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나라 이웃나라/문제점/중국

 


1. 세부적 오류들
2. 기독교
3. 중국의 지배
4. 문화 정체성
5. 소련군
6. 중일전쟁 관련 국민당과 공산당에 대한 오해
7. 그 외


1. 세부적 오류들


  • 건륭제가 신임한 '희대의 간신' 화신은 가경제의 종용으로 음독 자살했다.
- 실제는 가경제가 능지형을 내리려 하였으나 화신의 며느리인 가경제의 이복누이동생인 고륜화효공주가 간곡히 청하여서 형량을 낮추었다. 화신은 하얀 비단으로 목을 매 자살했다.
  • 영국 의회는 5표 차이로 아편전쟁을 승인했다.
- 실제로는 9표 차이.
- 태후가 되고 나서 서태후는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다. 문제는 오탈자가 심하고 악필이라서 독해가 가능한 정도에서 머물렀다는 것이지만....
- 서태후가 속한 예흐니라 성씨는 해서여진이라는 지파에 속해 있으며 이들은 사르후 전투 이후 누르하치가 이끄는 건주여진에게 패해 흡수당한 파벌이다.
  • 세포이 항쟁이 영국이 인도인 용병들에게 나누어준 총기 관리용 동물 기름이 폭동의 원인이 되었다.
-총기 관리용 동물 기름이 아니라 장전할 때 쓰는 화약 탄포 문제 때문이었다. 자세한 것은 세포이 항쟁 문서 참고.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영국정부에서 이를 총신에 기름을 바르지 않아도 되니 세포이들은 분명히 좋아하겠지 생각으로 따로 새로운 머스킷을 지급하고 장전하는 방법을 설명하려다가 화근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당시 화약 탄포가 종이로 만들었는데 이때 물에 적지 말라고 코딩시키는 기름을 바르고 있는 종이 탄피 상태로 장전하려면 탄포 한쪽을 이빨로 찟으면서 총구에 탄피에 있전 화약을 넣어야 했다는 점이다.
- 실제 사망일은 1908년 11월 14일이다. 그리고 그 다음날 서태후도 죽는다. 그런데 정작 만화에서는 서태후가 광서제가 죽고 난 뒤 선통제를 세우고 죽었다고 여러 번 설명하고 있다.
- 실제로 기독교 장군이라 불린 것은 펑위샹이었으며, 차오쿤은 독실한 유교도였다. 펑위샹은 민국 시기 서북쪽을 기반으로 거병한 군벌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기로 유명하다. 광서/광동 군벌들과 함께 장제스 안티로 유명했던 편이었으며, 본인은 문맹이었던 주제에, 자기들 부하들보고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갈구기로 유명했던 사람이다.
  • 청교도적 위선에 가득 찬 영국인 운운...
- 공정성 문제는 둘째치고 영국 국교는 영국편에서도 설명했듯 성공회이다. 물론 영국에도 청교도들이 공존하긴 했지만, 국교회로서 받는 왕실의 비호를 차치하고 신도 수만을 따져도 성공회가 훨씬 우위에 있었다. 청교도가 우위에 있었으면, 왕실을 압박해서 잉글랜드 안에서 종교의 자유를 쟁취하던가, 국교회(성공회)를 압박해서 청교도와 비슷한 수준으로 교리나 형식을 수정시키지,[1] 목숨을 걸고 메이플라워 호를 타지는 않았을 것이다.
  • 만주국 수립에 대해 설명할 때 관동군을 광동군이라 써놓았다(...).
  • 중일전쟁 시기 장제스는 대머리인데 머리가 있다.
- 분명 먼나라 이웃나라 한국편의 장제스는 대머리로 그렸으면서 여기선 장제스가 머리숱이 많이 나온다... 한국편 이후로 퇴화된 작화의 일환으로 보자.
  • 푸이의 만주국 황제직위 퇴위 후의 삶을 설명할 때 이런 맨트가 나온다. '중화 인민 공화국에 포로로 잡혀...' 라고 하는데 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니라 소련이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오히려 푸대접을 해 주었다. 그리고 푸이는 소련이 1945년 8월 만주 작전을 수행할 때 만주국을 멸망시킨다. 그리고 소련군은 푸이를 포로로 잡았다.
  • 연재 당시 마오쩌둥의 고향을 허난성이라고 표기하였다.
- 실제로는 후난성이다.
  • 1권에서 화교들의 동남아시아 진출을 설명할때 미얀마, 태국, 베트남은 같은 불교 문화권이라 쉽게 현지 사회에 동화 되었고, 가톨릭 문화권인 필리핀, 이슬람 문화권인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등지 에서는 융합 되지 않고 자신들의 문화를 지켜 나갔다고 스여있는대 베트남은 중국과 같은 대승 불교 문화권이라 이런 서술을 해도 괜챃지만 태국이나 미얀마는 소승 불교 문화권이라 대승 불교와 교리 자체가 다르다,[2] 그리고 예초에 화교들이 태국에서 현지 사회,문화에 빨리 동화되었다면 쁠랙 피분송크람이 태국판 창씨개명 이라고 할수있는 화교들의 중국식 성 사용금지 정책을 시행하지도 않았다.
  • 주변국들이 중국의 관대한 경제 외교적 처분에 '역시 대국은 다르군요 쎼쎼' 하는 장면이 나오거나, 홍콩인들이 중국자본의 도움을 받아 경제가 더욱 발전하여 기뻐하고 있다는 시대착오적인 언급들이 많이 나온다. 가령 주변 소국들이 대국 드립을 칠 때는 중국의 일대일로 사업이 막 시작되어 주변 소국들에게 다량의 차관을 지원해줬을 때 쯔음의 반응이며, 중국의 자본이 들어와 홍콩경제가 번창할때 역시 영국으로부터 반환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의 발언이다. 둘다 현실과 많은 괴리가 있다.

