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태/선수 경력

 


1. 개관
2. 상세
2.1. 고교 시절
2.2. 대학 아마추어 시절, 1992년 ~ 1993년
2.3. 1994년
2.4. 1995년
2.5. 1996년
2.6. 1997년
2.7. 1998년
2.8. 1999년
2.9. 2000년
2.10. 2001년 ~ 2002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2.11. 2003년
2.12. 2004년
2.13. 2005년 ~ 2007년
2.14. 2008년
3. 히어로즈로의 귀환, 은퇴식
4. 90년대 최고 투수 논쟁


1. 개관


1996년부터 2000년, 2003년까지 6시즌간 부동의 KBO 에이스로 군림했던 현대 유니콘스 소속의 투수였다.
현대가 마지막으로 우승했지만 개인 성적은 좋지 않았던 2004년과, 팀은 해체되기 직전에 기적적으로 정규리그 2위를 했지만 본인은 재활만 하다 단 한경기만을 등판한 2006년을 빼면, 정민태와 현대 유니콘스의 성적은 거의 같은 흐름을 보였다. 또한 2000년까지 탄탄대로를 걷던 현대 팀이 정민태가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진출한 2001년부터 가세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고, 양자 모두 야구에서의 결말이 비참했던 것까지 똑같았으니...이쯤되면 아예 팀과 인생을 같이한 수준. 야만없이지만 현대 유니콘스가 재정난을 겪지 않고 지금까지 존속했다면 그의 등번호 20번은 영구결번으로 정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래서 '투수왕국'으로 불렸던 현대 구단에서도 단연 투수 중 간판, 최고 서열로 대접받았다. 역대 삼청태현 투수 중 스탯티즈 WAR 1위, 최다승 투수(124승), 단일 시즌 20승 투수(1999년), 프로야구 최초의 연봉 7억 투수[1] 등의 타이틀을 가진, 현대의 명실상부한 에이스.
92년 데뷔했으나 토미 존 서저리로 2년을 쉬고, 94년부터 본격적으로 뛴 이래 00년까지 스탯티즈 투수 WAR 1위(38.35)[2], 다승 1위(99승). 90년대 후반(95~99년) KBO리그 투수 1인자[3].
통산 전적은 290경기 등판(선발 270경기) 1831이닝 124승 98패 평균 자책점 3.48이며, 특히 포스트시즌에서는 유일하게 두 자릿수 승수를 기록한 선수이자 최다 선발 등판, 스탯티즈 WAR 1위 등을 기록한[4] '''가을 야구 끝판왕'''. 이 중에서도 한국시리즈 기록은 더 특별한데, 한국시리즈 통산 유일하게 두 자릿수이상 선발 등판한(12경기) 투수이며 선발승 6승으로 1위를 기록하고 있다. 통산 다승으로는 가을까치 김정수 투수(7승)에 이어 선동열과 공동 2위, 누적 war 2위(2.90)[5]. 또한.최동원과 더불어 유이한 단일 한국시리즈 선발 3승 투수(2003년 한국시리즈[6])라는 기록을 갖고 있다. 정민태의 포스트시즌 및 한국시리즈 유일한 1패는 96년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조계현에게 당한 패배 뿐. 즉, 현대가 우승할 때 정민태는 패전을 떠안은 적이 없다.
선동열에 이은 투수부문 골든글러브 2연패 달성. 이 기록은 이후 린드블럼 외에는 아직 달성한 사람이 없다.

2. 상세



2.1. 고교 시절


84년 중학야구 MVP로 주목을 받았고 86,87년 팀을 황금사자기 4강에 까지 올렸다. 87년 전국체전 우승은 덤.
87년에는 훗날 국가대표에서 늘 함께한 지연규, 구대성 등과 함께 청소년야구 대표팀으로 선발되었다.
고교 대어로 주목받으며 한양대에 진학하였다.

2.2. 대학 아마추어 시절, 1992년 ~ 1993년


[image]
사진 좌측부터 정민태, 구대성, 양준혁
한양대 시절에는 1년후배 [7] 구대성과 함께 좌대성 우민태로 불리며 대학 야구를 평정했다.[8]
89년에 1학년 구대성과 함께 전국대회 3관왕, 90년에는 2관왕의 왕좌에 오르는데 1등공신이었으며 89년 대만 IBA배 국제대회 우승 90년 북경아시안게임 우승 [9],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우승 등 화려한 족적을 남기며 90년 아마야구 MVP 로 뽑혔다.

(북경아시안게임 일본전 완투)
91년에는 캐나다 국제 세계선수권 3위, IBA 우승의 주역이 되었다. [10] [11]
1992년 태평양 돌핀스의 1차 지명을 받고 데뷔했으나 그 해 겨울 병역비리로 인해 65일 간 ''' '''유치장에 갇혀 버린 데다가 설상가상으로 팔꿈치 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을 당해 결국 몇 경기 등판하지도 못하고 수술을 받게 된다. [12] 이때 한국프로야구 선수 중에는 '''최초'''로 인대 접합 수술을 받았다.참고로 당시 한국 프로야구계에서는 팔꿈치에 칼을 대는 수술을 금기시하고 있었고, 영입한 신인 투수가 1년 6개월 이상 재활하는 것을 바라만 봐줄 감독도 찾기 어려웠다. 때문에 당시 한국 야구의 일반적 상황이었다면 한의원 다니고 진통제나 맞으면서 야구하다가 성적 못 내면 흔한 학창시절 혹사당한 유망주중 한명으로 끝나는 거였다. 그런데 토미 존 수술과 재활 결정이라는 것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 태평양 감독이었던 정동진이 메이저리그를 경험한 인물이었고, 팀의 완전한 리빌딩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동진은 수술을 꺼리던 당시 투수들을 설득했고, 2010년대까지도 토미 존 서저리 최고 권위자로 불리는 제임스 앤드류스 박사를 찾아가서 투수들을 수술시키고, 완벽한 재활을 보장하는데 정민태가 운 좋게 여기에 포함되었다. 이 때 재활을 담당한 코치가 은퇴한 후 막 태평양이 투수코치로 영입한 '''김시진'''이었는데, 김시진 역시 정동진 당시 태평양 감독이 그 이전 대구상고 사제지간, 삼성 감독 시절 인연으로 영입한 인물이었다.

