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르트 도굴 사건

 

1. 개요
2. 사건의 배경
3. 목적
4. 처벌
5. 기타
6. 관련 문서


1. 개요


남연군 분묘 도굴 사건 /
고종 5년(1868년), 독일 함부르크 출신의 유대인 상인이자 자칭 인류학자 에른스트 야코프 오페르트(Ernst Jakob Oppert/1832년~1903년)가 충청도 덕산(德山)[1]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생부 남연군 구(球)의 묘를 도굴'''하려다가 실패한 굴총(掘塚) 사건이다. 덕산 굴총 사건이라고도 한다.
오페르트는 자신을 영국군이라고 속여서 두 차례나 조선을 방문했고, 세 번째 방문 이후의 경험담까지 합쳐서 아래 언급된 회고록을 썼다.

2. 사건의 배경


오페르트는 독일 함부르크에서 부유한 유대인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여러 형제가 있었으며, 형제 중 일부는 당시 독일에서 제법 저명했던 동양학자(orientalist)가 되었다. 이런 집안 분위기 속에 동양에 관심을 가지게 된 오페르트는 19세 때인 1851년 홍콩으로 건너가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홍콩에서 사업이 기울어 파산 위기에 처하자 한국으로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1866년 2차에 걸쳐 조선에 통상을 요청했으나 실패하고 돌아갔다.
1867년 홍콩에서 파산한 뒤 오페르트는 1868년 4월 제3차 한반도 답사를 계획, 한때 상하이 미국 영사관에 근무한 미국인 모험가 프레더릭 헨리 배리 젠킨스(Frederick Henry Barry Jenkins)를 자본주로 하고, 프랑스인 선교사 스타니슬라스 페롱(Stanislas Féron,1827년 ~ 1903년) 신부를 통역관 겸 보좌관으로 대동하여[2][3] 차이나호(號)에 백인 8명, 말레이시아인 20명, 조선 천주교도 몇 명, 청국인 승무원 약 100여 명을 태우고 상하이를 출항했다.
한국에 도착한 그들은 북독일 연방 국기를 게양하고 충청도 홍주목(洪州牧) 행담도(行擔島)[4]에 와서 정박하였다가, 구만포(九萬浦)[5]에 상륙하여 러시아 군병이라 자칭하면서 함부로 총칼을 휘둘러 지방 관헌조차도 접근하지 못하게 한 다음, 어둠을 타서 덕산 가동(伽洞)[6]에 있는 남연군의 무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덕산군수 이종신(李鍾信)과 묘지기 및 몇몇 주민이 이를 제지하려 하였으나 무장한 서양인을 당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날이 밝아 주민들이 몰려오며 내하(內河)의 퇴조(退潮)[7] 시간이 임박해지자 이들은 관곽(棺槨)까지 파낸 것을 그대로 버려두고 구만포로 퇴각하였다. 이 부분에서 오페르트 본인의 회고와 이종신이 상부에 올린 보고가 엇갈린다. 오페르트는 "이종신이 나를 막아서자 나는 스스로를 러시아 군병이라 일컬으며 위협했고, 겁을 먹은 이종신이 남연군 무덤으로 가는 지름길까지 가르쳐 주었다"고 했다(…). 반면 이종신은 "한밤중에 오페르트와 그의 부하들이 관아에 쳐들어와서 파괴 행각을 벌였다"고 주장했다. 오페르트가 관아에서 분탕질을 하며 어그로를 끌만큼 시간 여유가 없었다는 걸 생각하면 오페르트의 주장이 조금 더 설득력이 있다. 땅을 파는 과정에 대해서도 오페르트는 "조선인들의 도구를 빌렸고(!) 이종신을 비롯한 조선 관헌들은 얼씬도 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저항도 받지 않았다"고 회고했으나, 이종신은 "내가 군병을 이끌고 어떻게든 막아보려 했지만 총기를 겨눠서 위협하는 통에 물러섰다"고 주장했다. 어쨌거나 확실한 것은, 삽질하다가 석회층에 막힌 오페르트 일당은 5시간 동안 삽질만 하다가 결국 도굴을 단념했다는 사실이다.
2일간에 걸친 이 사건이 충청도 관찰사 민치상(閔致庠)에게 알려지자, 즉시 군관 100여 명을 출동시켜 추적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또 경기도 영종진(永宗鎭)에 이르러 대원군에게 올리는 글을 제시하면서 영종진을 습격하다가 실패하고 돌아가버렸다.[8]
오페르트가 보낸 글은 다음과 같다.

