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아일랜드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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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과 아일랜드의 외교관계를 다루는 문서. '''클로버와 장미'''.
영국과 아일랜드는 오랫동안 한 나라였지만 그 동안 아일랜드는 잉글랜드 혹은 영국의 식민지급 대우를 받아 수탈당하고 압제당한 것이 상당했으므로 서로간의 반목이 깊다. 서로에게 애증의 감정이 있는 편이기도 하다. 1973년에는 영국과 공동으로 유럽 연합에 가입하기도 했지만 이후로 북아일랜드 분쟁 등으로 감정의 골이 깊다.
800년 동안 잉글랜드와 영국에 지배받다보니 영국에 대해 감정이 좋지 못하다.
아일랜드 섬은 잉글랜드로부터 지속적인 침략과 수탈, 식민지배를 당했다.#, # 특히 영국에선 아일랜드인을 아프리카의 흑인과 같은 수준의 야만인이라는 뜻으로 "하얀 흑인(또는 하얀 침팬지)"(...)으로 멸시했을 정도였다.[1] 그러면서도 끈질기게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가며 영국의 지배에 맞서 싸웠다. 우여곡절 끝에 국제정세에 따라 독립을 얻긴 했지만, 나라가 남북으로 쪼개졌다. 바로 북아일랜드. 아일랜드인의 반영감정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다면 아일랜드 대기근을 알아보는 걸 추천한다.
아일랜드에는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을 들이대기에도 적절하지 않은데, 1920년대 무렵까지도 아일랜드 산업은 거의 근대화되어 있지 않았다. 산업혁명 과정에서 아일랜드는 빈곤한 농업 지역으로 남았는데, 인구부족과 노동력 부족, 지리적 고립성으로 공업화가 추진되지 않았던 것. 또한 올리버 크롬웰의 아일랜드 정벌 이후 농지는 거의 다 잉글랜드계 신교도 지주, 잉글랜드인 부재 지주들의 소유였고 대다수 아일랜드인은 빈곤한 소작농 신분으로 남아 있었다.
아일랜드는 중세시대부터 수백년간 계속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고 잉글랜드의 한 지방으로 취급받았는데도, 영국이 선도한 산업혁명과 근대화의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나마 공업화가 조금 진척되었던 벨파스트와 북아일랜드 지역은 계속 영국령으로 남았고 독립 직후 아일랜드는 경제적으로 매우 후진적인 농업 국가였다.
따라서 장기간에 걸친 영국의 통치정책은 아일랜드의 빈곤과 빈부격차, 사회갈등을 더욱 심화시켰지 전혀 해결하지 못하고, 수백년 세월 동안에도 아일랜드를 영국의 일부로 동화시키지 못해 결국은 아일랜드인들이 영국에 대한 적개심을 키워 격렬한 무장독립운동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크게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아일랜드어로 로칼(Rocal) 혹은 로카바리(Rocabarraigh), 영어로는 로콜(Rockall)이라 불리는 대서양의 작은 바위섬을 영국이 자기네 EEZ로 집어넣으려 하여 갈등을 겪고 있기도 하다.# 국제법을 기준으로 단순히 자로 잰 수치만 따지면 분쟁의 소지가 있다고는 하지만 문화적, 역사적으로는 명백한 아일랜드의 영토이기 때문에, 반영감정을 키우는 한 요인이 되고 있다. 심지어 1970년대에는 울프 톤스(The Wolfe Tones)라는 정치색 강한 아이리시 포크 그룹이 'Rock on Rockall' [2] 이라는 노래를 내놓기도 했다. 그 외에도 영국이 통치하는 북아일랜드 역시 오늘날의 독립국 아일랜드가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지만 30여 년의 분쟁을 겪고 난 후에는 서로 폭탄 건드리기 싫어 현상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도 아일랜드에는 영국의 식민지배가 남긴 후유증이 크다. 그런 일을 겪고도 피식민국과 아일랜드가 경제적으로 탄탄하게 성장했다는 걸 가해자였던 제국주의 열강들과 영국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지만, 아직도 영국은 아일랜드에 사과하는 일에 대해선 소극적이며 다소 미적지근하기에, 이는 아일랜드인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그리고 일부 영국인들은 아일랜드의 독립운동가들을 테러리스트나 살인마로 취급하며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등의 입장을 보인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아일랜드는 중립국이었는데, 이것은 물론 당시 약소국인 아일랜드의 사정상 전쟁에 참여할 이유도 없었고 그럴 여력도 되지 못했다는 점이 매우 컸지만, 반영감정이라는 이유도 꽤 컸다. 당시 영연방 소속 국가 중 영국에 협력하지 않고 중립을 선언한 것은 아일랜드가 유일했다. 아일랜드가 영연방 탈퇴를 선언한 것은 1937년이고, 영국이 이를 정식으로 승인한 것은 1949년이다. 즉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은 아일랜드를 영연방 소속 국가로 간주했으나, 아일랜드는 이를 부정했다.
예를 들어 아일랜드의 베레하벤, 코브, 락 스월리 항구를 영국 해군이 사용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윈스턴 처칠의 요청을 당시 아일랜드 총리였던 이몬 데 발레라는 철저히 무시했다(…). 이 항구들에 영국 군함들이 기항했다면 대서양으로의 항속거리를 늘릴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 독일의 U보트에 시달리던 영국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화딱지가 날 일이었지만, 아일랜드인들의 국민 감정상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일이었던 것.
사실 괜히 어설프게 영국 편을 들었다가 영국 본토 항공전과 같은 일이 아일랜드에서도 일어났다면 그야말로 답이 없었을 것이다.[3] 당시 아일랜드에는 공군 전력이라고 할 만한게 거의 전무했으니까. 당시 아일랜드 공군은 전투기의 종류 자체는 꽤 다양하게 보유하고 있었지만, 당연하게도 그 절대수가 다른 강대국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아일랜드를 점령하면 영국의 목에 칼을 겨눈 형국이 된다는 점에서 한때 아돌프 히틀러가 아일랜드 침공을 계획한 일이 있었지만, 해군의 반대로 계획을 철회한 일이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그야말로 코앞인 도버 해협도 건너지 못하는데, '''훨씬 멀리 떨어진 아일랜드에 상륙이 가능하다면 그냥 영국 본토에 상륙하면 될 일이지 않은가'''(…).
하지만 당시 영국 군수공장에서 일하는 아일랜드인들도 상당수 있었으며, 영국군에 자원하여 참전한 아일랜드인들도 약 4만 5천여명에 달할 정도였다.[4] 하지만 아일랜드 주민들의 반감이 매우 컸기 때문에 이 아일랜드인들은 휴가를 나올 때 군인인 걸 철저히 숨겼다고 하며, 아일랜드 정부는 이런 사실을 결코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언론의 검열에 의해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였다가 탑승 함선이 격침되었다가 살아남은 한 해군 병사에 관한 기사는 '태평양의 선박 사고에서 생존'이라는 식으로 보도되었고, 아프리카 전선에 참전했던 병사에 관한 기사는 '리비아 사막에서 납 중독으로 고생한 후 입원 중(한마디로 총탄을 맞고 입원했다는 얘기)' 이라는 식으로 보도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1945년 5월 히틀러 자살 직후에는 더블린에 주재한 독일 대사관에 총리 이몬 데 발레라가 조의를 표명할 정도였으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렇다고 아일랜드인들이 나치를 좋아한 건 아니었다. 이몬 데 발레라는 아일랜드 독립운동의 영웅 중 하나로 나치빠는 물론 아니었다. 발레라를 비롯한 아일랜드 독립과 전간기의 국부가 된 세대는 어쨌든 영미식 정치적 가치관에 큰 영향을 받아 프랑스 혁명의 대륙식 민족주의에는 열광했지만, 그 이상의 파시즘이나 공산주의 같은 본격적인 대중동원식 전체주의적 사상은 혐오했고, 아일랜드 내에서는 에몬 더피를 위시로 하는 그나마 본격 파시즘 못지않게 가톨릭 교권주의의 영향력도 만만찮게 강했던 소수 움직임을 제외하곤 유의미한 파시스트 세력이 자리잡은 적이 없다. 마이클 콜린스를 위시한 IRA의 무장투쟁과 이몬 데 발레라의 미국 내 정치 여론 활동이 아일랜드 독립운동의 가장 큰 두 축이었다. 그러니 영국에 대한 감정이 좋았을 리가 없었던 것이고, 이는 뒤집어 말하자면 사상적으로 나치에 공감하지는 않으나 영국을 괴롭혀 준다는 지정학적, 국가주의적 관점에서 통쾌해했다. 또한 독일에서는 아일랜드 독립운동가들에게 은근슬쩍 무기를 지원해주기까지 하여 무장 투쟁에 기여하기도 했으니, 미워할 수만은 없는 입장이기도 했다. 1941년 4월 독일군이 영국령인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를 폭격했을 때 아일랜드에서는 소방차를 보내 구호를 지원해준 일이 있다. 이건 중립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인도주의적, 민족주의적(북아일랜드도 한 민족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입장에서 행해진 일이었고, 독일은 이에 대한 보복 폭격을 몇 차례 하였다.
