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춤법/역사

 



1. 개요
2. 받침 표기의 발달
3. 역사
3.1. ~구한말
3.2. 신정국문(1905)
3.3. 국문연구의정안(1909)
3.4. 보통학교용 언문 철자법(1912)
3.5. 언문 철자법(1930)
3.7. (북한) 조선어 신철자법(1948)
3.8. (남한) 한글 간소화안(1953)
3.9. (북한) 조선어 철자법(1954)
3.10. (북한) 조선말 규범집(1966)
3.11. (남한) 한글 맞춤법(1988)


1. 개요


한국어의 정서법('맞춤법')의 역사에 관한 문서.
한국어의 한글 표기는 소리 나는 대로 적는 표음주의와 어원을 살리는 형태주의가 대립해왔다. 근대에 표기법이 만들어진 이래 주된 경향은 형태주의를 강화하는 방향이었다.
오늘날의 맞춤법은 표음주의와 형태주의를 절충하여 '얽히고설키다'와 같은 표기가 생기게 되었다. 앞의 '얽히고'는 [얼키고]로 소리 나지만 동사 '얽다'와 그 피동형 '얽히다'에서 온 것이 분명하므로 원형을 살려 '얽히고'로 표기하지만, 뒤의 '설키다'는 앞의 '얽히고'와 운을 맞추기 위함일 뿐, '섥다'라는 단어도 없고 피동형인 '섥히다'도 없어 '섥히다'라고 표기할 근거가 없으므로 소리 나는 대로 '설키다'로 적는 것이다. 띄어쓰지도 않는다.

2. 받침 표기의 발달


처음에는 실제로 해당 소리가 나는 받침만 오다가('받침은 8자로 충분하다'(八字可足用)) 뒤에 잇따르는 소리에 형태를 맞추기 위해서 여러 받침을 쓰게 되었다.
[image]
하지만 겹받침을 쓰는 것이 완전한 근대의 창작인 것은 아니다. 한글을 발명한 세종대왕 본인 역시 형태주의적 표기로 '흙', '닭' 등을 쓸 수 있다고 훈민정음 해례본 25장 뒷면에서 밝힌 바가 있다. 그러나 한글 초기의 문서에서도 모음이 이어지면 대체로 두 번째 받침은 연철로 이어 적었고, 자음이 이어질 때도 겹받침으로 쓰는 경우도 있고 안 쓰는 경우도 있고 불규칙하다. 어원을 살리는 표기는 발음 규칙에 대한 이해가 선결되어야 하므로 보편 교육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널리 퍼지기 힘들었을 것이다.
단, 사이시옷의 경우 그 특수성 때문인지 '''무조건''' 겹받침으로 들어갔다.
재미있게도 15세기에 겹받침을 쓸 때는 대체로 ㄹ+자음 꼴이 많았다. 다른 경우에는 겹받침을 잘 쓰지 않았다. 대체로 소리 나는 받침만을 표기했던 시기이기 때문에 'ㄹ+자음' 받침의 발음이 당시에는 가능했으리라는 견해도 있다. /ㄹ/는 유음이라 그 공명도(소리가 울리는 정도)가 높아 사실상 자음보다는 모음에 가까운 특성을 보이기에 음절말 자음 개수의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1] 현대 국어에서도 ㄹ을 섞어서 발음하는 사람들이 다시 생기기도 했고...

3. 역사



3.1. ~구한말


국가적인 차원에서 한글서적을 발행하곤 했으나 구한말까지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명문화된 맞춤법이 제정되지 않았고 민간에서 쓰이던 관행적인 표기를 따랐다. 애초에 갑오개혁(1894) 이전엔 한글이 공문서에 쓰이지 않았기도 했고. 다만 조선 초기에는 연철 표기법이 주류를 이뤘고, 조선 중기부터 구한말 시기까지는 중철 표기법이 주를 이뤘다. 개화기에는 '갓흔'과 같은 ㅎ 재음소화 표기가 잠시 주류를 이루었다.
명문화된 규칙은 없었으나 각 시대의 양상을 살피고 싶다면 중세 한국어, 근대 한국어 참조. 고대 한국어의 경우 이두구결 참조.
이후로 구한말 들어 한글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대한제국 시기에 맞춤법을 만들려는 시도가 시작되었다. 종두법으로 유명한 지석영의 신정국문(新訂國文)이나 국문 연구의정안 등이 그 사례다.

