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복

 


이름
이승복(李承福)
출생일
1959년 12월 9일
사망일
1968년 12월 9일(향년 9세)[1]
출생지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現 용평면)
가족관계
할머니 강순길
아버지 이석우
어머니 주대하
형 이학관[2]
남동생 이승수
여동생 이승자
1. 개요
2. 상세
3. 추모사업과 동상건립
4. 논란과 판결
5. 유머 소재로의 전락
6. 대중매체에서
7. 관련 문서
8. 바깥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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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3]

- 피살 직전의 이승복 -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때 희생된 피해자로, 오랜 기간 반공 교육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다.

2. 상세



1959년 12월 9일,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현 용평면) 도사리에서 3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고, 사망 시점에서 속사국민학교 계방분교[4] 2학년이었다.
1968년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때 어머니, 남동생, 여동생과 함께 북한 간첩에 의해 살해되었다.
1.21 사태 청와대 습격사건이 있던 1968년 10월 3차에 걸쳐 울진/삼척지구 해상으로 침투한 북한의 무장간첩 중 잔당 5명이 추격을 피해 북으로 도주하다 12월 9일 밤 11시, 강원도 평창군 노동리 계방산 중턱 이승복 군의 초가집에 침입했다.[5] 후술할 조선일보 기사 링크에 따르면 당시 이승복의 가족들은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려 했는데, 느닷없이 무장간첩들이 쳐들어와 어머니 주대하의 이마에 기관단총을 들이대며 밥을 지어달라고 협박했다. 이에 주씨는 "쌀이 없다"고 하자 이들이 "강냉이(옥수수)나 삶으라우"라고 하여 간첩 2명의 감시 하에 옥수수를 삶아서 줘야 했고, 이승복 등 3남매는 간첩 3명에게 둘러싸여 감금됐다.
당시 정부는 주민들을 공비의 만행으로부터 피신시키기 위해 독가촌이라는 집을 지어서 이주시켰는데, 이승복의 집은 다음날 이사할 차례였다고 한다.
무장간첩들은 삶은 옥수수를 먹고 가족 5명을 안방에 몰아넣은 채 "남조선(남한)이 좋으냐, 북조선(북한)이 좋으냐"고 질문하며 북한 체제선전을 하자, 그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했고, 격분한 간첩 중 1명이 이승복을 끌고 온 뒤 나머지 가족들도 같이 끌고 갔다.
이들은 먼저 모친 주씨의 머리를 벽돌만한 돌덩이로 쳐서 죽였고, 뒤이어 이승복 본인도 공비들의 양 손가락에 입을 찢기고 돌까지 맞아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동생 승수와 승자도 같이 살해되어 퇴비더미에 묻히고 말았다.
이후 발견된 이승복의 시신은 오른쪽 입술 끝부터 귀밑까지 찢어진 상처, 뺨 중간과 귀 근처에 십자 형태의 상처 2개가 뚜렷한 상태였다. 즉, 무장간첩들에게 문자 그대로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결국 이승복 군을 포함한 일가족 4명은 무참하게 살해되고, 36곳에 칼을 맞고 거름더미에서 발견된 형 이학관(당시 15세), 이웃집 이사를 돕다 돌아와 공비에게 붙잡혀 다리를 칼에 찔린 뒤 도주한 아버지 이석우, 그리고 할머니 강순길(1980년 별세)은 살아났으며 아버지는 즉시 달려가 향토예비군 초소까지 가서 신고했다. 당시 많은 언론들이 이 사건을 취재했는데, 조선일보가 이승복군 가족 4명이 북한 무장군인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사건은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이승복 군의 발언이 발단이 됐다는 특종 보도를 하게 된다. 당시 취재기자는 강인원[6]과 송종헌 2명이었다.
[image]

'''<잔비, 일가 4명을 참살>'''

'''"공산당이 싫어요"'''

'''어린 항거 입 찢어'''

