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해군 항공대
1. 개요
일본 해군의 해군 항공대. 조종사 양성제도로는 해군비행예과연습생이 있다.
일본군은 항공모함 등의 이유로 항공부대를 운용했다. 1904년에 최초 기안이 검토됐고 풍선을 운용하는 육군과 달리 해군은 정찰이 필요하단 이유로 1912년에 해군항공기술연구회가 설치됐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2,900대의 항공기를 운용했다. 해군 항공대의 총괄기구로 해군항공본부(海軍航空本部)를 해군성의 지국으로 두었다. 해군 항공본부장은 중장급이었다.
2. 라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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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델. 이 일장 라운델은 항공자위대로 이어졌다. 항공자위대 소속기체 뿐만 아니라, 육상자위대·해상자위대 소속기체에도 그려져 있다. 육군 항공대도 똑같은 라운델을 썼다.
3. 설계 문제점
해군이 운용한 항공기들은 대부분 자동 방루 연료 탱크라던지, 조종석에 방탄 설비같은 방어수단이 없다시피 했다. 이는 항공모함에서 운용하는 항공기와 지상기지에서 운용한 항공기 모두 적용되는 문제점이었다. 오죽하면 미 해군 항공대의 일본 해군 항공대 항공기에 대한 평가가 '''원샷 라이터'''였겠나? 그나마 대전말에는 조금씩 도입되기는 하지만 육군이 하야부사에서부터 일찌감치 방탄판과 방루탱크를 도입한것에 비하면 해군은 훨씬 늦게 도입한 셈이다.
4. 인력 관리의 문제점
운영 면에서도 최악의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목숨은 내다 버리는 것"''' 정신을 훈련, 교육만 감안하더라도 육성에 상당한 시간이 드는 귀중한 병력인 파일럿에게도 그대로 적용했다. 남태평양에서 상당한 위협이 되었던 대남항공대의 궤멸의 가장 큰 원인은 '''인간의 한계를 고려하지 않고 그저 기체 스펙에만 관심있던 대본영의 삽질'''이었다. 에이스인 사카이 사부로도 누적된 피로에 의해 후방기총을 가진 어벤저 뇌격기를 헬캣으로 착각하고 덤볐다가 간신히 죽다 살아났을 정도니 말 다했다.
또한 '''파일럿의 계급을 조종사 지원전의 계급으로 유지'''하는 병크를 터트렸는데 이로 인해 '''병 계급의 조종사[1] '''가 탄생하였고, 파일럿의 진급에도 엄청나게 인색했다. 그래서 파일럿 개인의 발언권이 제한당하는 문제가 생겼다. 타국의 파일럿만 봐도 대개 장교나 고위급 부사관이므로 작전 수립 단계에 직접 개입해서 의견을 개진할 수 있었지만, 일본의 파일럿은 심지어 정비부서보다도 계급이 낮은 경우가 압도적이라 자신의 비행기가 어디에 이상이 있으니 고쳐달라는 부탁도 제대로 못했다. 반대로 연합군과 나치 독일은 조종사가 되면 일단 닥치고 소위로 진급시켜줬다. 계급에 밀려서 자기 할 말도 못하고 찌그러져 있지 말고 요구사항을 제대로 전달하라고 하기 위해서였다.
이것도 모자라 일본 육군과 해군을 막론하고, 지상에 배치된 항공기와 항공대가 전황이 좋지 않아 비행장을 포기하고 퇴각하려고 하면, 꼭 '''정비병같은 지원 인원을 끝까지 퇴각시키지 않고''' 파일럿들만 쏙 빼낸뒤 그냥 내버려두고 떠나거나 육군 알보병으로 징집해버리는 정신 나간 짓거리를 저질렀다. 이런 뻘짓으로 인해 얼마 가지도 않아서 숙련된 정비 인원의 부족으로 안 그래도 부족한 부품에 정비도 못하고 그에 따라 출격 시간은 물론 기체 개개의 신뢰성조차 나락으로 굴러떨어지는 막장 테크를 탔다. 그나마 이와모토 테츠조같은 개념인이 소수나마 있었다는 게 위안.