아일랜드가 UN에 가입하는 것은 1955년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소련이 2차 대전 당시 중립국이었던 아일랜드의 UN 가입을 불쾌하게 생각했기 때문.
전쟁 직후 만들어진 영국 영화 I See a Dark Stranger는 당시 미묘한 관계를 경쾌한 로맨틱 코미디로 풀어내고 있는 영화다.
오늘날 아일랜드의 영국에 대한 감정은 좋지 못하지만 아일랜드 역사에서 잉글랜드, 영국이 남긴 영향은 너무 크다. 너무나 길었던(최초 지배부터 계산시 약 800년) 지배기간 탓에 문화적으로 상당히 동화된 면도 적지않게 있었기 때문이다. 아일랜드와 영국의 오랜 갈등원인 중 하나였던 가톨릭과 성공회 간의 관계는 점차 개선되어갔으며, 80년대 이후 종교의 영향력은 서유럽에서 전반적으로 퇴조했고 아일랜드에서 가톨릭의 영향력도 조금씩 감소중이다. 민족 고유언어인 아일랜드어 또한 거의 잊어버리고[5] 영국의 언어인 영어가 사실상 모국어의 역할을 하고 있다.
아일랜드가 자랑하는 대문호 중 한명으로 손꼽히는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는 아일랜드어 부활과 강제교육에 반대했으며, 자신의 작품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도 이를 소재로 다루고 있다.
또한 분명히 '''영국의 일부이긴 하지만''' 그만큼 아일랜드와 켈트계 혈통, 문화를 공유하며[6] '''잉글랜드와 비교적 동등한 위치에서 영국이란 나라를 같이 만들고 참여한 스코틀랜드'''는 분명히 존재하는 실체이다. 그리고 스코틀랜드는 특히 현대 글래스고 지방과 서부 해안, 하이랜드를 필두로 항상 아일랜드와 밀접한 문화적, 경제적, 사회적 지리를 공유해왔다. 켐벨, 카메론, 맥도널드, 고든, 맥도넬 등 수많은 하이랜드의 거대 클랜들은 아일랜드에도 그 분파가 존재해 왔고, 반대로 아일랜드 기원의 오닐, 오도넬 같은 클랜들도 많은 수가 스코틀랜드로 건너가서 분파를 형성했다. 이들이 왕실에게 협조하기만 한다면 런던과 에딘버러의 중앙 권력자들은 오래부터 비교적 현대까지 그 문화적, 사회적 자치성을 인정하거나, 중앙에 통합하여도 주요 클랜 당주들에게 귀족 작위를 내려주는 형식으로 상당히 융통성 있게 대하여 유기적으로 영국이란 국가적 정체성을 형성해 왔다.
현대까지도 스코틀랜드에서 그 인구의 20% 가까이 되는 가톨릭 신자들은 대부분 부모 중 1명 이상이 아일랜드계인 것 등 압도적인 '소수민족'은 아일랜드인이고, 북아일랜드 장로회의 위세를 보면 아일랜드 또한 스코틀랜드 혈통의 인구가 굉장히 많다. 여기서 아일랜드가 스코틀랜드, 웨일스와 다르게 영국이란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다양성을 포용한 국가 공동체에서 배제된 건 일단 종교적, 그 이후 경제, 사회적 요인이 가장 크다.
이렇기 때문에 영국과 아일랜드의 갈등은 종교, 문화, 민족, 이데올로기적 요소들이 결합된 복합적이고, 시대적 여건에 따라 변화해 온 다이너믹한 관계이며 일차원적인 민족적 '타자'의 억압과 핍박의 관계로만 보는 것은 한계가 있다. 하지만 영국은 공공연하게 아일랜드를 차별했고 이에 분노한 아일랜드 민중은 아일랜드인이라는 민족의식을 가지고 영국에서 독립했다. 영국의 통치가 조금만 덜 악랄했다면, 조금만 더 장기적인 포용을 염두로 두고 경제적 수탈을 완화했다면, 조금만 더 일찍 가톨릭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고, 스코틀랜드 장로회가 그러했던 것처럼 적어도 아일랜드 사회 내에서는 다수 종교를 공유하는 현지 가톨릭 엘리트들을 영국 국가 전체 엘리트의 일부로 편입시켰다면 현대 스코틀랜드, 웨일스가 그러한 것처럼 아일랜드 또한 문화적, 사회적 정체성으로는 독자성을 주장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영국이란 큰 국가의 틀을 유지했을 수 있다. 이만큼 역사적으로 공유하는 바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결국 실제 역사 내에서 저 '''조금만 덜'''을 지키지 못하고 끝끝내 근대 아일랜드 내에서 정치적 공동체 형성 과정의 주도권을 급진 민족주의자들이 잡을 토양을 만든 것은 전적으로 영국 당국의 책임이다.
이러한 이유로, 특히 북아일랜드 IRA의 무장 투쟁에 대해, 자치권을 획득한 20년대 중반부터 줄곧 비협조적이었으며, 아일랜드 내에서 IRA의 활동과 지원을 아일랜드 정부가 전면 금지하자 이에 실망한 일부 IRA 과격파들이 아일랜드에서 군자금 탈취를 위한 은행강도 등의 범죄를 저질러 아일랜드 경찰이 IRA 단원들을 체포하여 수감한 일도 있을 정도(...). 이런 흑역사 과거사로 인해 현재도 북아일랜드 신페인당과 아일랜드 정부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못하며, 아일랜드 통일에 양측이 소극적 입장으로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실상 80년대 중반까지도 서유럽에서 경제규모, 경제력 수준이 포르투갈과 경쟁하며 하위권을 다투던 나라였기 때문에, 이웃국가 영국과의 교역과 경제적 관계는 국가 유지에 필수적이었다. 또한 현재 영국에 거주하고 있는 아일랜드계 이민 1세대, 2세대와 유학생, 노동자 등 영국 체류 아일랜드 국적자, 영국-아일랜드 이중국적 보유자 등을 모두 합치면 수백만 명이 넘어 아일랜드 전체인구와 맞먹는 숫자(...)로, 인적 교류도 아주 많다.[7]
EU 출범 이후로는 같은 유럽연합 회원국으로써 물적 인적 교류가 점차 더 확대되었다. 아일랜드는 1990년대 호황기엔 "켈틱타이거"라 불리며 유럽의 신흥 경제강소국으로 급성장하고 선진국 도약이 이루어졌지만, 이후 대침체로 큰 타격을 입으면서, 영국의 투자를 유치하고 경제교류를 더욱 더 확대하기 위해 영국과 전반적인 관계 개선에 나서게 되었다. 2011년 영국 여왕의 아일랜드 최초 방문도 그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2011년과 2012년 영국 국왕 엘리자베스 2세의 잇따른 방문에 아일랜드의 여론이 크게 갈리고, '폐하(Your Majesty)'와 같은 존칭까지 사용해주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다만 여왕이 방문했을 당시 아일랜드에선 반영시위 또한 일어났다.[8] 영국 여왕은 아일랜드에게 사과의 입장을 보였지만 여왕이 영국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진 못하므로...
오늘날 아일랜드 정부는 꾸준히 신세대들에게 아일랜드 교육을 시키는 등으로 민족성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해외로 이주했던 아일랜드인들도 타 이민족들에 비해서 자신의 민족성을 강하게 느끼고 살아간다.
