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릉 도굴사건

 

1. 개요
2. 선릉과 정릉이 도굴되다
3. 도굴범을 소환하라
4. 이 쯤에서 덮어두자


1. 개요


임진왜란 중인 서력 1593년 1월 3일성종의 능인 선릉중종의 능인 정릉이 도굴된 사건이다. 그래서 선릉과 정릉에는 각각 성종과 중종의 시신이 없는 상태이다.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선 조정에서는 일본 측에 선릉과 정릉을 도굴한 범인을 잡아서 압송할 것을 요구했고 그 결과 2명의 도굴범을 잡았다고 대마도에서 도굴범들을 조선으로 보냈지만 모두 가짜임이 드러났다. 그러나 외교적 파장을 생각한 것인지 조선 조정에서 이 쯤에서 덮어두기로 하면서 유야무야 되었고 결국 압송된 대마도민 2명은 참수당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1]

2. 선릉과 정릉이 도굴되다


1592년 음력 4월 13일일본이 무려 20만이나 되는 대군을 보내 조선을 침공하면서 임진왜란이 발생하였다. 일단 그 나름대로 대비를 했다는 주장도 있기는 하지만 아마 당시에 이 정도 규모의 대군을 예측하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포르투갈로부터 수입해 온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의 공세에 맥없이 무너지며 정발 장군이 지키는 부산진성이 함락된 것을 시작으로 송상현이 지키는 동래성이 함락되었고 4월 24일에는 상주까지 진격하였다. 이일이 이끄는 조선군은 상주에서 일본군에게 궤멸되고 말았다. 그리고 나흘 후인 4월 28일엔 믿었던 신립의 조선 기병이 충주에서 일본군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충주에서 한양까지 거리는 불과 280리!
결국 절체절명에 몰린 선조몽진을 결심하게 된다. 개성으로 몽진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엔 평양으로 몽진했으며 최후에는 국경 근처인 의주까지 몽진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명나라에 구원병을 청했다. 그 틈에 일본군은 평양까지 점령했으나 너무 단기간에 조선 영토 깊숙한 곳까지 진격했기에 병참선이 지나치게 길어져서 전쟁 수행에 한계가 왔다. 그런데다 물자 보급을 맡은 수군이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에게 궤멸당했기에 전쟁 수행에 점점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무렵에 명나라의 구원병이 조선에 왔다. 처음 구원병을 이끌고 온 조승훈은 일본군을 얕잡아 보고 불과 5,000명의 병력으로 기세좋게 평양을 공격했으나 대패하고 달아났다. 조승훈의 뒤를 이어 이여송이 4만 5,000명의 구원병을 인솔하여 조선으로 왔다.
이여송의 구원병은 기세등등하게 진격하여 일본군을 남쪽으로 밀어내는 듯했다. 그러나 이여송의 명군도 오늘날 경기도 고양시 일대에 해당하는 벽제관에서 일본군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결국 이여송은 이후 개성으로 달아났고 평양까지 후퇴하였다. 그런 다음 심유경을 앞세워 일본과 화의 교섭에 치중하면서 전선은 임진강 부근에서 교착되었다. 그러던 중 1592년 음력 12월 1일에 왜적이 선릉과 정릉을 도굴했다고 한다.기사 참조 <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실록]엔 이 날짜에 도굴되었다고 기록하면서도 주석으로 정확하게 언제 도굴되었는지는 모른다고 적고 있다. 그러므로 그보다 더 이전에 도굴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조선 정부는 1593년 음력 4월 13일에 경기좌도 관찰사 성영(成泳)이 올린 장계를 통해 비로소 선릉과 정릉이 도굴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기사 참조 왜군이 선릉과 정릉을 도굴한 시점이 정확하게 언제이며 또 왜 도굴을 한 것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고 단지 추측만 할 수 있다. 유사한 사례를 통해서 당시 왜군의 의도를 유추할 수 있다. 고구려 고국원왕 12년(서기 342년)에 전연이 5만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로 쳐들어왔다. 이 때 전연은 고구려로 가는 길이 남쪽은 험준하고 북쪽은 평탄한데 고구려는 북쪽 길을 중점적으로 방어할 것이니 역으로 남쪽 길로 4만의 병력을 보내고 북쪽 길로 1만 5,000명의 병력을 보내는 작전으로 허를 찔렀다. 고국원왕은 치명적인 전략 미스를 범해 북쪽 길에 5만의 병력을 보내 방어하도록 하고 자신은 약졸들로 남쪽 길을 방어하러 갔다. 결국 고구려는 크게 패배하였고 수도 환도성이 함락당하는 치욕을 겪고 말았다. 이 때 전연 왕 모용황의 참모인 한수가 했던 말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 땅은 우리가 남아서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지금은 그들의 왕이 도주하고 백성들이 흩어져 산골짜기에 숨었지만, 우리 대군이 철수한 뒤에는 반드시 나머지 병사를 다시 모을 것이니, 이는 우리에게 큰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구려왕 아버지의 시체를 무덤에서 파내어 싣고 그의 생모를 사로잡아 돌아간 후, 고구려왕이 제발로 와서 사죄를 하면, 그 시체와 생모를 돌려주어 은혜와 신의로써 일을 마무리 짓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高句麗之地 不可戍守 今 其主亡民散 潛伏山谷 大軍旣去 必復鳩聚 收其餘燼 猶足爲患 請載其父尸 囚其生母而歸 俟其束身自歸 然後返之 撫以恩信 策之上也)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국원왕 12년 조(서기 342년)

