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장

 

1. 개요
2. 상세
2.1. 한국 역사서에서 고려장의 사용례
2.2. 잘못 알려진 사실
3. 논란
3.1. 일본의 역사왜곡설
3.2. 그리피스의 한국 방문 여부
4. 관련 설화들
5. 현대판 고려장
6. 인터넷 용어 고려장
7. 기타


1. 개요


''''''
고려시대에 나이 든 부모를 다른 곳에 버려 두고 오던 풍습이 있었다는 도시전설. 고려장이라는 단어는 일제강점기 이후에 쓰이기 시작했으며, 이에 따라 일제의 역사 왜곡설이나 단순한 루머가 확산된 것 이라는 등 다양한 설이 돌고 있다.
일본에서는 에도시대에 '우바스테야마(姥捨山)'라고 해서 늙고 병든 사람을 지게에 지고 산에 가서 버렸다는 풍속이 세간에 알려져 있다. 이러한 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바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나라야마 부시코이다. 다만 한국의 경우 고대 문헌을 뒤져봐도 기근이나 전쟁 등 특수한 상황이 아닌 평시에 이러한 행위를 풍습처럼 일삼았다는 기록은 전혀 없기 때문에, 현재 관련 연구자들은 실존 가능성을 부정하며, 일제에 의해 그 내용이 왜곡되어 고려시대의 풍속으로 잘못 전해진 것이라 추측한다. 물론 극한의 상황에서 부모를 버리는 일은 종종 있었다[1]. 이탓에 일본에서도 현대에 자주 발생하는 '유령 고령자' 문제를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楢山節考)'에 비유해 표현하기도 한다. [Why]고려장은 일본문화? 日 주간지 '유령 고령자' 문제 부모 버리는 풍습에 비유
하지만 이러한 일부 사례를 마치 일반적인 풍습으로 여기게끔 왜곡하고 그것이 널리 퍼졌다는 것이 문제이다. 한국뿐만 아니라, 그 어느 나라에서도 흑사병의 창궐이나, 양차 세계 대전같은 전시 상황 등의 극한 상황에서 가족을 버리는 일은 드물지 않게 있었으며, 단지 이것이 하나의 풍습으로 정착한 사례는 없었다는 얘기다[2]. 현대로 치자면 이런 이야기가 있다는 수준의 조선판 도시전설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2. 상세


