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린(고려)

 

'''조선 태조의 6대조'''
'''李璘 | 이린'''

'''성씨'''
이(李)
'''휘'''
린(隣[1] / 璘[2])
'''부친'''
이용부
'''부인'''
남평 문씨[3]
'''형제'''
이준의, 이의방, 이거
'''6대손'''
태조
'''생몰년도'''
1130년대 추정 ~ 1174년?[4]
1. 개요
2. 생애
2.1. 최후 관련 이설
3. 가족과 후손
4. 매체에서
4.1. 무인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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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무신정권의 집권자 '''이의방의 동생'''이자,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6대조.''' 의종 ~ 무신정권기의 관료였던 문극겸의 사위이다.

2. 생애


전주 자만동[5]에서 대장군 겸 태자청 도솔부솔[6] 이용부(李勇夫)와 정승 이형의 딸 이씨 부인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형제는 4남 1녀로 장남은 이준의, 차남은 이의방, 3남은 이린, 4남은 이거이며 딸은 우학유의 부인이었다.
정확한 출생 시기는 모르나 장인 문극겸이 형 이의방보다 1살 어린 것을 볼 때, 이의방과는 부자지간에 가까울 정도로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듯하다. 이의방이 무신정변으로 집권한 이후 1174년(명종 4년) 12월에 추밀원 집주로 임명받았다.#
집주로 부임한지 일주일 만에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고자 군을 끌고 나갔던 형 이의방정중부의 아들 정균이 보낸 승려 종참 등에 의해 암살당했다.# 이의방은 역적으로 몰렸고, 가문 역시 무사하지 못했다. 왕태자비였던 이의방의 딸은 폐출되었고[7] 이의방의 형 이준의와 그의 가족들도 전부 살해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2.1. 최후 관련 이설


정작 이의방의 몰락 이후 이린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록의 부재로 알 수 없다. 여러 설들이 있는데, 그 중 명종의 총애를 받았던 장인 문극겸의 보호를 받아 살아남았다는 설이 가장 잘 알려진 설이다.
하지만 이린 역시 형들과 같이 살해당했다는 설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일부 있다. 《고려사절요》에 '정균이의방을 죽인 후 이준의 '''형제''' 및 그의 당여 고득원과 유윤원을 잡아 모두 죽였다'고 적혀 있기 때문.#[A]
저기서 주목할만한 문장은 '이준의 '''형제''''이다. 만약 저 때 이준의'''만''' 죽인 것이었다면 굳이 이준의 '''형제'''라고 뒤에 덧붙였을 리 없다. 그냥 이준의라고만 적어도 되니까. 그리고 문장을 잘 보면#[A], 이의방과 이준의 형제가 동시에 죽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다른 형제도 정균 세력에게 살해당했음을 유추할 수 있으며 그렇다면 그게 바로 이린이라는 것이다.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홈페이지의 이린 항목에는[8], 김영곤 작가가 집필한 역사소설 《고려왕비열전》[9]을 인용하여 '김영곤의 《고려왕비열전》에는 이린이 1174년에 참살당한 것으로 나와있다' 라고 적혀있다.[10]
그렇지만 《고려사》 다른 기록을 보면, 위에서 말하는 이준의 형제가 꼭 이린으로 봐야할 지에 대해선 솔직히 애매한 부분이 많다는 반박도 더러 있다. 《고려사》 1171년 10월 11일 기록에는 궁궐에 불이 났을 때, 이준의(李俊儀)가 입직했다고 언급하고, 뒤에 '''이의방(李義方) 형제'''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이의방 형제는 정황상 이의방과 이준의를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 그래서 이 때처럼 이의방과 이준의가 참살당할 때도 둘의 관계를 강조하고, 둘이 죽은 시기는 다르지만 어쨌든 두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형제'''라고 뒤에 덧붙인 것으로도 볼 여지도 있다.
정황상 정중부가 집권 후 문극겸 등을 비롯한 문신들을 이전처럼 힘으로 누르는 것이 아니라 꽤 우대해줬던 것을 보면 문신들을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는 문극겸의 사위인 이린 역시 대놓고 죽이기에는 의외로 어려웠을 가능성이 높다. 훗날 정중부의 사위 송유인이 문극겸과 한문준을 탄핵하여 좌천시키자 인심을 크게 잃고 조정 신료들의 미움을 받았다는 기록도 전해지고 있을 정도이며 저 일은 결국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유발하여 경대승이 정중부를 척살하는 명분이 되기도 했다.[11] 설령 저때 이린이 살해되었다고 해도 이린이 문극겸의 딸과 혼인한지 이미 여러 해가 지난 시점이었으니 아들 이양무가 태어나 있었을 확률도 있고, 그렇다면 문극겸의 비호 아래 이양무는 이린 가문의 기반이 있어 보호받을 수 있는 전주로 보내지거나 하여 어떻게해서든 무사히 살아남았을 것이다.
확실한 것은 살았든 죽었든 저 때 이후 이린의 대한 기록은 일절 전해지지 않다는 것. 이린에 대한 기록이 거기서 끝나 이후 이린의 삶을 알 수 없는 반면, 동생 이거는 형들이 죽어나가는 와중에 기어이 살아남아서 1243년까지 살다 죽었다. 형 2명이 1174년에 살해되었고, 다른 형 1명은 1174년 이후 기록이 없어서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알 수 없는데, 막내는 형들이 죽은 후에도 무려 69년을 더 살았던 것이다. 참고로 이거는 고려 고종에게 궤장까지 하사받은 고려의 충신으로 이린의 아들 이양무보다도 더 오래 살았는데 그러니까 숙부가 조카보다도 더 오래 살았다는 것이다.

