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녕군

 

'''계동궁의 역대 종주'''
4대 남연군 이구

[1]

5대 완림군 이재원

'''조선 장조의 증손[2]'''
'''흥녕군
興寧君'''

'''군호'''
흥녕군(興寧君)[3]
'''시호'''
정간(貞簡)
'''본관'''
전주(全州)
'''이름'''
창응(昌應)[5]
''''''
유백(裕伯)
'''양조부'''
은신군
'''양조모'''
남양군부인 남양 홍씨(南陽 洪氏)
'''생조부'''
이병원[6]
'''생부'''
남연군
'''생모'''
군부인 여흥 민씨(驪興閔氏)
'''부인'''
군부인 임천 조씨(林川 趙氏)
'''자녀'''
1남[7]
'''생몰
기간
'''
'''음력'''
1809년 7월 16일 ~ 1828년 2월 1일
'''양력'''
1809년 8월 26일 ~ 1828년 3월 16일
1. 개요
2. 생애
3. 사후
4. 여담
5. 가족과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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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왕족. 남연군의 네 아들 중 장남이자 흥완군, 흥인군, 흥선대원군의 맏형이다.

2. 생애


1809년 7월 16일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6대손이자 원종의 셋째 아들 능창대군의 양7대손인 이채중(李采重)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인현왕후의 큰아버지 민정중의 4대손 민경혁의 딸 여흥 민씨다. 왕실의 후손이었지만 종친의 대우는 그의 고조부 안흥군의 대에서 끝났고 그의 가족은 단지 왕족 출신 양반일 뿐이었다. 그러나 7살 때인 1815년 12월 9일 아버지 이채중이 정조(조선)의 이복 동생이자 숙종(조선)의 3남 연령군의 양손자인 은신군의 양자가 되어 남연군의 작호를 받고 왕족으로 편입되면서 이창응 역시 종친이 되었고 1822년 12월 27일 휘경원 수원관(守園官)[8]을 지내고 같은 해 13세에 소의대부(昭義大夫)[9] '''흥녕군'''에 봉해졌다.[10] 이어 다시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의 묘를 관리하는 행 휘경원수(徽慶園守)[11]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워낙 어릴 때 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고 결국 1828년 2월 1일 향년 20세로 별세하였다. 참고로 사망 당시 그의 부모인 남연군과 군부인 여흥 민씨 내외는 아직 생존해 있었다.

3. 사후


[image]
흥녕군의 묘.
조카 고종이 즉위한 직후인 1864년(고종 1년) 7월 9일 '정간(貞簡)'이란 시호를 추증받았고, 1865년(고종 2년) 9월 10일 증 이조 판서 지종정경(知宗正卿) 겸 지경연 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직이 특별 추증되었다. 다시 1865년 9월 14일 조대비의 명으로 특별히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종정경(議政府領議政 兼 領宗正卿)에 증직되었다.

4. 여담


  • 흥선대원군이 형제들과 사이가 안 좋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나 큰형 흥녕군과 둘째형 흥완군과의 관계는 나름 괜찮았다. 사실 흥녕군은 흥선대원군이 9살 때 사망했으니 나쁘고 말고 할 게 없었다. 그리고 남연군 부부가 사망한 이후로는 흥완군이 나머지 형제들을 잘 챙겼다고 한다. 다만 흥완군도 꽤 이른 나이에 죽었고, 그나마 제일 오랫 동안 봐온 68세까지 살았던 셋째 형 흥인군과의 관계는 매우 좋지 않았다.(...)