2016년 브렉시트 사태가 터지면서 영국과의 관계가 다시 복잡해졌다. 이미 아일랜드와 영국 간의 경제 교류가 활발한 상태에서 브렉시트 사태는 아일랜드에겐 상당히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북아일랜드 문제까지 겹쳐서 더욱 복잡해졌다. 심지어는 아일랜드 내에서 '이참에 북아일랜드와의 완전한 통일을 이룩하자'라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브렉시트/영국 내 영향 및 브렉시트/세계 각국의 영향 문서 참조.
브렉시트 이후, 아일랜드 여권을 신청하는 아일랜드계 영국인들의 수가 늘어났고, 거기에다 아일랜드로 귀화를 하는 비율도 늘어났다.# 그리고 아일랜드 여권을 신청한 영국인들이 크게 늘어났다.# 영국과 아일랜드는 2019년 5월 8일에 양국국민들이 브렉시트이후에도 상대국에 자유롭게 거주하고 일자리를 구할 수 있도록 합의했고, 영국-아일랜드 간 공동여행구역을 브렉시트 이후에도 유지할 수 있는 협정에도 체결했다.#
브렉시트로 인해 영국과 아일랜드간의 관계가 안 좋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아일랜드는 10월 31일로 예정된 브렉시트의 추가 연기를 요청하면 영국의 요구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2020년 8월 13일에 존슨 총리와 아일랜드의 미홀 마틴 총리가 회담을 가지면서 무역협정, 코로나19에 대해 논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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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와 영국 북아일랜드를 잇는 고속도로의 아일랜드측에 설치된 영국 북아일랜드 진입 표지판에 '''ONE IRELAND'''라고 낙서가 되어있다.[9]
1937년부터 1999년까지 아일랜드의 헌법에는 '아일랜드의 국토는 아일랜드 섬 전체와 그 부속도서 및 해역으로 한다'(제2조)는 규정이 있었다. 단 '민족의 영토가 재통합될 때까지는 아일랜드 헌법은 남부 26개 주에만 적용된다'(제3조) 라는 구절도 있었다. 아일랜드의 입장에서는 '영국(자신들이 국가로 인정하는)이 자국의 일부를 무단 점거 중'이라 한다는 점에서 한국의 북한 문제와 맥이 비슷하다.
그러나 1998년 4월 북아일랜드 문제와 관련해 영국-아일랜드 간에 "벨파스트 협정"[10] 이 맺어지자, 같은 해 6월 19차 헌법개정으로 영토 관련 부분이 삭제되었다. 대신 해당 조항은 "아일랜드의 통일이 민족의 굳은 의지임을 선언하되, 그것은 북아일랜드 주민의 동의를 통한 평화적 방법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수정되었다.
그래서 명목상으론 북아일랜드를 영국의 일부로 인정하지 않고 자국이 반환받아야 할 영토로 간주한다. 즉 아일랜드 헌법상 북아일랜드는 자국의 영토와 동일한 지위를 갖는다. 그러나 현재 아일랜드 정부는 북아일랜드의 주권이 영국에 있다는 사실도 묵인하고, 물론 북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이 더블린에 와서 경기를 치를 때는 영국 국가를 연주해 준다.
반면 아일랜드 외교부는 잉글랜드 런던에 주영 자국 대사관을 두고,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의 주요 도시에는 자국의 총영사관을 두고 있으나 벨파스트를 포함한 북아일랜드에는 두지 않고 있다. 북아일랜드에도 두면 북아일랜드에 대한 영국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독립을 이루지 못한 북아일랜드의 수도 벨파스트를 위시한 얼스터 지방 내에도 가톨릭교도가 1/3이 있었기 때문에 북아일랜드 내에서 또 신/구교도끼리 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이들 지역에서는 피의 일요일 등의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대체로 북아일랜드는 어느시대에나 신교도 친영파의 세력이 우세했고, 친영파 신교도들은 UDA, UVF 등의 무장민병대들을 조직하고 IRA와 충돌하며, 일부 친IRA 성향의 아일랜드인들에게도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결국 통일과 영토 회복에 대한 열망과는 달리, 현실적으로 독립초부터 지금까지 아일랜드는 북아일랜드 인구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친영파 신교도들의 동의를 얻고 그들을 국민으로 수용하기가 아주 어렵기 때문에 아일랜드 통일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는 여건이었다. 북아일랜드인들의 과반수가 찬성하지 않는 아일랜드 통일을 추진하는 것은 민주주의와 다수결 원칙에 의해서도 이룩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현재는 조금씩 평화 분위기가 불고 있다. IRA는 2005년 소수의 원칙주의자들을 제외하고는 무장해제하였고 대부분의 남&북아일랜드인의 지지를 얻어 북아일랜드는 영국령으로 재확인되었다.
영국과 아일랜드 정부가 북아일랜드 공동정권 재출범을 위한 합의안 초안을 제시했다.# 그리고 3년만에 공동정권을 재출범하기로 합의했다.#
한 민족의 다른 민족에 대한 지배와 이에 저항하는 투쟁이라는 면에서 한일관계와의 유사성을 찾는 사람들이 좀 있다.[11] 하지만 아일랜드의 영국에 대한 감정은 한국의 일본에 대한 감정과 비슷한 면이 꽤나 많지만, 단순히 1:1로 대응시키기는 어렵다. 아일랜드는 길었던(최초 지배부터 계산시 약 800년) 영국의 지배기간 탓에 문화적으로 상당히 동화된 면도 적지 않게 있었기 때문이다.[12]
때문에 영국-아일랜드 관계를 한일관계에 투영하여 이해하려는 것은 소위 문화적, 정서적 차원에서 어느 정도 도움은 되어도 근본적으로 성립하기 힘든 비교 대상이다. 비단 국력의 우열 차원뿐만 아니라 영국 내의 다른 켈트계 주요 세력이었던 스코틀랜드의 비중까지 고려하자면 수많은 스코틀랜드 고지대와 서부 해안의 게일어권 클랜들은 아일랜드 쪽에도 가족과 세력이 있었고, 이런 지정학적 현실에 따라 아일랜드-영국간 관계는 정치적인 적대적 종주 관계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할 만큼 문화적, 인구적 교류의 역사가 깊다. 멀리갈 필요 없이 근대 이후 아일랜드의 독립운동 지도부 인사들조차도 상당수는 아일랜드에서 거주하면서 아일랜드와 동화된 잉글랜드계 개신교도였다. 그 정도로 두 나라의 교류가 많아서 의식 및 정체성을 도저히 한일관계처럼 분리해서 보기가 어렵다.
게르만계 잉글랜드의 인구, 경제적 비중이 워낙 넘사적으로 높을 뿐이지만 영국이란 나라 전체는 게르만 잉글랜드인들 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 웨일즈, 그리고 분리독립 이전 아일랜드의 켈트인들 또한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형성한 국가 공동체이다. 영국으로서 전체의 역사를 두고 봐도 잉글랜드계가 민족적, 인종주의적 관점에서 켈트계 전반을 일방적으로 배제하고 탄압했다고 규정하기에는 중세 말 상당히 일찍부터 꾸준히 웨일스, 그리고 스코틀랜드인들은 지방 자치를 존중받으면서 중앙으로의 진출도 적극적이었고, 대영제국에 소속됨으로써 들어온 이익과 번영도 많이 누렸다. 그러나 아일랜드는 스코틀랜드, 웨일스와 달리 끝까지 연합 왕국에 동화되지 못하고 독자적인 정체성을 유지할 수 밖에 없을 만큼 피지배민족으로서 수탈, 억압당했고 이것이 양국간 역사의 비극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은 이미 일제 지배 이전부터 민족의식이 있었고 일제 지배라고 해봐야 20세기 초중반의 50년도 안되는, 35년에 가까운 세월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고대사 이후로는 한 쪽이 다른 한 쪽에 대한 일방적인 침략 혹은 탄압이 가능할 만큼의 국력 격차가 있었던 적은 없다. 그 시절이라도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유의미할 정도의 통혼이 있어 독자적인 한국 - 일본 혼혈인의 집단의식이 있으면 모를까, 일제시대 한반도의 일본인들은 조선인들과 어울리지 않고 독자적인 세계 속에서 살았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한국 - 일본 혼혈인들은 대부분 한국에 잔류하여 한국인에 동화되거나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인에 동화되었다. 또한 일본이 일제강점기 말기 일본어 교육을 크게 강화했지만, 해방 무렵에도 식민지 조선 전체 인구에서 일본어가 유창한 사람은 10%도 채 되지 않았다. 소학교 진학률도 그리 높지 못했고, 적어도 30년대까지는 농촌계몽운동가들이 문맹퇴치 사업으로 시행하던 한글 교육도 금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은 조선인들을 피지배인으로 보며 조선인들에게 일본어 교육을 무작정 밀어붙이기만 하였다. 전근대의 양국에도 '도래인', '항왜' 등의 이주민 집단이 없던 것은 아니나 모두 시간이 지나면서 각각 일본/한국에 동화되어서 더 이상 독자적이고 새로운 정체성을 가진 집단으로 볼 수 없다.
