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도미르 안티치
1. 개요
세르비아(유고슬라비아)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2015년에 허베이 중지 감독을 맡았다.
그는 선수 시절엔 비교적 쏠쏠한 수비수였지만 그렇게 유명하진 않았다. 하지만 감독 인생을 시작한 후 그는 축구 역사상 유례없는 풍운아가 되었다. 이 사람 만큼 감독 인생을 굴곡 있게 살아간 인물은 아마 드물 것이다. 그는 스페인에서 레알 마드리드 CF, FC 바르셀로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등 명문 팀들을 맡아 탁월한 능력을 보여줬지만 항상 끝이 좋지 못해 불명예스럽게 퇴진해야 했다.(...) 특히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 3번 연속 부임해서 3번 연속 경질된(...) 일은 압권이라 하겠다. 그 후 세르비아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했으나 논란의 여지가 많은 사유로 해임되었고 중국으로 무대를 옮긴 뒤 또 다시 경질되었다.
2. 선수 경력
안티치는 1967년 19살의 나이에 유고슬라비아의 명문구단 슬로보단에 입단하며 축구 인생을 시작했다. 그는 한 시즌을 슬로보단에서 보낸 후 1968년 파르티잔으로 이적하고 그곳에서 8년간 활동했다. 이때 안티치는 1976년 국내 챔피언십 우승을 달성했다. 1976년 여름, 안티치는 터키의 페네르바흐체로 이적했다. 그는 페네르바흐체에서 2년간 활동하고 1978년 레알 사라고사로 이적했다. 그후 그곳에서 2년간 58경기 7골을 기록한 안티치는 1980년 1부 리그 소속이었던 잉글랜드의 구단 루튼 타운으로 이적하여 1984년까지 4년간 100경기 9골을 기록했다. 그는 루튼에서 1982-83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맨시티를 상대로 결승골을 기록하며 팀을 강등에서 구해냈다. 그 후 루튼에서 활동한 안티치는 1984년 36세의 나이를 끝으로 선수 생활을 정리하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한편 국가대표팀으로는 1973년에 단 한 번 출장한 경력이 있다. 1973년 9월 26일 헝가리와의 친선 경기 때, 안티치는 Franjo Vladić가 부상으로 결장하자 80분 경에 교체 투입되었다. 그 후로는 국가대표로 더 이상 활동하지 못했다.
3. 감독 경력
선수 생활을 정리한 뒤, 안티치는 1985년 파르티잔의 수석코치가 되어 2년간 그 팀에서 활동했다. 이 시기 파르티잔은 1985-86 시즌에 리그를 우승했고 이듬해에도 2년 연속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1987년 7월, 그는 수석코치 계약을 한 시즌 더 연장하는 데 합의했다. 하지만 시즌 도중, 그는 U-16 팀 코치로 강등 조치 되자 구단의 조치가 부당하다며 팀을 떠났다.
3.1. 레알 사라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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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치는 1988년 레알 사라고사의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감독 인생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당시 레알 사라고사의 스쿼드는 네임벨류가 대단한 선수는 없었다. 그나마 제일 알려진 선수를 꼽자면 레알 마드리드 유스팀에서 성장했으나 1군 선수로 자리잡는데 실패한 후안 세뇨르와 미겔 파르테사가 있었고, 아르헨티나에서 건너온 호세 루이스 칠라베르트도 아직 스타가 아니었다. 그리고 나머지 레알 사라고사 선수들 중 상당수는 22세 이하의 어린 선수들이었다.
안티치는 처음에는 이 어린 선수들을 통제하는 데 애를 먹어 고전을 면치 못하여 시즌 중반 까지 강등권에 머물렀다. 하지만 안티치 감독은 프란시스코 비야로야와 후안 비스카이노 등의 어린 선수들을 중심으로 꾸준히 팀 리빌딩 작업에 매진했고, 후반기에 들어 성적을 조금씩 끌어올리더니 마지막 리그 8경기를 모두 승리하며 순위가 급격히 몰라 마침내 리그 5위를 기록, 다음 시즌 UEFA컵 티켓을 얻었다. 이후 안티치는 2년간 사라고사를 맡으며 가끔씩 선수로 출장하여 어린 선수들을 잘 이끌다가 1991년 3월 레알 마드리드의 부름을 받고 레알로 이적했다.