중국 <효자전孝子傳>의 원곡(原穀) 이야기가 고려장 설화의 원형으로 보이며 불경 <잡보잡경雜寶藏經>의 '기로국연(棄老國緣)조의 설화'에서 기로국이 고려로 와전된 이야기가 고려장 설화의 원형일 수도 있다.
고려장이라는 단어 자체는 고려의 무덤 등의 뜻으로 쓰인 적이 있기 때문에 일본에 의해 창작되고 명명된 것은 아니며 '''처음으로 고려장이라는 용어가 '늙은이를 버리는 풍속'을 뜻하는 낱말로 사용되었던 기록'''은 1882년도에 발간된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의 책, <은자의 나라 한국(Corea : The Hermit Nation)>이다.
(조선 왕조)이전까지는 일본에서도 오래전부터 유행하여 17세기에 이르기까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것과 같은 풍속이 한국에 성행하고 있었다. 고려장은 그 자세한 내용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노인을 산 채로 묻어버리는 풍속이었다.(Heretofore the same rites which were so long in vogue in Japan, traces of which were noticed even down to the seventeenth century, held unchallenged sway in Corea. Ko-rai-chang, though not fully known in its details, was the habit of burying old men alive.)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한국을 실제로 여행했던 영국의 여류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쓰고 1897년 출간 된 그녀의 책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가 있다. 이사벨라가 원산에서 60리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고대 무덤들을 방문했을 때 고려장을 연상케 하는 전설을 들은 내용이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참고
이전 왕조, 즉 5백년 이상 거슬러 올라가면 늙은이나 병자가 가족들에게 짐이 될 경우 이 고분들에 딸린 돌방에 약간의 음식과 물을 남겨둔 채로 유폐시키고는 거기에서 죽게 내버려 두는 일이 관습적으로 행해졌다고 한다.(During the last dynasty, and more than five centuries ago, it was customary, when people from age and infirmity became burdensome to their relations, to incarcerate them in the stone cells which these mounds contain, with a little food and water, and leave them there to die.)
일제강점기의 자료를 통해 확인해 보면 고려장 설화와 관련된 것으로 1919년에 발행된 <전설의 조선>이라는 책이 먼저 눈에 띈다. 이것이 고려장 설화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일단 현재까지 드러난 것으로는 그 시기가 제일 빠르다. 이 책의 지은이는 평양고등보통학교 교유인 미와 타마키(三輪環)로 표시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그가 채집한 조선의 구비전설(口碑傳說)이 수록된 가운데 말미에 동화부분이 들어 있고 그 가운데 '불효식자(不孝息子)'라는 대목이 보인다. 그 내용은 "늙은 제 아비를 지게에다 지고 산 속에 버리려는 어떤 사내가 산에서 내려오던 길에 아들보고 그 지게가 필요 없으니 버리라고 하자, 그 아들이 하는 말이 나중에 아버지도 늙으면 필요할 텐데 또 써야 하니까 버리지 못한다고 하매 곧 크게 뉘우치고 버린 제 아비를 다시 모셔왔다"는 바로 그 얘기다.
이 얘기는 1924년에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동화집>에도 '부모를 버린 사내'라는 제목으로 등장하며, 곧이어 1926년에는 나카무라 료헤이(中村亮平)가 정리한 <조선동화집>에도 약간 내용을 달리하여 '부모를 버린 사내'라는 제목으로 거듭 수록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식민통치자들이 고려장 설화를 널리 퍼뜨린 주범일 듯도 하지만 이러한 자료에 수록된 내용은 어쨌거나 실제로 조선 땅에서 통용되던 설화나 전설을 채집한 결과였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에 명확한 결론은 내릴 수 없다.
일제강점기의 자료를 더 알아 보자면 생계로 인해 부친을 생매장한 사건을 다룬 1924년 9월 13일자 동아일보, 사위가 장인을 생매장한 사건을 다룬 1934년 6월 9일자 조선중앙일보에서도 고려장을 특정 풍속을 뜻하는 낱말로 사용한다.
종합하면 고려장 설화는 구전 설화로서는 분명 존재했으나, 이를 고려 시대 때 실제 있었던 장례 풍습이라고 일반인들이 두루 믿게 오해하게 된 것은 대략 구한말 이후 부터라고 생각된다. 삼국시대 이후로 조선시대까지 나온 한국의 역사책, 지리서, 수많은 문집들 어디에서도 노인을 산 채로 산에 버리는 고려장 얘기는 찾아볼 수 없으나 이사벨라 비숍 등 조선후기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고려장 설화에 대해 꽤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고(다만 이사벨라 비숍의 기록은 그리피스의 기록을 보았을 가능성이 있고, 그리피스의 기록은 그 신빙성이 의심된다.), 일제강점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거나 경험한 사람들은 대개 고려장 이야기를 알고 있으며 자기 동네에 고려장했던 곳이라는 전설이 내려오는 바위나 굴이 있었다는 기억까지 갖고 있는 것을 보면 적어도 1800년대 후반에는 고려장=노인을 산에 버린다는 지금과 정확히 같은 용법으로 사용되고 있었으며 일제강점기 조선의 동화를 모은 조선동화집같은 책을 보면 이미 민간에서 구전될 정도로 이야기가 널리 보급되어 있었음은 분명하다.
구한말 외국인들의 기록이나 일제강점기에 어린시절을 보낸 사람들이 알고 있는 설화라면, 최소한 일제강점기보다는 이전에 생긴 것이 분명하다. 설화나 전설은 하루아침에 생겨나는 것이 아닌 세월을 거쳐 탄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설화, 전설이 생각보다 그리 긴 역사를 지니지 않는 경우가 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킬트도 알고보면 그리 오랜 전통이 아니고.) 다만 외국인들의 기록은 한국 방문 여부에 대해서 신빙성 논란이 있고 그렇다면 현재의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장 설화의 경우에는 시기적으로 일제강점기 이전이 아닌 이후에 생긴 설화일 가능성도 분명 존재한다.

