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익(삼국지)

 


張翼
(? ~ 264년)


1. 개요


삼국시대 촉나라의 인물. 건위군 무양현 사람이다. 는 백공(伯恭).

2. 생애


조상 대대로 에 충성한 집안[1]으로 고조부는 사공 장호[2]이고, 증조부는 광릉태수 장강이며, 모두 명망과 공적이 있었다.
유비가 서촉을 정벌할 때 합류한다.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고 그 주의 목을 겸임했을때, 장익이 서좌(書佐)로 임명됐다. 젊었을 적 건안 말년에 효렴에 천거되었으며, 강양현의 장이 되었으며, 부릉현의 령으로 옮겼다. 이어 재동태수로 승진했으며, 여러 번 승진하여 광한, 촉군태수까지 이르렀다.
건흥 9년(231년)에 내항도독 겸 수남중랑장이 되나 장익은 평소 성격이 엄격하고 강직해 이민족들이 호응을 하지 않아 통치하는데 많은 애로사항을 겪는다. 결국 이민족의 수령인 유주란 자가 반란을 일으키자 마충을 내항도독을 대신 맡기고 장익을 중앙으로 소환한다. 그런데 장익은 이를 거부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만족이 소란을 피워 토벌하러 왔다가 임무를 다할 수 없어 돌아갈 뿐입니다. 그러나 나를 대신할 사람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전쟁터에서 식량 수송과 곡물을 축적하여 적을 멸망시키기 위한 물자를 만들어야 합니다. 어찌 쫓겨나는 이유를 빌어 공적인 임무를 버릴 수 있겠습니까?

장익은 이렇게 바로 소환에 응하지 않고, 마충이 도착할 때까지 군대를 통솔했으며 게으름이 없었고, 후임자가 도착하자 곧 출발했다. 장익 대신 도착한 마충은 장익이 세운 토대에 의지하여 유주의 반란을 진압한다. 승상 제갈량은 이 일을 듣고 장익을 칭찬했다. 이후 제갈량은 무공에서 출병할 때, 장익을 전군도독으로 삼고, 부풍태수[3]를 겸임하도록 했다. 제갈량이 죽은 후, 전령군에 임명됐고, 유주를 토벌한 공로를 소급하여 관내후의 작위를 주었다.
연희 원년(238년)에 중앙으로 들어가 상서가 되었고, 점점 승진하여 독건위[4], 가절이 되었으며, 승진하여 도정후로 봉해졌으며, 248년에 정서대장군으로 임명되는데, 전임자가 모두 북벌의 한축이었던 위연강유였다. 장익도 북벌 쪽에 얽히긴 했던 듯. 253년 정월에 대장군 비의위나라에서 투항해왔던 곽순에게 살해당하고 난 뒤, 255년에 위장군 강유와 함께 성도로 돌아왔다. 이때 강유가 출병하려 할 때 홀로 강유와 논쟁을 벌인 기록이 <장익전>에 있다. 당시 장익의 논리는 "아직도 영토는 협소한데다 백성들은 피곤해하니 무리하게 전쟁을 벌이지 말아야 한다."였다. 그러나 강유는 이를 묵살하고는 되려 장익에게 진남대장군으로 승진을 시키고 전장에 대동하고 다닌다.
그리고 강유는 북벌에 반대하는 장익을 끌고 위의 옹주자사 왕경을 적도에서 격파하고 수많은 위군을 죽였다. 이는 강유의 북벌 중 가장 통쾌한 승리였다. 하지만 장익은 "여기서 군대를 물려야 하며, 만약 더 전진했다간 그간 세웠던 공로를 훼손하게 될 것"이라며 또 다시 만류 내지는 경고를 했고, 강유는 장익의 의견을 '''또''' 무시한다. 그러나 강유는 적도에서 농성하는 왕경을 함락시킬 수 없자 결국 장익의 말대로 군대를 철수시킨다.
259년에 장익은 좌거기장군 겸 기주자사로 승진했으며, 263년에 위나라가 촉나라를 정벌하자 강유와 함께 검각에서 종회군에게 저항했지만 성도에 있던 유선이 항복하니 종회에게 항복한다.
264년에 강유의 꼬드김으로 종회가 야심을 품고 촉을 기반으로 사마소를 정벌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했는데, 이 때 장익은 유선 및 옛 촉나라의 다른 관리들과 함께 난에 휘말려 성난 위나라 병사들에게 살해된다.
비록 강유와는 물과 불처럼 의견이 자주 충돌하고 사이가 나빴으나, 강유가 억지로 장익을 전장에 대동했던 점을 감안한다면, 강유도 장익의 실력을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장익은 불평 없이 강유를 수행해 공을 세웠다. 진수는 "장익은 강유의 날카로움에 항거했고, 종예(宗預)는 손권의 위엄에 대항하여, 모두 칭찬할 만한 점이 있다"고 평가하였다.
그의 아들은 서진에서 광한태수를 지낸 장징, 손자는 동진에서 강양 태수를 지낸 장계(張啓)가 있다. 화양국지에 따르면 장익의 아들 중 장미(張微)라는 사람이 뜻을 돈독히 하여 배움을 즐기니, 관직이 광한태수(廣漢太守)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장징(張徵)의 오기로 보인다.

