 대한 지배력을 투사하는 과정에서 고구려의 국력이 불필요하게 낭비되는 것을 막고 점진적으로 고구려에 흡수시키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일례로 고구려에게 6세기 중반에 완전히 동화되는 말갈의 경우 고구려가 망하자 고구려의 계승을 내세우며 발해를 건국하는 데 기여했다.
여러 종족이 교차하는 만주지역의 특성상 거란, 선비, 말갈, 돌궐 등 '''다양한 북방 민족들을 휘하에 복속시켰다.''' 특히 선비족 같은 경우 초기 유리명왕 대에 그 일부를 복속한 기록이 보이고 먼 훗날 5세기에도 선비계가 주류인 북연의 인구를 흡수했다. 또한 몽골의 유연족 역시 멸망 후 일부가 고구려로 망명했다. 거란의 경우 고구려에 복속하고 있었으나 6세기 말부터 7세기에 점차 중국이나 돌궐에게 붙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사실 거란은 완전한 동화를 하지는 못했으며 장기간의 복속으로 동화상태에 갔던 말갈족 등과는 다르나 거란족 일부는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함께 했다. 말갈족의 경우 대부분 고구려에 복속하여 동화되어졌다 여겨진다. 흑수말갈족의 경우 동화까지는 아니더라도 복속하여 고구려 멸망 때까지 함께 한다. 돌궐족 역시 유연과 마찬가지로 영양왕 때 일부 부족이 복속되었다. 고구려 시기 상당기간 동안 중원이 혼란했던지라 중원에서도 상당한 인구의 한(漢)족을 비롯한 여러 민족이 고구려로 이주하거나 복속되었다.
전체적으로 고구려라는 나라는 이처럼 대륙에서 피난 온 여러 종족들을 흡수해서 국력을 키워 온 나라라고 할 수 있다.
3. 신분 제도
고구려의 사회 계급은 귀족·평민·노예로 구성되어 있었다(귀족 사회). 귀족층은 상호(上戶), 평민층은 하호(下戶)라 불렸다고도 한다. 상호는 일을 하지 않아서 앉아서 먹는 자라는 뜻인 좌식자로 불렸다. 좌식자들은 평소에도 칼을 차고 다녔다고 한다.
고구려의 정치를 주도적으로 관리하며 사회적으로도 높은 지위를 누린 계층은 왕가출신인 계루부 고씨, 절노부를 비롯한 5부 출신의 귀족들이였다. 고구려의 정치체제는 왕정[전제군주정]이었다. 주요 가문으로는 고구려 초중기 명림답부[3] 이후의 명림씨 가문, 을파소 가문, 창조리[4] 가문,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구려 말기에 등장하는 연 가문이다[5] 관직은 할아버지 연태조가 고구려 군사지휘권자인 막리지, 오늘날로 참모총장,하 참의장격 관직이있고, 아버지 연태조는 오늘날 국방부 장관급[6] 관직인 대대로의 관직에 올랐다. 이후 연개소문은 자신의 아들들을 막리지의 자리에 올리고 대막리지[7] 이들은 그 지위를 세습하면서 높은 관직을 맡아 국정 운영에 참여했으며, 전쟁이 나면 스스로 무장하여 앞장서서 적과 싸웠다. 뭐 이건 딱히 고구려만 그랬던 건 아니고, 타국 지배층들도 전쟁에 지면 자신들의 재산과 지위가 모조리 사라질 확률이 높으니 여간해서는 무장하고 싸웠던 경우로 보면 된다. 이들은 각기 방대한 양의 토지를 소유했으며, 조의, 선인 등 관리를 거느리고 있었으나 귀족 휘하의 관리들은 왕이 거느리고 있는 관리들보다 급이 떨어져서 관직명이나 지위가 같아도 함께 서있거나 할 때에는 같은 줄에 있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고구려는 백성이나 국민[8] 들을 조선시대 백성이 아닌 백정이라 불렸는데[9] 일반 백성은 평민으로는 농경사회인 조선과는 달리 무역을 중심으로 농경,상업,군사,유목이었고, 병역, 납세의 의무를 지며, 이들은 국가 공사에도 동원되었다. 또 일반 평민들 중에는 집단예민(集團隷民)이라는 존재들이 있었는데 평민과 천민 사이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바로 고구려의 영토나 영향력(간접지배 포함)하에서 정복된 집단으로 점차적으로 고구려화를 하면서 일반 평민으로 편입되는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 집단예민(集團隷民) 때에는 고구려가 요구하는 병력차출에 동원되었을 뿐만 아니라 공납을 바쳤다.[10]
고구려의 천민계층으로 노비(奴婢)가 있었다. 노비는 포로, 죄인, 채무자, 귀화인 또는 몰락한 평민 등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고구려에서는 신분 계급에 따라서 집과 의관(衣冠)에 차이가 있었던 편이다. 따라서 고구려 역시 골품제와 유사한 신분제도일 가능성도 있다. 고구려의 신분에 따른 의관(衣冠)문화는 바로 그들이 착용하던 모자가 대표적인 기록으로 남아있다.
