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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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야구 선수, 사업가이자 범죄자. 2008년에 네 모녀를 살해한 후 자살했다.
전직 해태 - KIA 타이거즈의 야구 선수로 역대 두 번째 20-20 클럽 가입 선수[4] 로 해태 시절 팀의 중심타자로 활약하였고, 해태 타이거즈가 거둔 아홉 차례 우승 가운데 네 차례에 공헌하였으며, 1990년대의 타이거즈 핵심 선수 중 한 명이었다. 은퇴 후에도 성공가도를 달리는가 싶었지만... 결국 사업 실패에 이어서 '''일가족을 살해하고 암매장한 살인마'''로 전락해 야구인들과 팬,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자살로 인생을 마쳤다. 사후에도 그는 야구계의 금지어가 되어 야구 관련 종사자들과 야구팬들은 물론 대한민국 대중들 모두에게 언급이 기피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2. 선수 시절
광주서석초-광주충장중-광주일고를 나온 광주-해태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이다. 아마추어 시절부터 호타준족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광주일고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연세대에 진학해서는 더욱 기량이 발전하여 연세대의 4번 타자로 활약하였다. 4학년 때는 제15회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에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나름 국대 경력도 있는 선수.
연세대를 졸업하고 1990년 고향팀 해태 타이거즈의 1차 지명을 받아 해태에서 데뷔했으며,[5] 입단 첫해인 1990년과 이듬해인 1991년, 데뷔 첫해부터 2년 연속으로 KBO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수상을 하며 혜성같은 데뷔를 알렸다. 해태가 1990년대에 차지한 4번의 한국시리즈 우승에서 모두 주축으로 활약했고, 1980년대 김성한과 한대화의 뒤를 이어 홍현우, 이종범 등과 함께 1990년대 해태 중심 타선의 한 축을 담당했다.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91년 제1회 한일 슈퍼게임, 93년 한일 프로친선대회, 97년 한일 프로골든시리즈 등 당시 몇 없는 국제경기에도 꾸준히 대표로 선발되었다.
등번호는 27번으로, 바로 원년 홈런왕이었던 김봉연의 번호였다.[6] 대선배의 번호를 물려받았다는 점에서 팀이 그에게 걸었던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1991년 20-20 클럽에 가입하면서 '''이종범이나 박재홍이 등장하기 전 가장 유력한 KBO 최초의 30-30 클럽 후보로 그를 거론했었다.''' 다만 부상을 자주 당했기 때문인지, 신인 3할을 기록했던 1990년과 1991년, 25도루 1실패[7] 를 기록하면서 타격 성적도 준수했고(.278) 14홈런 25도루를 기록했던 1992년, 그리고 앞의 3년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100안타와 두 자릿수 홈런을 넘긴 1997년을 제외하고는 연도별 성적 자체는 특별히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1993~97 이종범과 양준혁이 양분하던 시기는 투고타저가 심한지라 25~30홈런 치면 홈런왕이고 팀방어율이 개나 소나 3점대 초반도 심심치 않게 찍었으니 저평가될 법하다. 또한 이 시기에는 골든글러브 지명타자 부문 수상자 박재용의 성적도 '''겨우 2할 5푼대에 불과했다.'''
1996년 한국시리즈에서는 현대와 2승 2패로 맞선 5차전에서 1:0으로 리드하는 상황에서 잠실 야구장의 좌중간을 훌쩍 넘기는 투런 홈런을 작렬시켰다. 결국 그 게임은 3:1로 해태의 승리, 시리즈의 향방을 좌우하는 중요한 한 방이라고 할 수 있었다. 특히 1996년 한국시리즈 당시에는 김성한이 은퇴하고 선동열은 일본으로 진출하던 상황이었기에 이 상황속에서도 후배들을 잘 다독여서 팀의 2년 연속 우승에 기여했다.[8] 하지만 후술한 살인사건 이후로 해태가 한국시리즈 또는 플레이오프에서 활약한 하이라이트를 보여줄 때는 이 부분이 죄다 편집되거나, 한 경기가 통째로 1시간 분량이 나올 때에도 타자에 대한 언급은 일절 안하고 잘해야 타격하는 부분[9] 만 나온다.
