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도하 아시안 게임/야구
1. 개요
2. 참가국
3. 대회 일정
3.1. 1일차 1경기: 중국 4 : 1 태국
3.2. 1일차 2경기: 필리핀 2 : 17 일본
3.3. 2일차 1경기: 대한민국 2 : 4 중화 타이베이
3.4. 2일차 2경기: 필리핀 4 : 15 중국
3.5. 3일차 1경기: 일본 10 : 7 대한민국
3.5.1. 당시 일본 대표팀 명단
3.6. 3일차 2경기: 태국 0 : 16 중화 타이베이
3.7. 4일차 1경기: 대한민국 12 : 2 필리핀
3.8. 4일차 2경기: 중국 0 : 16 일본
3.9. 5일차 1경기: 중화 타이베이 4 : 2 중국
3.10. 5일차 2경기: 태국 0 : 12 대한민국
3.11. 6일차 1경기: 일본 6 : 0 태국
3.12. 6일차 2경기: 중화 타이베이 15 : 0 필리핀
3.13. 7일차 1경기: 필리핀 1 : 8 태국
3.14. 7일차 2경기: 대한민국 12 : 2 중국
3.15. 금메달 결정전: 중화 타이베이 8 : 7 일본
4. 최종 결과
5. 총평
6. 후폭풍
7. 여담
8. 관련 문서
1. 개요
2006 도하 아시안 게임의 야구 경기 결과이다.
2. 참가국
대회 방식은 플레이오프 없이 6팀이 풀리그 성적 순으로 메달을 결정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3. 대회 일정
3.1. 1일차 1경기: 중국 4 : 1 태국
3.2. 1일차 2경기: 필리핀 2 : 17 일본
3.3. 2일차 1경기: 대한민국 2 : 4 중화 타이베이
사실 이 경기가 김재박호의 가장 중요한 경기였고, 김재박 감독도 이 경기를 사실상 결승 진출의 교두보로 여겼다. AG 야구팀, 30일 대만과 사실상 결승전 특히 당시 대만은 궈홍즈(LA 다저스), 장첸밍(요미우리 자이언츠), 린언위(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린웨이추(한신 타이거즈) 등 해외파를 포함한 대만의 드림팀이었고 대회 직전 열린 아시아 시리즈에서도 라뉴 베어스가 삼성 라이온즈를 잡아내자 대만이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기사가 쏟아져 나온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대만전력 역대 최강” 전력분석팀 “예상보다 훨씬 강해”, 무서운 ‘대만’ 쫓기는 한국야구, 프로에서도 '난적'으로 성장한 대만야구, 빅리거 '궈홍즈', 대만전의 새로운 키워드
또한 2001년 야구 월드컵에서 현역 프로 선수들이 참여한 대표팀이 실업팀으로 꾸려진 대만대표팀에게 5:0으로 떡실신 당한 타이완 참사, 2003년 삿포로에서 일격을 당한 삿포로 참사의 쓰라린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 경기를 바라보는 대표팀의 시각은 상당히 무거웠다. 거기다 경기 직전 대만 감독이 금메달은 일본과 한국이 아닌 우리꺼다.라는 도발이 기사화 되기도 했다.
경기가 시작되고 손민한은 3이닝까지 단 1개의 안타만을 내주는 안정적인 피칭을 했으나, 4회초 시애틀 싱글 A에서 뛰고 있던 첸융지에게 솔로 홈런을 맞으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어 2루타를 친후 3루까지 도루를 시도해 성공한 천진펑을 린즈성이 불러들이는데 성공하며 2:0으로 앞서나갔다. 5회초에는 시에자센에게 솔로홈런을 얻어 맞고 결국 강판되었다.
대표팀은 4회말 이대호의 3루타와 이진영의 적시타로 1점을, 6회말에 이대호의 2루타와 이진영의 적시타로 1점을 내며 따라 붙었다. 하지만 8회초 첸융지가 바뀐 투수 장원삼을 상대로 또다시 솔로 홈런을 때려내며 4:2로 달아났고 이대로 경기가 끝나며 1패를 안게 되었다. 대표팀 입장에서는 5회말에 2사 2,3루의 찬스를 놓친 것이 뼈아팟다. 또한 궈홍즈(5이닝 6피안타 1실점)와 장첸밍(4이닝 5피안타 1실점)의 위기관리 능력이 돋보였는데 대표팀은 안타 11개로 10개를 친 대만 대표팀보다 많이 출루 했음에도 점수는 단 2점에 그쳤다. 한국야구, '대만 공포증' 이젠 현실로, 장점 못 살리고 약점 공략까지 실패, 투지 실종된 한국 야구, '고액연봉 군필자'들이 경기 망쳤다. 경기후 김재박 감독은 "베테랑 부재가 아쉽다."는 평을 내놓았다.