3.2. 레알 마드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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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3월, 안티치는 레알 마드리드의 부름을 받고 프리메라리가의 명문 중의 명문인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당시 레알은 분위기가 상당히 좋지 않았다. 전임 감독이었던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유러피언컵 8강전에서 스파르타크 모스크바에게 패하고 리그에서도 CD 로그로뇨에게 1:0으로 패했다. 결국 스테파노는 발렌시아 감독 시절처럼 이렇다 할 성과를 보여주지 못한 채 1991년 3월 20일 리그 26경기를 치뤄 7위를 기록한 상황에서 두 번째로 경질되었다. 이로서 안티치는 존 토샥, 디 스테파노에 이어 1990-91 시즌 세번째로 부임한 레알 마드리드 감독이 되었다.
안티치가 부임한 뒤에도 레알 마드리드는 개선의 여지조차 없어 보였다. 1991년 3월 24일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으로서 첫번째 경기를 치뤘다. 상대는 레알 오비에도였는데 결과는 1:1 무승부였다. 레알은 그 다음 상대인 레알 부르고스에게 홈에서 1:0으로 패하며 더욱 깊은 수렁에 빠졌다. 하지만 얼마 후 에스파뇰을 상대로 3:1 승리를 거두면서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데 성공한 뒤 기세를 몰아 발렌시아를 4:0으로 제압하는 등 5연승을 거두었다. 이후 레알은 막판 12경기에서 8승 2무 2패를 기록하며 리그 3위로 상승했고 유로파 진출 티켓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1991/92 시즌은 안티치의 감독 커리어에서 가장 실망스러운 시간 중 하나일 것이다. 1991년 여름, 안티치는 1991 유러피언컵에서 대활약하며 소속 팀인 츠르베나 즈베즈다를 우승시킨 인사이드 포워드 로베르트 프로시네츠키와 영건 루이스 엔리케를 영입하고 페르난도 이에로를 전방에 배치하여 팀 전력을 강화시켰다. 이후 레알은 1991-92 시즌 개막 이래 5연승을 질주하며 1위를 기록하며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다. 하지만 바르셀로나와의 엘 클라시코에서 무승부를 거두며 주춤했다. 그래도 레알은 다음 경기에서 다시 승리를 거둔 후 7연승을 질주하며 선두를 굳건히 했다. 이 연승은 1991년 12월 중순 레알 사라고사와 무승부를 거둠으로서 막을 내렸다.
이렇듯 잘 나가던 레알 마드리드였지만, 사라고사에게 비긴 후 다음 경기인 레알 오비에도와의 경기에서 또다시 무재배를 하면서 분위기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레알은 이후 세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했고 지역 라이벌인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게 시즌 첫번째 패배를 당했다. 레알은 다음 경기인 CA 오사수나와의 홈 경기에서 5:2 대승을 거두며 무승 행진을 3경기에서 막을 내렸지만 바로 다음 경기인 발렌시아와의 경기에서 1:0으로 이기고 있다가 막판에 2골을 내주는 바람에 시즌 두번째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그래도 레알은 다음 경기에서 CD 테네리페를 2:1로 제압하며 선두를 굳건히 했고 유로파 컵에서도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보드진은 발렌시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바르셀로나와의 라이벌 매치에서 우위를 기록하지 못한 안티치를 못마땅하게 봤고 결국 1992년 1월 26일 테네리페를 이긴 직후 안티치를 경질하고 말았다. 사실 당시 회장인 라몬 멘도사는 당시 기술이사로 재직 중이었던 레오 베인하커르를 감독으로 선임하길 원했기에 이런 무리수를 뒀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패착이었다. 레알은 안티치의 경질 이후 경기력이 급격하게 떨어져 결국 라리가 마지막 날에 바르셀로나에게 승점 1점이 밀려 2위에 그쳤고 UEFA컵에서도 토리노에게 4강전에서 패해 무관에 그쳤다. 또한 베인하커르는 다음 시즌에서도 부진을 면치 못하고 6개월 만에 경질되고 말았다.