3.2. 신정국문(1905)


1905년 7월 22일 지석영고종에게 건의하여 의정부 관보에 공표된 표기법. 고종의 재가를 받아 국가에서 공식으로 선포되긴 하였으나 지석영 본인의 독자적인 의견이어서 약간 받아들이기 힘든 면도 있었다. 갑자기 논의도 없이 새로운 글자 를 창제하자거나, ㅅ계합용병서한자 반복 부호(漢文疊字) 〻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틀린 가설을 내세우는 등. 그래서 이에 대하여 좀 더 논의하고자 대한제국의 학부(學部)에서 국문연구소를 설치하여 논의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의정부 관보에 실린 원문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신정국문 항목에서 시청각자료로 확인할 수 있다. 조정에 건의한 문건이므로 고종실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05년 7월 29일 2번째 기사: 지석영이 아뢴 대로 국문을 새로 고치다

'''新訂國文五音象形辨(새로 고친 국문 5음의 상형변):'''

ㄱ 【牙音, 象牙形。】 ,ㅋ 【牙音, 重聲。】 , ㆁ 【牙喉間音, 象喉扇形。 ○音失其眞, 今姑闕之。】 , ㄴ 【舌音, 象舌形。】 , ㄷ 【舌音, 象掉舌形。】 , ㅌ 【舌音, 重聲。】 , ㄹ 【半舌音, 象捲舌形。】 , ㅁ 【唇音, 象口形。】 , ㅂ 【唇音, 象半開口形。】 , ㅍ 【唇音, 象開口形。】 , ㅅ 【齒音, 象齒形。】 , ㅈ 【齒舌間音, 象齒齦形。】 , ㅊ 【齒音, 重聲。】 , ㅿ 【半齒音, 象半啓齒形。 ○音失其眞, 今姑闕之。】 , ㅇ 【淺喉音, 象喉形。】 , ㆆ 【喉齒間音, 象喉齶形。 ○音失其眞, 今姑闕之。】 , ㅎ 【深喉音。】

'''新訂國文初中終三聲辨(새로 고친 국문의 초, 중, 종 3성에 대한 풀이)''':

初聲終聲通用八字, ㄱ 【기윽】 , ㄴ 【니은】 , ㄷ 【디귿】 , ㄹ 【리을】 , ㅁ 【미음】 , ㅂ 【비읍】 , ㅅ 【시옷】 , ㅇ 【이응。 ㄱㄴㄷㄹㅁㅂㅅㅇ八字난 用於初聲 윽은귿을음읍옷응八字난 用於終聲。】

'''初聲獨用六字(첫소리로만 쓰이는 6자)''':

ㅈ 【지】 , ㅊ 【치】 , ㅋ 【키】 , ㅌ 【티】 , ㅍ 【피】 , ㅎ 【히】

'''中聲獨用十一字(가운뎃소리로만 쓰는 11자)''':

ㅏ 【아】 , ㅑ 【야】 , ㅓ 【어】 , ㅕ 【여】 , ㅗ 【오】 , ㅛ 【요】 , ㅜ 【우】 , ㅠ 【유】 , ㅡ 【으】 , ᅟᆖ 【이으의 合音】[2]

ㅣ 【이】 [3]

'''新訂國文合字辨(새로 고친 국문의 합자 풀이)''':

初聲 ㄱ字를 中聲 ㅏ字에 倂하면 가 字를 成하고 終聲 ㅇ字를 가 字에 合하면 강 字가 되나니 餘倣此하니라。

'''新訂國文高低辨(새로 고친 국문의 높낮이 풀이)''':

上聲去聲은 右加一點 【我東俗音에 上去聲이 別노 差等이 無함이라。】 하고 平入兩聲은 無點이오 凡做語之曳聲에 亦加一點하니라。

'''字音高低標(자음 높낮이표)''':

動 【움즉일동】 , 同 【한가지동】 , 禦 【막을어】 , 魚 【고기어】 之類餘倣此하니라。

'''做語曳聲標(말을 만드는 끝소리표)''':

簾 【발렴】 , 足 【발족】 , 列 【벌릴[4]

렬】 , 捐 【버릴연】 之類餘倣此하니라。

'''新訂國文疊音刪正辨(새로 고친 국문에서 중첩음의 삭제 정정 풀이)''':

ᄀᆞᄂᆞᄃᆞᄅᆞᄆᆞᄇᆞᄉᆞᄋᆞᄌᆞᄎᆞᄏᆞᄐᆞᄑᆞᄒᆞ 十四字가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하 字의 疊音으로 用하기에 刪正함이라。

