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틀란티스

 



1. 개요
2. 전해지는 내용
3. 형태와 특징
4. 존재 여부
4.1. 와전 설
4.2. 플라톤의 프로파간다
4.3. 아주 거짓일 가능성은 낮다
5. 가설
5.2. 북해 도거랜드 설
5.4. 모로코 수스마사(Sous Massa) 설
5.5. 모리타니 사하라의 눈 설
5.6. 기타


1. 개요


'''Ἀτλαντίς / Atlantis'''
과거 존재했으나 바다 속에 가라앉았다고 전해지는 전설상의 땅. 이름의 기원은 이아페토스아시아 사이에서 태어난 티탄 아틀라스로, 아틀란티스의 지배자들은 아틀라스의 자손이기에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1]
서구에서는 무 대륙과 함께 '사라진 지역' 전설로 유명하다. 이러한 이야기들에 대한 호기심은 훗날 유럽인들이 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 대륙 등에 이르는 등 미지의 남방대륙[2]과 더불어 모험 및 대항해시대, 신항로 개척 등에도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에는 미스터리 쪽에서 초고대문명설로 소비되는 경우도 잦다.

2. 전해지는 내용


πάντων δὴ πρῶτον μνησθῶμεν ὅτι τὸ κεφάλαιον ἦν ἐνακισχίλια ἔτη, ἀφ᾽ οὗ γεγονὼς ἐμηνύθη πόλεμος τοῖς θ᾽ ὑπὲρ Ἡρακλείας στήλας ἔξω κατοικοῦσιν καὶ τοῖς ἐντὸς πᾶσιν: ὃν δεῖ νῦν διαπεραίνειν. τῶν μὲν οὖν ἥδε ἡ πόλις ἄρξασα καὶ πάντα τὸν πόλεμον διαπολεμήσασα ἐλέγετο, τῶν δ᾽ οἱ τῆς Ἀτλαντίδος νήσου βασιλῆς, ἣν δὴ Λιβύης καὶ Ἀσίας μείζω νῆσον οὖσαν ἔφαμεν εἶναί ποτε, νῦν δὲ ὑπὸ σεισμῶν δῦσαν ἄπορον πηλὸν τοῖς ἐνθένδε ἐκπλέουσι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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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 first of all we must recall the fact that 9000 is the sum of years since the war occurred, as is recorded, between the dwellers beyond the pillars of Heracles and all that dwelt within them; which war we have now to relate in detail. It was stated that this city of ours was in command of the one side and fought through the whole of the war, and in command of the other side were the kings of the island of Atlantis, which we said was an island larger than Libya and Asia once upon a time, but now lies sunk by earthquakes and has created a barrier of impassable m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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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티아스》 108e 부분''' 그리스어 영어1 영어2

이 땅에 대한 이야기는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의 저서 《크리티아스》에 처음으로 언급된다. 아틀란티스 전설을 담고 있는 《크리티아스》는 원래 《티마이오스[3], 《크리티아스》, 《헤르모크라테스》 3부작 중 2부로 계획된 저서이다. 《티마이오스》는 그가 제시한 이상 사회의 모습과 합치되는 우주관을 펼치는 저서이고[4] 《크리티아스》는 그에 따른 이상 사회의 모습을 실제로 제시해 보이려는 의도로 기획되었다. 하지만 완성된 것은 1부 《티마이오스》뿐이며, 2부인 《크리티아스》는 중간에서 끊겼고 3부 《헤르모크라테스》는 아예 집필조차 하지 못했다. 이는 노년의 플라톤이 최후의 대작인 《법률》의 집필에 전념하고자 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플라톤은 80세에 사망했는데, 《법률》은 이때 내용상으로는 완결되었으나 퇴고 과정을 거치지 못한 상태여서 플라톤 생전에 출판되지 못했다.
《크리티아스》에서 플라톤은 '자기 가문의 할아버지였던 솔론이 말년에 이집트에 갔을 때 만난 고위 사제와 세계의 종말과 고대 문명에 대한 흥미로운 대화를 나누었으며, 솔론이 그에 대한 저술을 하려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솔론의 전언만이 가문 대대로 내려왔다'고 서술한다. 솔론과 플라톤은 같은 가문 출신이라, 집안에 전해진 솔론의 전언을 150년쯤 뒤에 태어난 플라톤이 듣고 기록했다는 것.
플라톤이 전하는 솔론과 사제의 대화는 아테네인들은 과거의 역사에 대한 기억이 전무하다는 사제의 비판으로 시작된다. 사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오래된 기록'이 이집트에 존재하며, 이런 '고귀한' 기록은 자신들의 신전에 보관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덧붙여 훗날 이 기록들을 놓고 솔론과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기를 원한다고 한다. 사제의 말에 따르면, '세계는 여러 시기 동안 여러가지 방법으로 종말을 맞은 바가 있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로 인한 멸망'이지만[5], 그 외에도 멸망의 역사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다고 말하면서 훌륭한 문명이 물로 멸망한 예를 드는데, 그것이 바로 아틀란티스다.

