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야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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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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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6월 26일 러시아 제국의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 사이에서 1남 4녀 중 3녀(셋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니콜라이 2세의 일기에는 이렇게 써 있다.
[image]기쁜 날, 하느님께서 셋째 딸 마리야를 보내주셨다. 마리아는 12시 10분에 무사히 태어났다. 알릭스[1]
는 매우 힘들었는지, 신체적 고통으로 밤에서 아침 무렵까지 자고 있다. 하느님, 고통을 빨리 넘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리야는 파랗고 큰 눈동자를 가졌고 밝은 밤색깔 머리색을 가졌고, 장밋빛 뺨과 더불어 키가 크고 튼튼했다. 그녀는 무척 예쁘고 사랑스러운 소녀였다.[2] 가족들 사이에서 황녀들을 부르는 애칭이 있었는데, 마리야는 종종 "마샤" 또는 "마쉬카"라고 불렸다.
2. 꿈 많은 셋째 황녀
마리아는 유아 시절 장난끼가 많았었다. 시녀들이 마리아를 목욕시킬 때, 도중에 뛰쳐나와 그 상태로 복도를 걸어다녔었다. 그리고 가끔씩 어머니 알렉산드라 황후의 식탁에서 과자를 훔치자, 알렉산드라 황후가 마리아를 꾸짖고 방으로 돌려보냈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10살이 넘으면서 점차 온화한 성격의 얌전하고 조용한 사춘기 소녀가 되었다.
마리아는 러시아식 미인이었고, 가족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다. 아버지 니콜라이 2세가 장티푸스로 인해 사경을 해매게 되자, 마리아는 자신의 방에 있는 아버지의 초상화를 밤마다 보며 울고 하였다.
마리아는 성장하면서 무척 아름다워졌는데, 그녀에게는 꿈이 있었다. 바로 '가정'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같은 낭만적인 사랑과 연애결혼을 꿈꾸며, 언제나 결혼과 가정에 대해 동경하는 꿈 많은 소녀였다. 이러한 꿈을 꾸게된 계기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부모인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가 연애결혼을 했고 그만큼 부부 금슬도 좋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3] 하지만 1918년 러시아 내전 당시 본인과 가족들이 모두 암살당하면서 무산되었다.
1916년, 전쟁이 터지고 아버지 니콜라이 2세는 전선에 나갔다. 그리고 어머니 알렉산드라 황후와 두 언니는 다친 병사, 장교들을 치료했고, 마리아와 아나스타샤는 어리기 때문에 옆에서 조수 역할을 했다. 마리아는 어린 시절부터 군인들과 친하게 지냈는데 이곳에서 만난 장교와 친해져 아버지에게 가끔 그의 안부를 묻곤 했다.
3. OTMAA이라 불린 5남매
1901년, 마리아의 가장 친한 단짝 친구인 여동생 아나스타샤가 태어났다. 마리아와 아나스타샤는 룸메이트였고, 무척 친하고, 옷도 똑같이 입었었다.[5] 마리아는 순진하고 얌전한데 비해, 장난끼 많은 아나스타샤는 마리아의 순진한 성격을 이용하여 셋째 언니를 자주 골탕을 먹였다. 아나스타샤가 다른 사람들한테 장난을 칠때 늘 사과했다고. 마리아의 큰언니 올가와 작은언니 타티아나도 마리아를 자주 놀렸지만, 마리아는 늘 재미로 받아들였다.
자매들은 그런 마리아의 착한 성품을 무척 좋아했고, 4자매들은 서로 무척 친했다. 서로가 일기 등에서 머리글자인 'OTMA'(올가, 타티야나, 마리야, 아나스타샤)로 표현할 정도로, 거기다 두 언니와 여동생 아나스타샤뿐만 아니라, 5남매 모두 우애가 좋아서 막내 남동생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 황태자와 함께 OTMAA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당시 혼란스러운 러시아 제국과 달리, 황제 부부는 자식들을 사랑했기에 5남매 모두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낼수 있었다.
