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광역시/역사
1. 개요
원래 광주지역 일대는 백제와 통일신라, 후삼국시대까지 무진군(武珍郡), 무진주(武珍州), 무주(武州)[1] 로 불렸다. 이두에서 珍의 새김(훈)은 돌, 들로서 우리말로 무돌, 또는 무들이 되며 '물(水)' + '들(野)'의 의미인 것으로 보인다. 광주에서 가까운 나주 영산포에도 이두로 水入伊(무들이)라고 읽는 지명이 남아 있다. 광주의 유명한 산인 무등(無等)산 역시 우리말 '무들'을 한자로 옮겨 적은 여러 다른 표기 가운데 하나이며, 무주는 그 약칭인 셈이다. 오늘날 쓰이는 광주(光州)란 이름은 고려 태조 23년인 940년에 그 이름이 처음 생긴 것이다. 왜 광주라 바꾼 것인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고려 말의 대학자 목은 이색이 '석서정기'라는 책에서 광주를 가리켜 "光之州"라 언급한 것으로 미뤄볼 때 빛의 고을이란 의미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이를 다시 우리말로 푼 '''빛고을'''이란 이름도 많이 쓴다.
드라마 태조 왕건을 보면 견훤이 처음에 이곳을 도읍으로 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완산주(지금의 전주시)를 얻자마자 도읍을 옮긴 것으로 보면 1,100년 전쯤에는 전주가 광주보다 번화했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사실 조선시대만 해도 전주는 부였고 광주는 목이었다.
2. 선사시대
광주에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영산강 유역을 따라 구석기 유물들이 출토되는데 광주의 도시개발 과정에서 상무지구의 치평동, 첨단지구 산월동, 철도이설 구간인 매월동 등의 구릉상에서 뗀석기가 발견되어서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을 것이라 본다. 또한 매월동과 풍암지구 등에선 고인돌의 존재가 확인되어 청동기시대에도 사람들이 계속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3. 삼한시대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했는데, 위지동이부한숙에 의하면 마한의 지역중 광주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구사조단국(구사오단국이라고도 한다)과 불이지국(불미국이라고도 한다)을 들 수 있다. 구사조단국은 장성군 진원면 일대로, 불이지국은 나주 일대로 본다. 광산구 첨단지구에는 일본식 전방후원분이 있어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학계에서는 양국의 교류가 삼한의 성립 이전부터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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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일본식 전방후원분, 장고분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4. 삼국시대 ~ 후삼국시대
이후 백제가 마한을 복속해 나가면서 광주 역시 백제의 영토에 속하게 되었는데 이 시기에 백제 3주의 하나인 무진주(武珍州)라 불렸다. 무진주는 그 직할에 미동부리현(남평), 복룡현(나주일대), 굴지현(창평)을 통치하였다.
통일신라 역시 서남해 일대의 중요 거점으로 무진주를 인식하여 무진주를 무주(武州)로 이름을 개칭하고, 도독부를 설치하여 오늘날 전남 일대인 15군 34현을 관할하는 행정 중심지가 되었다.
신라의 혼란한 말기에 서남해 일대의 해적을 소탕하는 임무를 맡고 온 견훤은 서남해 일대 해적과 해상호족들을 장악한 뒤 진성여왕 6년에 무진주를 점거한 뒤 완산주(오늘날의 전주)로 도읍을 옮길 때까지 무진주를 기반으로 후백제의 기틀을 다졌다.
5. 고려시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뒤, 고려 태조는 940년, 통일된 영토의 행정체제를 개편하면서 무진주의 이름을 광주로 고치고 그곳에 도독부를 설치했다. 그후 고려 성종 14년에 관제개혁으로 전국을 3경 4도호부 10도로 나누는 동시에 12주목을 12주절도사로 변경하였다. 이 개혁으로 오늘날의 전남 일대를 해양도라 했으며 도호부를 안남(현재 영암군)에 설치하였고 광주에는 자사를 두었다. 이때 광주의 이름을 해양현이라 개칭했다. 고려 고종 때는 기주라 칭하다가 충렬왕 때 다시 무주로 개칭하는가 하면 충선왕 때에 화평부, 공민왕 때에 무진부, 다시 공민왕 22년인 1373년에는 광주목 등으로 지명과 행정 지위가 자꾸 바뀌었다.
