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새싹 작전

 

'''봄의 새싹 작전'''
벌러톤 호 공세 / 너지카니저-쾨르멘드 공세
제2차 세계 대전동부전선의 일부
[image]
전투 당시의 지도
'''날짜'''
1945년 3월 6일 ~ 1945년 4월 15일[1]
'''장소'''
헝가리, 벌러톤 호와 헝가리 서부 일대
'''교전국'''
<^|1>[image] 소련
<^|1>[image] 나치 독일
[image] 헝가리 왕국
'''지휘관'''
<^|1>[image] 표도르 톨부힌 (제3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관)
<^|1>[image] 오토 뵐러 (남부집단군 사령관)
[image] 막시밀리안 폰 바익스(F집단군 사령관)
'''결과'''
소련군의 승리
'''영향'''
독일군의 기갑 전력 궤멸, 소련군의 오스트리아 함락
'''병력'''
465,000명
전차 407대
돌격포 및 박격포 6,597문
방사포 293문
항공기 965대
260,000명[2]
전차 1,245대
돌격포 및 박격포 3,200문
항공기 850대
'''피해규모'''
47,000명 전사
150,000명 부상

기갑차량 152대 손실
대전차포 415대 손실
항공기 400+대 손실
30,000+명 전사[3]
125,000명 포로 및 부상

전차, 돌격포, 구축전차 1,345대 손실
장갑차 446대 손실
화포 2,250문 손실
항공기 200+대 손실

1. 개요


Unternehmen Frühlingserwachen
다른 명칭:플라텐제[4] 공세(Plattenseeoffensive)
소련군 명칭:벌러톤 방어 작전
나치 독일군 최후의 공세. 헝가리 벌러톤 호 인근의 너지카니저 유전을 방어하기 위해 히틀러가 기획한 공세로 제6 무장친위대 기갑군과 국방군 2기갑군이라는 사실상 마지막 기갑 전력들을 총동원했다. 나치는 아르덴 대공세에서의 실패를 만회하려 했고 동시에 유전지대 점령으로 연료 수급을 원활히 하려 했으나 소련군의 반격으로 다수의 기갑장비들을 잃으며 대패를 당한다.

2. 작전 준비


1944년 8월 소련군의 진격과 더불어 미하이 1세의 친위쿠데타로 루마니아가 연합군 측으로 전향하면서 루마니아를 점령하는데 성공한 소련군은 독일군의 주요 석유 공급원이었던 루마니아의 플로이에슈티(Ploiești) 유전을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다. 플로이에슈티 유전을 잃은 독일군은 석유 공급이 끊겨 극심한 연료 부족에 시달리게 되었고 이후에는 헝가리에서 조금 나오는 석유와 독일 본국의 석탄을 액화시켜 얻은 연료로 근근히 버틸 수 밖에 없었다. 이 헝가리산 석유는 대부분 헝가리 서부 벌러톤 호수 서쪽에 위치한 너지카니저(Nagykanizsa) 유전에서 생산되는 것이었는데 만일 소련군이 너지카니저 유전마저 장악하면 독일은 석탄을 액화하는 것 말고는 석유 공급원이 완전히 끊기게 되는 것이었고 거기에 헝가리 전체가 소련군에게 넘어가 체코와 오스트리아를 거쳐 독일 남부까지 한번에 뚫리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히틀러는 부다페스트 공방전에서 독일군이 소련군에게 지연전을 펼쳐 두 배 이상의 병력 교환비를 내자 남쪽에서 활로를 뚫을 수 있다는 착각에 빠졌다. 그래서 소련군 제3우크라이나 전선군에 맞서서 제6 무장친위대 기갑군을 주력으로 공세를 할 계획을 세우는데. 벌러톤 호수 북쪽에서 진격한 뒤 다뉴브 강으로 진격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제6 SS 기갑군은 부대를 북쪽과 남쪽으로 나눈 뒤 SS E군과 합류해 최종적으로 소련의 26군과 57군을 모두 포위한 뒤 부다페스트까지 탈환하는 대담한 계획이었고, 조공으로 국방군 제2기갑군은 벌러톤 호수 남쪽으로 공세하고 헝가리 제3군을 동원해 소련군의 발목을 잡을 계획이었다.
작전 수립 과정에서 군부의 만류가 있었지만[5] 히틀러는 또 한번 자신의 운을 믿고 도박을 해볼 작정이었다.[6] 거기다가 지난 2월의 남풍 공세 작전(Operation Southwind)에서 큰 성공을 거두어 히틀러는 자신만만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지난 2월의 공세 작전이 '''독일의 마지막 성공적 공세 작전'''이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3. 투입된 독일군 규모


