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저항
1. 개요
初抵抗: '''초'''기'''저항''' 제어방식 전동차[4]
대한민국 최초의 지하철인 종로선[5] 과 직통하는 경원선, 경인선, 경부선을 운행하기 위해 철도청과 서울특별시지하철공사에서 도입한 전동차이다. 국내 최초의 통근형 전동차, 국내 최초로 생산한 전동차 등 오만 가지의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은 전동차이다. 한국 도시철도 역사의 산실이라고 볼 수 있다.
정확한 명칭은 한국철도공사 1000호대 전동차 또는 서울교통공사 1000호대 저항제어 전동차 이지만, 대다수의 철도 동호인들은 '''초저항''' 세 글자만 알고 있다. 두 차량은 도색과 이름, 운영 회사만 다를 뿐 성능은 동일한 차량이다.
서울 지하철 2호선 개통 초창기에는 열차가 부족해서 일부 1호선의 초저항 열차가 2호선으로 다니기도 했다.
2. 사양
3. 상세
초저항 구동음과 육성 안내 방송(1984년 6월)[9][10]
당시 국내에선 전동차 자체를 만들 능력이 없었고, 기차도 증기 기관차와 객차, 화차를 겨우 만들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일본을 통해서 수입하였다. 하지만 한 번에 많은 편성을 도입하게 될 경우 자금 조달이 어렵다는 문제가 있어 여러 번에 걸쳐 도입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다양한 차량 제조사들이 등장하게 된다.
1974년 수도권 전철 1호선 개통 당시, 일본에서 6량 21개 편성을 수입했으며, 이렇게 수입해 온 전동차를 수리, 분해, 결합 등을 하면서 쌓은 노하우로 1976년 대우중공업에서 대한민국 제조 1호기 1x15편성 전동차를 제작할 수 있었고, 이런 경험들이 축적되면서 다양한 열차들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11] 이후 계속 증차되어 1979년까지 총 6량 42개 편성이 도입되었다.
시운전은 1974년 4월 9일 오전 10시에 중앙선 청량리역 ~ 양평역 구간에서 이루어졌다. 1973년 6월 20일에 산업선 전철 구간이 첫 개통되었는데, 그 구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시운전 당시 기사 1
시운전 당시 기사 2
청량리 ~ 제천 간 개통 기사
처음에는 6량으로 운행했다가 1981년 8량을 거쳐 1986년 최종적으로 10량으로 증결되었다. 경원선 용산 ~ 성북 구간을 운행하기 위해 4량으로도 있었다.
당시 일본의 통근, 근교형 전동차의 사양을 적당히 섞어서 한국 사정에 맞게 부분 변형해 투입되었다. 101계를 필두로 도입된 전형적인 일본식 통근형 전동차의 4도어 형식 8개 출입문과 3-4-8-2-3 형태의 좌석 배치, 슬라이딩 방식의 미닫이 객실 간 출입문이 적용되어 있고, 강철 재질 차체와 직병렬조합 약계자 저항제어, SELD 제동 또한 전형적인 일본 국철 차량의 영향을 받아 설계되었으나 고속주행에 조금 더 적합한 설계가 이루어져 있다.[12]
일본의 철도 동호인들이 좋아하는 한국의 열차 중 하나이기도 했다. 도쿄 지하철 5000계나 도큐 8500계와 매우 흡사한 식빵형 전두부를 지녔으며[13] 그 외에도 일본 국철 101계, 103계, 301계 등과도 비슷한 상자형 전두부 모양과 내부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동안 국내에서 운용되는 유일한 중문 열차였다.[14][15] 원래 서울 지하철의 계획은 여러 편성의 전동차를 병결하여 운행하려고 했다. 이는 러시아워 시간대에는 전동차 2~5편성 정도를 붙여 많은 승객을 나르고, 평시에는 6량 1개 편성으로만 운행해서 배차 운영을 유연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에게는 지하철이라는 물건이 너무 신기하였고, 지하철의 장점이 너무 부각되면서 예상했던 것에 비해 상당량의 승객이 넘칠 정도로 늘어나서 1989년부터 10량으로 증결했고 사실상 흑역사 중 하나로 치부되기도 하였다.[16] 원래 자주 열어 줄 계획이 있던 문이었던지라, 나중에 밀폐가 잘 안 되어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문제점이 있었다.
