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학교/역사
1. 보성전문학교 시절
1.1. 대한제국 말기
1905년 대한제국 탁지부 대신[2] 이었던 충숙공 이용익 선생[3] 에 의해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민족 최초의 근대적 고등교육기관 보성전문학교가 설립되었다. 보성(普成)이라는 교명은 고종황제가 직접 하사한 것이며 '널리 사람다움(인간성, 人間性)을 열어 이루게 한다'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처음 설립될 당시의 학과 구성은 법률학전문과(현 법학전문대학원)와 이재학전문과(현 경제학과, 경영학과)의 2개 학과였다. 학과구성만 보더라도 조선의 전통 인문학이 아닌 서구 근대 실용학문을 계수하여 나라를 구하겠다는 취지가 드러난다.'''교육구국
(敎育救國)'''[1]
교사(敎舍)는 처음에 서울 박동(현재의 수송동)에 위치한 관립한성아어학교의 건물을 빌려 사용하는 것에서 출발했다. 그러다가 1906년 아어학교에 이웃한 김교헌(金敎獻: 조선시대 문신, 독립운동가, 민족사학자, 대종교 제2대 교주)의 기와집 200여간을 매입하여 학교건물로 사용하였다. 이곳은 현재 조계사 터이기도 하다.
1.2. 일제 강점기
충숙공 이용익이 분사(憤死)한 뒤, 보성전문은 이용익 선생의 손자이자 2대 교주(校主)인 이종호(독립운동가)에 의해 운영된다. 이종호 선생은 독립운동을 계속하면서 학교를 운영하였다.
당시 일제의 한국통감부[4] 는 학부를 통하여 보성전문학교를 일제 산하로 관립화 또는 예속화하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 통감부는 학교 경비의 부족액을 기부하겠다는 회유책을 폈었다. 이종호는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그 뒤로도 통감부의 지속적인 권유와 위협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이종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통감부는 안중근사건연루혐의라는 죄목으로 이종호를 안창호, 이갑 등과 함께 붙잡기도 하였다.
국권이 상실된 후 한국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할 수 없었던 이종호 선생은 1910년 천도교의 의암 손병희 선생에게 보성전문학교를 넘겨주게 된다.[5] 이후 보성전문은 민족종교인 천도교 계통의 학교로 새롭게 자리매김하게 된다.[6] 천도교의 금전적 지원이 가능해지자, 여태 사용하던 기와집을 허물고 신식 교사를 새로 지었다. 1918년에는 수송동에서 낙원동 교사로 이전하였고, 여기서 보전 교주와 보전 학생들을 주축으로 한 3.1 운동이 일어났다.[7] 1922년에는 송현동 교사로 이전하였다.
그 후 천도교가 일제의 탄압을 받으면서 재정난에 휘청거렸으나, 1932년에 인촌 김성수[8] 가 재단을 인수하면서 보성전문학교는 다시 활기를 찾았다. 1934년에는 지금의 안암동 교사로 이전하였는데[9] , 인촌 김성수의 사재로 건축한 화강암 석조전의 본관과 도서관(현재의 대학원) 건물은 당대 최고 수준의 건축물이라 큰 화제가 되었다. 이 건물은 일제가 1924년에 설립한 경성제국대학에 비해 물적인 면에서 결코 뒤지지 않으려는 조선인의 기개와 자존심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10] 지금 기준으로 보더라도 대단히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임을 알 수 있다.[11]
그러다가 1944년 태평양 전쟁 막바지에 접어들던 일본은 총동원 체제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보성전문학교는 일제의 강압으로 인해 강제로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개명되는 굴욕을 겪게 된다.
2. 광복~1960년대
8.15 광복 후 교명을 보성전문학교로 환원하였고, 1946년에는 보성전문학교의 건물, 대지, 교수진, 재정 등을 기초로 하여 고려대학교가 4년제 대학교로 문을 열었다. 초대 총장은 기당(畿堂) 현상윤(玄相允)이었다. 고려대학교로 개교할 당시의 단과대학 구성은 정법대학, 경상대학, 문과대학의 3개 대학이었는데, 지금 기준으로는 법학전문대학원[12] , 경영대학, 문과대학, 정경대학이 그 후신이라 할 수 있다.
고려대학교로 개교한 이후 한국전쟁기에는 대구로 자리를 옮겼다. 1952년에 안암동 교사로 돌아온 뒤에는 수학과, 화학과, 생물학과를 신설하고 농림대학을 신설하는 등 자연과학계열 학과 설립에 나섰다. 물론 1950년대까지만 해도 이과대학과 농과대학만 있었을 뿐, 공과대학은 존재하지 않았으나, 1962년 화공과의 신설을 필두로, 토목공학과, 건축공학과, 기계공학과가 연달아 신설되었으며(1964년), 1968년 공업경영학과, 1969년 전자공학과와 요업공학과가 신설되는 등 공과대학도 그 틀을 갖추었다.