'''新訂國文重聲釐正辨(새로 고친 국문 겹소리 정정 풀이)''':

ㄲㄸㅃㅆㅉ난 ㄱㄷㅂㅅㅈ의 重聲이라 古昔에 까따빠싸짜로 行하더니 挽近에 漢文疊字의 〻[5]

를 倣하야, ᄭᅡ[6]ᄯᅡᄲᅡ싸짜로 用함이 還屬便易로대, '以'字를 'ᄡᅧ'[7]로 釋함은 無由하기 ㅅ傍에 ㅂ을 倂用함을 廢止함이라。


3.3. 국문연구의정안(1909)


1907년 7월 대한제국 학부 소속으로 설치된 국문연구소에서는 이능화, 어윤적, 주시경 등의 의원들이 모여 열 가지 문제를 논의하였다. 각 의원의 논의는 약 200쪽가량으로 이기문(1970),《개화기의 국문연구》의 부록에서 영인본을 확인할 수 있다. 그 결과 확정된 의결안은 약 5쪽가량. # 그 안건들과 논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一. 國文의 淵源과 字體及 發音의 沿革 '''(可)'''

二. 初聲中 ㆁㆆ ㅿ ◇ ㅱㅸㆄㅹ 八字의 復用當否 '''(否)'''

三. 初聲의 ㄲ ㄸ ㅃ ㅆ ㅉ ㆅ 六字 並書의 書法一定 '''(可, ㆅ은 폐기)'''

四. 中聲字 ‘ㆍ’자 폐지 및 ᆖ자 창제의 당부 '''(否)'''

五. 終聲의 ㄷㅅ 二字用法及 ㅈㅊㅋㅌㅍㅎ 六字도 終聲에 通用當否 '''(可)'''

六. 字母의 七音과 淸濁의 區別如何 '''(五音과 淸音, 激音, 濁音으로 구분)'''

七. 四聲票의 用否及 國語音의 高低法 '''(四聲票는 不用, 長音 左肩一點)'''

八. 字母의 音讀一定 '''(ᅌ 이응 ㄱ 기윽 ㄴ 니은 ㄷ 디읃 ㄹ 리을 ㅁ 미음 ㅂ 비읍 ㅅ 시읏 ㅈ 지읒 ㅎ 히읗 ㅋ 키읔 ㅌ 티읕 ㅊ 치읓 ㅏ 아 ㅑ 야 ㅓ 어 ㅕ 여 ㅗ 오 ㅛ 요 ㅜ 우 ㅠ 유 ㅡ 으 ㅣ이ㆍᄋᆞ)'''

九. 字順行順의 一定 '''(初聲 牙舌脣齒喉와 淸激, 中聲 「訓蒙字會」순)'''

十. 綴字法 '''(訓民正音例義대로 仍舊綴字-모아쓰기)'''

1. 국문의 연원과 국문 자체 및 발음의 연혁

2. 초성 가운데 ‘, , , , , , ㅹ’ 8자를 다시 사용할지 여부 - '''쓰지 말자.'''

3. 초성의 된소리 표기를 ‘, , , , , ’ 6자로 정할지 여부 - '''(ᄭ 와 같은 ㅅ계 합용병서 말고) 각자병서(ㄲㄸㅃㅆㅉ)를 쓰자, 단 ㆅ은 폐기.'''

4. 중성 가운데 ‘ㆍ’자를 폐지할 것인지, 그리고 ‘ᆖ’자를 창제할 것인지 여부 - '''ㆍ를 폐지하지도 말고, ᆖ를 창제하지도 말자.(현상유지)'''[8]

5. 종성의 ‘ㄷ, ㅅ’ 2자의 용법 및 ‘ㅈ, ㅊ, ㅋ, ㅌ, ㅍ, ㅎ’ 6자도 종성에 통용할지 여부 - '''가결[9]

'''

6. 자모의 7음[10]

과 청탁의 구별 문제 - '''5음(아설순치후)[11]淸音(예삿소리)/激音(거센소리)/濁音(된소리)로 하자.'''[12]

7. 사성표를 사용할지 여부 및 국어음의 고저를 표기할지 여부 - '''성조는 표기하지 않기로 하자. 장음은 왼쪽 점 1개로 표기.'''

