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민(투수)/선수 경력

 

1. 개요
2. 야구선수 경력
3. 골프선수 경력


1. 개요


투수 윤석민의 선수경력을 정리해놓은 문서이다.

2. 야구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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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탑고 재학 시절.

구리인창중 졸업 후 인창고로 진학했으나 1학년을 마치고 성남시에 있는 야탑고등학교로 전학했다. 이 당시 동기로는 같이 인창고에서 전학온 초중학교 동창 오재일이 있고, 야탑고 2년 선배로는 오재원이 있다.
고등학교 2학년까지는 포지션이 내야수였다. 투수는 김성준, 백자룡, 배우열 등이 있었다. 그러나 1997년 야탑고 창단부터 2021년 현재까지 지휘봉을 잡고 있는 김성용 감독은 윤석민을 투수로 전향시켰고[1] 3학년인 2004년부터 마운드에 서기 시작했다. 팀은 황금사자기 결승(vs 덕수정보고)와 무등기 결승(vs 광주일고)에 진출했으나 모두 준우승에 그쳤다.
2005년 2차 1순위로 KIA 타이거즈에 입단했는데 이때는 뚜렷하게 두각을 나타내는 투수는 아니었다. KIA 타이거즈의 성공적인 스카우팅 사례 중 하나.
리틀 야구 시절에는 타자 윤석민과 프로 때와 정반대로 서로 포지션이 달랐다. 투수 윤석민은 이때에는 포수, 타자 윤석민은 투수였다. 초, 중학교를 같은 곳을 나왔으며, 인창고 1학년까지도 같이 동문수학을 하다가 투수 윤석민이 야탑고로 전학갔다.

2.2. KIA 타이거즈 1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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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2005 시즌


2005년 4월 2일 한화전에 2/3이닝 동안 1볼넷 2피안타 3자책점을 기록하였으므로 KBO 1군 데뷔전에선 부진했으나 그 이후 4월중 남은 기간 동안 7경기를 등판하며 14이닝동안 2.57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호투했고, 5월 10일을 기점으로 팀의 클로저를 담당하게 되었다.
5~6월동안 무난한 피칭을 이어갔지만 해당기간 동안에만 구원으로 37이닝을 소화하며 무리를 했고, 7월에 그에 대한 여파로 무너졌다.
8월중순에야 다시 추스르고 어느정도의 기량을 찾은 모습을 보이며 남은 시즌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2.2.2. 2006 시즌


4~5월 동안 20경기 31 1/3이닝을 소화하며 0.86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맹활약했고, 6월 약간 부진을 겪었지만 7월 부터 다시 맹활약하며 시즌을 마무리했다.

2.2.3. 2007 시즌


팀 사정상 선발로 보직을 전향한 상태로 시즌을 시작했고, 4월부터 7월까지 20경기 2.76 124이닝 74삼진 41볼넷 1.21WHIP를 기록하며 맹활약하나 해당기간동안 기록한 승패는 6승 12패에 그칠 정도로 팀 지원이 처참하여 팀 지원을 못받아 승이 적은 불운한 선발투수에게 팬들이 윤석민상을 수상하는 경우가 생겨났다.
8~9월은 멘탈이 무너지면서 실점을 많이 했는데 윤석민 본인말로 정말 1점만 줘도 팀이 지니까 심적으로 너무 힘들었다고 한다.

2.2.4. 2008 시즌


완전히 에이스로 발돋음한 시즌으로, 전해에 7월이 끝날때까지 6승 14패에 그치고 시즌내내 10승을 달성하지 못했던것과는 다르게 7월 15일 롯데전[2]에서 7이닝 1자책점 호투로 커리어 첫 10승에 도달했고, 해당시즌 평균자책점 1위, 완투 1위, 다승 2위를 기록하며 맹활약했다.