백라관(白羅冠)-청라관(靑羅冠)-자라관(紫羅冠)- 조미관(鳥尾冠)-비라관(緋羅冠)-조우관(鳥羽冠)등이 대표적이었다.
흰색 비단의 백라관은 왕만이 쓸 수 있었으며 최고위 귀족들만이 쓴 청색 비단의 청라관(靑羅冠) 그 다음이 붉은 색 비단의 비라관(緋羅冠) 그리고 마지막이 자주색 비단의 자라관(紫羅冠)은 관등의 차이를 나타내며 신분의 입장을 보여준 대표적인 고구려의 관모이다. 물론 이것은 관등의 차이로 볼 수 있지만 동시에 신분의 차이를 분명하게 나타난 것이기도 하다.
관모 말고도 지배층의 다른 모자로 새의 깃털을 세 개 또는 네 개 정도를 꽂은 조우관(鳥羽冠)이 존재하며 평민들은 새의 꼬리를 꽂은 조미관(鳥尾冠)을 쓰는 등 대표적으로 이런 차이들이 있었다. 물론 언급된 의관 말고도 다른 중국 쪽에서 유행했던 남북조시기에 유행하였던 위모관(委貌冠)이나 통천관(通天冠)등도 나타나는 등 계급에 맞는 각각의 의관이나 헤어스타일을 통하여 계급을 알아볼 수 있었다.[11]
4. 형법
고구려는 본래 부여에서 기원을 둔 만큼 부여의 형법을 적용했다고 한다.
척박한 환경인 데다 북방 국가와 자주 전투를 해야 하다보니 통치 질서와 사회 기강을 유지하기 위해 시행한 형법은 매우 엄격했다고 한다. 반역을 도모하거나 반란을 일으킨 자는 화형에 처한 뒤에 다시 목을 베었으며, 그 가족들은 노비로 삼았다고 하며, 살인을 저지른 경우에도 살인자를 죽이고 그 가족을 노비로 삼았다고 전한다.
또한 굉장히 호전적이고 상무적인 일면이 있어서 적에게 항복한 사람이나 전쟁에서 패한 사람 역시 사형에 처해졌다고 한다,[12]
절도죄를 저지른 도둑은 훔친 물건의 12배를 물게 하였다. 이는 일명 '1책 12법'으로 고조선대에 만들어졌다는 팔조법이나, 부여의 법에도 비슷한 법이 있는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런데 고구려의 제도가 1책 12법인지는 명확하진 않다. 여러 기록들 중에서 《구당서》에서만 1책12법을 언급할 뿐 다른 기록들에서는 오히려 10배의 배상을 언급하는 경우가 많다.(《북사》, 《수서》, 《신당서》)그 외에 《주서》에서 10여 배로 갚는다는 내용이 있다. 종합하자면 고구려는 1책 10법이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은가 한다.
또한 남의 가축을 죽인 사람을 노비로 삼거나, 남에게 진 빚을 갚지 못한 사람은 그 자식들을 노비로 만들어 변상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중대한 범죄자가 있을 경우에는 제가들이 모여 논의하는 제가회의를 통해 처벌하였다. 이토록 고구려에서는 범죄자에 대해 엄격한 형법을 적용하였기 때문에 고구려의 법률을 어기거나 사회 질서를 해치는 자가 드물었다고 전해진다.
5. 언어
고구려어 문서 참고.
6. 교육
전국의 지방에 경당을 설치하여 평민층을 대상으로 경전과 기마, 궁술을 교육했고 현대의 국립대학쯤 되는 태학도 존재했다.