2.3. 1994년


25경기 모두 선발로 출장, 145.1이닝 (선발 출장 경기당 소화 이닝 5.8), ERA 3.72 / FIP 3.01 (ERA+ 103.4 / FIP+ 127.6)
탈삼진/9 : 5.64 볼넷/9 : 2.35 피홈런/9 : 0.43, sWAR 3.23.
기나긴 재활에서 복귀한 시즌. 당시 수준 높았던 태평양 돌핀스 선발진의 한 축을 담당하며 8승 9패를 기록한다. 플레이오프에서 한화 이글스를 상대로 1승을 기록했으며 LG 트윈스와 벌였던 한국시리즈에서는 3차전에 선발 투수로 나서 5이닝동안 퍼펙트 투구를 하기도 했다.


2.4. 1995년


28경기 모두 선발로 출장, 188이닝(선발 출장 경기당 소화 이닝 6.7), ERA 3.63 / FIP 3.08 (ERA+ 103.4 / FIP+ 120.4)
탈삼진/9 : 5.51 볼넷/9 : 2.78 피홈런/9 : 0.38, sWAR 3.60.
팀 내에서 가장 많은 188이닝을 던지며 8승 14패를 기록했고 동산고 후배 위재영과 함께 팀 마운드를 지탱했다. 본격적으로 많은 이닝을 소화하기 시작했으나 태평양의 아름다운(?) 득점력 덕에 '''리그 최다패를 기록했다.''' 팀은 최종 순위 7위를 기록.
그 후 현대그룹이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한다.

2.5. 1996년


30경기 출장(선발 29경기), '''210.1'''이닝 (선발 출장 경기당 소화 이닝 ??), ERA 2.44 / FIP 3.13 (ERA+ 150.5 / FIP+ 117.1)
탈삼진/9 : 5.43 볼넷/9 : 1.93 피홈런/9 : 0.64, sWAR 5.87.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하고 팀명을 바꾼 현대 유니콘스의 꾸준한 지원과 김재박 감독, 하기룡 투수코치의 도움으로 에이스로 활약, 15승 9패를 기록한다. 한화 이글스와의 준플레이오프에서는 8이닝동안 무실점으로 호투하며 1차전 승리를 안겨주었고, 플레이오프 쌍방울 레이더스전에서는 활약이 뚜렷하지 않았으나 마지막 5차전에서의 활약이 컸다. 플레이오프에서도 승리하여[13] 한국시리즈에 진출, 해태 타이거즈전에 2차전(8.1이닝 노디시전)과 5차전(패배)[14][15] 선발 투수로 나서기도 하였다.

2.6. 1997년


31경기 모두 선발로 출장, '''219'''이닝 (선발 출장 경기당 소화 이닝 7.1), ERA 3.33 / FIP 3.08 (ERA+ 119.9 / FIP+ 129.6)
탈삼진/9 : 6.53 볼넷/9 : 2.10 피홈런/9 : 0.62, sWAR 5.53.
1997년에는 219이닝을 던지며 13승 13패 평균 자책점 3.33을 기록. 호투하고도 팀 타선이 터져주지 못한 경우가 많아서 아쉬웠던 해. 팀은 6위로 추락한다.
정민철과 탈삼진왕 경쟁을 벌였으나 1개 차이로 2위를 기록.(159삼진, 1위 정민철 160삼진)

2.7. 1998년


1998년에는 200.2이닝을 던지며 평균 자책점 2.89, 17승(리그 2위[16][17]) 9패 를 기록, 현대 유니콘스의 정규리그 1위[18]를 이끌어낸다. 이후 한국시리즈에서는 1차전과 4차전에 선발투수로 나서며 승리를 거두었고 6차전에서는 마무리로 등판, 세이브를 기록한다. 도합 2승 1세이브 방어율 0.61이라는 무시무시한 호투를 선보이며 한국시리즈 MVP에 선정, 당시 신차였던 EF쏘나타를 부상으로 받았고, 이어서 그 해 다승왕 김용수를 제치고 투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한다.[19][20] 다만 정규리그 MVP는 그 해 42홈런을 치며 종전 장종훈의 단일시즌 홈런 기록(41개)을 경신한 타이론 우즈가 가져간다[21].