금메달을 따기 위해서는 남은 경기를 모두 이기고 대만이 일본에게 패하길 바래야 했다. '도하의 비극' 한국야구, '기적' 없으면 金 난망
이 경기 결과도 충격이었는데 문제는 그 다음 경기였다.
3.4. 2일차 2경기: 필리핀 4 : 15 중국
3.5. 3일차 1경기: 일본 10 : 7 대한민국
승리 투수: 이소무라 히데토
패전 투수: 오승환
'''혀를 깨물고 죽고 싶은 심정의 게임이었습니다.'''
이 경기를 중계한 '''송인득''' 아나운서의 클로징.
대만전 패배 이후 대표팀은 남은 경기를 모두 이겨야 금메달의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이 경기는 다른 경기도 아닌 한일전이었기에 엄청난 관심을 불러 보았다. 한국의 선발은 류현진, 일본의 선발은 고마츠 사토시였다.'''한국 야구에 있어서 오늘은 국치일이나 다름없습니다.'''
허구연의 방송 마무리 멘트.
첫취점을 낸 것은 한국 대표팀이었다. 2회초의 무사 1,2루의 기회를 날렸지만 3회초 이용규의 출루, 이병규의 안타로 만들어진 1사 1,3루의 득점 찬스에서 이대호가 쓰리런 홈런을 쳐냈고, 이어 이진영이 볼넷과 도루로 만든 1사 2루의 찬스에서 강판당한 고마츠 사토시의 뒤를 이어 올라온 하세베 코헤이가 폭투를 기록, 2루주자 이진영이 홈까지 전력질주를 감행해 1점을 더 내는데 성공한다. 이대로 가면 무난히 승리하나 했는데...KBO의 센세이션을 일으킨 슈퍼루키 류현진이 3회 갑자기 무너지며 경기는 한치 앞도 알수 없게 되었다.
2타자를 볼넷으로 내주며 제구력 난조를 보인 류현진은 1사 1,2루의 위기에서 3번타자 쵸노 히사요시에게 2타점 2루타를 얻어 맞고, 이어 사이고 야스유키에게 투런포를 얻어맞으며 동점을 만들었다. 김재박 감독은 류현진을 믿는 건지 별다른 제스쳐가 나오지 않았는데 류현진은 아웃을 잡지 못하고 안타와 볼넷을 내주며 1사 1, 2루를 만들었다. 그리고 노모토 게이에게 1타점 적시타를 맞으며 강판, 2⅓이닝 5실점이라는 최악의 피칭을 보이고 내려왔다.
우규민이 급하게 올라와 불은 끄는데 성공했는데 4회말에 올라온 이혜천을 상대로 요시우라 다카시가 투런포를 때려내며 일본이 4:7로 앞서나가기 시작한다. 다행히 대표팀은 한일전 특유의 집중력을 발휘해 5회초에 이병규의 안타를 시작으로 만들어진 2사 1,2루의 기회에서 장성호가 적시타를 때려내며 1점을 따라 붙었고 8회초에는 2사후 정근우의 기습번트 안타와 이용규의 볼넷으로 2사 1,2루의 찬스가 만들어 졌는데 박진만과 이병규의 연속 안타로 2점을 내며 7:7 동점을 만드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9회말, 대표팀은 오승환을 올리는데, 1사 1, 2루의 위기를 만들고 난 이후 쵸노 히사요시에게 끝내기 쓰리런을 맞고, 결국 경기는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다른 경기도 아니고 한일전, 거기다 프로 선수가, 사회인으로 구성된 야구팀에게 역전패를 당한 것.