3.3. 레알 오비에도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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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알 마드리드에서 토사구팽당한 안티치는 1992년 11월, 당시 리그 16위에 그쳐 강등 위기에 놓이자 4년간 팀을 이끌었던 하비에르 이루레타 감독[1] 을 경질한 레알 오비에도의 부름을 받아 칼을 갈기 시작했다. 이후 안티치는 전 소속팀인 레알 마드리드에서 데려온 프로시네츠키를 축으로 선수들을 잘 다독여 팀을 강등 위기에서 구하고 순위를 14위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이후 안티치는 팀을 구한 공적을 인정받아 2년 재계약을 체결했다.
1993년 여름, 안티치는 파르티잔으로부터 수비형 미들필더 슬라비자 조카노비치를 영입하여 수비력을 강화했다. 레알 오비에도는 리그 개막 후 안정적인 경기력을 보여주며 지난 시즌 보다 순탄하게 리그를 꾸려나갔고 결국 그들은 1993-94 시즌을 9위로 마감했다. 안티치는 1994-95 시즌에서도 리그를 순탄하게 꾸려나갔고 유럽 대회에 진출하는 듯 했지만 단 2점차로 9위에 그치며 실패했다. 그래도 오비에도에서 팀을 나름 잘 이끌고 있었던 그는 1995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제안을 수락하고 마드리드로 향했다.
3.4.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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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치의 감독으로서의 전성기를 꼽자면 바로 이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오기 전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라리가를 14위로 마쳤는데, 승강 플레이오프를 치루게 된 17위 알바세테 발롬피에와의 승점 차가 불과 1점이었다. 그리고 그해 우승팀은 호르헤 발다노가 지휘한 레알 마드리드였다.
그는 1995년 여름에 부임하여 대대적인 선수 영입 작업을 펼쳐 호세 루이스 카미네로, 키코 나르바에스, 그리고 디에고 시메오네를 영입했는데, 이 선수들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핵심 선수로 자리잡아 팀의 전성기를 이끌어냈다. 안티치는 그 외에도 6명의 20세 이하 선수들을 대거 영입하여 선수진을 리빌딩하는 데 성공하여 젊고 건강한 팀으로 재편해 바로 지난 시즌만 해도 강등을 간신히 모면했던 팀을 놀랍게도 우승권으로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1995/96 시즌은 세비야 FC와 셀타 데 비고의 협회 기금 미지급 문제로 강등팀 결정이 여러 차례 반복되는 과정에서 22개 팀이 라리가를 구성하게 되었고, 승리 시 승점이 2점에서 3점으로 늘어나는 큰 변화가 있었다. 이보다 더 큰 뉴스는 레알 마드리드가 6위에 그쳐 유럽 클럽대항전 출전권을 얻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안티치는 팀을 이끌고 무패 행진을 이어나갔고 그들을 이길 팀은 어디에도 없어보였다. 델피 겔리와 산티 데니아가 센터백을 맡고 로베르토 솔로자베이와 안토니오 뮤네즈가 각각 라이트백과 레프트백을 맡은 수비진은 리그 최소 실점을 기록할 정도로 막강한 수비력을 과시했다. 또한 후한 비즈카니오와 카미네로가 맡은 센터 미드필더, 시메오네와 파티치가 맡은 좌우측 윙어 또한 훌륭했고 2선의 키코, 그리고 스트라이커 몰리나가 이끄는 공격진 또한 강력했다.
이렇듯 수비와 공격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아낸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1977년 이후 마침내 19년 만의 리그 우승을 달성했으며 코파 델 레이에서도 우승을 차지하며 더블을 기록했다. 오늘날에도 많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팬들은 이 시기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역사상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반면에 이웃 라이벌인 레알 마드리드는 마드리드 더비에서 둘 다 이겼지만 코파 델 레이에서는 16강으로 탈락하여 최악의 시즌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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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 우승컵을 들어올리고 있는 안티치. 이때가 그의 감독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
1995-96 시즌에서 대성공을 거둔 안티치는 리그 챔피언 타이틀을 방어하기 위해 전력을 좀더 강화시키고자 했다. 그는 PSV 아인트호벤으로부터 당시 19살의 유망주였던 '''호나우두'''를 영입하려 했다. 그러나 바르셀로나가 호나우두에게 더 많은 주급을 제의하는 바람에 결국 호나우두가 바르셀로나에 가는 걸 막지 못했다. 그 대신, 아틀레티코는 23세의 아르헨티나 스트라이커인 Juan Esnáider를 레알 마드리드로부터 영입했다. 또한 안티치는 유로 1996에서 대활약하여 체코를 준우승으로 이끌었던 24세의 체코 출신 수비형 미드필더인 라덱 베이블을 영입했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시즌이 시작된 후 레알과 바르셀로나에 이어 3위를 유지했고 챔피언스리그에서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비제프 우치, 스테에우아 부쿠레슈티를 제치고 조별 예선 1위를 기록했다. 그후 리그에선 레알과 바르셀로나에게 밀려 3위에 그쳤지만 챔피언스리그에선 승승장구하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4강전 아약스와의 경기에서 패배하여 결국 탈락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안티치는 2번째 시즌에선 리그 3위와 챔피언스리그 4강을 기록했다.