5. 제로센 (A6M)
기종명 자체는 영식함상전투기(零式艦上戦闘機/れいしきかんじょうせんとうき)이지만 레이센이 아니라 제로센으로 흔히 불리는데, れい를 ゼロ로 바꿔 표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A6M[2] 전투기 총 생산수는 Bf109와 엇비슷한 정도였지만, 성능이 Bf109보다 훨씬 낮았다.[3]
남방작전 기간 대활약을 했던 제로센 즉 A6M은 그 화려한 기동성을 위해 내구력과 방어력을 포기한 설계다.[4] 그리고 무전기의 성능이 형편없었는데 이는 후기형에서도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제로센의 모든 문제점의 근원은 일본의 낮은 공업기술로 만들어진 엔진이다. 당장 엔진 출력이 높아져도 부족한 실정에서 가장 출력이 낮은 엔진은 치명타라고 보면 된다. 스핏파이어나 Bf109가 어떻게든 1000마력이 넘는 엔진을 달려고 고심할때 제로의 초기형 21형은 고작 900마력을 겨우 넘는 정도였고 미국이 2000마력 더블 와스프 엔진을 달던 전쟁 말기에 이르러선 후기형 52형의 엔진은 '''이제야 겨우 1000마력을 좀 넘는데 그쳤다'''. 이로 인해 어떻게든 타국 기준에 맞추기 위해 기체의 자중을 상당수 포기하면서[5]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그나마 제로센보다 하위로 평가되는 와일드캣[6] 과의 교전은 전초반까지 우수한 파일럿들로 인해 제로센이 선전했었다. 물론 압도적인 격추비도 아니고 그나마도 와일드캣이 근소하게 우위에 있었다. 후일처럼 일방적으로 학살당하지 않았다는 정도의 의미다. 후기에 가서는 기어코 교환비를 역전해버리며 와일드캣이 우위에 선다. 개전 당시 일본 조종사는 중일전쟁으로 실전경험까지 갖춘 베테랑인 반면[7] 미군은 태평양 전선 자체가 2선급 전장이라서 이른바 엘리트들은 거의 없었고 그나마 조금 있던 대부분의 고참 파일럿은 일단 교육 요원으로 투입해 전선 대부분이 신병 투성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타치 위브라든지, 붐앤줌 같은 전술을 확립해가며 대응해가는 '''와일드캣에게 어느새 입장이 반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사실 이미 개전하고 1942년부터 와일드캣과 제로센 간의 교전비는 와일드캣의 희생이 제로센보다 덜했으므로 일본 우익이 항상 주장하는 '''전초반의 미군 와일드캣을 상대로 학살했다라는 주장은 완벽한 뻥카.'''
사실 고참 파일럿을 교육 요원으로 투입하는 로테이션 제도는 대전 중기 이후 여유가 있었던 모든 나라가 실행했다. 그로 인해서 독일처럼 백여 기 넘게 격추시키고 가끔 와서 신병들 잠깐 교육시키고 바로 출격한 슈퍼 에이스는 없지만 5기 이상을 격추시킨 일반 에이스는 압도적으로 많아지며 조종사들의 실력이 평균적으로 향상되었다.
조종사의 숫자 자체도 부족했고[8] 전투로 인해 지속적으로 숙련된 파일럿이 사라져가고 신병의 숫자도 부족했던 일본의 입장에서 미국의 로테이션 시스템은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거기다 미국은 이미 '''제로센 언더테이커'''인 '''F6F 헬캣'''으로의 기체변경이 거의 이루어진 상황에도, 심지어 전쟁 말기에는 함재기의 영역조차 아득히 초월해버린 '''F4U 콜세어'''를 들이미는 판국인데도[9] 일본은 신형 기체의 개발이나 기존 기체의 성능 개량은 지지부진하기만 했다. 제로센의 후계기로 준비되던건 A7M 렛푸라는 물건인데, 시제기 몇 기만 나오고 끝났다. 본토의 그 개판을 달리던 공업능력 때문.[10] 그래서 기존 기체인 제로센을 우려먹는다. 그런데다가 렛푸 자체의 성능은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을 대파시켰던 일본군 파일럿 시가 요시오가 렛푸의 테스트 파일럿으로 참여하고 나서 내린 결론이 '''"이따위 물건을 만들려는 놈들의 머릿속이 궁금하다."'''였으니 뭐...
