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욱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정세균계로 분류된다.
2. 생애
1962년 3월 20일, 충청남도 보령군에서 태어났다. 다만 실제 살았던 곳은 서울특별시 성북구 길음동이었다.[3] 아버지가 베트남에서 미군 하역 노동자로 일한 돈을 사기로 다 잃어버린 후에 가난한 집에서 어렵게 자랐다고 한다. 하지만 시골에서 살고 있던 조카들이 학업을 위해 서울로 올라오면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몇 달에서 몇 년씩 그의 집에 머물게 했다. 한 달에 쌀이 한 가마니씩 들어 가난한 살림을 더욱 주름지게 해도 어머니는 싫은 내색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한 마당을 쓰던 이웃들과 음식과 정을 나누며 친형제처럼 지내셨다고 한다.
그의 중, 고등학교시절은 서울은행 수위로 일하던 아버지의 급여로 빠듯한 살림살이를 꾸려 나가야 했기에 과외나 학원은 꿈도 못 꾸었지만 초, 중, 고를 거치며 한 번의 지각이나 결석 없이 12년간을 개근하며 받은 개근상에서 보듯 성실하게 최선을 다한 시절이었다고 한다. 그 덕분인지 1982년 고려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를 졸업한 후[4]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고대 법대 입학 후 처음에는 법관을 꿈꾸었지만, 어느 날 학생회관 계단에서 광주민주화항쟁의 진상규명과 군부독재타도를 부르짖는 학생들의 데모 현장을 처음 보고, 거기서 어느 백골단이 한 여학생의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고 가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날 주머니를 뒤져 소주 몇 병을 사들고 텅빈 교정에 다시 들어와 밤새 마시고 토하고, 울고 하였다. 그리고 도저히 고시생의 길을 걸을 수 없어 운동권에 뛰어들게 되었다.
3학년 때인 1984년 고려대학교 법학과 학생회장을 맡으면서, 군부정권 치하에서 열지 못하고 있던 법대의 전통적인 행사인 형사모의재판을 부활시켰고, 국내 대학 최초로 '모의헌법재판'을 개최했다. 또한 법과대학 신문 '正義의 廣場'을 창간하고, 공법학회, 사법학회 등 법학과의 사회참여적인 모임 활성화를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1985년 11월, 민주정의당 중앙정치연수원 점거농성 사건으로 구속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아 목포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형기를 절반 정도 채운 다음 1987년 6.29 선언 이후 특별사면으로 출소했다.[5]
1987년에 출소한 후에는 1996년까지 선반공 등으로 일했다. 그러다가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한 후, 1998년에 공채에 합격하면서 당직자로 근무하면서 정치에 입문하였다. 당직자로는 새천년민주당, 그리고 새년천민주당 분당 당시에는 열린우리당에서 일했고, 다시 열린우리당이 다시 통합될 때까지 계속 당직자로 일했다.
2004년 17대 총선을 앞두고 신설된 성동구 갑 선거구에 공천을 신청했으나, 중앙당이 경선 방침을 뒤엎고 최재천 변호사를 단수공천하면서 출마가 좌절된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는 민주당이 멸망한 선거였다. 패배가 너무 뻔히 보였던 선거였기 때문에, 당시 한나라당 현역의원이 있어 한나라당이 유리한 곳으로 평가받던 화성시에는 민주당에서 아무도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이때 원래 종로에서 출마한 손학규 캠프에 합류하기로 했던 이원욱은 이때 자원해서 화성시 을에 출마를 선언했다. 살아오면서 아무런 연고도 없던 지역에 출마한 결과는 당연히 보기 좋게 낙선이었다.[6] 하지만 여기서 주저앉지 않고, 화성시 을 지역위원장을 계속 맡아 본격적으로 지역구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런데 이 화성시 을 지역은 그 후 동탄신도시의 완성으로 인해 점차 젊은 유권자들이 늘어나는 곳으로 변모했다. 18대 총선 당시 누구도 나가려고 하지 않았던 선거구는 어느새 민주당계열 정당에게 제법 유리한 곳으로 바뀌었다. 이쯤되면 이 지역의 공천권을 두고 치열한 경쟁이 일어나야 정상이었겠지만,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공천 과정에서 이원욱은 제18대에서 자진해서 희생한 점을 인정받아 결국 공천장을 얻었고, 본선에서도 2위 후보와 25% 차로 여유있게 당선되었다.[7]
화성시 인구 증가로 선거구가 3개로 증설된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화성시 을에 출마했다. 제20대 선거에서는 국민의당 후보에게 일부 표를 뺐겼음에도 50% 이상의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재선의원 고지를 밟았다.[8]
대학교 직속 선배인 정세균의 2012년 대선 후보 캠프 대변인을 맡았다. 계파로는 현재 정세균계로 분류되고 있다. 그러나 정세균이 국회의장으로 들어가고 치러진 2017년 대선의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최재성, 이미경 등 정세균계 대부분이 문재인을 지지한 것과는 달리 이원욱은 "당의 후보가 결정되면 돕겠다"며 특정 후보에 대한 지지를 유보했다.#
2016년 9월 6일,더불어민주당 전략기획위원장에 임명되었다.
