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풍군(1890)

 



'''역임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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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동궁의 역대 종주'''
3대
청안군 이재순[A]

'''}}}#FAFAD2 4대
청풍군 이해승}}}'''

5대
이우영[14][15]


'''조선귀족 후작'''
<colcolor=#ffd800> '''대한제국 장조의 6대손 | 누동궁 3대 사손[*A ]
청풍군 이해승
淸豊君 李海昇'''
'''군호'''
청풍군(淸豊君)
'''이름'''
이인봉(李麟鳳) → 이해봉(李海鳳) → 이해승(李海昇)
'''호'''
송석(松石)
'''출생'''
1890년 6월 22일
'''사망'''
미상[1]
1. 개요
2. 가계
3. 생애
3.1. 조선 · 대한제국 시기
3.2. 일제강점기의 행적
3.3. 말년과 최후
4. 여담
5. 가족과 후손
6. 재산 환수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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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왕족이자 대한제국의 황족. 조선귀족 후작 작위를 받은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조선 25대 임금 철종의 형 영평군 이경응의 양증손자, 청안군 이재순의 양손자, 풍선군 이한용양자이다. 또한 전계대원군종가(宗家)누동궁의 5대 종주로 누동궁의 마지막 주인이다.[2]

2. 가계


이해승의 본 뿌리는 '''월산대군의 후손'''으로 그의 직계에서는 '''이미 300년 전에''' 종친 대우가 끝났다.
그런데 그의 할아버지 이재숙이 덕흥대원군 후손의 양자로 갔고 그의 친아버지 이건용 또한 다른 덕흥대원군 후손의 양자로 갔다.[3]
조선 후기에는 왕실의 후손이 몇 없어 덕흥대원군의 후손들이라면[4] 서로서로 입양을 주고 받는 풍조가 있었다. 그래서 이해승 역시 덕흥대원군의 후손 자격으로 풍선군양자가 된 것이다. 누동궁의 봉사손이 된 이해승은 철종의 큰집 장손으로써 중요한 왕실의 일원으로 대접받았다.

3. 생애



3.1. 조선 · 대한제국 시기


[image]
양할아버지 청안군 이재순과 함께.
1890년(고종 27년) 6월 22일, 군수 이건용(李建鎔)의 아들로 태어났다. 1897년(광무 원년)에 영평군의 건의로 풍선군양자가 되었고#, 1902년(광무 6년) 2월에 철종의 능인 예릉 참봉 직을 맡아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904년(광무 8년) 1월에 헌종효정왕후가 훙서[5]했을 때에는 국상종친이 맡는 직책인 종척집사로 임명받았고#, 1906년(광무 10년)에는 탁지부 재랑을 역임했다. 1907년(광무 11년) 3월에는 시강원 시종관 주임관 4등이 되었다.
순종 즉위 후인 1908년(융희 2년)에는 정 3품 통정대부로 올라 돈녕부도정이 되었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대원군 적장손 세습제'에 따라 청풍도정(淸豐都正)으로 봉해졌다.
1909년(융희 3년) 수학원을 졸업한 다음 가선대부를 거쳐 정 2품 자헌대부에 올랐다. 1910년(융희 4년) 6월에는 청풍군(淸豊君)으로 승격했으며 이후 영종정원경에 올랐다. 같은 해 8월에는 훈 1등 태극장이화대수장(李花大綬章)을 받았다. 이 때까지만 해도 무난하게 살던 젊은 황족이었다.