그렇게 날이 갈수록 빨라지고 튼튼해지는 미국 항공기들과 가면 갈수록 실력이 상향 평준화되고 동료기와의 연합 전술 능력도 향상돼 가는 미군 파일럿과의 공중전은 점점 힘들어졌다. 결국 '''한번의 전투에 미군 항공기에게 30대의 피해를 안겨주고 '순수 함재기만' 239대가 격추당하는 대굴욕'''을[11] 겪으며 '''날아다니는 잡몹이 된 끝'''에 결국 '''카미카제 공격'''의 상징물로 변해버리거나 전후에 거의 모든 기종이 고철 처분되어버리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12]
사실상 육군의 Ki-43 하야부사보다 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 병기이며 이는 실제 성능은 무시한 채 겉보기 스펙만 달성할것을 요구한 일본군의 한심한 사고가 그 근본적인 원인이니만큼 이는 자업자득이라고 볼 수 있다. 거기다 병맛넘치는 운용까지 겹쳤으니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게 이상할게 없는 셈이다.
6. 각종 전용 목적의 함재기
일본 해군은 특수한 용도의 함재기들을 많이 개발했는데, 항모를 제외한 특정 수상함 전용기(이하 특정 군함 전용기)가 바로 그것이다. 해당 기체를 운용하는 항공전함, 잠수항모, 항공순양함 등의 배다. 그들 생각으로는 상대적으로 비좁은 갑판에서 이착함을 해야 하므로, 그에 걸맞은 전용기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나 보다.
그런데 이 당시의 기술로는 수직이착륙기를 만들 수가 없었으므로, 특정 군함 전용기들은 모두 수상기로 만들어졌다. 항공전함 같은 배들이라도 캐터펄트를 실으면 함재기의 이함이 가능하지만, 태생이 전함인 탓에 함재기가 여유롭게 착함할 공간이 없으므로 물 위에 착수시키고 크레인으로 건져내는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이런 비행기들은 정찰기로 사용되었으나, 1930년대의 물건을 1940년대에 사용하는 것은 성능 면에서 문제가 있으므로 일본군은 새로운 수상정찰기를 개발하게 된다.
그래서 일본군은 E15K 시운이라는 수상정찰기를 만들어냈다. 전투기보다 빠른 수상정찰기가 있으면 제공권을 빼앗긴 상태에서도 정찰이 가능할 거라는 논리로 만든 것인데, 이건 오요도급 경순양함 전용기다. 시험제작기를 포함해서 '''15기'''가 생산되었으며, 자세한 건 오요도급 경순양함 일본 위키피디아와 시운 일본 위키피디아를 참조하자. 폭격기무적론하고 하등 다를 바 없는 논리인데 같은 엔진기술로 수상기가 빨라지면 상대할 비수상전투기는 훨씬 빨라진다. 물론 엔진기술은 영미의것이 훨씬 나았다.
그것만이 아니다. 일본군은 정찰과 폭격을 모두 할 수 있는 다목적 수상정찰기도 만들어냈다. E16A 즈이운이 바로 그것으로, 순양함에 탑재해서 정찰과 폭격을 병행함으로서 부족한 함재기 전력을 보충하려고 했으며 이세급 전함에 탑재될 예정이었다. 220기가 생산되었으며, 일본인들은 이걸 걸작이라고 칭했다. 자세한 건 즈이운 일본 위키피디아를 참조하자.