2.8. 1999년


1999년에는 33경기(선발 29경기) 등판, 230.2이닝을 던지며 20승[22] 7패 3세이브 평균 자책점 2.54[23](2위)[24]를 기록한다. 이 해가 정민태의 커리어하이인데, 사실 1999년 시즌은 역사상 손꼽히는 타고투저의 해였다. 30-30 기록자만 세 명이 나오고, 이승엽이 54홈런을 치고, 해태 타이거즈가 팀 홈런 210개를 기록하며, 리그 평균자책점이 4.98인 해. 즉 '''타고투저 시대에 혼자 투고타저 놀이한 선수'''. 당장 평균자책점 3위를 기록한 문동환의 평균자책점이 3.28이다.
타고투저에서 20승을 거두고 평균자책점이 2점대인 것을 보고 팀 운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 해 현대 유니콘스는 드림리그 3위, 종합 5위로 시즌을 마쳤다[25]. 팀 실점은 2위를 기록하였지만 이건 정민태의 지분이 크고, 나머지 투수들은 그 해의 타고투저를 버티지 못하였다. 김수경은 탈삼진왕을 차지하기는 하지만 기복이 심했고, 위재영은 시즌 중 병역비리에 걸려 한 동안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최원호는 방콕 아시안 게임 뒤에 제대로 박살나버렸다. 중간계투의 조웅천은 성적이 점점 내려가고 있었고, 김홍집은 LOOGY로 많은 경기에 등판하긴 했지만 5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 나머지 계투들 또한 성적이 좋지 않았다. 초반에 선발로 나섰다가 마무리로 복귀한 정명원은 구위 저하가 현저히 드러났다. 결국 이 해 현대는 특정한 마무리 없이 집단 마무리 체제를 가동, 10명의 선수들이 세이브를 번갈아 가면서 획득했다. 이 상황에서 정민태의 승리를 지켜주거나 분식회계를 막아준다거나 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팀 타선은 더 심각했다. 팀 득점은 쌍방울 다음으로 낮은 7위에 불과하였다. 작년도 좋은 성적을 낸 이명수김경기는 규정타석도 소화하지 못한 채[26] 그대로 고꾸라졌고 전준호는 그나마 규정타석은 소화했으나 타격성적이 전년도 보다 3푼이나 급락했다. 이숭용이나 나머지 선수들도 모두 성적이 조금씩 하락하였다. 이 시즌은 가중출루율(wOBA)이 4할 이상인 선수가 15명이나 있었지만 그 중에 현대 선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나마 wOBA 순위를 상위 25위로 범위를 넓혀야 박재홍(19위, .391), 박종호(24위, .370)만 이름을 보인다. 야심차게 데려온 외국인 선수 에디 피어슨은 wOBA 리그 28위(.365)로 전 해의 스코트 쿨바만큼의 활약을 하지 못하였다. 사실 피어슨은 공격력만 보고 데려온 외국인 타자인데[27], 그 공격력마저도 그저 그랬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버틴게 정민태였다.
투수 골든글러브 2연패를 달성하지만, 정규리그 MVP는 54홈런을 때린 이승엽에게 밀려 수상에 실패한다.
시즌이 끝나고 일본 진출을 하려했으나 KBO 규정상 1시즌을 더 소화해야 해서[28] 2000 시즌까지 뛰게 된다.
여담으로 정민태는 이때를 회상하면서 230이닝을 넘게 던졌을 때 나중에는 팔이 안들어지고 밥도 못 비빌 정도로 마비되는 기분을 느꼈다고 한다. 그만큼 무리하게 던졌다는 것.
이와중에 아시아야구선수권 겸 시드니올림픽대회 예선 국가대표, 한일 슈퍼게임에 출전하였다.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결승리그 2차전 대만전에 선발로 나서 7이닝 2실점으로 승리의 발판을 놓았다. [29]

99년 아시아야구선수권 대회 겸 올림픽예선전 결승리그 2차전
한일슈퍼게임에서는 4차전에 선발로 출전하여 3.1이닝 동안 5안타 3실점하였는데 마쓰이히데키한테 1회 2루타를 맞으며 2실점 한 것이 컸다. 5:3 상황에 내려온 이 경기는 결국 8:8로 무승부. [30]
사실 시즌 230이닝을 던지고 아시아야구선수권 대회를 뛰고 슈퍼게임까지 뛰며 250이닝 가까이 던진 시즌으로 그는 허벅지 부상으로 시즌 내내 고생했으며 2000년 시즌의 구위저하로 연결된다.

2.9. 2000년


2000년에는 김수경, 임선동과 함께 18승을 올리며 리그 최초 공동 다승왕에 올랐고[31] 삼성 라이온즈와의 플레이오프에서 2승, 두산 베어스와의 한국시리즈에서 1승을 올렸다. 그 해 플레이오프 MVP와 스포츠 신문사에서 주관하는 정규리그 우수 선수상을 받았다.
이해 7월 30일부터 정규시즌 종료까지 7연승을 거두었는데, 이는 일본 진출 및 복귀 이후인 2003년 21연승까지 이어진다.
http://mn.kbs.co.kr/news/view.do?ncd=108486
그러나 99년의 무리 탓에 후반기에는 허벅지 부상에 시달렸으며 플레이오프에서는 삼성과의 7전4선승제의 경기에서 2승을 거두며 한국시리즈 진출에 앞장섰으며 한국시리즈에서 3차전 선발로 승리를 거두었다.