후반부에 접어들자 이 경기를 중계한 MBC에 '''"무한도전 틀어라!"'''라는 비난이 쏟아졌으며, 경기가 끝난 후, '''"야구 집어쳐라"'''라는 비난과 함께 3회 2점홈런과 함께 역전을 허용한 '''류현진'''과 끝내기 홈런을 맞은 '''오승환'''은 죽도록 욕을 먹었다.[1]
이 경기 이후 김재박 감독은 "팬들을 볼 면목이 없다"는 말만 남기고 경기장을 떠낫다.
당시 경기후 반응은 그야말로 격렬했다. 언론뿐 아니라 팬들도 들고 일어나 그야말로 아수라장 그자체가 되었다.
"한국 야구에 오늘은 국치일이나 다름없어"
‘한국 야구 치욕의 날’,日사회인팀에 7대10 패
한국 야구, '이변의 주역'서 '희생양'으로 전락
김재박 야구, 게시판 성토 글로 들끓어
한국 야구, 도하 AG 충격 '변화·개혁의 밑거름 될까'
3.5.1. 당시 일본 대표팀 명단
당시는 비시즌 기간이라서 프로선수들의 참가도 가능했지만, 12월과 1월은 계약기간이다 보니 프로선수들의 참가가 보류되면서 일본 국가대표팀은 사회인야구 선수 17명, 대학야구 선수 5명 등으로 22인 엔트리를 채웠다. 사실상 일본 야구계 전체로 따지면 '''프로 3군''' 정도의 스쿼드라고 볼 수 있겠다.
'일본의 사회인야구'에 대해서 알아보자면 일본의 사회인야구는 그 스펙트럼이 넓어서 일반 동호회팀부터 기업/지자체팀까지 매우 다양하다. 특히 기업에서 운영하는 팀의 경우엔 말이 사회인야구지, 야구 명문 고교/대학 출신으로 실질적으로는 국내에서는 사라진 한국실업야구 수준의 팀이다. 당시 출전한 선수들 중 대학야구 선수를 제외한 사회인 야구팀 소속 선수들은 모두 이러한 실업야구 수준의 기업팀 소속이었다.관련 기사
당시 멤버들 중에도 프로로 진출한 선수도 몇몇 있긴 있었다. 드래프트 상위 순번에 뽑힌 선수들도 더러 있었다. 다만 이후 퍼시픽리그 신인왕(2008년)을 탄 코마츠 사토시, 센트럴리그 신인왕(2010년)에 오른 초노 히사요시,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의 주축 중간계투이자 '''일본프로야구 통산 홀드 기록 보유자'''로 성장한 미야니시 나오키 정도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그다지 프로에서 대성하지는 못했다. 다카사키 겐타로는 저반발 공인구 시절에 괜찮은 선발 요원으로 활약했으나 그 이후 제대로 활약이 없었고, 노모토 게이는 2군 본즈의 모습을 보여주며 1군에서는 대타 요원 정도로나 활약했고, 드래프트 1위 투수였던 하세베 코헤이도 제구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저반발구 시즌 이후에 고전했으며 나머지 드래프티인 투수 핫토리 야스타카, 포수 다나카 다이스케 등은 그냥 망했다. 나름 기대를 받았던 선수들이 있었지만, 프로에서 성공한 선수는 몇 없다. 프로 지명순위가 가장 낮았던 미야니시가 가장 꾸준한 커리어를 보낸 것도 재미있는 점.
아무튼 일본의 프로리그가 아닌 사회인 야구팀에 한국 KBO리그를 대표하는 선수들이 패배를 하는 모습은 한국의 야구팬들에게 큰 실망을 주었음이 명백하다. 다만 일본의 사회인야구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가 전무하다시피했던 터라 초노가 '''오뎅 장수''''니 하는 낭설이 사실인양 널리 퍼졌고 심지어는 개그 소재로 써 먹기까지 하는 등 제대로 된 이해를 가로막았다.