그러나 압권은 단연 M6A 세이란이다. 잠수 항모에 탑재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신형 수상정찰기 겸 폭격기로, 플로트 대신 바퀴를 붙인 육상 운용형 개량기 난잔까지 합쳐서 '''28기'''가 생산되었다. 이 수상정찰기는 비좁은 잠수함 격납고에 격납하기위해 주익이 뿌리부터 접혀 밀착되고 꼬리날개까지 접혀지며 플로트 역시 평소엔 분리하여 함내에 보관하다 출격시 기체에 장착하는 상당히 독특한 구조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극지방의 운용까지 상정해서 자이로스코프를 설치하는 등 세계 어디서나 이용 가능하도록 특수하게 제작되어 대당 단가가 제로센 50대와 맞먹는 굉장히 비싼 가격을 자랑했다. 세이란 일본 위키피디아 참조.
6.1. 문제점
위에 소개된 전용기들의 생산량은 적다. 220기라면 많아보이지만, 2차대전 당시의 전투기들 중에는 1만 기를 넘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즈이운은 많은 편이고, 시운이나 세이란은 시험제작기나 바퀴 달린 개량기들을 합해도 채 30기 조차도 안 된다. 이래가지고는 규모의 경제를 이루지 못하니 대량 생산을 통해 가격을 떨어뜨릴 수가 없으며, 전용 부품을 사용하므로 보급에도 혼란을 초래한다. 따라서 안 그래도 개발비가 비싼 물건이 제작비도 비싼데다 다른 무기 체계랑 사소한 부품조차 공유하지 않는다. 많이 찍어서 가격을 낮추면 된다고? '''말은 쉽지.''' 위에 있는 세 기종 모두 특수한 배에 전용 함재기로서 실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비행기들이므로 그럴 수가 없다. 즉 세이란이나 시운, 즈이운 등을 충분히 양산해서 가격을 내리려면 그만큼 '''해당 함재기를 요구하는 전용 모함인 센토쿠급 잠수 항모나 오요도급 항공순양함을 양산해야 한다.''' 일본군에게 과연 그것이 가능한 지에 대해선 더 이상 말이 필요한가?(...)[13]
그래도 갑판이 좁은 특수한 배에서 이착륙을 해야 하니 어쩔 수 없이 만들어야 하지 않느냐는 주장도 나올 수 있지만, 미군에는 그런 거 없다. 미군이 60m짜리 비행갑판을 가진 미니 항공모함을 만들었을 때, 여기에 실린 것은 육군 관측기였지 새롭게 만들어진 전용 함재기가 아니었다. 호위항공모함에 실린 함재기들도 이미 만들어진 해군의 함재기들을 그냥 갖다 놓았을 뿐이고,[14] 전용 함재기 같은 건 개발할 생각조차 안 했다. 호위항공모함이 무려 100척이 넘었는데도 말이다. 미국의 미니 항모에 대한 내용은 항공모함 항목에 소개되어 있으니 참조하자.
그리고 굳이 순양함에 탑재할 수상정찰기를 개발하고 싶다면 그냥 한 가지로 통일하면 된다. 오요도급 순양함에는 시운, 항공전함에는 즈이운, 잠수항모에는 세이란. 이런 식으로 개발하는 건 낭비다. 게다가 적어도 세이란은 그나마 모함인 센토쿠급 자체가 잠수함이라 격납고를 충분히 확보하는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격납고가 너무 좁았고, 다른 배와는 아예 개념 자체가 전혀 다른 잠수 항모라는 특성상 격납고 크기에 맞춘 별도의 전용기가 필요했다고 변명이라도 할 수 있지만[15][16] , E15K 시운 같은 건 '''변명 자체가 불가능'''하다. 오로지 오요도급 경순양함에만 실을 전용 함재기를 개발하고, 실패작으로 판명되었는데도 양산하다니 무슨 지거리야!