(전략) ... 공비들은 가족 5명을 안방에 몰아넣은 다음 북괴의 선전을 했다. 열살 난 2남 승복 어린이가 "'''우리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얼굴을 찡그리자 그중 1명이 승복 군을 끌고 밖으로 나갔으며... (중략) ... 승복 어린이에게는 "입버릇을 고쳐 주어야겠다"면서 양손가락을 입속에 넣어 찢은 다음 돌로 내려쳐 죽였다. (조선일보 1968년 12월 11일 3면, 원본 링크)

그의 부친과 조모는 이때 사건으로 정신분열증을 일으켰는데, 부친은 사건의 후유증으로 4~5년을 술에 의지하며 집안에 소홀한 탓에 유가족들은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얻어먹어야 했고, 조모도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형 역시 사건 후 불면증에 시달려 10년간 약물치료를 받으며 고교 입학도 21세 돼서야 했다. 또 유가족들 역시 "너무 지쳤다"며 논란에 휩싸이는 것보다 안식을 바란다고 한다. 2009년 무장공비 120명 중에 하나였던 김익풍 씨가 이승복 41주기 기념식에서 이학관 씨 부부에게 사죄하기도 했다.
2014년 8월 24일, 그동안 정신질환을 앓던 아버지 이석우가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장례식에선 지역 인사들이 참석하지 않아[7] 유족들만 남은 채 콘크리트 바닥에서 돗자리 하나만 깔고 식사할 정도로[8] 조촐히 치렀고, 유해는 가족들 곁에 안장되었다.
논란이 많은 사건이며 사건 자체에 대한 조작설도 나왔으나, 이승복 어린이가 북한군에게 살해당한 사실 자체는 맞다.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도 조작설이 난무하였으나 북한 짓이라는 사실은 명확하므로 두 사건은 이런 면에서 비슷한 특징이 있다.

3. 추모사업과 동상건립


그 후 이승복은 반공의 상징이 되어, 효자 정재수[9] 군과 함께 거의 모든 초등학교에 동상이 세워지고[10] 도덕 교과서에도 실렸다. 1975년 10월에는 평창군 대관령 정상에 '이승복 반공관'이 설립되었고 1982년에 이승복의 모교였던 속사초 계방분교 근처로 이전하면서 '이승복기념관'으로 바뀌어 성역화되었다. 3월 22일에 전두환 대통령은 이승복에게 국민훈장 동백장을 추서했다.[11] 이후 초등학교 수학여행에는 백이면 백 이승복기념관이 포함되었다. 이 기념관에는 피해자 일가족들의 참혹한 시신 사진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에 대해 안 좋게 보는 의견도 있다.

45년 세월을[12]

저 처참한 사진으로 남아 지금껏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아가며 아직도 영원한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기 처와 자식, 손자, 며느리가 저렇게 죽었다면 어느 누가 그 사진을 저렇게 액자에 높이 걸어 두고 온갖 사람들이 다 와서 보게 하겠는가. 이승복 집안이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쯤 되었어도 저리 시신 사진을 기념했을까.

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 출처

김병욱이 작사하고 정세문이 작곡한 <공산당은 싫어요>라는 제목의 추모곡도 있는데, 1950~1960년대생이라면 한 소절쯤은 아실 것이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1절)
원수의 총칼 앞에 피를 흘리며
마지막 주고 간 말 공산당은 싫어요.
구름도 망설이는 운두령고개
새 무덤 오솔길을 산새가 운다.
(2절)
어린 넋 잠든 곳에 겨레가 운다.
엎드려 절한 마음 눈물이 솟네.
바람도 길 멈추고 어루만지니
하늘이 성이 났다 오랑캐들아.
[image]
이승복 동상. 1982년에 제막되었다.
[image]
당시 구리가 부족하여 일부 동상은 콘크리트로 만들고 페인트를 칠한 경우도 많다. 당시 콘크리트 품질 상 풍화에 매우 취약한지 콘크리트상들의 상태가 대부분 안 좋다. 참고로 사진은 원주시 부론면 손곡초교로 1999년에 폐교된 학교다.
[image]
알려진 근황으로 동상이 이렇게 되어버렸다.