2. 기독교


  • 지금도 중국의 기독교 인구는 거대한 가마솥에 물 한 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전체 인구 대비 기독교 인구를 살펴보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표현이 과장된 측면이 있고 최근의 중국 기독교 세태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견해도 있다. 기독교 국가가 아닌 중국도 현대로 오며 문화개방과 경제성장을 따라 서구 사상과 종교가 더 유입되고 국가 내부적으로도 기독교인 숫자가 성장하면서 지금은 공식(삼자)교회와 지하교회 교인 수를 합쳐 기독교 국가가 아닌 국가치고는 상당히 많은 2~3천만 이상, 2010년 퓨 리서치 추정과 같은 자료에 따르면 6~7천만 명 정도의 거대한 신자가 있다. 1억 명이라는 이야기도 광범위하게 퍼져 있지만 실제보다 심하게 과장되어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미 아시아에서는 한국을 능가하며 필리핀을 제외하고 가장 기독교 인구(비율 말고 절대 인구 수로만 치면)가 많은 국가이며, 중국 공산당 정부 당국의 종교 규제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세계 순위권을 다투는 기독교 인구대국으로 급성장한다는 예측이 여기저기서 나올 정도로 증가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게다가 한국편에서도 여러번 씩이나 설명한다.
다만 비율적 측면도 무시해서는 안된다. 중국 기독교인이 7천만이라 대단하다고들 하지만 그렇게 치면 인도 기독교인도 3천만에 육박한다. 그러나 인도는 항상 기독교의 세력이 매우 적은 (전 인구의 2.3%) 곳으로 분류된다는 것을 잊지 말자. 중국 기독교인은 백분율로 치자면 여전히 전체의 2% 내지 잘해야 4~5%에 머물며, 특히 한국이나 홍콩, 싱가포르 등과는 완전히 대조적으로 사회적 영향력은 거의 전무함을 보면, '거대한 가마솥에 물 한 방울'이라는 것도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가뜩이나 중국은 종교의 자유가 제한된 사회주의 국가라 종교인 특히 '서구 열강 침략의 산물'인 기독교인들은 모래알 같은 형상으로 서로 흩어져 잘 드러나지도 못한다![3] 게다가 그나마 있는 신도의 비율도 저학력, 저소득, 고령층에 다소 집중되고 청장년층 신도의 비율은 전체 인구 1% 남짓의 괴멸적 비율로 일본과 유사하다.[4] 2014년 무렵부터 심해지고 있는 당국의 압박도 중국 교회에 상당한 타격을 주고 있는 현실이다. 따라서 앞으로도 계속 이전과 같이 성장할 것이라는 전제는 신뢰하기 어렵다.
현재까지는 전체 인구 13억(미등록/신고 인구까지 하면 14~15억도 운운하니) 중에 놓고 본다면 전체 인구 대비 기독교 인구 비율(%)로 따지면 국민의 8~90%는 기독교가 아니므로 아마 책에서는 그 점을 얘기하고자 문구를 저렇게 표현한 듯 싶다. (출처:civilization 서양과 나머지 세계/저자:니얼 피거슨)