그래도 특정 군함 전용기니까 성능은 괜찮지 않았냐고? 그런 거 없다. 위에 소개된 특정 군함 전용기들은 모두 수상기라서 플로트를 달고 있는데, 이러면 공기 저항을 심하게 받으므로 어설프게 설계하면 다른 비행기보다 시속이 100km 이상 느려진다. 가장 빠른 세이란조차 최고시속이 474km다. 수상기는 원래 그렇다고 변명하고 싶어도, '''이탈리아'''가 '''1931'''년에 개발한 경주용 수상기인 마키 MC. 72는 최고시속이 '''709km'''다. 물론 이 경우는 마키 MC. 72가 경주용으로 속력을 매우 강조한 경우임은 감안할 필요는 있다. 플로트가 없는 육상기인 독일의 Bf109나 영국의 스핏파이어의 후기형도 최고속력이 650km/h전후였고[17] 대전기 가장 빠른 기체중 하나라는 미국의 F4U 코르세어도 초기형은 700km/h가 안되는 속력이었다. 전투기들 보다도 빠른 기체를 세이란과 비교하니 당연히 느릴 수 밖에 없다. 세이란도 당시 미국이 운용한 OS2U 킹피셔같은 수상기보다는 빠른 편이라는점을 생각하면 어디까지나 수상기 치고는 빠른편이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아래에 있는 '특정 군함 전용기의 실적' 항목 참조.
애니메이션이라면 이런 특정 군함 전용기들이 큰 위력을 발휘했겠지만, 현실에선 그런 거 없다. 성능도 모자란 한 줌의 특정 군함 전용기로 전세를 뒤집을 수 있을 정도로 미군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일본군의 개전 직후부터 패전까지 잠시라도 보유했던 경항모, 정규항모 등을 전부 포함한 항공모함 총 생산량이 26척인데, 태평양 전쟁 말기 미해군은 '''정규항모만 따져도 28척에 달했다.'''(...) 한마디로 일본군이 전쟁 시작부터 끝까지 보유했던 모든 항공모함 숫자보다 미해군의 '''급조''' 정규항모 숫자가 더 많다는 소리다.[18] 게다가 정규항모 개개의 성능 역시 비교를 불허하는데다 미국의 '''100척이 넘는 호위항모 숫자'''는 제외했는데도 저렇다.
6.2. 특정 군함 전용기의 전과
제대로 써먹었다면 나름대로 괜찮은 평가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E15K 시운은 원래 목표에 크게 못 미치는 속도를 내는 실패작이고, E16A 즈이운도 성능은 괜찮았지만 제대로 활약하지 못했으며, 그들 모두 본래의 목적인 함재기로서의 활용은 전혀 되지 못했다. 그나마 M6A 세이란은 잠수 항모에 탑재되었지만, 실전 투입 직전에 전쟁이 끝났다. 한술 더 떠 이쪽은 '''미군기 도색으로 위장 도색을 입혀서 작전에 나갈 계획'''도 세워뒀다가 걸리기 전에 죄다 바다에 버렸다!
이 꼴이 된 이유는 미군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일본군이 특정 군함 전용기를 띄웠을 때는 전쟁 후반기인데, 이 무렵이면 미군이 제공권을 틀어잡은 시기다. 당연히 미군 전투기들이 특정 군함 전용기를 요격하기 위해 몰려오게 되고, 특정 군함 전용기의 빈약한 성능으로는 미군 전투기들을 따돌릴 수 없다. 일본군 수상기들의 실적이 전쟁 후반기로 갈수록 급격히 추락한 것도 그 때문이다. 미군이 일본군 수상기를 잡는데 전투기를 동원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까먹은 일본군의 잘못이었다.