대원군 좌하(座下)[9]

께 전하게 할 것.

煩帶至大院君座下

삼가 말하건대 남의 무덤을 파는 것은 예의가 없는 행동에 가깝지만 무력을 동원하여 백성들을 도탄 속에 빠뜨리는 것보다 낫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그렇게 하였습니다. 본래는 여기까지 관을 가져오려고 하였으나 과도한 것 같아서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어찌 예의를 중하게 여기는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군사와 백성들이 어찌 석회(石灰)를 부술 기계가 없었겠습니까? 절대로 먼 데 사람의 힘이 모자라서 그만 두었으리라고 의아하게 생각하지 말 것입니다.

謹言, 掘人之葬, 近於非禮, 勝於動干戈, 陷民塗炭之中, 故不得已行之。 本欲奉柩於此, 想必過度, 故停止耳。 此豈非敬禮的道乎? 軍民豈無破石灰之機械也哉? 萬勿遠人之力, 不及疑訝焉。

귀국의 안위(安危)가 오히려 귀하의 처리에 달려 있으니 만약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있거든 대관(大官) 1원(員)을 차송(差送)하여 좋은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만일 미혹에 빠져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나흘이 지나면 먼 데 사람들은 돌아갈 것이니, 지체하지 말 것입니다. 몇 달이 되지 않아서 반드시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우환을 당할 것이니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然且貴國安危, 尙在尊駕之處斷, 若有爲國家之心, 差送一員大官, 以圖良策如何? 若執迷不決而過四天, 遠人將回棹矣, 勿爲遲滯。 不幾箇月, 必値危國之患也, 以免後悔之地, 千萬幸甚。

연월일 아리망(亞里莽)[10]

수군 제독 대발(戴拔)[11]

年月日亞里莽水軍督戴拜||

이 소식이 중앙에 전해지자 분노한 대원군은 양이(洋夷)의 추적을 명하는 동시에, 이러한 궤변은 필시 천주교도의 내응(內應) 향도(嚮導)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국내에 남아 있는 천주교도를 더욱 엄중히 단속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편지에 대한 답장은 영종첨사 심효철이 우리는 이 따위 망령된 글을 받을 수 없다며 큰소리를 치며 편지와 함께 돌려보내버렸다.

우리나라 대원군(大院君) 합하께서는 지극히 공경스럽고 존엄한 위치에 계신다. 이런 글을 어떻게 전달하겠는가? 그래서 도로 돌려보낸다. 귀국과 우리나라의 사이에는 애당초 소통이 없었고 또 서로 은혜를 입었거나 원수진 일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 덕산(德山) 묘소에서 저지른 변고야말로 어찌 인간의 도리상 차마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또 방비가 없는 것을 엿보고서 몰래 침입하여 소동을 일으키고 무기를 약탈하며 백성들의 재물을 강탈한 것도, 어찌 사리상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우리나라 신하와 백성들은 단지 힘을 다하여 한마음으로 귀국과는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는 것을 다짐할 따름이다.

보내온 편지에서 좋은 대책을 도모하라고 한 것은 바로 사류(邪類)를 위하여 그들을 대신해서 좋은 말로 용서를 구하려는 것이 아닌가? 우리 나라는 바로 단군(檀君)과 기자(箕子)로부터 몇천 년 동안 이어온 예의의 나라인데, 어찌 이단에 유혹되어 그것을 없애버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위정척사(衛正斥邪)를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이것으로써 보면 우리나라의 비적 무리 가운데 법의 그물에서 빠져나간 자들이 당신네 배로 도망가서 백방으로 부추겨서 그렇게 된 것이다. 남의 부추김을 받아서 이유 없이 소동을 피우는 것은 귀국을 위하여 매우 좋지 못한 일이다.

