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덕홍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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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德壽宮 德弘殿
덕수궁의 전각이다. 함녕전 서쪽에 있다. 덕수궁의 건물들 중 (현대에 세운 시설물을 제외하고) 가장 나중에 지었다.
‘덕홍(德弘)’ 뜻은 ‘덕(德)이 넓고(弘) 크다’이다.
2. 역사
덕홍전은 일제강점기인 1912년에 처음 지었다. 즉, 조선왕조 시절에는 없었다.
원래 덕홍전 자리에는 경소전이 있었다. 경복궁에 있었는데 1896년(건양 1년)에 경운궁(덕수궁)으로 옮긴 것.[1] 이후 명성황후의 빈전으로 사용했으나 국장 이후에는 ‘경효전’으로 이름을 바꾼 뒤 혼전으로 활용했다. 이 때는 담, 문으로 침전 함녕전과 영역을 구분했다.
1904년(광무 8년) 경운궁 대화재로 경효전은 불탔다. 명성황후의 신주는 임시로 준명전 서행각에 봉안했다가 고종이 머물던 중명전 근처의 수풍당으로 이전했다. 이후 경소전 건물은 옛 모습대로 재건했지만 명성황후의 신주를 다시 이곳으로 옮기지는 않았다.[2][3]
이렇게 제례와 인연이 멀어지고, 또한 고종이 살던 함녕전과 가까워서인지 일제강점기인 1912년에 경소전을 알현실로 고쳐 짓고 이름을 덕홍전으로 바꾸었다. 이 때, 창덕궁의 알현실로 개조되었던 인정전을 참고했다고 한다.
주변도 크게 달라졌다. 우선 함녕전과 영역을 구분하던 담과 문을 헐고 같은 영역으로 만들었다. 혼전 관련 시설들을 전부 없애고, 대신 덕수궁 내 이왕직 청사[4] 및 귀빈실과 찬시실 등을 새로 만들었다. 그리고 귀빈실 및 함녕전과 통하는 복도를 설치했다. 함녕전에 거주하던 고종이 편하게 덕홍전을 오갈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1919년 고종 승하 이후 덕수궁은 비었고 그 후 1933년 일제는 덕수궁을 공원화하면서 많은 전각들을 허물었다. 그럼에도 덕홍전은 살아남아 오늘에 이른다.
3. 구조
- 장대석을 네 벌을 쌓아 기단을 만들었으며 기단 앞에 장대석 세 벌을 쌓은 대를 추가로 설치했다. 기단 상판은 전돌로 마감했고, 대 위는 박석을 깔았다. 그 앞에 소맷돌이 있는 계단을 두었고 측면에는 대 자체를 계단식으로 쌓았다. 그리고 건물의 서북쪽에 소맷돌 없는 3단의 계단을 놓았다.
- 정면 3칸, 측면 4칸의 총 12칸이다. 출입문은 정면 가운데 칸과 동쪽 측면의 남쪽에서 3번째 칸, 그리고 서쪽의 남쪽에서 2번째 칸에 달려있다. 나머지는 전부 중방 위에 교창을 둔 창이며 교창의 창호는 빗살로, 창의 창호는 띠살로 꾸몄다.
- 문은, (문이 있는)각 칸마다 중인방 가운데에 문선을 두고 가운데에 나무로 만든 서양식 당판문을 달았다. 정면과 측면의 모습이 약간 다른데, 정면 문짝에는 판 사이에 정자 모양의 구멍을 뚫어놓았으나 측면의 문짝은 판이다. 나머지 남은 면의 경우, 정면에는 띠살 문짝과 머름을 설치했으나 측면은 벽으로 메꾸었다.
- 실내는 전부 1칸으로 뚫려 있으며 바닥은 전돌이다. 사실 원래는 카페트를 깔았는데 나중에 치운 것. 천장은 우물반자로 하고 반자청판에 구름 속을 날고 있는 두 마리의 봉황을 그려넣었다.
- 근대 이후에 지어서 그런지, 내부 장식에 서양식을 가미했다. 천장에는 샹들리에를 달았고, 교창에는 커튼박스를 설치했다. 커튼박스는 양 가장자리에 날개를 문 듯한 모양의 봉황머리가 있고, 가운데에 금색 오얏꽃 조각이 달린 형태이다.
4. 여담
- 2018년 tVN에서 방영한 시대극 《미스터 션샤인》의 인기를 바탕으로,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재단이 같은 해 11월 23일부터 12월 12일까지 덕홍전에서 극 중 나왔던 한복과 근대 의복을 전시했다. 프로젝트의 정식 이름은 ‘덕수궁 션샤인 – 근대, 그날의 기억을 입다’. 특히 드라마에 직접 참여한 디자이너들이 준비해 화제를 모았다.[7]##
[1] 당시 아관파천으로 고종이 경복궁을 떠나고 경운궁을 환궁(궁으로 돌아가다)할 곳으로 정하면서 경복궁의 건물 일부를 경운궁으로 옮겨지었다.[2] 수풍당에 계속 있다가 1919년 1월 고종 승하 후 1921년 3월에 종묘에 같이 모셔졌다.[3] 임금의 생전에 황후, 왕비가 죽은 경우에는 신주를 혼전에 계속 두고 있다가 임금이 죽은 다음에야 같이 종묘에 봉안할 수 있었다.[4] 일제강점기 이왕가(옛 대한제국 황실)을 담당하던 기구.[5]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건축 단체 조선건축회가 1922년 6월부터 1945년 2월까지 펴낸 기관지.[6] 사진 아래 설명에는 석조전(石造殿)으로 적어두었으나 잘못 쓴 것이다.[7] 총괄 디렉터는 서영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