태학은 동진의 영향을 받아 소수림왕 시기 설립되어 기록상 한국의 최초의 교육기관이라는 의의를 가진다. 태학 외에도 국자학이라는 학교도 존재했다. 이 곳의 교육자는 박사라 하여 태학박사, 국자박사라 불렸다. 태학과 국자학 모두 주 입학 대상이 귀족 자제였던 것을 보아 관료양성기관으로 여겨진다.
경당은 지방의 큰길에 세워져있었다는 기록으로 따라 일정 규모 이상의 지방에 설치된 사립교육기관으로 추정된다. 중국의 기록에 따르면 미혼의 자제들이 교육받았다는 것을 통해 청소년 교육 기관이라 여겨진다. 또한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나 구석진 마을 출신도 교육받았다고하고 그런 이들도 책을 읽기 좋아했다고 한다. 수도에 있는 태학 외에 귀족을 위한 교육기관이 없던 것을 보아 신분에 관계없이 교육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7. 경제
수렵과 목축을 농업과 병행하던 부여와 달리, 초기의 고구려는 산지가 대부분인 국토의 여건상 농업이나 목축 등을 행하기 어려웠고, 주변 약소 부족을 털어먹는 약탈 경제에 거의 의존했다. 농업은 물론이고 목축도 고구려 초기에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물론 고구려에서 초기에도 하층민들이 경작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지만, 광개토대왕~장수왕대 이전까지 약 400여 년간 산악 국가였던 고구려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했고 주로 옥저 같은 주변 약소국을 털어먹는 약탈 경제였다. 사실 고구려의 영토였던 한반도 북부부터 요녕성, 만주에 이르는 지역은 대게 산지, 구릉, 산지, 고지대 등이 많고 평균 기온이 낮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지역은 그리 많지 않았다. 특히 4세기 이전 고구려의 영토는 해안의 극히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국토 전체가 산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나마 4세기 때 낙랑군을 정벌하고 나서야 비로소 평지라 부를 수 있는 땅을 얻게 된다.
이 당시의 농경방법은 휴경을 하는 것이 일상적이었으므로 경작을 하고 난 뒤 2~3년간 땅을 묵혀두어야 했다. 때문에 2~3년간 특별히 할 것이 없을 때에는 식량과 자원의 확보를 위해 주변지역에 대해 약탈이나 전쟁 등을 벌이는 군사활동을 벌이며 농업과 약탈을 병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고구려는 성립초기부터 한사군과 주변세력들에 대하여 군사활동을 벌여오며 경제력과 부를 획득해왔다.
이후 세력이 확대되어 말갈이나 거란 등의 유민들을 받아들인 후에는 돼지 등이 중시되는 등 목축의 성행을 암시하는 기록들이 있다. 지리, 기후 여건상 밭농사가 주였으나, 요동에서 대방(황해도)에 이르는 지역에서는 부분적으로 논농사가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자원확보는 농업 이외에도 주변지역에 군사활동을 벌여 자원을 확보하거나(약탈?) 휘하 유목민들을 부려 수렵, 유목 등을 통해 가축을 얻는 등의 방법도 있었다.
또한 요동지방에는 현대에도 알아주는 대규모 철광이 존재했다. 고구려의 철은 북만주의 실위에 수출되기도 했었다. 도로망이 잘 발달되고 수레가 잘 활용되어 각종 천연자원을 원활히 수출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평양에는 수레가 대량으로 다닐 수 있는 고구려시기 다리유적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고구려의 교역규모를 정확히 묘사하는 기록은 없으나, 2차 고수전쟁 개전 초기에 수나라가 돌궐기병 2만 명을 앞세워서 거란을 기습했다는 기록을 통해 간접적으로 추측해 볼 여지가 있다. 그때 수나라 군대는 돌궐기병을 고구려로 가는 상단으로 위장해서 거란을 쳤는데, 거란 측은 쳐들어오는 돌궐기병이 상단이라 믿고 있다가 크게 당하여 성공한 바 있다. 이는 고구려로 들고 나는 상단의 규모가 상당히 컸음을 암시하는 기록이다. 2만 기병의 10%만 선봉대로 돌진한다고 쳐도 말이 2천 필인데, 이를 상단으로 착각했다면 무척이나 대규모 상단이 존재했다는 말이 된다(...).
일본에 '토산물'로 낙타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휘하 거란족에게서 거둔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이 낙타는 '''쌍봉낙타'''로 중앙아시아와 몽골, 중국 동북부 등에 분포해 있었다. 혹이 큰 단봉낙타는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에 분포해있던 종이다.