<앗! 시리즈> 중 87권인 <야구가 야단법석>에서 꽤나 많이(3~4번) 언급된 선수이기도 하다.(글러브를 떨어뜨리는 바람에 모자로 공을 받아서 상대팀 주자들을 3루 진루시켰다든가.) 해당 책이 출판된 해는 2001년 무렵으로 이호성이 은퇴하기 직전이었다.
힘이 무지막지하게 강한 것으로 유명해서 신인 시절에는 라커룸 벤치에 튀어나온 못을 엄지손가락으로만 눌러서 박았다고 한다.# 홈런을 쳐서 무등구장 바깥의 무등수영장 기둥까지 공을 날렸던 선수이다. 게다가, 싸움 실력까지 대단해서 광주 시내에서 조폭 4명과 붙어서 4:1로 순식간에 조폭들을 때려잡은 전설도 있다.
그 외에도 LG 외야수인 이병훈에게 대타 인사이드 파크 홈런을 허용한 외야수가 이호성이다. 이 후 1994년에 LG에서 해태로 온 이병훈이 이적생에 대한 차별대우에 반발하여 싸운 선수가 당시 입단동기인 이호성이었다. 덕분에 둘은 어느 정도 친해졌다고. 두 사람의 자세한 일화는 이병훈 문서를 참조.
현재 '''두산 베어스의 감독인 김태형, LG 트윈스의 감독인 류지현, KIA 타이거즈의 감독을 지낸 김기태''', SK 와이번스의 2군 감독을 지냈던 김경기 등과 함께 선수협 5적으로 꼽히는 사람이다.[10] 선수협을 거부하며[11] 프런트의 지시에 따라 선수협에 찬성하는 해태 선수들을 불러다가 주장이자 군기반장이었던 자신이 직접 빠따로 때렸기 때문. 강병규의 트위터에 따르면 자기가 주장인데 왜 애들을 멋대로 부르냐며 양준혁을 때린 적이 있다고 한다. 다만 강병규가 양준혁을 비난하기 위해서 이호성을 언급했다.
이후 2001년에 KBO와 선수협을 문화관광부가 중재하고서 3대 선수협 회장을 지낸 바 있다.# 원래 선수협 반대파였기 때문인지 구단에서 어용 회장으로 내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최저 연봉 인상이나 복지기금 조성 등을 이뤄내며 '''선수협 회장으로서 제대로 일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특히 2001년 하반기에는 KBO의 외국인선수 기용 확대 움직임에 맞서 '포스트시즌 보이콧'을 감행하겠다고 선언하여 한때 KBO와 구단 측을 긴장시키기도 했다.
결국 플레잉코치로 시즌을 보내다가 2001 시즌이 끝나자마자 방출되어 은퇴했는데 이는 이호성을 어용 회장으로 앉혀놨더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선수협을 이끌어나가자 구단이 당황하여 은퇴를 종용했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1990~2001 시즌까지 1,090경기에 출장. 통산 타율 0.272, 홈런 102, 도루 167, 득점 562, 타점 526, OPS 0.780을 기록. 데뷔 2년째이자 최고 성적을 기록한 91 시즌에는 타율 0.288, 홈런 21, 도루 25, 득점 98, 타점 84, OPS 0.887을 기록. 도루성공률이 75.2%로 매우 좋은 수준이었고 1992~93시즌에는 25연속 도루성공을 기록하였으며 97년 이종범이 갱신할 때까지 최고 기록이었다. 스탯티즈 기준으로 1990년대 야수들 중 WAR 13위를 기록, 동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했던 강석천, 김상호, 김경기 등을 능가하는 수준이다.[12] '''즉, 공수주 삼박자를 갖췄으며, 이종범이나 홍현우처럼 팀을 견인할 만한 특급 선수는 아니었지만 한 팀의 중심타자로서는 꾸준히 괜찮은 수준의 성적을 냈다'''고 볼 수 있다. 이종범이 야구천재라면 이호성은 야구수재라고 보면 될 듯. 김상훈이나 유동훈, 김종국 등도 은퇴식을 치러주는 마당에, 영구결번급 레전드에는 못 미치겠지만 충분히 은퇴식을 치러줄 만한 선수이기도 했지만 바로 윗 문단에도 나왔듯이, 선수협 회장 경력으로 구단과 마찰을 빚으며 은퇴식 없이 은퇴를 하게 됐다.