3.6. 3일차 2경기: 태국 0 : 16 중화 타이베이
3.7. 4일차 1경기: 대한민국 12 : 2 필리핀
선발투수 장원삼(5이닝 1피안타 1실점 5K)의 호투와 이진영, 조동찬, 이대호의 홈런을 앞세워 콜드 승을 거두었다. 경기후 감독 인터뷰
이대호는 필리핀 전 이후 사과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3.8. 4일차 2경기: 중국 0 : 16 일본
3.9. 5일차 1경기: 중화 타이베이 4 : 2 중국
3.10. 5일차 2경기: 태국 0 : 12 대한민국
8회 콜드승을 거두었다. 경기 내용
3.11. 6일차 1경기: 일본 6 : 0 태국
3.12. 6일차 2경기: 중화 타이베이 15 : 0 필리핀
3.13. 7일차 1경기: 필리핀 1 : 8 태국
3.14. 7일차 2경기: 대한민국 12 : 2 중국
중국과의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며 동메달을 따내는데 성공했다. 한편 선발 류현진은 대만전에 이어 중국전에서도 불안불안한 모습을 보였는데 중국전 선발로 나와 4이닝 4피안타 1피홈런 2실점을 기록했다.##
3.15. 금메달 결정전: 중화 타이베이 8 : 7 일본
4. 최종 결과
결국 이 대회에서 대만, 일본이 각각 금메달, 은메달을 받았으며 대한민국은 동메달을 차지했다. 참고로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에 야구가 채택된 이후로 한국, 일본, 대만의 삼파전이 지금도 계속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말이 동메달이지 사실상 '''꼴찌'''라고 해도 무방하다.
5. 총평
하일성 사무총장, 도하참사 심경 고백
요약 정리
2006 도하 아시안 게임에서 일어난 '''대한민국 야구의 흑역사 중의 하나'''가 되었다. 말 그대로 야구판 오만 쇼크라고 볼 수 있으며 그 후폭풍은 오만 쇼크보다 심각한 수준이었던 사건. 3년 전, 2003년의 삿포로 참사 때와 똑같은 경기 내용으로 벌어진 일이라, 교훈을 개한테 줘 버리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톡톡히 보여 주었다.
그래도 오만이 아랍에서도 도깨비팀이었다는 점. 무엇보다 오만 골키퍼 알리 알 합시는 아랍, 아니 아시아에서 가장 성공한 EPL에서 오랜기간 주전으로 활약하는 등, 빅 리그 골키퍼 선수가 되었다는 점도 있지만 이 때는 이런 쉴드도 안 통했다.
이로 인하여 대만 야구가 도하를 통해 자신감을 얻은 반면, 대한민국에선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고조되었던 기대를 한꺼번에 무너뜨리게 되었다.
도하 참사의 제일 큰 원인은 풀 시즌을 치른 주축 선수들의 심각한 피로에 있었다. 또한 의도적으로 서울 라이벌 팀 손시헌을 뽑지 않고[10] 검증되지 않았다며 이미 메이저리그에서 유망주로 주목받던 외야수 '''추신수'''[11] 를 선발하지 않는 등[12] 이후 관계자들이 토로했듯이 WBC의 성공에 태만해져서 완전한 병역 미필 선수단도 아니고 그렇다고 최상급 선수단도 아닌 어설픈 진용을 꾸린 것이 더욱 더 독이 되었다.
베테랑들은 특히, 이 대회의 목적 의식이 없었으며, 뉴 페이스들은 국제대회 경험이 없어서 서툴렀다. 거기에 대다수가 지쳐 있었고, 이미 부상이 심각했던 투수 이혜천과 신철인을 단지 성적이 좋다는 이유로 뽑았다가 두 선수가 개점휴업을 하면서 사실상 투수는 7명뿐이었다. 그 중 하나는 아마추어 쿼터인 대학생 정민혁이었기에, 실질적으로 기용이 가능한 투수는 6명뿐이었다. 그 중 성적이 좋았던 류현진과 손민한이 선발에서 개털렸고, 마무리였던 오승환마저 털리니 어떻게 손을 쓸 도리가 없었다. 이혜천은 대회 이후 허리디스크 수술을 받아 병역이 면제됐지만, 2007년을 개점휴업 상태로 지내다가 한국시리즈 때가 와서야 등판했다.[13]
다만, 손시헌의 경우 대신 뽑힌 박기혁의 현장 평가가 워낙 좋았던데다[14] 성적 자체가 큰 차이가 없었고, 주전 유격수는 박진만으로 정해진 상태에서 백업 유격수 자리를 놓고 경합하다가 떨어졌기 때문에 이게 문제였다고 보긴 힘들다. 그보다는 이미 부상이 확인된 신철인과 이혜천을 빼고 마당쇠 역할을 해줄 다른 투수를 넣었다면 이러한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도하 참사 이후 베이징에 승선한 군 미필 선수들은 강민호, 류현진, 윤석민, 이대호, 이용규, 이택근, 장원삼, 정근우 등이다. 이들은 훗날 베이징에서 도하의 아픔을 씻어냈다.