#
무장친위대
독일 국방군
헝가리군
보면 알겠지만 대부분의 사단이 완편되지 못한 편제를 갖추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난 2월의 남풍 공세 작전으로 인해 정비중인 차량들도 많이 있는 상황이라 사단 규모가 그만큼 줄어든 것. 그럼에도 히틀러는 공세를 강행하라고 명령했고 그 결과는 최악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4. 공세


[image]
1945년 3월,작전 중 기동중인 무장친위대 기계화부대
3월 6일,제6 SS 기갑군은 배속된 다수의 티거 II 전차들을 동원해 소련의 제3 우크라이나 전선군을 타격했다. 공세는 초반에 순조로웠지만 다뉴브 강을 마주할 때 소련군의 거센 저항에 직면했고 진흙투성이의 지형을 마주하게 되면서 진격 속도는 더디어지게 되었다. 얼어붙었던 지형이 이른 봄이 찾아오면서 진흙으로 바뀌어버렸기 때문이다. 많은 차량과 병력들이 진흙탕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이러한 상황에 마주한 지휘관들은 공세 명령을 연기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히틀러는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3월 14일,독일군의 공세는 심각한 문제에 당면했다. 제6 SS 기갑군은 그나마 부다페스트로 향하는 길목인 작은 호수 벨렌체까지 돌파하는데 성공했지만 목표에 한참 미달한 수준으로 진격했으며 제2 기갑군은 벌러톤 호수 남쪽으로 멀리 진격하지 못했다. 합류하려 했던 E군 소속 제13 SS 산악 사단은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지휘하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의 저항에 부딪혀 실패하고 만다.
독일군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수 km 정도 수준 까지 돌파하는데 성공했지만 공세 8일 만에 1만 5117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1000대의 전차 중 약 332대의 전차만 가동 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예를 들어 무장친위대 제2 "다스 라이히" 기갑사단은 전체 기갑 전력중 42%가 파손된 상태에 놓여 있었다.[7] 이것만 놓고 보아도 재앙 수준의 타격을 입은 셈인데 아예 숨통을 끊어놓는 수준의 더 큰 재앙이 들이닥친다.

5. 소련군의 반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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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에 맞서서 불을 뿜는 76mm ZiS-3 사단포
소련은 이미 2월 하반기 부터 독일군의 대규모 공세 조짐을 포착했다. 소련은 해당 전선에 제3 우크라이나 전선군 소속 26군과 27군을 방어 병력으로 배치했다. 소련군은 가용 포병 전력 65%를 이용해 발라톤 호수 전방의 83km에 걸쳐서 66개의 대전차 매복 지점과 다층 대전차 방어선을 지어놓았다. 거기다가 보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임시 교량과 가스 파이프라인까지 설치하는 등 그야말로 우주방어 수준의 준비를 해놓았다. 1km의 구역 당 평균 17문의 대전차포가 배치되었으며 다수의 대인/대전차 장애물을 설치하는 것은 물론이고 수천발의 대전차/대인지뢰들이 매설되었다. 그래서 독일군 전차들은 방어선 돌파과정에서 큰 출혈을 강요당했다. 그리고 소련군은 SU-100 대전차 자주포들을 최초로 투입했다. 이 대전차 자주포들은 광범위하게 투입되어 판터, 야크트판터 그리고 티거 2를 공격해 격파했다. SU-100은 2km 거리에서 125mm 수직장갑을 관통할 수 있었고 1.5km의 거리에서 판터의 80mm 경사 전면 장갑을 관통해 격파할 수 있었다.[8] 그리고 방어선이 독일군에 돌파당할 경우 소련군은 급히 전술 예비대를 재배치하는 유연함도 발휘했다.[9]
그렇게해서 큰 피해를 입었던 독일군은 3월 16일, 소련군 제46군, 제4근위군, 제9근위군의 전면적인 반격을 마주하게 되었고[10] '''공세 이전 위치로 다시 몰리게 되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아직도 승리가 가능하다고 헛된 망상을 하고 있었다.
3월 19일, 소련 제6 근위 전차군까지 투입되자 독일군의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야심차게 공세하던 독일군은 벌러톤 호수로 내몰려 포위될 뻔하다가 겨우 탈출하기도 했다. 6 근위 전차군은 이 틈을 타 진격을 계속했다.
3월 22일, 제6 SS 기갑군 잔존 병력들은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철수하고 3월 30일, 소련 6 근위 전차군은 제4군, 제9 근위군과의 협동 작전으로 오스트리아 빈까지 공세해서 4월 14일, 소련군에 의해 빈이 점령된다.