오른쪽의 링크는 이호성이 선수 시절 사용하던 글러브를 공개한 것이다. #
2.1. 연도별 성적
3. 은퇴, 그리고 몰락
어쨌든 이호성은 은퇴식도 제대로 못 치르고 은퇴했지만, 그 동안 벌어놓은 돈을 바탕으로 몇 년간 준비를 하여 호성 웨딩홀을 차렸는데, 처음 2년간은 잘나갔다. 직원은 70여 명에 연간 매출액이 7~80여억 원에 달했으며 광주광역시뿐만 아니라 순천시와 목포시에까지 분점을 낼 정도로 대박이 났다. 또한 해태 타이거즈 선수로 지내면서 야구계에 쌓아놓은 인맥도 탄탄했기에 장성호를 비롯한 여러 해태 - 기아 출신 선수들도 결혼식을 할 때 호성웨딩홀에서 올리는 게 반쯤 관례가 되고, 전 동료 선수들이 주변인물들에게 알아서 홍보를 해줬기에 고정손님층도 계속해서 있던 편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것에 만족하지 않고 사업을 확장하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이것이 그만 몰락의 시작이 되었다'''.
전라남도 순천시에서 실내 화상 경마장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100억 원 정도가 소요되는 마권사업에 자본금이 모자라자 가족들을 보증인으로 해 10억 원을 빌렸고, 그것도 모자라서 은행에 담보를 잡고 35억 원을 빌렸다. 하지만 주민들의 도박장 반대 여론에 밀려 경마장 사업은 백지화되었고, 이에 절망한 이호성은 본인이 직접 ‘전 프로야구 선수 이호성을 죽음의 문턱에 이르게 한 농림부!’라는 제목의 탄원서까지 청와대에 올려보았으나 소용없었다. '''결국 100억 원이라는 초대형 부도를 내고''' 사업을 망치고 말았다. #
도박장 사업은 말 그대로 '도박'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위험부담이 큰데, 철저한 사전 준비나 조사도 없이 남의 말만 믿고 사업 자금을 무리하게 몰아넣은 것이 화근이었다. 그냥 웨딩홀 사업 하나에만 매진했으면 그가 이렇게까지 처참하게 몰락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사건이 화제가 될 당시 일부에서는 그가 소위 '바지사장'에 불과했고, 휘둘린 결과가 도박장 사업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다. 또, 웨딩홀 사업도 해가 갈수록 잘 안 되어서 도박을 한 결과라는 말도 있었다.
그는 후에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운동선수만 하다 사회 물정을 너무 몰라 벌어진 일이다. 사회 경험이 없어 아무나 쉽게 믿었던 것이 큰 화근이었다."라고 말했다. 사실 운동선수나 군인, 연예인 같은 직종들은 각자 일들에는 프로라 해도 워낙 폐쇄적인 사회에 오랜 시간을 보낸 데다가 남 부리고 살다 보니 자기 분야만 벗어나면 영락없는 문외한이다. 또 운동선수의 경우처럼 중고등학생 때부터 그것만을 목표로 두는 경우에는 사회 경험이 상대적으로 적어, 어른이 되어 그 일에서 은퇴하고 나면 세상 물정에 어두워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있다. 특히 선수 생활에는 문제가 없었는데 은퇴 후에 메스컴에 휘말리는 것이 기본이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13]
3.1. 반론 : 몰락했어도 인생이 망가질 수준은 아니였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세상 물정 잘 모르고 사업에 뛰어들었다 몰락한 운동 선수'의 대표 주자 격으로 언급되고 이호성 본인 또한 사업에 실패하고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처지를 자조하듯 그렇게 표현하기도 했지만, 사실 이호성은 맨주먹에서 사업을 시작하는 일반적인 자수성가 자영업자와는 차원이 다른 인물이었다. 형제들 가운데엔 의사와 변호사가 있는 엘리트 집안 출신이었고, 스타 선수 출신에 광주일고 - 연세대라는 최강급 학연을 등에 업은 선수였으며, 적어도 그때까지는 자신의 호탕한 보스 기질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십분 발휘해서 지역사회와 야구계 내외로 인맥도 잘 구축해놨다.