즉, 당시 전연의 국력으로는 고구려를 완전히 정복하기 힘들고 또 비록 첫 전투에서 고구려가 패배했다고 하더라도 언제 다시 고구려가 군사를 모아 역습할지 모르니 미천왕의 능을 파헤쳐 그 시신을 인질로 삼고 또 태후도 같이 사로잡아 인질로 삼아서 협상에 유리하게 쓰자는 것이었다. 아마 당시 왜군들도 이런 계산에서 선릉과 정릉을 도굴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당시 일본은 명나라에서 보낸 심유경과 함께 화의 교섭을 진행 중이었기에 협상에 유리하게 쓸 만한 카드가 필요했던 상황이었다. 선릉의 주인인 성종은 선조의 증조할아버지가 되고 또 정릉의 주인인 중종은 선조의 할아버지가 되는데 예부터 조선은 효(孝)를 중시한 나라였으니 현직 국왕의 조상 시신을 인질로 몸값을 높이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후, 독일 출신의 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의 묘를 파헤친 것 역시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면서 자국의 몸값을 높이기 위해 했던 짓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충분히 일리 있다고 생각된다.

3. 도굴범을 소환하라


1598년에 결국 7년에 걸친 왜란은 조선의 승리로 끝이 났다. 7년에 걸친 전쟁으로 인해 조선과 일본의 국교는 당연히 단절되었다. 하지만 양국 사이에서 중계무역을 통해 돈을 벌던 대마도 입장에선 이런 상황이 좋을 수가 없었다.[2] 그래서 조선과 일본이 서로 화해하도록 자리를 주선하려고 애를 썼다. 이에 조선 측에서는 1606년에 일본에 선릉과 정릉을 도굴한 범인을 잡아서 압송하라는 요구를 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엔 CCTV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니었고 사건이 일어난 지도 13년이나 지났는데 어떻게 범인을 잡겠는가? 그런데 놀랍게도 일본은 도굴범을 잡았다고 하며 2명의 도굴범을 체포해 조선으로 보냈다. 이렇게 조선으로 끌려온 도굴범은 당시 37세의 마코사쿠(麻古沙九)와 27세의 마타하치(麻多化之)[3]라는 인물이었다. 조선으로 압송된 이 2명의 도굴범들은 오자마자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자신들의 혐의를 부인하는 게 아닌가? 우선 마코사쿠란 인물의 진술을 들어보면 이렇다.

'''"나는 본래 대마도에 살았습니다. 임진년 왜적이 침구하여 왔을 때 연소한 사람으로 도주 군관(軍官)의 노자(奴子)가 되어 나와서 부산의 선소(船所)에 머물렀을 뿐 서울에는 올라오지도 않았기 때문에 능침을 범한 연유를 전연 알지 못합니다. 다만 대마 도주에게 득죄(得罪)하게 되어 촌가(村家)에 쫓겨나 있었는데, 지난 10월 8일 야간에 결박되어 이곳에 보내진 뒤로 이와 같이 추문을 받게 되었으니, 무엇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죽을지언정 어찌 감히 없는 말을 꾸며 공초할 수가 있겠습니까. 일본에 맹세한다면 반드시 믿어주지 않을 것이니 내가 조선에 맹세하는 것을 허락하여 준다면 사흘 내로 죽겠다는 맹세라도 굳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대저 나의 사정이 매우 애매하니 대마도로 돌아가서 변정(辨正)한 뒤에 다시 나와서 죽게 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205권, 선조 39년 11월 17일 임오에 실린 마코사쿠의 진술

즉, 마코사쿠는 임진왜란에 참전하기는 했지만 해군 출신이었기 때문에 부산포의 항구에만 머물렀을 뿐 서울엔 올라온 적도 없었다는 것이다. 다만 전쟁이 끝난 후 대마도주에게 죄를 얻어 쫓겨다니던 처지에 한 달 전에 붙잡혀서 강제로 조선으로 보내졌다는 것이었다. 뒤이어 마타하치의 진술을 들어보면 이렇다.