4. 논란과 판결


철저한 반공 분위기 하의 사회였다는 점과 보도 매체가 조선일보라는 점에서 기사 안에 소설이 가미된 것으로 여기는 자들이 있다. 심지어는 이승복이 아예 가상인물이라는 음모론도 있었다.
소송을 담당한 김태수 변호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틀에 걸친 조석간 신문 기사만 제대로 비교하고 현장 취재 기사와 브리핑 받아 쓰는 기사의 차이, 조석간 신문의 제작 시스템만 제대로 알았어도 조작론은 나올 수 없었다. 당시 조작론을 포함해 모든 기사를 비교 분석하면서 조작론자는 조선일보를 비방할 단서만 물색했을 뿐 이승복 사건의 진실을 확인하려는 노력은 부족해 보였다. 객관적 사실이 아닌 상상력으로 글을 쓴 것은 조선일보가 아니라 조작론자들이었다." (조작론자들의 위선을 보고야 말았다)
이 사건은 여러가지 논란에 시달렸는데 대표적인 것은 '''이승복 소송'''으로, 미디어오늘의 편집국장 김종배가 <저널리즘> 1992년 가을호에 게재한 걸 발단으로 1998년 부산역광장에서 ‘오보 전시회’를 연 김주언[13]의 기사가 더 큰 파급력을 불러일으키면서 사건은 더욱 커졌다. 김종배의 경우 〈“공산당이 싫어요” 이승복 신화 이렇게 조작됐다〉라는 기사를 작성, 문제제기를 했는데 조선일보 기사에서 '이승복의 형의 이름을 잘못 기록했다는 점', '그의 집이 마을과 멀리 떨어져 있어 소리를 듣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 후에 '이승복의 형이 조선일보 기자를 만난 적이 없다고 밝힌 점'을 지적했고, '이승복 시신의 입이 찢어져 있지 않았다'는 주민의 증언을 바탕으로 조선일보의 기사를 “작문”이라고 비판했다. 특히 이승복의 형이 조선일보 기자를 만난 적이 없다고 밝힌게 크게 문제가 되었는데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포함한 사건 증언 전체가 이 형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이에 조선일보는 김주언, 김종배 2명을 명예훼손으로 형사 고소했으나, 7년이 넘는 재판 끝에 2006년 김종배는 소송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당시 서울중앙지방법원 재판부는 "조선일보 기사의 '''우리는 공산당이 싫어요 발언'''과 '''조선일보 기자가 사건을 현장취재한 것'''이 사실에 근거한 것으로 인정되나, 거기에 대한 의혹보도 역시 당사자가 사실이라고 확신할 만한 충분한 개연성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언론의 자유에서 용인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한편 김주언은 집행유예 2년에 징역 6개월.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500만 원. 이는 오보전시회가 김종배의 글에 비해서도 훨씬 근거가 허술했음에 기인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대법원 판결에서 이승복 사건 자체는 실제 사건이라고 판결했다. 