2.2.5. 2009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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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1일 광주 삼성전 '''9이닝 1실점 승패없음'''(결국 그 경기 패)
초반 방어율이 4점대인데다, 기아 방어율이 6선발 평균 '''2점대'''의 다른 팀 에이스 선발급 포스를 내뿜고 있어 점점 입지가 좁아졌다. 게다가 기아 타선이 윤석민이 등판할때는 파업을 한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윤석민 등판일의 성적이 가장 나쁘다. 그야말로 안습의 절정을 달렸다.
4월 17, 18, 19일의 3연전에서는 타선이 폭발해서 25점이 나왔지만 윤석민 등판일인 18일에는 달랑 2점만 나오는 안습함까지.(결국 패전투수)
게다가 연이은 한기주의 '''퐈이야'''로 날려먹은 경기가 꽤 되는 상황이 되자(4월 21일~26일, 6일 연속으로 8회 이후에 실점), 결국 조범현 감독은 선발에서 부진한 윤석민을 마무리로 내리기로 결정한다.
5월 1일 경기에서 한기주의 퐈이야에 이은 4:4 상황에서 등장, 한화 타선을 4⅓이닝 동안 6삼진 '''퍼펙트'''로 완벽하게 틀어막았으나 타선의 삽질이 이어지며 이번에도 승수 쌓기는 실패했다.
그리고 '''어린이날'''에 미묘하게 부진하면서 결국 패전투수. 결국 스승의 날인 5월 15일에서야 최희섭김상현의 도움으로 시즌 첫 승을 기록하였다.
마무리로서 제법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지만 서재응과 이범석의 부상으로 인해 선발 로테이션에 문제가 생기자 5월 29일 선발로 복귀했다. 하필이면 상대투수가 봉중근이라 좀 흔들리는 감도 있긴 했으나 6이닝 2실점으로 호투하고 승리를 챙겼다. 조범현 감독은 이제 다시 마무리는 안 한다고 못 박은 만큼 남은 시즌은 선발로 등판할 것으로 보인다.
부상 당해 2군으로 내려간 한기주를 대신해 유동훈이 마무리 투수로 자리매김하고 윤석민은 다시 선발로 복귀, 전반기 마지막 등판에서 호투하며 부활을 알렸다.
이후 후반기에도 호투를 이어가며 연승행진 중. 기아 타선이 좋고 본인의 투구가 좋으니 진짜 남은 등판 경기 다 이겨서 10승 찍는 거 아니냐는 설레발도 나오는 상황이었다. 2009년 8월 12일 롯데전에서 7이닝 무실점 5탈삼진으로 시즌 6승을 거두며 팀과 자신의 연승 행진을 이어가는데 성공. 8월 18일 히어로즈 전에서는 5이닝 1실점 승리, 8월 23일 SK전에서는 7⅔이닝 1실점으로 8승째를 올리며 10승 설레발을 부채질하고 있다. 8월 30일 두산전에서는 7이닝동안 피안타 2개 1실점으로 호투했으나 기아 타선이 미친듯한 병살을 때려내면서 1:0으로 끌려가는 바람에 '''2007년의 윤석민'''이 되살아나....나 했는데 8회 초에서 최희섭의 적시타와 장성호의 대타 만루홈런, 다음 타자 김원섭의 백투백 1점 홈런으로 기아가 대거 6점을 뽑아내면서 역전에 성공, 시즌 9승째를 거뒀다. 이로써 등판 9연승을 이어가는 한편, 평균 자책점 부문에서 부상 때문에 출전하지 못하는 김광현을 제치고 1위로 올라섰다.
하지만 9월 5일 두산전에서 3이닝 10실점하는 최악의 피칭을 하며 평균자책점 타이틀 수성은 사실상 어려워졌다. 2007년 무리하면서 아킬레스건에 부상을 입은 이후 후반기로 가면서 체력과 투구 밸런스에 악영향이 심각한 것 같다. 결국 MRI 촬영결과 어깨에 부종이 확인, '''시즌 아웃'''이다. 다행히 포스트 시즌에서는 투구가 가능한 듯.
그리고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 기다렸다는 듯 복귀, 7이닝 무실점으로 호투하며 기아의 2연승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6차전에서는 5이닝 3실점을 하며 패전투수가 되었다. 해설, 선배투수, 본인까지 한목소리로 '너무 급했다'고 평했을 정도로 일찍 승부를 보려는 조급한 피칭을 했다. 팀 타선도 꽁꽁 묶여서 승리는 결과적으로 어려웠던 경기. 타선이 터졌으면 승리 투수가 되면서 나름 잘했다고 칭찬 받을 수도 있었다. 역시 이기면 뭐든지 좋게 보인다.