3. 형태와 특징


[image][image]
아틀란티스 섬에 대한 묘사는 특이하게도 동심원 형태의 여러개의 외섬과 하나의 중앙섬이 바다와 연결된 원형 운하에 둘러싸인채 하나의 운하로 중앙 섬까지 연결되었다고 서술된다. 전체 섬은 9000 m인데, 각 외섬과 운하의 폭은 운하와 안쪽의 섬이 같아서 각각 530 m, 350 m, 180 m, 중앙 섬은 450 m라고 한다. 이 특징적인 동심원 구조 묘사 덕분에 아틀란티스 상상도는 대동소이한 편이다.
포세이돈이 수호하는 대륙으로 오리칼쿰이라는 귀금속이 특산품이었으며, 다른 귀금속도 매우 풍부했다. 그러나 아틀란티스의 탐욕과 사치, 교만이 심해져, 자신들의 강성한 국력을 믿고 아테네를 침략하지만, 크게 패배했다. 이에 분노한 포세이돈이 화산을 폭발시키고 홍수를 일으켜서 매장시켰다고 전해진다.

4. 존재 여부


그렇게 거대하고 찬란한 문명을 지닌 것에 반해 아틀란티스에 관한 언급은 플라톤 전후 어떤 자료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실제로 《크리티아스》에 아틀란티스가 (플라톤으로부터) 9천 년 전, 즉 기원전 9300년 무렵에 아테네 침공 후 바다에 가라앉았다는 등, 설정이 현실적이지 않다. 가장 유구한 역사를 지닌 문명권인 이집트에서조차 이때는 아직 거대 문명국이 등장하지 않았다.[6] 9000년이라는 숫자는 오역이라는 주장도 있기는 하다. 아무튼간에 문자 그대로 9000년 전에 그런 도시가 있을 가능성은 낮은 편이다.
현대의 연구에 따르면 실제로 솔론이 말년에 이집트를 견학한 것은 사실로 밝혀졌지만, 거기서 이집트의 고위 사제와 아틀란티스에 대한 담론을 나눴다는 것을 시사하는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플라톤의 기록에 대해선 동시대의 아리스토텔레스도 '허무맹랑하다'는 비판을 했으며, 《영웅전》을 집필한 역사가 플루타르코스도 플라톤의 기록의 신뢰성에 대해 의구심을 표출했다. 단, 두 사람 모두 플라톤의 모든 기록의 진실성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3세기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7]에서 학자들 사이에서 아틀란티스가 실존했는지를 주제로 토론회가 열린 적이 있었는데, 여기서도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고 전해진다. 고대의 문서들이 소실되기 이전 시대 학자들조차도 아틀란티스에 대한 단서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결론은 '정답을 알 수 없다.'이다. 플라톤의 글을 제외한 아무런 증거도 없다. 현대 시대에 이르기까지도 아틀란티스의 존재는 부정되었지만, 19세기에 이르러 아틀란티스보다도 더 허무맹랑한 전설로 간주되던 트로이가 발굴되어 실체가 밝혀지고, 뒤이어 역시 전설상의 국가로 전해지던 아가멤논의 황금 미케네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발굴되자, 아틀란티스 연구에 불이 붙었다.