6. 조선시대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전라도를 좌도와 우도로 나누었는데 광주는 좌도에 속했다. 그런데 세종 12년 노홍준이라는 자가 광주목사 신보안을 구타했다는 이유로 광주목에서 무진군으로 강등시켜 버렸다. 문종 1년에 광주목으로 다시 회복되었지만 비슷한 사건 등으로 성종 20년 다시 광산현으로 강등되었고 연산군 1년에 다시 광주목으로 회복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인조대와 숙종대에도 비슷한 일들이 있었다.
고종 32년인 1895년 전국을 23부로 나누면서 나주부에 속한 광주군이 되었다가, 1896년 13도제로 개편함에 따라 전라남도청을 나주가 아닌 광주에 둠으로서 호남지역의 중심지로 성장하게 되었다.[2]
7. 일제강점기
일제시대 전까지는 그나마 조용한 동네였으나 1896년 나주[3] 를 대신해 전라남도청이 들어서게 되면서 성벽을 부수고 확장을 하였다. 그리하여 광주본정(光州本町, 현재의 금남로)이 들어서고 발전을 시작하게 되었다. 구한말 의병 또한 많았는데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거진 다 쓸려가게 되었다.
일제는 1910년 9월 30일 조선총독부의 새로운 지방제도를 발표하고, 이에 따라 광주읍성 안쪽인 성내면(충장로, 금남로 일대[4] )과 성밖의 기례방(오늘날의 대인동 일대)·공수방(오늘날의 수기동 일대)·부동방(오늘날의 서석동 일대)의 3방을 합해 광주면을 설치했다.
이후 1914년 4월 1일 전국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하여 15개 면으로 재편하였다.
이후 1923년 서방면[5] , 효천면, 지한면의 각 일부를 광주면에 편입하여 시가지를 확장한 후, 1931년 읍(邑)제 실시에 따라 광주면은 광주읍으로 승격되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중심지가 되었고 이 운동의 여파로 전국의 거의 모든 학교가 동맹휴학을 하는 등의 일이 있었다. 1931년 우치면과 본촌면이 지산면으로 통합되었다.
1935년 서방면, 효촌면, 지한면, 극락면의 일부를 편입하여 광주읍이 '''광주부'''로 승격되었으며, 효천면과 지한면이 효지면으로 통합되고, 광주군의 잔여지역은 '''광산군'''으로 개칭되었다. 1937년 광산군 송정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8. 8.15 광복 이후
해방과 정부수립 이후 1949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광주부는 '''광주시'''로 개칭되었고, 나주군 본량면, 삼도면, 평동면이 광산군에 편입되고 광산군청을 광주 시내(현 동구 대의동)에서 송정읍으로 이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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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7월 광산군 극락면, 서방면, 석곡면[6] , 효지면이, 1957년 11월 지산면, 서창면[7] , 대촌면이 광주시에 편입되어 시역(市域)이 대폭 확장되었다. 이는 자유당 이승만 정권의 게리맨더링이라 한다. 그러나 1963년 서창면과 대촌면은 다시 광산군으로 환원되었다.
1973년 구(區)제가 실시되어 동구와 서구의 2개 구가 설치되고, 1980년에는 동구와 서구의 각각 일부를 떼어 북구를 신설했다.