2.1. 한국 역사서에서 고려장의 사용례


조선시대 후기 기록 중 고려장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경우는 대충 아래와 같다. 해석을 보다시피, 고려가, 혹은 고려시절에 묻거나 장례했다는 뜻으로 늙은 사람을 갖다버리는 악습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1654-? 회은집(晦隱集)
特深穿窟。如鑿井之形。築以小石。今往往崩毁處。稱以'''高麗葬'''者是也。
특별히 깊게 굴을 판다. 우물을 파는 모양과 같이 작은 돌로 쌓는다. 지금 왕왕 무너진 곳은 '''고려시대에 묻은''' 것이라고 한다.
1689-1756 입재유고(立齋遺稿)
山野處處。高墳大塚。俗謂之'''高麗葬'''。
산야 곳곳에 고분과 대총은 속인들이 '''고려시대에 묻은''' 것이라 일컫는다.
1897 성재집(省齋集)
元主元不書葬。元世葬於漠北起輦谷。不加築爲陵。故史不書葬。 '''高麗葬'''。
원주는 원래 장사지낸다고 쓰지 않는다. 원 시절에는 막북의 기연곡에 장사했는데, 능(봉분)을 만들지 않은 고로 역사서에 장사지낸다고 쓰지 않았다. '''고려는 장사 지낸다.'''
1757 승정원일기 영조 33년
上曰, 古者以鐵爲釘耶? 曮曰, '''高麗葬''', 多用鐵釘矣。
주상께서 가로되, "옛 사람들은 철로 정을 만들었는가?" 묻자 엄이 대답하길, "'''고려가 장사 지낼 때'''에는 철정을 많이 썼습니다."
1713 연행록(燕行錄 홍대용)
且滿漢公卿。擧皆不火葬。而地室設炕。傍開通穴。守直之人。出入燃燭云。有如我東昔日'''高麗之葬'''。
만족(滿族)이나 한족(漢族)으로서 공경(公卿)은 거의 화장하지 않고 광중(壙中)에 온돌을 만들며 옆에 통래(通來)하는 구멍을 뚫어서 수직하는 사람이 드나들며 촛불을 켠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옛날 '''고려의 장례'''와 같은 것이다.
고려의 무덤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했으며 그럴 경우 고려총(高麗塚), 고려산(高麗山), 고려곡(高麗谷), 고려분(高麗墳)이라고도 했다. 일제강점기 이후 한국 내에서 쓰이게 된 '늙고 병든 사람을 지게에 지고 산에 가서 버렸다는 고려 시대의 풍습'을 뜻하는 고려장과 다른 말이다. 마찬가지로 후술되는 고려장과 구별해야 한다.
1908년 11월 11일 <대한매일신보>의 고려장 굴총이라는 기사에도 용례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서도에서 온 사람의 말을 들은즉 근일에 일인들이 고려장을 파고 사기를 내어가는 고로 온전한 고총이 없다더라.' 무덤을 칭하는 말로 고려장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실제로 이때부터 개성 주변의 고려 고분들이 일본에 의해 대거 도굴당했다.
이런 뜻으로 널리 통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또다른 자료로 조선총독부가 정리한 <조선보물고적 조사자료>가 있다. 발행연도가 1942년이지만, 그 내용은 1916~17년께 조사한 고적 대장의 자료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으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고려장'을 비롯하여 '고려총', '고려분', '고려산', '고려곡' 등으로 표기된 고분들이 두루 기록되어 있으며 그 수가 전국에 걸쳐 90여곳이나 된다. 그 시절에도 흔히 이름모를 무덤들을 일컬어‘고려장’이라고 불렀던 사실만큼은 분명히 엿볼 수 있다. 즉, '고려장'이라는 명칭은 그것의 실체가 무엇이었던지 간에 전국 곳곳에 흩어진 '이름 모를' 고분들을 대체하는 이름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라 짐작할 수 있겠다. 흔히 주인 모를 무덤을 일컬어 '당장(唐葬)'이나 '호총(胡塚, 되무덤)'이라는 이름을 더 많이 사용했던 평안북도 지역 정도를 제외한다면, 고려장은 전국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정말 '흔한' 용어였던 것이다. 대충 옛날 무덤이고 주인 없다 싶으면 그저 막연하게 이전 왕조인 고려 시대 무덤이라고 뭉뚱그려 칭하던 습속이 있었던 것.