4.1. 와전 설


9000년이 아니라 900년인데 번역 과정에서 오역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리스인들이 100을 뜻하는 이집트 문자 '감겨진 로프'를 1000을 뜻하는 이집트 문자 '연꽃'으로 착각하였다는 주장인데, 실제로 아틀란티스의 평야의 크기(355km x 533km)나 아틀란티스 평야를 둘러싼 운하의 길이(1만 스타디온 : 약 1776km)는 지나치게 크다. 전부 한 자릿수가 틀린 것이라면 납득이 가는 수치가 된다. 이에 대해, 산토리니섬의 함몰된 부위의 크기에 100을 곱하면 플라톤이 주장한 아틀란티스 크기와 일치한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그러나 로프와 연꽃이 착각할만큼 비슷하게 생기지 않았다는 반론도 있다. 이쪽은 이집트의 연대 계산법이 달을 기준으로 하는 것과 해를 기준으로 하는 것으로 이루어져있는데, 솔론이 개월수를 햇수로 잘못 알아들었다는 것이다. 이 경우 아틀란티스의 멸망연대는 기원전 9500년에서 기원전 1340년으로 바뀌어 납득할 만한 수치가 된다. 다만 이쪽도 문제가 있는데, 그렇다면 아틀란티스가 멸망하기 전 상당기간의 역사를 이집트나 아시리아, 수메르, 히타이트, 바빌로니아 등 수많은 동방 문명과 공유하고 있었다는 결과로 이어지나 해당 문명권에서 아틀란티스에 대한 행정적, 경제적, 역사적 문자 기록이 거의 전무하다.
그 밖에도 수치가 너무 뻥튀기 된 게 아니냐는 주장이 전해진다. 사실 아틀란티스의 인공 평야의 넓이나 운하, 수로의 길이, 깊이 등은 괴이할 정도로 거대하다. 평야를 둘러싸고 있는 운하의 길이만 1700 km가 넘는데, 이는 서울-부산 간 거리의 4배가 넘는다. 이 정도 수로를 굴착한 사람들이 아테네에 패배했다는 것은 영 믿기지 않는 일이다. 약 1/100 정도라고 가정하면 산토리니 섬이 플라톤의 묘사와 거의 비슷한 사이즈이기에 숫자가 잘못 전해진 게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

4.2. 플라톤의 프로파간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나 조지 오웰의 1984처럼, 플라톤이 당시의 아테네 사회를 비난하기 위한 목적으로 여러 사건들과 멸망에 대한 전설 등을 조합해 아틀란티스라는 그럴싸한 가상의 나라를 만든 프로파간다라는 주장이다.
플라톤은 평생 아테네의 해군을 상당히 비난하던 사람이었다. 아테네는 군대가 중장보병에서 해군 중심으로 바뀐 상황이었는데, 해군 갤리선의 노잡이를 충당하기 위해 무산자(無産者)들을 동원해야 했고, 이 무산자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얻게 되어 민주주의가 성립된 상황이었다. 그리고 플라톤은 이 민주주의를 겨냥해 '아테네가 '악덕'에 차 있다'고 비난할 정도로 평생동안 아테네민주주의와 해군을 부정적으로 바라봤다.
이런 배경 속에서 아틀란티스 전설이 담긴 플라톤의 저서《크리티아스》는 反민주주의 정서를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관련성들을 보여준다.
  1. 이 《크리티아스》의 제목은 플라톤의 5촌 당숙인 '크리티아스'의 이름을 딴 것인데, 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말기에 스파르타와 결탁해 30인 참주가 되어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해군을 해체하며 무산자들을 탄압하다가 그 반발로 일어난 민주주의 혁명에 죽은 독재자였다. 이런 사람의 이름을 따 제목을 지었다는 점에서 목적성을 의심할 수 있다.
  2. 크리티아스 이후 민주주의를 회복한 아테네는 스파르타와 맞서기 위해 해군을 재건하려고 한다. 페리안드로스는 부유층 1200명을 모아 갤리선 함대를 구축하는 비용을 부담시키려고 했는데, 어째서인지 이야기 속 아틀란티스의 함대도 딱 1200척이다.
  3. 아테네의 반격에 몰리던 스파르타의 최후 잔존 함대는 코린토스만灣 남부 헬리케의 오래된 포세이돈 신전 앞에서 지진해일에 휩싸여 전멸한 일이 있었다. 포세이돈의 분노 어쩌고 하는 아틀란티스 몰락 이야기가 연상될 수 있는 부분.
  4. 플라톤이 태어나던 무렵 아틀란테라는 이름의 섬이 지진해일로 두 동강이 난 사건도 있었다. 스파르타 함대의 전멸과는 별개로 아틀란테라는 섬이 아틀란티스가 물에 잠겨 사라졌다는 이야기의 모티브가 되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기타 자잘한 부분들로 비추어봤을 때, 아틀란티스 이야기가 플라톤이 지어낸 허구이고, 특정 디테일들이 플라톤 개인의 反민주주의 성향을 시사하거나, 그러한 목적성이 없더라도 플라톤이 줏어들은 이야기들로 짜깁기하여 만들어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아틀란티스 프로파간다설'의 요체이다.