물론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14]라는 말은 불신할 만한 합리적 의심의 근거가 있지만, 이웃 주민들은 물론 생존한 형 이학관이 수십회 난자당해 비몽사몽 상태에서도 그 상황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상당한 개연성을 부여하므로, 사건 자체는 분명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이다. 굳이 정리하자면 이승복이 당시 상황에서 북한체제에 대해서 비판적인 주장을 했고, 그것이 이 어린이를 죽음으로 몰고 갔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 다만 날조를 주장한 김종배의 경우는 조작설은 허위이지만 김종배가 조작설을 믿을 만한 사정이 있었기에 언론의 자유로서 용인되는 것이라고 하여 무죄를 선고받았다.
다만 날조를 주장한 김종배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승복 공산당이 싫어요 조선일보 기사"는 날조가 아닌 사실이지만, 김종배가 날조라고 생각할 만한 사정이 있었다는 이유다. 당시 서울중앙지방법원 재판부는 "조선일보 기사의 '''우리는 공산당이 싫어요 발언'''과 '''조선일보 기자가 사건을 현장취재한 것'''이 사실에 근거한 것으로 인정되나, 거기에 대한 의혹보도 역시 당사자가(김종배) 사실이라고 확신할 만한 충분한 개연성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언론의 자유에서 용인할 수 있다" “1992년 기사 작성 당시에는 (김종배가) 자신의 기사가 허위임을 인식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한편 김주언은 대법원에서 유죄 확정됐다.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500만 원. 이는 오보전시회가 김종배의 글에 비해서도 훨씬 근거가 허술했음에 기인하는 것이다. 1·2심 재판부는 “이승복군이 ‘공산당이 싫다’는 말을 한 것은 사실로 판단되고 조선일보 기자들이 현장에 없었다는 주장은 허위사실의 적시”라고 판결했었다. 결국 김씨는 국가공무원법 등에 따라 신문발전위원회 사무국 사무총장(2급)에서 면직됐다. 소송을 담당한 김태수 변호사는 "이틀에 걸친 조석간 신문 기사만 제대로 비교하고 현장 취재 기사와 브리핑 받아 쓰는 기사의 차이, 조석간 신문의 제작 시스템만 제대로 알았어도 조작론은 나올 수 없었다. 당시 조작론을 포함해 모든 기사를 비교 분석하면서 조작론자는 조선일보를 비방할 단서만 물색했을 뿐 이승복 사건의 진실을 확인하려는 노력은 부족해 보였다. 객관적 사실이 아닌 상상력으로 글을 쓴 것은 조선일보가 아니라 조작론자들이었다."이라 밝혔다. 조작론자들의 위선을 보고야 말았다
대법원 판결 3줄 요약
  • 이승복 사건 그 자체: 이승복 어린이가 북한군에게 살해당한 것은 100% 사실.
  • 이승복에 대한 의혹보도: 피고가 그 사건이 허위라고 믿을만한 사정이 있었다, 따라서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로서 용인되므로 무죄. [15]