냉/난방 시설은 상당히 떨어진 편이었다. 1986년 최종 도입분까지 에어컨 없이 모두 '''선풍기'''였고, 이는 당시의 극심한 혼잡률과 함께 여름철 지하철 통근을 '''지옥'''으로 몰아넣는 원인이 되었다. 당시 신문에 심심하면 냉방화 요구가 기사나 독자 기고란에 올라올 정도였다. 결국 1987년부터 차내 냉방 장치를 에어컨으로 개조하는 사업이 진행되어 대부분의 열차들이 에어컨으로 개조되었다. 개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초기 개조 차량은 냉방 성능이 매우 열악했으며, 일부 차량에서는 에어컨에서 나오는 냉각수가 열차 내부에 떨어지는 등의 문제도 발생하였다. 게다가 저항 차량 특성 상 가감속시 엄청난 열이 발생하기 때문에 지하 구간의 '''찜통 더위'''는 여전히 개선되지 않았다. 따라서 초기 개조 차량은 선풍기를 완전히 제거하고 에어컨만 있었으나, 개조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선되지 못하자 후기 개조 차량에는 에어컨과 보조 냉방으로 선풍기를 추가로 달았다.
4. 현황
현재도 서울교통공사 1000호대 VVVF 전동차에 드문드문 짬뽕편성으로 들어가 있다. 객차 중 이질적인 무광 질감에 낙창식 차창을 달고 있다면 100% 초저항 차량이다. 현재 해당 차량은 모두 불연재 개조가 되어있다. 110편성에 편입된 1610호는 접이식 의자 시범 사업으로 개조된 적도 있다. 또한 일부 편성을 개조 후 개조저항이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달리고 있다.
반면 한국철도공사 소속의 초저항 부수 객차는 2014년 8월 30일을 끝으로 운행을 종료하면서 사실상 은퇴했다. 편성 단위로 도입된 초저항이 모두 은퇴한 지 딱 10년 후에 부수 객차조차도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5. 보존작전
현재 서울교통공사는 6량 1개 편성을 기증의 목적으로 2호선 신정차량기지에 보존하는 중이며,전용 유치 공간이 따로 있을 정도로 이 차량에 대해 각별하다.(신정차량사업소 Y7유치선에 유치중) 보관 및 관리 상태가 퇴역 당시의 상태와 거의 같은 수준으로, 지금도 마스콘을 꽂으면 운행 가능하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편 한국철도공사는 국산화에 성공한 전동차 2량(1115호, 1315호)과 일본제 최초 도입분 1량(1001호)을 철도박물관에서 보존하고 있다. 다만 서울교통공사와는 달리 차량의 보관 및 관리 상태는 그다지 좋지 않은 편이다. 언젠가부터 초창기 도색을 유지하던 1001호는 얼마나 관리를 안했는지 내부 누수와 곰팡이로 개방을 중단하고, 이미 철도청 구 도색과 역삼각 로고가 도색된 1115, 1315호에는 KORAIL 같은 당시 도색에 어울리는 글자체도 아닌 완전한 코레일 로고에 비슷한 색을 대강 도색시켜 놓았다. 또한 1115, 1315호는 직물시트를 걷어내고 가죽시트를 장착하는가 하면 손잡이를 철거하여 교육 시설로 쓰면서 보존을 넘어 마개조를 하는 수준이 되고 말았다. 2101호와 다를 게 없다.
현재 보존 중인 일본제 최초 도입분 1001호는 보존되기까지 꽤나 우여곡절이 있었다. 1998년 12월 21일 운행 종료 이후, 철도박물관 전시를 위해 1301호와 함께 구로차량사업소에 유치 중이었으나, 여러 이유로 인해 3년 간 전시가 미뤄지며 계속 방치되어 있었다. 마침내 2002년에야 보존 계획이 가시화 되었는데, 그동안 방치 되었던 지라 차체에 녹이 슬고 칠이 죄다 벗겨지는 등 차량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한국철도공사에서는 1001호를 보존 대신 폐차하기로 결정하고, 당시 내구 연한 만료로 운행이 중지된 최초의 국산 전동차 1X15편성의 1115호와 1315호를 '''1001호와 1301호로 둔갑시켜''' 2002년 말부터 철도청 말기의 역삼각형 도색으로 철도박물관에 전시하였다.