3. 중국의 지배


  • 중국의 지배는 서양과 달리 무력이 아닌 문화에 의한 교화라는 평화적인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할 수 있겠다. 우선 고대 로마 제국과 한 제국부터 동, 서양 가리지 않고 모든 제국들은 자국 문화를 주변 국가에 퍼트려 강제로 교화시키려 했다. 중국도 예외가 아니라서 고조선이나 고구려, 베트남, 기타 북방 유목민족들의 사례에서도 보듯이 제국주의적 침략 전쟁도 가리지 않았다. 한국사 책만 봐도 중국의 반도침공 사례가 수도 없이 나온다. 베트남 역시 마찬가지다.
또한 중국도 그들의 땅에 사는 소수민족들한테 심한 차별을 했으며, 특히 소수민족들이 중국 정부의 차별과 탄압에 분노하여 일어난 반란이 셀수없이 많으며 중국 정부는 이를 항상 잔혹하게 진압했고 오히려 평화롭게 정벌했다는 평정이라는 말로 왜곡하는 뻔뻔한 짓을 했다. 따라서 중국 역시 서양과 다를 것이 없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라 위구르족과 티베트족이 계속 중국 정부에 저항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당장 동북공정만 봐도 그렇지만, 수많은 사서에서 자기네는 무조건 '중화'고 주변 민족은 벌레네 야만인이네 하면서 심지어 그마저도 서로 다르게 불러서 (안타깝게도 참고할 사료가 많지 않은)주변 국가의 학자들이 자국 역사를 연구하기 곤란하게 만들어 놓았다.
다만 중국이 어쨌든 북적, 남만, 서융, 동이 방위별로 자기 외에는 다 오랑캐라 하면서 자기 땅에 안주하며 역사적으로 중원 본토 이외로 뻗어나간 적이 서양국가들과 비교하면 많지는 않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비교해서 중국이나 한국 일본의 경우를 서양과 비교하여 서양은 뭐든지 조금만 수틀리면 창, 칼 들고 쳐들어가 다른 나라 공격/멸망시키고 중국의 경우는 조공 형식의 간접적 지배를 좀 더 선호하는 편이었고 오랑캐의 천박한 땅이고 중화사상 자기중심주의에 갇혀 외부로 영토를 더 뻗어나갈 생각은 딱히 많이 안 했다고 한다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아마 저 책에서도 이러한 부분을 놓고 얘기한 듯 싶다. 제국주의 서양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좀 덜했다는 얘기라면 딱히 틀린 것만은 아니다. 물론 침략전쟁을 아예 안했다는 것도 아니지만.