2.2.6. 2010 시즌


성적이 나쁜 건 아니지만 순 제멋대로인 스트라이크존에 제대로 적응 못하고 투수코치가 데스기모토로 바뀐 탓인지 부진하다.
5월 9일에는 뜬금없이 마무리 등판까지 했다. 5월 11일 광주 넥센전에서 2년만에 완투승을 거뒀지만, 류현진의 17K 탈삼진쇼에 아쉽게 묻혀버렸다. 5월 26일 잠실 LG전에서는 ⅔이닝동안 8실점으로 관광당했다... 충격이 오래 갈듯 할텐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2010년 6월 18일 있었던 SK 와이번스와의 경기에서 완투직전에 윤상균에게 적시타를 맞으며 강판당했다. '''그리고 강판 후에 분노를 이기지 못해 라커룸에 오른손을 내리쳤는데 하필 새끼손가락이 골절되었다.''' 전치 6주.[3]
은퇴 후에야 윤석민 본인이 스톡킹에 출연해 이 당시 라커룸을 내리친 상황에 대해 상세히 밝혔다. 당시 윤석민이 부진해 잘 나가던 팀이 윤석민의 선발 등판 날에 패하는 경우가 많아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중, 어느 날 경기가 다 끝나지 않았는데도 기자가 승리 멘트를 요청한 적이 있었고 윤석민이 인터뷰를 수락하진 않았지만 그 날 경기에서 끝내 패하며 많이 마음에 남았었다고 한다. 그런데 심지어 그 기자는 다른 날에도 경기가 끝나지 않았는데도 승리 멘트를 요청했고, 다시 거절하자 인터뷰를 한다고 경기가 뒤집어지거나 하냐면서 역으로 화를 낸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완투를 자처하다 적시타를 맞고 강판된 날에도 그 기자는 어김없이 경기가 끝나기 전에 멘트를 요청했고, 이 때문에 열을 받아 글러브를 내던지고 라커룸에 들어갔다 나왔더니 결국 끝내기를 맞자 홧김에 문을 내려쳤다가 손이 부러졌다고 한다.
8월 15일에는 2대 1 상황에서 등판, 볼넷과 송구 실책으로 1점을 내준 직후 홍성흔의 타석에서 던진 직구가 손등을 강타해 홍성흔이 시즌아웃이 돼버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대개 몸쪽 볼은 대부분의 타자들이 잘 피하는데, 가끔 스윙하려고 나가다가 손등에 맞는 경우가 나온다. 하필 홍성흔도 이 경우였기에 안타까운 상황. 윤석민 본인도 그냥 서 있으면 안 맞았을 공이었다고 말했다. 문제는 기아와 롯데는 4강을 놓고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중이었고, 홍성흔은 그런 롯데타선의 중심축이었던 선수였다. 게다가 홍성흔은 타점 신기록 경신이 상당히 유력한 상태였기도 했다.
때문에 윤석민은 롯데팬들에게 많은 욕을 먹었다.빈볼 논쟁이 나오기도 했지만 롯데, 기아 모두 빈볼은 아니라는 입장이고, 특히 피해자인 홍성흔은 사과 전화를 한 윤석민에게 ''경기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다, 신경쓰지 말고 잘해라'' 라고 말해주는 대인배의 풍모를 보이기도 했다.#기사
8월 19일 경기에서 마무리로 등판하여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리고 8월 24일 롯데와의 경기에서 구원등판하였는데 커브볼이 손에서 빠지면서 조성환의 헬맷에 맞아버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분노한 사직 구장 롯데 팬들의 오물 및 물병 투척으로 경기가 10여분 정도 지연되었다가 재개되었다.
이 때 롯데팬들의 분노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 했는데 이는 단순히 롯데팬이 극성이기 때문만은 분명히 아니다. 해당 경기 시점에서 롯데와 KIA의 4강 경쟁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였다는 점 + 2010시즌 윤석민이 던진 몸에 맞는 볼이 총 3개인데 3개 모두 롯데 중심 타자들(강민호, 홍성흔, 조성환)에게 맞았다는 것[4] + 8회말에 등판해서 9회말 2아웃까지 절묘한 제구로 5타자 연속으로 삼진 및 범타로 처리를 하던 중이었다는 것이 합쳐지는 바람에 엄청난 결과가 돼버렸다.
조범현 감독은 3만 관중이 "내려가" 콜을 하는데도 굴하지 않고 계속 윤석민을 던지게 했고, 윤석민은 이대호를 고의사구[5]로 거른 후 카림 가르시아를 외야 플라이로 잡아내고 내려갔다.
경기 결과는 KIA가 7:5로 승리. 이후 경찰들의 경호를 받으며 구장을 빠져나갔다고 한다. 이후에도 큰 파장이 있었다. KIA 타이거즈/사건사고 참조.
결국 심리적인 문제 때문에 1군 등록이 말소되었다. #기사 한편 메이저리그의 한 멘탈 코치가 윤석민의 소식을 듣고 조언을 하기도 했다. #기사 그리고 이 때 공황 장애로 내려갔다는 기사가 나왔는데 루머로 밝혀졌다.[6]
그리고 9월 14일 다시 1군에 올라왔다.#기사 하지만 역시 후유증이 남아있었는지 9월 15일 서재응에 이어 8회 등판 ⅔이닝 4실점하며 084의 위엄을 다시 한 번 드러냈다.
사구 논란과 그 후의 부진 때문에 광저우 아시안게임 최종 엔트리에 든 것을 비난하는 의견도 적지 않다. 2014년 6월 16일 조성환이 은퇴를 선언하자 이 사건이 다시 재조명 되었다.[7]

2.2.7. 2011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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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민(투수)/2011년 항목으로.