8. 한글 자모의 명칭을 정하는 문제 - '''(ᅌ 이응 ㄱ 기윽 ㄴ 니은 ㄷ 디읃 ㄹ 리을 ㅁ 미음 ㅂ 비읍 ㅅ 시읏 ㅈ 지읒히읗키읔티읕피읖[13]

치읓 ㅏ 아 ㅑ 야 ㅓ 어 ㅕ 여 ㅗ 오 ㅛ 요 ㅜ 우 ㅠ 유 ㅡ 으 ㅣ이ㆍᄋᆞ)로 읽자.'''

9. 자순(字順), 행순(行順)을 정하는 문제 - '''자음은 아설순치후 + 예사/거센소리 순으로, 모음은 훈몽자회 순으로 하자. (8항에서 적힌 대로)'''

10. 철자법[14]

- '''훈민정음에 나온 예전 방식대로[15] 모아쓰기로 하자.'''

의결안이 발표되고서 1년 후 대한제국멸망하여 공포되지는 못하였다. 그래도 이후 조선총독부의 보통학교용 언문 철자법에도 국문연구소의 의원이었던 어윤적 의원이 참여하는 등으로 내용이 계승된다.
오늘날 각자병서의 사용, 7종성 이외의 종성 표기(+'티읕', '치읓' 등의 호칭[16]) 등은 모두 국문연구의정안에서 처음 명문화된 것이다.
한편 차이점도 있는데, 의정안에서는 자모의 순서를 '''ᅌ'''ㄱ(아)ㄴㄷㄹ(설)ㅁㅂ(순)ㅅㅈ(치)'''ㅎ'''(후)ㅋㅌㅍ'''ㅊ''' /ㅏㅑㅓㅕㅗㅛㅜㅠㅡㅣㆍ라고 하여 자음의 순서가 조금 다르다. 또한 여기에서의 순서에서도 보면 알 수 있듯이 아음인 ᅌ은 옛이응으로 폐지하기로 논의한 것이었는데 자음 순서에서는 옛이응을 아음으로 실어두고 있는 등(초성에서 등장하는 ㅇ은 위의 분류로는 후음에 속한다) ㅇ과 ᅌ을 혼동하고 있는 경우가 의정안 곳곳에서 확인된다. 'ㄱ, ㄷ, ㅅ'에 대하여 훈몽자회에서 적당한 한자가 없어서 비슷한 글자를 끌어와 조금 달라진 '기역, 디귿, 시옷'이라는 발음은 쓰지 않고 '기윽, 디읃, 시읏'이라고 하였는데 이 역시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다시 훈몽자회 식으로 돌아갔다. 북한에선 이걸 이어온 건지 아니면 또 다른 계기가 있었는지 '기윽, 디읃, 시읏'을 사용중. '장음을 점 하나로 찍어서 표시하자'는 내용도 이후 표기법에서 약간 더 길게 이어졌지만 오늘날엔 반영되지 않았다.

3.4. 보통학교용 언문 철자법(1912)


  • 서울 방언을 기준으로 삼음.
  • 아래아의 폐지. 한자음에서의 아래아는 그대로 두었다.
  • 받침 , , 이 추가로 인정되었다. '붉다', '삶다' 등이 현재의 형태로 쓰이게 된 게 이때부터. '있다', '빛' 등은 여전히 '잇다', '빗'으로 썼다.
  • 된소리는 ㅅ을 붙이는 방법인 ㅅ계 합용병서(ㅺ, ㅼ, ㅽ, ㅾ)만 인정되었다. 현행의 쌍자음(각자병서)은 인정되지 않았다.
  • 부사는 ''로만 적는다. (높히, 가벼히 등)
  • 가나
    • 가나 す/つ를 수/두로 적었다. 탁음은 한글에 탁음점을 붙였다.
    • 장음은 가장자리 점으로 표시했다.