4.3. 아주 거짓일 가능성은 낮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아틀란티스 이야기가 프로파간다나 날조에 불과하다는 주장에 반대한다. 反민주주의 선동이 진짜 목적이었다면 그냥 기존의 신화를 변형시키거나, 단순한 전설에 대한 기록보다는 당대에 인기를 끌었던 시나 희곡으로 각색하는 편이 훨씬 유용하다. 그러나 플라톤은 아틀란티스 이야기를 역사적 진실이라고 주장하면서 굳이 자기 집안의 솔론과 크리티아스의 이름을 걸고 사실이라 강변했다. 물론 두 명 모두 이미 사망한 시점이므로 작정하고 조작하는 것이면 이름을 팔아먹는 데에 어려움은 없었겠지만, 과연 그렇게까지 사기를 쳐야 할 이유가 있었는지는 의문인 것이다.
게다가 플라톤은 이런 종류의 사기를 친 전력이 없다. 심지어 플라톤은 그런 식으로 허구를 창작해내는 행위 자체를 '진실을 속이는 거짓'이라고 비난하며 혐오했고, 그 연장선에서 아예 '시인 추방론'을 주장했는데, 고작 효과도 불분명한 선동을 목적으로 자신이 혐오하던 창작 내지 날조를 했다는 것은 내로남불에 가까운 행위로 납득하기 어렵다.
또한 '아틀란티스'에 대한 문헌은 별로 없지만, '헤라클레스의 두 기둥 너머 거대 국가'에 대한 전설은 여러 문명을 막론하고 여기저기 전해졌기 때문에 고고학 연구자들 사이에서 아틀란티스는 상당히 진지한 주제로 받아들여진다. 왜냐하면 정말 아무 것도 없었다면 그 근방의 넓은 범위에서 이런 전설이 퍼져있을 당위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신뢰도가 떨어지는 고대 시대의 전설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넓은 범위의 통일되지 않은 지역에서 제각기 비슷한 이야기가 전승될 가능성은 일반적으로 크지 않다.
따라서 아틀란티스 함대가 1200척이니 하는 일부 디테일은 다른 사건들 따위에서 따왔을 수도 있으나, 솔론이 전해들었다는 '오래 전 융성했던 헤라클레스의 기둥 너머의 어느 세력'에 대한 전승 그 자체는 거짓이 아니리란 게 통설이다.

5. 가설


아틀란티스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지역 내지는 그 근처에 있는 국가들의 경우 국가에 따라 지지하는 가설에 차이가 있다. 대체로 에게 해 미노아 문명 설은 그리스·터키[8]·키프로스에서 지지를 받고, 북해 도거랜드 설은 영프독을 포함한 서유럽권 국가에서 지지를 받는다. 스페인 타르테소스 설은 스페인에서, 모로코 수스마사 설은 모로코에서, 모리타니 사라하의 눈 설은 모리타니에서 지지를 받는다.

5.1. 에게 해 미노아 문명


그러나 아틀란티스의 위치에 관한 여러 가지 주장들 중에는 매우 설득력 있는 논문으로 발표된 것도 많은데, 그 대표적인 것들 중 하나는 아틀란티스가 지중해에서 지진으로 그 일부가 궤멸된 테라 섬(현재의 산토리니 섬)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1969년, 그리스의 고고학자 안젤로스 갈라노풀로스(A. G. Galanopoulos) 교수가 처음으로 제기했다.[9]

그에 의하면, 아틀란티스는 미노스 문명의 일부이며, 기원전 1500년 에게해 남부 퀴크라데스제도의 테라 섬에서 일어난 화산 폭발로 궤멸되었다. 그 화산 폭발은 그리스의 섬들 대부분과 그리스 동부 및 크레타 섬 북부 연안 지대에도 타격을 주었다고 한다. 플라톤도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 폭발은 아테네에도 분명 심대한 피해를 입혔을 것이다. 플라톤은 9000년 전 아틀란티스가 아테네와 전쟁을 했다고 기술했지만, 그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가 그렇게 오래전부터 존재했을 리 없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그 시기는 플라톤보다 9000년 앞선 시기가 아니라 900년 앞선 시기인 기원전 1400년경으로, 미노스 문명이 영화를 누리고 있었던 시대와도 일치한다.