또 일본에 대해서 자립적일 수 있는 한국 혹은 한반도의 인구(5,000만 내지 7,000만) 및 경제규모[13] 와 달리, 아일랜드 인구는 450만에 지나지 않아(북아일랜드 합쳐도 600만)의 인구로는 6,000만 인구의 영국에 대해 완전히 대등한 위치에 서는 게 사실상 힘들다.[14] 경제규모(GDP)를 비교해보면 한국과 일본은 3배 차이 정도이지만 영국과 아일랜드는 10배도 넘는다. 군사력 면에서도 한국군과 자위대는 세계 군사력 순위에서 엎치락뒤치락하는 반면, 아일랜드군은 나토 2위의 군사대국인 영국에 비해 병력과 무기 등 여러 면에서 독립 이후 지금까지 항상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약소한 수준이다. 자세한 것은 아일랜드군 문서 참조.
또한 해당 문화권의 중심지에서(각각 중국과 유럽 대륙) 한국은 일본보다 가까워서 역사의 시작이 빨랐고 그것을 일본이 한국보다 큰 내부 영역의 개척과 복속으로 중세에 추격, 근세에 역전을 한 반면, 아일랜드는 영국보다도 더 멀어서, 그야말로 체급도 한참 뒤쳐지는 데다가 역사의 시작도 더욱 늦었다는 점도 있다.
군사사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아일랜드는 오히려 영국의 식민지로서 다른 외부 세력에 동조해 내부 반란을 일으키거나 끊임없이 영국 본토 정계와 사회를 불안하게 만드는 지속적인 테러리즘을 벌이는 게 차라리 영국 국가에게 더 안보 위협이 되었다. 독립 국가의 군대가 아니라 외세 아래 비정규군으로서 이웃 강대국에게 오히려 더 위협이 되는 세계사적으로 아마 유일한 경우일 것이다(...). 그래서 영국과의 군사적인 분쟁은 극도로 자제해왔다.
이 점 때문에 한국을 "동양의 아일랜드"라고 부르는 것에 의문감을 느끼는 사람도 많다. 한국이 800년이나 일본의 손아귀에 있었단 말인가? 아일랜드 역사에서 영국의 영향력과 현대 아일랜드에 대한 영향력과 비교하면 한일관계는 새발의 피다. 오히려 일본과 등지고 일본의 잠재력을 너무 무시하다가 19세기 말에 와서야 일본의 앞선 근대화를 뒤늦게 인식하고 이후 식민화되는 굴욕을 겪었던 데 비해, 아일랜드는 '''12세기 노르만족의 정복 이후부터''' 잉글랜드 국왕의 속령이었고, 1800년대 들어서는 저런 형식적인 동군연합급의 자치도 완전히 폐지되었다.
미국과 캐나다 이민자 사회에서 한국인 = 동양의 아일랜드인 드립은 적어도 1950년대부터 퍼졌던 농담인데, 술 마시는 문화나, 술 마시고 싸우는 문화나, 술 마시고 싸우고 화해한 뒤 친구 먹는 문화 등 양 민족의 음주 문화와 관련된 드립이 많다. 사회권력적인 관점에서 주로 약소 민족으로 시작하여 억척스러운 근성으로 수 많은 피눈물 끝에 나름 번영하는 이민자 사회를 건설하며, 이 과정에 생긴 집단적 스트레스를 강력한 종교성과 음주가무로 풀어 내는 문화와 역사를 통해 상당히 웃픈 스트레오 타입을 공유하게 된 셈이다.
이에 대해서는 70년대에 일본 신문 기자가 아일랜드 역사를 홋카이도와 아이누족의 역사를 비교하며 칼럼을 쓴 것이 와전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당시 일본 신문 기자는 일본의 아이누족과 부라쿠민들의 차별에 대한 칼럼을 썼다. 도래인인 야요이들이 일본 열도를 평정하고 일본 선주민인 아요이족과 하야토들은 홋카이도로 이주하거나 부라쿠민이 된 것이 영국과 아일랜드의 역사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몇 일본 기자들은 그것에 대해 잘못된 방향으로 창피함을 느꼈고 그래서 아일랜드와 역사가 비슷한 건 한국이라는 식으로 칼럼을 자주 썼으며 그것이 와전되어 한국 사람들도 한국 역사와 아일랜드 역사가 비슷하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국-아일랜드 관계를 한일관계에 비유하는 건 어디까지나 대체로 다른 나라의 역사와 국민감정, 문화적 정서 등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비유로서 봐야지, 거의 모든 부분이 해당되는 정도로 타당한 말이라고 받아들이면 안 된다.
영국과 아일랜드의 외교관계를 다루는 문서. '''클로버와 장미'''.
1. 개요
영국과 아일랜드는 오랫동안 한 나라였지만 그 동안 아일랜드는 잉글랜드 혹은 영국의 식민지급 대우를 받아 수탈당하고 압제당한 것이 상당했으므로 서로간의 반목이 깊다. 서로에게 애증의 감정이 있는 편이기도 하다. 1973년에는 영국과 공동으로 유럽 연합에 가입하기도 했지만 이후로 북아일랜드 분쟁 등으로 감정의 골이 깊다.
2. 아일랜드인의 반영감정
800년 동안 잉글랜드와 영국에 지배받다보니 영국에 대해 감정이 좋지 못하다.
아일랜드 섬은 잉글랜드로부터 지속적인 침략과 수탈, 식민지배를 당했다.#, # 특히 영국에선 아일랜드인을 아프리카의 흑인과 같은 수준의 야만인이라는 뜻으로 "하얀 흑인(또는 하얀 침팬지)"(...)으로 멸시했을 정도였다.[1] 그러면서도 끈질기게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가며 영국의 지배에 맞서 싸웠다. 우여곡절 끝에 국제정세에 따라 독립을 얻긴 했지만, 나라가 남북으로 쪼개졌다. 바로 북아일랜드. 아일랜드인의 반영감정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다면 아일랜드 대기근을 알아보는 걸 추천한다.
아일랜드에는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을 들이대기에도 적절하지 않은데, 1920년대 무렵까지도 아일랜드 산업은 거의 근대화되어 있지 않았다. 산업혁명 과정에서 아일랜드는 빈곤한 농업 지역으로 남았는데, 인구부족과 노동력 부족, 지리적 고립성으로 공업화가 추진되지 않았던 것. 또한 올리버 크롬웰의 아일랜드 정벌 이후 농지는 거의 다 잉글랜드계 신교도 지주, 잉글랜드인 부재 지주들의 소유였고 대다수 아일랜드인은 빈곤한 소작농 신분으로 남아 있었다.
아일랜드는 중세시대부터 수백년간 계속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고 잉글랜드의 한 지방으로 취급받았는데도, 영국이 선도한 산업혁명과 근대화의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나마 공업화가 조금 진척되었던 벨파스트와 북아일랜드 지역은 계속 영국령으로 남았고 독립 직후 아일랜드는 경제적으로 매우 후진적인 농업 국가였다.