게다가 이미 20대 현역 시절부터 사업에 관심이 많아 자신의 친형과 당시로선 신사업이었던 컴퓨터 솔루션 업체와 사무용 복사기를 공급하는 회사를 설립해 투잡을 뛰는 등 사업가로 변신한 운동선수들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되레 '준비된 사업가'에 가까웠다. 아니 이미 나름대로 성공한 사장님이었다. 이 사업체는 꽤나 건실했는지 이호성이 모든 걸 다 잃고 최악의 연쇄살인마로 전락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도 10년가량 본인 소유로 계속 운영됐다고 한다.
이렇듯 비록 백억대 부도를 내고 몰락하긴 했지만, 이렇게 이호성 수중에 돈이 들어올 구석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또한 새로운 사업을 진행할 여력도 남아있었다. 또한 부도가 난 상태에서 채권자들이 보통 빚을 받기 위해 이호성의 남은 재산을 경매에 붙이거나 했을 텐데 그런 일이 없었던 걸로 보아 추가사업체를 가지고 있던 이호성이 시간만 지나면 빚을 갚을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해 채무기한을 연장해줬을 가능성이 높다.[14] 그래서 훗날 이호성이 4모녀 살인사건을 저지르고 자살했을 때도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이 남았다. 처음 사건이 세상에 공개됐을 땐 빚이 많은 이호성이 내연녀의 돈을 노리고 살해한 게 아니냐는 시각이 우세했지만, 이호성의 또 다른 내연녀인 차아무개라는 사람은 이호성이 '''당장 돈 몇푼에 쪼들리는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고 진술했다.
이런 걸 따져 볼 때, 아마 과도한 욕심을 부리지 않고 적당한 수준에서 만족했다면 은퇴 후 사회인으로서 실패한 선수들이 즐비한 현실을 극복한 모범 사례이자 성공한 운동 선수 출신 사업가로서 후배 선수들의 귀감이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15]
그리고 이호성이 한창 잘 나가는 선수 생활 때부터 사업에 관심을 보일 수밖에 없던 이유는 당시 프로 선수들의 활동 여건에서 나타났던 한계 때문이던 걸로 보인다. 그 시절엔 프로 선수 생활이 몸 관리만 잘하면 30대 후반 ~ 40대 초반까지 이어갈 정도에 아직 이르지 못했고, 연봉 수준도 지금보다 많이 낮아서 선수시절에 벌어들인 것만으로 은퇴 이후까지 보장받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그는 프로아구팀들 중에서도 열악한 자금 사정으로 악명 높았던 해태 소속이었고, 특히 IMF 외환위기로 모기업이 파산해서 주축 선수들이 차례로 트레이드되는 것도 보았다. 때문에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해서 현실적인 고민이 컸고, 지금 선수들보다 더 빨리 사회 진출을 준비할 필요성을 인식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이호성보다 훨씬 더 뛰어났던 당대의 스타이자 팀선배인 김성한도 현역 한창 때부터 이런저런 부동산 투자나 여러 사업체를 굴리며 은퇴 이후의 삶을 대비해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쓴 걸로 유명했다. 이호성도 이를 참고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만약 성공했다면 양준혁처럼 사업가를 통해 인지도를 끌어내 이런 저런 방송이나 유튜브 채널의 게스트나 출연진으로 연예계에도 모습을 드러냈을 지도 모른다.
4. 이호성 살인 사건과 비참한 최후
동거녀의 일가족을 살해한 그는 경찰에 쫓기다가 결국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며, 이때가 향년 40세. 사망 시점은 2008년 3월 10일 새벽 시간대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업적이 있는 프로 선수라면 장례식에 수많은 조문객들과 조화가 가득 차는 것이 보통이나, 범죄자가 되어 불명예스럽게 생을 마감했기에 이호성의 장례식장에는 과거의 같은 팀 동료들이나 선후배들은 고사하고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제아무리 경쟁하고 정치적으로 싸우고 지냈더라도 장례식장에서만큼은 그저 문상객이 위로와 덕담을 보내는 것[16] 이 일반적 상도덕이다. 심지어 선친 산소가 있는 교회 공동묘지를 장지로 하려다가 땅 주인인 교회가 거부했는데, 유족들이 살인자 옆에 내 가족을 모시는 것에 반발해서 유골을 이장하는 상황이 생기는 것을 막아야 했기 때문이라고...