또, 그들은 아틀란티스가 "헤라클레스의 기둥의 바깥쪽에 있는 큰 섬"이라는 기술이 그것이 대서양에 존재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전까지는 헤라클레스의 기둥이 지브롤터 해협을 가리킨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장소, 즉 헤라클레스의 기둥으로 불리는 구역이 존재했던 것으로 판명되었다는 것이다. 그 구역은 다름 아닌 고대 그리스의 미케네이며, 테라 섬은 그 미케네 바깥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게다가 플라톤은 아틀란티스를 가리켜 어디에서도 '대륙(ēpeiros)'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으며 어디까지나 큰 '섬(neos)'이라고만 표현했다.(《티마이오스》 24e). 그것이 '리비아와 아시아보다 크다'는 표현이 나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시의 지리관에 근거한 것이므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대륙에 필적할 만큼 크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근거는 없다는 것이다.

테라 섬이 궤멸한 것은 아테네의 입법가 솔론이 살아 있었던 시기보다 약 900년 앞선 시기이다. 9000년 전은 아니라는 말이다. 여기서 갈라노풀로스는 기록자들이 숫자를 잘못 써 10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의 필사자들은 100을 나타내는 이집트의 문자 '감겨진 로프'를 1000을 나타내는 이집트의 문자 '연꽃'으로 혼동했다고 한다. 확실히 플라톤이 가리키는 숫자는 모두 비정상적으로 크다. 아틀란티스 평야를 둘러싼 운하의 길이 1만 스타디온(약 1776km)은 현대 런던 둘레의 20배나 되고, 또 운하의 폭과 깊이는 각각 약 90m와 30m 정도로 너무 거대하다. 페리클레스 시절 그리스 선박의 크기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폭과 길이가 각각 9m와 3m인 규모의 운하가 훨씬 현실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가로 세로 각각 355km X 533km로 기술된 직사각형 모양의 평야의 크기도 가로 세로 각각 36km X 53km가 되는 셈이므로 섬의 규모는 훨씬 작아진다. 실제로 현재 산토리니 섬에서 함몰된 부분에 100을 곱하면 플라톤이 기술한 아틀란티스 대륙의 둘레와 정확히 일치한다. 또 니집트에는 해를 중심으로 연대를 산하는 방법 외에 달을 중심으로 연대를 계산하는 방법도 있었으므로, 이런 점을 고려하면 9000년은 9000개월일 수도 있다. 솔론이 개월 수를 햇수로 잘못 생각했다는 것이다. 요컨대 솔론이 활동하던 기원전 90년에서 9000개월(750년)을 거슬로 올라가면 기원전 1340년이 되는데, 이는 결국 산토리니 섬에 발달해 있었던 미노스 문명이 멸망한 시기와 매우 근접해 있다. 실제, 당시 미노스인들은 해상 교역으로 막대한 부를 누리고 있었고 궁전을 장식하는 릴리프나 벽화 및 토기의 도안에는 플라톤이 아틀란티스에 대해 기술한 것과 유사한 수소 사냥 광경이 그려져 있었다. 당초 산토리니 섬은 미노스 문명과는 동떨어진 변경의 땅으로 여겨진 탓에, 낙원으로 묘사된 아틀란티스와는 많이 어긋난다는 점에서 이러한 주장에 회의적인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1967년 그리스의 고고학자 마리나토스(S. Marinatos)는 산토리니 섬에서 크노소스에 버금가는 고대 청동기 시대 유적을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아틀란티스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것과 유사한 환상 수로와 직선 수로가 이곳에서도 역시 존재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처럼 많은 학자들이 미노스 문명은 아틀란티스인이 건설했다는 주장을 지지하고 있어 아틀란티스 섬이 테라 섬이라는 주장은 나날이 신빙성을 더해 가고 있다. 어쨌든 산토리니 섬의 궤멸이 아틀란티스 전설의 토대가 되었다는 것에는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주장을 받아들이는 데는 여전히 심각한 의문들이 남아 있다. 고대 그리스 필사자들이 이집트 숫자를 오해하기에는 100과 1000을 나타내는 상형문자가 시각적으로 너무 다르다는 것이다. 또, 1977년에 독일 과학자들이 화산 분출물들을 분석한 결과, 산토리니 섬의 폭발은 크레테에 거의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최근에는 미노스 문명이 멸망한 것은 지진 때문이 아니라 지진이 일어난 후 약 1세기 뒤에 있었던 미케네군의 공격 때문이라는 주장도 강력히 제기되고 있다.