6.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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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사진들
6 SS 기갑군이라는 이름 잘 붙였네. '''단지 6대의 전차 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6 SS 기갑군 사령관 요제프 디트리히가 던진 농담
독일군은 3만 명 이상의 전사자와 12만 5000명의 포로가 발생하며 궤멸적 타격을 입는다. 장비 손실도 어마어마했는데 일단 숫적으로도 손실한 기갑전력이 거의 2,000대에 달하는데다가 티거 II야크트판터 그리고 판터와 같은 고급 전력들도 상당수였던지라 질적인 피해 규모도 더 컸다.[11][12] 어찌나 큰 피해를 입었는지 509 중전차 대대는 빈 함락 이후 미군에게 항복했을 때 '''살아있는 티거 2가 한 대도 없는 수준이었다.'''그나마 남아있던 독일군의 기갑전력마저도 완전히 궤멸되면서 독일군은 잔존한 전력들과 급조한 장비[13][14]들로 기갑세력을 겨우 유지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거기다가 헝가리 유전지대 방어는 커녕 소련군의 역공으로 독일 마지막 유전지대는 물론이고 오스트리아 까지 내주게 되었으니 나치 입장에선 더욱 뼈아픈 패배였다. 비록 독일의 최후의 한 방인지라 소련도 4만 명이 넘는 전사자와 10만 명이 넘는 부상자가 발생하고 한때 부다페스트로 향하는 교두보까지 밀려나는 큰 피해를 입었지만 소련군은 계속 막대한 병력과 장비들을 충원하고 있었으므로 사실상 소련군 수뇌부 입장에서는 거의 무의미한 피해였다.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이 내린 무리한 명령에 대한 책임을 지기는 커녕 적반하장으로 전투에서 패배한 무장친위대 부대는 패잔병이라는 치욕의 표시를 받으라며 무장친위대 사단 칭호가 적힌 소매 띠를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디트리히를 비롯한 무장친위대 장성들과 장병들은 이에 대해 크게 분개했고 상당수의 무장친위대원들은 이를 불복하고 그냥 달고 다녔다. 이미 히틀러에 대한 일선 장성과 장병들의 신뢰도는 떨어지고 있었다는 대표적인 사례.
여담이지만 소련군이 빈을 점령한 뒤에 오스트리아 시민들에게 상당히 친절하게 대우했다.# 베를린 공방전 당시와 비교되는 행동이었는데 일단은 강제로 독일에 합병된 처지이기도 했고 이때 적지않은 오스트리아 민간인들이 소련군의 진격을 도와주었기 때문. 나치는 소련군이 오스트리아를 파괴할 것이라고 선전했지만 소련군 야전부대들이 적극적으로 반박하며 오스트리아 시민들에게 계속 생업에 종사할 것을 호소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시민들의 저항도 전무했다. 또한, 소련군이 독일군의 청야전술을 막은 덕에 빈의 주요 세계적 문화유산들이 파괴되지 않고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다.