3.5. 언문 철자법(1930)


  • 한자어를 적을 때 댜/뎌 등으로 적던 것을 자/저로 적게 되었다. 해당 시기에도 발음은 ㅈ이었는데 표기가 뒤처진 거였다고 한다.
  • 한자어 표기에 남아있던 아래아도 이때 폐지.
  • 받침을 더 많이 쓸 수 있게 됐다. , / , , 만 빼고 다 쓸 수 있게 됐다. '좋다', '했다' 등은 여전히 '조타', '햇다'로 적었다.
  • ㅊ받침으로 끝나는 단어들은 뒤에 ㅌ을, ㅌ받침으로 끝나는 단어는 뒤에 ㅊ을 적었다. ex) 윷티(윷이) / 샅치(샅이)
  • ㄷ불규칙 용언에는 ㅅ받침을 썼다. (ㄷ규칙 용언은 ㄷ받침으로 쓰게 함)
  • 사이시옷을 쓰기 시작했다. 받침으로 적을 수 없는 경우에도 ㅅ을 홀로 썼다. ex) 문ㅅ자
  • 용언 ‘-아/-어’형에서 어간 끝소리가 ‘ㅣ, ㅐ, ㅔ, ㅚ, ㅟ, ㅢ’일 경우에 ‘-여’를 붙인다. ex) 되여
  • 가나
    • 가나 /는 현행처럼 스/쓰로 적게 되었다.
    • 일본어탁음 표기에 ‘ᅁ(ガ행), ᅅ(ザ행), ᅂ(ダ행), ᅄ(バ행)’과 같은 특수한 자모를 썼다.
    • 장모음 표기에 일본어의 장음 기호 ‘ー’를 사용했다. 이 영향으로 당시에 한글로 표기된 외래어 중 몇몇에게 장음 기호가 들어간 걸 볼 수 있다. 다만 입력 자료에는 오늘날 일본어 장음 기호가 아닌 하이픈으로 입력된 경우가 많다.

3.6. 한글 맞춤법 통일안(1933)


위키문헌 원문

一、 한글 마춤법(綴字法)은 표준말을 그 소리대로 적되、 語法에 맞도록 함으로써 原則을 삼는다。

二、 표준말은 大體로 現在 中流 社會에서 쓰는 서울말로 한다。

三、 文章의 各 單語는 띄어 쓰되、 토는 그 웃 말에 붙여 쓴다。

위를 한글전용으로 옮기면 아래와 같다.

1. 한글 마춤법(綴字法)은 표준말을 그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함으로써 원칙을 삼는다.

2. 표준말은 대체로 현재 중류 사회에서 쓰는 서울말로 한다.

3. 문장의 각 단어는 띄어 쓰되, 토는 그 웃 말에 붙여 쓴다.

조선어학회에서 발표한 통일안. 당시엔 '마춤법'이라고 하였다.[17] 현재 남북한 맞춤법의 토대가 되었다. 이것이 일제강점기, 그러니까 분단 전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남북한 맞춤법은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었다.
  • 된소리를 적는 데에 각자병서(쌍자음)을 적게 되었다.
  • 어중의 된소리는 나눠서 적지 않고 쌍자음으로 적는다. ex) 오빠(그 전엔 '옵바')
  • 두음법칙 적용
  • 어원이 뚜렷하지 않은 'ㄷ' 받침은 그냥 'ㅅ'으로 적는다. ex) 짓밟다(그 전엔 '짇밟다')
  • 받침 ㅋ, ㅎ / ㄶ, ㅀ, ㅆ을 드디어 쓸 수 있게 되어 오늘날의 종성이 확정됐다.[18] 이때부터 '있다', '않다', '닳다' 같은 표기가 생겼다(그 전까지는 '잇다', '안타', '달타').
    • '하다'를 ㅎ받침으로 줄일 수 있다. ex) 부지다(부지런하다), 아니하다/아니 하다(않다)
    • 이때부터 '-읍니다'도 쓰였는데, 그 전까지 '옵바', '햇습니다'처럼 쓴 것에 착안해 /ㅆ/를 /ㅅ/+/ㅅ/의 합으로 여기면서 'ㅄ' 뒤와 'ㅆ' 뒤에는 '했읍니다'처럼 '-읍니다'를 쓰게 된 것이다. (현행 맞춤법에서는 '-습니다'를 씀)
  • 방언이나 고어를 위해 ''과 같은 받침도 쓸 수 있게 됐다. 다만 'ᇚ' 받침은 약 반세기 뒤에 규정에서 제외되었다.
  • ㅅ ㅈ ㅊ을 첫소리로 삼는 ㅑ ㅕ ㅛ ㅠ를 ㅏ ㅓ ㅗ ㅜ로 적는다. 현재와는 달리 'ㅅ'도 들어가 있는 것도 차이점.[19]
  • 띄어쓰기
    • 보조 용언은 붙여 쓴다.
    • 의존 명사는 붙여 쓴다. 현행 맞춤법에서는 띄어 쓴다.
    • 숫자는 10진법에 따라 띄어 쓴다. 예: 일억 삼천 사백 육십만 이천 오십 사
현행 맞춤법에서는 44항에 따라 만 자릿수마다 띄어 쓴다. 단, 두음 법칙은 단어마다 적용되기 때문에, 6을 륙으로 적진 않는다. 예: 일억 삼천사백육십만 이천오십사
  • 문장 부호
    • 세로쓰기용 구두점만 인정했으나 1940년에 가로쓰기용 구두점도 인정.
현행 맞춤법에선 가로쓰기가 대세가 되면서 도리어 세로쓰기용 구두점이 폐지되었다.
  • 따옴표 역시 세로쓰기용 꺾쇠만 인정했지만 가로쓰기용 " 따옴표도 인정.
  • 고유 명사에는 줄을 그었다. (이전에도 조금씩 쓰임)
잠시 'ㄹ꼬', 'ㄹ까'를 'ㄹ고', 'ㄹ가'로 적은 적이 있다. 글자 사이에 ㄴ삽입 현상이 일어나는 경우 담ㅅ요처럼 죄다 사이시옷을 넣었다.[20] 이와 같은 점들은 개정판에서 폐지되었다.
이후 남북이 분단되면서 남북 각각에서 맞춤법 파동이 생겼다. 북에서는 형태주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남에서는 표음주의를 강화하는 방향의 파동이 생겼던 것이 재미있는 점. 둘 다 파동으로 끝나고 완화되어 아직도 남북의 맞춤법은 1933년의 안을 기본으로 거의 유사하다.