몇 달 뒤에 설사 전선(戰船)이 온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도 방비할 대책이 있다. 대원군 합하께서 국정을 확고하게 잡고 계신 데 대해서는 내가 잘 알고 있다. 이제부터 표류해 오는 서양 각국의 배에 대해서는 먼 곳의 사람을 회유하는 도리로 대우하지 않을 것이니, 다른 말을 하지 말라. 이렇게 알라.

뭐 일단 말이 못 받는다는 퍼포먼스지, 그 내용이 실록에 남은 것으로 볼 때 편지의 내용은 조정에 전해졌고 대원군도 이 내용을 피꺼솟하며 읽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도굴에 가담한 천주교인들은 3년 후에 체포되어 모두 능지형을 당했다.
원래 대원군은 서방에 대해 많이 알지는 못했지만, 권력을 잡은 초기엔 개방에 그렇게까지 부정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병인양요, 오페르트 도굴사건, 신미양요가 연달아 터지면서 조선사회에서 서양에 대한 이미지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대원군 입장에서도 서양과 수교를 맺는 건 조선의 백성과 왕족을 능멸한 문화권 사람들과 손을 잡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정치는 명분이 매우 중요한데 결국 이 사건은 조선의 정치인들이 개방을 주장할 명분이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였다.

3. 목적


이들의 항해 목적은 뒷날 젠킨스가 이 사건으로 법정에서 진술한 바에 의하면
  1. 조선 왕국과 통상 조약의 체결을 교섭하는 것
  2. 조선의 사신 1명을 배에 태워 세계 일주 여행을 시키자는 것
  3. 이와 같이 하여 은둔국인 조선을 세계에 소개하자는 것
등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들은 조선인이 시신을 소중히 여긴다는 사실을 알고 관을 미끼로 조약을 체결하려 했던 것 같다.[12]
그러나 젠킨스가 법정에서 진술한 것과는 달리, 오페르트와 페롱은 남연군묘의 도굴 자체에 목적을 두고 방문했다는 의견 또한 존재한다. 페롱 신부는 상해로 도망친 조선인 천주교도 7명(최선인, 심순녀 등)에게 "조선인들은 선친의 분묘가 도굴당하는 것을 가장 수치스러워한다"며, 이를 이용해 천주교도들이 당한 박해를 복수하자고 제안한 것을 받아들여 애초에 조선 방문을 남연군묘 도굴에 목적을 두었었다는 주장이 있으며, 오페르트는 2차 조선 방문 때에 통상 요구가 거절된 것의 원인을 대원군의 쇄국 정책으로 생각했고, 쇄국 정책은 대원군 및 몇몇 정치인들만 지지하고 타 정치인들과 일반 민중들은 개항에 호의적이기 때문에 대원군의 권위만 손상된다면 통상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도굴을 감행했다는 주장이 존재한다.[13] 하지만 대다수 정치인들은 개항에 반대했고 심지어 지방의 양반들 또한 같은 의견이었다. 게다가 나중에 개항 후 민심을 보면 대다수 민중들도 개항을 달가워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 개항을 원하는 민중은 아마도 '''천주교도 중 극히 일부'''였을 것이다. 그 천주교도들 사이에서도 남의 무덤 파헤치는 인간들을 좋아할 사람은 극히 소수였을 것이고...