따라서 장기간에 걸친 영국의 통치정책은 아일랜드의 빈곤과 빈부격차, 사회갈등을 더욱 심화시켰지 전혀 해결하지 못하고, 수백년 세월 동안에도 아일랜드를 영국의 일부로 동화시키지 못해 결국은 아일랜드인들이 영국에 대한 적개심을 키워 격렬한 무장독립운동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크게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아일랜드어로 로칼(Rocal) 혹은 로카바리(Rocabarraigh), 영어로는 로콜(Rockall)이라 불리는 대서양의 작은 바위섬을 영국이 자기네 EEZ로 집어넣으려 하여 갈등을 겪고 있기도 하다.# 국제법을 기준으로 단순히 자로 잰 수치만 따지면 분쟁의 소지가 있다고는 하지만 문화적, 역사적으로는 명백한 아일랜드의 영토이기 때문에, 반영감정을 키우는 한 요인이 되고 있다. 심지어 1970년대에는 울프 톤스(The Wolfe Tones)라는 정치색 강한 아이리시 포크 그룹이 'Rock on Rockall' [2] 이라는 노래를 내놓기도 했다. 그 외에도 영국이 통치하는 북아일랜드 역시 오늘날의 독립국 아일랜드가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지만 30여 년의 분쟁을 겪고 난 후에는 서로 폭탄 건드리기 싫어 현상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도 아일랜드에는 영국의 식민지배가 남긴 후유증이 크다. 그런 일을 겪고도 피식민국과 아일랜드가 경제적으로 탄탄하게 성장했다는 걸 가해자였던 제국주의 열강들과 영국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지만, 아직도 영국은 아일랜드에 사과하는 일에 대해선 소극적이며 다소 미적지근하기에, 이는 아일랜드인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그리고 일부 영국인들은 아일랜드의 독립운동가들을 테러리스트나 살인마로 취급하며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등의 입장을 보인다.
3. 제2차 세계 대전 아일랜드의 중립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아일랜드는 중립국이었는데, 이것은 물론 당시 약소국인 아일랜드의 사정상 전쟁에 참여할 이유도 없었고 그럴 여력도 되지 못했다는 점이 매우 컸지만, 반영감정이라는 이유도 꽤 컸다. 당시 영연방 소속 국가 중 영국에 협력하지 않고 중립을 선언한 것은 아일랜드가 유일했다. 아일랜드가 영연방 탈퇴를 선언한 것은 1937년이고, 영국이 이를 정식으로 승인한 것은 1949년이다. 즉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은 아일랜드를 영연방 소속 국가로 간주했으나, 아일랜드는 이를 부정했다.
예를 들어 아일랜드의 베레하벤, 코브, 락 스월리 항구를 영국 해군이 사용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윈스턴 처칠의 요청을 당시 아일랜드 총리였던 이몬 데 발레라는 철저히 무시했다(…). 이 항구들에 영국 군함들이 기항했다면 대서양으로의 항속거리를 늘릴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 독일의 U보트에 시달리던 영국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화딱지가 날 일이었지만, 아일랜드인들의 국민 감정상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일이었던 것.
사실 괜히 어설프게 영국 편을 들었다가 영국 본토 항공전과 같은 일이 아일랜드에서도 일어났다면 그야말로 답이 없었을 것이다.[3] 당시 아일랜드에는 공군 전력이라고 할 만한게 거의 전무했으니까. 당시 아일랜드 공군은 전투기의 종류 자체는 꽤 다양하게 보유하고 있었지만, 당연하게도 그 절대수가 다른 강대국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아일랜드를 점령하면 영국의 목에 칼을 겨눈 형국이 된다는 점에서 한때 아돌프 히틀러가 아일랜드 침공을 계획한 일이 있었지만, 해군의 반대로 계획을 철회한 일이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그야말로 코앞인 도버 해협도 건너지 못하는데, '''훨씬 멀리 떨어진 아일랜드에 상륙이 가능하다면 그냥 영국 본토에 상륙하면 될 일이지 않은가'''(…).
하지만 당시 영국 군수공장에서 일하는 아일랜드인들도 상당수 있었으며, 영국군에 자원하여 참전한 아일랜드인들도 약 4만 5천여명에 달할 정도였다.[4] 하지만 아일랜드 주민들의 반감이 매우 컸기 때문에 이 아일랜드인들은 휴가를 나올 때 군인인 걸 철저히 숨겼다고 하며, 아일랜드 정부는 이런 사실을 결코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언론의 검열에 의해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였다가 탑승 함선이 격침되었다가 살아남은 한 해군 병사에 관한 기사는 '태평양의 선박 사고에서 생존'이라는 식으로 보도되었고, 아프리카 전선에 참전했던 병사에 관한 기사는 '리비아 사막에서 납 중독으로 고생한 후 입원 중(한마디로 총탄을 맞고 입원했다는 얘기)' 이라는 식으로 보도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1945년 5월 히틀러 자살 직후에는 더블린에 주재한 독일 대사관에 총리 이몬 데 발레라가 조의를 표명할 정도였으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렇다고 아일랜드인들이 나치를 좋아한 건 아니었다. 이몬 데 발레라는 아일랜드 독립운동의 영웅 중 하나로 나치빠는 물론 아니었다. 발레라를 비롯한 아일랜드 독립과 전간기의 국부가 된 세대는 어쨌든 영미식 정치적 가치관에 큰 영향을 받아 프랑스 혁명의 대륙식 민족주의에는 열광했지만, 그 이상의 파시즘이나 공산주의 같은 본격적인 대중동원식 전체주의적 사상은 혐오했고, 아일랜드 내에서는 에몬 더피를 위시로 하는 그나마 본격 파시즘 못지않게 가톨릭 교권주의의 영향력도 만만찮게 강했던 소수 움직임을 제외하곤 유의미한 파시스트 세력이 자리잡은 적이 없다. 마이클 콜린스를 위시한 IRA의 무장투쟁과 이몬 데 발레라의 미국 내 정치 여론 활동이 아일랜드 독립운동의 가장 큰 두 축이었다. 그러니 영국에 대한 감정이 좋았을 리가 없었던 것이고, 이는 뒤집어 말하자면 사상적으로 나치에 공감하지는 않으나 영국을 괴롭혀 준다는 지정학적, 국가주의적 관점에서 통쾌해했다. 또한 독일에서는 아일랜드 독립운동가들에게 은근슬쩍 무기를 지원해주기까지 하여 무장 투쟁에 기여하기도 했으니, 미워할 수만은 없는 입장이기도 했다. 1941년 4월 독일군이 영국령인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를 폭격했을 때 아일랜드에서는 소방차를 보내 구호를 지원해준 일이 있다. 이건 중립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인도주의적, 민족주의적(북아일랜드도 한 민족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입장에서 행해진 일이었고, 독일은 이에 대한 보복 폭격을 몇 차례 하였다.
아일랜드가 UN에 가입하는 것은 1955년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소련이 2차 대전 당시 중립국이었던 아일랜드의 UN 가입을 불쾌하게 생각했기 때문.
전쟁 직후 만들어진 영국 영화 I See a Dark Stranger는 당시 미묘한 관계를 경쾌한 로맨틱 코미디로 풀어내고 있는 영화다.
4. 애증의 이웃: 현대 아일랜드와 영국 관계
오늘날 아일랜드의 영국에 대한 감정은 좋지 못하지만 아일랜드 역사에서 잉글랜드, 영국이 남긴 영향은 너무 크다. 너무나 길었던(최초 지배부터 계산시 약 800년) 지배기간 탓에 문화적으로 상당히 동화된 면도 적지않게 있었기 때문이다. 아일랜드와 영국의 오랜 갈등원인 중 하나였던 가톨릭과 성공회 간의 관계는 점차 개선되어갔으며, 80년대 이후 종교의 영향력은 서유럽에서 전반적으로 퇴조했고 아일랜드에서 가톨릭의 영향력도 조금씩 감소중이다. 민족 고유언어인 아일랜드어 또한 거의 잊어버리고[5] 영국의 언어인 영어가 사실상 모국어의 역할을 하고 있다.
아일랜드가 자랑하는 대문호 중 한명으로 손꼽히는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는 아일랜드어 부활과 강제교육에 반대했으며, 자신의 작품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도 이를 소재로 다루고 있다.