여담으로 당시 윤석민, 이용규, 장성호가 차출된 KIA는 모두 당시 활약이 괜찮았던 덕에 까임에서 벗어나 팬들끼리 소소한 기쁨을 누렸다나 뭐라나...
6. 후폭풍
이 사건 이후로 야구장에서 마운드를 낮추고, 경기 공인구도 기존에 사용되던 것과 달리 좀 커졌으며 심판들의 스트라이크 존에 대한 적용에 대한 교육 작업이 뒤따랐다. 그리하여 당시 '''김동주''', '''이승엽''' 말고는 성적을 내지 못한 타자들이 많았으나, 도하 참사 이후로 저렇게 바뀌면서 공격적인 타자들이 점점 늘어났다.[15] 또한 선수 차출 논란이 일자 축구와 마찬가지로 기술위원회를 설립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야구도 '기술위원회' 생긴다
그리고 이 대회에서 뛰었던 이대호, 이용규 등의 새로운 선수들이 성장해나가면서 '''베이징 올림픽 야구''' 올림픽 사상 첫 전승무패 금메달을 시점으로 한국야구가 다시 정상에 오를 수 있게 된 계기 중 하나가 되었으며 큰 시련으로부터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이에는 KBO의 국제대회 적응을 위한 노력들도 나름의 영향이 있었다.
이 참사 때문에 프로야구 흥행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우려가 되었다. 2006년 시즌의 관객수가 WBC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전년도에 비해 되레 떨어졌기 때문. 하지만 이 사건에 대한 반성이 효과를 발휘했는지 결국 2007년 시즌은 다시 410만명을 기록하며 다시 흥행 상승세를 기록했다.
그 뒤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도하 참사과 비슷한 일이 실제로 이탈리아 대표팀에게 일어났으며 여기는 무승부였지만 이탈리아는 지난 대회 우승국이었고 상대가 축구 약팀으로 유명한 뉴질랜드였다는 점에서 도하 참사보다 이만한 쇼크는 더 컸다. 참고로 뉴질랜드는 실제로 당시 프로선수가 아닌(2010년 시점),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은행원 앤드류 배런(정확히 말하자면 호주 2위 은행인 웨스트팩은행 근무중)이 막판에 4분간 교체출장했다.
10주간 몰래 휴가까지 내가면서 뉴질랜드 대표팀으로 활약하며, 자신의 조국을 월드컵 본선까지 진출시킨 그는 일에 집중하고 싶다고 밝혀서 은퇴했다. '축구계의 엄친아' 카카가 취미로 주식을 한다면, 그는 투자은행에 근무하면서 직업으로 주식을 한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그는 직업으로 카카, 호날두 연봉의 몇 배에 해당하는 돈을 자기가 굴리면서 취미로 축구도 하는 거다. 실제로 비즈니스 SNS인 Linkedin에 이름이 등록되어 있으니 검색해보자.
팬들은 이런 일을 통해 반면교사하고 재도약하기를 바랬고, 실제로 2년 후 올림픽 금메달과 2009년 WBC 준우승으로 화려하게 반등에 성공하지만... 이후 교훈을 잊어버렸는지 '''원정과 홈 모두에서 또 다시 쓴맛을 봤으며, 2018년엔 이를 능가하는 대형 사고를 저질렀다.'''[16]
7. 여담
- 대만의 첫 아시안 게임 야구 금메달이었다. 이후 대회에서는 은메달 2번과 동메달에 획득을 하였다.
- 류현진이 일본 전에 엄청 약하다는 것을 야구팬들이 이 때부터 알게 되었다는 썰이 있었다.
- 이 대회에 나간 류현진/이대호/오승환은 훗날 MLB에서 뛰게 된다. 윤석민만 유일하게 메이저가 아닌 마이너에서 1시즌 뛰고 국내로 복귀한다.
- 2006년 한해동안 대만에게 3연패를 당하면서 충격이라는 반응이 있었다.
- 대회가 끝난후 궈홍즈를 비롯한 대만 선수 3명이 도핑테스트에 발각되었다는 것이 알려졌다. AG야구 한국참패 주역 대만 투수 약물 양성반응
- 김성근 감독은 김재박 감독은 불행히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라며 한국야구의 기반을 다져야 한다고 말했다.