3. 가족관계


  • 아들 장징(張徵): 자는 건흥. 관직은 광한태수에 이르렀다고 한다. 서진 말기인 302년, 이특의 공격을 받아 사망했다.
  • 손자 장존(張存)
  • 손자 장계(張启)

4. 평가


  • 장익의 북벌 반대론은 진지와 초주가 함께 작성한 <구국론>과 연계 되었다는 시각이 있다. 강유가 본격적인 북벌을 시작한 시기가 비의의 사후였던 점, 진지가 사망한 시기가 258년이였던 점, <구국론>의 핵심이 "작은 나라는 백성이 피로하지 않게 풍족하게 된 연후에야 큰 나라를 칠 수 있다"로 장익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는 점, 또한 장익 역시 진지와 마찬가지로 상서에서 일한 경험이 있음을 감안한다면, 255년 무렵에 강유가 조정에서 적도 전투의 당위성을 주장하자 장익, 진지, 초주 등이 나름의 논리를 함께 세운 다음 강유의 주장에 조정에서 함께 저항한 것이 아닌가 추측할 수도 있다. 이 와중에 진지는 강유에게 논파되고 장익만 홀로 남아 강유와 언쟁을 벌인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각 사건의 선후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추측한 것이므로 유의해야 한다.
  • 반대로 북벌론에서 강유와 무조건 엇나가는 취지에서 말한것은 아니라고도 볼 수 있다. 장익이 상서에서 일했다지만 곧이어 승진하여 건위독, 가절, 정서대장군이 되었고 제갈량의 북벌 당시에도 오장원이 관할구역인 부풍태수를 맡는 등 장익은 내정보단 북벌, 군부와 연계되어 있는 사람이다. 특히 장익이 강유의 북벌을 반대한 처음 시점인 255년이 중요한데 이때 장익은 강유와 함께 같이 성도에 돌아왔다고 되어 있다, 즉 강유의 성공한 북벌인 254년 적도 북벌에 장익도 정서대장군으로서 참여한 이후 강유와 함께 돌아 왔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위나라에 반란을 일으킨 적도지역의 지역민들까지 촉한에 귀속시킨 분명 성공적인 북벌인데 바로 다음해에 강유가 다시 북벌을 하려고 하자 장익만이 조정내에서 오로지 혼자 강유와 정쟁을 했다고 되어 있으며(唯翼廷爭) 여기에 진지나 초주가 끼어 들 여지는 없었다.