2.10. 2001년 ~ 2002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image]
2000 시즌 종료 후 이적료 5억엔[32], 연봉 1억 2000만엔에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 조성민, 정민철과 1군 진입 경쟁을 펼쳤다. 그런데 2001시즌 개막 직전,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와의 시범경기에서 발목 부상을 당하고, 8월에야 데뷔전(13일 대 야쿠르트전)을 갖는다. 그런데 여기서 3이닝 3실점을 기록, 하루만에 2군으로 내려가고 만다. 9월에 다시 1군에 올라와 16일, 18일에 구원승 2승을 올리지만, 선발로 올라가면 올라가는 족족 털리고 만다. 2001년 성적은 10경기 등판(선발 3경기) 2승 무패 방어율 6.16.
2002년에는 6월에서야 1군에 올라가게 된다. 중간계투로 등판하면서 7월 중순까지는 선방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7월 25일 한신전에서 끝내기를 당하면서 2군으로 내려가고, 8월 18일에 1군에 복귀하여 0이닝 3실점을 기록하고 만다. 그래도 바로 2군으로 내려가지는 않고 몇 경기 더 던졌지만, 8월 30일에 역시 0이닝 3실점을 기록하고 이후 1군 경기에 나오지 못한다. 2002년 성적은 17경기(선발등판 없음) 1패 방어율 6.41.
이후 정민태는 계약기간 1년을 남기고 KBO에 복귀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12월 16일 연봉 5억원에 현대 유니콘스로 복귀한다.
일본에서의 실패 요인이라면, 정민태 본인은 차별대우코칭스태프(특히 가토리 투수코치)와의 불화를 이유로 들었다. 그러나 불펜에서 정민태의 공을 받아 봤던 요미우리의 불펜 포수인 유환진[33]은 정민태에게 구종이 단조롭다는 평가를 내렸었다.
그러나 96~00년까지 5년연속 200이닝을 던지면서 이미 99년부터 고생했던 허벅지 부상으로 인해 구위를 잃고 있었다. 한국시리즈의 무적 투수였지만 2000년에는 구위를 많이 상실했던 것으로 경기에서 증명되었다. [34] 팀의 사정 [35] 으로 요미우리로 강제 입단 한 것은 덤
구대성과 같이 한국야구와 비슷한 성향의 퍼시픽리그로 입단을 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얘기도 있다. 실제 구대성은 절친한 선배인 정민태에게 같은 조언을 하기도 했다. 일본야구-구대성, 정민태 만나 조언

2.11. 2003년


2003년은 정민태가 '''사실상 선수로써의 마지막 불꽃을 태운 시기.''' 정민태는 이 해 8월 31일 세계 기록인 '''선발 21연승'''[36]을 기록하며 종전의 기록인 로저 클레멘스의 20연승을 갈아치웠다. 최종 성적은 29경기(전부 선발등판) 177이닝 평균자책점 3.31(3위), 17승(1위) 2패를 기록. 세번째로 다승왕 타이틀+골든글러브를 차지했고 승률부문 타이틀도 차지한다. 다만 선발 21연승의 임팩트가 워낙 강렬해서 그렇지 세부 스탯으로만 보면 한화의 이상목이 더 뛰어났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37][38][39]
그리고 SK 와이번스벌어졌던 한국시리즈에서는 1, 4, 7차전에서 선발로 나서며 모두 승리를 따내 1998년에 이어 2번째로 한국시리즈 MVP에 오른다. 단일 한국시리즈 선발 3승은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최동원이 거둔 4승(선발3승, 구원1승) 이외에는 나오지 않은 기록. 또한 정민태 이후로 아직까지 7차전을 완봉승으로 장식한 선수는 없다.
그러나 선발 21연승, 한국시리즈 3승이라는 대기록이 정민태의 남은 선수생활에 악영향을 미치는데, 우선 정규시즌에서 7연승을 한창 달리던 중 정민태는 고질적인 허벅지 근육통으로 인해 2군에 한 번 다녀온 적이 있다. 그런데 당시 현대의 선발진이 무너지기 직전이었고[40] 이 때문에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선발 로테이션에 끌려나온 것. 한국시리즈에서도 정민태는 허리 상태가 썩 좋지 못했는데, 그걸 참고 1, 4, 7차전에 선발로 등판했고, 특히 7차전에서는 허리에 테이핑을 하고 완투를 하게된다. 이렇게 무리를 한 결과는 바로 다음 해부터 드러나게 된다. [41]
아무튼 화려한 성적을 거둔 그는 당시 프로야구 역대 최고연봉인 7억 4천만원에 연봉협상을 마무리한다.[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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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2004년


개막전에 출전. 이전까지 개막 5연승을 달리던 정민태였는데, 이 시즌 개막전에서는 홈런 2방을 맞고 7이닝 3실점. 잘 던졌으나 패전을 떠안고 만다. 그러나 그 이후로 3연승을 하며 5년만의 20승 재도전이라는 말까지 나왔는데, 4월 25일 두산전[43]에서 1.1이닝 9실점(6자책)을 기록하며 털리고 만다. 이후 정민태는 그대로 무너졌고, 이 와중에 허리부상무릎부상까지 닥치면서 선수생활 자체에 빨간불이 켜지게 된다. 결국 최종성적은 28경기(전부 선발 등판) 165.2이닝 7승 14패(다패왕) 평균자책점 5.00을 기록한다.
그래도 왕년의 에이스이고 워낙 포스트시즌에 강했던 모습을 보여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고 2차전과 7차전 선발로 출격했지만, 2차전에서는 1.1이닝 6실점, 7차전에서는 4.1이닝 3실점으로 무너졌다. 다만 두 경기 모두 무승부를 기록.[44]
시즌 종료 후 바로 연봉이 25% 삭감, 5억 5500만에 연봉협상을 마무리한다.