3.2. 일제강점기의 행적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의 체결로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일본식민지로 전락했다. 일제한일 병합의 정당성을 선전하기 위해서는 조선인들의 협조, 그 중에서도 황실이나 양반들같은 기존 기득권에 있던 사람들의 협조가 필요했다. 그 일환으로 황족인 이해승도 일제에게 후작 작위와 16만 2천 원[6]을 받았다. '''이후 본격적인 친일의 길에 들어선다.'''
같은 해 조선귀족 관광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가서 조선귀족을 대표해 메이지 덴노에게 감사 인사를 했으며 안중근 의사가 저격했던 이토 히로부미묘소를 참배했다. 1912년에는 ‘한일 병합 이전 한·일 관계의 공적이 있는 자’로 한국병합기념장도 받았다.
이후 이해승은 채무보증을 잘못 서서 큰 을 졌다.(...) 하지만 일제의 도움으로 재산을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신탁하는 조건으로 채무를 변제하였다. 그리고 일본에게서 받은 돈을 주식에 투자해 배당금을 받은 뒤 조선총독부로부터 토지를 대부받거나 금은광의 광업권을 받아 경제력을 키워나가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7][8]
1923년부터 1926년까지 3년 간 해동은행# 대주주로서 감사를, 1937년부터 1942년까지 5년 간 일선산금 주식회사의 이사를 지냈다.#
1925년부터는 조선귀족회에서 활동하여 1945년까지 이사를 지냈고 1942년부터는 회장직을 맡았다. 또한 1940년에서 1941년 사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조선 최대의 조선총독부 외곽단체인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과 전시 체제기 최대 민간 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42년 조선귀족회 회장이 된 이후엔 일제 육 · 해군에 각각 1만원씩의 국방 헌금미나미 지로 조선 총독에게 전달했다. #

3.3. 말년과 최후


이러한 친일 행각으로 인해 해방 이후인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회가 만들어진 후 당연히 체포되었고 기소까지 되었으나 반민특위가 해체당하면서 풀려났다.
그리고 1년 뒤인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고 환갑의 나이에 '''북한군에게 납북당해 행방불명 되었다.(...)''' 도저히 생사를 확인할 수 없었기에 1958년 실종 선고가 내려졌다.[9][10]
그래서 현재 (적어도 남한 지역에) 그의 실제 는 없다. 다만 경기도 포천시 선단동에 그의 가묘가 있다. 정확하게는 부인 청송 심씨의 묘인데 명목상 합장 형식으로 둔 것. 묘비의 은 권태희가 짓고 이석은이 썼으며 4면 다 글이 새겨져 있다. 전면에는 ‘자헌대부 영종정원경 청풍군 완산 이공 휘 해승 지묘 배 정경부인 청송 심씨 부좌(資憲大夫領宗正院卿淸豊君 完山李公諱海昇之墓 配貞敬夫人靑松沈氏祔左)’라 새겨져 있다.#

4. 여담


  • 성격이 부드럽지는 않았던 것 같다. 충청북도 괴산에서 작가 홍명희[11]와 함께 3·1 만세 운동을 주도했던 독립운동가 이재성(1887 ~ 1925)이란 사람이 있었다. 항렬로는 이해승의 할아버지 뻘 먼 친척으로 〈동아일보〉 기자를 역임했었는데, 징역 1년 반을 살다 나온 후 집세낼 돈이 없어 손자 뻘인 이해승이 소유한 누동궁의 10여 호 별채 중 한 채를 빌려 들어가 살았다. 당시 이재성의 부인임신 중이었는데 이해승의 집에서는 직계가 아니면 궁에서 아이를 낳거나 죽을 수 없다며 나가라고 재촉했다. 이재성의 부인은 다행히 지인들의 도움으로 동대문 부인 병원에서 출산했으나 불행히도 아기는 죽었다. 쇠약해진 이재성의 부인은 누동궁으로 돌아갔으나 이해승에게 쫓겨났고 이틀만에 죽었다. 이재성 역시 폐결핵이 심해져 드러누웠으나 이해승은 집에서 죽을까봐 두려워 무당을 불러 을 치고는 그 날 바로 내쫓았다. 이재성은 쫓겨날 때 한겨울 찬바람을 쏘인 탓에 병세가 나빠져 부인과 마찬가지로 쫓겨난 지 이틀 만에 사망했다. 이재성이 죽은 후에도 이해승은 물론이고, 집안 사람 어느 누구도 조문을 가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이재성의 친구와 지인들이 이해승에게 따지러 갔다. 그러나 이해승은 병을 핑계로 만나주지 않았고, 끝내 무대응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이는 1925년 2월 8일 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실린 내용으로## 이해승의 인물 됨됨이를 엿볼 수 있는 기록이다. 비록 먼 친척이지만 자신에게 해가 될까 두려워 죽어가는 사람을 내쫓을 정도의 냉정함을 보인 것이다.#