한편 1960년에는 대다수 학생들이 4.18 의거에 가담하는 등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앞장섰다. 박정희 정권이 수립된 이후 1964년에는 다수의 학생들이 한일국교정상화에 반대하여 6.3 항쟁을 일으켰고, 1967년에는 그때까지 15년간 고려대학교 총장직을 수행하던 현민 유진오가 정계에 입문, 야당 총재가 되어 박정희 독재에 저항하는 등, 반골대학이자 학생운동의 요람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게다가 그 당시 동아일보는 대표적인 야당지로서, 사카린 밀수 사건 이후 연일 박정희 정권과 삼성그룹에 대한 맹공을 퍼부었기 때문에, 한마디로 그때는 재단과 학교, 학생이 혼연일체가 되어 반골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고 볼 수 있다.[13]
3. 1970년대
1971년에는 우석대학교[14] 를 인수하여 의과대학을 신설하였다. 당시 고려대학교는 박정희 정권에 워낙 단단히 찍혀 있었기 때문에 우석대를 인수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고 한다.
1972년 이후 박정희가 유신독재를 강력하게 밀어붙였을 때에는,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여기에 거의 극한적으로 저항하였다. 당시 고려대학교 학생들은 수업을 거의 작파하다시피 하고, 연일 데모로 유신정권에 저항하였으며, 여기에 더해 고려대학교 총장 김상협은 "학생동요 이유 있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교수 전원을 한밤중에 소집하여 데모 학생들을 경찰로부터 보호하고 안전하게 귀가하게 하는 등 박정희 유신정권기의 대학총장으로서 비범한 용기와 강단 없이는 도저히 할 수가 없는 일을 계속 하였다.
1974년에는 동아일보 기자들이 김대중 납치사건 등에 반발하여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내면서 투쟁하였다. 그 당시 동아일보의 반정부적 논설의 강도도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자 박정희 정권은 동아일보 광고주들을 압박하여 동아일보의 광고면이 전면 백지가 되도록 하고 동아일보 사주에게는 기자들의 대량해고를 강제하였다.[15] 이 정도로 당시 고려대학교 재단, 학생과 박정희 정권 간의 긴장상태는 극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결국 1975년 4월에는 유신헌법 철폐시위와 관련하여 고려대학교만을 대상으로 한 긴급조치 제7호가 발동되었으며, 그로 인해 박정희 정권의 군병력이 학생소요 진압을 핑계로 고려대학교에 난입하였다. 그러자 고려대학교 총장 김상협은 이에 항의하여 총장직을 사임하였다.
4. 1980년대
박정희 사후 1980년 전두환이 정권을 장악했을 때에는 분위기가 일변하여, 현민 유진오가 국정자문위에 참여하고, 남재 김상협이 국보위에 참여하는 등 고려대학교의 반골적, 반독재적 교풍이 무너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낳았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김준엽 총장이 전두환 독재에 항거함으로써 고대의 자존심을 살렸다.
한편 이 즈음에는 정부가 서울의 주요 대학교들에 대해 지방에 각각 분교를 만들도록 요구하였는데, 고려대학교도 이러한 정부시책에 따라 충청남도 연기군 조치원읍 서창리에 조치원분교를 건립하였다. 이때 만들어진 조치원분교는 얼마 안 있어 조치원캠퍼스로 개칭되고, 다시 얼마 안 있어 서창캠퍼스로 개칭된 뒤 그 이름을 유지하다가 2008년 세종특별자치시가 출범하자 세종캠퍼스로 개명되었다. 세종캠퍼스의 역사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여기로.
어쨌든 1980년대에도 전두환 정권에 대한 학생들의 저항은 계속되었고, 수업거부와 시험거부는 고대생들에게 거의 일상이 되다시피 하였다. 그런데 이때 고려대학교 총장 김준엽은 시위하는 학생들이 경찰에 체포되지 않도록 적극 보호하였을 뿐 아니라, 학생회 간부들을 즉각 제적시키라고 정부에서 누차 요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불응하는 등 정권에 노골적으로 반항하였다. 그러자 정부는 1985년 2월 김준엽 총장을 강제로 퇴임시켰다. 그 직후 1985년 동계졸업식에서 김준엽 총장이 퇴임사를 마치고 나갈 때에는 수만명의 학생들이 김준엽 총장의 뒤를 따르며 정권에 항의하는 시위를 하였다.
그 몇년 뒤 1987년 6월 항쟁 때에는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반독재민주화투쟁의 주축이 되었다. 전두환 정권 말기 학생시위대의 인원 가운데 고대생들의 비중이 워낙 컸기 때문에,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 이인영은 제1대 전대협 의장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전두환 정권이 끝나고 대통령 직접선거에 의해 노태우 정권이 수립된 뒤에도 고려대학교의 학생운동은 계속 활발하였다.
