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프랑스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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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프랑스'''
1. 개요
2. 역사적 관계
2.1. 중세
2.2. 18세기
2.3. 19세기
2.4. 20세기
2.5. 현대
2.5.1. 2010년대
2.5.2. 2020년대
3. 문화 교류
4. 대사관
5. 관련 문서


1. 개요


러시아프랑스는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둘다 상임이사국이지만, 역사적으로는 사이가 좋지 못한 적대적인 관계로 지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문화적으로는 교류가 상당했는데, 러시아는 유럽으로 정체화 할수록 유럽의 문화를 선도하던 프랑스 문화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프랑스 역시 귀족층을 중심으로 러시아식 문화를 은연중에 흡수해 왔다[1]
그도 그럴 것이 나폴레옹 전쟁, 크림 전쟁 외에는 딱히 서로가 외교적으로 충돌한 역사가 없기에 서유럽 국가들 중 프랑스가 그나마 친러 스탠스를 취할 수 있었다. 후술하겠지만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프랑스로부터 차관을 빌려와 건설하였으며 1890년대 접어들어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러불동맹을 맺고 삼국간섭에 함께 개입하였을 정도였다. 여담으로 1차세계대전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 소련군은 아드리안 방탄모를 사용했는데 이 역시 프랑스에서 직수입 해 온 물건이었다. 그만큼 교류가 많았다는 뜻이기도 하다.[2]
또함 러시아는 1991년 소련 붕괴이후 프랑스를 모티브를 삼아 이원집정부제식의 민주주의를 표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2. 역사적 관계



2.1. 중세


러시아와 프랑스는 중세때부터 연결고리가 생겼다. 키예프 공국시절에 야로슬라프 1세의 딸 중에 안나 야로슬라프가 앙리 1세와 결혼했었다.
키예프 공국이 몽골 제국에 의해 멸망한 뒤, 양국관계가 잠시 단절되었다.

2.2. 18세기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러시아도 프랑스의 문화도 받아들이고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 유럽의 국제어인 프랑스어가 러시아에서 중요하게 쓰이기 시작했다. 특히 표트르 대제가 유럽식 제도를 받아들이는 등의 개혁을 할 때부터 러시아의 귀족들은 외국어로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 예카테리나 2세때 러시아 궁정의 공식언어가 프랑스어였을 정도. 이러한 분위기는 제정 말기까지 지속되어, 훗날 하급 귀족인 레닌도 프랑스어 가정교사를 두고 프랑스어를 배웠다고 한다.
프랑스 혁명기에 많은 왕당파 귀족들이 프랑스를 탈출해 유럽 곳곳으로 빠져나갔는데, 이 때 러시아로 망명한 귀족들도 상당수 있었다. 이들의 후손들은 훗날 러시아 혁명 때 러시아를 떠나 조상처럼 망명자 신세가 되었다(...).

2.3. 19세기


19세기에 나폴레옹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로 진군했으나, 맹렬한 추위로 인해 결국 러시아에 졌다고 알려져 있지만 알다시피 추위는 국적을 차별하지 않는다. 게다가 당연히 나폴레옹도 러시아의 겨울을 피해 쳐들어갔다. 실제로 서유럽권에서는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할 경우, 자주 추위 탓을 하는데 이는 자존심 문제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러시아는 프랑스가 점령했던 다른 유럽 국가들과는 비교를 거부하는 광대한 영토를 보유한 나라이다. 이에 따르는 너무나 긴 보급선, 예상보다 강한 러시아의 항전 의사, 동맹의 급속한 이탈에 부딪혀 그냥 전쟁에서 진 것이다. 실제로 프랑스군은 개전 초기 모스크바만 점령하면 러시아가 항복할 거라는 장밋빛 환상을 품었으나, [3] 러시아가 이를 거부하고 결사항전 의지를 보이자 재빨리 철군을 결정했다.[4] 추위는 퇴각 과정에서 사상자를 늘리는 역할 정도만 했다.[5] 그리고 19세기 중반에 러시아가 크림 전쟁을 일으키자 프랑스는 오스만 제국을 돕고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동맹군들과 함께 러시아와 전쟁을 했다. 러시아는 혁명으로 프랑스와 적대적인 관계가 되자 프랑스와 관련된 것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그리고 프랑스와 러시아는 독일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1892년부터 1917년까지 러불동맹을 맺기도 했다. 알렉산드르 3세는 독일의 비스마르크와 사이가 나빠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고, 프랑스 자본을 끌어들여 시베리아 철도를 놓게 되었다. 청일전쟁 이후 삼국간섭때도 두 국가가 동맹상태여서 그런지 서로 협력하기도 하였다. 프랑스에서도 19세기말에 있었던 파리 박람회당시에 알렉상드르 3세 다리가 세워지기도 했다. 적대적인 것과는 별개로 문화적인 면에서는 계속 영향을 받았고, 19세기에도 프랑스와 러시아가 적대적인 상태에서도 프랑스어는 러시아에서 중요한 외국어가 되었고, 러시아의 귀족들은 러시아어외에도 프랑스어를 아는 것을 중요시했다.