4. 러시아 혁명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니콜라이 2세는 폐위되었다. 황제 일가는 볼셰비키 감시 하에서 망명생활을 시작하였다. 마리야는 예카테린부르크로 망명할 때 남매들 중 유일하게 부모와 함께 먼저 출발했다. 알렉산드라 황후가 생각하기엔 첫째 올가는 기운이 없었고, 둘째 타티아나는 알렉세이를 돌봐야 했고, 넷째 아나스타시야는 아직 너무 어렸던 데다 다섯째 알렉세이는 다친 게 심해져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기 때문.[6]
볼셰비키 당원들은 황녀들의 침실의 문을 못 잠그게 하였으며, 심지어 욕실까지 따라왔다. 황녀들은 길거리에 나가기만 하면 경멸과 비난과 조롱거리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자신들을 감시하는 군인들이 농담을 한답시고 성희롱을 해 황녀들은 매우 충격을 받았다. 그런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작은언니 타티아나가 충격을 받아 울면서 뛰쳐나가자, 마리야 여대공이 그 군인을 크게 꾸짖었다고 한다. 하루아침에 몰락한 비참한 순간이었음에도 마리야에게는 아직도 황녀로서의 위엄이 남아있었다.
마리야는 황제 일가 중에서 감금 생활에 가장 잘 적응했으며, 일가를 감시하던 경비병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마리야의 생일날 몰래 생일 케이크를 가져다 준 경비병이 있는가 하면, 심지어 '''마리야와 결혼을 하거나 그녀를 감금지에서 구출하고 싶다'''고 부모에게 말한 경비병도 있었다. 이런 경비병들의 동요는 볼셰비키 측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으며, 결국 볼셰비키는 감금지 경비병들을 대거 교체하고 감시를 강화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5. 사망
1918년 7월 16일 밤 12시경, 유로프스키가 이파티예프하우스의 문을 두드리고 지하실로 내려오라고 했다. 그들은 단순히 사진을 찍는 줄로만 알았으나, 지하실에서 유로프스키는 황제 일가에게 처형 사실을 통보한 후 볼셰비키 요원들과 함께 황제 일가에게 총을 난사했다.
로마노프 왕조 마지막 황제 가족은 아나스타샤와 마리아를 제외하고 전원 즉사했다. 마리아는 허벅지에 총을 맞고 총검에 찔렸지만 그녀의 옷 안에 있던 보석들 때문에 죽지 않았고, 결국 볼셰비키 요원은 마리아의 머리에 총을 쐈다.[7] 처형이 끝난 줄 알고 시신을 처리하던 중 기절해있던 마리아가 다시 깨어나서 소리를 지르자 그들은 조용해질 때까지 얼굴을 구타했다.[8] 총에 맞고 급사한 다른 가족과 달리 마리아는 죽은 이유가 명확하지 않아 아직도 미스테리로 남아있다고 한다. 당시 그녀의 나이 만 19세였다.
다음날에는 마리아의 이모인 엘리자베타 대공비도 살해되었다. 엘리자베타 대공비는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의 둘째 언니로, 알렉산드라 황후보다 10년 먼저 러시아 제국에 시집와서 살고 있었다.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가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진 것도, 세르게이 대공[9] 과 엘리자베타의 결혼식에서였다.