5. 가족과 후손


부인은 임천 조씨로, 둘 사이에서 자식이 아예 없었기 때문에 1831년 아랫 동생 흥완군 이정응의 아들 완림군 이재원(李載元)이 태어나는 대로 바로 사후 양자입양해 조씨 부인이 키웠다. 조씨 부인은 1871년 6월에 사망했다, 나중에 영의정까지 지낸 양자 이재원은 1889년에 아들 이기용(李埼鎔)을 얻었으나 2년 뒤인 1891년 사망했으며 사후 1899년에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받자 완림군(完林君)으로 추봉받았다.
이기용은 여느 황족들처럼(...) 친일 노선을 타면서 호의호식했다. 그러나 8.15 광복 이후 몰락해 가난하게 살다가 1961년에 사망했다. 자식이 없었기에 황적에 올라가지 못한 의친왕의 자녀들 몇 명을 입양했는데 아들로는 의친왕의 7남 이해청(이광)을, 딸로는 의친왕의 1녀 이해완(이령), 2녀 이해원(이진), 3녀 이해춘(이찬), 4녀 이해숙(이숙), 5녀 이해경(이공)을 자신의 호적에 올렸다. 이해청(이광)은 1952년에 양아버지, 친아버지보다도 먼저 죽었고 그의 후손에 대해선 전해진 게 없다.

[1] 원래 남연군의 뒤를 이어 계동궁 종주가 되어야 했으나 아버지 남연군보다 일찍 죽었다.[2] 흥녕군의 양할아버지 은신군영조의 동생 연령군의 봉사손이었다. 그러나 계대 문제로 조선시대 당시에 은신군의 후손들은, '우리는 연령군의 제사를 챙길 뿐, 엄연히 사도세자(장조)의 자손'이라고 인식했고, 왕실에서도 그들에게 영조 - 사도세자의 후손 자격으로 군호를 주었다.(20세기 중반부터는 연령군을 조상으로 인정하고 있다.) 사실 당대에 연령군의 후손으로 인정받았다면, 흥녕군은 숙종의 5대손이기 때문에 군호를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자세한 것은 연령군, 낙천군, 은신군 항목 참조.[3] 군호는 인천의 옛 지명인 흥녕부(興寧府)에서 유래했다. 형제들의 군호도 마찬가지.[4] 참고로 이는 흥완군과 같은 항렬의 왕족들의 이름들도 마찬가지인데 먼저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익종, 문조)의 이름은 '영('''旲''', '''日''' + 大)'이며 철종은 왕이 된 이후 원범에서 '변('''昪''', '''日''' + 弁)'으로 개명했다. 은전군의 양손자 완평군 역시 초명은 '병('''昺''', '''日''' + 丙)' 이었다가 '승응('''昇'''('''日''' + 升)應)'으로 바꿨으며 완평군 이전의 은전군 양손자였던 경평군의 이름 역시 '호('''晧''', '''日''' + 告)' 였다. 은언군의 큰손자이며 상계군의 양자이자 풍계군의 친자 익평군의 이름 역시 '희('''曦''', '''日''' + 羲)'였고 철종의 큰 형인 회평군도 원래 이름은 원경이었는데 '명('''明''', '''日''' + 月)'로 고친 것이다. 영평군 역시 원래 이름은 '욱('''昱''', '''日''' + 立)' 이었다가 후일 '경응('''景'''('''日''' + 京)應)'으로 개명했다.[5] 여담이지만 형제들의 이름을 보면 재미있는 규칙을 찾을 수 있는데, 첫째는 흥녕군 이창응(李昌應), 둘째는 흥완군 이정응(李晸應), 셋째는 흥인군 이최응(李最應), 막내가 흥선군 이하응(李昰應)인데 이최응을 제외하고는 전부 가운데 이름자의 부수가 날 일(日)자다. 이최응의 最의 부수는 갈 왈(曰)인데, 아무래도 남연군이 이름을 지을 때 비슷한 글자를 골라서 붙인 것으로 보인다.[4][6]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5대손.[7] 후술하겠지만 양자이다.[8] 정조의 후궁 수빈 박씨의 묘를 지키는 관직[9] 종2품 하의 종친에게 준 관계[10] 군호는 인천의 옛 지명인 흥녕부(興寧府)에서 유래했다. 형제들의 군호도 마찬가지.[11] 앞서 나온 휘경원 수원관보다 높은 직책이다. 휘경원 관리직 중 최고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