2.2. 잘못 알려진 사실


조선왕조실록#에도 고려장으로 추정할 만한 풍습에 관련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는 내용이 웹상에 퍼져 있는데 이는 '외사(外舍)로 내어 두게 되니'라는 구절을 '밖에 내다버리니' 라고 오독한 것을 확대해석한 것으로 외사(外舍)는 '안채'인 내사(內舍)와 대비되어 '바깥 행랑채'를 일컫는 말이다.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의 기록을 참고하면 이해하기 쉽다.
칠원공(漆原公, 이언결)이 말년에 심양(心恙, 심병心病)이 있어서 외사(外舍)에 거처하게 되자, 공이 정성을 다해 보호하고 봉양을 함에 늘 문밖에서 선잠假寐을 자고 옷에 띠를 풀지 못한 것이 여러 해였고, 대고(大故)를 당하자 공의 나이 이미 60이 가까웠는데도 집상(執喪)을 예절에 지나치게 하였다.

3. 논란



3.1. 일본의 역사왜곡설


유사역사학자인 이덕일 같은 일부 사람들은 위와 같은 사실을 바탕으로 고려장이 일제강점기에 일본측이 문화재 약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과거부터 "입으로만 전해져 오던 설화"를 사실처럼 둔갑시켜 퍼트린 소문이 정착된 것이라고 하기도 하며 고려장이 역사적으로 허구였더라도 고려장이라는 용어 자체는 일본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것이라고도 말하고 있다. MBC의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2011년에 관련 내용을 방송했다.[3]
애초에 고려장은 역사학자들에게 제대로 연구되고 있는 분야도 아니며 고려장이라는 표현 자체는 여기저기서 나오지만 '노인을 버리는 풍습'의 '''실제 존재 유무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있는 사료나 근거가 전혀 없다.''' 고려장 풍습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라는 그리피스의 책에서도 관련 내용은 겨우 '그런게 있다 카더라'는 짧은 언급 딱 하나 뿐인데, 아래 문단에 나오듯이 이마저도 논란이 매우 많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이런 설화를 의도적으로 구체화시켜 퍼뜨렸을 가능성은 다분하다. 일제 이전까지는 아예 등장하지 않던 고려장이란 용어를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일본인들이 조선인 교육자료로 활용하기 시작한다. 고려장은 없었다. (기사)
오히려 일본에는 우바스테야마(姥捨て山)라는 이름의 이런 풍습이 실제로 존재했고, '''"일본에서도 오래전부터 유행하여 17세기에 이르기까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것과 같은 풍속"'''이라는 기록이 있다. 즉, 일본에서는 자기나라 풍습이자 당대에도 존재햇던 마비키와 더불어서 유명한 악습이였던 것을 이누쇼군이라고 불리던 도쿠가와 츠나요시가 '''갓난아기, 병자, 노인을 버리는 행위에 대한 대책법'''을 내놓고 나서야 겨우 해결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이러한 것에 대한 그 어떠한 죄책감이 없었기에 곧바로 이를 실행한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실행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우선 개에 대한 존중을 명령하면서 점차적으로 생명 경시 사상에서 생명 중시사상으로 연결되도록 하고 난 다음에 이러한 조치들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영향이 미치지 못하는 지방은 근대까지도 그러한 습관들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나가노 현의 오바스테라는 산을 포함해서 이런 일화는 오히려 일본에 더 많은 편이고, 해당 일화를 가지고 소설이 쓰여지고, 그 소설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바로 나라야마 부시코이다. 영상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고려장이 실제 풍습으로 존재했는지는 논란이 있지만 한반도는 가난했기 때문에 노인을 아사시키는 것도 있던 것 같다며 지레짐작하고 있다. 게다가 한국인들이 고려장 설화가 퍼지게 된 이후의 시점만을 서술하고 있다.[4]
다만 상술했듯, 식민 지배 이전에 고려장=노인을 산에 내다버리는 풍습이라는 설화는 일제가 고의성을 가지고 악의적으로 퍼트린 날조라는 주장은 일단 속단하기엔 이르다. 그리피스 이후의 한국인들도 일단 고려장이라는 말에 그런 과거가 있었구나 정도로 '''착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조선에 대한 동화집에서 무분별하게 인용된 것은 맞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고려장 풍습은 일반인들 사이에서 아직도 많이 사실(史實)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학계에서는 그 존재 자체가 의심받고 있다.''' 부경대 사학과 강인욱 교수는 '''"한국에 부모를 버리는 풍습이 있었다는 내용은 문헌 근거가 희박하다"'''며 '''"현재 학계 다수설은 고려장은 실재하지 않았던 풍습이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부모를 버리는 풍습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명시적인 기록이 19세기 말 이후에 일본인이 쓰거나 다른 외국인이 쓴 글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것도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또한 최인학 인하대 교수는 고려장에 대해 '''"우리나라의 무덤을 도굴하기 위한 일본의 꼼수"'''라고 설명했다. #