  •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정확한 근거가 없음. (형 증언의 상당한 개연성은 존재. 공산당에 대한 비판적 주장했을 가능성 높음.)
어찌 되었건, 이 소송 사건은 관습화되는 와중에 조금씩 사그라들던 반공주의 기조와 이승복 기념사업에 찬물을 끼얹는 결정타가 되었다. 이 소송이 벌어지는 기간 동안 전국 초등학교 중 70~80%는 동상을 철거했으며, 이승복 기념관은 2004년 강원도교육청 소속에서 평창교육지원청 소관으로 옮겨지며 통폐합이나 사회단체나 사단법인의 관리를 고려하는 수준으로 격이 떨어졌다. 2008년부터 보수정권으로 바뀐 뒤에도 이승복 기념사업은 다시 부활하지 못했고[16][17] 이승복 사건은 역사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설상가상으로 민병희 강원교육감 취임 후 이승복기념관장 직위도 2013년부터 교육장에서 과장으로, 2014년에는 계장급으로 격하되었다.
이 사건과 비슷한 시기인 1998년 9월 경남매일에 <아직도 이승복 동상이>라는 기사를 쓴 김효영 기자도 11월 5일, 이승복의 형 이학관에 의해 '사자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약식 기소되어 이듬해 7월에 200만원의 벌금형을 당했고, 9월 22일에 방영된 MBC PD수첩을 통해 이승복 조작설 관련 보도를 했던 이용석 PD는 경남매일 건과 같은 날 이학관에 의해 명예훼손으로 소송당한 일이 있었다.
이런 논란이 안타까운 점은, 무장공비 침투에 의한 대단히 비극적인 테러 사건임에도 일반인들에게는 이승복 일가 학살사건 자체가 독재정권의 홍보용 조작사건쯤으로 받아들여지고 희화화된다는 점이다. 희화화 문제에 대해선 아래 항목 참조.
한편으로 사건과 '공산당이 싫어요'란 발언 자체는 사실로 인정하면서도 이 부분을 비판하는 의견도 있다. 무장간첩이 총을 들이밀고 위협하는 와중에도 겨우 9세의 어린이가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신념을 담아 말했다는 것인데, 이는 그만큼 당시의 반공 교육이 거의 세뇌 수준으로 철저하게 이뤄졌음을 지적한 것이다. 앞서 말한 조작 논란이 불거진 이유도 '9살 먹은 어린애가 어떻게 그 상황에서조차 그렇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란 의심에서 비롯한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어린이니까 순진하게 솔직하게 말할 수 있다. 더군다나 당시 무장공비들이 많은 민간인들을 죽이고 다니자, 이승복의 학교 선생님이 그 사실을 얘기하여 이승복은 공산당이 나쁘다고 알고 있었다. 게다가 깊은 산골에서 사느라 공비와 국군을 본 적 없어 식별할 줄 모르는 아이들이었고, 공비가 가족을 위협하고 있던 상황이 아니라 적이 아닌 척 들어와 앉아서 숙제하는 이승복에게 "이 연필 미제냐?" 이런 질문을 하던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남한이 좋냐 북한이 좋냐?" 이런 질문을 했다가 이승복이 대답했던 것이고, 이승복은 매우 당돌하고 절대 지지 않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이승복을 만나기 전에도 무장공비가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류의 질문을 했다. "박정희가 좋냐 김일성이 좋냐?" 사람들은 박정희라 대답했고 살해당했다.