이를 알고 분개한 철도 동호인들이 철도청에 엄청난 민원을 투하했고, 결국 철도청이 이 요청을 수락하여 대전조차장에서 '''분해 직전이었던''' 1001호를 극적으로 다시 가져와 철도청 초창기 시절 구도색으로 재도색해 2003년 6월에야 겨우 보존되는데 성공했다.1001호 도입 과정과 후기 아카이브 1001호로 둔갑되었던 1115호는 다시 원래 1115호 이름을 되찾았다. 원래 1001호였다는 증거는 프로게이머 이기석이 출연한 한국통신(현 KT)의 코넷 광고 스티커. 쌈장 이기석이 출연한 광고가 1999년에 런칭되었으며 광고를 3년 이상 묵힐 이유는 없으니 이로써 진품 1001호 확정.
6. 관련 문서
[1] 왼쪽은 서울특별시지하철공사 (현 서울교통공사) 소속 차량, 오른쪽은 철도청 (현 한국철도공사) 소속 차량이다. 철도청 차량의 경우 기존 열차번호의 개편에 따라 1033호는 1111호로 변경되었다.[2] 빨간색 차량은 주로 청량리 - 수원간 노선에 투입되었으며, (일부 구로행, 주안행 차량도 있었다.) 파랑색 차량은 인천 - 의정부간 노선에 많이 투입되었다. 또한 파랑색 차량은 구로기지에, 빨간색 차량은 군자기지에서 입출고를 하였다. 다만, 구로기지에서도 드물게 빨간색 차량을 볼수 있긴 했다. (간혹 빨간색 구로행 차량이 구로기지에 들어가는 일이 있기 때문.) [3] 천장에 선풍기만 달려 있다. 1980년 당시에는 에어컨이 상당한 고가인 데다 성능이 좋지 않아 도입되지 않았다. 에어컨이 도입된 시기는 1987년 이후로 지금은 전 열차에 도입 및 설치가 완료되었다. 2020년대에 들어선 현재 선풍기를 달고 현역으로 운행하는 열차는 CDC가 전 열차에서 유일하다. 그렇다고 CDC에 선풍기만 있는 것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보조 냉방을 위해 달려 있는 것이며, 주 냉방장치는 당연히 에어컨이다.[4] 超(Ultra)저항이 아니라 初(First)저항으로, 말 그대로 최초로 도입 되었다는 뜻이다.[5] 서울 지하철 1호선, 즉 수도권 전철 1호선의 지하 구간이자 서울교통공사 관리 구간.[6] 정확히는 개조 후 개조저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다니고 있다.[7] 경부선, 경인선, 경원선, 서울 지하철 1호선 구간[8] 1990년대 초반까지[9] 한 일본인이 한국 방문 당시 직접 녹음한 것이다. 당시 새마을호 등도 녹음했으나 안타깝게도 녹음본들을 찾지 못했다. 해당 구간은 군포역 → 명학역 구간으로 금정역은 이 당시에 없었다. 금정역은 안산선이 개통한 1988년에 개통하였다.[10] 당시에도 자동 안내 방송은 있었다. 허나 저 운행 계통의 안내 방송이 준비되어 있지 않아서 육성으로 한 것이다.[11] 훗날 현대정공이 대우중공업, 한진중공업의 철도차량 제조사업부를 인수 합병하고 현대로템으로 분리되면서 축척된 노하우로 모든 철도 차량을 제작하고 있다.[12] 의외로 그 당시 차량들 중에서는 고스펙이다. 당시 일본 국철의 통근형, 근교형 전동차의 최고 속도는 100km/h였다. 사철 차량들도 대부분이 최고 속도가 100-110km/h정도였다.[13] 특히 5000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80% 비슷하다.[14] 현재 초저항 Tc 차량 전량과 객차 대다수가 폐차되었다.[15] 대신 서울교통공사 광폭형 GEC 초퍼제어 전동차, 신분당선 D000호대 전동차, 인천교통공사 2000호대 전동차, 대구도시철도공사 3000호대 전동차가 비상 탈출용으로 중문을 채택했다.[16] 지하철 개통 후 1980년대 말까지 서울의 지하철은 러시아워 기준 '''250%~300%의 혼잡률'''을 매우 흔하게 기록하던 때이다. 참고로 현재 서울 지하철에서 가장 혼잡한 2호선 사당 ~ 방배 구간의 러시아워 때의 혼잡률이 224% 정도이므로 250%~300% 정도이면 엄청난 수치임을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