3.2. 그리피스의 한국 방문 여부


그리피스는 두 차례 한국을 방문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1차 방문시기는 밝혀지지 않았고 2차 방문 시기는 1926-27년 사이이다. 한때 학계는 그리피스의 1차 방문을 사실로 여겼다. 그러나 그 이후, 그리피스가 1871년에 신미양요가 있을 당시 조선에 방문하였다고 주장했던 정수일 교수를 포함한 학계는 최근 여러가지 연구를 하고 내용을 검토한 결과 그렇지 않다는 쪽에 무게를 싣고 있다.
사실 이전에도 문일평이 <은자의 나라>에 실린 식탁이나 두발 모습 같은 그림들이 한국적인 것이 아니란 점을 증거로 그가 한국에 오지 않고 일본에 앉아서 쓴 것이라고 지적한 바가 있었다. 특히 <은자의 나라>에는 일본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한 경우가 많다는 것도 그 신뢰성을 의심하게되는 주요 근거다. 대표적인 사례로 그리피스가 고대부터 1868년까지 부산이 대마도주의 영지였다는 잘못된 정보를 기록하기도 했다. 또한 미카도의 제국 같은 저서에서는 칭기즈칸이 일본인이라는 의견을 수용하기도 하는 등, 일본의 주장에 치우친 듯한, 신뢰성에 의문을 가게 만드는 저작들도 존재한다.[5][6]
무엇보다 그리피스는 역사학이 아니라 자연과학을 전공한 학자로 일본 정부의 초빙으로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의 전신인 도쿄가이세이학교(東京開成學校)에서 강의했으며, '''일본이 주체가 되어 조선에서 미신과 전제왕권을 몰아내고 서구문명과 기독교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매우 친일적인 인물이었다.'''[7] 그는 '''조선을 한 번도 방문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의 자료들에만 의존해 한국의 역사와 풍습에 대해 서술'''했는데, 한국에 대한 편견에 기초하여 일부 설화의 내용을 마치 역사적 사실인 양 왜곡하여 서술했다는 점에서 그의 자료는 방한 여부의 논란과 상관없이 비판적인 검증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아알모모] 우리가 늙은 부모님을 산에 버렸다고?

4. 관련 설화들


중국 <효자전孝子傳>의 원곡 이야기에서는 수레만 지게로 바꾼 이야기가, 우리나라에는 할아버지를 버리려고 한 아버지가 아들의 재치로 뉘우친 '할아버지의 지게'라는 이야기로 교과서에 실렸을 정도로 유명하다. 은비까비의 옛날 옛적에에서도 나오며, 할아버지가 할머니로 치환된 걸 빼면 내용은 동일하다. 만화 '옛날 옛적에'에서는 임금이 이 광경을 우연히 보고 고려장을 금지시키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만화 '은비까비'에서도 고려장이 실제로 잘못 전해진 풍습임을 강조한다. → 은비까비는 시베리아몽골의 못된 풍습이 전해졌다는 늬앙스.

어느 날 할아버지가 70세가 되자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지게로 업고 가서 버렸다.

그 곳에 아들이 따라가서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왜 지게를 두고 가세요?”

“할아버지 고려장 다 지냈다. 지게는 버리고 가야지.”

“아버지, 제가 지게 가져갈래요.”

“지게는 가져가 무얼 하려고.”

할아버지 져다버린 지게인데 뒀다가 아버지도 여기에 져다 드려야죠.

이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는 잘못을 뉘우치고 할아버지를 다시 모셔와 잘 봉양했다.