위의 기대가 말도 안 되는 것이, 적어도 왕조 국가의 국민들은 비록 어느 정도 불만은 있을지언정 그 질서에 대부분 순응한다. 사회 대다수가 현 정권에 순응하지 않는다면 혁명이나 쿠데타, 반란 등의 정권 전복 시도가 일어나니 말이다. 즉 자신들이 인정한 국가 수반이 같은 국가의 사람도 아니고 외국인에 의해 권위에 손상을 입는다면 일반적인 사람들의 반응은 '''"저런 예의도 모르는 쌍것들"'''이라는 게 일반적이다. 한 국가의 수반이 이유도 없이 모욕을 당한다면 일반적인 국가의 백성(국민)으로서는 정권 전복을 시도하고 있지 않는 한 아무리 그 수반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나라 자체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임이 상식이다.[14][15][16] 이것은 국가 권력의 기반이 왕에게서 나옴을 천명하는 왕정 국가나 사실상 국가 수반이 그 나라 자체인 독재정은 물론, 딱히 국가 수반 = 국가의 공식이 성립되지 않는 공화정 국가에서도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사실이다.[17]
또한 오페르트의 예상이 맞다고 쳐도, 권위의 손상에도 방법이 있다. 조선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인류 문명권에선 시신에 대한 훼손, 도굴, 장례 방해는 그 대상이 야만적이고 그보다 더한, 어지간히 천인공노할 고인모독으로 여겨지고, 도굴을 매우 야만적인 행동으로 보거나 '''천인공노할 범죄로 여겨진다.''' 괜히 동탁이 장안 천도 때 황릉을 도굴한 것으로 욕을 먹은 것이 아니고[18], 괜히 오운이 이미 죽은 철천지 원수의 시체마저 꺼내 매질한 게 아니며, 괜히 도굴꾼이 사회를 막론하고 욕을 먹는 것이 아니다. 오죽하면 바로 이 오페르트도, '''그 본국의 법정에서 기소되어 재판에 회부되었을 정도니까 말이다.''' 비록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방면되긴 하지만, 외국 땅에서 외국인에게 (그것도 자기들과 대등한 나라로 인정하지도 않던 나라에서) 저지른 범죄임에도 자국 법정에 기소되었다는 건 그 자체로 큰일이 맞다. 반대로 동탁이 도굴했던 황릉을 복구한 손견이 괜히 후한 최고의 충의지사라는 칭송을 받는 게 아니다. 그리고 고국원왕의 경우도 도굴했던 가해자인 전연이 무너지자 고구려로 도망친 모용위 등 모용씨 선비족들을 전진으로 다시 돌려보냈으며, 이를 계기로 고구려와 전진은 친해지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도 성종의 묘는 물론 성종의 시신이 일본군에게 불태워지는 수난을 겪자 선조는 물론 조선 백성들 모두가 분개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이 무너지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막부 세력을 잡자 조선과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목적에서 성종의 무덤을 도굴했던 범인들을 찾으려고 했을 정도였다. 물론 세월이 한참 지났을 시기라 진짜 범인을 제대로 찾긴 어려웠고, 결국 범인을 찾았다고 했으나 가짜 범인이었다. 물론 선조는 여전히 그 수모를 잊지 않았지만 당시 일본(에도 막부)의 반성하려던 마음이나 행보 등으로 인하여 끝내 용서하였고(일본에 끌려간 백성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려면 외교 관계도 필요했었고, 선조도 그 목적으로 일본과 다시 외교를 맺기로 하였다) 겨우 외교 관계를 다시 회복하면서 약 2백년간 조선 통신사를 파견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수교를 원한다며 어느 문명권에나 금기시되는 도굴을, 그것도 현 국왕의 친할아버지 무덤을 도굴하려 했으니 '''"OME 저것들은 사람이 아닌가벼"'''라는 반응이 안 나오는 게 이상할 노릇.