2.13. 2005년 ~ 2007년


2005년에는 시즌 개막 전에 어깨 물혹 증세가 발견, 재활에 힘쓰다 5월에 1군 등록. 8일 복귀전에서 7이닝 2실점으로 호투했지만 패전을 떠안았다. 그런데 5월 13일 경기에서 2.2이닝만에 허벅지 부상으로 인해 강판되고, 그대로 시즌 아웃. 9월에 조용준과 함께 어깨 수술을 받는다.
2006년에는 전해 받은 어깨 수술로 인해 7월 이후에나 복귀할 예정이었다. 이 해 정민태는 FA까지 60이닝 정도 남은 상황이어서 건강하게 복귀하는 것이 절실했던 상황. 그러나 복귀가 점점 늦어졌고, 그 와중에 2군 경기에서 3이닝 12실점이나 하는 모습도 보이고 말았다. 그래도 끝내 1군 복귀를 하지 못한 조용준과는 달리 9월 29일, 1년만에 1군에 등록되고 10월 1일 삼성전에서 중간계투로 첫 등판을 가졌다. 복귀하자마자 심정수에게 투런홈런을 맞고 말았지만[45], 2이닝 1실점을 하며 그런대로 지켜볼 만한 투구를 펼쳤다. 팀은 당시 정규리그 2위를 기록했고, 정민태가 막판에 PO 엔트리에 들어갈 수 있을지가 관심사였으나, 결국 PO 엔트리에는 들어가지 못한다. 그리고 현대가 PO에서 한화에게 업셋을 당하면서 정민태에게 더 이상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2007년에는 시작부터 복귀 가능성에 대해 좋지 않은 평이 들려왔다. 그리고 4월 7일 롯데전 홈 경기에 7회 계투로 나온 첫 등판부터 0.2이닝 4실점으로 무너지고, 15일 LG전에 선발로 나와서도 4이닝 4실점(3자책)을 기록한다. 그리고 21일 롯데전에는 이대호에게 사직구장 첫 장외홈런을 허용하는 등 0.2이닝 5실점을 기록. 평균자책점이 3경기 20.25까지 치솟자 정민태는 자진해서 2군으로 내려간다. 결국 김시진 감독의 입에서 은퇴 이야기까지 나오고 만다. 그래도 7월 12일에 1군에 다시 등록되고, 비로 한 차례 선발 등판이 밀려 22일 KIA전에 선발로 등판했지만 4.1이닝 4실점을 기록. 29일 LG전에서는 1회부터 강습타구에 맞는 등 불운까지 겹쳐 2.2이닝 4실점을 기록. 이제까지 등판한 경기에서 모두 패전을 떠안았고, 평균자책점도 14.59. 다행히 시간이 조금 지난 8월 19일 롯데전에서는 그래도 5이닝 2실점을 기록하지만 ND. 게다가 다음 등판인 8월 25일 두산전에서 2.1이닝 6실점 패전을 기록하며 도로 원상태로 돌아오고 만다. 그리고 이 경기가, 그가 현대 유니폼을 입고 뛴 마지막 경기가 된다. 그리고 9월 20일 두산전 홈 경기에서 다니엘 리오스가 본인 이후 8년만에 20승을 하는 광경을 지켜봐야 했다. 07시즌 최종 성적은 7경기(선발 6경기) 19.2이닝 0승 6패 평균자책점 12.81.
3년 동안 무승, 10연패. 한 때 KBO를 대표하는 에이스였던 그는 너무나 처참하게 무너져 있었다.

2.14.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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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이 되어버린 KIA 타이거즈 시절.
선수 말년에는 무리한 연봉으로 '돈민태'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었는데, 이는 2004년 4월 말 이후 급격한 노쇠화와 부상 등으로 인하여 전혀 팀에 도움이 안 됨에도 불구하고 연봉 협상에서 난항을 겪었기 때문이다.[46] 그러다 현대 유니콘스히어로즈로 재창단될 때, 이장석 사장과 박노준 단장은 '연봉 거품을 빼는 MLB식 운영'이란 명목으로 김동수, 전준호, 이숭용, 송지만, 조용준 등의 고액연봉자는 물론 모든 선수의 연봉을 후려치려 했다. 고참 선수들은 집단으로 반발했고 박노준 단장과 계속 트러블이 나다 박노준은 선수들에게 경고장을 날리는 목적으로 3월 4일 정민태를 자유계약 공시하며 방출시켰다.[47] 그 후 선수들은 결국 3월 말에야 깎인 연봉안을 받아들였다.
어쨌건 평소 고향 팀에서 커리어를 마무리하고 싶다고 밝혔고, SK도 '인천 SK'를 표방하기에 정민태의 영입을 시도했다. 그러나 김용휘 현대 유니콘스 사장이 KIA 타이거즈에게 정민태를 영입해 달라고 요청하고[48], KIA 타이거즈도 정민태에게 선발 자리를 보장한단 조건을 내건 결과, 정민태는 KIA 타이거즈로 이적한다.
그러나 2008년 4월 18일 무등 한화전에 선발 등판했지만 김태완에게 홈런을 맞는 등 부진하여 패전 투수가 된 뒤 2군으로 내려갔고, 그게 마지막 경기가 됐다. 2군으로 내려가서도 재기에 실패하며 결국 현역 은퇴를 선언한다.[49] 은퇴할 때도 고운 눈으로 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이미지가 많이 실추되었다. 이는 원래 그를 옹호해줘야 할 현대 팬 자체가 적을 뿐더러, 히어로즈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그나마 적던 팬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더욱 심화된 것이기도 하다.