[1] 3월 16일까지는 독일군의 공세, 이후에는 소련군의 반격[2] 헝가리군 병력은 불명으로 포함하지 않음.[3] 독일군 남부집단군만. 독일군 F집단군 및 헝가리군 손실 미포함[4] 벌러톤 호의 독일어 명칭.[5] 이때 소련은 헝가리만 공격한 것이 아니라 독일 동부에서 비스와-오데르 대공세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폴란드 총독부와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의 숨통을 끊었고, 동프로이센포메른, 슐레지엔의 함락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6] 히틀러는 원래부터 판돈을 크게 걸고 일을 벌이는 스타일이었다. 전쟁 초기 폴란드와 프랑스를 연달아 점령하고 소련을 모스크바 코앞까지 밀어내자 히틀러의 기세는 더욱 오르게 되었고 주변 참모들의 조언을 경청하기보다는 자신의 능력과 운을 신뢰하게 되었다. 이후 히틀러는 군부 장성들의 조언을 무시하는 것은 물론이고 장성들의 자율성을 저해하며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게 되었다. 히틀러의 고집 때문에 독일군 장성들은 프랑스 침공과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선보였던 자신의 강점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독일군이 패하면 그것을 장군들의 책임으로 몰고 가는 것은 물론이고 불리한 상황에서도 갑자기 공세를 하라고 명령하거나 포위당할 위험에 처한 독일군 부대에 대해서도 끝까지 전선을 고수할 것을 명령하는 등의 군사적 전략적 실책을 여러차례 범하는 바람에 독일군의 손실은 더욱 커져만 갔고 결과적으로 나치 독일의 패전을 앞당기게 되었다.[7] 자료에 따라선 제9 SS 기갑 사단이 이와 같은 피해를 입었다고 서술되어 있다.[8] Higgins, David R. (2014). Jagdpanther vs SU-100. Eastern Front 1945. Osprey Publishing.[9] 톨부힌은 예비대로 묶여 있는 야전군을 보내줄 것을 요구했지만 스타브카가 거절해서 전술 예비대 투입으로 만족해야 했다. 야전군급의 예비대를 투입하지 못했기 때문에 방어선이 뒤틀리긴 했지만 방어선이 완전히 붕괴되지는 않았다.[10] 독일군이 지연전에 큰 피해를 입고 있던 14일~16일 사이 부다페스트 서쪽에서 소련군의 '''4개 야전군'''이 독일군의 좌익과 후방을 노리며 은밀히 배치되고 있었다.[11] 1945년 당시에는 날이 갈수록 더 강화되는 미-영 연합공군의 폭격에 군수공장을 제대로 가동하지 못해 엔진과 같은 중요 부품을 제대로 생산하지도 못했고, 심지어 품질 악화 문제로 장갑이 약화된 판터 G형이 출고되기도 했다. 비스와-오데르 대공세로 인해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내 군수공업지대까지 소련에게 내준 상황이었다. 그리고 티거 II는 이미 서부 전선에서의 아르덴 대공세와 연합군의 프랑스 해방 과정에서 많은 손실을 입은 상황이었다. 즉, 공세에 동원된 독일군 전차들은 '''정말로 독일의 제대로 된 마지막 기갑전력이었던 것.'''[12] 하노마크 반궤도 장갑차 수 백대를 손실했던 것은 당시 독일군의 상황에 있어서 기동능력에 있어서의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독일군은 수송 트럭조차 부족한 형국이었고 철도는 계속되는 연합군의 공습에 파괴되기 일쑤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 하노마크 반궤도 장갑차를 비롯한 제대로 된 장갑차들을 대량으로 보유하는 사치를 누리고 있던 제6 SS 기갑군의 궤멸은 사실상 독일군 기동 능력의 상실이나 마찬가지였던 것. 독일군에게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건 전선이 극도로 축소되고 수세적 방어자 입장이었기 때문에 병력 투입이 상대적으로 용이해진 상황이었다.[13] 베를린 공방전을 보면 노획한 전차, 훈련용으로 운용되던 전차, 그리고 온갖 프로토타입이나 다른 형식의 부품들을 끼워맞춘 잡종 전차, 대전차포를 장착한 구형 전차들도 동원한다. 엔진이 제거된 채 고정형 토치카로 운용되는 전차는 물론이고 심지어 1차 세계대전 당시 사용되던 노획된 영국제 Mk 시리즈 와 프랑스제 르노 FT-17까지 동원한다.[14] 물론 서부전선에서 제대로 운용 중이던 512 중전차 대대 소속 야크트티거 그리고 판터를 비롯한 전차 전력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이들은 베를린 공방전에 투입할 수 없었고 결국 연합군 대비 수적 열세와 보급 고갈로 하나 둘씩 궤멸되거나 항복하는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