또한 분명히 '''영국의 일부이긴 하지만''' 그만큼 아일랜드와 켈트계 혈통, 문화를 공유하며[6] '''잉글랜드와 비교적 동등한 위치에서 영국이란 나라를 같이 만들고 참여한 스코틀랜드'''는 분명히 존재하는 실체이다. 그리고 스코틀랜드는 특히 현대 글래스고 지방과 서부 해안, 하이랜드를 필두로 항상 아일랜드와 밀접한 문화적, 경제적, 사회적 지리를 공유해왔다. 켐벨, 카메론, 맥도널드, 고든, 맥도넬 등 수많은 하이랜드의 거대 클랜들은 아일랜드에도 그 분파가 존재해 왔고, 반대로 아일랜드 기원의 오닐, 오도넬 같은 클랜들도 많은 수가 스코틀랜드로 건너가서 분파를 형성했다. 이들이 왕실에게 협조하기만 한다면 런던과 에딘버러의 중앙 권력자들은 오래부터 비교적 현대까지 그 문화적, 사회적 자치성을 인정하거나, 중앙에 통합하여도 주요 클랜 당주들에게 귀족 작위를 내려주는 형식으로 상당히 융통성 있게 대하여 유기적으로 영국이란 국가적 정체성을 형성해 왔다.
현대까지도 스코틀랜드에서 그 인구의 20% 가까이 되는 가톨릭 신자들은 대부분 부모 중 1명 이상이 아일랜드계인 것 등 압도적인 '소수민족'은 아일랜드인이고, 북아일랜드 장로회의 위세를 보면 아일랜드 또한 스코틀랜드 혈통의 인구가 굉장히 많다. 여기서 아일랜드가 스코틀랜드, 웨일스와 다르게 영국이란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다양성을 포용한 국가 공동체에서 배제된 건 일단 종교적, 그 이후 경제, 사회적 요인이 가장 크다.
이렇기 때문에 영국과 아일랜드의 갈등은 종교, 문화, 민족, 이데올로기적 요소들이 결합된 복합적이고, 시대적 여건에 따라 변화해 온 다이너믹한 관계이며 일차원적인 민족적 '타자'의 억압과 핍박의 관계로만 보는 것은 한계가 있다. 하지만 영국은 공공연하게 아일랜드를 차별했고 이에 분노한 아일랜드 민중은 아일랜드인이라는 민족의식을 가지고 영국에서 독립했다. 영국의 통치가 조금만 덜 악랄했다면, 조금만 더 장기적인 포용을 염두로 두고 경제적 수탈을 완화했다면, 조금만 더 일찍 가톨릭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고, 스코틀랜드 장로회가 그러했던 것처럼 적어도 아일랜드 사회 내에서는 다수 종교를 공유하는 현지 가톨릭 엘리트들을 영국 국가 전체 엘리트의 일부로 편입시켰다면 현대 스코틀랜드, 웨일스가 그러한 것처럼 아일랜드 또한 문화적, 사회적 정체성으로는 독자성을 주장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영국이란 큰 국가의 틀을 유지했을 수 있다. 이만큼 역사적으로 공유하는 바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결국 실제 역사 내에서 저 '''조금만 덜'''을 지키지 못하고 끝끝내 근대 아일랜드 내에서 정치적 공동체 형성 과정의 주도권을 급진 민족주의자들이 잡을 토양을 만든 것은 전적으로 영국 당국의 책임이다.
이러한 이유로, 특히 북아일랜드 IRA의 무장 투쟁에 대해, 자치권을 획득한 20년대 중반부터 줄곧 비협조적이었으며, 아일랜드 내에서 IRA의 활동과 지원을 아일랜드 정부가 전면 금지하자 이에 실망한 일부 IRA 과격파들이 아일랜드에서 군자금 탈취를 위한 은행강도 등의 범죄를 저질러 아일랜드 경찰이 IRA 단원들을 체포하여 수감한 일도 있을 정도(...). 이런 흑역사 과거사로 인해 현재도 북아일랜드 신페인당과 아일랜드 정부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못하며, 아일랜드 통일에 양측이 소극적 입장으로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실상 80년대 중반까지도 서유럽에서 경제규모, 경제력 수준이 포르투갈과 경쟁하며 하위권을 다투던 나라였기 때문에, 이웃국가 영국과의 교역과 경제적 관계는 국가 유지에 필수적이었다. 또한 현재 영국에 거주하고 있는 아일랜드계 이민 1세대, 2세대와 유학생, 노동자 등 영국 체류 아일랜드 국적자, 영국-아일랜드 이중국적 보유자 등을 모두 합치면 수백만 명이 넘어 아일랜드 전체인구와 맞먹는 숫자(...)로, 인적 교류도 아주 많다.[7]
EU 출범 이후로는 같은 유럽연합 회원국으로써 물적 인적 교류가 점차 더 확대되었다. 아일랜드는 1990년대 호황기엔 "켈틱타이거"라 불리며 유럽의 신흥 경제강소국으로 급성장하고 선진국 도약이 이루어졌지만, 이후 대침체로 큰 타격을 입으면서, 영국의 투자를 유치하고 경제교류를 더욱 더 확대하기 위해 영국과 전반적인 관계 개선에 나서게 되었다. 2011년 영국 여왕의 아일랜드 최초 방문도 그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2011년과 2012년 영국 국왕 엘리자베스 2세의 잇따른 방문에 아일랜드의 여론이 크게 갈리고, '폐하(Your Majesty)'와 같은 존칭까지 사용해주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다만 여왕이 방문했을 당시 아일랜드에선 반영시위 또한 일어났다.[8] 영국 여왕은 아일랜드에게 사과의 입장을 보였지만 여왕이 영국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진 못하므로...
오늘날 아일랜드 정부는 꾸준히 신세대들에게 아일랜드 교육을 시키는 등으로 민족성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해외로 이주했던 아일랜드인들도 타 이민족들에 비해서 자신의 민족성을 강하게 느끼고 살아간다.
2016년 브렉시트 사태가 터지면서 영국과의 관계가 다시 복잡해졌다. 이미 아일랜드와 영국 간의 경제 교류가 활발한 상태에서 브렉시트 사태는 아일랜드에겐 상당히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북아일랜드 문제까지 겹쳐서 더욱 복잡해졌다. 심지어는 아일랜드 내에서 '이참에 북아일랜드와의 완전한 통일을 이룩하자'라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브렉시트/영국 내 영향 및 브렉시트/세계 각국의 영향 문서 참조.
브렉시트 이후, 아일랜드 여권을 신청하는 아일랜드계 영국인들의 수가 늘어났고, 거기에다 아일랜드로 귀화를 하는 비율도 늘어났다.# 그리고 아일랜드 여권을 신청한 영국인들이 크게 늘어났다.# 영국과 아일랜드는 2019년 5월 8일에 양국국민들이 브렉시트이후에도 상대국에 자유롭게 거주하고 일자리를 구할 수 있도록 합의했고, 영국-아일랜드 간 공동여행구역을 브렉시트 이후에도 유지할 수 있는 협정에도 체결했다.#
브렉시트로 인해 영국과 아일랜드간의 관계가 안 좋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아일랜드는 10월 31일로 예정된 브렉시트의 추가 연기를 요청하면 영국의 요구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2020년 8월 13일에 존슨 총리와 아일랜드의 미홀 마틴 총리가 회담을 가지면서 무역협정, 코로나19에 대해 논의했다.#
5. 북아일랜드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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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와 영국 북아일랜드를 잇는 고속도로의 아일랜드측에 설치된 영국 북아일랜드 진입 표지판에 '''ONE IRELAND'''라고 낙서가 되어있다.[9]
1937년부터 1999년까지 아일랜드의 헌법에는 '아일랜드의 국토는 아일랜드 섬 전체와 그 부속도서 및 해역으로 한다'(제2조)는 규정이 있었다. 단 '민족의 영토가 재통합될 때까지는 아일랜드 헌법은 남부 26개 주에만 적용된다'(제3조) 라는 구절도 있었다. 아일랜드의 입장에서는 '영국(자신들이 국가로 인정하는)이 자국의 일부를 무단 점거 중'이라 한다는 점에서 한국의 북한 문제와 맥이 비슷하다.
그러나 1998년 4월 북아일랜드 문제와 관련해 영국-아일랜드 간에 "벨파스트 협정"[10] 이 맺어지자, 같은 해 6월 19차 헌법개정으로 영토 관련 부분이 삭제되었다. 대신 해당 조항은 "아일랜드의 통일이 민족의 굳은 의지임을 선언하되, 그것은 북아일랜드 주민의 동의를 통한 평화적 방법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수정되었다.