4. 처벌


한편 오페르트 일당은 이후 영사관으로 소환당해 조사를 받았으며, 그 뒤 미국 주도하에 이루어진 영사 재판에서 오페르트와 젠킨스가 모두 기소당했으나, 혐의 및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오페르트가 수군 제독을 사칭한 사실이 프로이센에 딱 걸려서, 오페르트는 본국으로 소환되어 다시 재판을 받고 실형을 언도받아 옥살이를 했다.
조선 정부는 오페르트(Ernesr Jacob Oppert) 일행의 만행에 대해 청나라 예부(禮部)에 자문(資文)을 보내 이 사건을 알리면서 (중략) 이 사건에 관계된 인물들의 국가의 영사들에게 통고하는 동시에 사건 해명을 요청했다. 청국 정부의 요청을 받은 상해(上海) 주재 프로이센 영사는 사건의 주모자 3인, 즉 오페르트, 페롱(Stanislas Feron) 신부, 젠킨스(Frederick Jenkins) 등은 프로이센 사람이 아니며 선주 묄러(Moeller)와 선원들은 전원 음모 사실을 몰랐다는 등의 해명을 했다.
한편 상해 주재 함부르크 영사는 오페르트의 혐의 사실을 시인하면서 그를 조사한 후 본국으로 송환하여 응분의 처벌을 받게 하겠다고 해명했다.88) 이후 '''오페르트는 본국에서 실형을 받아 감옥살이를 했다.'''89)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 호 사건 이후 조난선 구제 문제를 놓고 교섭함으로써 조선과 실질적인 관계를 맺고 있던 미국측의 총영사 슈워드(George F. Seward)는 북경(北京) 주재 미국 대리공사 윌리엄즈(Samuel W. Williams)와 상의한 후 '''젠킨스를 불법적이고 수치스러운 원정을 준비했다는 등 8개의 범죄 조항을 들어 주 상해 미국 영사 재판에 기소했다.'''90)
88) 盧啓鉉, <오페르트의 南延君墳墓 盜掘蠻行과 韓國의 措置>, 《年岩 梁俊模博士回甲記念論文集》1982년(《韓國外交史論》, 大旺社, 1984년, 148쪽).
89) 박일근, <젠킨스에 대한 駐上海美領事 載判 - 南延君 墳墓盜掘 事件에 關하여>,《釜山大學敎 論文論》11, 1970년, 272쪽의 註 39.
90) 젠킨스에 대한 駐上海美領事載判 과정 및 그 의의에 대해서는 박일근, 위의 논문, 261쪽 ~ 272쪽을 보라.
91) 오페르트 일당의 도굴 사건에서 페롱 신부의 역할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에른스트 오페르트 著, 韓沰劤 譯, 《朝鮮紀行》, 一潮閣, 1974년, 225~235쪽; 盧啓鉉, 앞의 논문, 139쪽 ~ 142쪽.
출처: 연갑수, <대원군 집권기 부국강병정책 연구>, 서울대 출판부, 2003년, pp.109-110