즉, 장익은 북벌의 성공을 보고도 군사활동을 반대한 것인데 여기에는 장억의 전사 같은 영향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수많은 성을 함락시키고 위나라에 반란을 일으킨 백성들을 촉한 내지에 이주시킨 성공을 거둠에도 장익의 이런 태도는 의아한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사실은 그만큼 강유의 입지가 (외정과 내정 1인자가 아닌 탓도 있으나) 조정내에서 약했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굳이 다른 대신들이 아닌 강유와 함께한 장익만이 오로지(唯) 반대했다고 나오는 부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쨌거나 강유는 장익을 일단 끌고가서 북벌에 참여시키는데 장익은 다시금 강유와 함께 대성공을 맛보지만 북벌의 성과 확장에는 또 반대한다. 그런데 조정에서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치기 어렵다고 주장한 논리'와는 달리 조정과는 관련없는 현지에서 이때 장익이 강유와 대면할때는 그때와 다른 논리를 내세운다. '지금까지의 큰 성과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다. 즉 실제로 장익의 이 말은 장익이 진정 두려워 한 것이 강유가 북벌에서 혹시나 성과를 올린 다음에도 오히려 손해를 입어 그 성과가 퇴색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만약 장익이 초주나, 진지와 같이 정략적인 입장에서 강유를 비판한거라면 이 시점에서 강유의 성과가 퇴색되는 것에 대해서 굳이 말릴 필요가 없고, 애초에 강유의 북벌에 굳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필요가 없다. 왜냐면 강유의 성과가 없고 이에 자신의 책임이 없을수록 자신의 말이 옳은것이 증명되며 목소리를 정계에서 더 낼 수 있으니까. 강유가 억지로라도 장익을 북벌군에 데리고 온 것은 그만큼 장익이 강직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맡은바 할 일은 충실히 수행하는 인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여러모로 불안한 강유의 입지를 생각했을때, 북벌에 반대하는 인물, 그것도 북벌의 실질적인 중요 책임자인 정서대장군을 진남대장군으로까지 승진시켜 억지로 끌고 왔다면 강유가 절대적인 신권 1인자가 아닌 만큼 더한 마찰이 있을법도 한데 장익은 계속 북벌에 대해 강유와 의론이 틀어졌음에도 실제론 맡긴 직책 자체는 순순히 받아들이고 그의 북벌에 열심히 참여하였다, 또 강유의 변경된 한중방어선을 가동할 때도 강유가 굳이 지원군으로 지정하여 요청해 최고 중요 요지인 한중 양안관구를 방어할 사람은 장익이었다. 이렇게 진지와 초주등에 장익이 연합했다는 증거는 없는 반면 강유가 장익과 서로 연결되었다는 증거는 많다. 이는 그만큼 서로 생각이 달랐어도 강유는 자신의 군사계획상으로 장익을 그만큼 신뢰하고 있었으며 장익 역시 강유와 논쟁을 벌이면서도 그의 군사활동에 묵묵히 참여하는 강유측 인사임을 드러내는 것이다.[5] 진지와 연계가 있다는 장익이 상서에 있던 시기는 열전 상으로 봐도 얼마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강유와 더 친분이 있을법한 장익이 이렇게 강유가 '북벌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민감하게 구는가? 이 문제를 다시 한번 살펴보자면 비의 사후 강유의 군권과 진지의 내정이 나뉘어진 것을 따질수 있다. 장익은 성격이 엄격하고 강직하며 선천적으로 법률을 엄격하게 집행하는 사람이었던 반면 진지는 황호 등의 환관들과 타협하고 방굉등의 인재들을 내치는 등 그 행실이 바르지 않고 시류에 영합하는 등 서로간 성격이 달랐다. 이는 촉한이 멀쩡할때 정계에서 소외되자 진지와 연계하고, 진지 사후 다시 정계에서 소외되자 촉한의 항복을 주장하는 등 시류에 영합해 자신의 이익을 취한 초주와도 다른 점이다.