5. 가족과 후손


앞서서 영평군 이경응부터 청풍군 이해승까지는 전부 입양으로 대를 이었지만 이해승부터는 친자녀들로 이어진다. 이해승은 아들을 넷 낳았는데 장남 이완주(李完柱)가 원래 그의 가문 계통(家系)을 이을 예정이었으나 1943년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다. 다른 아들 이택주(李宅柱)는 은언군종손 이완용[12]의 양손자로 입양갔으나 6.25 전쟁 중이던 1950년 9월에 북한군에게 사망했다. 그리고 막내 아들 이영주(李寧柱)만이 오래 살아 해방 이후 낙선재의 비서실장을 지냈다.#
현재 다른 후손 중 알려진 사람들은 큰아들 이완주의 장남인 이우영(李愚英)과 이우영의 장남 이윤기(李允基)다. 현재 호텔 그랜드힐튼 서울의 오너 일가이기 때문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링크 참조.[13]
이우영의 동생 이우진(李愚振)은 중앙대학교 명예 교수를 지냈다.
이해승의 생가 누이 이해영(李海映)은 《상록수》로 유명한 작가 심훈과 결혼했다.

6. 재산 환수 논란


이우영은 1957년부터 구 황실재산총국에 소송을 제기해 동양척식주식회사신탁되어 있던 재산을 찾아가기 시작해 1990년대 말까지 신탁 재산의 75%인 890만㎡를 되찾았고 이 중 절반 가량인 435만㎡를 매각하였다. 1988년 이우영은 반환 받은 토지전계대원군의 처 용성부대부인가 있었던 서울 홍은동 땅에 스위스 그랜드 호텔을 지었고, 이후 그랜드 힐튼 서울 호텔로 바뀌었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가 2007년 친일 재산국가에 귀속시키는 결정을 내리자 이우영은 2008년부터 소송을 시작하였다. 대형 법무 법인 변호사들을 고용해 그가 진행한 소송은 모두 5건이었다. 이우영은 1심에서 패소하였으나 2심 재판부는 1심을 뒤집고 국가 패소 판결을 내렸다. ‘작위 수여만으로는 한일 병합의 공이 있었다고 추단할 수 없다’라는 이유에서였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 귀속에 관한 특별법은 ‘한일 병합의 공으로 작위를 받거나 이를 계승한 자’를 재산 귀속 대상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하고 있었는데, 이우영 측은 이를 이용해 ‘한일 병합의 공으로’ 작위를 받은 것은 아니므로 재산 귀속 대상자가 아니라는 주장을 폈고, 재판부가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당시 2심 재판관은 훗날 대법관이 되고 양승태 대법원 사법농단 의혹 사건 관련인물로 알려진 박병대 법관이다.
결국 이우영은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낸 첫 소송에서 2010년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해 320억원 상당의 을 지켜냈다. 이씨가 물려받은 땅의 절반이 넘는 규모였다. 이해승의 친일 행각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친일 재산 국가 환수는 불가능하다는 대법원 판단에 공분이 일었다. #
그러자 국회는 2011년 대법원 판단의 근거가 됐던 ‘일제 강점 하 반민족 행위 진상 규명에 관한 특별법’의 내용 중 ‘한일 병합의 공으로’라는 문구를 뺀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우영은 개정된 특별법이 너무 과도하고 특정인을 노린 것이므로 헌법에 위반된다며 소송 담당 재판부에 위헌법률심판 제청을 신청하였으나, 헌법재판소는 2013년에 이를 기각하였다. #
2014년 2월 대한민국 정부는 이우영이 개정된 특별법 발효 이후 친일 재산을 제3자에게 매각해 얻은 부당 이득 220억여 원을 반환하라는 1심에서 승소하였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는 2017년 1월 대법원에서 최종적으로 승소하였다. # 반면 이우영이 국가를 상대로 낸 친일 재산 확인 결정을 취소해 달라는 소송은 2016년 11월 대법원에서 최종적으로 패소하였다. #
2019년 6월 26일 서울고등법원 민사 13부는 국가가 이해승의 손자 이우영을 상대로 낸 소유권 이전 등기 소송의 항소심에서 원고 패소한 1심을 뒤집고, 일부 원고 승소 판결하였다. 1심은 '확정판결에 따라 개인에게 귀속된 적용을 배제한다'는 조항을 들어 원고 패소 판결하였지만, 2심에서 뒤집어진 것이다. #
하지만 2심에서 국가에 환수하게 된 토지 1필지는 소송 대상이 됐던 땅 가운데 극히 일부로서 충청북도 괴산군에 있는 수로 4㎡ 만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고, 나머지 토지에 대해서는 사실상 원심과 같은 판단을 내렸기에 그야말로 국가의 일부 승소 또는 사실상 패소라고도 볼 수 있는 상황이다. 사실 국가에 귀속을 명한 4㎡ 토지는 2007년 당시 국가귀속 결정 대상이 아니어서 기존 대법원 확정 판결과 무관하기 때문에 국가에 귀속하라는 취지였다고 한다. #
이전 2010년의 대법원 판결에 대해서는 법무부가 2015년에 재심을 청구하였으나 2013년의 헌법재판소 결정 이후 1년이라는 소송 기간을 넘겨 심리할 수 없다는 취지로 대법원에서 2016년에 각하되고 말았다. # 결과적으로 이 부분은 1992년 이완용의 후손들이 소유권 다툼에서 국가를 상대로 승소한 후 일어난 친일 후손의 국가 상대로의 승소 사례로 남게 되었다.
이외에도 이해승이 소유하고 있었던 토지가 상당히 많았던 모양인지 2020년에도 환수를 추진하겠다는 기사가 올라온다. #

