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성

 


1. 개요
2. 역사
2.1. 쇠퇴?
3. 귀성이 어려운 이들
4. 기타

歸省

1. 개요


귀성이란 부모님을 뵙기 위해 고향으로 가는 것을 말한다.
이촌향도를 기반으로 한 단어라, 자신이 지방에 살고 서울에 사시는 부모님을 찾아뵙는 경우는 보통 귀성이라고 하지 않는다.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것을 귀경(歸京)이라고 한다.

2. 역사


명절의 귀성 풍속은 오래 전부터 있어 왔지만 산업화로 인한 이촌향도가 본격화되는 1970년대부터 점차 민족 대이동 급으로 확대돼 명절 전 승차권 예매 때나 명절 연휴가 오면 서울역 등 주요 철도역버스터미널에는 귀성 인파가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뤘고 기차버스가축수송 수준으로 귀성객을 실어날랐다.

1990년대의 흔한(...) 귀성길 풍경을 모은 영상.
1980년대 말부터는 마이카 시대가 열리면서 자가용을 통한 귀성객이 늘어 전국의 고속도로가 해마다 거대한 주차장이 되곤 했다.[1] 1990년대 이후 고속도로망이 대대적으로 확충되고 2000년대 들어서는 고속철도의 개통과 저비용 항공사의 등장 등 교통망의 다변화로 교통량이 많이 분산되기는 했지만 구간에 따라 정체가 일어나는 것은 여전하다.

2.1. 쇠퇴?


일각에서는 귀성 풍속도 세월이 지날수록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과거에는 각 지방에서 도시로 유입되는 인구가 많았지만 현재는 이촌향도 현상으로 이주하는 인구가 과거보다 확실히 줄었다.
더구나 1970~1980년대 각자의 고향을 떠나 수도권에 정착한 지방 출신 베이비붐 세대의 경우 고향에 거주하던 부모가 세상을 떠나[2] 더 이상 고향에 내려갈 이유가 없어진 경우도 있고[3] 수도권에서 낳고 키운 자녀들은 분가한 후에도 특별한 이슈가 없는 한 대부분 부모의 거처와 가까운 수도권에 머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자녀들도 장거리 귀성길을 떠날 필요가 없게 됐기 때문이다.
아울러 명절증후군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굳이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분 상한 채로 명절 연휴를 보내기는 싫기에 가족모임을 하고 싶지 않다는 의견이 많아졌다.
귀성 행렬보다는 연휴를 맞아 재충전을 위한 여행 행렬이 더 잦아졌다는 것도 쇠퇴의 한 단편이다. 매년 명절마다 국제선 전용 공항인 인천국제공항의 이용객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그 증거.

3. 귀성이 어려운 이들


건설로 인해 고향이 수몰돼 갈 수 없는 사람들[4], 북한에 고향을 두고 있는 사람들 혹은 정태춘처럼 이런저런 시설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고향이 철거되는 등으로 고향을 잃은 실향민들은 명절에도 귀성을 하지 못한다.
매년 설날추석임진각 망배단 앞에서 실향민들이 모여 북쪽을 향해 합동 제사를 지내고 있다. 그러나 분단의 세월이 길어지면서 실향민의 숫자도 함께 줄어들고 있어[5] 임진각 합동 차례도 언젠가는 보지 못하게 될 수 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귀성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취업준비생, 수험생 그리고 과제가 산더미처럼 쌓인 대학생, 교수를 잘못 만나서 명절에도 수업이 잡힌 대학생 등. 명절에 다들 귀성하는 중에 귀성하기를 포기했다고, 수포자, 영포자에서 따와 "귀포자"라고 한다. 신(新) 실향민이라고도 한다.
이민, 유학, 파견 등으로 해외로 건너간 사람들은 한국의 명절이 해당 국가의 연휴와 맞지 않아서 사실상 귀성이 불가능하다.

4. 기타


귀향(歸鄕)과 비슷한 의미로 쓰는 경우가 많지만, 부모님을 뵙기 위해 하는 귀성과는 달리 부모님과는 관계없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귀향이라고 한다. 귀성이라는 말은 주로 설날, 추석명절에 많이 쓴다.
2000년대에는 장거리 귀성을 떠난다고 해도 교통의 발달로 서울→부산 고속철도 이용 기준으로 왕복 5시간이면 왕래가 가능하기에 과거처럼 본가에서 자고 오는 풍속 대신 아침 일찍 고향을 찾은 뒤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는 당일치기 형태의 귀성이 늘었다.

[1] 이렇다보니 위의 동영상에서 보이듯 아예 차에다 휴대용 가스버너 등 취사도구를 싣고 출발해서 도로 정체가 심하면 그대로 차 안에서 밥을 해 먹거나(!) 라면을 끓여 먹는 진풍경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2] 베이비붐 세대의 부모 세대는 대부분 1920~1940년대에 태어난 이들로 2020년 기준으로 최소 70대 중반의 노인이 됐다. 의학과 식생활의 발달로 장수한다고 해도 부모 세대의 인구는 과거보다 확실히 줄었다.[3] 물론 부모의 묘소가 고향에 있다면 불가피하게 성묘를 가는 경우는 있다.[4] 대표적으로 임하룡이 있다. 산업화 시기에 충주댐, 소양강댐, 안동댐, 임하댐, 팔당댐 등이 건설되며 이런 사람들이 수만~수십만 명 정도는 있다.[5] 1945년 남북분단6.25 전쟁의 여파로 북쪽의 고향을 등지고 월남한 이들은 최소 1950년생 이상이다. (대학 학번으로 치면 69학번 이전) 그 1950년생도 2020년 기준 세는나이 71세가 됐다. 북쪽의 고향에서 뛰놀았던 기억이 있는 해방 이전 세대 출생자는 70대 이상의 노인이 됐고 이미 상당수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날만을 기다리다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