- 한국전에 출전한 초노 히사요시, 코마츠 사토시, 미야니시 나오기는 프로에서의 활약으로 WBC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었다.
8. 관련 문서
[1] 참고로 이들은 그 뒤 KBO 역대 최고의 선발 투수와 마무리 투수가 되면서 최초로 메이저로 직행하게 되었다. 근데, 사실 류현진과 오승환은 각각 당해년도 신인선발투수 역사상 최초 200이닝에 포시와 국대까지 합산 '''230이닝'''에 달하는 최악의혹사를 치르거나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을 시작으로 쉴 틈 없이 달렸기에 첫 풀시즌이자 혹사로 어쩔수없는게 당연하다는 평론으로 이어졌다.[2] 2015년을 마지막으로 방출[3] 사이드암에 가까운 낮은 왼손 스리쿼터 투구폼이며, 현재는 중간계투의 주축으로 활약중이다. 2018년 현재 '''일본프로야구 통산 홀드 기록 보유자'''이며 일본프로야구 유일의 통산 300홀드 투수이다. 데뷔시즌인 2008년부터 11년 연속으로 시즌 50경기 이상 등판해 2009년부터 10시즌 연속 두 자릿수 홀드 기록을 달성했으며 홀드왕(최우수중간계투)도 2회 차지했다.[4] 2009 시즌 중간계투로서 56경기에 등판했고 2011, 12 시즌에는 괜찮은 선발 요원으로로서 활약했다. 2017년을 마지막으로 은퇴.[5] 2008년 오릭스가 2위를 할 때 '''15승 3패 2.51 ERA 151탈삼진'''의 맹활약을 떨치며 퍼시픽리그 신인왕을 차지했고 2009 WBC 국대에도 뽑혔다. 문제는 바로 그 해에 '''1승 9패 7.09 ERA'''로 폭망하더니 끝내 부활하지 못하고 은퇴했다. 2009~2014년 성적이 9승 22패...[6] 2016년을 마지막으로 방출, 구단 영업사원으로 새출발.[7] 2014년을 마지막으로 방출, 오릭스 버팔로즈와 계약했으나 2016년 또 방출.[8] 사실 프로에 갈 기회가 몇 번 있었지만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가겠다는 일념으로 다른 팀의 지명을 '''두 번이나''' 거부한다. 자세한 사항은 항목 참고.[9] 2018년을 마지막으로 방출. 히라타 료스케 등에 밀려 끝내 주전 자리를 한 번도 획득하지 못하고 주로 대타 요원으로 쓰였다. 현재 주니치의 스카우트로 있다.[10] 단, 손시헌은 백업 유격수 경쟁에서 떨어진 거라 실질적으로 전력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 힘들다.[11] 추신수는 당시, '''최희섭''' 처럼 2번째 메이저리거 타자 선수가 되어 전도유망한 유망주였다. 알다시피 추신수는 4년 후 광저우에서 웃었다.[12] 덕분에 추신수가 정상급으로 자리를 잡은 현재에 이르러서는 김재박이 당시 추신수를 뽑지 않았던 이유로 내세운 '''"추신수같은 선수는 국내에도 널렸다."'''는 두고두고 까야 제맛인 망언으로 정착했다.[13] 이혜천의 해마다 등판 경기와 이닝 수를 보면, 사람이 아닐 지경으로 보인다. 그런 인재를 매번 등판시킨 김인식/김경문 감독들의 혹사가 미친 짓이다.[14] 나쁘게 말해서 손시헌은 '''2004년 프로야구 병역비리 사건'''에 연루된 인물 중 하나였다.[15] 당시 변명을 하자면 김동주는 1회 WBC에 나가서 생애 첫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을 하다가 어깨 골절로 이미 시즌을 접은 상태였다 그리고 커리어 로우이자 FA 취득을 1년 뒤 늦춰졌다., 이승엽은 거인에서 '''4번 타자''' 중책을 맡느라 국내야구는 신경 쓸 일이 없었다.[16] 그 뒤 금메달을 따긴 했지만 네티즌들의 평은 좋지 못한 상황이며, 같은 길을 걸었던 남자 축구 팀과는 반응이 대조적이다. 여기는 그나마 고르게 뽑고 감독이 어수선한 팀 수습까지 했으니 당연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