《크리티아스》 이정호 옮김 2판 1쇄 112-115쪽

크레타 섬의 미노아 문명이 멸망할 때 화산 폭발이 일어났다는 설에서 착안해 아틀란티스 이야기가 미노아 문명 이야기라는 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미노아 문명이 산토리니 섬의 테라 화산 분화와 그에 이어진 미케네인들의 공격으로 멸망했으며, 이것이 아틀란티스 이야기의 모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20세기 초부터 대두된 학설로서 비교적 최근까지 가장 통설적 견해의 지위를 가져왔다.
이는 현재에도 유력한 학설 중 하나이긴 하지만, 실제 화산 폭발과 연도가 맞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테라 화산의 분화 연도를 여러 기관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독립적으로 조사한 결과 95%의 확률로 기원전 1627년~1600년이라는 연대를 얻었다. 그러나 미노아 문명은 기원전 3000년 이전에 시작되어 기원전 1200년 이후까지 계속 이어졌으며, 유명한 크노소스 궁전 시대는 테라 화산의 분화보다 최소한 180년 후인 기원전 1420년에 시작되어 기원전 1200년까지 이어졌다.
더구나 미케네인들의 공격은 크노소스 궁전 시대가 시작되는 기원전 1420년 무렵이다. 즉 미케네인들이 크레타섬을 공격한 것은 화산 폭발로부터 최소한 180년 이상 지난 후의 일이고, 미노아 문명이 전성기를 맞은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실제로 화산재는 크노소스 궁전 '''아래'''의 지층에서 발견되었다. 즉 화산 폭발과 미케네인들의 침공이 미노아 문명을 멸망시킬 만한 타격을 주지 못했으며, 단지 미노아 문명이 전성기를 맞기 전에 있었던 짧은 에피소드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크레타는 그리스인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지역이라는 점이다. 솔론이 크레타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곳이 크레타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아틀란티스 운운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또 한편으로 '헤라클레스의 기둥'은 대개 지브롤터 해협으로 인지되는데 크레타 섬은 지브롤터 해협과는 연관시키기 어렵다.

5.2. 북해 도거랜드 설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바다에는 '도거랜드(Doggerland)'라고 불리는 바닷속의 높은 평지와 같은 지형이 있다. 해수면이 지금보다 훨씬 낮았던 신석기 시대에 영국과 프랑스는 육지로 이어져, 현재의 아일랜드부터 브리튼 섬과 프랑스, 네덜란드에 이르기까지 넓은 범위가 거대한 반도의 형태로 있었는데 이를 도거랜드라 부른다.
도거랜드가 있었다고 추정하는 대략적인 연대는 기원전 18000년부터 5500년까지로, 실제로 도거랜드에 해당하는 지역들에서 유적과 유물들이 발견되면서, 오래전에 이 지역에 존재한 문명이 있다는 것이 밝혀져 이곳이 바로 아틀란티스가 아니었나 하는 이야기도 나왔다.네이버 기사#, 내셔널지오그래픽 기사# 이후 해수면이 점차 높아지면서 도거랜드 지역이 완전히 수몰돼 현재처럼 되었다는 것.
아틀란티스 도거랜드설은 아틀란티스 전설에서 말하는 수몰이 바로 도거랜드가 물 밑으로 가라앉은 것을 가리키고, 아틀란티스 문명도 이 도거랜드 어딘가에[10] 존재했다고 추정하는 가설이다.
2014년엔 이 지역이 엄청난 쓰나미로 잠겼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전설상의 아틀란티스와의 연계성이 더욱 주목받았다. 네이버 기사#

5.3. 스페인 타르테소스


현 스페인의 카디스Cádiz와 헤레스Jerez de la Frontera 근방에 위치했던 타르테소스 왕국이 아틀란티스였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그러나 타르테소스 관련 기록이 나오는 것은 기원전 600년 정도로, 해당 왕국이나 그 전신의 문명을 상정한다 해도 시기가 크게 다르고 지형이나 관련 전설 내용과 부합하는 것도 적어, 지브롤터 해협 근방에 있다는 것 외에는 타당성이 크게 떨어진다.
아틀란티스 전설을 다룬 일본 만화 '일리어드'와 일본 애니메이션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에서는 이 설을 채택했다. 아틀란티스 침몰 후 살아남은 사람들이 타르테소스 문명을 이룩했다는 주장.