그래서 명목상으론 북아일랜드를 영국의 일부로 인정하지 않고 자국이 반환받아야 할 영토로 간주한다. 즉 아일랜드 헌법상 북아일랜드는 자국의 영토와 동일한 지위를 갖는다. 그러나 현재 아일랜드 정부는 북아일랜드의 주권이 영국에 있다는 사실도 묵인하고, 물론 북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이 더블린에 와서 경기를 치를 때는 영국 국가를 연주해 준다.
반면 아일랜드 외교부는 잉글랜드 런던에 주영 자국 대사관을 두고,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의 주요 도시에는 자국의 총영사관을 두고 있으나 벨파스트를 포함한 북아일랜드에는 두지 않고 있다. 북아일랜드에도 두면 북아일랜드에 대한 영국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독립을 이루지 못한 북아일랜드의 수도 벨파스트를 위시한 얼스터 지방 내에도 가톨릭교도가 1/3이 있었기 때문에 북아일랜드 내에서 또 신/구교도끼리 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이들 지역에서는 피의 일요일 등의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대체로 북아일랜드는 어느시대에나 신교도 친영파의 세력이 우세했고, 친영파 신교도들은 UDA, UVF 등의 무장민병대들을 조직하고 IRA와 충돌하며, 일부 친IRA 성향의 아일랜드인들에게도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결국 통일과 영토 회복에 대한 열망과는 달리, 현실적으로 독립초부터 지금까지 아일랜드는 북아일랜드 인구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친영파 신교도들의 동의를 얻고 그들을 국민으로 수용하기가 아주 어렵기 때문에 아일랜드 통일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는 여건이었다. 북아일랜드인들의 과반수가 찬성하지 않는 아일랜드 통일을 추진하는 것은 민주주의와 다수결 원칙에 의해서도 이룩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현재는 조금씩 평화 분위기가 불고 있다. IRA는 2005년 소수의 원칙주의자들을 제외하고는 무장해제하였고 대부분의 남&북아일랜드인의 지지를 얻어 북아일랜드는 영국령으로 재확인되었다.
영국과 아일랜드 정부가 북아일랜드 공동정권 재출범을 위한 합의안 초안을 제시했다.# 그리고 3년만에 공동정권을 재출범하기로 합의했다.#
6. 한일관계와의 비교
한 민족의 다른 민족에 대한 지배와 이에 저항하는 투쟁이라는 면에서 한일관계와의 유사성을 찾는 사람들이 좀 있다.[11] 하지만 아일랜드의 영국에 대한 감정은 한국의 일본에 대한 감정과 비슷한 면이 꽤나 많지만, 단순히 1:1로 대응시키기는 어렵다. 아일랜드는 길었던(최초 지배부터 계산시 약 800년) 영국의 지배기간 탓에 문화적으로 상당히 동화된 면도 적지 않게 있었기 때문이다.[12]
때문에 영국-아일랜드 관계를 한일관계에 투영하여 이해하려는 것은 소위 문화적, 정서적 차원에서 어느 정도 도움은 되어도 근본적으로 성립하기 힘든 비교 대상이다. 비단 국력의 우열 차원뿐만 아니라 영국 내의 다른 켈트계 주요 세력이었던 스코틀랜드의 비중까지 고려하자면 수많은 스코틀랜드 고지대와 서부 해안의 게일어권 클랜들은 아일랜드 쪽에도 가족과 세력이 있었고, 이런 지정학적 현실에 따라 아일랜드-영국간 관계는 정치적인 적대적 종주 관계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할 만큼 문화적, 인구적 교류의 역사가 깊다. 멀리갈 필요 없이 근대 이후 아일랜드의 독립운동 지도부 인사들조차도 상당수는 아일랜드에서 거주하면서 아일랜드와 동화된 잉글랜드계 개신교도였다. 그 정도로 두 나라의 교류가 많아서 의식 및 정체성을 도저히 한일관계처럼 분리해서 보기가 어렵다.
게르만계 잉글랜드의 인구, 경제적 비중이 워낙 넘사적으로 높을 뿐이지만 영국이란 나라 전체는 게르만 잉글랜드인들 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 웨일즈, 그리고 분리독립 이전 아일랜드의 켈트인들 또한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형성한 국가 공동체이다. 영국으로서 전체의 역사를 두고 봐도 잉글랜드계가 민족적, 인종주의적 관점에서 켈트계 전반을 일방적으로 배제하고 탄압했다고 규정하기에는 중세 말 상당히 일찍부터 꾸준히 웨일스, 그리고 스코틀랜드인들은 지방 자치를 존중받으면서 중앙으로의 진출도 적극적이었고, 대영제국에 소속됨으로써 들어온 이익과 번영도 많이 누렸다. 그러나 아일랜드는 스코틀랜드, 웨일스와 달리 끝까지 연합 왕국에 동화되지 못하고 독자적인 정체성을 유지할 수 밖에 없을 만큼 피지배민족으로서 수탈, 억압당했고 이것이 양국간 역사의 비극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은 이미 일제 지배 이전부터 민족의식이 있었고 일제 지배라고 해봐야 20세기 초중반의 50년도 안되는, 35년에 가까운 세월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고대사 이후로는 한 쪽이 다른 한 쪽에 대한 일방적인 침략 혹은 탄압이 가능할 만큼의 국력 격차가 있었던 적은 없다. 그 시절이라도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유의미할 정도의 통혼이 있어 독자적인 한국 - 일본 혼혈인의 집단의식이 있으면 모를까, 일제시대 한반도의 일본인들은 조선인들과 어울리지 않고 독자적인 세계 속에서 살았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한국 - 일본 혼혈인들은 대부분 한국에 잔류하여 한국인에 동화되거나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인에 동화되었다. 또한 일본이 일제강점기 말기 일본어 교육을 크게 강화했지만, 해방 무렵에도 식민지 조선 전체 인구에서 일본어가 유창한 사람은 10%도 채 되지 않았다. 소학교 진학률도 그리 높지 못했고, 적어도 30년대까지는 농촌계몽운동가들이 문맹퇴치 사업으로 시행하던 한글 교육도 금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은 조선인들을 피지배인으로 보며 조선인들에게 일본어 교육을 무작정 밀어붙이기만 하였다. 전근대의 양국에도 '도래인', '항왜' 등의 이주민 집단이 없던 것은 아니나 모두 시간이 지나면서 각각 일본/한국에 동화되어서 더 이상 독자적이고 새로운 정체성을 가진 집단으로 볼 수 없다.
또 일본에 대해서 자립적일 수 있는 한국 혹은 한반도의 인구(5,000만 내지 7,000만) 및 경제규모[13] 와 달리, 아일랜드 인구는 450만에 지나지 않아(북아일랜드 합쳐도 600만)의 인구로는 6,000만 인구의 영국에 대해 완전히 대등한 위치에 서는 게 사실상 힘들다.[14] 경제규모(GDP)를 비교해보면 한국과 일본은 3배 차이 정도이지만 영국과 아일랜드는 10배도 넘는다. 군사력 면에서도 한국군과 자위대는 세계 군사력 순위에서 엎치락뒤치락하는 반면, 아일랜드군은 나토 2위의 군사대국인 영국에 비해 병력과 무기 등 여러 면에서 독립 이후 지금까지 항상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약소한 수준이다. 자세한 것은 아일랜드군 문서 참조.
또한 해당 문화권의 중심지에서(각각 중국과 유럽 대륙) 한국은 일본보다 가까워서 역사의 시작이 빨랐고 그것을 일본이 한국보다 큰 내부 영역의 개척과 복속으로 중세에 추격, 근세에 역전을 한 반면, 아일랜드는 영국보다도 더 멀어서, 그야말로 체급도 한참 뒤쳐지는 데다가 역사의 시작도 더욱 늦었다는 점도 있다.
군사사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아일랜드는 오히려 영국의 식민지로서 다른 외부 세력에 동조해 내부 반란을 일으키거나 끊임없이 영국 본토 정계와 사회를 불안하게 만드는 지속적인 테러리즘을 벌이는 게 차라리 영국 국가에게 더 안보 위협이 되었다. 독립 국가의 군대가 아니라 외세 아래 비정규군으로서 이웃 강대국에게 오히려 더 위협이 되는 세계사적으로 아마 유일한 경우일 것이다(...). 그래서 영국과의 군사적인 분쟁은 극도로 자제해왔다.