세르게이 대공이 죽은 후 엘리자베타 대공비는 자신의 집을 수녀원으로 개조하였고, 수녀가 되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여 자선과 봉사에 전념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의 와중에 다른 황족들과 함께 살해당하고 말았으니,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한편 여동생 아나스타시야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공주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생존설이 돌았고, 남동생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 황태자 생존설도 있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6. 사후
1991년 니콜라이 2세 일가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이 발굴되었으나, 당초 11구여야 할 시신이 9구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실종된 시신 2구가 아나스타샤 공주와 알렉세이 황태자인 줄 알았지만 곧 아나스타샤 공주가 아닌 마리아 공주임을 알게 되었다. 그 후 2007년 실종되었던 유골 2구가 추가적으로 발굴되었는데, DNA 검사를 통해 각각 마리아 공주와 알렉세이 황태자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2015년 부모님과 언니들 곁에 묻힐 예정이었으나 교회 쪽의 추가적인 DNA 검사 요구[10] 로 인해 아직까지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7. 가족관계
8. 여담
필립 마운트배튼의 외숙부[12] 인 루이 마운트배튼이 마리아를 짝사랑했다고 한다. 본래 루이 마운트배튼의 어머니인 헤센의 공녀 빅토리아는 헤센 대공국 루트비히 4세 대공과 앨리스 모드 메리의 장녀로, 사녀이자 여섯째였던 알렉산드라 황후의 친언니라서 루이 마운트배튼과는 이종사촌 관계다. 그 때문에 어릴 적의 루이 마운트배튼은 자기 이모의 시가인 러시아 제국에 종종 들르곤 했는데, 거기서 한 살 위의 이종사촌 누나인 마리아 여대공에게 반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루이는 자라면 마리아와 결혼하고 싶었지만, 마리아가 러시아 혁명으로 죽게 되면서 무산되었다. 루이 마운트배튼은 세월이 한참 흐른 뒤 언론에서 해당 사실을 밝혔고, 아일랜드 독립세력의 폭탄 테러로 사망한 그 날에도 루이의 서재에는 마리아의 사진이 있었다고 한다.
부모를 닮아 장신이다. 아버지 니콜라이 2세 문서의 가족 사진을 보면 알수 있는데, 여동생 아나스타샤와 비교했을때 확실히 체격이 크다. 마찬가지로 장신인 두 언니들과는 키가 비슷하다.
가족 모두가 카메라를 가졌기에 마리아의 사진 역시 많이 남아있는데, 특이하게도 당시 러시아와 적국이였던 일본의 기모노를 입고 촬영한 사진이 있다.
이 문서는 니콜라이 2세 일가 중 가장 마지막으로 작성되었다. 마리아가 이 일가 사람들 중에 개성이 가장 희미하고 대중적으로도 덜 알려졌기 때문인 듯.
어머니 알렉산드라 황후를 상당히 많이 닮았다.
첫째 언니 올가는 장녀로서 여동생들을 잘 보살폈고 병약한 막내 남동생이 투정을 부려도 너그러이 보살필 정도로 점잖고 어른스러웠으며, 승마도 잘 하여 고작 17살 소녀의 몸으로 기병대장이 되어 기마병들을 이끌 정도로 문무 모두에 출중했다. 그래서 병약한 막내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 황태자를 제치고 황위계승자로 거론될 정도였다. 러시아 제국에서는 공주에게 황위계승권이 없어서 무위로 돌아갔을 뿐.[13]
4자매 모두 미인이었지만 특히나 둘째 언니 타티아나는 러시아의 황녀들 중 "가장 조각 같다"고 할 정도로 아주 빼어난 미인이었다고 한다. 또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국왕, 그리고 그 당시 영국의 왕세자였던 에드워드 8세와 혼담이 오가기도 했다.
여동생 아나스타샤는 러시아의 마지막 황녀라는 상징성도 있고, (결과적으로 사실이 아니라고 밝혀졌지만) 낭만적인 생존설의 주인공이기도 해서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하다.
아버지 니콜라이 2세, 어머니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남동생 알렉세이는 각각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황후/황태자로 유명하다.
이렇게 가족들이 다들 이야깃거리가 하나씩 있는데, 마리아만은 이렇다 할 특이 사항이 없는지라 대중의 인지도가 낮은 편.