7. 지상 기지에서 운용된 항공기
일본 해군은 육상 기지에서 운용해야 하는 중형 폭격기를 대량으로 운용했다. 대략 1,048대의 G3M과 2,435대의 G4M을 운용하여 총3,483대를 운용했다. 그러나 해군에서 저런 항공기를 운용하는 자체가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때문 만은 아니다. 저 사례로 든 폭격기들은 지상폭격 임무도 수행했지만 대함임무 또한 수행하였으므로 해군에 소속된게 영 터무니없는 행위는 아니다.[19] 게다가 일본은 공군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니[20] 해군 항공대에서 대함임무로 대형폭격기를 운용하는 것 자체는 별로 이상한 문제가 아니다. 이는 소련 해군에서도 항공대를 운용했던 방식이며 현대에도 P-3같은 대잠초계기는 해군 지상기지에서 운용한다.
문제는 해군에 소속된 중(中)형 폭격기들이 태평양 전쟁 중, 후기에 맡은 임무가 병맛이 넘친다는 것인데, 크기로 보나, 운용 목적으로 보나, 전투기라기보다는 '''카미카제용 유인 유도[21] ''' '''단거리[22] ''' 대함 순항미사일인 MXY-7 오카를 운반, 발사하는 것이었다. 그나마 같은 목적으로 만든 Ki-115 츠루기의 경우는 자력으로 이륙이나 이함이 가능한 프로펠러 엔진이라도 달려 있지, MXY-7 오카는 그런 것도 없이 로켓 엔진이어서 자력으로 이륙이나 이함이 불가능하다. 물론 오카는 당시 기술로는 요격이 어려울 정도로 굉장히 빠르긴 하지만 그 이전에 자폭병기라는 시점에서 이미 문제가 많다. 자폭병기에 대해서는 일본군/무기체계 문서의 자살특공 문단을 참고.
또한 대함임무를 위한 의도와는 별개로 실제로 이 폭격기 운용 면에서 육해군 대립 때문에 발생한 삽질도 존재한다. 이 부분은 육해군 대립 문서와 점감요격작전 문서를 참고할 것.
그리고 일본 해군이 발주한 중(重)폭격기로는 G10N 후가쿠가 있는데, 이건 육군 항목의 실패한 초중전차인 100식 전차 일명 오이차의 후계인 Dae-i 거대 이동 요새와 비슷한 궤를 갖고 있다. 쉽게 말해 프로토타입도 제대로 만들어지지 못한 페이퍼 플랜.[23] 그리고 이놈이 실제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문제가 되는데, 당장 미 육군항공대의 B-29만 해도 당대의 어느 항공기보다 덩치가 큰 항공기인데, 이건 그 B-29조차 능가하는 덩치로 만들 예정이었다는 것이다.[24]
8. 조선인 출신 인사
일본 해군에서는 조선인이 입대해도 함선 배치를 최대한 막았기 때문에 일본 해군에 입대한 조선인은 대부분 이 해군 항공대 아니면 해병대인 해군 육전대에 속했다. 해군 항공대 출신 인사들은 광복 후 대부분 대한민국 공군으로 들어갔다.