1997년 여름, 안티치는 리그 우승컵을 탈환하기 위해 유벤투스의 전설적인 스트라이커 크리스티안 비에리를 영입했고 미들즈브러로부터 브라질의 25세 공격형 미드필더 주니뉴 파울리스타를 1200만 유로에 영입했다. 반면 디에고 시메오네를 인터 밀란으로 팔아치웠다. 이 시기 안티치는 수천만 유로에 달하는 거액을 소진해가며 유명 선수들을 대거 영입했다.
그러나 그 놈의 부상이 그의 계획을 망쳐버리고 말았다. 비에리는 24경기에서 24골을 기록하며 여전한 실력을 과시했지만 주니뉴는 부상에 시달리며 23경기 6골만 기록한 두 시즌을 조기 마감하고 말았다. 또한 여러 선수들도 부상에 시달렸고 팀은 선두권에서 일찌감치 밀려나 순위가 점점 떨어졌다. 게다가 라치오와의 유로파 대회에서 패배를 당하자, 안티치를 경질하라는 목소리가 일기 시작했다. 결국 며칠 후, 안티치는 시즌을 채 마치지도 못하고 경질되고 말았다.
3.5. 아틀레티코 미드리드 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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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99 시즌,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안티치를 경질한 뒤 혼란에 휩싸였다. 그를 대신해 감독으로 부임한 아리고 사키는 AC 밀란에서의 환상적인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마드리드에선 별로 인상적이지 못했고 결국 팀 성적을 13위로 떨구고 말았다. 이에 보드진은 사키를 경질한 뒤 안티치를 다시 감독으로 선임했다. 이후 안티치는 남은 11경기를 3승 4무 4패로 마감하여 시즌을 13위로 마감했고, 그해 코파 델 레이에서는 준우승에 그쳤다.
하지만 이사진은 안티치가 딱히 인상적인 경기력을 보여주지 못한 것에 실망하고 시즌이 끝난 뒤 그를 또다시 내쫓고 클라우디오 라니에리를 새 감독으로 선임했다.
3.6.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3기
... 그런데 1999-00 시즌, 라니에리가 이번에는 팀을 강등권으로 인도하고 말았다. 그러자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보드진은 라니에리를 경질한 뒤 또다시 안티치를 감독으로 선임했다. 이로서 안티치는 1998년 아틀레티코에서 경질된 후 1999년 다시 아틀레티코에 부임하고 그 해 다시 짤렸다가 2000년에 아틀레티코에 재선임되는 축구 역사상 유례없는 행보를 보여줬다.(...) 하지만 이 선임은 별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안티치는 강등권에 처진 팀을 구하지 못했고 그해 코파 델 레이에서도 준우승에 그쳐 결국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종국에 '강등'이라는 두 글자로 파국을 맞았다. 이에 보드진은 그를 또다시 경질했다. (...)