2.2.8. 2012 시즌


윤석민(투수)/2012년 항목으로.

2.2.9. 2013 시즌


윤석민(투수)/2013년 항목으로.

2.3. 노포크 타이즈 (마이너리그) 시절



2.3.1. 2014 시즌


2013 시즌 종료 이후 FA를 선언하면서 해외 진출을 꾀하게 된다. 하지만 다른 FA 선언 선수들이 전부 계약한 가운데 이듬해 2월이 넘어가도록 계약소식이 들리지 않으면서 국내유턴 설 등 여러 루머들이 돌았다.
마침내 볼티모어 오리올스 산하 마이너리그팀인 노포크 타이즈에서 뛰게 되었다. 하지만 6월 중순 기준으로 방어율이 리그에서 밑에서 4위이고 이닝당 피홈런수는 리그 1위이며 6월 17일 기준으로 아홉경기 연속 피홈런을 맞는 등전혀 기대에 못미치고 있다. 마이너리그 시즌이 모두 끝난 시점에서는 '''딱 크보급 투수'''라는 말을 들어도 할말이 없을 정도. 10경기 연속 피홈런이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도 겪었다.
8월 31일 볼티모어의 40인 목록에서 제외되었다. 국내 리턴설이 다시 떠오르는 중. 윤석민 본인은 내년에도 메이저리그 도전의사를 드러냈다.
자세한 내용은 윤석민(투수)/2014년 항목으로.

2.4. KIA 타이거즈 2기



2.4.1. 2015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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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동안 메이저리그 진출을 도모했지만 결국 실패하여 친정팀 KIA로 돌아온 해이다.
윤석민(투수)/2015년 항목으로.

2.4.2. 2016 시즌


자세한 내용은 윤석민(투수)/2016년 항목으로.

2.4.3. 2017 시즌


2016년 12월 8일 팀 공식 SNS를 통해 어깨에 웃자란 뼈 제거 수술에 들어가며 복귀에 최소한 6개월은 걸린다는 소식이 나왔다. 관련기사. 수술 후 재활에 반년 정도 걸려 2017년 상반기는 출장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재활 후에도 등판 준비에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들어간다는 걸 생각하면 전반기는 아웃이 확실시되고 후반기에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지가 중요하다. 하지만 팬들은 어차피 수술할 거였으면 일찌감치 수술을 받고 다음시즌을 확실히 준비해서 나올 것이지, 12월이 되어서야 수술을 받는 이 상황에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쯤되면 토종투수들 중 사상 최악의 먹튀가 될지도 모르는 우려스러운 상황.
여담으로 시즌 전인 2016년 12월에 득남했다. #
인터넷에서 팬들끼리 아직 복귀를 하지 않는 윤석민의 보직을 두고 선발투수불펜 자리로 예송논쟁을 벌이고 있다 카더라.
6월 18일 현재에도 이전의 6월 복귀 기사에 대한 복귀 기사는 찾아볼 수 없다. 올해 안에 복귀한다해도 현실적으로 2년째 경기경험이 없는 선수가 복귀 직후 제대로 된 활약을 하기 어렵기 때문에 올해 복귀는 힘들다고 보는게 정신건강에 이롭다. 복귀해도 불펜으로 쓸 수 있는지조차 의문.
8월에 돌아온다고 하지만 또 미뤄질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결국 9월달에야 돌아올 가능성이 있다는 기사가 났다. 몸 상태가 완벽해지면 복귀시킨다고 하는 걸로 봐서 아예 시즌을 통째로 날리게 될지도.
7월 31일, KIA가 2017년 2차 1라운더 유망주인 좌완투수 이승호를 내주고 넥센의 마무리 투수 김세현을 받아오자 팬들은 더더욱 윤석민을 성토하기 시작했다. 윤석민이 제때 돌아와 투수진에서 활약해줬어도 꼭 성사할 필요가 없었던 트레이드였기 때문이다.
결국 2017년 8월 30일, '''2017년 복귀는 어려울 것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같은 날, 팀 또한 최규순 스캔들이 터지면서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었다. 이걸로 KBO 역사상 유례 없는 '''최악의 먹튀''' 확정.
결국 2017시즌 기아 타이거즈의 정규시즌과 한국시리즈 우승을 함께하지 못했다.
11월 14일, 개그맨 변기수와의 사진으로 근황을 공개했다.
12월 9일, 아내의 출산으로 인해 1년여 간 미뤘던 결혼식을 올렸다.
12월 22일, 골프에 빠졌다는 근황이 공개되었다.