불교 경전인 잡보장경에 실려 있는 '기로국' 이야기가 있으며 위기에 빠졌던 기로국이 노인의 지혜로 위기에서 벗어났다면서 효도를 강조하는 내용이다.
줄거리는 한 나라에서 나이가 든 노인들아 밥벌이가 안 된다고 산속으로 내쫓았는데 근처에 있던 강대국이 이 나라를 침략하기위해 재로 새끼줄을 꼬아오라는 말도 안되는 트집을 잡았다. 그러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심하던 왕은 결국 노인들이 버려진 산속으로 들어가 지혜를 구했으며, 노인들은 새끼줄에 소금물을 적신후 불로 태우면 된다는 간단한 해결책을 내놓아 나라를 구한 뒤 그 나라는 노인을 공경하며 살았다는 이야기다.
이 기로국 이야기를 원형으로 한 한국의 전설이 6차 교육과정 초등학교 읽기 교과서에도 실린 적이 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8]

옛날에 효성이 지극한 신하가 살았다. 이 당시에는 고려장이 법으로 제정되어 있었는데 그 신하의 어머니도 60이 거의 다 되어 산 속에 내다버려야 할 처지다. 그래서 어머니는 그냥 자신을 산 속에 버려달라고 했지만 효자 신하는 그럴 수 없다며 차라리 무거운 벌을 받겠다고 했다. 궁리 끝에 효자 신하는 어머니를 뒤채에 숨겨놓고는 일부러 어머니를 고려장 보냈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얼마 뒤, 중국에서 사신이 찾아와 지혜겨룸을 하잡시고 굉장히 어려운 3가지 문제를 냈다.

1. 구멍이 구불구불한 구슬에 명주실 꿰기

2. 똑같이 생긴 어미말과 새끼말을 손 안 대고 구분하기

3. 가지 하나만 가지고 백 가지 나물 만들기

대단히 어려운 문제들이었다. 효자 신하가 뒤채에서 어머니에게 이를 얘기했더니, 뭐라뭐라 해법을 제시했다.

다음날, 효자 신하가 그 해법대로 중국 사신 앞에서 문제를 풀어 보였다.

1. 개미 허리에 명주실을 맨다. 그리고 한쪽 구멍 근처에 꿀을 바르고 반대쪽 구멍에 개미를 넣는다. 개미가 꿀을 향해 기어가면 반대쪽 구멍으로 빠져나오게 되어 명주실이 구슬에 꿰어진다.[9]

2. 마른 풀더미를 놓고 두 말에게 동시에 먹으라고 해서, 먼저 먹는 말이 새끼말이고 나중에 먹는 말이 어미말이다.

3. 그냥 가지를 하얗게 깎은 다음 나물로 무친다. 백(白)가지 나물 완성.

그러자 중국 사신이 포기하고 돌아갔다.

임금이 어떻게 그런 지혜를 발휘할 수 있었느냐고 묻자, 효자 신하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고려장을 보내지 않은 자신을 벌해달라고 했다. 그러자 임금이 노모의 지혜 덕에 위기를 모면했다면서 오히려 상을 내려야 할 일이라고 말했고 그때부터 고려장을 금지했다고 한다.