5. 기타
- 호성드립에 대해서는 문서 참조.
- 씨름 천하장사 이만기를 팔씨름에서 1초컷 한 적도 있고, 500원 주화를 두 손가락으로 접거나 엄지로 못을 눌러박는 정도의 완력이었다. 유도 실력 또한 엄청나서 소년 시절 유도를 시작하자마자 전국대회 우승자를 압도적으로 이겼다.
- 어린이 & 가족 살해에 이은 자살이라는 점에서 한 해 앞서 일어난 미국 프로레슬러 크리스 벤와 사건과 비교된다. 그러나 크리스 벤와는 직업인 레슬링으로 인한 두뇌 손상과 그로 인한 약물 중독 및 환각 상태에서의 무의식적인 공격 본능이 그의 우발적 살인의 발단이 된 반면, 이호성은 정상적인 두뇌를 가지고서 미리 범행을 계획하고 어설프게나마 증거를 은폐하려 한 점 등으로 볼 때 개인의 이기심과 어리석음이 발단이 되었다는 점에서 차이를 지닌다. 또한 WWE에서의 기록이 말소된 전적이 있는 크리스 벤와와는 달리[17] , KBO 측은 이호성 사후에도 그의 공식 기록을 삭제하지 않고 있다.[18]
- 마구마구에서는 이호성이라는 이름 대신에 '장산격'이란 카드로 개명되었으며, 프로야구 매니저에서는 '신영수', 슬러거에서는 '이화민', 프로야구 H2에서는 사임수[19] , 컴투스 프로야구 for 매니저에서는 이합민, 이사만루에서는 이한수로 개명되어 있다. 특히 위의 사건으로 인하여 마구마구 측은 몇 차례 진행된 재평가에서 '장산격' 카드의 능력치를 단 한 번도 재평가하지 않았다.[20] 1991 시즌 0.288 125안타 21홈런 25도루라는 몇 차례 재평가가 이루어진 시점에서 레어카드를 받을 수 있는 기록이지만 노렙업 기준 평균 스탯이 72로 노말급 능력치이다. 다만, 다른 야구게임에서는 가명 처리는 하되 능력치는 제대로 줬으며, 살인 미수로 14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모범수로 7년여 만에 출소한 마무리 투수 우게쓰 어비나(우게쓰.U)는 재평가로 레어가 나왔던지라 논란이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21][22] 최근에는 레전드 카드까지 나온 아동성폭행 혐의의 존 위틀랜드도 존재한다. 그러나, 최근 들어 KBO 선수들을 또 다시 재평가하는 과정에서 2000, 1999, 1998의 장산격 선수카드에 능력치 상승 및 듀얼 포지션 추가를 하여 유저 간담회에서 했었던 약속을 암암리에 깨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는 중이다.
- 이사만루2015 KBO에는 '이후선'으로 개명되어 있다.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1990년, 1991년 시즌의 슈퍼스타 등급 카드와 현역 마지막 시즌인 2000년의 일반 카드[23] 가 존재한다. 그런데 웃기는 점은, 모든[24] 이후선 슈퍼스타 카드에는 당시 이호성의 사진이 있어서 해당 카드를 획득한 유저들을 지리게 했다는 카더라가 있다는 거다. 더더군다나 정면사진에 흑백사진이 있으니 더욱 지렸다. 1991 이후엔 타격스탯이 준수한 15성으로 실장됐다.
- 마구마구 2014에서는 본명으로 나왔고 레어카드도 존재한다. 다만, 저 레어카드는 골든글러브 수상자여서 존재 하는 것으로[25] , 당연히 스페셜카드와 공존한다.
- 마구마구 2017로 업데이트 후 같은 해 8월 4일 성민철로 개명됐다.
- 슬러거 모바일에서도 이름은 물론 사진까지 등장했다. 물론, 보기 불편하다는 유저들의 항의에 얼마 못 가 사진도 짤리고 이름도 가명 처리되었다.
- 오락실 게임인 원더리그스타에 ‘이후성’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스타팅멤버가 아닌 대타로 출장 가능하며, 게임상 성적이 0.221 27홈런으로 되어있다.