[1] 저 유명한 사카이 사부로, 이와모토 테츠조도 병계급이었다![2] 0식 함상전투기의 모델넘버로 A6M을 쓰는 이유는 A: 전투기, 6: 여섯번째 모델, M: 기체를 처음 설계한 회사인 미쓰비시에서 나온 것이다. 제로센의 수상기 버전인 2식 수상기는 N이 붙어 있는데, N은 수상기로 개조했다는 의미. [3] 이쪽은 대전 말까지도 미국의 P-51 머스탱과 호각으로 싸울 수 있는 성능을 가지고 있었고 최후기형은 머스탱 D형보다 우세한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머스탱이 다른 연합군기에 비해서 전투시 안정감이 좀 떨어지는 편이기는 했지만 이건 '''중폭격기에 대한 호위기로 만들어진''' 머스탱의 역할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수랭식엔진+익내연료탱크. 익내연료탱크문제는 그래도 떡장+소화/방루장치 다 갖추고있어서 제로센따위와는 비교가 불가능하다. 그래도 저 둘 때문에 바이탈파트가 늘어나는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긴 하지만말이다.) 그리고 저렇게 대조를 해도 미 해군 항공대에는 최강의 전투기 F4U-4가 있으니...[4] 문제는 저 화려한 기동성도 알고 보면 여타 항공기들이라면, 연합군기는 물론 루프트바페의 항공기라도 실속에 빠져서 추락하기 딱 좋은 저속에서의 선회전을 중심으로 한 기동성이란 거다. 저속 선회전이 언제 유행한 전술인지를 생각해보면 역시 시대에 뒤처진 전술교리가 만들어낸 것이다. 특히 본문에 나오는대로 엔진 기술부터 떨어지는 상황에서 무리하게 비행성을 끌어올리는 설계를 하다 보니 기체를 만든 재료부터 경량화에만 올인하며, 경량화 기법을 너무 남용해서 A6M 문서에 들어가서 보면 한계속도가 629km/h남짓이던 21형의 경우 시험 모델이던 12시(試) 전투기의 급강하 기동 테스트시 매스밸런스가 무너지면서 공중분해(!)됐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테스트 파일럿은 탈출을 못해서 순직.[5] 자중을 포기하면서 포기한 게 하나 더 있다. 바로 기체의 구조 강도. 그래서 P-40 워호크의 주익을 이용한 육탄공격을 받고 꼬리날개가 잘려서 격추된 사례도 있으며, 제로센 21형의 경우 급강하 속도가 629km/h 정도로 제한되면서 이 속도를 넘어가면 심할 경우 기체의 매스밸런스가 버티지 못하고 붕괴하면서 '''비유적인 의미로서가 아닌 실제로''' 공중분해 당한다. 자세한 사항은 항목 참고.[6] 물론 일반적인 인식이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1942년 5월부터 11월까지의 와일드캣과 제로센의 손실비는 111:127로 제로센이 오히려 열세다. 특히 와일드캣이 전쟁 후반기에도 FM-1 & FM-2로 이름을 바꿔서 호위함공모함의 함재기 용으로 개량된 후 계속 쓰였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참고로 호위항공모함용 와일드캣의 이름이 바뀐 이유는 제조사가 그루먼에서 제너럴 모터스로 바뀌었기 때문이지 기본적으로 같은 기종이다. 엔진이 F4F시절에 쓰던 1200마력에서 1300마력대의 엔진으로 업그레이드 되고 기총 수가 F4F-4 형태에서 F4F-3 형태로 돌아간 걸 제외하면 말이다.[7] 일본의 내로라하는 에이스들은 거진 중일전쟁에서 양민학살하며 배출된 에이스들이며, 대부분의 격추숫자도 중일전쟁에서 격추한 중국군 기체가 대다수다. 그때문에 이와모토 테츠조처럼 전쟁 중후반까지 활약한 에이스가 아니라면 실력이 상당부분 과장됐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8] 조종사 양성 과정도 폐쇄적이었을 뿐 아니라, 사소한 일에도 조종사 후보생에서 퇴출시키기도 했다.[9] F6F 헬캣과 비슷한 시기에 함재기로 개발됐으나 F4U 콜세어는 함재기의 한계를 초월했다. 함재기는 육상기에 비해서 성능의 페널티가 심한데 저건 어지간한 육상기보다 더 좋은 물건이었다. [10] 렛푸의 경우에는 뒤떨어진 설계사상도 한몫 한다.[11] 386대라고 적혀있었지만 교차검증 결과 밝혀진 실제 격추수는 정찰기를 포함해서 239대다. 필리핀 해 해전 항목 참고. 