3.7. (북한) 조선어 신철자법(1948)


위키문헌
꽤 특이한 맞춤법으로 이 맞춤법에서는 ㄹ, ㅅ, ㅎ, ㅇ, ㅂ 불규칙 용언을 나타내는 새로운 자음을 5개, ㅣ가 ㅓ와 어울려 ㅕ로 줄여지는(가지다 + 어 = 가지여) ㅣ 어간을 나타내기 위한 새로운 모음도 들어갔다. 하지만 이 새로운 6자모는 거의 쓰이지 않았고, 조선어 신철자법을 주도한 인물이었던 김두봉이 실각하면서 다음에 만들어진 조선어 철자법에서는 폐지되었다.
  • 6개의 자모가 추가되었다. 해당 자모들은 불규칙 용언들을 규칙 용언으로 만들기 위한 자모들이 많다.
    • ㄹ불규칙 용언 : 𠀀 비슷한 모양의 글자[21]가 쓰였으며 이를 빼지 않고 적어 규칙 용언화하였다. ex) 놀(노+𠀀)ㅂ니다 (현행은 '놉니다')
    • ㅅ불규칙 용언 : 훈민정음에 있던 여린히읗을 다시 활용하였다.
    • ㄷ불규칙 용언 : 훈민정음에 있던 반치음 ㅿ을 다시 활용하였다.
    • ㅂ불규칙 용언 : Y 비슷한 글자가 쓰였다.
    • 르불규칙 용언 : 巳 비슷한 모양의 글자가 쓰였다.
    • ㅎ불규칙 용언 : ㅎ을 빼지 않고 적어 규칙 용언화하였다. ex) 하얗ㄴ (현행은 '하얀')
    • 앞의 자음 ㅣ 때문에 뒷소리가 ㅕ로 [j] 발음이 끼어 들어갈 땐 ㅣ대신 1 비슷한 다른 글자를 썼다.
  • 방언을 위해 ㄹ+여린히읗, ᇚ 등의 받침을 쓸 수 있게 됐다.
  • 사이시옷은 어깨표(')로 바꾸었다.
  • 몌/폐는 '메', '페'로 적는다. 이것은 아직까지도 북한에서 유지된다.
  • 두음법칙 폐지. 이는 아직까지도 북한에서 유지된다.