2.4. 20세기


1918년에 러시아 제국이 멸망하고 소련이 건국되자 소련은 프랑스에도 정치적인 영향을 주게 되었다. 러시아 제국이 멸망했을 때, 러시아 귀족들이 프랑스로 대거 피난을 갔다.[6]
전통적인 자본주의 국가였던 프랑스는 영국,독일과 더불어 소련을 가장먼저 처리해야할 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1933년, 독일 내 히틀러가 집권한 이후 프랑스는 독일의 급부상을 견제하기 위해 1934년 3월, 프랑스의 외무장관이던 장 바르투[7]가 소련을 도우면 독일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소련과의 협력이 진전되어 소련-프랑스 공동안보체제를 결성하려고 노력하였으나 바르투 외상이 암살당하면서 이 조약은 무효화되고 말았다.
이로보아 러시아와 프랑스는 소련시절부터 현재까지도 서로 가상적국으로 견제를 해왔던 면도 있지만, 프랑스는 영국과 달리 완전한 반러성향의 국가는 아니라서 나치 독일을 막아내기 위해 어느정도의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쪽의 외교노선을 탔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프랑스와 소련은 상임이사국이 되었고 외교관계를 유지했지만 프랑스는 자유진영에 속했기 때문에 사이가 좋지는 않았다. 소련이 알제리 전쟁이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때 식민지 반군들을 지원해주기도 했고. 그래도 냉전시기 다른 국가들에 비하면 양반이였던 편.
1990년에 소련의 고르바초프는 프랑스를 방문해 양국간의 새로운 협력관계 설정 및 EC의 소련 경제지원을 촉구하기도 했다.#

2.5. 현대


프랑스의 대러 외교 기본은 위험한 독재체제인 러시아와의 충돌을 가급적 꺼리는 것이다. 미국과 공조하여 러시아에 적극적으로 맞서는 영국과 다르게, 아무래도 국경이 가까운 독일-프랑스는 러시아와의 분쟁을 최소화하려고 애쓰는 편이다. 물론 러시아와 미-영의 충돌이 격화될 경우에는 어느정도 미-영 쪽 움직임에 공조하긴 한다.