9. 5.18 민주화운동
광주의 역사 중 현대사 부분은 5.18 민주화운동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1980년 5월 27일을 기해서 완전히 시민군과 계엄군간의 전투는 중지되었으나 이미 광주는 희생자들의 시신들을 화장하고 장례를 치르느라 여유있는 날이 없었고 현재는 최소 40대 이상의 광주 시민들에게는 큰 아픔을 남겼다. 이후 1986년까지 정부와 방송, 언론기관은 보도지침 때문에 광주에 대한 일상을 평화롭다고 선전하며 실체를 은폐하려 들었다. 그러나 광주와 전남일대에서 일어난 일련의 학살소동에 대한 소식은 천주교재단과 1982년 광주 5.18 유가족들의 국회의사당 앞 집회로 인하여 전국의 대학교 및 국민들에게 그 실체가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이는 서독 기자였던 '''위르겐 힌츠페터'''가 목숨까지도 걸고 광주에 잠입하여 5.18 당시의 상황을 취재하는데 성공하는 쾌거를 이루면서 전 세계로 광주에 대한 소식이 퍼져나가면서 사실상 전두환 정부는 대외적으로도 빼도박도 못한 상황에 직면하였다. 오죽하면 1980년대 미국 반공정책의 대명사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마저도 전두환 대통령에게 5.18의 원인 중 하나인 김대중 구속을 이유로 들며 김대중을 석방하지 않으면 앞으로의 한미간 정상회담은 없을 것이라고 못을 박았다. 어쨌든 그 이후 1986년까지 재빠른 재건을 거듭하며 직할시로의 승격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0. 5.18 민주화운동 이후
1986년 광주시가 '''광주직할시'''로 승격되었으며, 광산군 송정읍 역시 '''송정시'''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2년 후인 1988년 광산군과 송정시 전역을 광주직할시에 편입하고 광산구를 설치함으로서 송정시는 2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8]
1995년 직할시가 광역시로 이름이 변경되면서 광주직할시가 '''광주광역시'''로 개칭되고, 서구에서 남구를 분리하였으며, 광산구 서창출장소(구 광산군 서창면)를 서구에, 대촌출장소(구 광산군 대촌면)를 남구에 편입하였다.[9] 2011년 10월 북구 동림동과 운암동 중 하남대로 이남 지역이 서구에 편입되어 동천동이 되었으며, 이외에도 각 구마다 자잘한 경계조정이 있었다.
2016년 현재 5자치구 90행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전라북도에 있는 무주군과는 한자가 다르다. 여기는 한자가 茂朱로, 무주(武州)가 이미 광주로 바뀐 후에 무풍현(茂豊縣)과 주계현(朱溪縣)의 무와 주를 따서 만들었다.[2] 정확한 과정을 설명하자면, 단발령으로 인해 의병이 봉기하고 나주군수를 살해하면서 관찰사가 광주로 피신갔으며 차후 의병이 없어져도 나주로 안 돌아갔기에 광주에 도청이 생긴 것이다.[3] 나주는 고려 혜종의 외가라는 특수성 때문에 고려시대부터 대읍이었고 양반이 많아 일제에 잘 순응하지 않았다.[4] 지금의 충장로1~3가, 금남로1~3가, 궁동, 대의동, 광산동, 황금동이 해당된다.[5] 여담으로 김태촌으로 유명한 조직폭력배 이름인 '서방파'는 이 면의 이름을 딴 것이다. 김태촌이 이 곳 출신이기 때문.[6] 덕의리, 충효리, 금곡리는 담양군 남면(현 가사문학면) 소재지와 가깝다는 이유로 따로 그쪽에 편입되었다가, 2년 후인 1957년 11월 다시 광주시에 편입되었다.[7] 단, 송대리는 광주시에 편입되지 않고 동곡면으로 편입되었다.[8] 그로부터 광산구 농어촌지역은 6년뒤 농어촌발전특별조치법에 따라 지원된 각종 혜택이 중단되고 주민들의 세금부담마저 가중됐다며 1994년과 1999년 두차례 광산군 환원운동이 있었지만 광산군으로 환원에 대한 방식이 틀리고 광주광역시의 무관심과 소극적인 행동으로 끝내 무산되면서 부산, 대구, 인천, 울산, 세종과 달리 행정구역적으로까지 도농복합시로 이루지 못했다.[9] 이들 지역은 상술한 것처럼 이미 1957년에 광주시에 편입되었다가, 1963년에 광산군으로 환원되었던 지역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