3.8. (남한) 한글 간소화안(1953)


한국어 위키백과 문헌
이승만은 1949년에 그 시절의 철자법을 폐지하고 일제 강점기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담화를 발표했다. 그 동안에 형태주의적 요소를 많이 받아들인 한글 맞춤법이 구한말 세대인 이승만에게는 너무 어렵고 번거로웠던 것. 1953년에 국무총리령이 발표되어 이 건을 밀어붙이게 됐다. 하지만 국어학자들의 격렬한 반발에 부딪혔고, 문교부 장관이 연달아 사임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승만은 1954년에 “3개월 이내에 현행 맞춤법을 버리고, 구한국 말엽의 성경 맞춤법에 돌아가라.”라는 담화를 발표했으며, 새로 임명된 문교부 장관이 일단 간소화 안을 발표하고 무작정 국무 회의를 통과시켰다. 그러자 더욱더 각지의 반발과 비난이 빗발쳤으며, 이승만은 결국 1955년에 이 방안을 취소했다.
  • 받침은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ㄺ, ㄻ, ㄼ만 허용한다. 언문 철자법 시기와 동일. ex) 잊다 → 잇다
  • 용언의 어간은 받침으로 쓰지 않고 연철해서 쓴다. ex) 잊으니 → 이즈니
  • 어원은 표시하지 않는다. ex) 길이 → 기리 , 낱낱이 → 낫나치

3.9. (북한) 조선어 철자법(1954)


1948년에 제시된 조선어 신철자법이 지금도 유지되는 조항을 제외하고는 상당히 문제가 많았고, 때마침 김두봉이 실각하자 북한에서는 1954년에 철자법을 개정했다.
  • 사이시옷 어깨표(1966년 조선말 규범집에서 폐지), 몌/폐를 '메', '페'로 표기, 두음법칙 폐지를 제외한 조선어 신철자법의 모든 조항을 폐지했다.

3.10. (북한) 조선말 규범집(1966)


#
1987년과 2010년에 각각 개정되었다.
  • ‘-ㄹ까, -ㄹ꼬, -ㄹ쏘냐’는 'ㄹ가', 'ㄹ고', 'ㄹ소냐'로 적는다.
  • 앞의 ㅣ때문에 뒷소리가 '여'로 나면 '여'로 적는다. ex) 되여
  • (사이시옷 현상을 적던) 어깨표 폐지. 사이시옷으로 복귀하지 않아 사이시옷을 표기하지 않게 되었다. '샛별', '빗바람'등은 예외.[22]
  • 명사가 조사 없이 이어서 쓰이는 경우 붙여 쓰는 걸 원칙으로 한다.
  • 의존명사는 붙여쓴다.
  • 보조용언은 붙여쓴다.
  • 따옴표는 ≪ ≫를 쓴다.

3.11. (남한) 한글 맞춤법(1988)