결정적으로 장익이 강유의 북벌을 비판할때는 강유의 북벌은 성공적이었으며 또 무조건 비판을 위한 비판만은 아닌, 같이 북벌을 실행하는 입장에서 자신의 군사적 식견이 포함되어 있었던 비판이기도 했다.[6][7]한편 강유가 잘나갈 무렵엔 진지, 초주는 침묵하고 있었으나, 강유의 북벌이 실패한 단곡 이후에 강유의 입지가 약해지자 그제서야 진지는 초주와 협력해 구국론을 짓는다, 그러나 이 논문이 나올때는 장익은 기록상으론 여기에 영합하지 않았다.[8] 여기에 장익은 여전히 군부에서 일하며 구국론이 작성된 다음해에 진지가 죽자 우거기장군이 되었으며 강유는 이에 발 맞추어 대장군이 되어 답중에서 한중 방어선과 북벌에 대비했다. 단지 처음에 내세운 논리가 나중에 진지, 초주등이 내세운 논리와 같았을 뿐이다. 한 마디로 장익은 북벌에 참여하면서 순수하게 강유의 북벌이 실패할 경우를 더 걱정하고 있었다는 반증으로 볼 수 있다. 즉, 장익은 강유의 비판적 지지자라고 볼 공산이 있다는 것이다.
장익은 상서에서 진지와 같이 일해 봤고, 진지가 황호 등과 영합하는 것을 직접 봤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인 만큼 상서에서 진지를 경험해보고 그 사람됨을 우려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그를 견제할만한 인물인 강유가 위험요소가 높은 북벌의 실패로 인해 촉한 내부에서 영향력을 상실하는것을 우려했을 수도 있다. 우선 나라를 다스릴 재주는 있으나 궁극적으로 내부의 문제점을 조장하는 진지, 그리고 궁극적으로 최종 문제점인 황호에 대한 견제가 필요하다고 봤을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강유가 함부로 군사활동을 하는 것을 경계했을 가능성이 높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면 장익(+요화)가 굳이 강유의 북벌을 반대하거나 내켜하지 않으면서도 그에 충실히 협력하는 이유도 가능하다, 강유의 북벌에서 성과가 있어야 내부의 진지, 그리고 진지 사후 황호를 제압할 수 있을 권위가 세워질만 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후 요화가 내부적으로는 황호를 제압할수 없어 답중에 머물다[9] 후화로 출병하는 강유[10]를 보고 '적보다 역량이 안 되는 상황에서 왜 계속 북벌에 신경 쓰느냐' 쓴 소리를 한 것이나 제갈첨과 동궐이 강유의 병권을 빼앗는 대신 익주자사라는 내정직으로 돌리려는 것과 유사한 행동이라고도 볼 수 있다. 즉, 황호 같은 황권과 결합한 환관세력을 견제할 만한 인물은 당시에 다들 강유밖에 없었다고 본 것이다. 강유 스스로도 황호를 제거하려다가 실패하고 도망한 적이 있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런면에서 삼국전투기 등에서도 추정하는 것이지만 장익이 성도의 난때 살해당한것은 그만큼 강유와 깊숙히 연결되어 있고 종회로부터 인호절개를 이어받아 촉군을 지휘해 강유와 함께 촉한을 부흥시킬 작정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도 설득력이 있다. 장익이나 요화나 강유에게 경력이나 연륜이나 나이 어린 상관에게 '쓴소리'를 할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지 강유를 적대한 인물로는 보기 어렵다는 것. 물론 이 역시 추측이지만, 적어도 장익이 강유의 북벌을 충실히 수행한 장수라는 점 하나만큼은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5. 기타