그리고 국가가 부유했을 것으로 보이는 게 645년 고구려-당 전쟁에서 개모성에서 탈취한 곡식이 10만 석, 요동성에서 탈취한 곡식이 50만 석이나 되는 점으로 보아 비축해둔 곡식의 양도 엄청났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을 뒷바쳐 줄 수 있는 근거는 만주평야는 중국의 중원에는 비할 바가 안 되지만 그래도 한반도보다 더 큰 평야가 있고 북쪽에는 농사 짓는 데에 좋은 흑토로 구성되어있어 곡물의 수확량이 상당했을 것이고 아직까지도 만주는 중국의 주요 곡창지대 중 하나이다.
8. 인구
사서에서 고구려의 인구에 대해 기재되어 있는 것을 추리면 아래와 같다.
- 《삼국사기》 위지 동이전 고구려: 3만 호「萬戶」
- 《구당서》 동이전 고려: 5부 176성 69만 7천 호「千戶」
- 《삼국유사》 기이편 고구려: 21만 508호
가구당 인구 숫자를 계산할 때 표본을 (3543명/763호)[13] 로 잡으면 3~4백만 명이고 (20여만 명/28200호~20여만 명/38200호)[14] 를 기준으로 잡으면 6백만 이상까지 가능하다. 중국 남조가 50~90만 호 사이이고 위나라가 66만 호라는 것을 감안하면 어느 쪽이든 간에 고대 국가 치고는 상당한 덩치인 셈이다. 고구려의 옆 동네인 중국 왕조 한나라, 수나라, 당나라 인구가 4~5천만이나 되지만 인구밀도로 치면 이에 버금가는 수준이다.[15]
이에 대해서는 과장된 수치인가 축소된 수치인가, 고구려 전체 인구인가 일부 인구인가 여부, 고구려 자체 조사 기록인가 당나라 자체 조사 기록인가 등이 갈리는데 소수설, 통설 부분에서 후술한다.
한편 《삼국유사》에서는 고구려의 인구를 전성시에 21만 508호에 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야사인 동사보유에도 인용되어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구당서》의 70만 호 기록이 틀리고 《삼국유사》대로 고구려의 전체 인구일 가능성[16] , 《삼국유사》나 《구당서》 둘 다 다른 특정 시기 고구려의 전체 인구일 가능성[17] , 고구려 특정 지역의 인구일 가능성[18][19] , 전체 70만 호 인구 가운데 순수 고구려인 인구일 가능성[20] , 호구 편제가 호당 5명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달라서 자체 편제 21만 호가 당나라식 70만 호로 환산됐을 가능성[21] 등이 제기되며 《한서》, 《후한서》 지리지와 《삼국지》 동이전에서 중국이 인식한 국가들의 인구규모 등이 참고된다.
이에 따라 고구려 인구 추정치에는 중국 사학계 및 이옥, 윤종주 등이 제기한 100만 이하설, 《삼국유사》나 1~3세기 중국 기록을 참조하여 이를 비판 혹은 수정한 100만 설, 손영종, 채희국 등의 북한 사학자나 김용만 등의 일부 국내 학자들이 제기한 500만 이상 혹은 혹은 700만 이상설까지 최댓값과 최솟값의 간극이 큰 편이다.
다만 《구당서》 및 《삼국사기》에 기록된 70만 호에 가구당 인구수 4~6을 곱한 300~400만이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무난하게 보는 수치에 해당한다.[22]
역사인구학에서는 도시나 유적의 규모, 토지의 생산성, 경제활동 등을 단서로 접근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아직은 매니아들 사이에서 정황증거 정도로나 활용될 뿐 아직 삼국시대에 대해서 학술자료로서 엄밀한 검토를 통해 다뤄지지는 않는 듯.