5. 유머 소재로의 전락


주된 내용은 실제로는 이승복이 '공산당이 싫다'고 말하지 않았는데 발음이 비슷해서 무장공비들이 이승복의 말을 잘못 듣는 바람에 이승복을 살해했다는 이야기다. 시대가 변하면서 말하는 쪽이 최불암이나 사오정인 경우도 있었다.
1980년대에 이미 나온 개그는 다음 같은 것들이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에서 싫을 빼면? 나는 공산당이어요!"''',
토론 합의로 대표적인 드립만 남겨둔다.

무장공비: (어린이인 이승복에게 군것질거리를 줘서 회유하기 위해) "자. 맛있는 콩사탕이란다."

이승복: "싫어요. 저는 콩사탕이 싫어요."

- 가장 유명한 콩사탕 드립. 정치적으로 검열당하는 걸 피하기위해 우회적으로 이 단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다른 드립들도 대부분 몬데그린을 이용한 개그다.

6. 대중매체에서


이 사건을 토대로 여러 편의 극화가 만들어졌는데, 실제 사건 재현이라는 명목 아래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트라우마를 주는 작품이 많다. 이를테면 이강윤 감독[18]1985년작 영화[19] <잊을 수 없는 순간>이란 영화가 있는데, 제작은 신한영화가 맡았으며 김덕영과 장정국, 오영화, 박지훈, 곽은경, 추석양, 라정옥, 신양균, 정미경, 김성국, 손전, 최일 등 중견배우들과 아역들이 총출연했다.
영화 자체의 완성도는 좋지 않지만, 후반부에 공비들이 난입해 벌이는 만행은 웬만한 호러 영화는 저리가라 할 정도로 끔찍하다. 반공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이 영화는 학교를 돌면서 단체 상영되기도 했는데 전체 관람가[20] 등급임에도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시리즈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잔인한 폭력 묘사가 있는 편이라 놀라서 우는 학생들이 속출했다. 더 심한 경우에는 이때의 충격으로 인해 성인이 되어서도 악몽에 시달려 상담을 받은 30대의 사례도 존재한다. 배고픈 공비들이 살아있는 닭을 산 채로 씹는가 하면, 무장 공비가 이승복의 입을 대검으로 찢어버리고 승복의 어린 동생을 에 던져서 살해한다. 그리고 확인사살한다면서 이승복의 머리에 큰 돌을 던져 머리를 박살내 버리는데 더 끔찍한 사실은 이승복이 입을 찢겨 피투성이가 된 상태에서도 '''살아 있다가'''[21] 머리에 돌을 맞고 죽는다는 사실이다.[22] 돌을 맞고 엉망진창이 된 모습을 몇 초 동안 계속 보여주는데 상당히 끔찍하다. 해당 영화는 한국영상자료원 영상도서관에 DVD 형태로 소장중이다.
그 당시에는 굉장히 심의 삭제가 심하던 시절이라서 영화나 지상파 만화영화, 만화책에 조금만 선정적이거나 폭력적인 묘사가 있으면 가차 없이 삭제 당하던 시절이나, 반공을 목적으로 하는 창작물에는 심의가 굉장히 관대했다가[23],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대종상 반공 부문이 사라지는 등 반공 애니메이션이나 반공 영화에 대한 지원이 점차 줄어듬으로써 대중들 역시 반공물 장르에 대한 관심이 사라짐에 따라 반공 영화 특유의 공포에서 해방되었다고 한다.
반공물이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의외로 자료 조사가 잘 된 전기는 1980년대 나온 신동우 화백이 그린 이야기 책이다. 이 책은 당시 생존자들을 일일히 인터뷰했고 이승복 사건 전후에 일어난 무장 게릴라들의 학살 사건 등도 빠짐없이 취재했다.
1980년대 반공 서적 중에는 1960년대 산골 소년 이승복 가족이 스웨터를 입고 있는 충격적인 일러스트를 선보인 적이 있다.[24] 물론 그 책에서는 이승복 실록보다는 뒤에 있는 북한 어린이의 참상이라는 작품이 더 현시창과 트라우마를 안겨주었다.[25]
1969년부터 국민학교 5학년 2학기 도덕 교과서에도 이승복 이야기가 꼬박꼬박 수록되어 전국 어린이들에게 널리 가르쳐졌다. 4차 교육과정 때까진 당시 무장공비들의 만행이 자세히 기술되는 등 비중 있던 내용이었으나, 5차 교육과정 개정 후인 1990년부터 간략히 기술되다 6차 교육과정 중이던 1997학년도 교과서부터 내용이 아예 삭제되었다.