3. 가족과 후손


이준의, 이의방의 존재가 전주 이씨 입장에서는 흑역사라서 족보에서 아예 지워버렸다. 사실 고려시대 무신정변 주동자로써 반역자로 찍힌 이의방과 혈연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별로 내키지 않았는지, 과거 전주 이씨의 족보에는 이린의 한자를 다르게 써놓는 등으로 애매하게 기록한 경우도 있었다. 현재는 전주 이씨 문중에서도 인정하고 있다.#[12]
동생 이거(李琚) 역시 문극겸의 딸과 혼인하였다. 그는 이의방 몰락의 신호탄이 된 조위총의 난 때 서경유수군 측에 섰다. 이 때 공을 세운 이거는 훗날 하빈군(河濱君)에 봉해졌으며, 하빈 이씨의 시조가 된다.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대장군 이양무(李陽茂)이다. 《씨족원류》에 따르면 딸은 유택(柳澤)과 혼인했다.
이양무의 5대손이 바로 태조 이성계이다. '''사실상 현존하는 대부분 전주 이씨의 조상'''.[13] 이후 가계는 조선/왕사 참조.

4. 매체에서



4.1. 무인시대


[image]
무인시대》의 이린
《무인시대》에서 전현이 이린 역을 맡았다. 재미있는 게 이의방 역을 맡은 서인석은 《태조 왕건》에서 견훤을 연기했고 전현은 견훤의 아들인 금강 역을 맡았다는 것. 즉 후백제의 왕과 왕자가 자기들의 나라를 멸한 나라에서 형과 동생으로 사이좋게 환생했다는 배우개그가 성립하는 것. 또한 전현은 《정도전》에서 이린의 6대손 이성계를 도운 조선 개국공신 조준 역을 맡았으며 다른 사극에서 이린의 후손인 조선 왕족들을 꽤 많이 연기하기도 했다.[14]
권력과 가문을 지키기에만 급급한 소인배에 불과한 큰 형 이준의(김동현 분)와 거병을 해서 세상을 바꾸어보겠다고 나섰으나 결국에는 타락한 채 난신적자로 전락해버린 둘째형 이의방과는 달리, 그나마 분수를 지킬 줄 아는 개념인으로 등장한다. 개경으로 올라온 것도 딱히 권력을 원해서가 아니라, 동생으로서 이의방을 도우려던 것일 뿐이었고 형들이 구설수에 오를 만한 행동을 할 때마다 이를 우려하며 비판하기도 했다. 가령 자신을 사위로 맞아들이기 싫어하는 문극겸(김종결 분)에게조차 핏줄만 아니었으면 이의방과 맞서 싸웠을 것이라고 대놓고 언급했었고 이의방의 명령을 받은 이광정(황범식 분)이 마을을 약탈하면서 저항하는 이들을 모조리 죽여버리자 문신들과 함께 이의방에게 항의했을 정도.
이의방이 암살로 몰락했을 때 장인인 문극겸의 도움을 받아 겨우 피신하는데 성공한다. 이 때도 이린은 문극겸이 찾아와 도망가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가문의 죄가 있다면 국법에 따라 그 죗값을 치르겠다"'''고 밝히며 의연히 벌을 받으려 했지만, 문극겸이 간곡하게 설득한 탓에 결국 피신하는 것을 선택한다.[15] 그리고 전주로 낙향하는 장면이 마지막.[16] 이 드라마에 등장한 무신들과 그 주변인물들 대부분이 영 좋지 못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걸 감안하면 그나마 제 명에 살아 남았던 케이스.