8.1. 소수
한국의 고구려 인구 100만 이하설은 위와 같다. 대체적으로 중국 사학계에서 보고 있는 고구려 인구이기도 하며 한국에서는 이옥, 윤종주[27] 등이 내놓은 주장이다.한 호가 보통 5인으로 구성된다고 할 때 위의 사료[23]
에 따르면 고구려의 인구는 15만에서 300만 이상으로 증가한 것이 된다. 어떤 사가는 백제에는 76만호, 즉 380만 명[24] , 신라에는 수도인 경주에만 17만8936호 즉 약 90만 명[25] 이 살았다고들 한다. 이 숫자들은 명백히 과장된 것이며, 여기서 호는 명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한 문헌[26] 에는 고구려에는 21만508호, 다시 말해서 약 100만가량의 주민이, 그리고 백제에는 15만2300호, 약 76만 1500명 정도가 살았다고 쓰여있는데 바로 이 주민들의 수가 《구당서》에 나타난 호의 수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렇게 믿는 또 하나의 이유는 11세기 중엽에 한반도에는 총 210만 명이 살고 있었으며 17세기에도 500만 명이 약간 넘는 인구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삼국시대에 총 800만이 넘었던 인구수가 7세기에서 11세기에 약 500만이 되었다는 것은 수학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다. 이 모든 점에 비추어 볼 때 고구려 말기에는 69만 7000호가 살았던 것이 아니라 69만 7000명이 살았음이 명백해 진다.
'''<고구려 민족형성과 사회, 이옥, 1984>'''
참고로 고구려 인구 70만 중에 30만이 죽고 30만이 끌려가고 나머지는 이민족이나 발해나 신라로 소수 흘러들었으니 한국사와 접점이 없다는 요지로 중국 사학계에서도 위와 비슷한 수치를 주장하고 있다.[28][29]
이옥이나 윤종주의 경우 후대의 고려와 조선 중기[30][31] 의 추정 인구를 각각 200만, 500만으로 보기 때문에 고구려 인구 70만 호는 너무 많다 여겨 인구 증가율을 역산, 고구려의 인구를 70~100만 명 정도로 보고있는 것이다 이후 이옥은 한사군의 호적 조사, 《삼국지》 동이전에 기록된 수치 등을 합산한 수치가 대략 100만 가량이고 《삼국유사》의 '고구려 전성시 인구 21만 호'라는 기록을 감안하여 고구려 인구를 90~135만가량에 휘하 말갈 인구가 더 붙을 수도 있다고 주장을 수정한다.[32]
8.2. 통설
일반적으로는 70만 가구라는 기록을 별 다른 의심 없이 인정하고 여기서 가구당 인구 숫자를 곱하는 것이 통설이다.[33]
《한서》 등에 기록된 한사군의 인구 숫자, 3세기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의 인구 등을 보면 이미 100만을 넘어가며 이마저도 완전한 전수조사라 보기 어렵다는 점, 삼국시대와 후대의 영토 크기가 확연히 다르기에 일률적으로 계산식을 집어넣을 수 없다는 점, 고려와 조선시대 인구 숫자 추정치도 확실하지 않다는 점, 고구려의 전쟁 동원능력 등을 고려하여 소수설을 비판하고 고구려의 인구를 추정하는 등의 고찰이 곁들여지기도 한다.[34]
조상현은 위와 같은 검토와 함께 고구려인의 25% 이상이 군인이며, 그 인원이 640년에서 670년까지 단 한 번의 교대도 없이 복무했으며, 당나라가 전사 및 포획시킨 인원이 고구려 군인 전체 숫자라고 가정을 해도 고구려의 인구는 160만을 넘어가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70만 호 이상의 인구는 조선시대에도 검토를 거친 수치인 만큼[35][36] 고구려 인구는 300만은 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한 바 있다.[37]
여기에 대해서도 세세한 구분이 있는데 70만 가구는 당나라가 집계한 인구가 아니라 고수, 고당대전 이전의 멀쩡한 시절 내지는 전성기 고구려의 인구라는 견해,[38][39] 고구려인 70만 가량에 나머지는 이민족이라는 견해,[40] 멸망 당시 집계된 인구로 고구려 인구 전체가 아닌 일부의 집계라는 설 등이 있는데 일부는 다수설에서 후술한다.