5. 기타


도굴사건을 일으키기 전에는 오페르트와 근처 주민들과의 사이는 좋은 편이었다. 폭풍이 온다고 조선인들이 미리 알려주어 같이 비를 피하거나 한 적도 있다. 그의 마닐라인 부하 중 하나가 소를 훔치는 바람에 주민들이 분격한 일이 있었는데 배상을 통해 원만하게 해결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사건이 터지면서 그는 악랄한 이름이 되어버려 1903년 71살로 죽을 때까지 다시는 조선에 들어오지 못했다. 친할아버지 무덤을 도굴하려 든 자를 고종이 좋게 봤을 리가 없다.
당시 관련된 이야기를 보면 묘에는 대략 석회가 1m(!) 정도의 두께로 다져진 회곽이 있어 드릴을 동원해도 뚫기 어려웠다 하며[19], 풍수지리와 관련된 설화에서는 불을 붙이려 하자 바람이 불어나와 불을 꺼 버려 결국 똥을 들이부었다고도 한다. 조선 시대 당시 관과 묏자리에 물이 차는 것은 좋지 않게 여겼기 때문에 성리학과 주자가례에 입거해 관에 물이 들어가지 못하게 석회 자체를 두껍게 다져 회곽을 만들어 관을 안치한 후 다시 석회를 덮는게 일반적이었다. 흔히 회곽묘나 회격묘라고 하는 묘소 조성장식이 이것이다. 간혹 발견되는 조선 시대 미라도 관곽에 바른 석회가 굳으면서 엄청난 열과 함께 수분을 흡수하고, 물의 침투를 막아서 가능했던 일이다. 오페르트는 편지에서 '뚫으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뚫을 수 있다'는 식으로 허세를 부렸으나, 애초에 그들은 처음 석회층에 도달했을 때 석회가 아니라 강철이 묘를 막고 있다고 착각했다.[20] 애초에 수군 제독을 참칭한 것만 봐도 허언증 기질이 있었던 듯.
정작 풍수지리명당은 이 무덤에서 백여 보 위에 있으며, 이 자리는 그다지 좋은 자리가 아니라고 한다. 묘가 도굴당하고 나중에 대도 끊겼으며 나라도 망한 자손을 두었으니 결과적으로 좋지는 않았다. 흥선대원군이 남연군의 묘자리를 알아볼 때 지관이 "여기 명당이 두 군데 있는데 한 곳은 자손 가운데 2대에 걸쳐 황제가 나올 자리이고, 다른 한 곳은 자손이 만대에 걸쳐 재물복을 누릴 자리"라고 하자, 흥선대원군은 주저없이 전자를 선택했다는 야사도 있다.[21]
이후 흥선대원군도 명당자리에 몸을 눕히게 되었으나, 1906년 일제에 의해 이장되었다. 이후 1966년에 한 번 더 이장.
북한에서는 이 사건을 미제의 만행으로 대대적으로 소개하고 있다(물주가 '''미국인''' 젠킨스니까). 월북 화가이자 고구려 고분 벽화 재현의 대가 정현웅의 작품 중 "미제의 남연군묘 도굴"이라는 작품이 있다.
오페르트는 이후 조선에서 있었던 일을 회고록으로 출판했다.# 우리나라에선 <금단의 나라 조선 기행(Ein verschlossenes Land, Reisen nach Corea)>이란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 발췌독 하기
이 회고록의 내용을 보면 오페르트가 의외로 지적 능력이 높은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역사와 정치, 군사 제도까지 제법 자세하게 정리해 놨다. 조선의 건국년도를 1397년으로 오기하거나[22], 조선 시대 3포의 개항을 마치 '''일본이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킬 권리를 얻은 것(...)'''처럼 오해하는 등 오류도 많지만 서양인이라는 신분과 시대적 한계를 감안하면 대단한 수준이다. 또한 조선의 군사 제도가 겉보기에만 그럴싸할 뿐 형편없다며 매우 깠는데, 당대 상황을 생각해보면 그럴 법도 하다(...).[23]
회고록에선 조선인이 사람이 좋다느니 야만인이 아니라는 등 의외로 조선을 긍정적으로 묘사한다. 심지어 '''"조선인은 일본인이나 중국인보다 키가 크고 피부가 흰 것이, 백인이나 유대인의 잃어버린 10지파의 후예일 수도 있다"'''(...)는 주장까지 실려있다. 조선인이 일본인이나 중국인보다 피부가 희거나 키가 크다는 표현은 이사벨라 버드 비숍과 몇몇 선교사들의 여행기 또는 서신에서도 종종 나오므로 오페르트만의 입발림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24]
이후 명문가의 조상묘를 파헤쳐서 조상 유골을 인질로 몸값(?)을 요구하는 유사 범죄 행위가 자주 일어나긴 했는데, 오페르트의 도굴을 흉내낸 유사 범죄는 아니다. 조상묘 도굴을 통한 몸값 요구는 훨씬 이전부터 있었던, 매우 유서 깊은 범죄다. 구한말에는 화적떼가 몰려들어 6대조 할아버지 유골을 훔쳐내어 돈내고 찾아가라고 산 위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는 목격담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얌전히 관을 통째로 퍼가면 그나마 다행인데 관뚜껑을 열고 썩은 해골의 목만 베어가서 찾아가라고 소리질러대는, 후손 입장에선 어그로 팍팍 오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오페르트는 이 사건 이후 '''자신의 모국인 프로이센 언론으로부터''' 나라 망신이라고 큰 비난을 받았다. 더군다나 그가 유대계였기 때문에 유대인 전체를 향한 비난으로 이어졌다. 당시 프로이센은 물론이고 유럽 전체에 반유대주의가 팽배했기 때문에 더했다. 그리고 아무리 제국주의, 인종주의, 사회진화론이 판치던 시절이라 하더라도, '''왕실에 대한 도굴'''과 '''시체 훼손'''은 자기들도 왕실이 있던 당시 프로이센인들이 느끼기에도 '''문명인답지 않은''' 지나치게 과격한 행위였다.
공범인 페롱 신부는 병인박해 때 순교한 다블뤼 주교의 뒤를 이어 장상이 된 리델 주교의 명에 따라 조선에 오지 못하고, 1870년에 인도 퐁디셰리 교구로 임지가 바뀌어 1903년에 선종할 때까지 머물렀다(출처).