5. 1990년대 이후
1991년에는 의과대학이 녹지캠퍼스로 이전하여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 1996년에는 아산이학관이, 2000년에는 생명과학관이 준공되어 이공대의 시설도 점차 제대로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1989년 초중고생 과외수업이 자율화되고, 1994년 수학능력시험이 도입된 이후에는, 강남 8학군 출신 학생들과 외국어고등학교 출신 학생들의 비중이 급증하였다. 부유층 학생들과 예쁜 여학생들이 많아짐으로 인해, 캠퍼스 분위기가 많이 화사해지고 세련되어갔다. 물론 그에 반비례하여 고려대학교의 학생운동은 점차 쇠락하였다. 고대생들의 주된 관심은 정치, 인간관계, 동아리에서 차츰 학점, 고시, 취업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한편 2002년 3월에는 기존의 대운동장 부지에 지하주차장과 열람실 및 각종 편의시설, 잔디공원이 조성된 중앙광장이 준공됨으로써 국내 대학 최초로 지상에 자동차가 없는 쾌적한 캠퍼스가 구현되었다. 이 즈음에는 서울 지하철 6호선이 개통되어 안암역과 고대역을 통한 등교 및 출근이 가능해졌는데, 이로 인해 학교문화와 분위기가 급격히 바뀌었다는 말을 들었다.
2003년 2월~2006년 12월에는 어윤대 총장의 개혁이 세간의 화제를 모았다. 교내 영어강의가 4%에서 34%로 확대되자, 그에 힘입어 세계대학 랭킹에서의 순위가 급격히 상승하였다. 그러나 교주(校酒)를 막걸리에서 와인으로 바꾼다는 둥, 캠퍼스에 쇼핑몰을 들여온다는 둥 하는 무리한 개혁은 학내외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삼성 이건희 회장 사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고려대학교와 성균관대학교를 합치려는 프로젝트를 기획했다고 한다. 백주년삼성기념관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건물이었다고. 그러나 이 계획은 이건희 회장이 고려대학교 명예박사 학위수여를 받으려 캠퍼스에 방문한 날 총학생회의 강력한 저지로 인해 백지화 되었다고 밝혔다.
2005년 교육부의 고려대학교와 고려대학교병설보건대학의 통합 승인으로 2006년부터 고려대학교병설보건대학의 신입생 모집이 중단되었다. 이후 2006년에 고려대학교 본교 서울캠퍼스(당시 안암캠퍼스) 산하 4년제 학부로 보건과학대학이 신설되었다. 고려대학교병설보건대학은 기존 병설보건대 학적자들을 위해 2011년까지 존속하다 폐교되었다.
2007년에는 고려대학교 출신의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 후 다수의 동문들이 이명박 밑에 줄서기를 하며 대통령 보위에 안간힘을 다하여, 다른 대학교 출신들의 반감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결국 이명박 퇴임 후에는 그 역풍을 맞아 한동안 고대 출신들이 오히려 고위관직에서 소외되는 부작용이 나타났었다.
2017년 3월 1일부터 학칙 개정으로 인하여 기존의 안암캠퍼스가 서울캠퍼스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 교육으로 나라를 구한다. 보성전문학교 시절 교훈이자 설립이념.[2] 현재의 기획재정부 장관.[3] 현재 대학원 건물 앞에 흉상이 있다.[4] 1905년 을사조약의 체결에 따라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삼으면서 한성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이를 계기로 한국의 정사(政事) 및 행정 등을 장악하며 직접 통치하도록 일제에 의해 설치된 기관이다.[5] 이 때문에 문과대학(서관) 앞에 손병희 선생의 흉상이 있다.[6] 당시에는 국가의 교육지원이 거의 전무하였고, 가난한 학생들에게서 등록금을 비싸게 받을 수도 없었기 때문에, 종교재단 등의 후원이 대학운영에는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보성전문은 천도교, 연희전문과 이화여전은 기독교, 혜화전문은 불교, 명륜전문은 유교의 도움을 받은 게 다 그러한 이유였다.[7]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한 곳은 수송동 교사 바로 옆의 보성사였다. 보성사는 충숙공 이용익 선생이 설립한 인쇄사다.[8] 동아일보를 창간하고 부통령을 지낸 그 김성수다.[9] 당시 안암동은 경성부가 아닌 고양군 숭인면 안암리였으나 1936년에 경성부로 재편입되었다. [10] 특히 당시 교수 1인당 1 연구실을 제공하여 일부 일본의 대학보다 더 좋은 연구환경을 제공하였다.[11] 화강암 건물의 특성상, 투박하면서도 언제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것 같은 강인한 이미지를 갖고 있어, 그때부터 고대생들 특유의 기질, 예를 들면 순박함과 뚝심, 우직함과 꿋꿋함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12] 2009년 법학전문대학원이 출범하면서 2018년 법과대학이 폐지되었다.[13] 그때만 해도 학생들은 인촌 가문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시위 중에 구속자가 발생하거나 동지 중에 누군가가 강제징집되거나 하면 학생들이 인촌 묘소에 가서 엉엉 울었다고도 한다.[14] 현재 전북 완주에 있는 그 우석대학교가 아니라 서울에 있었던 대학이다.[15] 이때 강제해직된 130여 명의 동아일보 기자들이 1987년 12월에 새롭게 신문사 하나를 차렸는데, 그게 바로 한겨레신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