어쨌든 대개 가구당 인구수 4~6을 곱하여 고구려 특정 시기 내지는 말기 인구를 300~400만가량으로 추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8.3. 다수
앞서 살핀 통설에서는 고구려의 병력 동원 능력을 고찰하여 인구 숫자 300만 이상 설을 소개했지만 350만 인구 가운데 병력 자원을 100만 이상으로 상정하고[41] 군 병력 교대 주기도 여전히 긴 등 여전히 계산은 소극적으로 소수론의 선학들의 눈치를 보고 매우 조심하는 티가 팍팍 난다(..)[42] 전통적으로 정주국가에서 병력이 30만 정도를 동원하려면 병력자원이 100만, 그리고 100만가구 정도는 나와야 그게 정상이다.[43]고구려의 인구는 멸망 시 67만 호라고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고구려를 점령한 당의 추산일 뿐 실제 고구려의 인구는 더 많았을 것이다...(중략)...다만 순수한 고구려인의 숫자는 500만 명을 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김용만, <고구려의 발견> 중
일반적으로 군대의 동원 비율이 인구의 5% 정도만 되어도 매우 많이 쥐어 짠 것이며,[44] 백제사의 경우 병력 동원 능력을 5% 정도로 가정하여 전체 인구를 추정하기도 한다. 또한 당시 당나라가 점령한 영토는 고구려의 서부 일부에 한정되며 여수, 여당 전쟁 정도면 인구 수의 격감도 당연히 고려해야하는 상황이기에 오히려 70만 가구 집계는 고구려 인구의 하한선에 해당하는 것으로 봐야한다는 것이다.
다수설 중에서도 인구수 100만설의 대척점에 해당하는 설이다.고구려의 인구가 70만 호라는 것은 과호, 즉 국가의 조세, 군역 등의 부과단위로서의 호 수이고 실지 자연호는 약 150만 호(인구 약 700~800만) 정도 되었겠다고 본다.
손영종, <고구려사의 제문제>
실제로 조선시대에도 법정호 이외의 자연호는 상당한 비율을 차지했고 또 정부에서도 이를 인식한 것도 사실이기에[45] 학자들이 간과하는 부분을 시사하는 면은 어느정도 존재한다.
다만 여기에 대해서는 소개한 견해 둘 다 고구려 군사 동원 능력이 당나라군의 전공 포장을 위해 과장됐을 가능성, 과연 한반도와 만주 일대의 고대국가가 이 정도의 인구를 가지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반론 등이 제기된다.
특히 두 번째 견해의 경우 수치가 다른 학설과 동떨어지고 북한의 연구라서 객관성을 의심받아 국내에서는 소개 이상의 인용은 드문 편이다.
[1] 이 때문에 '삼국통일의 욕심 때문에 외세를 끌여들여 같은 민족을 멸망시킨 신라' 라는 말이 뻘소리라는 것이다. 그나마 백제는 건국설화가 고구려에서 이어져오는 데다가 개로왕이 장수왕에게 사로잡혔을 당시 '고구려와 백제는 본래 형제이니' 라는 언급을 하는 등 뿌리는 같다는 의식이 있었긴 하나, 신라는 아예 건국설화 자체도 따로 존재하며 삼국이 모두 하나의 민족이라는 의식은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 영토를 접수한 후인 남북국시대에 와서야 정의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삼국은 서로를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백제나 고구려의 부흥운동을 신라가 지원한 이유도 한반도를 완전히 점령하려는 당을 몰아내기 위한 수단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았다. [2] 말갈인들을 고기방패처럼 운용하기도 하고 당나라 역시 말갈인들만 골라내서 죽여도 고구려인들과 항복 협상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 사실 말갈인들은 고구려인과 다르게 탄압을 더 심하게 받아서 발해를 세우는데 크게 기여한 점도 있다. [3] 67년 - 179년 음력 9월 112세로 굉장히 장수한 인물 중 하나, 고구려 최초의 국상이었으며 이는 고구려 초기 최고의 관직이었다 [4] 294년 등용, 고구려 남부 출신으로 국상 상루가 사망하고 대사자직위에서 국상에 등용되었다[5] 막리지 연자유 - 대대로 연태조 - 대막리지 연개소문 - 연남생, 남건, 남산대의 가문이다[6] 정치인 겸 군 최고지휘자[7] 고구려 말기 최고의 관직, 군사권의 경우 고구려 태왕보다 상위에 있으며 행정역시 총 책임자로서 태왕의 직속 하관이다.