2.4.4. 2018 시즌


해당 문서로.

2.4.5. 2019 시즌


연봉이 대폭 삭감되었다는 기사가 떴다. 무려 '''10억 5천만 원이 삭감'''된 2억 원에 계약하였다. 하지만 팬들은 이것도 너무 많다는 반응이다.
2월 7일 인터뷰에 따르면 2017 시즌에도 언급된 오른쪽 어깨 웃자람뼈 제거 수술 이후 '''아직도''' 통증을 호소한다고 한다. 햇수로 수술을 받은지 '''2년 2개월'''이 지났는데도 통증을 호소한다는 소식에 팬들은 크게 절망하며 사이버&먹튀화 예약이라며 씁쓸해 하는 중. #
결국 김세현처럼 국내 귀국 조치가 떨어졌고, 갸갤과 엠팍은 한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대체적인 기류는 부활은커녕 더이상 선수생활이 어려울 거 같단 의견이 대다수.
4월 퓨처스 리그에서 등판하여 24일 1이닝 무실점, 27일 2이닝 2탈삼진 무실점으로 활약했다고 한다. 최고 구속 139km/h를 찍었다고 한다. 구속이 더 올라오면 복귀가 가능하다는 전망도 있으나 복귀해서 활약할지는 미지수다.
7월 13일. 이범호의 은퇴식에서 오랜만에 근황이 포착되었다. 다른 선수들은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그라운드로 나와 있는데 차마 그러진 못했는지 라커룸에 있었다고 한다.
결국 4월 퓨처스 등판을 끝으로 '''또''' 재활만 하다 시즌을 마감했다. 그렇게 재활만 했는데도 통증이 가시지 않는 모양. # 팬들도 이젠 완전히 포기하는 모양새. 이젠 남은 선수생활 동안 1군에 올라와서 공 한번이라도 던지는 게 기적으로 받아들여질 지경.
10월 말에 기사 한번 나고 별다른 소식이 들리지 않던 도중 12월 13일에 보도자료를 통해 긴 재활 끝에 결국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윤석민은 "다시 마운드에 서기 위해 노력했지만, 정상적인 투구가 어려운 상황이다. 재활로 자리를 차지하기 보다 후배들에게 기회가 생길 수 있게 은퇴를 결심했다"라며 은퇴 의사를 밝혔고 KIA 구단도 이를 수용했다. 윤석민은 마지막으로 "선수로 뛰면서 팬들의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 응원과 사랑에 보답하지 못한 것 같아 죄송한 마음뿐이며 앞으로도 팬 여러분이 보내주신 사랑을 가슴에 새기고 살겠다. 그동안 기회를 주시고 지도해주신 감독님과 코치님, 구단 직원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정말 감사드린다"라는 인터뷰를 끝으로 현역 생활을 마치게 되었다. 임의탈퇴선수로 공시되며 은퇴 절차 또한 마무리지었다.
사실 지난 5월달에 마음을 정리하고 구단에 은퇴 이야기를 꺼냈지만 조계현 단장이 1년만 더 해보자며 만류해서 좀 더 재활을 해봤지만 전혀 나아지지 않아 은퇴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8] 어찌되었던 한때는 트리플 크라운도 수상하던 선수지만 전혀 나아지지 않아 은퇴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말년에 재활만 하며 90억이라는 거액을 먹튀를 하는 것도 모자라 2018시즌 자신 때문에 다른 투수들의 보직까지 파괴시킨 행보[9]가 워낙 임펙트가 컸던지라 위에 나왔던 인터뷰에도 팬들의 반응은 싸늘하기 그지 없었다.

2.5. 국가대표 경력



2.5.1.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06시즌 당시 구원으로 2점대 평균 자책점을 기록하는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었기에 우완 불펜으로 승선하였으나 도하 참사를 겪고 돌아오게 된다. 이 당시 프로 2년차 햇병아리로 너무 어렸기에 패전조 취급이라 대만전에서는 나가지 못했고, 크게 이긴 중국전에서 한 번 등판기회를 얻었다.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시합에 아예 나가질 못해서 패배에는 딱히 책임이 없긴 했다.