2019년 8월 11일, 주 52시간 근로제 시행을 연기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2019년 5월, 20대 국회 이인영원내지도부에서 원내수석부대표로 임명되어 패스트트랙 공수처법, 검찰개혁법, 유치원 3법 통과를 위해 4+1 협의체에서 실무협상을 담당하여 법안을 통과시켰다.
21대 총선에서 64.5%의 득표율로 21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21대 국회에서 일명 '좋은 어른법'을 대표발의하였다.#1#2 현재 아동보호시설의 아동들은 만18세가 되면 보호종료되는 상황인데 이들의 사회적 자립이 어려운 현실을 감안하여 그래서 보호대상 아동의 보호종료 연령을 만18세에서 22세 미만으로 상향하고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무를 강화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좋은 어른법 2호로‘아동학대범죄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을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발의하였다. 법안의 주요내용은 영유아, 초등학생, 장애아동을 학대치사나 학대중상해를 입힌 사람에 대해서는 최고 사형, 무기까지 구형할 수 있도록 했다.
2020년 7월 19일, 민주당 답게! 흔들림없이! 라는 슬로건으로 더불어민주당/2020년 전당대회 최고위원에 출마했다. # 하지만 경남도당 연설에서 '정권 재창출'을 “정권 교체를 이뤄 문재인 정부를 성공시키겠다”고 말실수를 하면서 친문들한테 찍히고 말았다. 결국 6위로 낙선. 자세히 살펴 보면, 대의원 득표율은 1위였으나, 권리당원 투표에서 7위를 하는 바람에 6위로 미끄러졌다.
2020년 8월 15일에 전광훈 목사의 광화문 집회사건으로 이후 확진자가 급증하자 8월 21일 전광훈 목사에게 집회를 허락한 판사의 실명을 딴 일명 ‘박형순 금지법’ 법안을 발의하게 된다.#[9]
3. 논란
4. 여담
- 기자들이 꼽은 패션테러리스트과의 의원이라고(...) 사진 참조
- 2015년 12월 18일 경기언론인연합회(회장 박종명)가 수여하는 ‘2015년 경기언론인연합회 의정대상’ 시상식에서 ‘국회의원 부문 의정대상’을 수상했다. 19대부터 수소경제의 중요성을 깨닫고 수소연료전지자동차와 수소충전소등 전반적인 수소 산업 발전에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국민의 안전과 생명에 직결된 라돈법을 발의하였다. 또한 공공건설 분야의 상생협력을 통해 공사현장의 말단까지 공정한 산업사회의 일꾼으로서 대우 받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지역구 화성뿐만 아니라 비슷한 시군구의 난개발을 막기 위해 포럼을 운영중이며, 이를 통해 연속 3년 동안 환경운동연합에서 수여하는 환경의원상을 받았다.
- 2016년 8월, 청년기본법을 대표발의하여 2020년 1월 9일 국회 본회의에서 법안이 통과되는데 기여하였다. #
- 제19대 국회의 경제표결 분석 결과 더민주 의원들 가운데 가장 보수적인 의원으로 분류되었다.[10]
- 국민의당 문병호가 작성한 친노의원명단에 포함되었다. 그로 인해 국민의당 지지자들에게 비토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전망이 나돌았으나, 그래도 지역구를 워낙 단단히 다져놓았기 때문인지, 제20대 총선과 제21대 총선에서 무난히 당선되었다.
- 화성을 지역구는 화성시의 동탄 1,2 신도시이나, 이중 동탄3동은 제 21대 국회의원 선거구 획정 과정에서 화성 병으로 편입되었다.
5. 소속 정당
6. 선거 이력
7. 둘러보기
[1] 각종 포털사이트 프로필에서는 1963년 3월 20일생으로 나와있지만, 실제로는 1962년에 태어났다고 한다.[2] 네이버 프로필 참조.[3] 지금은 재개발로 신도시가 만들어진 어느 변두리 막다른 골목길 집에서 소년시절의 대부분을 보냈다. 지금은 사진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전형적인 70년대 골목길이었다.[4] 김선동 의원과 같은 12회 졸업생이다.[5] 2001년 4월 민주화운동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명예회복 대상자로 선정되었다.[6] 한나라당 박보환에게 패하였다.[7] 새누리당의 리출선 후보를 꺾어 눌렀다.[8] 새누리당의 오병주 후보를 꺾어 눌렀다. 한때는 새누리당에서 얼짱 20대 예비후보인 조은비 후보가 화성 을에 공천을 받지 않을까 했는데, 결국은 60세의 변호사인 오병주 후보가 화성 을에 공천을 받았다.[9] 설명하자면 박형순법은 집회시위법 및 행정소송법 개정 법안이다. 내용은 감염병법상 교통차단 또는 집회시위가 내려진 지역과 재난지역에서 집회 및 시위는 원칙적으로 금지대상에 포함하고 법원이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또한 법원이 감염병법상 집회금지처분 문제와 관련해서는 반드시 질병관리본부의 자문을 의무적으로 받고 결정을 내려야 하는 법안이다.[10] 그런데 이걸 만든 pingkorea가 갖고 있는 진보-보수라는 관념이 그다지 신빙성이 없다는 게 함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