[8] 중국에서는 백성, 로마는 시민[9] 조선시대 천민 계급 중 백정이 아니다[10] 고려시대의 향, 부곡, 소의 주민들과 비슷해 보인다.[11] 헤어스타일이 짧을수록 신분이 낮은 형태를 보이기도 한다.[12] 물론 이 점은 백제도 똑같다. 그러나 백제의 진무는 고구려군에게 패했어도 또 내보내졌다.[13] 666년, 연정토가 신라에 투항할 때 인구[14] 668년, 당나라가 압송한 고구려 유민 숫자[15] 중국 후한의 예주, 기주 등 중원 지방에 비해서는 낮은 편.[16] 이옥, 소수설에서 후술.[17] 조상현, 고구려 인구에 관한 시론, 1997[18] 동사강목[19] 손영종, 고구려사(2), 1997 / 채희국, 고구려 역사 연구- 평양 천도와 고구려의 강성[20] 경철화, 손진기, 마대정, 양보륭 등 중국 사학자[21] 간과되는 부분인데 실제로 신라장적, 《삼국유사》 가락국기, 당평백제비 등 호당 인구수 10명 이상의 케이스가 꽤나 많이 등장한다. 앞서 인용된 조상현 역시 호당 인구수를 5명가량으로 잡으면서도 호 편제가 다를 가능성 역시 열어두고 있다.[22] 조상현, 『삼국유사』의 삼국 ‘全盛時期 戶口’ 기사 검토[23] 《구당서》[24] 《구당서》[25] 《삼국유사》의 기록.[26] 《삼국유사》를 말한다.[27] 우리나라 고대 인구에 관한 소고, 1985[28] 논고구려역사연구기개문제, 광명일보 2003년 6월 24일 기사에 중국 사학자 이대룡의 견해를 실은 내용이다.[29] 고구려 전체인구가 350만가량이라 주장하는 쪽도 있지만 어찌됐든 고구려인은 70만가량이니 결국 고구려인은 전부 중국에 흡수된다는 결론으로 간다. [30] 조선 숙종 시대 조선 인구를 578만 명으로 잡았다.[31] 일반적인 통설에 비해도 매우 낮은 수치다. 이론의 여지는 있지만 대다수 학자들은 이미 조선 인구는 여말선초의 혼란을 극복하고 임란 직전에 1300만까지 갔다는 것이 중론이다.[32] 이옥, 고구려의 인구 - 하나의 제안, 1997[33] 오히려 백제의 76만호의 경우가 신빙성에 있어 의심을 사는 상황이다. 삼국시대 내내 고구려와 백제가 보여준 동원력이 '''차원이 다르기 때문.''' 또한 고구려와 백제의 체급 차이는 당이 양국을 멸망시킨 후 구 고구려와 백제 지역에 설치한 행정구역의 '''단위'''에서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안동'''도호'''부이고 백제는 한 단계 낮은 웅진'''도독'''부인 것. 백제와 신라의 체급이 거의 비슷했음을 상기하면 고구려가 백제, 신라와 체급 자체가 아예 다른 나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치 수/당이 고구려와 체급이 아예 다르듯.[34] 간단하게 말해 소수설 말대로라면 중국의 큰 국가들이 100만짜리 소국가 잡자고 수십만 군대를 보내서 70년 동안 싸운 건 어떻게 설명할 거냐는 말이다.[35] 《조선왕조실록》 세종 32년 1월 15일[36] 여기서 '조선 정도 크기면 장정만 210만 이상 나와야 정상'이라는 주원장의 발언도 함께 인용된다.[37] 조상현, 고구려 인구에 관한 시론, 1997[38] 신형식, 고구려사, 2003[39] 전성기에 350만, 멸망 당시 200만, 순수 고구려인 130만이라는 주장이다.[40] 경철화, 손진기, 마대정 등 중국 사학자들[41] 심광주, 2005,「남한지역 고구려 성곽연구」[42] 송서 일본전에 나온 12세기 일본 병력 자원의 인구는 88만명, 조선의 경우에도 비슷한 수준으로 고구려의 그것보다 많다고 할 수 없지만 둘 다 더 후하게(600~700만 이상)추정한다.[43] 조선왕조실록 세종 32년 1월 15일, 세조 11년 11월 15일[44] 현재 징병제 국가인 대한민국의 인구 대비 군인 비율이 1%를 조금 넘는다. 5%면 '''북한''' 수준.[45] 법정호만이 의미있고 자연호는 의미가 없다 간주하기도 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 조선 초기의 인구 집계는 100만 안쪽이었지만 이를 상회하는 수준의 국력였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고 병자호란 직후, 1639년의 인구 통계도 152만으로 영의정 이원익의 발언에 의하면 전체의 1/6 수준이었는데 1626년에는 필요에 따라서 226만의 장정을 따로 조사하여 관리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