때로 장익을 또다른 촉의 명장인 장억과 헷갈려하는 사람이 꽤 된다.
덤으로 요화내민 등에 가려지기는 하지만 이 사람도 장난 아니게 오래 살았다. 유비가 익주목이 되었을 때'''(214년경)''' 관직을 받은 기록이 있으니 그 이후 무려 '''50년''' 가량을 촉에 충성한 것이 된다.

6. 미디어 믹스



6.1.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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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이 남정할때 악환과 일기토를 벌이는 것으로 첫 등장.

6.2. 삼국지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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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인의 삼국지
삼국지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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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2, 13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모든 능력치가 70대 초반인 만능형 장수다. 얼핏 보기엔 뭐하나 쓸 데가 없어 보이지만, 후기 시나리오 장수에, 이릉 이후에 가장 인재난에 시달리는 촉에서 몇 안되는 올라운드 플레이어이기 때문에 빛을 보는 편. 삼국지 2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삼국지 3에서는 육전지휘 75/수전지휘 71/무력 72/지력 42/정치력 36/매력 73의 평범한 무장으로 나온다. 근데 출생이 158년이라 시나리오 6에서는 죽어서 안 나온다. 이후 삼국지 4부터 출생이 178년으로 고쳐졌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6/무력 74/지력 71/정치력 68. 분투와 연사, 정란을 가진 좋은 장수. 9의 경우 익주쪽 장수들은 기병, 궁기계 병법을 가진 장수가 없는 대신 분투와 연사, 특히 연사는 거의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게 특징이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7/무력 74/지력 71/정치력 68/매력 70으로 고만고만. 특기는 기술, 보수, 화시, 진정, 은밀, 유인, 반격. 총 7개다.
삼국지 11에서도 통솔력 75/무력 74/지력 71/정치력 72/매력 70의 괜찮은 능력치이지만, 특기가 잉여인 친만. 다른 이민족 킬러 장수들은 답파인데 안습. PK버전이라면 특기를 다른 것으로 바꿔주자.
삼국지 12에선 엄청나게 쓸 만한 전법인 '''전공성강화'''가 생겨서 평범한 무장에서 쓸 만한 무장으로 위상이 올라갔다. 능력치는 통솔력 75/무력 74/지력 76/정치력 72. 물론 본인은 공성(특기)없음에 궁병이라서 파괴력이 약하지만, 다른 무장들에게는 좋은 편이라서 팀의 파괴력을 책임지는 무장이다. 지력도 76이라서 나쁘지 않다. 게다가 제갈량팔진도와 합치면 아군에게 주는 파괴력이 세지고 공성 특기을 가진 무장들을 완벽한 공성병기으로 진화시켜 준다. 그래도 전국칠웅 시나리오에서는 낙읍(낙양) 재야로 등장하는데. 이는 장량의 후손이기 때문. 이는 장막도 마찬가지다. 일러스트는 창을 든 채 위로 올린 무릎에 손을 올리고 있다.
삼국지 13에서도 능력치는 삼국지 12 때와 동일하다. 특기는 훈련 3, 순찰 3, 신속 2에 창/기/궁은 각각 B/C/A. 전수특기는 훈련이다. 유비군 소속이므로 창병은 거의 A로 나가게 될 것이다. 전법은 사기회복으로 전법 포인트 1로 사기 2단계(자신의 사기 50 상승)를 올려주는 전법인데 아무래도 전작보다 전법이 부실한 느낌이지만, 그래도 포인트 부담 없고 사기가 많이 차서 엔간해선 장익의 부대는 궤주할 일이 없긴 하다.
거기에 PK에서는 사기 상승이 30으로 줄었긴해도, PK에선 길을 지날때마다 사기가 깎이는 반면 사기 상승전법 대부분의 너프 때문에 사기 30 한꺼번에 올려주는 전법 찾기가 쉽지 않다. 가성비로는 이만한 사기상승 전법이 또 없는셈, 3포인트만 질러줘도 자부대 사기가 90이나 오른다! 여기에 부장전법을 사용하게 해주는 트레이너까지 사용해 장익을 부장으로 이용해주면 해당 주장은 전투 마무리 단계에서 사기를 충전시켜 적어도 사기걱정은 없이 부대를 진군시킬수 있다. 장익의 능력치까지 나쁘지 않은것도 플러스 포인트.
삼국지 14에서 일러스트는 전작 삼국지 13을 그대로 쓴다. 능력치는 통솔력 75/무력 74/지력 72/정치력 72/매력 70으로 전작에 비해 지력이 4 하락했다. 개성은 숲전, 조달, 법률, 친만이 있고, 주의는 할거, 정책은 시설개발 Lv 3, 진형은 장사, 안행, 방원이 있고, 전법은 연노, 철벽, 경파, 저지를 가지고 있다. 친애무장은 요화, 혐오무장은 없다.