[1] 하단 참조.[2] 누동궁의 가계 자체는 현재까지 내려온다. 자세한 것은 후술.[3] 덕종 이장 - 월산대군 이정 - 덕풍군 이이 - 파림군 이주 - 양천도정 이혜 - 이호인 - 이희맹 - 이석번 - 이강 - 이하석 - 이사흥 - 이상근 - 이희순 - 이영규 - 이석현 - 이재숙(덕흥대원군 이초 후손 이현에게 출계.) - 이건용(덕흥대원군 이초의 다른 후손 이재범에게 출계) - '''청풍군 이해승'''.[4] 덕흥대원군과 그의 친 아들 선조와 그 손자 인조의 후손들 모두를 아우르는 개념이다.[5] 군주, 왕족, 귀족의 죽음을 높여 부르는 말.[6] 현재 물가로는 백억여 원이 넘는 엄청난 돈이다.[7] 후술할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는 이해승의 친일 재산을 조사해 2007년 ~ 2009년 3차례 국가 귀속 결정을 내렸는데 그 규모가 토지 · 임야 합계 197만㎡, 시가 322억여원으로 '''환수 대상자 중 최고 액수'''를 기록하였다.[8] 의친왕의 5번째 딸인 이해경 여사는 당시 이해승의 집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어머니와 가끔 큰 집이라 불리는 누동궁에 갔었어요. 당시 이우영 회장의 조부인 이해승 씨가 집 주인으로 계셨죠. 들어가는 입구부터 조경이 잘 되어 있었고 경치가 수려했죠. 출입문 입구에는 양쪽으로 커다란 도자기가 나열되어 있어서 마치 중국에 들어가는 기분이었습니다.”[9] 우리 민법에서 실종의 정의는 부재자의 생사가 5년간 분명하지 않은 경우, 법원이 이해 관계인이나 검사의 청구로 하는 선고로써 이 5년의 기간이 만료된 실종자는 사망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해승의 경우 1950년에 실종되었으나 당시는 전쟁 중이었기에 전쟁이 끝난 1953년을 기준으로 5년을 계산하면 1958년이 된다.[10] 아마 얼마 못 가 바로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로써는 고령인데다 공산당 입장에서 타도해야 할 군주정 시대 왕족에 거물급 친일반민족행위자였기 때문이다.[11] 소설 《임꺽정》을 썼다.[12] 매국노 이완용과는 동명이인. 하지만 이 사람도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13] 이우영의 인터뷰 기사다. 참고로 이우영은 이 인터뷰 외에는 절대 언론에 모습을 비추지 않으며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싶지 않아한다. 왕손이라는 이유로 주목받는 것이 부담스러워서일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