위 이야기 이설로 말의 새끼와 어미를 구분하는 것 대신에 호리병 안쪽에 종이를 바르는 문제가 있으며 닥나무 풀을 개어 호리병 안을 적신 뒤 남은 물을 비우고 말리는 해법이 전한다.
속초 지명의 어원이 된 이야기로 동일한 전설이 울산바위에도 있는데 울산에서 울산바위에 지세를 걷으려는 것을 거부하자 울산에서 재로 꼰 새끼로 바위를 묶으면 가져가겠다고 했고, 그 다음은 이와 동일. 또한 몽골에도 착한 아들과 슬기로운 아버지라는 이야기가 있으며 위의 이야기와 거의 유사하다.
그밖에 유사한 이야기로 삼국유사에는 가난 때문에 사람을 묻으려 하던 신라 때의 '손순 설화'가 남아있는데, '어머니를 굶길 수는 없으니 차라리 애를 묻읍시다.'라고 하다가 돌종을 발견하자 이게 하늘이 내려준 거라 생각하고 아이 묻기를 취소했으며, 그 이야기가 알려지자 임금이 그 부부에게 도움을 주어 구원을 받은 이야기다. 또한 곽거도 가난 때문에 아이를 묻으려다가 금솥을 얻은 이야기가 있다.
현대인의 윤리적 기준으로 보았을 때, 백제 계백 장군의 가족 살해가 '비뚤어진 충(忠)의 강조'라는 비판이 있듯이, '아이는 더 낳을 수 있어도 부모님은 한 분'이라는 논리는 '비뚤어진 효(孝)의 강조'라는 비판이 있다. 물론 결말은 좋았지만... 사실 손순 설화는 늙은 부모를 잘 모시려고 아이를 희생하는 이야기니 고려장과 반대되는 경우다.
한편 일본에는 시즈오카 현 후지노미야 시에 있는 밤바 구멍(バンバ穴) 설화가 있다. 이 구멍은 입구의 크기는 1~2m 정도로 별로 크지 않지만 깊이가 20m에 달해 한 번 빠지면 자력구제가 불가능하다. 먼 옛날에는 늙은 부모를 이 구멍에다 유기하고 도망가는 사건이 많았고, 자식에게 버림받아 죽은 노파의 영혼은 밤중에 구슬프게 울거나,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을 구멍 안으로 끌고 들어간다고 한다. 밤바 구멍에 대한 소문은 무성하지만 공식적으로 '부모를 버렸다'고 확언된 기록은 없기에 일본에서는 한국의 고려장 같은 도시전설로 여긴다.
현대에는 일본 호러 스팟 매니아들이 찾는 성지순례지 중 하나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로 '우바스테야마(姥捨て山)' 설화도 있다. 이름부터가 '''할머니 모/ 버릴 사/ 뫼 산'''으로서, 우바스테야마(또는 오바스테야마,姥捨山)라는 이름으로 실제 나가노현에 존재하는 산에, 고령의 노부모를 버리는 풍습이 있었다는 것.
이러한 일본판 고려장을 다룬 일본 영화가 있는데 나라야마 부시코라는 영화다. 이마무라 쇼헤이가 1983년 제작한 영화로, 극도로 가난한 산간마을에서 식량을 아끼기 위해 노모를 버려야 하는 아들의 이야기다.
이러한 노인 유기 풍습이나 관련 설화는 동아시아 문화권 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인도의 타밀나두 주에서는 'Thalaikoothal'라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는 신장에 해로운 음식을 대량으로 섭취시켜 노인의 자발적 혹은 비자발적인 죽음을 종용하는 케이스이다. 이누이트들도 노인을 얼음 위에 방치하고 떠나는 풍습이 있었다고는 하나 기근이 아닌 이상 극히 드물었다고 한다. 쓸모 없어진 노인을 유기/살해하는 풍습은 서양권이라고 예외가 아니었으며, 고대 로마, 그리스, 세르비아(Lapot), 북유럽권(Ättestupa)에서는 벼랑에서 던지거나 날붙이로 살해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다만 '이러저러한 풍습이 있었다더라' 식의 소문만 전해지고 명백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은 케이스도 많기 때문에, 정말로 혹은 빈번히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5. 현대판 고려장



이외에도 저가 요양병원으로 보내는 것도 일종의 고려장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코로나 19 사태가 터지면서 집단 면역 정책을 펴 많은 고령자들이 코로나 19로 사망한 스웨덴도 고령자에 대한 연금 지급 부담을 줄이려는 정부와 청년층의 미필적 고의로 인한 현대판 고려장 정책이라는 비판이 있다.

6. 인터넷 용어 고려장


인터넷 용어들이 대체로 그렇듯 안 좋은 의미로 많이 쓰이는데, 비유적으로 쓰는 경우 대체로 스포츠팬들이 왕년에 잘 나갔으나 노쇠화하여 팀에 마이너스 요소가 되는 노장 선수를 쳐냈을 때나, 쳐내야 한다고 주장할 때 많이 쓰인다.
2013 시즌 이후 스토브 리그에서 고참 선수들을 정리하는 두산 베어스의 행보를 두고 고려장 야구라는 말이 있다. 또한 엘지 트윈스의 라뱅 이병규가 2013년 마지막 대활약으로 하얗게 불태운 후 노쇠화를 이기지 못하고 부진한 모습을 보이자 지게에 담아 고려장을 해야한다며 고려뱅,지게뱅 등 갖은 별명이 붙었다. 프로야구판에서 고려장 명인으로는 선동렬[10]양상문이 꼽힌다.