5.4. 모로코 수스마사(Sous Massa) 설


독일의 컴퓨터 전문가 미하엘 휘프너(Michael Hübner)가 제기한 설. 《티마이오스》와 《크리티아스》에 나온 지형적 특징을 근거로 아테네에서 반경 4700 km 이내의 지형을 400개 구역으로 추리고, 지형적 특징이 일치하는 만큼 점수를 매겨 가장 점수가 높은 지역을 뽑아냈다. 실제로 크리티아스에서 등장하는 동심원 모양의 지형이 꽤 많았고, 크기도 플라톤이 말하던 것에서 10%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해당 지역이 모로코 국왕의 개인 소유지였기 때문에 발굴 작업을 진행할 수 없었고, 모로코 국왕도 발굴에 큰 관심이 없으며, 이 설을 연구하던 휘프너마저 2013년 불의의 사고로 인해 유명을 달리했기 때문에 현재까지는 진실 여부를 말할 수가 없다.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 영어설명글 참조.

5.5. 모리타니 사하라의 눈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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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서부 사하라 사막의 리차트 구조가 아틀란티스의 문명의 흔적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곳의 리샤트 구조(Richat Structure)는 '사하라의 눈(眼)'이라고도 불리는데, 아프리카 북서부 해안에 근접한 모리타니에 위치한 둥근 동심형 지형이다. 크레이터의 흔적이라느니, 화산 폭발의 흔적이라느니 하는 주장이 나왔으나 아직까지도 이런 지형이 생긴 원인을 알 수 없다.
'사하라의 눈'이 2018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아틀란티스의 후보로 주목받은 이유는 이곳이 실제 사람의 눈높이에서는 그냥 흔하디 흔한 사막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근방이 죄다 삭막한 모래사막이라 직접 갈 일도 없었다. 그러나 현대에 접어들어 정밀한 인공위성 사진으로 보면서, 그동안 사람들이 아틀란티스를 상상하며 그려온 모습과 놀랍도록 비슷한 지형이 있음을 발견한 것.
유튜브 'Bright Insight' 채널은 리샤트 구조가 아틀란티스의 흔적이라는 세 가지 근거를 제시한다.
  1. 리샤트 구조의 크기가 플라톤이 기록한 아틀란티스의 크기와 일치한다.
    • 플라톤은 아틀란티스의 크기를 127스타디아라고 기록했는데, 1 스타디아는 185 m로, 127스타디아면 23.495 km이다. 위 사진의 두꺼운 회색지대를 제외한 지름이 대략 24 km이다.
  2. 리샤트 구조의 주변 지형이 플라톤의 기록과 일치한다.
    • 아틀란티스는 동심원 3개인 고리 모양 해자 구조로 중앙섬에 연결되고, 도시의 북쪽에 산이 있고 남쪽에 넓은 평지가 있다고 기록되었다. 상기된 '모로코 Sous Massa설'을 주장한 미하엘 휘프너(Michael Hübner)도 이 특징적인 동심원 지형을 찾아다녔을 만큼 이 구조는 매우 독특한데, 리샤트 구조의 위치가 사막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아틀란티스와 거의 흡사하다.
그런데 사하라 사막은 지구 자전축 변화로 인해 2만 년마다 초원&습지와 사막을 오간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이에 따르면 이 지역이 지금처럼 사막이 된 것은 약 5000년 전부터이니 플라톤의 주장대로 9000년 전, 지금 기준으로 1만 1천 년 전쯤에는 사막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1. 아틀란티스 문명의 멸망 시기가 영거 드라이어스기(Younger Dryas)에 해당한다.
    • 영거 드라이어스기에는 급변하는 기후로 인해 해수면이 높아졌는데, 이것은 도거랜드설과도 상통하는 부분으로, 일만 여년 전에는 지금보다 해수면이 훨씬 낮았다. 이 해수면이 높아지는 과정에서 당시 아틀란티스가 수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아틀란티스는 물속에 가라앉았다가 다시 떠오른 셈인데, 실제로 모리타니 사막에서 오래된 고래화석이 발견된 적이 있어 인근 지역이 해수면 아래에 위치했던 적이 있음은 사실로 판명되었다#. 이런 변화들은 플라톤이 '모종의 이유로 지진으로 가라앉은 후, 진흙으로 막혀 배로는 접근할 수 없었다'고 기록한 것을 설명해준다.
'사하라의 눈'을 포함한 사하라 사막 아래 거대한 강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따라서 1만 1천 년 전 이 리샤트 구조의 위치는 해협수준의 거대한 강줄기[11]를 끼고 있는 연안도시였음을 추정할 수 있고, 현재 위치처럼 내륙의 사막지역이 아닌 연안지역이었기 때문에 기후변화 속에서 수몰되었던 것으로 상정할 수 있다. 단, 이 가설에 따라 리샤트 구조 지역이 실제 수몰된 과거가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지질학적, 해양학적 연구결과는 아직 발표되지 않아 어디까지나 가능성에 머무르고 있다.
  • 사하라의 눈 문명설에 대한 Bright Insight 채널의 영상
  • 위영상들을 한국어로 편집한 채널영상
Bright Insight가 올린 영상에서는 1년당 지표면 상승치를 역산하여 '1만 1천 년 전 서아프리카 대부분이 물에 잠겨 있고 리샤트 부근이 섬처럼 떠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데, 이는 단순히 수치를 역산한 결과로, 만 년 가까이를 역산해도 무방 할만큼 지표면이 꾸준히 상승했는지는 보장할 수 없는 데다가 상정한 수치만큼 해수면이 서아프리카 지역을 뒤덮을 수 있었는지 등을 간과한 데이터라는 한계가 있다.