6.3. 영걸전 시리즈


삼국지 영걸전에선 아예 등장조차 하지 않는다.
삼국지 공명전에선 면죽관 전투 이후에 오의, 오반과 함께 합류하지만, 천대받는 클래스인 보병계에 레벨도 낮고 능력치도 구리며, 일기토조차 단 하나도 없기 때문에 이엄, 하다 못해 (지력이 좋아 책략을 사용하기 수월한) 마속을 키우면 키웠지 장익을 키우는 사람은 일부러 어렵게 게임을 하려고 하지 않는 이상 없다. 같은 장씨 돌림인 장억의 활약에 비하면 더욱 묻혀보인다.
삼국지 조조전에서는 가상모드에서 조조에게 단칼에 썰리는 것도 모잘라 송사리 취급당한다. 장익이 썰리자 장억이 분노하지만 장억도 썰린다.

6.4. 진삼국무쌍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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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삼국무쌍 시리즈에서는 줄곧 클론 무장으로 나오다가, 모바일 게임인 진삼국무쌍 BLAST에서 첫 참전. 조비와 비슷한 느낌의 차가워보이는 미청년으로 등장했다.
무기는 장성채와 동일한 순패검. 생긴 것도 그렇고 복장도 그렇고 어째 성채의 TS버전같다. 이 외에도 전국무쌍 시리즈타케나카 한베에와 닮았다는 의견도 보이는 편.
아직 본편에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클론들이 대축제를 벌이는 진나라 스토리에서 요화, 제갈각 등과 함께 비중이 상당히 높은 클론으로 등장하기에 참전할 여지는 어느 정도 있다. 특히 요화와 함께 강유를 보좌하며 마지막까지 진에 저항한 촉나라 소속 무장이라는 캐릭터성이 있는만큼 후반기 스토리에서 참전하기 좋은 떡밥을 가지고 있다. 요화와 장익이 참전하면 234년에 죽어야 하는 월영이 263년까지 살아나오는 전개를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된다.

6.5. 삼국전투기


레옹으로 패러디. 소개 컷에서는 화분을 들고 있다. 유비 사후의 촉군에서 꾸준히 등장한다. 조운-제갈량-위연 등이 사망한 이후부터는 강유와 같이 북벌에 많이 참여한다. 이때 강유의 북벌에 여러 합리적인 이유를 들며 태클을 건다. 이후 검각전투에서 강유-요화와 합류하여 필사적으로 위군을 방어해냈지만, 유선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강유와 함께 촉한을 부흥시키려는 계획에 참가하다가 목숨을 잃은 것으로 묘사된다.