2.5.1. 2010년대


유로마이단 이후, 러시아가 크림 반도를 합병하자 러시아 제재를 했다. 이에 프랑스 정부는 미스트랄급 강습상륙함을 러시아로 보낸다는 계획은 취소했다.[8]
대통령에 당선된 마크롱은 러시아 제재는 계속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거기에다 프랑스는 영국과 연대하면서 러시아 외교관 추방 정책을 실시했지만, 동시에 마크롱 대통령이 5월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릴 예정인 경제 포럼에 참석하겠다고 밝혔다.#
대선에서 마크롱과 대결했던 마린 르 펜친러성향이고, 프랑수와 피용도 친러성향이다.
2017년 5월 29일에 마크롱과 푸틴은 정상회담을 가졌고 북한 핵문제에 대해선 공조를 같이 한다고 합의했지만, 시리아 문제와 우크라이나 문제에서는 이견을 나타냈다. #
프랑스는 미국과의 교역불확실성이 커지고 트럼프와 갈등하는 경우가 늘어나자 중국과 러시아에 손을 내밀며 경제관계를 강화하고 있다. # 하지만 영국에서 세르게이 스크리팔 암살 미수 사건이 일어나자 영국, 독일과 함께 연대하면서 러시아를 비판했고 EU의 러시아 외교관 추방정책에 동참했다.#
2018년 5월 24일에 푸틴과 마크롱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회담에서 이란핵문제, 시리아사태에 대해 논의했다.#
2018년 8월 10일에 마크롱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에게 우크라이나 출신의 반체제 영화감독의 선처를 촉구했다.#
2019년 1월 2일에 마크롱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은 전화통화에서 시리아문제와 우크라이나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러시아의 드미트리 페스코프 대변인의 딸인 엘리자베타 페스코바가 프랑스 의원의 인턴으로 근무하고 있는 것이 밝혀지면서 논란을 빚고 있다.#
2019년 6월 24일에 필리프 총리와 메드베데프 총리는 프랑스에서 만나 회동을 갖고 양국 간 경색된 관계증진을 모색했다.# 8월 19일에 마크롱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이 회담을 가질것이라고 AFP통신이 보도했다.# 그리고 푸틴 대통령과 마크롱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문제를 비롯한 시리아, 이란 등 주요 분쟁 현안의 출구전략을 논의했다.# 하지만 대화하는 과정에서 마크롱 대통령이 러시아의 공정선거를 요구하자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판 노란조끼 시위는 원치 않는다고 밝히는 등 신경전이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에 대해선 러시아 포용론을 밝히며 러시아와 적대시하는 것을 멈추고 유럽의 일원으로 받아들어야한다고 8월 27일에 G7정상회의에서 밝혔다.#
제정 러시아 채권의 환수도 지속되고 있다.# 그리고 크림 반도 합병이 된 뒤로 중단되었던 프랑스-러시아 안보관계 장관회의가 5년만에 열렸다.#
2019년 12월 9일에 돈바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크롱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 젤린스키 대통령,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파리에서 모여 회담을 가졌다.# 회담에서 돈바스 지역의 평화적인 해결도 합의하고 2019년말까지 휴전도 합의하면서 러시아 측은 EU의 제재해제와 G8복귀도 희망했다.#

2.5.2. 2020년대


2020년 6월 24일에 마크롱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은 26일에 화상회의로 회담을 하기로 밝혔다.# 그리고 회담뒤에 마크롱 대통령은 러시아를 방문하기로 합의했다.# 또한, 불러관계 개선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8월에 프랑스 장교가 러시아 기밀을 넘기는 스파이짓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10월 20일에 푸틴 대통령과 마크롱 대통령은 전화 통화를 하고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 문제를 논의했다.#
2021년 2월 13일에 뱌지마에서 나폴레옹 군대와 러시아 제국군간의 전투에서 사망한 양국군인의 합동장례식이 진행되었고, 쿠투조프 장군의 후손과 뮈라 장군의 후손도 참석했다.#
프랑스가 러시아 소행으로 의심되는 해킹을 다수 적발했다.#