4. 문화 정체성


  • 중국은 일본과 달리 제국주의 시대에도 문화 정체성을 잃지 않았고 그것이 21세기에 일본이 방황하고 있는 반면 중국은 수직상승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것도 역사의 자의적인 해석이 될 수 있는 부분이다. 실제로는 중국은 5.4 운동과 문화대혁명에서도 보듯 구습을 타파한다면서 과거의 정체성을 완전히 버리는 모습을 보여줬으며[5] 일본의 메이지 유신도 자세히 보면 서양의 그것을 일본식으로 해석해서 받아들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중국이 21세기에 잘나가고 일본이 주춤하는 이유를 단순히 문화적 정체성이라는 간단한 명제로 설명할 수 없다. 인구 14억이 넘는 중국의 잠재력이 발휘된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 다만, 10억이 넘는 인구의 국가가 크게 분열되지 않은 건 자신들이 중국인이라는 자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특히 중국은 언어도 인도 수준으로 다르지도 않기에 통합이 더 쉽다.

5. 소련군


  • 소련군만주 작전으로 동아시아 일대에서 승리자가 되어 우쭐하고 있고 미군이 그걸 보고 실제로 싸운 건 얼마 되지도 않았다면서 못마땅한 눈으로 보고 있다.
독소전쟁에서 독일군은 소련군이 강해서 아르덴 대공세 같은 예외가 아닌 경우 가급적 동부전선에 병력을 더 많이 투입해서 제2차 세계대전 독일군 전사자의 80% 이상이 독소전쟁 전사자이다. 그러나 영국이 아프리카 전선에서 패했다면 소련이 패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결과 비록 소련군도 유럽의 절반 이상과 베를린을 포함해 독일 영토의 절반을 차지했지만 연합군의 점령지 역시 쓸데없는 아프리카 땅을 제하더라도 상당히 넓었고 괜찮은 곳도 많았다.
대신 아시아의 경우는 상황이 반대로 미군이 섬 하나 하나를 먹기 위해 고생한 동안 소련군은 유럽에서 연합군이 그런 것처럼 상당히 손쉽게 만주를 장악했다. 당시 만주의 관동군은 무장 수준이 만주군보다 못한 정도였다.
물론 소련이 랜드리스의 도움을 많이 받은 것도 사실이고 쿠르스크 전투에서 이탈리아 상륙전으로 인해 도움을 받은 것도 사실이기는 하나 2차 대전에서 수천만 명의 인명을 갈아넣어가며 저항하지 않았다면 2차대전이 더 길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애시당초 소련이 가장 위험했던 바르바로사 작전 시점에서는 소련 스스로가 독일의 진격을 막아낸 것이었다.