3. 히어로즈로의 귀환, 은퇴식


사실 KIA에서 은퇴한 뒤에 KIA에서 투수코치로 일하면서 영건들을 키우고 싶다는 의견을 표력했지만, 선수들이 전혀 따라주지 않는 바람에 실망한 나머지 2008 시즌 후 김시진 감독의 부름을 받고 넥센 히어로즈에 코치로 돌아왔다. 보직은 1군 투수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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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2일 목동 LG전에서 은퇴식을 치렀다.[50] 코치를 하면서 보람을 많이 느낀다고 한다. 사진에도 나오듯이 평소때의 인상은 둥글둥글하고 인자해 보이지만, 투수가 어이없이 털릴 때 눈에 힘이 들어가는데 그땐 굉장히 무서워 보인다.(...)

4. 90년대 최고 투수 논쟁


전성기가 90년대로 겹치고, 일본에도 비슷한 시기에 다녀오고(그것도 같은 팀), 일본에서나 돌아와서나 비슷하게 망한(...) 한화 이글스정민철과 늘 비교가 된다. 야구팬에게는 영원한 논쟁 거리.
일단 다승 측면에서만 보면 161승(우완 최다승)의 정민철이 124승의 정민태를 압도한다.
92년에 같이 데뷔해서 95년까지 4년간 정민철은 54승, 정민태는 17승을 거뒀으나 이후 96년부터 04년까지 각각 7시즌을 KBO에서 뛰면서 정민철은 73승(평균10승), 정민태는 107승(평균 15승)을 거뒀다.
이에 2004년까지 양 정의 누적은 각각 127승(정민철), 124승 (정민태) 으로 비슷했으나 05년 이후 정민태는 폭망했고 정민철은 다시 살아나 09년까지 34승을 더해 둘의 누적 스탯 격차가 벌어지게 되었다.
현재 시점에서 기록으로 보는 두 정의 비교는 누가 봐도 정민철의 우위.
90년대 에이스 논란도 90~99년을 놓고 보았을 때 데뷔시즌 부터 활약한 정민철이 96년부터 본 궤도에 오른 정민태보다 90년대 누적 WAR 에서 우위이다. 다만 분석 경향에 따라 5년 단위 war 또는 연속 7개년간 누적 다승 또는 선발승이란 기준으로 조회를 하게 되면 90년 전반기의 정민철, 후반기의 정민태라는 결과를 얻기도 한다.
하여튼 정민태가 각성한 96년 시즌부터 기준을 하게 되면 이후 6년간 또는 04년을 포함하여 7년간 보여준 포스와 기록은 당대 누구도 그를 이길 수 없었다. 당대의 임팩트와 리그 지배력만 놓고 봤을 때 정민태의 위상은 포스트 선동열이라는 수식어가 다른 이보다 부끄럽지 않을 수준.
(96~03년 6시즌 간 100승, 한국시리즈 MVP 2회, 다승왕 3회, 골든글러브 3회 등)
반면에 정민철은 90년대 내내 꾸준했지만 전성기가 90년대 초중반에 있었기에 현대왕조 출범과 더불어 90년대 후반~00년 초반에 걸쳐져 있는 정민태의 임팩트보다 묻혀있기도 하다. 90년대의 다승 우월주위에 묻힌 면도 분명히 있다.
90년대 전체를 놓고 봤을 때 그리고 통산 성적을 놓고 보면 정민철의 우위. 그러나 96년부터 03년까지의 리그 지배력은 정민태의 승리.
[1] 2016년 김광현이 연봉 8억을 받으며 기록을 경신한다.[2] 전체 WAR 1위는 양준혁(42.57)[3] 물론 90년대 기록은 Sorting 방법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92년부터 00년으로 분류하면 정민철이 109승 WAR 48.03, 정민태가 100승 WAR 38.89지만 94년부터 끊으면 결과가 바뀐다. 마찬가지로 90년~94년으로 90년대 전반기를 분류하면 부동의 1위는 선동열이 된다. 90년대 전체로 하면 1위는 선동열.[4] 포스트시즌 통산 21경기 등판(선발 18경기), 10승 1패 평균 자책점 2.11, 115.1이닝, WAR 5.01[5] 1위는 선동렬의 3.22. 둘 다 한국시리즈에서 6승 1패를 기록.[6] 당연하지만 이 위로는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4승(3선발.1구원) 을 기록한 최동원밖에 없고, 단일 한국시리즈에서 3승을 거둔 투수는 정민태와 김일융(84시리즈, 선발2승 구원1승) 말고는 없다.[7] 실제로는 구대성과 동년배다. 구대성은 69년생, 정민태는 빠른 70. 구대성이 유급을 한 탓에 상호간 족보가 꼬였다. 그러다 90년대만 해도 학번 위계질서가 강한 터라 큰 의미 없이 상호간 선후배 또는 형동생 관계가 형성되었을 것이다.[8] ( 90년 아마야구 MVP 정민태, 91년 MVP 구대성 )[9] 일본전 9이닝 1실점 완투승 [10] 다만 91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아시아 예선 겸 아시아야구 선수권대회에서 대만전 선발로 나섰으나 동점을 허용했고 뒤에 구대성의 실점으로 통한의 패배를 했다.[11] 91년 아마야구 MVP는 구대성. 