[1]고려사#, 《조선왕조실록》의 기록#.[2]조선왕조실록#, 조선 왕실 족보인 《선원계보》의 기록.[3] 문극겸의 딸이다.[4] 정황상 형들과 같이 사망했을 수도 있다는 추측이 있다. [5] 현재의 풍남동 이목대, 전주 한옥마을 일대.[6] 태자를 시위하는 역할[7] 훗날 이의방의 딸과 혼인했던 태자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강종(康宗)이다. 강종이 즉위한 후 이의방의 딸을 복권시켰고 사평왕후(思平王后)로 추존했다. 그리고 짧은 혼인이었음에도 둘 간의 금슬은 괜찮았는지 수령궁주라는 딸을 한 명 두었다.[A] A B 원문: ...(생략)... 이의방이 우연히 선의문(宣義門) 밖을 나가자 정균(鄭筠)이 몰래 종군승(從軍僧) 종참(宗旵) 등을 꾀어 호소할 것이 있다고 핑계를 대고는 이의방의 뒤를 따라가 틈을 엿보아 그를 죽이고, 사람을 여러 곳으로 나누어 '''이준의(李俊儀) 형제''' 및 그 당여인 고득원(高得元)과 유윤원(柳允元) 등을 수색하여 잡아 그들을 '''모두 죽였다'''....(생략)...[8] '16세(世) 인(璘) (3)' 단락 참조.[9] 2016년 금성출판사 발간[10] 원문: ...(생략)... 이의방이 피살되자 정중부는 왕명을 빌어 형 준의와 '''동생 린''' 등 1백여 명을 참살했다고 김영곤(金英坤) 작가의 <고려왕비열전>에는 적고 있다. ...(생략)...[11] 문신들 중 문극겸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송유인이 문극겸을 탄핵한 것이 경대승의 거병을 선택하게 되는 계기 중 하나가 되기도 했으며 이후 천민 출신으로서 이의민, 두경승과 함께 권력을 나눠 가졌던 조원정도 문극겸에 의해 끌어내려진 탓에 그를 죽이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당하기도 했다. 이런 기록들을 보면 문극겸이 조정 내에서 가졌던 영향력은 말년까지도 매우 컸다고 볼 수 있다.[12] '16세(世) 린(璘) (3)' 단락 참조. 그러나 '이의를 제기할 근거도 없지 않다'고 문장을 마무리 지은 것을 볼 때, 다른 견해의 제기 가능성도 열어둔 듯 하다.[13]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의 종파 분류에 따르면, 이린의 후손이 아닌 파는 시중공파(侍中公派, 이린의 숙부 이단신이 파조)와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 이린의 동생 이거가 파조) 뿐이다.#[14]조선왕조 500년 - 한중록》의 은전군(22대손), 《불멸의 이순신》의 입부 이순신(14대손), 《인수대비》의 금성대군(9대손).[15] 이때 문극겸은 "자네가 내 사위라서 국법을 피해 몸을 피하라는 게 아닐세. '''의기 때문에 가문이 멸족당한다면 장차 조상님들을 무슨 낯으로 뵙겠는가.'''"라며 간곡히 설득했다.[16] 저 장면에 깔린 내레이션의 내용이 "장차 이린의 6대손이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개창한 태조 이성계가 되시니, '''고려 황실과 이의방 가문의 악연은 이의방 사후에도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