이 점 때문에 한국을 "동양의 아일랜드"라고 부르는 것에 의문감을 느끼는 사람도 많다. 한국이 800년이나 일본의 손아귀에 있었단 말인가? 아일랜드 역사에서 영국의 영향력과 현대 아일랜드에 대한 영향력과 비교하면 한일관계는 새발의 피다. 오히려 일본과 등지고 일본의 잠재력을 너무 무시하다가 19세기 말에 와서야 일본의 앞선 근대화를 뒤늦게 인식하고 이후 식민화되는 굴욕을 겪었던 데 비해, 아일랜드는 '''12세기 노르만족의 정복 이후부터''' 잉글랜드 국왕의 속령이었고, 1800년대 들어서는 저런 형식적인 동군연합급의 자치도 완전히 폐지되었다.
미국과 캐나다 이민자 사회에서 한국인 = 동양의 아일랜드인 드립은 적어도 1950년대부터 퍼졌던 농담인데, 술 마시는 문화나, 술 마시고 싸우는 문화나, 술 마시고 싸우고 화해한 뒤 친구 먹는 문화 등 양 민족의 음주 문화와 관련된 드립이 많다. 사회권력적인 관점에서 주로 약소 민족으로 시작하여 억척스러운 근성으로 수 많은 피눈물 끝에 나름 번영하는 이민자 사회를 건설하며, 이 과정에 생긴 집단적 스트레스를 강력한 종교성과 음주가무로 풀어 내는 문화와 역사를 통해 상당히 웃픈 스트레오 타입을 공유하게 된 셈이다.
이에 대해서는 70년대에 일본 신문 기자가 아일랜드 역사를 홋카이도와 아이누족의 역사를 비교하며 칼럼을 쓴 것이 와전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당시 일본 신문 기자는 일본의 아이누족과 부라쿠민들의 차별에 대한 칼럼을 썼다. 도래인인 야요이들이 일본 열도를 평정하고 일본 선주민인 아요이족과 하야토들은 홋카이도로 이주하거나 부라쿠민이 된 것이 영국과 아일랜드의 역사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몇 일본 기자들은 그것에 대해 잘못된 방향으로 창피함을 느꼈고 그래서 아일랜드와 역사가 비슷한 건 한국이라는 식으로 칼럼을 자주 썼으며 그것이 와전되어 한국 사람들도 한국 역사와 아일랜드 역사가 비슷하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국-아일랜드 관계를 한일관계에 비유하는 건 어디까지나 대체로 다른 나라의 역사와 국민감정, 문화적 정서 등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비유로서 봐야지, 거의 모든 부분이 해당되는 정도로 타당한 말이라고 받아들이면 안 된다.
7. 기타
- 영국과 아일랜드는 이미 1923년부터 공동여행구역(Common Travel Area)을 결성, 입국심사 없이 국경을 넘나들 수 있게 했다. 영국과 아일랜드는 EU 가입국이었지만 솅겐조약에는 가입하지 않았다. 만약 영국이 솅겐조약에 서명한다면 아일랜드도 동조한다고 표명했었지만 영국의 EU 탈퇴로 양국의 솅겐조약 가입은 요원하다.
- 이디 아민이 자국을 아일랜드의 상황과 등치시키는망상을 저지른 적 이 있다
8. 관련 문서
- 영국/외교
- 아일랜드/외교
-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 벨파스트 협정
- 피의 일요일 사건(북아일랜드)
- 영국/역사
- 아일랜드/역사
- 아일랜드/정치
- 북아일랜드 분쟁
- 브렉시트
- 영국/경제
- 아일랜드/경제
- 영국/문화
- 아일랜드/문화
- 아일랜드계 영국인
- 대국관계일람/유럽 국가/서유럽 국가
[1] 미국도 마찬가지. White Nigger라고 불렀다(엘비스 코스텔로의 노래 Oliver's Army에 이 단어가 등장해서 논란이 되었는 데, 코스텔로는 아일랜드계 영국인이다. 노래 제목의 Oliver는 바로 아일랜드인이 그토록 증오해마지 않은 인물인 올리버 크롬웰). 대기근 당시 아일랜드 사람들이 무수히 미국으로 쏟아 들어왔다. 이 과정에서 멸시와 비아냥의 대상이 되었다.[2] 다만 IRA 지지하는 밴드답게 노래 가사는 독도는 우리 땅이랑은 비교도 안되게 강하다. 노래 후렴구부터가 (로칼의) '''천연가스로 니들 궁둥짝을 불태운 다음 지옥으로 날려버릴거야!'''다.[3] 실제로 일부 영국, 독일 파일럿들이 아일랜드 가까이서 전투를 벌이다 불시착한 적도 있었다. #[4] 반대로 지난 1차 대전처럼 영국군과 싸우기 위해 독일군에 복무한 아일랜드인들도 있었다.[5] 몇 백년이나 버텨오긴 했으나 아일랜드 대기근을 결정타로 해서 많은 아일랜드인이 죽거나 이민을 가서... 하지만 아일랜드의 영어는 본토 영어와 매우 달라서 원어민도 못알아먹는 경우가 많다. 제주 방언과 본토 한국어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다.[6] 단순히 같은 '켈트족'인 것 정도가 아니라, 스코트인의 조상은 7~8세기경 '''아일랜드에서 건너온 게일인이다.'''[7] 글로벌화 지구촌 시대에 영국으로 구식민지 출신 아프리카인과 아랍인, 동양인까지 몰려오는 실정에서, 아일랜드인 정도는 그나마 같은 유럽계 백인으로서 영국인들이 그리 거부감을 가지거나 차별할만한 이유가 없어진 것이 현실이다. 아일랜드계 영국인으로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도 많으며, 배우 연예인 가수 등의 유명인들(예를 들면 제 5대 제임스 본드 피어스 브로스넌이라든지)도 많다. 아마도 캐나다인, 호주인, 뉴질랜드인을 제외한 외국 출신으로 영국 사회에 가장 많이 동화되고 성공한 사람들이 아일랜드인들일것이다.[8]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70~80년대 북아일랜드 독립을 단호하게 반대하며 IRA를 테러집단을 규정하고 무력진압을 지지하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북아일랜드 IRA와 영국 왕실은 1979년 왕실 인척인 마운트배튼 백작의 암살 사건으로 개인적인 원한도 깊다. 그러나 그 전에 피의 일요일 학살 사건을 담당한 군인에게 훈장을 직접 줬기 때문에 아일랜드인들의 상처에 소금을 뿌렸고, 그 때문에 IRA는 복수로서 아일랜드에서 팔자 좋게 휴가를 보내던 마운트배튼 백작을 암살했다.[9] 구글 스트리트뷰에서 확인 가능하다.[10] 성 금요일 협정(Good Friday Agreement)이라고도 부른다. (성 금요일은 부활절 이틀 전의 금요일)[11]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등의 나라들도 다 영국의 식민지였지만 아일랜드는 위 나라들과는 다른 형식이다.[12] 이 점에서 영아관계와 한일관계의 가장 큰 차이점은 영국 문화 역시 아일랜드 문화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아일랜드가 언어적으로 잉글랜드에 완전히 동화되자 17~18세기부터 상당수의 아일랜드 민요가 영국으로 흘러들어가 인기를 끌며 영국식으로 개사되는가 하면, 아일랜드 요리도 영국 문화의 하나로 영국인들이 거부감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반면, 한일관계를 살펴보자면 일본 문화가 한국에 녹아든 경우는 조금 있어도 반대의 경우, 특히 한국 민요가 일본으로 흘러들어간 경우는 매우 드물다. 굳이 꼽자면 엔카 정도. 지배기간이 짧아 언어적으로, 문화적으로 완전히 동화되기 전에 일제강점기가 끝났기 때문이다.[13] 한국의 경제규모는 일본의 1/3 정도이다. 북한의 경제력은 남한의 지방 도시 하나 정도에 불과해서, 통일이 된다 하더라도 당장 한일 경제규모의 비율에 변화를 주는 것은 없다.[14] 남북아일랜드 전체의 인구는 19세기 경 900~1,000만명에 달했으나,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수많은 사람이 굶어죽거나 이민을 가서 '''두 세기가 지난 지금도'''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다 합쳐봐야 600만 명이 좀 넘는 정도다.