6. 관련 문서



[1] 현재의 예산군 서부(덕산면) 지역이다.[2] 페롱 신부는 펠릭스 리델, 알퐁스 칼레(1833~1884)와 함께 병인박해 때 살아남은 선교사 중 한 명이었고, 함께 청나라로 탈출한 뒤 조선 천주교도들이 도륙되는 꼴을 볼 수 없다며 대원군을 협박할 무언가를 찾던 중 오페르트와 의기투합했다. 가톨릭 사전 사이트에서는 페롱에 대해 부정적인 건 죄다 언급하지 않고 소개한다(#).[3] 리델은 조선대목구 감목이 되었고, 칼레는 프랑스로 돌아가 시토회에서 여생을 보냈다. 페롱은 도굴사건 이후인 1870년에 인도 퐁디셰리 교구로 옮겨가 1903년에 선종할 때까지 사목했다(출처).[4] 충청남도 당진시 신평면 매산리에 있는, 행담도휴게소의 그 행담도 맞다. 행담도를 비롯한 현 당진시 동부 지역(합덕읍·송악읍·신평면 등)은 구한말까지는 당진이 아닌 홍주 관할이었다.[5]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구만리. 꽤 내륙 쪽인데, 당시는 삽교천 방조제도 없고 삽교천 정비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때라 밀물을 타고 여기까지도 비교적 큰 배가 드나들 수 있었다.[6] 현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7] 서해의 썰물로 인해 삽교천의 물이 빠져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수위가 낮아지면 배를 띄울 수 없기 때문.[8] 이 과정에서 오페르트 일당은 영종진을 포위하고 통상하자고 무력 시위를 했는데, 영종첨사 심효철이 포수들을 데리고 기습적으로 총격을 가해 필리핀 사람 둘이 죽고 나머지는 죄다 달아나버렸다. 그 덕에 심효철은 특진되고 두둑한 상을 받았으며 마닐라 출신의 죽은 필리핀인 2명은 모두 서울에 효수되었다.[9] 실록에는 편지 겉봉투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고 한다. 한자 문화권 호칭에 무지한 외국인이 보낸 글임을 감안하더라도 다소 무례한 표현인데, 조선 시대 대원군을 부르는 일반적인 칭호는 좌하보다 몇 단계 위인 저하합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좌하'는 부모나 스승 등 웃사람에게 보내는 편지글에 상투적으로 들어가던 경칭이었다. 요즘으로 친다면 '귀하'라는 표현과 비슷하다.[10] 프랑스어로 독일을 뜻하는 단어 Allemagne(알마뉴)에서 음차한 표현.[11] 오페르트가 쓰던 한자 이름.[12] 정확히 1526년 전의 고구려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전연모용황이 쳐들어와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훔쳐갔고, 돌려주는 조건으로 '고구려가 우리의 신하국이 되어라'고 강요했던 것. 결국 고구려는 굴복했지만, 전연이 전진에게 무너져 모용황의 아들인 모용평(慕容評)이 도망쳐오자 고국원왕은 모용평을 밧줄로 묶어 전진으로 배달해버렸다. 전연이 있었던 곳에 다시 세워진 후연도 고구려를 털었다가 광개토대왕에게 제대로 보복당했고, 결국 후연의 내분을 틈타 고구려 왕족 출신인 고운(高雲)모용희를 죽이고 북연을 세우고 나서야 원한 관계가 끝이 난다.