9. 서브컬처의 등장
명탐정 코난의 극장판 중 하나인 세기말의 마술사에서는 마리아 공주가 볼셰비키 혁명 당시 극적으로 살아남아 당시 러시아에서 활동했던 기술자 코사카 키이치(더빙판 채길석)와 결혼하여 일본(더빙판에선 한국)으로 건너와 살았다고 하며, 마리아가 일찍 죽자 독일식 성을[14] 짓고 그 곳에 달걀[15] 과 유해를 안치했다고 설정되어 있다.
세기말의 마술사가 개봉했을 당시에는 1999년 세기말로, 마리아와 남동생 알렉세이 황태자의 유골이 발견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새로운 해석을 더하여 이야기를 만들었지만, 8년 후인 2007년 마리아와 알렉세이의 유골이 발견되면서 황제 일가는 1918년 전원 사망한것이 확정되어 사실과는 맞지 않는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극장판에서 마리아의 눈동자 색은 회색이라고 했는데 실제로는 회색이 아니라 파란색 이다.
10. 관련 문서
[1] 알렉산드라 황후의 결혼 전 이름. 본래 그녀는 독일 헤센 대공국 출신이며 이름은 '알릭스'였는데, 결혼하면서 러시아식으로 '알렉산드라'라고 개명했다.[2] 작은 언니 타티아나와 더불어 자매들 중 가장 예뻤다는 평을 들을 정도.[3] 그렇다고 알렉산드라 황후가 집안이 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황후의 아버지는 헤센 대공국의 루트비히 4세 대공이었고 어머니는 빅토리아 여왕의 차녀 앨리스 모드 메리였다. 다만 마리아의 친할머니인 마리아 황태후는 자신의 며느리감으로 프랑스의 공주를 원했고, 거기다 마리아 황태후의 친정인 덴마크와 알렉산드라 황후의 친정 독일과 사이가 나빴고 두 사람의 성격 차이와 알렉산드라가 아들이 아닌 공주만 4명을 낳아서 고부관계가 냉랭했다고 한다.[4] 여담이지만 황녀들 중에서는 둘째인 타티아나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황녀가 제일 미인이라, 가장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타티아나 황녀가 무도회에 참석하면, 그녀와 꼭 춤을 추고자 하는 남자 귀족들이 줄을 섰다고.[5] 첫째 올가와 둘째 타티아나도 서로 가장 친했다[6] 애초에 혈우병 환자로 어릴 때부터 병약했다.[7] 그러나 뒤늦게 발견된 그녀의 두개골에는 총상이 없었다고 한다. 아마 두피에 상처가 나서 기절했고, 이로 인해 죽은 것으로 오인했던것 같다.[8] 실제로 마리아의 두개골은 구타의 흔적으로 상당히 손상되어 있었다고 한다.[9] 니콜라이 2세의 작은아버지[10] DNA 재검사를 위해 이미 매장한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의 무덤을 다시 파냈다. [11]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손녀이다.[12] 필립 마운트배튼의 어머니인 바텐베르크의 앨리스는 바텐베르크의 공자 루이와 헤센의 공녀 빅토리아의 장녀로 차남이자 막내인 루이 마운트배튼의 큰누나다.[13] 한때는 여성도 즉위가 가능했고, 여러 여제들이 재위했던 여제 시대도 있었다. 그러나 예카테리나 2세 사후 어머니와 사이가 나빴던 파벨 1세가 여성의 계승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었고 그 이후로 여성의 즉위가 불가능해졌다.[14] 어머니 알렉산드라 황후의 친정이 독일이어서 독일식 성을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건 고증오류인데, 알렉산드라 황후와 그녀의 형제들은 외가인 영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빅토리아 여왕의 차녀인 어머니 앨리스 모드 메리는 아이들을 영국식으로 키웠고, 앨리스가 죽은 후로는 외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이 외손주들과 자주 편지를 주고 받는 등 교류했다.[15] 작중에 나오는 중요한 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