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1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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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제국의 황족 출신 관료이자 조선귀족 작위를 받은 친일반민족행위자. 사도세자의 3남인 은언군의 양현손자, 상계군의 양증손자, 익평군의 양손자, 덕안군의 양자이다. 은언군의 제사를 받드는 봉사손이었다.
매국노의 대명사 이완용과 동명이인이다. 다만 이름 끝 글자의 한자가 다르다. 흔히 아는 이완용은 ‘李完'''用'''’으로 쓰지만 이 문서의 이완용은 ‘李完'''鎔'''’으로 쓴다.
황실의 후손임에도 작호를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족보 상 이완용의 가계에서 마지막으로 왕[2] 이었던 사람은 5대조 장조(사도세자)인데, 법적으로 임금의 4대손까지만 황족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2. 생애
2.1. 조선 · 대한제국 시기
1872년(고종 9년) 12월 13일에 태어났다. 친아버지는 덕흥대원군의 12대손으로 부사과를 지낸 이재경이고, 친어머니는 청송 심씨이다.
22살이던 1893년(고종 30년)에 은언군의 사손 덕안군의 아들인 이언용이 요절하여 고종의 명으로 덕안군의 양자가 되었다.[3] 이완용은 이언용과 같은 항렬이기에 이언용을 대체한 양자로 온 것이다. 보통 저럴 땐 이언용의 양자를 구하는데, 이완용의 입양은 특이한 경우이다.
음서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홍릉, 예릉의 참봉을 지내고 능령을 거쳐 비서원승, 봉상사부제조, 중추원의관 등을 지냈다. 군수로도 여러 번 임명받아 삭녕, 통진, 중화, 수원군수를 역임했다. 비인군과 익산군 군수로도 임명받았지만 저 땐 부임하기 전에 새 벼슬을 받아 실제로 역임하지는 못했다. 이후에도 내부 회계국장[4] 겸 시종원 시종, 강화부윤, 종정원경, 동지돈녕원사[A] , 태복사장[A] , 봉상사제조[5] 등 주요 보직을 역임했다. 품계 또한 높아서 최종적으로 종2품 가의대부에 올랐다.
2.2. 일제강점기
한일병탄 이후 1910년 10월 7일에 일본 정부에게서 훈1등 자작 작위와 은사금 3만원을 받았다. 1912년에는 일본 정부에게서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이후 선대 왕들의 생일에 선원전을 봉심하고## 종척집사, 장의위원, 수빈원 등# 이왕가 내의 의례 행사들에 참여하며 그럭저럭 잘 살았다. 1918년에는 아들의 결혼으로#, 1919년에는 모친상으로#[6] 순종에게서 각각 100원과 200원을 받았다.
3. 사후
1937년 2월 4일에 경기도 경성부 관철정 41번지[7] 자택에서 사망했다. 묘는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아미동에 있다.
2002년 대한민국 국회의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에서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 이름이 올랐다.
4. 여담
5. 가족과 후손
문화 류씨 부인과 결혼해서 아들 이해만[A] 을 얻었고,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첩 사이에서 아들 이해구를 얻었다.
그러나 이해만은 1936년에 자식 없이 죽었다. 그래서 철종의 생가 누동궁 사손 이해승의 아들 이택주가 사후 양자로 입양왔다. 이해만은 이완용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에 이완용 사후 이택주가 바로 자작 작위를 물려받았다.
이택주는 6.25 전쟁 때 사망했으며 슬하에 이우석, 이우용 두 아들을 두었다. 현재는 이우석의 장남 이성기가 은언군가의 종손으로 있다.#
그 밖의 다른 가문의 일원들에 대해선 알려진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