그래도 '''단 하루''' 공중전에서의 단순 교환비만 여덟 배 차이라는 게 함정. 저기서 지상기지에 있던 기체들을 포함하면 단 하루 공중전에서 290대가 격추당했다.[12] 사실 카미카제 항목에도 나오지만 제로센은 그 허약한 내구도 때문에 카미카제에도 쓰이지 못했다. 카미카제가 속도 무시하고 달려드는 자살 돌격인데 제로센은 항목에 들어가서 제원표를 보면 나오지만 후기형인 52형으로 따져도 최대 속도 제한이 약 670km/h밖에 되지 않았다! 전기형인 21형의 경우 최대 제한 속도가 629km/h 정도. 이 속도를 넘어가면 '''비행 중에 산산조각 난다.''' 대공포를 맞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물론 극후기형은 700km/h를 넘어가는 기체도 나오지만 그거 나올 때쯤이면 그나마 에이스 파일럿이라 할 만한 파일럿들은 거의 죄다 야스쿠니 신사로 영구재배치 되던 무렵이라....[13] 애초에 일본이 항공전함, 항공순양함같은 걸 만든 이유가 항공모함을 건조할 재료와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야마토급 전함 3번함인 시나노도 건선거를 비울 정도까지만 건조하다가 중단된 것을 항공모함으로 개장한 것이니...[14] 이 당시 미 해군 호위항공모함에 쓰인 함재기는 F6F 헬캣의 직전 함재기인 F4F 와일드캣을 호위항공모함 용도로 소폭개량한 FM-1, FM-2이다. 그런데 이거... 원래의 와일드캣 개발사인 그루먼에서 만든 게 아니라 자동차 회사인 제너럴 모터스에서 만든 거다![15] 사실 이것조차 명확한 변명이 될 수 없다. '''"도대체 잠수함이 함재기가 왜 필요하단 말인가?"''' 말로야 미군의 수상함대의 저지선을 뚫고 파나마를 폭격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지만 그게 가능한 소리인가? 고작 잠수함에서 발진한 수상기 2~3기 정도에 타격을 받을 정도로 파나마가 녹록한 타겟일 리도 없거니와, 유효한 타격을 주려면 수십 기는 필요할 텐데, 고작 28기로 그게 가능할 리 없다. 일본군도 그 정도는 알고 있어서 잠수항모의 대량생산을 추진했지만 실패했다.[16] 지금이야 전쟁이 끝난지 오래되었으니 민간인이 가도 군용 시설을 보기 어렵지만 전시에는 대공포로 도배가 되어있었을 것이 뻔하다.[17] 물론 둘 다 나중에는 700km/h를 넘기는 버전까지 나온다.[18] 왜 급조인가 하면 에식스급 항공모함들이 건조된 연도가 진주만 공습으로 시작된 태평양 전쟁 직전인 1941년부터였기 때문.(에식스급의 전 함급이자, Big E가 포함된 함급인 요크타운급 항공모함과 와스프는 제2차 세계대전도 개전되기 전인 1931년부터 건조된 것이다.)[19]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시 미 해군도 비슷한 목적으로 2발 중형 폭격기인 B-25J 건쉽의 해군 버전인 PBJ-1J 미첼과 4발 중폭격기인 B-24리버레이터의 해군 버전인 PB4Y-2를 운용했다.[20] 이건 당대 미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초대 미 합중국 공군참모총장인 헨리 아놀드 역시 대전기 호칭은 '''육군항공대 사령관''', 계급은 육군 원수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공군을 독립된 편제로 보유한 국가는 영국과 독일 뿐이었다.[21] 즉 사람을 유도장치 삼은 것이다.[22] 이것도 중요한데 오카의 최대 사거리는 40km도 되지 않았다.[23] 특히 G10N 후가쿠의 경우는 기체는 제대로 되지도 못한 설계도로만 있었고 엔진만 몇기 만들어지고 끝났다. 그래서 일본 내에서 게임이나 프라모델로 나오는 G10N들은 완성된 모델을 상상해서 만들어낸 거다.[24] 텍싱으로 이착륙하는 항공기들은 헬리콥터 같은 수직이착륙기가 아닌 이상 덩치가 커질수록 이착륙시에 요구하는 활주거리도 길어진다. 즉 그 당시 일본의 내부 사정을 감안했을 때 이놈이 만들어졌다고 해도 이륙을 위한 텍싱을 하다가 정찰 나온 미군기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격파될 운명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