  • 모음조화나 형태에 어긋나게 굳어진 채로 널리 쓰이면 굳어진 것을 표준어로 삼는다. ex) 깡충깡충, 설거지
  • 기술자는 '-장이'로, 그 밖엔 '-쟁이'로 나누어 쓴다. ex) 미장이 / 개구쟁이
  • '-읍니다'는 더는 안 쓰고 '-습니다'만 쓴다.
  • 외래어에서 장음은 따로 적지 않는다. ex) 유우에프오우 → 유에프오/뉴우요오크 → 뉴욕(원칙대로는 '뉴요크'이나 관용상...)
1985년에 개정 작업을 시작해 1988년 1월 19일에 한글맞춤법 고시하여 1년의 유예기간을 거쳐 1989년 3월에 시행했다(#). 현재 우리가 쓰는 맞춤법은 1988년에 확립된 것이다. 다만 문화체육관광부2014년 10월 27일에 현행 한글 맞춤법 중 문장 부호의 용법만을 일부 수정하는 개정안을 고시했다. 개정안의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없으면 조금 더 쉽게 풀어쓴 글을 읽어 보자.
현재의 한글맞춤법(국립국어원)
[1] 자음으로 끝나는 어간에는 매개 모음을 수반하는 어미가 결합하지만, 'ㄹ'로 끝나는 어간에는 받침이 본래부터 없다는 양 매개 모음 없는 형태가 붙는다. e.g. -(으)면: 먹으면, 안으면, 얻으면... vs. 가면, '''살면'''[2] 실록 한문입력에서는 '으이의 합음'으로 잘못되어있다. 국문 번역 자료에서는 맞게 되어있다.[3] 신정국문 본문에서 '아래아를 폐지한다'라는 구절은 없으나 중성 단락에서 아래아를 포함하지 않음으로써 지석영이 아래아를 폐지하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아래에 '중첩음의 삭제' 부분에서 아래아를 'ㅏ'로 바꾸는 부분에서도 나타난다.[4] 실록에서는 '벌랄렬'로 되어있으나, 의정부 관보의 원문은 '벌릴렬'이 맞다. 실록에서의 오기.[5] [image] [image] 원문으로는 이와 같이 표기되어있는데(오른쪽은 실록), 지석영이 ㅅ과 닮았다고 한 반복부호는 〻가 아닌 로 추정된다. 실록 입력본에서는 그냥 ㅅ으로 입력되어있으나, 글 맥락상으로도 다른 글자를 써야 할 것이고 실제 지면에서도 ㅅ과는 분명 다른 글자를 쓰고 있다.[6] 실록 입력본에는 'ᄭᅡ'가 누락되어있다. 실록 원본과 관보 원본엔 모두 'ᄭᅡ'가 존재한다.[7] 실록 입력본에는 '써'로 입력되어있으나, ㅂ계합용병서에 대한 언급이므로 원 표기를 살려서 표기하여야 한다.[8] 문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당대에는 (발음은 이미 ㅏ나 ㅡ로 합쳐진) 아래아(ㆍ)의 창제 당시의 발음이 ᆖ였을 것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에 ㆍ의 폐지와 ᆖ의 창제 논의가 같이 이루어졌다.[9] ㄷ 말음은 용언의 어간에서만 사용하기로 하였다. '씻다-씻어[씨서\]'와 '믿다-믿어[미더\]'의 경우에만 ㅅ과 ㄷ을 구분한 것. 체언에서는 모두 ㅅ으로 적는 것으로 통일하였다.[10] 아음, 설음, 순음, 치음, 후음(아설순치후)과 반설음, 반치음[11] 반치음 은 사라졌기 때문에 넣지 않았고, 반설음 은 설음에 포함시켰다.[12] 훈민정음에서는 현재의 ㄱ/ㅋ/ㄲ의 예삿소리/거센소리/된소리를 全淸(전청), 次淸(차청), 全濁(전탁)으로 구분하였는데 '激'이라는 표현을 새로 도입한 것이다.[13] 링크된 디지털한글박물관 입력본에는 ㅍ이 빠져있다.[14] 영어의 spelling에 해당하는 의미가 아니라, 각 자모를 '배열(철)'하는 방법으로 풀어쓰기를 할 것인지/모아쓰기를 할 것인지를 의미한다.[15] '仍舊'(잉구, 고치지 않고 예전대로 씀)이라는 표현에서부터 '풀어쓰기로 바꿔보고는 싶지만 갑작스러울 것 같으니 그대로 두자'라는 어조가 느껴진다. 실제로 국문연구소 의원 가운데 풀어쓰기를 지지한 사람들이 꽤 많았다. 주시경이 대표적이다.[16] 대체로 훈몽자회를 따랐으나, 훈몽자회에서는 ㅋㅌㅍㅎ 등을 종성으로는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티읕'이라고 부르지 않고 '티'라고만 하였다. 당장 바로 위의 신정국문까지만 해도 'ㅌ, ㅊ' 등은 '티, 치'로 부르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17] 1940년 제2차 수정 때 제19항의 ‘갖후다·낮후다·늦후다·맞후다’의 사역 형성 접미사 ‘후’를 ‘추’로 고치면서 ‘마춤법’도 ‘맞춤법’이라 쓰기로 했다.[18] 여기서 규정되지 않은 것은 옛한글로 간주되어 인코딩도 뒤늦게 이루어졌다.[19] 참고로 이렇게 표기가 강제 교정된 이후로 다시 '사'와 '샤'의 발음이 구분되기 시작하면서, 이전 시대에 '샤', '셔' 등으로 발음되었던 단어들의 발음은 전부 '사', '서' 등이 되었다. '星'의 옛 표기가 '셩'인 게 그 예.[20] 그 때문에 이 시기에 나온 시를 보면 산새를 산ㅅ새라고 쓴 것도 있다.[21] ㄹ에서 첫 번째 가로획을 오른쪽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글자다. 좀 정확히 묘사하자면 T를 가로로 길게 쓰고 획을 이어서 C를 ㄷ자로 각지게 쓴 듯한 모양이다.[22] 남한에서도 사이시옷을 적용하지 않는데 발음에서 사이시옷이 드러나는 경우는 존재한다. 한자어에서는 발음상 소리가 덧나더라도 '곳간(庫間), 셋방(貰房), 횟수(回數), 숫자(數字), 찻간(車間), 툇간(退間)' 이 여섯 개의 예외를 제외하고서는 사이시옷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기점, 초점, 시가, 호수(號數나 戶數), 도수가 대표적인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