[13] 노계현, 〈오페르트의 南延君墳墓 盜掘蠻行과 韓國의 措置〉[14] 이는 현대에도 마찬가지인데, 만약 당신이 아무리 현 정권의 대통령이 마음에 안 든다 해도, 그 대통령의 부모의 무덤이 도굴되었다는 황당한 소식을 접한 순간 딱하고 분한 생각이 드는 건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당연한 것이다. 더군다나 그 당시 대원군은 여러 개혁 정책으로 경복궁 중건을 빼면 백성들의 호평을 듣고 있었다.[15] 이는 후에 을미사변에서도 재현된다. 당시 지식인층에서 명성황후는 좋지 못한 평가를 받고 있었고 주변의 민씨 일가는 백성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었으나 을미사변이 일어났을 땐 남녀노소 개층을 가릴것 없이 전 백성이 분노했다.[16] 최남선이 일본 유학갔을때 학생들이 학교에서 상영하는 연극보러 갔을때 조선왕을 분한 배우가 일왕에게 분한 배우에게 삼배구고두하는 장면에 관람중이였던 분노한 조선유학생들이 연극무대를 때려 엎었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또 다른 조선 유학생들은 이런 굴욕 받으면서도 공부할꺼냐? 하여 항의의 표시로 집단 자퇴하였고 귀국하였다. 최남선도 어쩔 수 없이 자퇴하고 귀국하였다.[17] 그 사례로 옛날 초 회왕이 간신배의 말에 속아 진나라에 가다가 귀국하지 못하고 억류되고 진 소왕에게 땅을 내놓라고 협박당하고 신하국의 군주로 푸대접을 받는 등 굴욕을 당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다른 나라의 군주를 함부로 억류하고 그처럼 굴욕과 수모을 주었으니 아무리 당시 시대가 전국 시대이면서 진나라가 강대국이였고 그리고 초 회왕이 어리석은 암군이었어도 초나라 백성들이 자신의 국가 원수에게 다른 나라 군주가 할지를 강요하며 억류시키고 그런 모욕과 수모를 준 진나라의 횡포에 분노하고 증오했던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초 회왕이 원통하게 죽자 초나라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동정할 정도로 통곡하였다.[18] 아예 18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낙양이나 장안에서 이 얘기 나오면 욕설의 향연이 펼쳐진다'''. 즉, 이 지역에서 "동탁 만세!"를 외치는 것은 남한에서 "김일성 만세!"를 외치는 것과 다를 바 없다.[19] 현대에도 이장이나 발굴 시 이런 회곽이 있을 경우 굴삭기와 소위 '''뿌레카'''라 부르는 브레이커를 동원해 발굴을 진행한다. 당연하게도 삽질로는 이빨조차 들어가지 않기 때문.[20] 영문 위키백과에서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마침 관련 설화에도 회곽 위에 쇳물까지 녹여부었다는 얘기가 있다.[21] 이 야사를 모티브로 제작된게 영화 명당이다.[22] 그래봐야 실제와 고작 5년 차이다.[23]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보면 알겠지만 조선 군대는 시대에 뒤쳐지는 정도가 점점 심해지고 있는 막장 상황이었다.[24] 사실 한국인들은 북방계 민족, 그 중에서도 예맥족의 영향을 받아서 일본인, 중국인들보다 평균적인 부분에서 키가 크거나 피부가 하얗게 나온다는 의견이 있기는 하다. 물론 한국인들이 전부 그런 것은 아니고 백인에 가까운 것은 더더욱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