진정한 좌대성 우민태. [12] 92년 4월22일 쌍방울과의 더블헤더 1차전에서 최고구속 147을 자랑하며 경기개시 4타자 연속탈삼진, 7회까지 매이닝 탈삼진으로 진가를 발휘하며 데뷔했으나 4회말 삼진을 잡으려고 던진 공 하나로 팔꿈치에 치명타를 입었다고 한다. - 베이스볼코리아 96년 11월호 참조 [13] 플레이오프 최초의 리버스 스윕이 나왔다.[14] 한국시리즈에서 유일하게 패전을 떠안은 경기다.[15] 이날 피홈런도 있었는데 홈런친 해태 타자가 '''그분'''이었다.[16] 시즌 내내 LG 김용수와 다승왕 경쟁을 벌였다. 시즌 막판 양자 모두 17승을 거둔 상태에서 공동 다승왕으로 가자는 비하인드 얘기가 있었다는 소문이 있다. 그러나 김용수가 18승을 거두자 정민태가 많이 화가 났었다고.[17] 또 다른 설도 있는데, 현대가 한국시리즈에 갈 것이 확실시되자 에이스인 정민태를 일부러 아끼면서 한국시리즈에 대비하고, 다승왕은 플레이오프를 거치면서 한국시리즈로 올라올 것이 유력한 LG의 김용수에게 넘기는 쪽으로 작전을 세웠다고 한다. 김용수는 나이도 39살로 많았기에 체력도 상대적으로 밀리던 편이었고, LG의 1선발이 김용수니까 플레이오프 내내 올라올 가능성도 컸다. 하지만 이 설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이, 후술할 우즈의 42호 홈런이 나온 경기가 바로 98년 10월 1일, 정민태의 18승이 달린 경기였기 때문. 또한 이 해 LG는 정규리그 3위를 기록하고, 이 3위도 2위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6위에서 치고 올라온 것이다. 때문에 시즌 중에는 2위 삼성 라이온즈가 한국시리즈에 올라올 것으로 예측되었다. 현대도 그걸 바랬고(대 삼성전 14승 4패).[18] 111경기만에 정규리그 1위를 확정했다. 126경기 체제에서는 최단경기.[19] 조금 논란이 있는데, LG 김용수가 당시 최고령 다승왕에 올랐지만(18승), 한국시리즈에서 2패를 기록하다보니 기자단들이 정민태에게 돌아섰다고. 그러나, 정민태는 당해 투수 WAR 3위(선발 중 2위, 선발 1위는 1점대 평균자책점의 정명원)를 기록했지만 김용수는 14위(선발 중 10위)를 기록했다. 김용수의 평균자책점이 꽤 높기도 하고(3.45), 이닝도 25이닝 차이가 난다.[20] 한편 골든글러브 2위는 선발 보직이 아닌 마무리 투수 임창용이 기록. 참고로 임창용은 1998년 투타 전체 WAR 1위. 임창용은 삼성시절의 혹사로 많이 기억되지만, 사실은 해태 때에도 무진장 굴렀다.[21] 이 해 MVP와 골든글러브는 논란이 꽤 있는데, 자세한 건 KBO 골든글러브 항목 참조.[22] 구원승 1승 포함. 언제부턴가 구원 1승을 비하하며 선발 20승이 아니라는 기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선발20승의 가치는 존중받아야 하지만 정민태의 구원 1승도 5이닝 이상 던지고 얻은 승리에다 당시 에이스가 구원투수로도 나와야 했던 99년 현대의 사정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구원 등판이 오히려 20승의 방해 요소가 되기도 했다. 8월 28일에 19승째를 올렸지만, 후술하듯 현대의 구원진이 망가져 있어서 9월 동안 구원투수로도 간간이 등판해야 했고(3구원등판, 3세이브 기록), 이후 선발로 돌아왔을 때 3패만을 추가한다. 그리고 20승을 올린 건 10월 8일. 1995년 당겨쓰기로 인해 20승을 못 올릴 뻔한 이상훈과 유사한 경우. 참고로 순수 선발승으로만 20승 고지에 오른 마지막 투수가 바로 그 이상훈. 그 후로 단일 시즌 20승은 2007년 다니엘 리오스, 2014년 앤디 밴 헤켄, 2016년 더스틴 니퍼트, 2017년 헥터 노에시 같은 외국인 투수들이 달성했다가, 정민태 이후로 18년 만인 2017년에 양현종이 토종 투수로써 20승 고지에 올랐다.[23] 선발투수의 평균 자책점과 구원투수의 평균 자책점의 가치를 맞추기위해 등장한 런 세이브라는 지표를 보면, 1999년의 정민태는 1986년의 선동열보다도 높은 런 세이브를 기록한다. 1999년의 정민태의 런 세이브는 약 62.5, 1986년의 선동열은 약 61.[24] 평균자책점 1위는 선발 등판을 한 번도 안 하고 규정이닝을 채운(...) 임창용이 기록한다.[25] 그래도 5할을 넘기긴 했다.[26] 이명수 400타석, 김경기 308타석.[27] 덩치가 그 찰스 스미스와 비슷했고, 수비나 주루 또한 그 찰스 스미스와 비슷했다(...)[28] 외국 진출을 위해서는 풀타임 7시즌을 소화해야 한다. 정민태는 입단 후 8시즌을 보냈으나 위에 설명했듯이 부상으로 인해 초반 두 시즌을 거의 나오지 못했기에 6시즌만 소화한 것으로 인정받았다. 