7. 기타


  • 폴 펠리오와 아우렐 스타인등의 고고학자가 발견한 돈황문서 중 일부에는 고구려로 보이는 나라 Keu-li에 대해 기술되어 있다. 해당 구절에 따르면 "Shan-ton 지방의 대신 Chan-Chun-Chi 관할구인 Keu-li 경내의 주민은 턱을 숙여 가슴에 붙이며 인육을 먹고 연로한 부모와 노인을 발가벗겨 죽였다"라고 적혀있는데 이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장의 모습과 흡사하다. 그런데 이걸 믿으면 그 문장에 있는 '산동대신의 관할구역이라는 표현'과, 바로 아래 문장인 그 아래 주민들은 물 속에서 고기처럼 살고 있다도 믿는 수준이다.
  • 쓸모 없어지면 제거한다는 점에서 토사구팽과 비슷한 용어이나 토사구팽이 '필요해서 데려왔다가 쓸모 없어져서 내쳤다'는 뉘앙스인 반면 고려장은 '원래 있던 존재였는데 쓸모 없어져서 내쳤다'는 뜻으로 좀 다르다. 그런데 폴아웃 세계관에서의 시저의 군단의 경우 늙고 약해지면 고려장과 동시에 토사구팽을 행한다고 한다.
  • 우리나라의 좀 오래된 여관에는 이름이 ○○장 식으로 된 여관이 많은데, 그 중에는 충공깽스럽게도 고려장여관도 있다. 물론 이쪽은 高麗莊으로 한자가 다르다. 다음 지도 확인결과 김해, 양구, 목포에 있으며 로드뷰 확인 결과 김해에 있는 것은 한울모텔로 개명, 양구는 아직 남아 있으며 목포는 확인 불가.
  • 얼음과 불의 노래에서 북부에서는 옛날에 겨울에 식량이 부족해지면 노인들이 자발적으로 죽으러 갔다고 한다.
  • 일본 역사왜곡설을 이유로 고려장이란 표현은 쓰지 말아야 하고, 일본이 만들었으니 에도장, 원래 명칭이었던 우바스테야마 같은 식으로 바꿔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어머니, 꽃구경 가요

제 등에 업히어 꽃구경 가요

세상이 온통 꽃 핀 봄날

어머니 좋아라고

아들 등에 업혔네

마을을 지나고

들을 지나고

산자락에 휘감겨

숲길이 짙어지자

아이구머니나

어머니는 그만 말을 잃었네

봄구경 꽃구경 눈감아 버리더니

한 움큼 한 움큼 솔잎을 따서

가는 길바닥에 뿌리며 가네

어머니 지금 뭐 하시나요

꽃구경은 안 하시고 뭐 하시나요

솔잎을 뿌려서 뭐 하시나요

아들아, 아들아, 내 아들아

너 혼자 돌아갈 길 걱정이구나

산 길 잃고 헤맬까 걱정이구나

따뜻한 봄날 - 김형영 -


[1] 조선 시대에도 경신대기근 시기에 노모를 버리고 달아난 남성에 대한 기록이 있을 정도다.[2] 고려장 이야기의 원형으로 추정되는 아래의 일본존속유기 '풍습'도 실제로는 기근으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으로 추정된다.[3] 방송에 출연한 최인학 교수 역시 정식 역사학자가 아니라 아동문학가 출신의 민속학자이다.[4] 당연히 전부 루머의 근원인 그리피스의 기록 이후의 사례다.[5] Fusan has been held by the Japanese from very ancient times. Until 1868 it was a part of the fief of the daimio of Tsushima.(p.202)[6] 일본어 위키백과에서 칭기즈칸=요시츠네설 문서의 10번 문단 참조 #[7] 아이러니하게도 일본 또한 개항 이전에는 조선 이상으로 서구문명과 기독교를 거부하고 있었다. 당장 존황양이파들조차 그닥 개방적인 인물들이 아니었다.[8] 교과서에는 가지 하나만 가지고 백 가지 나물 만들기 문제가 두께를 똑같이 깎은 나무의 뿌리와 줄기를 구분하기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여러 판본이 존재하는 듯. 여기서의 정답은 물에 담그면 뿌리 부분이 더 잠기니 물에 띄워보는 거다.[9] 이것은 원래 중국에서 공자를 주인공으로 한 민담에 나오는 이야기로, 공자천주 고사성어에 대한 유래다. 그리스 로마 신화다이달로스 일화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10] 특히 선동렬의 경우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의 '''양준혁'''과 기아 타이거즈 감독 시절의 '''이종범''' 강제은퇴의 주범이다. 이 둘은 에서 영구결번이 된 레전드들이고, 이종범은 선동렬 본인 뒤를 잇는 영구결번(그 당시엔 영결 유력) 기아 레전드인데도 그런 짓을 벌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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