- 야구계나 대한민국의 웬만한 야구 사이트에서는 거의 언급 금지의 인물이다. 예컨대 엠엘비파크 한국야구게시판에서는 이 사람의 이름이 금지어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컴투스프로야구2020에는 아예 카드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야갤에선 그러한 금기는 당연히 없으나, 떡밥이 식은 지금은 언급이 전혀 되지 않는다.
- (현재는 플레이 불가인)I Wanna Kill The Happil에서는 세 번이나 써먹었다. (성님, 호성그린, 호성타브)
- 이사만루2017에도 이한수라는 가명으로 추가되었다.
- 게임에서 유이하게 실명으로 플레이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하나는 자레코에서 출시한 SFC판 <한국프로야구>를 플레이하는 것으로 실명으로 등록되어 있다.[26] 그리고 다른 하나는 PC로 출시한 <98 프로야구 한국 시리즈>를 플레이하는 것이다. [27]
- 현역 시절 본인이 꼽은 대표적인 별명은 무등산 타잔(?).[28] 준수한 성적에 비해 그냥 운동만 묵묵히 하는 평범한 체육인이었던 데다 외모가 특이한 것도 아니었고, 플레이 스타일도 딱히 못하는 것 없이 다 적당히 어느 정도 하는 스타일이라 특별한 캐릭터성이나 별명이 있는 선수는 아니었다. 그나마 튀어나온 못을 손가락으로 박았다는 사건에서 온 차력사 같은 별명이 있었고, 해태-기아의 전환기에 4번을 쳤다는 점으로 인해 선수생활 말년에는 해태의 마지막 4번타자라는 별명도 있었다. 물론 지금 인터넷상에서 가장 많이 불리는 별명은 성님. 유래는 딱히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 디시인사이드 발 카더라 통신으로 의하면 현역 시절 의외로 팬 서비스가 좋았다고 한다. 단, 해태팬 한정으로...
- 살인 사건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네이버에 이호성을 검색하면 이 사람이 메인에 나왔지만, 언제부터인가 인물 정보에서 사라졌다. 다음과 네이트, 줌의 경우 사진만 지워진 상태로 기본적인 프로필은 나온다.
- 동명이인 중에 살인범이 있다. 1993년 서울특별시 성북구에서 부모와 형, 형수, 조카를 살해한 이호성이 그 동명이인이다. 4명을 살해하고 지옥으로 도피한 이 이호성과는 달리 이쪽은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1995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6. 관련 문서
[1] 마포경찰서에서 발부된 수배지 상의 주소로 보면, 은퇴 후 광주와 서울을 드나들며 생활한 것으로 보인다.[2] 프로필상으론 180cm이지만 마포경찰서에서 나온 수배지에는 182cm으로 기록되어 있었다.[3] 아버지의 산소가 교회에서 운영하는 공동묘지였다.[4] 첫 번째는 김성한. 같은 해 장종훈도 가입했지만 이호성이 조금 더 빨랐다.[5] 광주상고를 졸업하고 바로 입단한 홍현우와 프로데뷔 동기생이다.[6] 훗날 김상현도 27번을 달고 홈런왕이 된다. 현재 27번의 주인은 문선재.[7] 이 기록은 97년도 29연속 무실패를 기록한 이종범이 깼다.[8] 즉, 후배선수들을 상대로 패기도 잘 팼지만, 챙겨주는 것도 잘했다는 얘기다.[9] 1994년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4번타자로 나와 정민철을 상대로 2안타 2타점에 고의사구까지 얻었는데도 9번타자 이경복까지 9번타자라며 자막이 나온다. 이 외에도 이호성이 나온다 싶으면 잘 안 보이도록 흐리게 처리 해버린다.[10] 이 외에도 두산 베어스의 2군 재활코치인 조경택도 포함되기도 한다.[11] 선수협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선수협 자체에 반대했다기보다는 1기 선수협을 주도하던 인물들의 강경적인 행보에 대한 반발이었다.[12] 마지막 전성기였던 97년까지로 압축한다면 TOP 10에 들어간다. 