현대 유니콘스는 이 규정을 피해가고자 구단 권리를 포기하고 정민태를 자유계약선수로 방출하는 강수를 두려고 했던 것 같지만, KBO에서 불허한다.[29] 4:2 상황에서 8회 임창용에게 넘겨줬으나 실점을 하여 연장전에 돌입. 11회에 박재홍의 결승타로 신승했다. 이후 일본과의 결승도 5:4 로 신승하여 대회 우승을 달성하였다. [30] 1차전은 구대성, 2차전 문동환, 3차전 정민철이 선발로 나섰으나 1,2,3,4 차전 모두 선발이 5이닝을 채우지 못하고 부진하였다. 구대성 [31] 사실 공동 다승왕이 가시권에 보이자, 김재박 감독과 김시진 투수코치가 로테이션을 조정했다.[32] 2001년 현대 유니콘스는 정민태의 이적료만으로 1년을 버틴다(...).[33] 일본프로야구와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했던 우에하라 코지의 신망을 얻은 포수였다.[34]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의 구위도 99년의 아시아선수권과는 많이 차이가 났다. 2000년 한국시리즈 1선발을 임선동에게 넘겨준 것을 보면 당시의 구위 저하를 알 수 있다. 비록 18승을 거두었지만...[35] 현대 경영난[36] 박철순이 1982년에 22연승을 기록한 적은 있지만 이것은 구원승(7승)을 포함하여 세운 연승기록이다. 이후 다나카 마사히로가 2013년 선발 22연승을 넘어서면서 기록을 갱신했다.[37] 스탯티즈 WAR 기준 이상목이 5.66, 정민태가 5.02[38] 사실 정민태는 5월 14일까지 7연승에 평균자책점 1.55(당시 2위), 47탈삼진(당시 1위)를 기록하며 불타올랐으나, 그 이후 약 두 달동안 무너진다. 7승 경기 이후 55일만에 승리를 추가하고, 그 동안의 6경기에서 모조리 부진했지만 패만 적립하지 않은 정도. 8승째 경기도 5.2이닝 4실점을 기록하고 타선 도움을 받아 승리. 당시 신문에서 대놓고 '억세게 운좋은 사나이'라고 깠을 정도. 5월 이후 무실점 경기는 3개월 뒤인 8월 15일에야 나온다. 그리고 그 뒤로 21연승 달성 경기(9월 1일, 이 날도 6.2이닝 3실점을 기록)까지 무실점 경기가 없다. 그래도 후반기에 QS 정도는 계속 찍어주면서 평균자책점을 조금 끌어내린 결과 10위권에서 놀던 자책점 순위를 3위까지 낮추긴 했다. 다만 정민태가 이런 성적을 거둔 데에는 이유가 있었는데, 이것은 기사에도 나오긴 하지만 후술.[39] 이상목은 클래식 스탯에서 정민태에게 밀린 것이 문제.(33경기 29선발 185이닝 15승 7패 평균자책점 3.54)[40] 외국인 투수 셰인 바워스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선발이 없었다. 다승왕 출신이자 선발 주축 중 하나였던 임선동은 이 해부터 은퇴 때까지 1승도 못 거두는 등 퇴물로 전락해버렸고, 당장 5선발이 원래 없었고(이동학, 전준호가 각각 11선발씩 뛴다), 4선발 마일영은 제대로 망했으며(20경기 14선발 69.1이닝 평균자책점 5.97), 3선발 김수경 또한 썩 좋지 않은 성적을 기록했다(29경기 167이닝 평균자책점 4.63). 심지어 그 바워스도 22선발 143.2이닝만 던졌다.[41] 허벅지 부상은 99년 이래 고질병이었는데 2003년을 하얗게 불태운 이후 급격한 내리막을 걷게 된다. [42] 사실 처음에는 연봉으로 10억, 보장액 8억 5000만을 요구했었다.[43] 이 날 선발이 이제 막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이재우였다.[44] 당시 경기시간이 4시간을 넘어가면 그대로 경기를 끝낸다는 조항이 있었고, 이 때문에 무승부가 속출했다.[45] 당시 심정수도 수술하고 재활에서 막 복귀할 때라, 이 홈런이 본인의 06시즌 마수걸이 홈런이었다.[46] 2007년 그가 받은 연봉은 3억 1080만원.[47] 정민태가 연봉에 불만을 가져 자의로 떠났다고 알려졌지만, 기아에서 받았던 연봉은 히어로즈가 제시했던 8천만원보다 1천만원 적은 7천만원이었다. 그리고 2009년 인터뷰에서 박노준 단장이 먼저 본인을 방출시켰다고 밝혔다.[48] 정민태를 범 현대가에 남기려 했단 추측도 있다.[49] 2008년 7월에 김조호 단장에게 본인 방출 요청을 하자, 임의탈퇴 공시되었다.[50] 여담이지만 영구결번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구단내에서는 '''준'''영구결번으로 취급되었다. 하지만 2013년 롯데 코치로 이적하면서 해제되었는데 2013년에는 장시환, 2014년에는 김성태가 차례로 달았다. 2015년부터는 최원태가 계속해서 달고 있다. 사실 공식적으로 히어로즈는 현대 유니콘스의 후계 구단이 아닌데다가 정민태 본인도 히어로즈에서 뛴 적이 없으니 영구결번까지는 어려웠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