7. 관련 문서


이승복 형 인터뷰

8. 바깥 고리



[1] 공교롭게도 자신의 생일에 사망했다.[2] 호적상 본명으로, 아명은 이승권.[3] 실제로 이승복이 이 말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아래의 논란과 판결 참고.[4] 1998년 폐교됐다. 현재는 후술할 이승복 기념관의 일부로 사용 중이며, 이승복 군이 다니던 시절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5] 당시엔 북한의 무장 공격이 도처에서 벌어진 시대였다. 전년도인 1967년에는 1, 4, 5, 8, 9월에 군함 피격, 휴전선 남하 북한군과의 교전, 철도 폭파 테러, 어선 피격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6] 1981년 정치부 차장을 끝으로 조선일보를 떠나 총무처 대변인, 소청심사위원, 대우통신 감사 등을 역임함.[7] 그나마 있던 화환도 강원도교육청 부교육감 명의로 온 것이다.[8] 기념관 내에 회의실이 있지만, 유족들이 식사를 하기엔 협소했다.[9] 1964~1974. 당시 경북 상주 사산국민학교 2학년이었으며, 1974년 1월 22일 아버지와 함께 폭설이 내린 충북 보은군 마로막재를 건너다 술에 취한 아버지가 쓰러져 얼어죽게 되자 쓰러진 아버지를 살리려고 가진 을 벗어서 덮어주고 아버지와 함께 얼어죽은 효자다. 이 아이의 이야기도 사후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에 실린 건 물론이요, 이원세 감독에 의해 <아빠하고 나하고>란 영화로 만들어져 아역배우 전호진이 정재수 역을 맡은 바 있다. 그러나 1994년에 모교이던 화령국민학교 사산분교가 폐교되고 교과서에서도 사라져 아예 잊혀지는 듯하다가 2001년에 상주시 측이 효자정재수기념사업준비위원회와 협력해 고향이던 화서면의 동 분교 건물을 개수해 문을 열었다. 참고로 정재수는 원희룡 제주도지사, 이재명 경기도지사 등과 동갑내기로, 그 역시 현재까지 살아 있었다면 60세가 된다.[10] 이때 세워진 동상들 중 일부는 2010년대까지도 남아있었고, 아직도 극소수가 남아있다.[11] 이 성역화 사업에 발맞추어 MBC 호랑이 선생님에서도 이승복 극화를 방영하기도 했다.[12] 이 글은 2013년에 쓰였다.[13] 1986년 보도지침 폭로 사건 관련자 중 하나로 당시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총장이었다.[14] 참고로 조선일보 기사에는 "'''우리'''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쓰여 있다.[15] 이러한 식의 판결은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잘 이해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사실이 호도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무죄판결이 났으니 피고의 주장이 옳았다는 식으로 잘못된 주장이 다시 반복 인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유사한 판결로 박정희 간도특설대 독립군 토벌설이 있는데 조선족 류연산의 주장을 인용한 출판 등에 의한 사자명예훼손 소송에서 허위사실임이 해당 시기에 교사로 일한 박정희에게 수업을 받았던 제자들의 증언으로 밝혀졌음에도 무죄판결이라는 결과만 남아 의도적으로 전기만화 등의 저작물에 악용되고 인터넷에서 계속 독립군 토벌설이 사라지지 않고 올라온다. 유포자가 접한 자료에는 허위사실이 기록되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사실 여부의 책임을 묻지 않고 무죄판결을 하니 의도적인 허위주장이더라도 유포 행위는 무죄가 되어버리는 것[16] 흥미롭게도 도리어 이승복 부활 여론을 강조한 기사는 2004~2007년간 조선일보의 기사가 대부분으로 나온 이후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보통은 보수언론이라고 묶이지만 이런 거 빼면 서로 경쟁사인 터라 동아일보중앙일보도 이렇게 한 쪽 신문이 독점하듯이 크게 내세우는 건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이승복 조작사건이라고 크게 화제가 될 때, 두 신문은 적극적으로 보도하거나 조작이라고 하지 않았어도 방관하는 분위기가 컸다.[17] 더 나아가 2010년 교육감 직선제 실시 후 진보 교육자 민병희가 강원교육감으로 당선되면서 관심도 더더욱 줄었다.[18] 1980년작 《속 병태와 영자》를 만든 감독이다.[19] 실제 개봉은 1987년 6월 1일에 했다.[20] 학교를 돌면서 단체 상영된 상영 등급이 전체 관람가로 되어 있지만, 진짜 국내 상영 등급은 청소년 관람불가(舊 연소자 관람불가)이다.[21] 자세히 보면 돌을 맞기 직전에도 움직이며 희미한 목소리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한 번 더 말한다.[22] 이승복 일대기를 보고 싶으면 여기를 참조하자. 영화는 비디오로도 발매되었으며, 등급은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이다.[23] 폭력적인 장면 뿐만이 아니라 벌건 대낮에 중요 부위 노출은 없지만 베드 씬, 강간 씬이 나오기가 일쑤였다[24] 이 주장 역시 좌파측에서 나오는 비판 중 하나인데 이는 당시 사정을 모르기 때문이다. 60년대는 서구의 재활용품이 원조물자로 유입되던 시기로 지금 아프리카에서 한글이 적힌 중고옷을 볼 수 있듯이 해외의 헌옷들도 많이 들어와서 배급되던 시절이다. 스웨터는 물론이고 중고 스타킹이나 하이힐 마저 원조로 들어왔다. 털실로 된 옷은 실을 풀어서 각 가정에서 다시 짜서 입는 일도 흔했다.[25] 부연하면 이승복 사건 부분은 그래도 상처 하나 없이 죽는 모습이 나오지만(실제로는 칼로 난자하고 입을 찢어 죽였다.) 북한 어린이의 참상에서는 시체훼손이 적나라하게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