'''"나는 본래 대마도 사람으로 도주 평의지에게 소속되어 포수(砲手)가 되었는데 도주가 매 사냥을 나갔을 때 수행하였다가 마침 명령을 어긴 잘못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득죄하게 되어 좌고촌(佐古村)에 쫓겨나 감옥에 갇힌 죄수가 되었는데, 평경직(平景直)이 나의 건장함을 애석하게 여겨 몰래 식량을 갖다 주었으므로 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박하여 배에 실어보냈기 때문에 오긴 했습니다만 조선 땅은 이번이 처음으로 능침을 범한 절차에 대해서는 전연 모르는 일이고 평조윤이라고 하는 자도 모릅니다. 부모는 다들 형제간이 없을 뿐만 아니라 4∼5촌 이내에 전혀 친족이 없습니다."'''

-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205권, 선조 39년 11월 17일 임오에 실린 마타하치의 진술

즉 이 두 사람의 알리바이[4]가 증명된 셈이다.
마타하치는 임진왜란 당시엔 아예 조선에 온 적도 없어 이번에 처음으로 조선 땅을 밟은 인물이었다. 나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당시엔 그는 겨우 13세의 소년이었다. 당연히 군에 입대했을 리가 없다. 즉, 마코사쿠와 마타하치 모두 대마도에서 살았던 일개 잡범들이었는데 대마도 측에서 억지로 능침을 범한 인물이라고 갖다 붙여서 조선으로 보낸 것이었다. 또한 쓰시마에서 반환했다는 중종의 시신 역시, 생전의 중종을 본 적이 있는 궁녀들이 살펴본 결과 키나 체격을 볼 때 중종이 아니라고 증언했다. 결국 이로 인해 조선 조정에서는 다시 한 번 갑론을박을 벌이게 되었다.

4. 이 쯤에서 덮어두자


결국 조선 국왕 선조는 "이 쯤에서 덮어라."는 지시를 내리게 되었다. 처음엔 마코사쿠와 마타하치가 제 목숨을 건지려고 거짓말을 늘어놓는 게 아닌가 해서 혹독하게 고문을 가해 보았지만 이 독한 놈들은 끝까지 버티며 자신들이 범인이 아니라고 개기는 중이었다. 또 이제 와서 대마도 측에다 왜 가짜 도굴범을 보냈느냐고 따진다고 해도 그들이 진범을 잡을 수 있을 가능성도 희박했다. 물론 조정 내에서는 선릉과 정릉을 도굴한 진범을 내놓을 때까지 절대 화의를 맺어선 안 된다는 여론도 만만찮았으나 결국 이대로 질질 끌면 쓸데없는 소모전이 될 뿐이라는 여론이 더 우세해 이 쯤에서 덮기로 결정했다. 이후에 논의된 문제는 그 가짜 도굴범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로 옮겨갔다.
한음 이덕형은 이 가짜 도굴범들을 다소 동정했는지 김해시양산시로 귀양을 보내서 살게 하자는 방안을 건의했지만 다른 대신들은 비록 저들이 가짜이긴 해도 본보기로 처형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그 가짜 도굴범들을 처형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1606년 음력 12월 20일에 사형이 집행되었고 이 불쌍한 2명의 가짜 도굴범들은 억울하게 목이 잘려 죽고 말았다. 조선 조정에서 이 두 사람을 처형하고 불문에 부치면서 결국 진짜 도굴범은 붙잡지도 못했고 진짜 성종과 중종의 시신은 반환되지도 못한 채 사건은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 한편, 일본 측에서는 쓰시마가 날조했다는 사실을 30년 뒤인 1620~30년 경에야 알게 된다.

[1] 아예 죄가 없지는 않았고 잡범으로 대마도에서 잡혀서 압송된 죄수들이기는 했지만 결과는 가혹했다.[2] 대마도에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대마도는 들이 적고 숲이 많은 곳이라 농사 짓고 살기 좋은 곳이 아니다. 먹고 살 길은 교역 뿐이었다. 다만 대마도에 워낙 나무가 많고 그 나무들의 목재로 쓸 수 있을 만큼 질이 좋아서 그 섬의 나무들을 몽땅 팔아도 일본 전 국민이 3년은 먹고 살 수 있다는 농담이 있긴 하다.[3] 두 사람 다 성씨는 없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평민들이 성씨를 쓰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위의 한자들은 실제 그들의 이름이 아니라 조선 측에서 그들의 이름을 듣고 한자로 음차한 것이다.[4] 당시에 그곳에 없었음을 주장함으로써 무죄를 주장하는 방법. 마타하치와 마코사쿠 두 사람 모두 당시에 서울에 없었음을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