2.5.2. 2008 베이징 올림픽



경기
이닝
방어율


홀드
세이브
피안타
피홈런
자책점
삼진
4구
5
7⅔
2.35
2
0
0
1
6
1
2
6
1
윤석민은 임태훈을 대신하여 베이징 올림픽에 출전하게 됐다. 당시 대표팀 감독 김경문이 윤석민 뽑는 것을 반대하다가, 평가전에서 참패하고 기술 위원들의 설득으로 임태훈 대신 넣었다고. 허구연의 방송사고로 드러났다. 좀 더 이야기하자면 윤석민은 대표팀 명단 발표가 나고 페이스가 올라왔고, 임태훈은 하락했다. 대회 직전만 보면 윤석민이 들어가는 것이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원래 올림픽 대표팀의 불펜진은 한기주, 오승환, 권혁(L), 정대현(U)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풍부해 보였으나 한기주가 심각하게 부진했고 오승환도 컨디션 이상으로 이탈해 버려서 졸지에 대표팀 유일의 우완 불펜으로 등극, 윤노예라 불리며 마운드에 자주 올랐다. 사실 올림픽 때의 투구내용 자체는 훌륭한 편이 아니었다. 소위 말하는 분식회계가 많았다. 이대호가 윤석민을 살렸다고 했을 정도.
윤석민은 조별리그 1차전 미국과의 경기, 6:5로 리드중인 9회초에 대회 첫 등판을 했다. 당시 한기주 아웃카운트 단 한개도 잡지 못한채 홈런-안타-안타를 허용해 무사 2,3루 위기를 만든 상황에서 윤석민은 2아웃까지 잘 잡아냈지만 결국 적시타를 맞아 역전을 허용했다. 하지만 팀이 9회말 3점을 내서 역전하는 바람에 윤석민은 대회 첫승을 기록하게 됐다.
이후 윤석민은 조별리그 4차전 일본과의 경기에 6회 1사후 구원등판했다. 윤석민은 올라오자마자 투런 홈런을 허용했지만 이후 타자들을 안정적으로 막아내며 2.2이닝 1실점을 기록했다.이대호가 동점홈런을 치고 팀이 9회초 역전에 성공하면서 승리투수로 기록되었다.
윤석민은 조별리그 5차전 대만과의 경기 9:8로 리드중인 8회 다시 한번 구원등판했다. 이날 대한민국의 마운드를 상대로 맹폭을 날리던 대만타선을 1.2이닝 0실점으로 잠재우며 팀의 승리를 지켜냈다. 덤으로 이번 대회 첫번째 세이브까지 기록했다.
바로 하루 뒤인 조별리그 6차전 쿠바전 역시 구원등판했다. 원래 윤석민은 이 경기 선발투수로 내정되었으나 대만전이 예상치 못한 접전으로 흐르게 되어 등판했던 것이다. 이날 윤석민은 4점차 리드 상황에 등판하여 1.1이닝 1실점을 기록하고 오승환에게 마운드를 넘겼다.
윤석민의 등판은 결선 토너먼트에 가서도 이어졌다. 윤석민은 4강 일본전 마무리 투수로 등판해 1이닝 0실점 깔끔한 피칭을 보여줬다. 비록 팀이 4점차로 리드중인 상황이라 세이브로 기록되진 않았다. 이 당시 불펜에서 몸을 풀때 긴장을 해서 제구가 흔들렸는데 막상 마운드에 오르니 긴장이 풀어졌다는 후문.
결국 대한민국이 결승전에서 쿠바를 다시 한번 꺽고 우승을 차지함으로써 윤석민 역시 목에 금메달을 걸 수 있었다. 대회 내내 중요한 경기의 승부처마다 등판해 제 몫을 해낸 윤석민이 대한민국의 사상 첫 금메달의 일등공신중 한 명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최종성적: 5경기 7.2이닝, 2승 0패 1세이브, 6K, ERA 2.35