3. 문화 교류


프랑스와 러시아와의 관계가 역사적으로 깊었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문화교류가 이뤄졌다. 프랑스어의 경우, 전술했다시피 루스 차르국과 러시아 제국 당시에 러시아의 주요 외국어이자 귀족들이 자주 사용했다. 프랑스의 문화가 러시아에도 전해지면서 러시아는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심지어 러시아어에도 프랑스어 차용어가 많이 포함됐다.
제정 러시아 시절 많은 러시아인 귀족들이 프랑스인 가정 교사를 고용하여 프랑스어를 배웠다. 물론 프랑스인 교사들이 공짜로 와서 가르쳐준 건 절대 아니고 비싼 교습료와 먹고 자는 비용은 농노들에게 납부받은 지대로 지불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농촌 공동체 문화를 본받자는 슬라브주의자들 사이에서 반프랑스 감정도 있었고 이들은 어설프게 프랑스 따라하길 좋아하는 귀족들을 비꼬는 식으로 이를 지적하길 좋아했다.
현재에도 프랑스어는 러시아의 주요 외국어에 속해 있다. 러시아어는 프랑스에서 적지만, 일부 배우는 경우도 있다.
2019년 10월 16일에 러시아 박물관에서 중국과 프랑스에서 지점을 세울려는 계획을 하고 있다.#(러시아어) 그리고 프랑스어에서 러시아어 행사가 개최되었고, 파리시에서 처음으로 러시아 지역 어학교 행사가 개최되었다.#1#2

4. 대사관


양국은 대사관을 설립했다. 모스크바에는 주 러시아 프랑스 대사관이 존재하고 파리에는 주 프랑스 러시아 대사관이 존재한다. 냉전당시에는 주 소련 프랑스 대사관, 주 프랑스 소련 대사관이었다.

5. 관련 문서



[1] 예컨대, 제정 시기 러시아 궁정 회의의 공식 언어가 프랑스어가 되거나 러시아어에 프랑스어 차용어가 존재하는 것, 한 접시씩 음식을 내가는 러시아식 코스 요리 전통이 프랑스 요리에 이식된다거나 하는 것이 그 예.[2] 또 다른 프랑스계 국가인 벨기에는 러시아와 직접적인 악연이 없어서 러시아와 사이가 나쁘지 않은 편이다. 영국과 러시아는 미러보다도 오래된 앙숙이었고 독일과는 독소전쟁이 있었으며 네덜란드는 그럭저럭 괜찮았으나 2014년 돈바스 전쟁 도중 말레이시아 항공 비행기 격추사건으로 인해 틀어져 버렸던 것에 비해 러불관계는 그나마 양호한 편이다.[3] 19세기 러시아의 경우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두 수도' 라고 지칭했다. 즉 차르가 상트페테프부르크에 머무르고 있다고 해도, 상트페테르부르크만 수도이고 모스크바는 수도가 아닌데 엉뚱한 도시를 목표로 삼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것. 게다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경우 표트르 대제의 서방정책으로 1700년대 이후 건설하여 급성장한 일종의 신도시, 신수도로써 도시로서의 역사 및 중요도에 있어서는 1400년대 이후 러시아의 중심지이자 근대 러시아의 모태 역할을 했던 모스크바보다 높다고 보기 어렵다. 좀 극단적으로 비교해 보면 만약 한국에서 헌법개정등을 통해 세종시가 공식적인 수도의 지위를 부여받는다고 해도 한국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핵심도시로써의 위상이 서울시에서 세종시로 휙 옮겨가지는 않는다는 것. 결국 모스크바만 함락시키면 러시아의 저항의지를 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 자체야 완전한 오판이었지만, 최우선 공격 목표로 삼아야 할 최중요 도시를 상트 페테르부르크가 아닌 모스크바로 본 판단 자체는 틀렸다고 하기는 어렵다.[4] 애초에 러시아 경제를 뿌리부터 흔드는 대륙봉쇄령을 내려놓고 러시아가 쉽게 항복하리라고 판단한 게 의문스러울 정도. 모스크바를 점령한 나폴레옹의 항복 요구에 알렉산드르 1세가 “베링해까지 와서 다시 물어보라.”라는 답을 한 걸로 보아, 러시아는 상트 페테르부르크까지 내주더라도 항복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5] 차라리 러시아의 전략적 이점을 따진다면 유럽쪽 국경에서 중심부까지 기나긴 거리를 통해 가능한 종심방어 자체가 가장 크고, 추위는 이 전략적 이점의 성립을 조금 쉽게 하는 정도라는 것이다.[6] 프랑스어를 자주 썼던 러시아 귀족들은 프랑스인들로 동화되었다.[7] Jean Louis Barthou(1862~1934)[8] 이후에 미스트랄급은 이집트군에 보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