그 사이 이승엽, 박정태 등이 그를 추월.[13] 일본야구기구에서는 이러한 피해를 막기 위해 은퇴 선수를 위한 직업교육, 구직 활동 지원을 하고 있으나, 한국 스포츠계는 이런 제도가 지금도 상대적으로 미비하다.[14] 채권자 입장에서는 당장 받을 돈이 없어보이면 다른 채권자들보다 빨리 채무자를 뜯어먹어야 하지만, 이 사례처럼 유명인이라 야반도주도 쉽지 않고 추가 고정수입이 있다면, 빚을 유지하면서 이자를 받는 편이 당연히 더 좋다. 그러다가 채무자가 사정이 나아져서 갚으면 좋고, 정 못 갚겠다 싶으면 그때 가서 뜯어먹으면 그만. 채권자들과 오랜 관계 끝에 지금은 그냥 형동생하며 지내는 이상민의 경우를 떠올려보면 쉽다.[15] 멀리 갈 것도 없이 이호성과 프로 입단 동기였고 통산 성적은 나빴지만 사업가로는 성공한 사람이 이미 있다.[16] 이런 사례는 의외로 대단히 많다. 전두환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 빈소에 찾아가고, 이건희 삼성 회장 빈소에 삼성 저격수로 유명한 박용진 의원이 찾아간 것이 그 예이며, 특히 두 경우 모두 유족이 고맙다고 인사까지 했을 정도로 훈훈한 분위기였다. 사실 이게 정상이다. 특히 김대중 빈소 사례는 더욱 놀라운 것이, 김대중 일가는 전두환의 탄압으로 장남 김홍일이 영구 장애를 앓는 등, '정치적 대립' 이상의 피해를 봤다. 결코 용서하기 힘들었음에도 전두환을 환영했다.[17] 기록이 말소가 되었다가 이후 빈스 맥맨이 "그를 다루는 일은 지금도 앞으로도 없을 테지만, 그가 역사상에 존재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라며 현재는 기록이 다시 되살아난 상태다. 물론 기록적으로만 존재하는거지 그가 죽은 이후 현재까지도 WWE에서 그를 언급하는 일은 한번도 없었다.[18] 단, 영구제명과 기록말살형은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일단 KBO는 제명당한 선수들의 기록까지 말살하지는 않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KBO만이 아닌 MLB를 비롯 야구 전체의 방침이다. 기록의 스포츠인 야구에서 제명당했다고 기록을 말살해버리면, 상대 선수는 귀신을 상대로 삼진을 잡거나 당하고 홈런을 맞거나 쳤다는 것이 되기 때문에 후일 범죄자가 되거나 약물복용이 밝혀지거나 해도 기록 자체는 지우지 않는다.[19] 호성드립에서 '사'라는 글자를 '死'에 투영시켜 써먹다보니 유저들 사이에선 이를 '死임수'라고 부르기도 한다.[20] 유저간담회에서도 이호성 카드의 재평가는 없을 거라며 못을 박았다.[21] 2005년 노동자 다섯 명을 마체테로 공격하고 휘발유를 부으려고 했다. 14년 7개월형 선고받고 현재는 임시 석방 상태.[22] 사실 우게쓰 어비나의 경우 해외야구에 관심이 있지 않는 한 국내에서는 인지도가 매우 낮다. 그러나 이호성은 일가족 살인 사건으로 사회에 큰 파장을 줌으로써 야빠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상당히 유명해졌다. 또한 이 사건에서 파생된 호성드립 등이 합필갤 등지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며 이미 상당한 인지도를 확보한 상태이므로 어비나와 단순하게 비교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23] 레전드 등급까지 승급 가능[24] 1990 이호성 슈스에도 사진이 있다. 다만 정면 사진은 아니라 파급력은 좀 덜한 듯.[25] 1996, 1997년에 2할 4푼치고 지명타자 골든글러브를 받은 박재용도 노말과 스페셜 사이의 능력치를 가진 레어가 존재한다.[26] 물론 출시 당시엔 현역이었으니 가능했던 일이다.[27] 어마어마한 쿠소게로, 당시 야구장에서 주얼CD를 뿌려댔다는 소문이 있다. 인터넷에 검색하면 구할 수 있다.[28] 아이러니하게도 해당 별명을 가진 또다른 인물도 이호성처럼 네 사람을 죽인 살인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