2.5.3. 2009 WBC



경기
선발
이닝
방어율


홀드
세이브
피안타
피홈런
자책점
삼진
4구
4
2
16
1.13
2
0
2
0
13
1
2
13
1
지난 2008 베이징 올림픽을 통해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핵심 자원으로 떠오른 윤석민은 당연히 이번 엔트리에도 포함됐다. 불펜 투수로서 합류했던 지난 대표팀때와 달리 이번 대표팀에서는 선발투수로서 나설 것으로 예상됐다.
윤석민은 1라운드 중국전 선발투수로 등판했다. 몇 수 아래의 중국타선을 상대로 견고한 피칭으로 6이닝 0실점 완벽투를 펼첬다. 대한민국이 7회 14:0 콜드게임 승을 거둠에 따라 이번 대회 첫 승까지 기록하게 되었다.
이후 멕시코전, 일본전에서 계투조로 활약하며 방어율 0을 기록하며 대표팀의 4강 진출에 공헌했다.
베네수엘라와 펼친 4강전에서 메이저리거로 구성된 베네수엘라 타선을 6⅓이닝 7피안타 2실점으로 틀어막아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미겔 카브레라를 본인의 장기인 슬라이더로 삼진으로 처리하기도 했다. 사실상 윤석민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경기로 지금까지 끊임없이 회자되는 명경기다.
최종 성적: 16이닝, 13K, 2승 0패, ERA 1.23, WHIP 0.88

2.5.4.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야구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서 참가했다. 자신의 커리어 2번째 아시안게임 출전으로 지난 4년전의 도하 참사 맴버로서 겪은 굴욕을 만회할 기회를 잡게 되었다.
11월 13일 조별리그 대만전 7회에 선발 류현진을 구원등판하러 나왔는데... 알고보니 당일 출전선수 명단[10]에서 빠진 상태였다. 때문에 주심이 윤석민을 퇴장시키는 바람에 1구도 못 던지고 쫓겨나고 대신 봉중근이 급히 올라왔다. 프런트의 초대형 사고. 이 과정을 심판이나 위원회가 민감하게 받아들였더라면 재경기 내지 몰수패라도 나올 상황이었다는 점[11], 대만측에서도 윤석민을 퇴장시킨 후에도 이런저런 항의를 하며 제스쳐를 취했다는 점, 비록 크게 리드해나가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분위기가 매우 미묘해지는 바람에 등판투수의 기복에 문제가 있을 수 있었다는 점[12] 등 큰 문제가 될 뻔했다.
이일로 기아갤과 야갤에선 윤종범, 윤유령, 윤투명, 윤실종, 윤미아, 윤난입, 윤톨이, 윤누락, 윤나가, 윤간인, 윤난입, 윤리건, 윤명인간, 윤유령투수 등 김별명 못지않은 온갖 별명을 얻었다.
그래도 18일 준결승 중국전에는 제대로 나와서 150km/h 가 넘는 공을 뿌리며 호투했다.
이후 19일 대만과의 결승전에서는 선발 류현진 다음으로 마운드에 올라가 5이닝 7k 무실점, 9회까지 모두 던지며 승리투수가 되었다. 류현진이 4이닝 3실점으로 흔들렸지만 휘둘리지 않고 호투를 해서 경기 끝까지 안심하고 지켜본 국민들에게 박수를 많이 받았다. 야갤러들 마저 공황甲이라 부르며 칭송했다. 특히 7회의 3타자 연속 삼진은 이 경기의 백미.

2.5.5. 2013 WBC



경기
선발
이닝
방어율


홀드
세이브
피안타
피홈런
자책점
삼진
4구
1
1
4⅓
4.15
0
1
0
0
4
0
2
2
1
윤석민은 2013 WBC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서 참가했다. 4년전에 이어 커리어 2번째 WBC 출전이다. 이 대회에서 류현진, 김광현이 각각 MLB진출과 부상으로 대표팀 합류를 고사했기 때문에 팀의 에이스로서 윤석민의 어깨가 어느때보다 무거웠던 대회였다.
세간의 예상대로 팀의 에이스 윤석민은 네덜란드 야구 국가대표팀과의 1차전에 선발등판했다. 당시 네덜란드의 타선은 한국언론에 과소평가받았지만 내실있는 강타선이었다. NPB 2년 연속 홈런왕 블라디미르 발렌틴, MLB통산 434홈런을 기록한 앤드루 존스, MLB 상위 유망주였던 안드렐톤 시몬스, 잰더 보가츠 등 해외에서 이름있는 선수들이 다수 포진되어 있었다. 이 타선을 상대로 윤석민은 4.1이닝 2K 2실점(4피안타, 1피볼넷)을 기록하며 제 역할을 어느정도 해줬다. 하지만 팀 타선이 네덜란드 투수진을 상대로 단 한점도 뽑지 못하면서 패전투수로 남게 되었다.
이후 대한민국호주, 대만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어 2승 1패를 기록했지만 이 때의 5점차 대패를 극복하지 못하고 사상 첫 WBC 1라운드 탈락의 수모를 맛봐야만 했다.
최종성적: 1경기 4.1이닝, 0승 1패, 4K, ERA 4.15