6.6. 삼국지평화


삼국지평화에서는 이름의 한자가 날개 익이 아닌 유익할 익으로 나온다. 조운보다 강하고 장비와 천합을 겨루는 촉의 명장으로 나오며 삼국지연의에서는 탁응과 함께 낙성을 지키던 유괴의 지원군으로 파견되면서 등장하며 장임이 전사한 후에도 끝끝내 항복하지 않고 항복한 엄안을 욕하는 유괴를 죽이고 항복해 유비의 부하가 된다.
[1] 선조를 거슬러가면 한삼걸인 '''장량'''에 이른다.[2] 장호(張浩)는 자가 숙명(叔明)이다, 율(律)과 춘추(春秋)를 정리했으며, 경사(京師)에서 유학하여, 광한태수 담찬(鐔粲), 한중의 이합(李郃), 촉군(蜀郡)의 장패(張霸)와 함께 사이가 좋았다. 대장군 등즐(鄧隲)이 장호를 불러 점차 상서복야로 옮겼고 나아가 팽성상(彭城相)이 되고, 은사(隱士) 여구막(閭丘邈) 등을 천거하여 불려가 정위(廷尉,중국 진(秦)나라 때부터, 형벌을 맡아보던 벼슬)에 배임되었다. 연광(延光) 3년(124), 한안제가 태자를 폐의하길 의논하자, 오직 장호와 태상(太常) 환언(桓焉), 태복 내력(來歷)와 함께 불가(不可)하다고 말했다. 순제(順帝) 초에 장호는 사공(司空)에 배임되었고, 83세에 죽었다. - 익부기구전 주석[3] 이 부풍태수 직책이 중요한데, 부풍군 안에 오장원이 있기 때문에 오장원 일대의 둔전을 맡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단지 추측일 뿐, 확실한 근거가 없다.[4] 건위군의 도독[5] 강유가 촉한에 온 227년부터 263년까지 북벌전선에서 강유, 장익, 요화까지 해서 서로 부대낄일이 더 많았고 장익의 부풍태수, 정서대장군 벼슬이나 요화와 함께한 강유의 북부 군사활동을 보면 이 셋은 제갈량-장완-비의 시절 위나라 상대 군사활동에 깊게 연관되어 있다. 이는 264년 촉한이 멸망할때까지 진행된다. 거의 촉한 최후의 3대장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6] 실제로 조수 전투에서 더 이상의 성과는 불가하다고 장익이 반대했을때 강유는 성과를 더 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화를 냈지만, 정말로 진태의 원군이 도착하자 더 이상의 전과를 포기하고 종제에 주둔한다.[7] 그러나 강유의 판단이 공명심에 들떠 장익의 현명하고 냉철한 판단을 무시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 진태와 같이 있었던 등애 역시 촉군의 왕성한 사기, 위군의 낮은 사기로 촉군과의 교전을 피할 것을 주장하였다. 한 마디로 해 보지 않고는 모르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강유는 위의 지원병을 대비해 복병도 심어두었고 강유가 포위를 풀고 철수하자 왕경이 구원해 준 진태에게 "식량이 열흘 치도 안 남아있어서 성이 함락되고 옹주를 잃을 뻔했다." 고 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결과만 가지고 강유의 공격 판단이 아주 틀렸다고 볼 수는 없다. [8] 물론 이것은 고질적인 촉한의 기록 미비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라고 볼 여지도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257년의 시도에선 장익이 진지, 초주와 함께 연계했다고 볼만한 정황은 없다. 만약 진지가 장익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친분이 있었다면, 그는 결정적으로 같은 상서에서 일했다는 명분으로 정계에서 소외되고 무시당하는 초주 같은 인물 대신, 장익을 함께 끌어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장익전에도 언급되듯, 그의 고조부는 삼공 중 하나인 사공을 지낸 장호이며 광릉태수, 시어사, 광록대부를 지낸 장강이 증조부이다. 한 마디로 후한시기 중앙정계에서 나름대로 명문이기까지 한, 오래 놀던 명문집안이라는 뜻. 장익을 끌어들이는게 별 다른 가문적인 뒷배가 없는 초주보다야 나았을것이다.(물론 이랬어도 뭔가 꾸며내기 좋아하는 초주를 계속 이용했을수도 있다.) 만약 실제 몇년전 강유의 북벌을 같은 이유로 반대했던 실무자이자 유비시대부터 일해온 군부 최연장자 중 하나인 장익이 참여했다면 초주가 몇글자 적은거 보다야 파급력이 상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진지는 굳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초주같은 인물을 불러서 이런 시도를 해야했으며 화양국지에는 '촉한 사람들이 초주의 구국론을 제대로 살피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을만큼 진지와 초주의 시도는 외면받았고 강유는 그러거나 말거나 북진해 2년간 머물렀다.[9] 변경된 한중 방어선을 통괄해야하기 위해선 강유가 답중에 있어야 했고 또 한편으로는 중앙의 모함이나 암살 위협을 피할 필요성도 있었기 때문이다.[10] 후화전투는 여러가지 명목으로 진행된 것 처럼 보인다. 내부적으로는 4년동안 북벌을 쉬었던 강유지만 언제까지 북벌을 쉴 순 없었다. 4년간의 휴식기간 동안 바뀐 위나라 변경 상황을 찔러보아 어느정도 성과가 나오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외부적으로는 촉한이 계속 위나라 서부에 위협을 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위해 보여줄 필요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