6. 중일전쟁 관련 국민당과 공산당에 대한 오해


  • 1927년 4월에 제1차 국공합작이 끝났다고 써있는데 실제로는 7월까지 진행되었다.
  • '중일전쟁 때 국민당은 후방에서 방관했지만 공산당은 앞장서서 싸웠다.'는 사실 그 반대이다. 하지만 이 부분만은 이원복 교수를 탓하기 힘든게 한국 역사학계부터가 국방대 기세찬 교수 이전엔 도긴개긴으로 2000년대 이전 중국 공산당의 입장을 충실하게 대변한 선전을 그대로 인용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역사 연구가 생업인 학자들이 그 지경이었는데 아동용 교양만화가에게 대신 책임을 묻는건 주객전도다. 하지만 이원복의 만화책은 역사학계의 그 누구보다 대중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쳤으며, 시중에 각종 국민당 및 장제스 재평가를 다룬 해외서적들이 붓물 터지듯 출판되었음에도 이후 2018 개정판에서도 별다른 수정을 안한다는 점[6]평가가 에서 면책하기는 어렵다. 아무튼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중일전쟁에서 가장 앞장서서 싸운 건 국민당이고 공산당은 옌안에 틀어박혀 세력만 키웠지만, 중일전쟁 이후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한 이후 국민당의 업적은 대륙에서 과소평가됐다. 나무위키의 전신인 리그베다 위키에서도 몇년 전까진 딱 이런 식으로 서술 되었다 대대적으로 갈아엎어졌다.
  • 그렇지만 2000년대 이후 대륙에서도 장제스와 국민당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면서 장제스는 중국의 근대화와 항일전쟁을 이끌었던 영웅으로 치켜세워졌고[7] 2010년대 이후 중국에서 나온 중일전쟁 관련 영화에선 중국군은 공산군이 아닌 청천백일기를 들고 태양 마크를 철모에 붙인 국부군으로 그려진다. 대표적으로 난징! 난징!진링의 13소녀, 그리고 첩혈고성. 이 영화들 에서 처절하게 저항하고 싸우는 중국군은 전부 다 국민당군 복장과 제식을 하고 있다. 역사교육에서도 국정제->검정제로 바뀌면서 역사교과서에 중일전쟁의 역할에는 국민당 정권이 컸다는 것은 분명하게 기술하고 있다.
  • 오히려 중일전쟁 동안 뒤에서 이득만 노리던 건 공산당으로 마오쩌둥이 세력확장에 7할, 2할에 반장제스 투쟁, 그리고 나머지 1할에 항일 이라 교시했다(중일전쟁/오해와 편견 참조). 리그베다 위키 시절, 먼나라 이웃나라 및 중국공산당 측 주장과 동일한 내용으로 기술되어 있었다. 아직도 중일전쟁이나 관동군 항목 등 관련 항목 등을 뒤져보다 보면 먼나라 이웃나라식 기술을 찾아볼 수 있다. 어쨌든 책에서 나오는 만주 에서 장쉐량의 역할과 서안 사건, 신4군의 환남사변 등 중일전쟁에 대한 대부분의 내용은 인과관계가 완전히 잘못됐다.
  • 보수 우익인 작가의 성향과 반대로 중일전쟁 내내 심각한 공산당 찬양과 장제스/국부군 까성량으로 채웠는데, 중국공산당측 자료만 뒤져보고 책을 집필한 것 같다. 먼나라 이웃나라 전체에서 지엽적인 부분은 수많은 비판 사항이 지적되는데, 중일전쟁 파트처럼 큰 규모를 완전히 오해한 것은 매우 드물다. 장제스, 마오쩌둥 모두 이 전쟁이 장기전이 될 것으로 내다보면서 모두 장기전이 중국에게 유리할 것이라 판단했다고 하면서 그 결과는 달랐다고 기술했다. 국민당의 경우 '일본과 싸우느라 기진맥진...' 이라는 대사를 하고 공산당은 '치고 빠지는 게릴라전으로 공산군 세력 불리는 기회!' 라는 대사를 한다. 그런데 국민당은 일본군에 안 맞서고 도망치고 공산당은 열심히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면, 왜 국민당은 기진맥진했는지에 대한 내용은 먼나라 이웃나라에선 없다.
  • 만주사변 당시 일본군이 만주를 공격하자 장제스의 지시로 싸우지 않고 도망 갔다는 중국공산당측의 주장을 충실하게 그려 놓았다.[8] 당시 만주를 다스리고 있던 것은 장제스가 아니라 장쉐량이다. 둘은 누가 누구에게 명령을 내리는 관계가 아니며, 50만명이라는 엄청난 대병력을 보유하고도 싸우지 않고 도망간 것은 장쉐량 본인의 판단이었다. 즉, 만주는 장쉐량의 땅인데 자기가 싸우고 싶으면 싸우는 거고, 빤스런하고 싶으면 하는 것이지, 수천km 떨어져 상하이에 사는 장제스의 뜻과는 관계 없다. 오히려 장제스는 장쉐량에게 일본과 독단적으로 협상하지 말라고 하였다. 장쉐량은 장제스의 지시를 따르는 관계가 아니었다. 만화와는 반대로 장쉐량은 '관동군의 도발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 동북군은 무력으로 대항하지 말고 모든 무기를 병기고에 보관한 채 스스로 물러날 것이며 일본군에게 최대한 협조하라.'라는 지시를 내리며 무저항을 지시하였고, 이에 환멸을 느낀 장쉐량의 수십만 대군은 일본에 항복하여 이후 친일로 변절 하였다.[9]
  • 중일전쟁 말기 공산군과 국민당군이 각자 일본군에게 자신들에게 항복할 것을 요구하자 일본군은 둘 다 거부하고 최후까지 저항했다. - 실제로는 당시 세력이 더 컸던 국민당군에게 항복하기로 결정하고 공산군과는 교전을 지속하기로 결정했다. 일본군 장교였던 창군원로들의 책을 보면, 전쟁이 끝나자 마자 부대는 항복하였으며 조선과 일본으로 이동하는 과정이 나온다. 만주에서는 관동군은 일본인 조선인 안가리고 시베리아로 끌려 갔지만, 소련군이 보기에 군대 취급도 못 받은 만주군의 조선인들은 그냥 걸어서 조선으로 돌아가 창군의 주력이 된다. 이는 모든 창군 원로들의 자사전에 동일하게 나오는 내용이며 결사항전 같은 것은 없었다.