3.7. 레알 오비에도 2기
2000년 여름, 안티치는 레알 오비에도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과거 레알 오비에도에서 성공적인 행보를 보였던 그였지만 이번에는 별로 좋지 못했다. 2001년 1월 30일엔 브래드포드 시티로부터 잉글랜드 축구 선수인 스탠 콜리모어를 자유계약으로 영입했다. 이 영입은 수많은 미디어들의 관심을 이끌어내긴 했지만 문제는 이 선수는 실력은 좋은데 성격이 매우 좋지 않은 인물이라는 것이다. 콜리모어는 이기적인 플레이를 서슴지 않아 팀 분위기를 흐리게 했고 툭하면 동료들과 말다툼을 벌였고 감독의 지시에도 불순종했다. 결국 레알 오비에도 측은 한 달 만에 콜리모어를 방출했고 콜리모어는 즉시 축구 인생을 은퇴한다고 선언했다. 레알 오비에도는 콜리모어를 방출한 이후에도 부진한 성적을 이어가다가 결국 강등되고 말았다. 보드진은 팀을 강등시킨 책임을 물어 안티치를 경질했다.
3.8. 바르셀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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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월, 안티치는 레알 마드리드의 영원한 앙숙인 바르사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이는 루이 판 할이 시즌 중에 경질되면서 찾아온 기회였다. 당시 바르셀로나는 리그 15위까지 떨어지면서 최악의 부진에 빠져 있었다. 그는 6개월간의 한시적인 계약을 맺고 챔스 진출권 확보 시 1년 계약 연장이라는 조건으로 지휘봉을 잡았다. 그는 빠르게 바르사를 재정비하는 작업에 착수하여 겨울 이적시장 기간에 후안 파블로 소린을 영입해 활력을 불어넣었고, 차비 에르난데스의 전진배치로 중원의 창조성을 강화했으며, 유스팀에서 키운 빅토르 발데스와 안드레스 이니에스타를 1군으로 끌어올려 중용했다. 안티치는 바르사 감독으로 맞이한 엘 클라시코에서 훌륭한 경기를 보여 4월 19일 베르나베우 원정에서 1-1 무승부를 이끌었다.
이 경기에서는 전 바르사 공격수 호나우두가 전반 15분 선제골을 넣었고, 전 레알 마드리드 미드필더인 루이스 엔리케가 전반 31분 동점골을 기록하는 등 흥미로운 사건이 많았다. 안티치호는 가파른 상승세를 탔지만 결국 시즌을 6위로 마쳤다. 비록 챔스는 놓쳤지만 UEFA컵 티켓은 따게 되었다. 또한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여전히 승승장구하여 8강에서 마르첼로 리피 감독이 지휘하는 유벤투스를 만나면서 바르사는 1차전과 2차전에서 둘 다 1:1 무승부로 동률을 이룬 뒤 연장전에서 아쉽게 한 골을 내주면서 패배했다. 그러나 신임 회장 조안 라포르타는 연장 계약을 제시하지 않고 프랑크 레이카르트를 새 감독으로 선임했고, 안티치는 엘 클라시코와의 인연을 마무리했다.
3.9. 셀타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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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에서 억울하게 느껴지는 이유로 쫓겨난 안티치는 2003-04 시즌 중반 강등권과 불과 승점 1점차로 몰려 있던 셀타 비고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당시 셀타 비고는 리그에선 매우 부진했지만 챔피언스리그에서는 반대로 16강에 진출하는 등 선전했다. 안티치는 팀을 수습하기 위해 여러 잉여 선수들을 방출하고 이적시장에서 나름대로 활발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그는 새로 영입된 선수들과 기존의 멤버들을 제대로 조화시키는 데 실패했다. 셀타 비고는 챔스 16강에서 아스날에게 5:2로 패하고 탈락했으며 리그에서도 부진을 면치 못했다.
2004년 3월 29일, 안티치는 레알 사라고사와의 홈경기에서 2:0으로 패배하고 리그 19위로 추락하자 결국 경질되고 말았다. 이후 셀타 비고는 혼돈에 휩싸였고 결국 그 시즌에 강등되고 말았다. 안티치는 훗날 자신이 셀타 비고 같은 환경에 처한 팀에 부임한 것은 실수였고 다시는 시즌 중반에 감독 직을 맡지 않겠다고 밝혔다.