3. 골프선수 경력


은퇴 이후 한동안은 외부 활동을 자제하고 간간이 TV 및 유튜브를 통해 근황을 알렸다가, 2020년 12월 22일 정푸드코리아의 스폰서십 체결 소식과 함께 KPGA 2부투어 도전을 알리며 프로골프선수로 전향을 알렸다.
야구선수 시절부터 골프에 두각을 나타내기도 했고 오프시즌 야구인 초청 골프대회에서 몇 번 초빙을 받으며 아마추어 레벨에서는 어느 정도 실력을 인정받기는 했지만, 프로로 전향한 것은 이례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해외에서도 투수 존 스몰츠가 은퇴 이후 골프대회에 도전을 했지만 어디까지나 아마추어 자격으로 도전에 나선 것이었다.
FA계약으로 거액의 금액을 안겨줬음에도 어깨수술로 인해 야구선수를 은퇴하며 KIA의 전력에 마이너스를 안겨준 것으로 인해 지금도 많은 비난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윤석민의 프로골프선수 도전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12월 26일 본인의 SNS를 통해 프로 전향이 아닌 세미골퍼 자격증을 따려고 하고있으며, 2부투어는 참가비만 내면 누구든 참여 가능하다며 해명했다.

[1] 야수치고는 발이 너무 느린 단점도 있었다.[2] 은퇴 이후 언급한 바로는 전날 올림픽 엔트리에 선발되지 못한 것 때문에 경기 당일 새벽에 술을 마시고 던졌다고 한다.[3] 일본의 좌완 투수 스기우치 토시야가 이전에 비슷한 짓을 하다가 부상당한 적이 있다. 후술하겠지만, 이후 안티들이 윤석민을 깔 때 윤복서라고 부르기도 했다.[4] 공교롭게도 이 중 홍성흔조성환은 2010년 골든글러브 수상자다. 전원 3할 타자에 홍성흔의 경우 이승엽의 한 시즌 타점 신기록 갱신 가능성까지 있는 상태였다. 조성환은 전 시즌에 채병용에게 공을 맞아 광대뼈 함몰에 전치 8주 판정을 받은 적도 있고.[5] 이 고의사구가 롯데팬들의 분노를 키웠다.[6] 우울증 등의 정신질환으로 추정되나 기아빠로 유명한 이선호가 윤석민을 옹호하겠답시고 공황 장애라고 기사를 써 버린 것. 이에 대해 윤석민은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하였다. 이 기사 때문에 공황 장애에 걸린 적도 없는데도 윤공황(...)으로 불리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7] 네이버 측에서 조성환의 활약상을 담은 동영상들을 올리면서 이 사건도 같이 올렸다.[8] 다만, 이 말을 믿을수 없다는 의견이 있다. 5월에 은퇴의사를 밝혔던 선수였고 나아지지 않아서 은퇴를 이미 결심한 상황이라면, 신임 감독 환영행사때 유니폼을 입고 나타나는 일 따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의견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주장에는 연봉협상 과정에서 자존심이 상해서 박차고 나가서 은퇴를 결정했다는 의견이 있다. 물론 짧은 시간 내에 생각이 바뀌었을 수도 있고 사실을 확인하기는 어렵겠지만 미운털이 심각하게 박혀있고, 2018시즌 보여준 이기적인 모습을 생각해보면 아주 허무맹랑한 소리는 아니기에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하지만 2015년 어깨 수술 이후 본인이 수술 이후 정상적인 복귀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직감했다고 은퇴 이후 인터뷰에 밝힌 걸 보면 틀린 말은 아닐수도... 어찌되었던, 진실은 저 너머에.[9] 윤석민의 1군 복귀로 그 전까지 준수하게 선발 로테이션을 돌던 한승혁임기영이 선발과 불펜을 와리가리하면서 결국 부진에 빠지고 말았다.[10] 당시 규정상 24명 엔트리에, 경기당 22명까지 출전 가능하다. 윤석민 본인은 아예 엔트리에서 누락된 줄 알았다고 한다.[11] 물론 굳이 법대로 하자! 라면 규정상의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원래 이런건 빌미를 잡혀봤자 좋을거 하나 없거니와 조범현 감독도 몰수패 판정이 나올까봐 조마조마했었다고 하니 말 다했다.[12] 우천지연 등의 예로도 알 수 있지만 타자도 리듬이 깨지지만 이 경우 어깨가 식고, 페이스를 잃은 투수쪽이 더 큰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이걸 빌미로 역전이라도 당했었다간 큰일이었다. 그런 사례가 적지 않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