7. 그 외


- 실제로는 1998년에 사망했다. 그냥 오타일 것이다.
  • 1981년에 죽은 쑹칭링이1983년에 죽었다고 나온다.
  • 트루먼이 원작폭탄 사용 관련 방송을 11월 30일에 했는데 20일이라고 나온다.
  •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제국의 국기가 나치 독일의 하켄크로이츠로 나온다(...)
  • 일국양제를 좋은 제도라 치켜세웠는데 이는 절대로 좋은 제도가 아니다. 원래 일국양제 원리는 외교나 국방은 중국 정부가 맡고 나머지는 홍콩인들이 알아서 하는데 정상이고 원리인데 중국이 약속을 무시하고 자의적으로 홍콩의 행정수반을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을 뽑고 삼권분립을 무시하면서 민주파를 탄압하다보니 이에 대한 홍콩인들의 반감이 커서 반중시위가 가장 많이 일어나는 곳이다.[10] 오죽하면 대만의 친중 정당인 국민당도 하나의 중국은 찬성하지만 일국양제는 반대한다. 특히 대만 내에서 중국이 원하는 일국양제로 통일하자라고 주장하면 대만인들에게 삿대질당하고 심지어 매타작 당할 수 있다.



[1] 당시 국교회(성공회)는 천주교/장로회/루터회 등 여러 그리스도교 종파들의 교리와 형식을 다양하게 포용해서, 온 국민이 믿기에 무리 없는 교회를 만들고자 했다.[2] 인도네시아의 화교들은 네덜란드의 영향을 받아 개신교가톨릭으로 개종한 경우가 많았다[3] 중국에 거주하는 한 서양인이 쓴 칼럼. 중국 기독교인이 많다니 어쩌니 하지만 현실에서는 오래 살아도 한 두 사람 보기 힘들다는 이야기.[4] Chinese Family Panel Studies의 2012년 조사 자료[5] 덕분에 중국은 소프트 파워가 약하다.[6] 거의 7년만에 낸 최신 전면 개정판이라는 홍보가 무색할 정도로 중일전쟁 시기는 켜녕 비교적 최근인 시진핑과 관련된 내용조차 수정된 부분이 전무하여 전면 개정이 아니라 '정면' (책 표지) 개정으로 보일 정도.[7] 장제스를 호평하면 그를 상대로 해서 승리한 마오쩌둥의 평가도 같이 올라가게 되니 당연한 과정이다. 이는 항우를 띄워주면 그 항우를 물리친 유방이 자연스레 띄워지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8] 마오쩌둥 등 공산당 간부들의 주장을 아무런 검증없이 에드가 스노우가 언론보도를 한 결과 오늘 날까지 많은 대중들에게 정설처럼 각인 되어있다.[9] 사실 이전 소련과의 분쟁 등에서 장쉐량과 알력이 있던 원로들 휘하 부대를 소모성 총알받이를 내세우는 등의 행위로 상당한 갈등이 있었다.[10] 이는 중국은 '일국'을 홍콩은 '양제'를 강조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