3.10. 세르비아 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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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8월 19일, 안티치는 세르비아 축구 협회의 제안을 수락하고 세르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안티치는 2008년 9월 6일 페로 제도와의 국대 감독으로서의 첫번째 경기를 치뤘고 결과는 2:0 승리였다. 이후 안티치는 선수들을 제대로 조화시키는데 성공하여 리투아니아를 3:0으로 제압하고 4일 뒤엔 오스트리아를 격파하는 등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본선 진출을 향한 여정을 순탄하게 이어갔다. 이후 루마니아를 원정에서 3:2로 이겨 2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이 때문에 프랑스는 세르비아에게 밀려 플레이오프로 밀려났고, 아일랜드와의 플레이오프 경기에서 앙리의 신의 손으로 가까스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지만, 정작 월드컵 본선에서는 개망하고 말아 세상의 비웃음을 한 몸에 받았다.(...)
각설하고, 다시 세르비아의 월드컵 이야기를 써 보자면, 월드컵에선 독일, 가나, 호주와 D조라는 죽음의 조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1차전에서는 가나에 패했지만, 2차전에서 독일을 1:0으로 이기는 이변을 일으켜 전 세계를 경악시켰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3차전에서는 호주에게 패하며 1승 2패에 월드컵 조 예선 꼴찌로 탈락하고 말았다. 월드컵이 끝난 후, 안티치는 해임될 뻔했다가 연봉까지 반토막난 채 겨우 재계약하고 UEFA 유로 2012를 준비했다. 일단 페로 제도를 3:0으로 제압하여 순탄한 출발을 보였다. 그런데 슬로베니아를 1:1로 비긴 뒤, 안티치는 돌연 해고되고 말았다. 이유는 '고작' 슬로베니아 따위를 이기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 후 세르비아는 관중 난동으로 인해 무관중 징계까지 받는 등 여러 악재에 시달린 끝에 결국 유로 2012에 진출하지 못했다.
3.11. 산둥 루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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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25일, 안티치는 중국 슈퍼 리그의 클럽인 산둥 루넝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그는 2013 시즌에 고작 12위를 기록하고 말았고 결국 2013년 12월 21일 경질되고 말았다.
3.12. 대한민국 대표팀 감독 지원
2014년 7월, 안티치가 홍명보 사임 이후 공석이 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직에 지원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사실 그 외에도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남아공월드컵 준우승을 일궈낸 베르트 판 마르베이크나 98 월드컵 당시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었던 글렌 호들, 2014년 현재 갈라타사라이와 상호계약해지라 무직 상태인 전 맨체스터 시티 감독 로베르토 만치니, 한국을 잡기 위해 K리그 경기까지 찾아봤다는 전 알제리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바히드 할릴호지치, 구자철과 박주호 등의 소속팀 마인츠의 전 감독인 토마스 투헬, 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의 미겔 에레라나 코스타리카 축구 국가대표팀의 호르헤 루이스 핀투 등이 거론되었다.
하지만 이용수 기술위원장은 아시안컵, 유로컵 등의 대회 지휘 경험, 영어구사 가능, 월드컵 예선과 본선 16강 이상 지휘 경험, 클럽팀 지휘 경험, 국대경기가 없을 때 축협의 지도자 육성 프로그램 참여 가능, 현재 무직이고 바로 계약 가능한 사람 등의 요건을 거론했는데, 안티치는 이 요건에서 미달되었기에 결국 탈락했고, 대신 울리 슈틸리케가 선임되었다.
3.13. 허베이 중지
2015년 1월 27일, 안티치는 중국 1부리그의 허베이 중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이해 중반 팀을 이수한 화샤그룹은 팀명을 허베이 화샤로 바꾸면서, 8월 안티치를 전격 경질했다. 반전은 후임감독이던 리톄가 남은 9경기중 8경기를 승리하여 팀을 슈퍼리그로 승격시켰다.
4. 사망
2020년 4월 6일 오랜 췌장염 투병생활 끝에 사망했다.
5. 논란
1995-96 시즌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맡아 잘 나가고 있던 시절, 안티치는 스페인의 칼럼니스트 허만 타시치를 공개적으로 모욕했다 그는 1995년 9월 10일 엘 문도와의 인터뷰에서 타시치가 자신을 비판하는 것은 그가 반 세르비아 주의자이기 때문이라며 그를 '''나치'''라고 지칭했다. 이에 타시치가 안티치를 고소했다. 둘 간의 법정 다툼은 2003년 11월 중순에야 안티치가 만 2천 유로의 벌금을 지불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1] 그러나 그는 1998년에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 감독으로 부임하여 1999/2000 시즌에 큰 일을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