5.6. 기타


켈트계 서유럽 부족 국가에 대한 이야기가 전파 과정에서 변형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레이엄 핸콕을 위시한 신고고학파들 사이에서 대두된 이론으로, 남극이 아틀란티스였다는 또 다른 설이다. 1만여 년 전에는 남극이 빙하에 덮여있지 않았고 남대서양에 있어서 그곳에 초문명이 있었다는 주장이다. 남극이 눈에 뒤덮힌 시기나 그리스와의 거리로 봤을 때 영 신빙성이 없다. 마찬가지로 남미까지 언급하는 사람들도 있다.[12] 혹자는 미국이 옛 아틀란티스 자리에 재건된 국가라는 썰을 풀기도 한다.

[1] 여담으로 대서양을 뜻하는 영어 단어 'atlantic ocean'도 마찬가지로 아틀라스에서 유래한 것이다. 북아프리카의 아틀라스 산맥에 먼저 아틀라스라는 이름이 붙고 그 뒤에 대서양에 atlantic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우연의 일치이긴 하지만 아틀란티스의 위치 가설 중 대서양을 끼고 있는 것들도 몇몇 있다.[2] 이것은 지구과학적으로 '남반구에도 비슷한 대륙이 있어야 할 것'이라는 이론에서 비롯된 것으로 초고대문명설 등의 전설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3] 이 책은 오로지 아틀란티스에 대한 내용이며, '아틀란티코스'라고도 불린다.[4] 현대의 자연 과학자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는 작품이다. 실제로 불확정성의 원리로 유명한 하이젠베르크의 자서전인 '부분과 전체'의 첫 장에는 자신이 젊은 시절에 '티마이오스'에 영향을 받았다는 내용이 나오며, 마지막 장 제목은 아예 '소립자와 플라톤 철학'으로, 자신의 연구와 《티마이오스》의 우주관을 총체적으로 고찰한다.[5] 여기서 사제는 물로 인한 멸망으로 데우칼리온 신화를 언급하며, 불로 인한 멸망으로 헬리오스의 아들 파에톤의 신화를 인용한다.[6] 이집트보다 더 오래된 괴베클리 테페라는 기원전 9000년대의 건축물이 발견되기는 했다.[7] 참사를 겪기 전에 있었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다.[8] 크레타 섬을 포함한 지금의 그리스 영토 전체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은 과거가 있을 뿐더러 현재까지도 크레타 섬은 터키풍이 강하게 남아있는 곳이다.[9] 책 속 주석: Galonopoulos. A. G. & E. Bacon "Atlantis : The truth behind the legend", Nelson, London, 1969.[10] 주로 위 사진 속 Dogger Bank 구역을 뜻한다.[11] 타만라세트(Tamanrasett) 강. 타망가세트 강으로도 부른다.[12] 이집트가 남미와 코카인 무역을 했다는 설도 있지만 벽화에 그림을 잘못 해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